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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박망후(博望候) |
이름 | 장건(張騫) |
고향 | 한중(漢中) |
생몰년도 | 기원전 ???년 ~ 기원전 1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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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한 시기의 군인이자, 여행가.전한 제7대 세종 무황제 유철의 명령으로 그때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서역으로 떠나, 천신만고의 모험 끝에 수많은 국가를 탐방하고 정보를 가져와, 서역에 대한 중국의 이해를 크게 넓혔고, 최종적으로 서로 다른 문명의 접촉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다. 이를 통해 비단길이 개척되었다. 또한 장건의 고난에 찬 여로를 따라가 보면 그가 진정한 근성의 화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모험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조.
2. 배경
당시 전한은 가공할 수준의 국력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고조 유방이 흉노의 영웅 묵돌 선우에게 백등산 포위전에서 패배한 뒤로, 군사적으로는 쭉 흉노에게 눌려오던 상황이었다. 여후는 대놓고 흉노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고,[1] 한문제의 시대에는 쳐들어온 흉노는 막아냈으나 한나라의 장수들이 적을 추격해서 북벌을 감행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하지만 한무제의 시기에 이르러 내부의 역량이 그야말로 절정으로 치닫자, 자연스레 그 힘은 외부로 분출되었다. BC 133년, 한무제는 무려 300,000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침공했다.
작전은 적을 유인해 복병으로 섬멸하는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흉노의 군신선우가 이 작전을 완전히 간파하여 시도도 못한 채 완전히 물 말아먹고 끝났다는 것이다. 아무 전공도 세우지 못했고,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까지 하는 바람에 여기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비용만 허공으로 날리게 되었다. 결국 관련 책임자를 죽이자는 여론이 강해져서, 작전을 입안한 왕회(王恢)는 절망한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답답한 정세는 곧 위청이라는 명장이 나타나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한무제가 위청, 그리고 곽거병 등으로 반격을 개시하기 직전 즈음, 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려고 했던 한나라는 동맹이 있다면 일이 좀 더 쉽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국도(國都) 장안(長安)이 있었던 지금의 섬서성 서북방에, 마치 호리병을 가로눕힌 모양으로 길게 동•서로 가로놓인 것이 감숙성이다. 그리고 그 호리병 한가운데 움푹 패인 곳을 황하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황하는 이 지역에서는 계속 그런 식으로 흘러내려 내몽골의 초원까지 이르며, 마치 호리병 한가운데를 잡아맨 끈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황하의 끈으로부터 동반분(東半分), 즉 호리병의 밑동 부분이 장안의 북쪽을 흐르는 위수(渭洙) 상류 지방으로 한족의 세력이라고 한다면, 황하의 끈에서 서반분(西半分) 그러니까 양주(凉州), 감숙(甘肅), 숙주(肅州), 돈황(敦煌)과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가 마침내 호리병의 부리에 이르는 지역은 한족의 세력 밖에 놓여 이민족이 그야말로 날뛰는, 다시 말해서 이민족들이 잘 먹고 잘 살다가 이따금 한족을 때리고 삥뜯으러 오는 그런 지대였다.
본래 이 지대에 살던 이들은 월지(月氏)라는 족속이었다. 그런데 흉노가 동북방에서 그 지역으로 점차 세력을 뻗쳐오더니, 월지를 쫓아내고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흉노는 북쪽과 서쪽에서 모두 한나라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며, 쫓겨난 월지 종족은 서쪽으로 달아나 지금의 신강성 서북부 이리 분지까지 도주했다.
3. 비단길 개척
3.1. 장건의 출발
그 무렵 한무제가 항복한 흉노 무리에게 이 일을 물어보자 대답하는 말이 다 같았다고 한다."흉노가 월지(月氏)와 싸워 그들의 왕을 죽여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월지 부족들은 멀리 도망가 숨어 살면서 항상 흉노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하지만 함께 협력하여 공격할 동맹국이 없다고 했다." |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월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 했음으로, 아무나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무제는 쓸 만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널리 모집을 했는데, 이때 자원한 사람이 장건이었다. 건원(建元)[2] 연간, 장건은 낭(郞)이 되어 있었다.
