<colbgcolor=#000><colcolor=#fff> 레니 리펜슈탈 Leni Riefenstahl |
|
본명 |
헬레네 베르타 아말리에 리펜슈탈 Helene Bertha Amalie Riefenstahl |
출생 | 1902년 8월 22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사망 | 2003년 9월 8일 (향년 101세) |
독일 푀킹 | |
직업 | 영화 감독, 사진작가, 무용가 |
성향 | 탐미주의 |
활동 | 1925년 ~ 2002년 |
배우자 |
피터 자콥 (1944년 ~ 1946년, 이혼) 호르스트 케트너 (2003년 결혼) |
링크 | 공식 사이트 |
서명 |
[clearfix]
1. 개요
아돌프 히틀러와 담소를 나누며 웃는 리펜슈탈 |
독일의 무용가, 영화감독, 사진작가, 탐미주의자. 나치 독일 시절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촬영기법과 제작 퀄리티로 세계 영화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나치 정권의 부역자였다는 거센 비난을 받는 양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01세까지 장수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독일 제국의 몰락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붕괴, 나치 독일의 등장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독일의 동서 분단과 통일까지 한 세기에 걸친 격동과 굴곡의 독일 근현대사를 모두 지켜봤다.
2. 생애
베를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3년, 표현무용의 무용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몸"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구했고 특히 "강인한 육체"에 집중했다.이런 리펜슈탈의 성향에 대해서 어떤 이는 "타고난 파시즘의 징조"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가 고전주의를 선전에 악용하였던 것이지 결코 '고전주의 = 파시즘'은 아니다.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공연하던 중 프라하 공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리펜슈탈은 결국 무용가로서의 길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된 산악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가진 그녀는 무릎 수술을 받은 후 아르놀트 팡크 감독과 함께 산악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빼어난 미모와 강인한 육체를 지닌 리펜슈탈은 산악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스타 영화배우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리펜슈탈은 1932년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자신이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영화 "푸른 빛(Das Blaue Licht)"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받으면서 그녀는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으며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고 팬이 된 한 남자와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리펜슈탈의 영화 "푸른 빛"을 보고 열성적인 팬이 된 히틀러는 후원자가 되었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리펜슈탈은 뛰어난 재능을 나치즘을 선전하는 데 쓰고 말았다.
리펜슈탈의 첫 번째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는 1933년작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로, 뉘른베르크에서 1933년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린 제5차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간부들이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의 비중으로 등장했는데 이듬해 장검의 밤을 거치면서 이들이 모두 숙청되자 이 영화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에른스트 룀에 대한 기록말살형 차원에서 〈신념의 승리〉는 시중에 돌던 사본이 모조리 회수, 파기되었다. 리펜슈탈은 촬영 필름 원본을 몰래 소장하고는 있었으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막판의 혼란 속에서 이 역시 유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때는 이 작품이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으나 1980년 무렵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필름 보관소에 사본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34년 히틀러의 요청으로 역시 뉘른베르크에서 9월 5~10일에 열린 제6차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를 만들었다. 〈의지의 승리〉는 당시로선 찾아보기 어려운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카메라 구도, 효율적인 음악 사용 등으로 히틀러를 최고의 영웅으로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의지의 승리〉에 크게 기뻐한 히틀러는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영상은 오로지 〈의지의 승리〉로 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독재자와 전범을 미화, 우상화한 작품'으로 호된 비판을 받지만 촬영기법이나 드라마틱한 연출기법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레니 리펜슈탈의 전기를 기록한 오드리 설킬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
D. W. 그리피스의 자극적인 영화
국가의 탄생을 제외한다면, 영화사에서
의지의 승리만큼 오랫동안 논란을 일으킨 영화는 없었다. 우리는 의지의 승리를 그 이후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이 영화는 본래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도록 만들어진 감정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은 이성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 영화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영화 자체보다 파시즘에 매혹되었다고 생각될까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오드리 설킬드
이듬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1936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 올림피아〉 2부작을 만들게 되었다.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하에 최첨단 영화기자재들을 맘껏 구사하였고 리펜슈탈 자신의 재능도 최고로 끌어낸 걸작 영화였다. 다만 문제는 나치즘의 아리안 우월주의를 찬양하는 데 이 모든 게 이용되었다는 것이었지만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독창적인 영상미학을 선보였다.
〈올림피아〉에서 리펜슈탈이 가장 주목했던 선수는 바로 손기정 선수였다.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반한 그녀는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의 영상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리펜슈탈은 〈올림피아〉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된다. 손기정은 마라톤 경기가 끝난 지 3일 후에 리펜슈탈의 저택에 초대받았고[2] 종전 후에도 리펜슈탈을 만났다.[3]
그러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의 선택에 혹독한 책임을 져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리펜슈탈은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영화미학만을 생각했다"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호했다.[4] 전범재판에서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사실상 독일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전쟁 전부터 기획했던 영화 "저지대(Tiefland)"를 1953년 개봉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나치즘을 찬양한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남은 생애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결국 온갖 비판과 중상모략에 법정다툼으로 일생을 보냈고 악평을 받는 리펜슈탈과 영화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스태프들도 없어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작가의 길로 방향을 돌렸다.
