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8:28:21

아덴만 여명 작전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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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만 여명 작전
Operation Dawn of Gulf of Aden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121170607.jpg
▲ 작전 중 삼호 주얼리호의 사진[1]
날짜 2011년 1월 18일 ~ 1월 21일[2]
장소 아라비아해 아덴만 입구 해역
삼호 주얼리호
결과 해적 진압
피랍선 탈환 및 인질 21명 전원 구출 성공
교전 세력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항구적 자유 작전 지원국

[[미국|]][[틀:국기|]][[틀:국기|]][3]

[[오만|]][[틀:국기|]][[틀:국기|]][4]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5]
파일:해적기.svg 소말리아 해적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명박[6]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관진[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한민구[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성찬[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황기철[1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영주[11]
파일:해적기.svg 아브디 리스케 샤크 †
파일:해적기.svg 수티 알리 하루트 †
병력
대한민국 해군 300명
(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
DDH-981 최영
슈퍼 링스 1대
해군 특수전전단 30여 명
피랍선 1척
해적 17명
피해 규모
0명 사망
3명 부상
( 민간인 1명 부상)
8명 사망
4명 실종
5명 생포

1. 개요2. 전개
2.1. 선박 납치2.2. 1차 작전2.3. 2차 작전
2.3.1. 진입2.3.2. 작전 직후
2.4. 석해균 선장의 용태2.5. 무공 훈·포장, 표창 수상자
3. 이후
3.1. 시신 처리 및 재판3.2. 소말리어 통역 문제3.3. 수감 생활3.4. 금미 305호3.5. 석해균 선장에게 맞은 총알 관련 논란3.6. 석해균 선장의 치료비 문제3.7. 제미니호 피랍사건
4. 반응5. 엠바고 요청과 무시6. 군 기밀 유지 부실 논란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아덴만 여명 작전 2011년 1월 15일 아브디 리스케 샤크가 이끄는 소말리아 해적 일파에 의해 피랍된 1만톤급 화물선 삼호 주얼리(SAMHO JEWELRY)호를 구출하기 위해 같은 달 18일 대한민국 해군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통칭 청해부대)가 실시한 해상 작전이다.

이는 한국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최초의 인질 구출 작전이었으며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주도 아래 미국, 오만, 파키스탄 등 항구적 자유 작전에 참가한 국가의 함정 및 병력이 작전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은 납치 6일 만인 2011년 1월 21일, 청해부대 소속 해군 특수전전단(UDT/SEAL) 팀의 급습을 통해 해적 8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인질 21명(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전원을 구출하여 작전에 성공하였다.

2. 전개

2.1. 선박 납치

2011년 1월 삼호 주얼리호(11,566톤, 몰타 선적)가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다. 선원들은 해적의 접근을 보고 재빨리 선미의 로프 저장창고로 대피했으나 3시간 15분 만에 뚫렸고 해적들은 선장을 협박해 배를 소말리아로 돌릴 것을 요구했다. 이를 보고 더 이상의 납치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 대통령 이명박 청해부대(당시 지휘관 해군 항해 대령 조영주)에게 해적 소탕과 인질 구출을 명령했다.

청해부대 6진에 해당하는 최영함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으로 해상 작전을 위한 링스 헬기(항공대장 강태열 소령), 선박검문검색을 위한 UDT대원(검문검색대장 안병주 소령), 항구 정박시 함정 경계를 위한 해병대원(경계팀장 최승우 중위) 들이 타고 있었다. 최영함 총 인원은 전대장 겸 함장 조영주 대령 이하 300명이었다.[12]

석해균 선장은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해 작전 시간을 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석 선장은 최초에는 기관실에 이상이 있다며 해적을 속이고 배를 멈췄으며 가짜로 수리했다고 한 후에는 기관에 이상이 있어 속도를 못 낸다며 5노트의 속도로 시간을 끌었고 자이로스크프를 조작하여 지그재그 주행했다. 해적의 명령에 따라 영어로 해운사 측과 통화하면서도 중간중간에 한국어로 상황을 전달했다.

2.2. 1차 작전

삼호주얼리호의 선장 석해균은 선박 속도를 늦추려고 해적들 몰래 "엔진오일에 물을 타라."고 지시했고 선장 석해균에게 지시받은 기관장 정만기는 해적의 감시를 피해 물을 탔다. 선장 석해균 측의 말로는 물을 타라고 지시하였으나 선원들이 겁에 질려 시도하기까지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속도를 레드 존에 놓는 식으로 엔진 고장을 가장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박은 정상 운항이 어려워졌다. 엔진오일에 물이 들어간 탓에 삼호주얼리호는 자주 멈추는가 하면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에 해적들은 근처를 지나는 몽골 선적 상선을 추가로 빼앗으려고 4명이 해적선에 타고 삼호주얼리호를 떠났고 이를 발견한 해군은 링스 헬기와 고속단정 2척을 진입시켰고 링스헬기의 K-6 중기관총으로 위협사격해 해적선을 무력화시켰다.[13]

이에 삼호주얼리호의 해적들이 백기를 들어 투항의사를 표시하였고 검문검색팀이 고속단정으로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하였으나 해적들이 갑자기 링스헬기와 고속단정 2척에 사격을 가해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격으로 3명이 부상을 입었고 작전이 중단되었다. 해적의 기습으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해적들의 보트와 AK 소총 3정 및 실탄 90발을 빼앗아 전력 절반을 무력화했다.[14] 군 관계자는 "21일 작전이 비교적 수월하게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1차 작전으로 적의 전력이 약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상자들은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고속단정에 타고 맨 선두에 위치한 UDT 검문검색대장 안병주 소령(해학군 39기)은 허리에 3발의 총탄을 맞아 한발이 척추에 근접까지 했으며 관측수 강준 하사는 총알이 오른쪽 광대뼈를 스치고 지나가 찰과상을 입었다. 링스에 탑승했던 해상저격팀장 김원인 상사는 오른쪽 허벅지에 2발의 총탄을 맞았다. 부상자들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세 명 모두 총상 위치가 조금만 달랐어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부상이 가장 심했던 안병주 소령은 수술 후 일주일 만에 보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했으며 이후 완전히 회복해 9개월 뒤에는 호국보위상 수상식에도 참석했고 중령으로 진급해 해군 2함대 제5특전대대장으로 보임된 것이 2013년 국방일보 기사로 확인되었고 2022년 기준으로 대령으로 교육훈련전대장으로 재직 중이다. 헬기에서 부상을 입은 대원도 부상에서 회복하였고 2018년 다시 청해부대로 파병 임무를 나갔다.

2.3. 2차 작전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미 해군 P-3C 대잠초계기가 삼호 주얼리 호를 감시하다가 해적선 모함이 다가옴을 알리자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작전을 허락받고 명령했다고 한다. 부산항에서 삼호 주얼리 호와 동형의 선박을 대상으로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주얼리호에 링스헬기로 계속 사격을 퍼부어 해적들을 지치게 만든 다음 현지시각 오전 4시 58분부터 9시 56분(한국 시각 오후 2시 56분)까지 진행했다.