장건이 이렇게 용감하게 나서자, 무제는 당읍씨(堂邑氏)[3]의 가노였던 흉노인 감보(甘父)와 함께 농서(隴西)의 길을 통해 나아가도록 했다. 장건은 BC 138년, 당시 월지가 있었던 일리 강 유역을 목표로 출발했다.
3.2. 고생길의 시작
그런데 흉노 땅을 통과하려는 본래의 목적이 성공을 거두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흉노 땅을 지나다가 그 병사들에게 딱 걸려서, 흉노의 군신 선우 앞에 끌려오는 신세가 된 것이다. 군신 선우는 장건 일행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월지는 우리나라의 북쪽에 있는데 한나라가 어찌하여 사자를 보내는가? 내가 한나라의 남쪽에 있는 월(越)나라[4]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나라는 기꺼이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는가?" |
장건이 흉노에서 지낸지가 오래되다 보니, 자연스레 감시도 약해졌고 이때문에 그는 마음대로 흉노 땅을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느슨한 상황을 틈타, 장건은 가족들 및[5] 부하 감보와 함께 월지를 향해 달아났다.
3.3. 대완(大宛)과 강거에서
장건이 정신없이 달아난지 수십여 일, 마침내 대완이라는 낯선 나라에 도착했다. 대완은 현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의 국경이 만나는 페르가나 지방(Fergana)이었다. 대완에서는 소문으로 한나라가 매우 강하고 부유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통상무역을 하고 싶었던 중 한나라 사람인 장건이 찾아오자 매우 기뻐하며 물었다."그대는 어디로 가려는가?" |
"나는 월지국으로 가는 한나라 사자입니다. 흉노에 의해 억류되어 길을 가지 못한 바가 되었으나 도망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왕께서 사람을 내어 주셔서 저를 월지국까지 보내주십시오. 진실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사자의 임무를 다하고 한나라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나라가 왕께 주는 재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
3.4. 월지와 대하에서
그러나 막상 월지국에 닿고 보니, 장건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첫째로 그 나라의 위치가 예전에 들었던 자리가 아니었다. 본래 감숙에 있었던 월지가 흉노에게 쫓겨나면서 자리잡은 곳은 신강성의 서쪽 끝인 이리 지방이었지만, 월지는 그 이리 지방도 오손(烏孫)에게 빼앗기고 다시 훨씬 더 서쪽인 구소련 동남쪽의 소그디아나(Sogdiana) 지방으로 두 번째 이전을 해 있었다.
이 두 번째 이전지는 지극히 풍요로운 곳으로, 월지는 완전히 그 곳에 평화롭게 정착해버리고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 흉노에 대한 원한 따위는 이미 전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로부터 너무 멀었고, 또 땅도 풍요로웠으며, 월지는 대하(大夏)라는 나라까지 복속시켜 득의양양하기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6]
에우크라티데스 1세 |
하지만 본래 목적인 월지와의 동맹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장건은 1년 가까이 이국에서 꾸물거리다가 끝내 단념하고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때의 귀로에 대해서 남산(南山)을 따라 티베트계 강족(羌族)의 땅을 경유하여 돌아오려고 했다고 하는데, 일본 사학자인 하네다 도루(羽田亨)는 장건이 신강성의 남반, 즉 천산남로(天山南路)로부터 청해성 쪽으로 빠져나오는 길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3.5. 귀환
여하간에 돌아오던 중이던 장건은, 정말 재수없게도 다시 한번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7] 그야말로 망했어요가 절로 나오는 상황……그런데 장건이 1년쯤 그렇게 지내고 있으려니 흉노 정세에 무언가 이상이 감지되었다.군신 선우가 붕어하고, 흉노의 좌곡려왕(左谷蠡王)이 흉노의 태자를 공격하는 내란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소란 통에 장건은 흉노인 아내 및 부하 감보와 함께 또 극적인 탈주극에 성공해 한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기원전 138년에 길을 떠난 장건이 도착한 것은 기원전 125년으로 무려 13년 만에 장안으로 귀환했는데, 당초 떠날 때의 일행은 100명이었지만, 귀환한 일행은 흉노인 아내를 빼면 장건과 감보,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 감보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 장건이 굶어죽게 생기면 활을 쏘아 짐승을 잡아서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여하간에 장건은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장건이 황성 안으로 들어오자 무제를 포함한 전 대신이 모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돌아오니 울 만도 하다.
