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2:16:46

쉬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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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2대 대총통
한문 徐世昌
한국식 독음 서세창
영문 Xu Shichang
국인(菊人), 도재(弢齋), 동해(東海), 도재(濤齋)
복오(卜五)
출생 1855년 10월 22일
청나라 하남성 급현
사망 1939년 6월 5일 (향년 83세)
중화민국 임시정부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진사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유교
총통
재임 기간
2대 1918년 10월 10일 ~ 1922년 6월 2일
국무총리
재임 기간
5대 1914년 5월 1일 ~ 1915년 10월 27일
7대 1916년 3월 22일 ~ 1916년 4월 23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에서 신해혁명까지2.2. 홍헌제제 호국전쟁2.3. 장훈복벽 호법전쟁2.4. 중화민국 2대 대총통2.5. 안직전쟁2.6. 1차 직봉전쟁2.7. 대총통 하야와 말년
3. 여담4. 매체에서5. 참고문헌6. 관련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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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중화민국 4대 대총통을 지냈다. 위안스카이를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총통 자리에 있었다. 그나마 위안스카이가 중간에 황제 놀이한다고 뻘짓한 100일 정도를 제외하면 며칠 차이 안나고 그걸 합산해도 200일 차이다.

북양군벌의 원로이지만 문치파라 군사적인 세력은 없었으며 이 때문에 '문치총통'이라 불리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에서 신해혁명까지

1855년 하남성 급현에서 태어났다. 이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위안스카이와 친분을 맺어 그의 의형제가 되었다. 1898년, 광서제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하다가 서태후 등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히자 위안스카이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했다. 위안스카이는 쉬스창과 함께 베이징으로 올라와 상황을 지켜본 다음에 광서제의 세력이 서태후에게 크게 못미친다고 판단하고 서태후에게 협조하여 무술정변을 일으켜 변법파를 축출하였다. 1903년 조정에 연병처가 설치되고 위안스카이가 연병처회판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연병처의 요직에 올랐고 1905년 군기대신이 되었다. 같은해 7월 16일, 진국공 재택, 홍부시랑 대홍자, 호남순무 대방 등과 함께 동서양 각국의 정치제도를 시찰하겠다고 발표하고 수행원들을 대동하여 정치개혁을 위한 외유를 다녀왔다. 그해 11월 6일,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려는 철량의 음모로 군기대신에서 해임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인해 만주가 혼란스러워지자 봉천장군 자오얼쉰(조이손)이 위안스카이에게 고관을 파견해 시찰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위안스카이는 11월 12일 톈진에서 쉬스창을 극진히 대접한 후 봉천으로 파견하였다. 쉬스창은 동북지역을 시찰한 후 12월 13일 톈진으로 돌아와 1907년 동북 지역에 행성이 설치되면서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이때 쉬스창은 멍언위안, 톈중위 등을 거느려 부임했으며 동북에서 날뛰던 마적 두리싼(두입삼)을 토벌하기 위해 장쭤린을 등용했다. 장쭤린이 지략을 이용하여 두리싼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자 장쭤린을 봉천성 순방영 전로통령에 임명했다. 이후 장쭤린에게 마적단 토벌 임무를 맡기며 그를 중용하여 만주의 치안을 안정화시켰다.

이후 1909년 동삼성총독에서 자리를 옮겨 우전부상서에 임명되었고 1910년 군기처 대신이 되었다. 1911년 5월 8일 내각관제가 제정되면서 아이신기오로 이쾅 내각에서 나동과 함께 협리대신에 임명되었고 이후 위안스카이 복직을 도왔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가 터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내각총리대신 경친왕에게 위안스카이를 등용하지 않으면 강남 전체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 위협하며 위안스카이 재등용을 요구했다. 섭정왕 재풍은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10월 14일 위안스카이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 토벌을 지시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혁명군과 내통하여 1912년 선통제 퇴위를 강요,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국하여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2.2. 홍헌제제 호국전쟁