2.3.1. 진입

아덴만 여명 작전은 새벽 4시 58분 시작됐다. 갑판 위의 해적은 4명이었다.[15]

5시 17분부터 해적의 시선에서 고속단정 강하를 감추기 위해 함수를 오른편으로 돌린 상태에서 우현 1, 3번 고속단정을 강하했고 다시 왼쪽으로 변침하여 좌현의 4번 고속단정을 강하했다. 6분 뒤 K-6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링스 헬기가 최영함에서 떠오르면서 모든 작전 준비가 끝났다. 최영함은 VHF 상선망으로 부산 갈매기 노래와 함께 곧 작전이 시작된다는 한국어 경고방송을 실시해 삼호 쥬얼리의 선원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16] 우선 링스 헬기가 먼저 K6 중기관총으로 우현 사격을 하여 시선을 끌었는데 K-6 탄이 걸려서 더 이상 사격을 못 하고 뒤로 빠졌으며 그 틈을 타고 해적들에 의해 한국인 선원들이 인간 방패로 끌려 나왔다. 이때 갑자기 선박 좌현에 있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최영함은 소병기로 비 오듯이 사격을 해서 해적들을 당황시켰고 그 사이에 선원들은 도망쳤다. 그리고 최영함에 있던 UDT 저격수 박00 중사가 갑판에 있던 대부분의 해적들을 저격했다.[17]

이 사이 고속단정 3척에 나눠 탑승한 UDT/SEAL 작전 1팀 8명, 2팀 7명은 이 삼호 주얼리 호 함미 우현에 접현해 사다리로 승선해 해적을 제압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특이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선박작전 시 흔하게 사용되던 일반적인 와이어형 그물 사다리가 아니라 얇은 철근에 대나무 가지처럼 철근을 붙인 사다리가 이용되었다. 이 사다리가 어려운 작전 중에서 좋은 영향을 주었는데 와이어형 사다리는 어떤 상황, 어떤 선박에서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파도가 많이 치거나 여러명의 대원들이 동시에 승선할 경우 흔들림이 심해 빠른 작전 진행이 불가능하다. 반면 철근으로 단단하게 이어붙힌 사다리는 와이어형 사다리에 비해 무겁고 처음 제작된 길이에 맞는 건현을 가진 선박에만 사용 가능하지만 고정이 단단하게 되어 여러명의 대원들이 빠르고 안전하게 승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18]

또 UDT/SEAL팀은 각각 개인 카메라 '카이샷'을 머리에 부착하여 이 화면은 실시간으로 최영함과 합동참모본부, 국방부에 전송되었다.

최영함에서는 소나타 ECM을 삼호 주얼리 호에 직접 조사하여 레이더 무전기를 먹통으로 만들었고 5시 40분 접근한 링스 헬기가 레이더와 통신 안테나에 무력화 사격을 가해 완전히 파괴했다. 링스 헬기가 선교와 갑판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최영함이 고속으로 접근해 삼호 쥬얼리호를 중기관총과 저격수 사거리 안에 넣고 선교에 사격했다. 이 시점에서 선교의 해적 한 명이 무력화됐다.

6시 9분 고속단정 3척에 탑승한 UDT/SEAL 공격조 제2팀이 선미 진입을 시작해 15분에는 2개 공격조 15명 모두가 등반에 성공한다. UDT/SEAL 대원들은 4층 선교로 통하는 계단에서 해적 한 명과 조우, 즉각 사살했다. 6시 30분 드디어 UDT/SEAL 팀이 섬광탄을 이용해 선교를 완전 장악했다.

이때 석해균 선장은 조타실에서 해적선과 조우를 막고 구출작전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소말리아 영해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배를 느린 속력으로 지그재그로 돌리다 복부에 해적의 총격을 받았다. 선교를 장악한 UDT/SEAL 대원들은 삼호 주얼리 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 팀이 데크하우스 격실들을, 다른 한 팀이 기관실을 맡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해적 4명을 추가적으로 쓰러뜨렸으며 6시 35분 선장실 근처에서 해적 두목도 사살됐다. 6시 45분 선교에 풀려난 선원 13명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점령되고 저격수 이외에 일시 사격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 사이 공격조 1개 팀이 부상이 심한 석해균 선장을 최영함으로 응급이송했고 7시 57분 UDT/SEAL 공격조 1개 팀이 다시 삼호 쥬얼리호에 복귀하면서 해적에 대한 마지막 소탕작전이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던 4명의 해적 중 2명이 사살되자 남은 2명이 항복하면서 총 4번의 총격전과 5시간에 걸친 작전은 끝났다.

2.3.2. 작전 직후

작전 성공 직후 대국민 브리핑을 하는 이명박 대통령

삼호 주얼리 호 석해균 선장이 해적의 총을 복부와 무릎 등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석해균 선장을 비롯하여 부상자는 응급치료 뒤 미 해군의 SH-60 헬기를 이용하여 오만 병원으로 후송됐다.

석해균 선장은 출혈이 많아 22일 오후 해군 장병 3명으로부터 급히 혈소판 수혈을 받았다. 석해균 선장은 복부에 AK 소총의 7.62mm 총탄을 5발 맞았다. 해적이 UDT/SEAL 대원들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1발을 쐈고 이를 목격한 선원을 잡으려다 실패로 돌아가자 1발을 더 쐈다. 당시에는 생명에 별 지장이 없다고 발표되었지만 얼마 안 가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상자 외에 다른 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총 21명의 선원들에 대한 검진 결과 건강 상태가 대체로 양호한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중 대부분은 오만에서 항공기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삼호 주얼리 호는 석해균 선장이 시간을 끌기 위해 엔진오일에 물을 탄 결과 선체에 이상이 생겨 오만으로 향했다. 선원들은 2011년 2월 2일 귀국했으며 이후 피해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2.4. 석해균 선장의 용태