3.6. 장건의 보고
[8]
장건은 대완(大宛), 대월지, 대하(大夏), 강거(康居) 등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 외 주변의 나라 5, 6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고 한다. 장건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대완[9]은 흉노의 서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이며 한나라로부터 10,000리입니다. 그 나라의 풍속은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어 주식으로 삼습니다. 포도주를 담그고 핏물 같은 땀을 흘리는
한혈마(汗血馬)[10]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새끼라고 합니다. 성곽이 있고 그 안에 가옥을 짓고 삽니다. 그 나라의 지방에는 크고 작은 성 70여 개가 있고 백성들은 수효는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활이며 군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쏩니다. 그 북쪽에는 강거,[11] 서쪽에는 대월지,[12] 서남쪽에는 대하,[13] 동북쪽에는 오손(烏孫)[14]이 있고 동쪽에는 우온(扜鰛)과 우전(于窴)이 있습니다. 우전의 서쪽에는 강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들어갑니다. 그 동쪽의 강은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흐릅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흘러들어갔다가 그 남쪽의 황하의 발원지에서 솟아납니다. 옥돌이 많이 산출되고 황하는 중국으로 흐릅니다. 누란(樓蘭)과 고사(古事)는 성곽이 있고 염택과 인접해 있습니다. 염택에서 장안까지는 5,000리입니다. 흉노의 왼쪽은 바로 염택의 동쪽이고, 농서(隴西)의 장성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강(羌)과 접하고 한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손(烏孫)은 대완의 동북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목을 하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만 명이고 싸움에 나서면 용감합니다. 옛날에는 흉노에 복속되었지만 지금은 세력이 커져 흉노에 보낸 인질들을 모두 귀국시키고, 지금은 회합에 참가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강거(康居)는 대완의 서북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떠돌아다는 생활을 하며 월지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길 수 있는 군사가 8~90,000명에 이르고 대완과 이웃해 있습니다. 나라는 작아 남쪽 지방은 월지에 의해 통제되고 동쪽은 흉노를 받들고 있습니다. 엄채(奄蔡)[15]는 강거에서 서북쪽으로 2,000리 떨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목생활을 하며 강거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00,000여 명에 달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큰 못[16]을 접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곳이 북해(北海)인 것 같습니다. 대월지는 대완의 서쪽으로 3,000리 되는 곳에 있고 규수(嬀水)의 북쪽에 있습니다. 그 남쪽에는 대하(大夏)가 있고 서쪽에는 안식(安息)이 있으며, 북쪽에는 강거가 있습니다. 유목국가로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따라 거처를 옮겨다닙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200,000명에 달합니다. 옛날 나라가 강했을 때는 흉노를 가볍게 대했으나 모돈(冒頓, 묵돌 선우)이 흉노의 대선우가 되고 나서 월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노상 선우(老上單于)때는 월지 왕을 죽여 그 두개골 뼈로 그릇을 만들어 술을 마셨습니다. 원래 월지는 돈황(敦煌)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에 나라를 세웠는데 흉노에게 패배한 후에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완(大宛)을 지나 대하(大夏)를 쳐서 그들을 신복시키고, 마침내 규수(嬀水) 북쪽 평원에 도읍을 세워 왕정(王庭)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월지인들이 남산과 강족(羌族)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렸습니다. 안식(安息,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은 대월지의 서쪽 수천 리에 있습니다. 그들의 풍속은 정착 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벼와 보리를 경작하며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읍은 대완과 비슷하며 나라에 속한 성읍은 대소 수백 개가 있으며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달해 그중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嬀水)가 흐르고 있고 시장이 있는데 백성들이나 상인들은 수레와 배를 가지고 인접한 나라나 수천 리 되는 먼 곳을 다니며 장사를 합니다. 은으로 돈을 만들고 그 표면에 왕의 얼굴을 넣으며 왕이 죽으면 재빨리 동전을 바꿔 왕의 얼굴을 다시 넣습니다.[17] 그들은 가죽 위에 글을 써서 기록합니다. 그 나라 서쪽에는 조지(條枝)가 있고, 북쪽에는 엄채(奄蔡) 및 여헌(黎軒)이 있습니다. 조지(條枝, 시리아)는 안식의 서쪽 수천 리 되는 곳에 있고, 서해(지중해)에 맏닿아 있습니다. 기후는 덥고 습합니다. 농사를 짓고 벼를 경작합니다. 큰 새가 있는데 그 알이 마치 항아리와 같이 큽니다. 사람은 매우 많은데 가는 곳마다 소군장(小君長)들이 있습니다. 