1913년 5월 자오빙쥔 내각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사퇴한 후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대행을 하다가 7월에 정식 국무총리 선출을 실시하게 되면서 내각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으나 량치차오의 진보당에서 쉬스창이 국민당의 반대를 받는다는 이유로 슝시링을 지지하면서 슝시링이 총리가 되었다.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일어나고 5월 신약법이 발표되면서 쉬스창은 국무경에 임명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차차 황제적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했다. 쉬스창은 위안스카이의 옛 친구로 인정받아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쉬스창 본인은 청조의 복고를 주장하는 복벽파였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즉위에 반대하며 국무경에서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12월 25일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 등이 운남에서 호국군을 일으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호국전쟁을 일으켰고 3차 혁명이라 불리는 토원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제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쉬스창은 위안스카이에게 더 늦기 전에 제제를 취소할 것을 건의했고 펑궈장, 장쉰 등 남방의 실력가들도 제제 취소를 건의하자 위안스카이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제제를 취소한 후 3월 22일 쉬스창을 국무경에 임명했다. 3월 25일 쉬스창은 부총통 리위안훙,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함께 군주제가 철회되었으니 전쟁을 멈추고 뒷수습을 하자고 남방에 제안했고 4월 1일 다시 평화회담의 조건을 제시했으나 남방에서는 위안스카이의 퇴진과 외국 추방을 강경히 요구했다. 사태의 악화에 4월 22일 쉬스창은 국무경에서 하야하고 돤치루이가 그 뒤를 이었다. 거듭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관계 단절, 독립 통보에 요독증이 급격히 악화된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와 쉬스창을 불러 리위안훙에게 대총통 자리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후 맏아들 위안커딩에게 자신을 섬겼듯이 쉬스창을 섬기라고 당부했다.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죽음을 맞이했고 쉬스창은 돤치루이, 돤즈구이, 장진방, 왕스전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임종을 지켰다.

6월 7일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에 취임했고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선포하면서 7월 14일 남방의 군무원이 취소, 8월 1일 구국회가 복구되면서 호국전쟁은 끝났다. 이 시기 쉬스창은 청조를 복고하고 위안스카이를 총리로 하는 신체제를 구상했으나 멸문지화를 염려한 청황실의 반대로 인해 이루어지진 않았다.

2.3. 장훈복벽 호법전쟁

이후 대리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 사이에서 부원지쟁이 일어나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장하며 돤치루이의 주장을 옹호했고 장쉰 등과 함께 줄기차게 복벽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6월 28일, 위안스카이의 시신을 운구한 후 쉬스창은 북양군벌의 거두들을 소집해 비밀회의를 열어 복벽에 대해 논의했고 일본과 협력, 선통제를 복위시켜 보정왕에 오르려 했다. 이 때문에 역시나 복벽을 주장하던 장쉰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1917년 5월,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해임되어 돤치루이가 톈진에서 리위안훙에 대한 토벌을 준비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성의 독립을 부추겼고 자신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려 했으나 장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리위안훙에게서 정치적 중재의 요청을 받고 톈진에 올라온 장쉰과 만나 복벽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으나 자신을 섭정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간택하자는 무리한 요구를 하여 묵살당했다. 6월 장쉰이 리위안훙을 겁박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약법을 폐기한 후 7월 1일 선통제를 복위하자 필덕원 원장에, 7월 4일에는 태부에 임명되었다. 필덕원 원장 임명 이후 7월 2일 태부 겸 내무부 총관대신 세속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하늘이 성청을 바라 다시 대통을 세우고 모든 이가 기뻐하니 노신에게 있어서야 더하다. 창(쉬스창)은 국가를 유지하고 황실의 뜻을 받들어 왔는데 다행히도 밝은 세상을 맞이하였으니 황제 폐하 만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늙은 몸이라 쇠약하고 또한 무더운 여름이라 병마가 더 심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시일이 조금 지난 다음에 다시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복벽은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가 토역군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금방 궁지에 몰렸다. 세속이 쉬스창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쉬스창은 다음과 같이 회전했다.
현재의 형세는 제일 급한 일이 성상을 보위하는 것으로 외신을 만나 이외의 일이 일어나게 할 필요가 없다. 어린 황제가 궁중 안에 안주할 수 있는 우대 조건은 반드시 계속 유효할 것이다. 창은 밖에서 이미 앞으로의 일이 잘 되도록 획책하고 유지되도록 힘써 수년 동안 마음에 가지고 있던 뜻을 다할 것이다.