오만 대학병원에서 1차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위중한 상태에 빠졌고 이에 대한민국에서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이국종 교수팀이 현지로 급파되었다.[19] 이국종 교수가 직접 서술한 바에 따르면 석해균 선장은 이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었으므로 한국 의료진이 가더라도 실패의 부담이 매우 컸고 병원 내에서도 이 교수가 오만행을 결정하는 바람에 병원 윗선에서 불같이 화를 쏟아내는 등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국종 교수는 오만에 도착하여 2차 응급수술을 집도했으나 석해균 선장의 용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으로 응급 이송하여 근치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문제는 석해균 선장이 생사가 경각에 달린 환자였으므로 일반 여객기나 군용기로는 이송이 불가능하여 전문적 의료장비를 갖춘 ' 에어 앰뷸런스'를 이용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국종 교수팀의 김지영 코디네이터[20]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독일의 에어 앰뷸런스 회사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으나 한국의 정부 부처들이 미적미적하면서 결정을 미루는 사이 이 에어 앰뷸런스는 다른 환자 이송을 위해 떠나버렸다. 이 교수 팀이 급히 스위스의 에어 앰뷸런스 회사 '레가(Rega)'와 접촉하여 비행기를 섭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회사도 계약금을 바로 입금하든가 아니면 정부 차원의 지급보증을 요구했다. 석해균 선장의 치료를 위해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교수는 어떤 정부 부처도 확답을 주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계약서에 지급보증 서명을 해서 보내버리기로 결심했다. 이 때 에어 앰뷸런스 총 이용대금은 $380,000, 한화 4억 원이 훌쩍 넘는 거액이었다. 안 그래도 병원 내에서 눈총을 받던 와중인데 일이 잘못 돌아갔을 경우 이국종 교수가 개인 재산에서 다 물어내고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 되는 것이고, 환자가 사망이라도 하면 단기적으론 여론 때문에 못 하겠지만 장기적으론 병원에서 잘릴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김지영 코디네이터가 교수님 미쳤냐며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으나, 이국종 교수는 기어이 팩스를 다시 받아서 서명을 보냈고, 잠시 뒤 이 사실을 안 김지영 코디네이터는 얘기를 듣다 말고 그냥 방을 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비용은 내가 낼 테니 지금 당장!!" 의 일화의 전말이다.[21]
파일:28254899136_a17a15e00e_b.jpg
스위스 Rega 사의 봉바르디에 챌린저 604 에어 앰뷸런스. 석해균 선장을 국내 이송한 그 기종이다.

이 때 에어 앰뷸런스라는 개념이 주목을 받고 그에 관한 관련 인프라와 인력을 조성 및 육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조성된 바 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잠시 논의되다가 사라졌다. 2023년이 되어서야 '플라잉닥터스' 소속의 에어 앰뷸런스가 운항을 준비 중이다.

이국종 교수와 중증외상센터 정책 분야에서 협조하던 당시 민주당 허윤정 전문위원[22]의 중재와 도움으로 청와대가 각 부처 조율에 나서면서 국토교통부가[23] 아주대학교 병원과 가까운 성남공항을 개방하는 등 준비 끝에 마침내 석해균 선장은 한국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의 교통통제하에 앰뷸런스로 20여분만에 아주대학교 병원에 이송된 석선장은 이국종 교수 집도 하에 대수술을 받아 마침내 생명을 되찾았다. 2011년 2월 3일 오전 10시 의식을 회복한 석해균 선장은 이후 상태가 악화와 호전을 오갔지만 천천히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2011년 3월 5일 이명박 대통령은 아주대학병원을 방문하며 석해균 선장이 걸어나와야 아덴만 여명 작전이 끝난다고 위로를 보냈다. 석해균 선장은 2011년 11월 4일 퇴원하였다.

2.5. 무공 훈·포장, 표창 수상자[24]

2011년 5월 24일 국무회의에서 아덴만 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해군 대위 김규환 등 25명의 무공 훈·포장 수여를 의결했다. 같은 달 30일, 청해부대 6진 장병은 청와대에 초청되어 오찬과 함께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포장을 받았다. 2012년 1월 19일 아덴만 여명 작전 1주년 기념을 위해 해군 작전사령부에서 전적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아래 명단의 계급은 2011년 당시 계급이다.
  1. 무공훈장(12명)
    • 을지무공훈장 1명 : 대위 김규환[25]
    • 충무무공훈장 1명 : 대령 조영주
    • 화랑무공훈장 6명 : 중위 양지웅, 원사 안승호, 상사 김정호, 중사 김평민, 중사 강병주, 하사 배광영
    • 인헌무공훈장 4명 : 소령 강태열, 상사 김광수, 중사 김덕우, 중사 박세창
  2. 무공포장(13명)
    소령 안병주(부상), 대위 백창훈, 원사 김신석, 원사 조규명, 상사 최창근, 중사, 김종욱
    중사 장원진, 중사 박대우, 하사 박상준, 하사 강준(부상), 하사 안민섭
  3. 표창(120명)
    • 대통령 표창 : 중장 황기철 등 11명
    • 국무총리 표창 : 대령 박기경 등 14명
    • 국방부장관 표창 : 준장 이범림 등 38명
    • 합참의장 표창 : 중령 신상렬 등 57명
  4. 아덴만 여명작전 주요 지휘관
    • 작전사령관 : 중장 황기철(해사 32기)
    • 청해부대장 : 대령 조영주(해사 40기)
    • 검문검색대장 : 소령 안병주(해학군 39기)
    • 공격팀장 : 대위 김규환(해사 57기)
    • 항공대장 : 소령 강태열

3. 이후

3.1. 시신 처리 및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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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된 해적 5명
사진 왼쪽부터 마호메드 아라이, 압둘라 알리, 아부카드 애맨 알리, 압둘라 세룸, 아울 브랄라트[26]

해적 13명 중 두목과 부두목을 비롯해 8명이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되었다. 사살된 해적들의 시신 처리 문제는 오만 주재 소말리아 대사관과 협의가 지연되면서 수장하는 방법도 고려되었다가 오만을 거쳐 소말리아로 인계하기로 결정되었다.[27]

수사 과정에서 해적들의 신원을 파악했으며 생포된 해적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나이는 모두 당시 기준)[28]
  • 마호메드 아라이(Mahomed Arai): 23세. 어부. 해상에서 물고기를 잡아 식량을 조달하는 담당이었다. 선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석해균 선장을 쏜 해적으로 유력시되며 인질들을 험하게 다루어서 좋지 않은 진술이 있었다.[29] 해적들 증언에도 조타실에서 내려와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니 분명하다.
  • 압둘라 알리(Ali Abdullah): 21세. 전직 군인. 아라이와 함께 해군의 2차 공격 때 석해균 선장, 김두찬, 정상현, 손재호 등을 인간 방패로 내세웠다.
  • 아부카드 애맨 알리(Ali Abukad-Aeman): 21세. 전직 군인. 전직 군인 출신인 2명은 무기류 공급, 총기사용 훈련을 맡았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7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한다.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는 차라리 가족들도 다 같이 교도소에 데려와서 살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Abdulahi Husseen Maxamuud): 예명 압둘라 세륨(Serum Abdullah). 21세. 요리사. 해적들과 인질의 식사 담당으로 다른 해적과 달리 선원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친절하게 대해 인질들 쪽에서도 좋은 소리가 나왔으며 유일하게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 아울 브랄렛(Brallat Aul): 19세. 버스 운전 기사. 원래는 학생이였으나 중간에 때려치우고 버스 운전 기사를 했다. 해적이 된 것은 자신이 몰던 버스가 고장나는 바람에 수리비를 마련하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해군의 1차 기습 때 기관총을 쏴서 해군 특전요원들에게 상해를 입힌 장본인이다. 유일한 10대에 학생 신분이었고 영어에도 꽤 능통하다고 하는데 어느새 한국어도 배웠는지 "판사님 앞으로 두 번 다시 해적질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꼭 귀화하고 싶다고 강하게 읍소했다.