안식은 이 나라를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안식의 장로가 이르기를 조지에는 약수(弱水)와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대하(박트리아)는 대완의 남쪽 2,000리 되는 곳의 규수 남쪽에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 생활을 하고 성을 건설하며 그 안에 집을 짓고 사는데 대완과 같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대군장은 없고, 가는 곳마다 성읍에 소군장이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는 약하고 싸움을 싫어합니다.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데 능숙합니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해와 그들을 공격해서 패주시키고 속국으로 만들어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하의 인구는 매우 많아 1,000,000명이 넘습니다. 그 도성은 남지성(藍氏城)이라고 하는데 시장이 있어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고 팝니다.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身毒國)이 있습니다." - 《 사기》 <대완 열전> |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邛)에서 생산되는 죽장(竹杖)과 촉(蜀)에서 나는 베를 보고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상인들이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인도)은 대하의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 생활을 하고 대체적으로 우리 대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날씨는 불순하고 습하며 여름에는 몹시 덥다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에는 아주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 건(騫)이 추측해본 바, 대하는 우리 한나라에서 서남쪽으로 12,00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신독국은 대하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또 촉에서 만든 물품들이 있으니 아마도 촉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대하로 사자를 보낸다면 강(羌)족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길이 험할 뿐 아니라 강족이 매우 싫어할 것입니다. 또 북쪽으로 조금 돌아간다면 흉노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촉으로 곧바로 간다면 길도 가깝고 도중에 도둑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 《사기》 <대완 열전> |
한무제 초년에 지금의 귀주 지방이 광동, 즉 당시 남월로 통하는 교통로로 주목받았고, 당몽이라는 인물이 귀주 북부의 우두머리인 야량국의 왕에게 교섭을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한나라에서는 지체없이 인부를 보내 군용 도로를 닦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인부들이 징발되었던 탓에 사천의 유력 인사들이 불만을 마구 터뜨렸고, 성과도 별로인 데다가 북방의 대흉노 전쟁에 몹시 바빠 서남이 경략은 일시 중단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장건의 보고로 인해 재개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광저우, 즉 남월의 수도였던 번우(番禺)의 시가지를 흐르는 주강은 분명 귀주성에서 발현하고 있으며, 운남성에서 미얀마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미얀마 로드(Myanma Road)가 보여주는 그대로이다. 다만 한무제는 인도에 도달할 수 없었다. 만약 인도로 가는 길이 이때 열렸다면 중국에 대한 불교 전파는 100년은 빨라졌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수십 년 후부터 귀주와 운남 지방 등이 복속하여 그 지역에 한나라의 군현들이 속속 개설되기는 했다.
4. 지휘관으로서
장건은 그 후 교위(校尉)의 신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대흉노 정벌전에 종군했다. 사막에 물과 초지가 있는 것을 그가 숙지하고 있었음으로 한나라의 군대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 공으로 장건은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기원전 121년, 한나라 장군 이광은 낭중령의 신분으로 4,000여 명을 이끌며 우북평에서 출발했고, 박망후 장건은 10,000여 명을 이끌고 길을 달리해서 출격했는데, 갑자기 이광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흉노 좌현왕의 군대 40,000명이 이광을 포위했다.
이광의 병사들은 멘붕에 처해 모두 패닉 상태였으나, 이광은 자신의 아들 이감에게 명령하여 적에게 돌격하도록 했다. 이감은 수십여 기를 이끌고 수만 명의 흉노 군대에 돌진하여 적의 기병을 정면돌파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저놈들 별 것 아니라고 자신감있게 말해 한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별것이 아니든 어쩌든 일단 싸워야 했기에, 이광은 부대를 원형으로 하여 밖을 둘러보게 했고,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흉노 병사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당시 이광 본인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를 쏘아대어 흉노군의 부장들을 쳐죽이며 분전했고, 날이 저물어도 포위가 여전하자 겁에 질린 한군의 병사들도 이광의 이런 용맹한 태도를 보고 용기를 얻어 열심히 싸웠다.