7월 10일에는 장쉰에게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귀하가 갑자기 난을 일으켜 국체를 바꾸고 명분을 빌려 전국에 호소하니 결코 성공될 까닭이 없다. 어린 임금은 근심과 위기에 빠져 있어 외부인의 힐책을 듣기 마땅하다. 본인은 국가에 대해여 황제에 대하여 평소부터 현상을 유지하는데 힘써 왔는데 현재 일이 날로 급하게 되니 국가를 위하여 신속히 공화를 회복하고 황제를 위하여 오직 우대 조건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귀하를 위하여는 오직 신속하게 물러나는 것밖에 없다. 즉시 서울에 있는 군대는 왕스전, 강조종, 오병상에게 넘기고 무장을 해제하여 성밖에 주둔하는 것이다. 귀하가 병권을 조종하지 않으면 책임이 없게 되는 것이며 귀하의 집안과 재산에 관하여 이미 돤치루이 총리와 상의하여 역시 심하지 하지 않도록 본인은 있는 힘을 다하여 보호할 것이다.

결국 복벽은 7월 12일, 12일만에 진압당했다. 리위안훙이 총통직을 펑궈장에게 물려주고 도주했기 때문에 펑궈장이 대총통,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인 새로운 내각이 7월 14일 출범했는데 돤치루이는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고 세계대전에 참전, 니시하라 차관을 들여 안휘군벌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이 때문에 쑨원이 광저우로 이동,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일으켰고 돤치루이가 무력으로 토벌하려 하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펑궈장을 비롯한 직예군벌의 전쟁 반대와 남방정부의 내분으로 인하여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2.4. 중화민국 2대 대총통

1918년, 펑궈장의 임기가 만료되어 가면서 차기 대총통 자리를 놓고 직계와 환계의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돤치루이가 펑궈장에게 군사적 기반이 없는 쉬스창을 대총통 후보로 추천하면서 만약 쉬스창을 대총통으로 삼으면 펑궈장에게 부총통 자리를 양보할 것이고 만약 펑궈장이 부총통 자리까지 마다한다면 자신도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다. 6월 19일 톈진의 독군단 회의가 쉬스창을 지지하였고 9월 4일 쉬스창은 의회에서 436표 중 425표의 찬성표를 얻어 중화민국 2대 대총통[2]에 당선, 10월 10일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돤치루이가 약속대로 국무총리에서 물러나고 12월 20일 내무총장 첸넝쉰이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돤치루이는 여전히 참전독판으로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부총통은 쉬스창이 남방인사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휘군벌이 호법전쟁에서 공이 큰 인물을 부총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다투는 바람에 정족수 미달로 선출되지 못했다. 취임 직후, 쉬스창은 만청의 왕공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맡게 된 것은 어린 황제를 위하여 섭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취임에 맞추어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장건 등 명사들이 10월 23일 평화기성회를 조직, 내전의 중지를 호소하였으며 전 대총통 펑궈장 등 기존의 주화파는 물론 안휘독군 니쓰충을 비롯한 주전파들도 동의하였다. 남방에서는 쉬스창의 총통 취임에 반대하며 쉬스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쉬스창이 10월 24일 평화령을 선포하고 11월 16일 각 부대에 정전령을 내리자 이에 호응하여 11월 22일 정전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은 종결되었다. 1919년 2월 20일부터 상하이에서 남북화의가 열렸지만 의견대립으로 인해 결렬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히게 되자 분노한 학생들이 5.4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첸넝쉰 내각이 사퇴하고 궁신잔 내각이 들어섰지만 9월에 궁신잔 내각도 사퇴하면서 육군총장 진윈펑이 국무총리를 대행하였다. 쉬스창은 첸넝쉰의 사임 이후 형식적으로 의회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약법에 총통의 사직은 근거가 없다고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이후 쉬스창은 베르사유 조약을 추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1920년, 산동성 곡부에서 공자의 77세손인 쿵더청이 태어나자 이미 중국이 공화국이 된 상태였지만 쿵더청의 연성공 세습을 허용하고 쿵더청의 탄생에 군대를 보내 보호하였다.