1962년부터 아프리카의 누바족을 만나 10년에 걸쳐 그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았고 1973년 10개국에서 사진집 "누바"를 출판하여 아티스트로서 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집 "누바"에서도 촬영 기법이 나치즘을 찬양한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와 유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노년의 리펜슈탈.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인 2003년 1월 18일 뒤셀도르프에서 촬영했다.
리펜슈탈은 73세에 나이를 속이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다 속을 촬영한 사진집을 내놓기도 할만큼 늙어서도 도전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무려 100세의 나이에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여 ''물 아래의 인상(Impressionen Unter Wasser)"[5]이라는 영화를 오랜만에 제작했다. 이것은 리펜슈탈 최후의 영화가 되었고 이와 함께 역대 최고령 스쿠버 다이버의 기록도 세웠다.
말년인 2003년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101세 생일까지 맞았고, 이 자리에서 자신은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101세 생일 날 35년간 동거하던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지만, 2주 뒤인 2003년 9월 8일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리펜슈탈의 일생은 도전의 일생이라 할 만한데 무용가로 시작해서 배우로, 영화감독으로, 노년에는 스쿠버 다이빙까지 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시도를 한 뛰어난 재능의 감독이란 평가와 나치즘을 선전한 인물이라는 평가[6]로 나뉜다. 하지만 리펜슈탈의 가치관이나 나치즘 선전 영화를 찍은 행적들을 떠나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후 현대 영화는 리펜슈탈의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파시즘과 스펙타클에 대한 비판과 고찰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후대에도 (주로 안 좋은 쪽/비판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특히 독일의 전후 세대들이 이끈 뉴 저먼 시네마는 리펜슈탈의 유산을 거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고 투쟁한 걸로 유명하며 그 중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그의 히틀러는 리펜슈탈이 영화를 통해 신화화한 히틀러를 중점적으로 해체하고 고찰하고 있다.
4.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편집 | 비고 |
1932 |
푸른 빛 Das blaue Licht |
○ | ○ | ○ |
판타지 영화 직접 배우로도 출연 |
|
1933 |
신념의 승리 Der Sieg des Glaubens |
○ | ○ | ○ | ○ | 나치당 선전물 |
1935 |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 |
○ | ○ | ○ | ○[7] | 나치당 선전물 |
1935 |
뉘른베르크 1935 Tag der Freiheit: Unsere Wehrmacht |
○ | ○ | ○ | ○ | 나치당 선전물 |
1938 |
올림피아 Olympia |
○ | ○ | ○ | ○ | 나치당 선전물, 2부작으로 구성됨 |
1954 |
저지대 Tiefland |
○ | ○[8] | ○ | ○ | 오페라 드라마 영화 |
2002 |
물 아래의 인상 Impressionen unter Wasser |
○ | ○ | ○ |
다큐멘터리 영화이자
유작 촬영 감독도 담당 |
5. 기타
- 죽기 직전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6. 대중매체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우리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투쟁을 영화화한다.
-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몰리나가 하는 영화 이야기 중 두번째 영화인 나치 선전영화의 여주인공 '레니'가 레니 리펜슈탈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레니 리펜슈탈이 등장하진 않고 대사로 언급된다. 독일어 발음이 형편없는데 독일 영화를 잘 안다는 이유 하나로 적지에 잠입하게 된 영국 장교 히콕스가 그의 발음을 미심쩍게 여기는 SS 장교에게 산골 오지 출신으로 리펜슈탈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이 있다고 둘러댄다.
- 높은 성의 사나이 시즌 3에서는 은퇴를 앞둔 영화감독으로 언급된다.
- 사이베리아 월드 비포에서 리펜슈탈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유명한 카메라 자화상 사진도 패러디되어 나올 정도.
-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히틀러 대신 아르민 로젠바움이 집권하자 로젠바움을 바람둥이로 묘사한 창작물을 만들어서 비난하는 바람에 히틀러와 같이 죽을 뻔하다가 스페인 내전의 선전물을 찍는 것으로 용서받는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처럼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며,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촬영한다.
- 총통님 미국 가신다!에서는 현대 한국인 웹소설 작가가 빙의한 히틀러가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돈과 인재를 끌어모은 히틀러 컴퍼니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중, 빙의한 히틀러의 부탁으로 영화감독으로서도 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에드워드 8세가 왕자이던 시절에 사실상의 비공식 연인 관계가 되었다.
[1]
라이카를 들고 있는
자화상. 레니 리펜슈탈 본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낸 것으로, 사진 역사에서 걸작 자화상 중 하나로 꼽힌다.
킬링 조크의 표지에서도
오마주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훗날 저택이
덕수궁보다 크더라고 회상했다.
[3]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년의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4]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시 몸에 달라붙는 도발적인 스키니 가죽바지를 입고 법정에 출두한 것도 리펜슈탈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일화다.
[5]
영어 제목('Underwater Impressions)을 그대로 읽은 언더워터 임프레션으로도 알려져 있다.
[6]
나치의 수석
치어리더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7]
크레딧은 받지 않았다.
[8]
하랄트 레인과 공동 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