해적 5명은 최영함에 감금된 뒤 아랍 에미리트 왕실 전용기 편으로 석해균 선장을 오만의 병원에서 한국으로 후송할 때 같이 압송되었다.[30] 잡혀온 해적들은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국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처벌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UN해양법협약 제105조 "공해상에서 해적선을 나포하고 해적을 체포할 수 있으며 해당 국가의 법원에서 형벌을 결정할 수 있다."에 따라서 대한민국으로 데려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공해상에서 외국인 해적을 붙잡아 와서 재판한 것은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법무부의 검토에 따르면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고 한다. #

대한민국 국내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경우 해상강도죄로 10년 이상의 무거운 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부산지방검찰청 해상강도살인미수· 강도살인미수·해상강도상해· 강도상해·특수 공무집행방해치상·선박 및 해상구조물에 대한 위해행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으며 해적 5인방 중에서 요리사 압둘라 세륨만 모든 혐의를 인정하여 일반재판을 받고 나머지 4명은 국민참여재판을 요청하여 배심원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52303140005100_P2.jpg

검찰은 마호메트 아라이에게 무기징역, 나머지에게는 13년형 및 15년형을 구형했으며 2011년 5월 28일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문(2011고합93) 1심 결과에 불복하여 이루어진 2심 및 대법원 판결에서 압둘라 세륨은 속죄를 사유로 징역 12년으로 감형됐지만 나머지는 항소기각되었다. 2심 판결문(2011노349) 3심 판결문(2011도12927)
  • 마호메드 아라이: 무기징역(2031년 이후 가석방 가능)
  • 압둘라 알리: 징역 13년 (2024년 5월 28일 출소 예정)
  • 아부카드 애맨 알리: 징역 13년 (위와 동일)
  •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압둘라 세륨): 징역 15년 → 12년 (2023년 5월 28일 출소 이후 외국인 보호소에서 임시 구금 중)
  • 아울 브랄렛: 징역 15년 (2026년 5월 28일 출소 예정)

한편 형사소송법적으로는 체포 과정이 쟁점이 되었다. 일단 대한민국 해군은 사법경찰관도 검사도 아니고 사법경찰관리에 준하는 권한이 법적으로 부여[31]된 사람들도 아니다. 형사소송법 213조 1항에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 아닌 자가 현행범인을 체포할 때에는 즉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에게 인도하여여 한다는' 조문이 있는데, 해적들은 이역만리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신병이 인도되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 것이다. 이 문제는 대법원이 대판 2011도12927 판결을 통해 '즉시'는 '정당한 이유없이 인도를 지연하거나 체포를 계속하는 등으로 불필요한 지체를 함이 없이'라는 뜻으로, 체포된 현행범인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기한 48시간의 기산점은 '검사 등이 현행범을 인도받은 때'로 보고 해군의 체포와 검사의 기소라는 절차 면에서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던 것으로 정리되었다.

3.2. 소말리어 통역 문제

소말리아인 해적들이 무학자들이라 능력이 떨어져 정식 재판 중에는 고급 언어 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정식 재판에는 호주에 살던 선교사를 불러서 통역관으로 임명하였다. 문제는 한국어-영어-소말리어 통역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데다 소말리어 통역사가 ' 구속적부심사'나 '특신상태[32]' 같은 복잡한 법률 용어를 생전 처음 들어보기도 하고 그걸 소말리어로 통역할 능력도 안 됐다.

한편 소말리아 해적들을 수용한 부산구치소도 통역이 필요했는데 따로 통역을 구하지 않고 그냥 구치소장이 담당 교도관에게 소말리어 배워서 통역하라고 지시하여 해결하였다(...) 이로 인해 부산구치소 교도관들은 인터넷으로 외국의 소말리어 사전을 구입해서 독학하여 소말리어를 배웠다. 이후 국민참여재판이 열려 교도관들이 소말리아 해적들을 데리고 재판장으로 호송해갔는데 그 소말리어 통역관이 재판장에 지각해서 안 왔다. 그러자 교도관들 중 1명이 해적들에게 "재판이 지연되고 있으니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라"라고 말하자 해적들이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교도관이 소말리어로 해적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재판 때 소말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해서 소말리어를 할 줄 안다던 호주인이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법률용어도 몰라서 버벅댔지만 이전까지 소말리아가 어디인지도 몰랐던 박흥열 교도관(8급)은 재판장의 한국말을 직통으로 해적들에게 소말리어로 통역 가능했다.[33] 그러자 지각한 정식 통역관에게 빡친 재판장은 그를 해임하고 박흥열 교도관에게 즉석에서 부탁하여 차후 재판까지 계속 통역을 맡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1심이 끝난 후 해적들이 항소하여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에서 새로 재판받게 되었는데 지난번에 호주에 살던 선교사 때문에 고생하여 이번에는 서울에서 통역관을 구했다. 그런데 첫 재판부터 통역관이 KTX를 놓쳐 지각한다고 연락이 왔다. 이에 최인석 부장판사의 요청에 의해 호주인 선교사고 서울사는 통역관이고 다 때려치우고 처음부터 교도관이 대신 통역하게 하였다. ”해적들과 상담하며 소말리아어 익혔죠"

그런데 여기서 작은 반전이 있다. 처음 부산구치소장에게 소말리어를 배워서 통역하라고 지시받은 사람은 박흥열 교도관이 아니었다. 박흥열 교도관은 "정말 고수는 따로 있는데 저만 주목받아서 죄송스럽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고수 교도관의 업무는 일자무식인 해적들에게 소말리어 글자( 라틴 문자)를 가르쳐 주는 일이라고 한다. 잠깐이지만 박흥열 교도관의 유창한 소말리어를 볼 수 있다. 장면은 4년 만에 석해균 선장과 대면한 아라이다.

3.3. 수감 생활

소말리아에 비하자면 국제기준에 맞는 인권을 존중하는 한국의 외국인 교도소는 너무나 시설이 좋기 때문에[34] 아이러니하게도 해적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호텔이나 다름없다. 해적 중 한 명인 압둘라 세륨은 생활에 잘 적응되고 환경이 좋다 보니 나온 말이라고 했다.[35][36]

2012년 11월 24일 중앙일보에서 이들이 갇힌 대전교도소에 취재하러 갔다. 이들은 교도소 측과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한국어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대우에는 만족한 듯하다. 무함마드 아라이는 몸무게가 10kg이나 늘었고 아울 브랄렛은 "출소하면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수감된 해적들은 아예 대놓고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대한민국의 외국인 수형자는 대전과 천안외국인교도소에 반반씩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해적들도 반은 천안에 있다. 이들 해적들은 모두 교도소 내 공장에 출석하면서 각자 일하고 있는데 공장에 무슬림 수감자들이 다수 있어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수감 4년째인 2014년 1월에도 중앙일보에서 취재하러 갔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소말리아가 얼마나 지옥 같은 환경인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수감된 해적들은 소말리아의 평범한 사회인의 생활보다 대한민국 교도소 수감자가 훨씬 풍족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했으며 객관적으로도 그렇다.