2.5. 안직전쟁

1918년부터 직계와 환계의 충돌이 극심해졌고 특히 쉬수정이 세계대전 참전을 구실로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조직한 참전군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안휘군벌은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고 외몽골 출병 등을 구실로 변방군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직계와 봉계는 물론, 쉬스창도 변방군을 육군부 직할로 두어 안휘군벌의 사병으로 삼지 말라고 하였으나 돤치루이는 듣지 않았다.

결국 1920년 3월 직계의 우페이푸가 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북상하고 환계를 견제하기 위한 직계-봉계 동맹이 결성되었다. 쉬스창은 하남독군 자오티의 해임에 대해 비준을 거부하는 등 돤치루이의 폭주를 저지하려 했고 정치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자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리춘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중에서 장쭤린만이 중재요청에 응해 베이징을 찾았다. 돤치루이와 쉬수정은 장쭤린을 극진히 대접했으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쉬수정의 장쭤린 암살 시도가 있었고 가까스로 달아난 장쭤린은 북방에서 출병을 거행했다. 돤치루이는 직계와 봉계를 토벌할 것을 선언했고 직계도 출병하면서 안직전쟁이 일어났다.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은 2주만에 패퇴하여 몰락했고 돤치루이는 하야, 쉬수정은 도주하였다. 환계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만들었던 안복 구락부도 해체되었다. 하지만 쉬스창과 장쭤린은 환계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다.

환계가 제거되자 이제는 장쭤린의 봉계와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계가 패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쉬스창은 안직전쟁 발발과 동시에 사퇴한 진윈펑을 대신하여 주수모를 총리로 삼았지만 장쭤린이 자신의 사돈인 진윈펑을 복직할 것을 요청하여 8월 11일에 진윈펑 내각이 재출범했다. 12월 3일 쉬스창은 세력균형을 위해 북양군벌의 원로인 왕스전을 강소, 안휘, 강서 순열사로 삼고 치셰위안을 강소독군에 임명했다. 하지만 서남에서의 군벌들의 내전, 양호 독군, 장강 삼성 독군 자리를 놓고 봉계와 직계의 싸움은 연일 거세어져갔다.

2.6. 1차 직봉전쟁

1921년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하면서 외몽골이 중국의 지배에서 떨어져나갔고 직계와 봉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아 차오쿤의 동생 조예와 찻잔까지 집어던지며 싸운 국무총리 진윈펑이 화가 나 사직을 요청하는 등 정치상황은 개판이었다.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 등 실력자들을 불러모아 중재를 시도하고 외몽골 탈환에 대해 논의하여 1921년 5월 30일 장쭤린을 몽강경략사로 임명하고 외몽골을 정벌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직예군벌인 23사단장 와승빈을 하남독군에 임명하고 28사단장 염상문을 섬서독군에 임명하는 등 직계와 봉계에 적당히 정치적 조정을 해주면서 좀 조용해지나 싶더니.... 1922년 6월 7일 우창에서 왕잔위안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왕잔위안이 축출되자 우페이푸는 즉각 25사단장 소요남을 보내 우한을 점령하고 호북독군에 삼았다. 우페이푸도 양호순열사에 임명되었다. 이 꼴을 본 봉계는 크게 분노했다.

이와중에 1921년 겨울 경제위기로 인해 군비 지급이 중단되어 파업과 집단 사직이 이어졌고 중국은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휩싸였다. 결국 1921년 12월 7일 진윈펑 내각은 사퇴하고 외교총장 옌후이칭이 국무총리 대리가 되었다. 이후 장쭤린이 교통계 량스이를 지지하여 12월 24일 총리에 임명되었는데 량스이가 환계 돤즈구이, 장수원, 취퉁펑, 진문운, 유순, 위종한 등을 대거 사면하고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려 하자 우페이푸는 량스이를 이완용같은 자라고 비난하였다. 우페이푸는 량스이와 그 후원자 장쭤린을 동시에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고 치셰위안, 펑위샹, 톈중위, 진광원 등이 우페이푸를 지지했다. 결국 1922년 4월 봉계와 직계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1차 직봉전쟁이 벌어졌는데 우페이푸 등은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출중한 군재들이 많은 반면, 장쭤린의 부대는 사람은 많지만 상당수가 마적단 출신이라 현대적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봉계는 1주일도 안되어 참담히 패해 산해관 너머로 도주했다.