다음날, 이광이 여전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때, 장건의 부대가 도착하여 흉노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너무 지쳐 추격하지 못했고, 이광의 부대는 전멸의 위기를 넘겼지만 몰골은 완전히 패잔병 꼴이었다. 장건은 행군을 지체하여 그 죄로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속죄금을 내어 목숨만은 건졌다.[19] 이광은 딱히 공이랄 것이 없어,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사기》 <흉노 열전>에 따르면, 이광의 4,000여 명의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죽었고, 흉노는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5. 사망
장건은 후작의 작위를 잃었지만, 서역에 대해 그보다 더한 전문가도 없었기에 한무제는 이러한 점을 자주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장건은 대답했다.
"제가 흉노에 살고 있을 때 오손의 왕은
곤막(昆莫)이었습니다. 그의 부왕 때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작은 나라인 오손을 흉노가 공격하여 곤막의 부왕을 살해하고 어린 곤막을 들판에 버렸습니다. 그러자 까마귀가 고기를 날라와 먹이고 이리가 와서 젖을 먹였습니다. 신이 돕고 있다고 기이하게 생각한 흉노 선우가 곤막을 거두어 키웠습니다. 이윽고 곤막이 장성하자 장수가 되어 여러 번 공을 세웠고 이에 흉노의 선우는 다시 오손 부족들을 곤막에게 주어 오랫동안 흉노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습니다. 곤막이 변방의 작은 고을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의 부족민들은 활을 쏠 수 있는 전사로 성장하여 싸움에 익숙해졌습니다. 흉노의 선우가 죽자 곤막은 오손 부족들을 이끌고 먼 땅으로 이주하여 중립을 지키면서 흉노의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흉노가 군사를 보내 기습을 시도했으나 이기지 못했음으로 곤막을 '신인'이라고 생각하고 멀리하며 명목상으로만 속국으로 삼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우는 한나라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으며, 혼야왕이 살고 있었던 하서 지역은 무인지경으로 비어 있습니다. 원래 만이들은 한나라의 재화와 물품들을 좋아함으로 이때 성의를 다하여 많은 뇌물을 예물로 오손 왕에게 주어 그들을 불러 동쪽으로 옮겨 옛날 혼야왕의 땅에 거주케 하고, 우리 한나라와 형제의 결의을 맺자고 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우리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는 일이 됩니다. 일단 오손과 연계가 되면 그 서쪽에 있는 대하와 같은 다른 나라도 모두 불러 우리의 외신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장건이 오손에 도착해보니, 곤막은 마치 흉노 선우가 사자를 맞이하는 예를 취했다. 이에 장건이 예절이 맞지 않다고 따졌지만 곤막은 하사품에 대해서만 예절을 취하고 나머지 의식은 그대로 했다.
장건은 오손을 회유하기 위해 이런 저런 제안을 했지만 당시 오손 내부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탓에 딱히 뭔가 약속을 하기 어려웠다. 대신 장건은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을 주변 나라로 보내 정보를 얻게 했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한무제는 장건을 대행령(大行令)[20]에 임명했고, 장건은 1년 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끝마쳤다.
6. 평가
장건 사후 그가 각지에 파견시킨 인물들로 인해 한나라는 서역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손 등과의 접촉도 훨씬 빈번해지면서 서역과 중국 양자에게 있어서 큰 이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게다가, 장건이 외국을 다녀와서 그 신분이 존귀하게 되자 그를 따라다녔던 관리와 병사들,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사절로 가기를 청했다.[21] 이런 면에서 보면 장건의 대모험이 여러가지 면에서 이러한 왕래를 훨씬 빠르게 진전시킨 측면이 있다고 할 만 하다. 장건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중국과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을 테지만 장건이 이를 훨씬 빠른 시기로 단축시킨 셈이었다.