2015년 1월에는 석해균 선장이 대전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마호메드 아라이와 면회하였다. 포옹과 악수를 나누었고, 아라이는 "가난 때문에 해적을 시작했고 그때는 그게 잘못된지 몰랐으며 해적질 한 것이 죄송하다. 석 선장을 쏘려고 하지 않았고 많이 다쳤다고 해 많이 놀랐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성실히 수감 생활을 하면 감형될 수도 있다는 석해균 선장의 말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영상 석해균 선장은 "(자신을 납치한 해적들을) 이제 용서하게 됐다.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그렇다."며 "나는 해적들이 대한민국을 돈줄로 생각하면서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해적도 동료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선장인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기로 했다고 발언했다. 기사 석해균 선장도 사건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남아 있었는데 아라이와 만나면서 그런 감정들이 많이 씻겨 나갔다고 했다.

3.4. 금미 305호

생포한 해적들을 얼마 전에 납치된 금미 305호의 선원들과 교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헌데 해적들이 워낙에 여러 세력으로 갈라져 있어서 종종 해적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울 정도다 보니 금미 305호를 납치한 해적들이 당시 소탕된 해적들과 같은 집단이라고 볼 만한 근거가 별로 없다. 그리고 금미 305호는 결국 해적측에서 자진 석방하는 식으로 풀려났다. 인질이 살아 있어야 하고 때로는 붙잡은 금미 305호를 모선으로 이용해 해적질에 나서기도 했으니 기름과 식료품 값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몸값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아덴만 여명 작전도 벌어지고 했으니 금미 305호도 워낙 낡아서 모선으로 쓰기에도 부적합했고 결국 그동안의 식비와 기름값만 받고 풀어줬다고 한다. 덧붙여서 인질의 대부분은 같은 무슬림인 케냐 선원들이라 이 부분도 작용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다만 이슬람권 국가들도 해군을 보내 해적들을 소탕하고 다른 아랍권 및 동남아 이슬람권 국가 국적 배들도 납치되는 상황에서 꼭 들어맞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금미 305호의 기관장이 현지에서 케냐 여성과 성매매를 하고 화대 지급을 거부했다가 몸싸움이 벌어진 끝에 케냐 호텔에서 추락사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3.5. 석해균 선장에게 맞은 총알 관련 논란

석해균 선장의 몸에서 나온 탄환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고 결국 그 중 하나는 아군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곳곳에 총알이 날아다니던 상황이었던 만큼 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게 대세지만 책임 추궁 차원이 아닌 작전의 평가와 보완 차원에서도 진상 조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도 대두되었다.

그리고 석해균 선장의 몸에서 발견된 AK-47 소총탄 1발도 조준탄이 아닌 튕겨져 맞은 유탄(流彈)[37]으로 분석된다는 기사도 나왔다.( 수사본부 "해적 총알 1발도 튕겨져 맞은 것") 물론 그렇다고 해적들의 죄가 감해진다거나 정상 참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해적이 석 선장에게 총을 난사했다는 그동안의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도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구출작전의 엠바고조차 지키지 않은 미디어오늘의 보도라 타 언론에 의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거기에 선원, 해적, 도합 6명의 증인도 있었으니... 검찰 측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후술하다시피 해적들의 사격으로 인한 총상은 유탄이 아닌 직접적인 사격으로 밝혀졌다.

위 보도와는 달리 오히려 아군의 탄이 유탄으로 예상된다는 보도가 있다. 그리고 아군의 탄이 유탄이라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일단 총알 4발 중 AK-47 소총탄 1발, 총격으로 부서진 선박 파편 하나 그리고 권총탄 1발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1발은 현지에서 분실했다. 후술할 내용에 따르면 그 분실된 총알은 사실 총알이 아니었고 선박 내부의 파편이었다고 한다. 사실 총알이 체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군과 정부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거기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물론 '석해균 선장이 있던 자리에서 교전은 없었다', '절대 UDT/SEAL 대원 총에 맞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까지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국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가령 경찰관이 강도를 제압하기 위해 적법절차에 따라 권총을 발사하였는데 우연히 인근의 무고한 시민이 총알에 맞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때 시민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근거가 없다. 이것은 행정법 교수들을 괴롭히는 문제다.

그런데 정작 석해균 선장을 포함한 선원 가족들은 오히려 UDT/SEAL 대원들에게 감사를 표명했다. 과거에 군사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인질 구출 작전에서 인질범들의 공격만이 아니라 교전에 휘말려드는 등 성공적인 작전이라도 인질의 30% 가량은 피해를 입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근 30여 년간의 인질 구출 작전 대부분이 점점 정교해지면서 인질의 희생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았을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 재판에서 이국종 교수의 증언과 수사결과가 나왔다. 결론은 해적들은 직접 사격으로 쏜 게 맞았으며 석 선장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해군의 탄환은 다른 곳에 맞고 튕겨나온 유탄이라 근육층을 뚫지 못하고 가벼운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었다.[38]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 재판에서는 해군의 탄들은 유탄이며 해적들이 사격한 탄들은 직접사격에 의한 총상으로 판명되었다. 해적들의 총알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발사됐으며 당시 석 선장은 몸을 피하면서 피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석 선장의 주치의인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가 25일 오후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린 해적 재판에서 증언했다. 이 교수의 이 같은 증언은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가 엎드려 있는 석 선장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상당히 뒷받침했다. 반면 석 선장의 오른쪽 엉덩이 위쪽과 오른쪽 무릎 위쪽에서 각각 발견된 해군의 유탄에 대해서 이 교수는 "직사화기에서 발사된 총알이 근육층을 뚫지 못했다는 것은 직사(직선으로 발사)된 것이 아니라 어디에 맞고 튄 유탄으로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고 밝혔다. 분실된 총알 한발에 대해서는 "석 선장의 오른쪽 하복부에서 나왔으나 오만 현지에서 분실한 것은 탄환과 다른 은색이었고, 얇은 것으로 미뤄 철판 같은 게 튀어서 구부러진 것처럼 보였으며 탄환이라기보다는 파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오만 현지에서 빼냈던 것이 처음부터 총알이 아닌 파편이었다는 뜻이다.