봉계가 패배하자 쉬스창은 장징후이를 사면하고 안위장군에 임명하는 한편 직군과 봉군에게 원래 위치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며 량스이, 예궁차오(葉恭綽), 장호삼 등에게만 체포령을 내리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장쭤린에게 엄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여 쉬스창은 5월 10일 장쭤린의 동삼성 순열사 직을 비롯한 공직을 면직했고 5월 11일 몽고경략사직도 폐지했다. 하지만 장쭤린의 쉬스창의 명령에 불복하여 5월 12일, 동삼성의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우쥔성, 펑더린 등이 장쭤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면서 장쭤린은 6월 4일 동삼성보안총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만주의 기반은 유지할 수 있었다.

2.7. 대총통 하야와 말년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군벌은 더 이상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쉬스창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에 우페이푸 등 직계는 법통중광이라는 구호를 들고 와 장쉰이 해산한 구국회를 소집하고 북양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자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돤치루이가 만든 안복국회의 정통성이 부인되어 안복국회에서 선출된 쉬스창도 당연히 물러나야 하고 임시 약법 하에서 마지막으로 선출된 리위안훙이 대총통이 되는 것이었다. 우페이푸의 이러한 구국회 복구 운동에 광저우의 민우사, 상하이의 익우사 국회의원들이 호응하였고 구 국회의장 우징롄, 왕가양 등도 1922년 5월 10일 우페이푸가 개최한 바오딩 회의에 참여하여 법통중광을 지지했다.

1922년 5월 19일 우페이푸는 쑨촨팡을 시켜 구국회 복구를 선동하고 마땅히 리위안훙을 복직시켜야 한다는 전문을 보내 쉬스창과 쑨원을 공격했다. 여기에 정학계, 헌정연구회, 량치차오 등도 동의했고 5월 27일 우페이푸는 자신이 이미 10여개 성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좋은 말로 할때 하야하라는 위협전문을 보냈다. 5월 28일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톈진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리위안훙을 복직시켜 통일을 도모하자고 발표했으며 5월 29일 쑨촨팡이 쑨원과 쉬스창에게 모두 하야를 요구했다. 6월 1일 우징롄, 왕가양 등 구국회의원 203명이 텐진으로 모여들어 쉬스창을 비방했다.

쑨촨팡에 이어 치셰위안이 5월 29일, 쉬스창의 사퇴를 요구하자 쉬스창은 5월 31일, 사퇴 의사를 밝히며 사직의 적절한 방도를 마련해달라고 통전했으나 6월 1일, 국회가 쉬스창을 '가짜 총통'으로 규정하고 그가 통일을 방해한 죄가 있다고 맹비난하자 바로 다음날인 6월 2일, 몸이 쇠약하여 물러난다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톈진의 사저로 돌아가 은거했다. 6월 11일 리위안훙이 5대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정치에 완전히 관심을 끊고 서화 등 예술에 전념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베이징과 텐진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일본 제국은 쉬스창을 괴뢰국인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장으로 옹립하려 시도했으나 쉬스창은 거부했다. 이후 방광암에 걸려 1939년 6월 사망하여 고향 하남성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나 전쟁 중이라 이뤄지지 못하고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 묻혔다.

3. 여담

사후 1939년 6월 8일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충칭에서 쉬스창에게 고인을 칭송하는 포양령(褒揚令)을 선포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 대총통 중 가장 오래 재임한 총통이다.근데 이 사람도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들이 어김없이(...) 그의 무덤을 박살냈다.

아내가 2명이었지만 아들은 없으며 딸을 둘 낳았지만 둘 다 어릴 때 죽었다.

4. 매체에서

파일:건당위업서세창.jpg
영화 건당위업에서 중국배우 유문치가 분했다.

5. 참고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조곤의 부패선거(1923년)과 법통문제의 종식,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8호,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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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이 자리는 위안스카이가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심복 돤즈구이를 시켜 많은 뇌물을 뿌리게 했지만 서태후가 위안스카이 임명에 반대하면서 물건너갔다. [2] 리위안훙 펑궈장은 계임되었기에 대수를 따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