장건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힘이 세고 마음이 넓었으며, 사람들 사이에 신망이 있어 흉노족을 포함한 서역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확실히 몇 번이나 살해당할 위기에 놓였었고, 심지어 한나라의 숙적이었던 흉노에게 사로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은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매력은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측면이 있다. 괜히 장군까지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또한 거대한 교류사적 흐름으로 보지 않더라도 한무제의 치세에 장건의 모험은 큰 영향을 끼쳤다. 장건이 가져온 정보로 인하여, 한무제는 이광리 등에게 명령을 내려 대완 정벌을 계획했고,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대완에서 나름대로 장건을 후하게 대접했던 것을 생각하면 미래라는 게 참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1]
조롱거리도 그냥 조롱거리가 아닌 것이
한고제의 붕어 이후 당시 흉노의 지도자였던
묵돌이 "남편을 잃었다고 하는데 나랑 부족한 거 채워보지 않겠소?"라는 섹드립을 했다(...). 여후도 한 성질 하는지라 이를 받아들고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진평이 "고제께서도
걔네랑 붙어서 졌는데 우리가 뭔 수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당시 한나라의 상황이 흉노를 치기에 좋은 것도 아니었던지라 결국 여후는 자신이 늙어서 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는 등 굴욕을 제대로 겪었다. 게다가 당시 유방과 여씨들의 숙청이 유행했기 때문에 인재들도 많이 부족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흉노가 진나라의
몽염에게 쫓겨서 땅을 뜯기던 신세임을 떠올려 보면 격세지감...
[2]
한무제의 첫 번째 연호. BC 140년부터 135년까지.
[3]
지금의 강소성 육합(六合) 북쪽의 성읍으로 한고제의 공신이었던 진영(陳嬰)의 제후국이었다.
[4]
남월(南越)을 말함이다. 지금의 베트남. 후에
고조선과 함께 무제에게 멸망당했다.
[5]
가족을 두고 떠났다는 설도 있다.
[6]
이곳에서 힘을 기른 월지인들은 훗날
쿠샨 왕조를 건국하고, 중앙아시아와 북인도의 패권을 차지했다.
[7]
흉노를 피해 남쪽길로 돌아가려 했지만, 경로상에 있었던 티베트가 당시 흉노의 동맹이었다.
[8]
월지의 이동 과정을 나타내는 지도지만 연대 오류가 극심하니 이동 방향만 참고하자. 월지는 장건이 동맹을 위해 떠난 BC 138년까지만 해도 흉노와 접한 일리 강 유역에 거주했기에 장건이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장건이 흉노에 잡혀있는 사이에 멸망한 오손이 흉노의 힘을 빌려 월지를 쫓아냈기에 소그디아나로 이동해 대월지가 되었다. 장건이 대월지에 도착한 BC 126년에는 이미 박트리아(대하)를 정복한 후였다.
[9]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이다.
[10]
《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인 곽정이 타는 한혈마로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명마인 아할타케이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적토마, 절영, 적로 등의 명마도 서역산 한혈마로 추정된다. 원래 동아시아의 말은 체격이 훨씬 작다.
[11]
카자흐스탄 남부이다.
[12]
현 우즈베키스탄의 대부분인 트란스옥시아나. 당시엔 소그디아나로 불렸다.
[13]
박트리아의 음차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가 중심이었다.
[14]
키르기스스탄과 러시아의 일리 분지, 신강의 준가리아 분지이다.
[15]
이후의 이란계
알란족이다.
[16]
카스피 해.
[17]
서양 문화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에서 온 장건에게는 무엄하게도 임금의 얼굴을 돈에 새긴다는 게 굉장한 문화 충격이었을 것이다.
[18]
그 중에서도 현재
파키스탄의
신드(Sindh) 주를 뜻한다. 그리스계 대하 사람들이 신독의 풍습이 자기들과 비슷하다고 말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향으로 그곳에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
당시 한나라의 법은 사형 선고를 받아도 돈 500,000전, 현대 기준으로 못해도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에 이르는 돈을 내면 서민으로 강등당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장건은 이 방식을 택한 것이다. 참고로, 돈을 내지 않고 사형당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궁형, 즉
고자되기였다. 그러나 이 방식은 사형당하는 것 이상으로 명예도 잃어버리고 상처의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얼마 못 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이걸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선친의 유지를 위해 이걸 선택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마천이었다.
[20]
제후와 이민족들에 대한 사무를 관장했다.
[21]
후한 초기의
반초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한명제 시대에 장건을 본받아 서역행을 자처한 반초는 50여개의 서역 국가들을 한나라에 귀의시키는 큰 업적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