결론으로는 총상을 분석해 보았을 때 해적들의 총알로 입은 총상은 직접적인 사격으로 인한 총상, 대장과 간일부를 손상하는 치명상과 뼈가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상처를 입혔고 해군의 유탄들은 애초에 오조준으로 인한 직접사격이 아닌 어딘가에서 튕겨나서 맞은 도비탄이기 때문에 근육층조차 뚫지 못하고 몸속에 박힌 비교적 가벼운 상처였다. 재판의 자료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해군의 총상은 엉덩이 쪽과 다리 쪽에 있었고 부딪혀서 튕겨나간 유탄이 근육층을 뚫지 못하고 발견됐지만 해적들의 총상은 몸 중심부에 사격했고 관통상에 장기를 손상시키고 뼈를 돌출시켰다. 눈먼 총알인 유탄과 직접적으로 사살하기 위해 사격한 총알의 차이다.[39]

3.6. 석해균 선장의 치료비 문제

석해균 선장이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약 2억 원 정도의 치료비가 발생했는데 이 중 국민건강보험 측에서 지불한 약 8,800만 원 정도를 제외한 액수를 미지급하였다. 치료비를 내야 할 주체는 본래 삼호해운이었지만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결국 파산하면서 치료비를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2015년 2월 아주대병원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대우학원은 치료비를 받기 어렵다고 보고 이를 회계상 손실[40]처리했다. 대우학원의 추호석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정부에서 조치를 해줄 수 없다면 추후 다른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관련 기사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부가 석 선장을 영웅으로 추켜세울 땐 언제고 정작 치료비 문제는 뒷짐지고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일었다. 6년이 지난 후 정부에서 치료비의 대납을 검토하기로 했다.

2017년 12월 26일 이낙연 국무총리의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석 선장을 치료한 의료 기관이 받지 못한 치료비를 일반예비비에서 지출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대통령이 바뀌고 나서야 완납한 셈이다.

3.7. 제미니호 피랍사건

2011년 4월 30일 케냐로 이동하던 싱가포르 선적의 제미니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들은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사살당한 8명에 대한 보상과 체포된 해적의 석방을 요구했다. KBS는 "사촌 중 한 명이 대한민국 특공대로부터 살해됐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없다면 선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해적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 선원 4명이 총 582일 동안 납치되었고 이 기록은 역대 최장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행히 이들은 2012년 12월 1일 석방되었다.

4. 반응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군 당국에게는 이 사건으로부터 1년 전의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으로 크게 실추되었던 국내외적인 신뢰를 회복하고 사기를 고양하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 측 사망자가 없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다. 특히 당사자인 해군은 영토에서 1만km 넘게 떨어진 아프리카 해역에서 피랍된 선박 구조에 성공하면서 천안함 피격 사건 직후 위축되었던 대양해군 건설의 효용성을 부각시켰고 이후 이지스함 추가 건조와 대형화된 차기 독도함 등의 후속 전력증강에도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댓글을 어느 정도 선별한다는 점은 있지만 당연히 한국이 잘했다는 주장이 주류였다. 미국 야후만 해도 순식간에 16,000개의 댓글이 달렸고 대부분이 한국을 잘했다고 평하고 부정하는 댓글들에는 집단 린치를 가했다. 작전이 실패한다면 이명박 정부에 엄청난 비난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군부만이 아니라 청와대 쪽에서도 나름의 큰 각오를 하고 결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전이 성공하긴 했어도 정치권에서는 정치적 견제 등을 이유로 말이 많았다.

작전 성공 이후 업계에서는 해적과 돈을 주고 협상하는 것을 계속할 수는 없고 타협하지 않는 선례를 만든 점을 크게 환영했다. 일부 관계자는 해적의 보복을 우려하지만 성공적인 구출 작전이 된 점을 감안하면 반대로 해적들이 한국 선박의 납치를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41]

한겨레는 이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해적들의 인명피해 적지 않아'라는 기사인데 간추리면 해적들이 인명피해가 발생할 경우 인질무사주의를 포기하고 인질에게 상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으니 예방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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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나아가 2011년 1월 31일 박노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해적”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붕괴된 국가가 더 이상 외국 어선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게 된 어장들을 빼앗겨 생계 곤란에 빠진 해안지구의 어민들이다. 이들의 인질 범죄를 당연히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 문제는 대다수 국민들은 해적들의 죽음에 기뻐한다기보다는 인질의 구출에 기뻐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42] 이는 도덕성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인식과 관계의 문제다. 우리가 평소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던 해적이 몇 죽었다고 한들 그것이 어떤 기쁨이나 슬픔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인질들은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무고한 일반인, 거기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적들은 사정과 동기야 어쨌건 무고한 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고 이 사건의 인질이 된 선원들은 그저 생업에 종사하다가 졸지에 생사의 기로에 서서 끔찍한 일을 겪게 된 피해자다. 그러니 해적들의 죽음에 대해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다. 상식적으로 저 배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었을 선원들이 아닌 그들을 납치한 해적들에게 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다 저 기사의 내용은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자신의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해적들을 옹호하는 칼럼이 올라온 것을 보고 어떠한 감정이 생길지는 불보듯 뻔하며 작금의 상황에서 해적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게끔 해적 문제를 해결할 '실현 가능하면서 이상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권 반응을 모은 기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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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작전을 계기로 다시 해군 헬기 떡밥이 나왔다. 링스로는 대규모 인원을 나를 수 없어서 위험하게 사다리를 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더 큰 헬기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YTN에서 나왔다. 실제로 K-6 기관총을 장착하는 공간도 모자라서 대잠 장치들도 모두 제거했다. 조종사 2명과 기관총사수등을 제외하면 고작 1~2명이 더 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애초부터 헬기를 통한 강습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호 주얼리호가 1만톤급이고 삼호 드림호와 같은 초대형 상선은 30만톤을 윗돈다. 해적들도 사다리를 통해 피랍하기 때문에 이런 초대형 상선들은 대개 잘 피랍되지 않는다. 하지만 해적들은 시리우스 스타호(31만톤급) 같은 덩치 큰 배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더 큰 배가 납치되었을 때 사다리를 통한 선상진입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이 일을 핑계삼아서 한국인을 상대로 보복을 감행하겠다는 해적들이 나왔다. 사실 해적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저런 엄포가 위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더 이상 충돌을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해적의 목적은 국가를 상대로 배짱을 튀기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돈과 이권을 챙기는 것이니까 고분고분 몸값을 갖다 바치는 나라를 상대로 해적질을 하는 게 더 이득인 것이 당연하다. 당장 세계 최상위권 강대국이면서 테러에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미국이나 러시아를 상대로 저런 일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EU 해군에서 이 작전에 대해 비슷한 우려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고 소말리아 해적들에 당한 나라들의 대부분이 무력 대응보다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 협박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도 처음부터 무력대응을 한 것은 아니다. 삼호드림호 피랍사건이 터졌을 때 해적들에게 한국 정부가 협상을 위해 지급한 금액은 언론사마다 다르지만 대략 950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해적들의 목적은 결국 납치한 배를 풀어주는 대가로 거액의 협상금을 받아내는 한탕주의인데 한국 정부가 지급한 해당 금액은 상당한 거금이고 그 결과 한국 선박이 해적들의 주요 타겟이 되는 역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협상이 최고의 정답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삼호쥬얼리호를 납치한 해적들이 선박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것을 듣고 환호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 억류 상태였던 금미 305호의 선원들은 의외로 2011년 2월 9일 오후 9시에 석방되었다. 몸값을 받지 않고 그냥 풀어준 것인데 정확한 이유는 미상이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추측해 볼 때 선장이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몸값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선원들을 먹일 식량이 없어서 억류를 풀어준 것이며 나아가 아덴만 여명 작전에 연관된 해적 단체 간의 알력이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었다. 아마도 이 근거가 현실성을 인정받게 되면 해적들에 대한 강경 대응방침이 보다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하지만 만약 다른 해적에게 인질을 넘겼다면 모두 끔살되는 참극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5. 엠바고 요청과 무시

1차 교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 엠바고를 요청했으나 국방부 기자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부산일보가 독자적으로 떡밥을 물어 보도한 탓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후에 부산일보가 기사를 철회했으나 노컷뉴스 미디어오늘이 부산일보를 인용하여 기사를 지속적으로 쓰면서 문제가 되었다. 덕분에 작전팀의 부상자만 나온 것처럼 전해서 사람들을 낚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미디어오늘 국방부가 엠바고를 요청한 사실까지 기사로 내면서 동시에 나포된 상태에서 군사작전 위험천만, 해적 소탕 군사작전 보도 이상하다 등의 기사를 올려 작전 자체를 위험하게 했다. 해적 사업이 점차 규모가 커지고 경험이 축적되면서 무슨 동네 어부들이 AK 들고 WAAAGH!!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GPS 등의 장비까지 싣고 다니는데다가 해적들은 해외 언론들을 모니터링 하며 작전까지 짠다고 한다. 해적들 중에 한글과 한국어를 아는 자가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미디어오늘 등의 엠바고를 어긴 뉴스가 외신으로 번역되어 퍼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여튼 언론으로서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음은 명백하다.[43] 첨언하자면 해적들은 런던의 범죄조직과 연줄이 닿아 있고 부족장들이 조직을 운용하면서 해외의 호텔에서 돈세탁을 하는 등 체계화된 범죄 조직의 성향을 띠고 있다.

심지어 일부 진보 성향 인터넷 매체에서는 미디어오늘의 실패 소식 보도만을 보고 정권의 실패...이제 북한과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인 이슈로 몰고 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미디어오늘은 작전이 성공한 후에도 자신들이 엠바고를 깨뜨린 행위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이 구출 군사작전 이명박 대통령 작품?, 막후서 진두 지휘 …공격 명령·대국민 발표에 보도통제까지? 같은 기사를 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시아 투데이라는 인터넷 매체도 작전 성공 발표 몇 시간 전부터 네티즌들의 트위터에 단편적으로 올라온 작전 진행을 근거로 기사를 올리면서 엠바고를 깨뜨렸다. 덕분에 아시아 투데이는 국방부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국방부의 전근대적인 언론탄압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려 징징댔다. 덤으로 미디어오늘도 긴급조치 이후 최악의 언론탄압이라며 기사를 써댔다. 또 국방부의 엠바고는 사실을 은폐, 왜곡하기 위한 것이므로 엠바고를 깬 언론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지킨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엠바고는 보도금지가 아닌 단지 보도지연일 뿐이다. 엠바고가 해제되면 바로 기사가 나온다. 보도지연인 엠바고와 달리 (묵시적인) 보도금지는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일각에서는 1차 작전 실패 때문에 국방부의 엠바고는 작전 기밀성 보존이 아닌 작전 실패를 가리기 위한 것(쪽팔림 또는 사기 문제 때문에)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물타기로 아무 말이나 막 해 본 것이다.

기어이 부산일보, 미디어오늘, 아시아투데이는 국방부 상대로 소송까지 걸었다.

6. 군 기밀 유지 부실 논란

해적들에게서 인질들을 구출해냈다는 기쁜 소식의 열기가 어느 정도 식어가면서 군의 홍보에 치중한 무차별적 공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각종 작전 동영상 공개에 의해 작전뿐만 아니라 각종 장비들(특히 무전 장비 등)이 공개되고 일반적으로 특수전력은 얼굴까지 꼼꼼하게 가리는 것이 추세인 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일부 노출되었다. 당장 구글에서 SAS 델타 포스를 검색해 보면 얼굴은 전부 꼼꼼하게 모자이크하거나[44] 방독면과 선글라스로 완전히 가린 사진들이 즐비하다. 이는 전력 노출뿐만 아니라 대원과 그 가족, 주변 인물들의 안전 문제, 특히 보복 테러에 대한 안전 조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얼굴이 드러난 대원은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해당 대원이 이미 언론에 노출된 유명인이라 고의적으로 일부러 유출하는 경우고 두 번째는 이미 전사했거나 전역해서 공개해도 상관없는 경우다. 그런데 얼굴이 드러남은 물론 소속 부대, 실명까지 마구 거론되었다. 과거 국지도발 등의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군과 정치가들의 마구잡이식 발표에 의해 군 기밀이 술술 새어나왔던 일이 다시 벌어질 판이었다.

이게 진짜 잘못인 이유는 따로 있다. 군이 한창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던 금미 305호는 아직도 억류 중이었다. 즉, 홍보를 통해 유출된 군 기밀 때문에 금미 305호의 구출 가능성이 더 흐려졌다는 말이다. 나중에 금미 305호는 안전하게 풀려나긴 했지만 당장의 성과에 환호하기에 바빠서 역시나 대한민국 국민인 금미 305호 선원들의 안전을 경솔하게 생각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결국 국방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의 군 보안 소홀에 관한 질타가 이어졌고 국방장관은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마침내 기무사에서 조사에 나섰다. 최영함의 위성좌표와 헬기의 대응, 미 해군의 협조 등은 유사 작전을 위해 보안을 유지했어야 한다는 게 기무사의 판단이라고 한다.

7. 기타

국방부 제작 다큐멘터리
국방TV 본게임 24회 푸른 바다의 전설. 아덴만 여명작전

해군 관계자는 "검문검색팀장(소령)이 다치자 남은 대원들 사이에선 '반드시 작전을 성공시키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오히려 이것이 남은 대원들의 투지를 불사르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청해부대는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16일 출동 이후 매일 수차례 구출작전을 위한 모의훈련을 벌였다. 부산에 정박한 삼호해운 소속 삼호 주얼리 호와 동일한 선박의 내부 구조를 국내에서 화상으로 전달받아 연습에 활용했다고 하며 대한민국에서는 구출작전에 알아둬야 할 선박의 특징을 면밀히 분석해 청해부대로 보냈다. 이 작전으로부터 1년 전에 일어난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실종 장병을 구조하다가 순직한 한주호 준위가 이 작전에 참가한 UDT/SEAL의 교관이었다고 한다. 한 준위도 청해부대 1진에 최고령 대원으로 합류해 2009년 8월 바하마 선박 노토스스캔 호에 접근하는 해적선 퇴치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이 작전에 사용된 사다리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한겨레에선 작전 성공 직후 찍은 작전에 참가한 UDT/SEAL 대원들의 사진이랑 해군이 공개한 사진이 사실은 2010년 말에 찍은 자료사진이라고 밝히면서 큰 껀수라도 되는 양 대문짝만하게 1면에 올렸다가 욕만 먹었다. 보통 특수부대 등의 사진은 보안 문제로 날짜와 인원을 실제와 다르게 조작해 발표하는 경우가 흔하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단지 정부를 깔 건수 하나 찾았다며 부풀린 것이다.

2019년 1월 이환경 감독이 아덴만 여명 작전을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봉 예정 시기는 2021년 1월쯤이라고 한다. #[45]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문제가 제7회 변호사시험 형사법 선택형에 출제되었다.(문제 36번)

2022년 3월 17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소재로 등장했으며 석해균 선장, 이국종 교수, 김규환 중령[46]의 인터뷰도 공개되었다.

FPS 게임 레인보우 식스 시즈의 오페레이터인 비질은 이 작전에 참여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8. 관련 문서



[1] 배 선체에 있는 자국은 UDT 대원들이 피랍된 선박에 성공적으로 승선하기 위한 엄호 사격의 흔적으로, 사전에 인질들에게 피해가 없는 지역과 탄이 뚫을 수 있는 두께를 파악하여 목표로 삼은 곳이다. [2]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3월 5일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한 석해균 선장의 병실을 병문안 차 찾아가 "(석 선장은) 함대사령관을 해야 될 사람이다. 선장이 걸어 나와야 작전이 끝난다."고 발언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 있으나 여기에 어떤 '군통수권자로서의 작전일정에 관한 명령' 같은 전술적인 의미는 부여되어 있지 않다. 당시 석해균 선장은 수술이 잘 끝나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으며 마호메드 아라이를 비롯한 생포 해적 피의자들이 미결수로 구속되어 있었다. [3] 미 해군 구축함 USS Shoup(DDG-86) 및 항구적 자유 작전에 참가 중인 전투・의료 병력 지원. [4] 오만 왕립 해군 미사일 고속정 파견 및 의료 지원. [5] 구축함으로 해적 탐지 및 작전 지원. [6] 대통령 [7] 국방부 장관 [8] 대장, 합동참모의장 [9] 대장, 해군참모총장 [10] 중장, 해군작전사령관 [11] 대령, 청해부대장. 해군사관학교 40기, 훗날 준장 예편. ( 근황) [12] 장교 36명, 부사관 187명, 수병 73명, 군무원 4명으로 구성되었다. [13] 중기관총 사격을 받자 네 명 모두 배를 버리고 헤엄쳐서 삼호주얼리 호에 복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4] 해적들은 보트 2척과 총 6정, 30발 탄창 6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 작전 직전 미군 P-3C가 선교에 해적 4명, 갑판에 4명, 중갑판에 3명을 감지하고 통보했지만 최영함이 근접하여 적외선 카메라로 확인해 보니 선미는 홋줄을 걸기 위한 비트, 중갑판은 통풍기를 오인한 것이었다. 즉 갑판에 있는 4명이 전부였고 그 중 1명은 수시로 인사를 받는 것으로 보아 두목으로 추정되었다. [16] 선원들이 부산 출신이라 부산 갈매기를 틀어 줘서 해적들이 경고 방송을 못 알아채게 하기 위한 트릭인데 석해균 선장의 말로는 작전 이전에 이미 해적들이 전원을 뽑아놔서 부산 갈매기고 경고 방송이고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한다. [17] 지난 3일 동안 링스 헬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사격해서 해적들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해적들은 인간방패 작전을 써서 한국군 측에선 그들의 대응 패턴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영함의 소병기 근접 사격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해적들이 놀란 것이다. [18] 이 철골 사다리는 한주호 준위가 고안했다. 순직 후에도 국가에 공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 이국종 교수가 펴낸 골든아워 1권에 따르면 당초에는 서울의 모 대형병원 중환자의학 전공팀이 파견된다고 하여 이국종 교수는 현지로 갈 생각을 접었으나 한밤 중에 외교부로부터 그 의료진이 갈 수 없게 되어 이국종 교수팀이 가 줄 수 있겠는가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20] 이국종 교수와 함께 아주대학교 중증외상센터 설립부터 함께 해온 초 베테랑 간호사다. [21] 자세한 경위는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 1권에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국종 교수가 맞닥뜨린 당시 상황은 절체절명의 연속이었다. 한국 의료계의 질시, 정부부처의 무관심과 소극적 협조 등 온갖 상황에 짓눌려야만 하는 이국종 개인의 심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22] 이국종 교수가 여러 차례 '중증외상센터' 정책은 그의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증외상센터 설립과 운영 정책에 공이 큰 사람이다. '골든아워' 책에 허 위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제20대 국회의 종료를 4개월 앞두고 김성수 전 의원의 국무총리비서실장 임명으로 인해 궐위된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받았다. [23] 당시 국토해양부 [24] 수상자는 보훈처 및 언론에서 발표하였기 때문에 군사기밀에 저촉되지 않는다. [25] UDT 1팀장으로 부상 당해 오만으로 후송된 안병주 검문검색대장을 대신하여 작전을 지휘하였다. 2022년 3월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인터뷰에 등장해 현직 중령 계급임이 확인되었다. [26] 범인들이 더운 지역 출신인데다 한국의 겨울에 해당하는 시기에 사건이 발생해서 다들 코트를 입혀 놓은 걸 볼 수 있다. [27] 관련기사(한국경제신문)/ 관련기사(세계일보) [28] 연합뉴스기사 [29] 생포 당시 선원들은 "저놈이 가장 악질이다. 저놈만큼은 여기서 죽이고 가지 왜 살려서 데려가느냐?"고 UDT/SEAL 대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30] 아랍 에미리트 왕실 전용기가 쓰인 까닭은 이명박 대통령의 아이디어로 UAE 무함마드 왕자에게 부탁한 것으로, 왕실기는 대통령 전용기와 마찬가지로 '군용특별기'로 간주돼 민항기나 군수송기가 지켜야 하는 국제규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어서 시간 단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31] 예컨대 국가정보원 직원은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에서 사법경찰관리에 준한다. [32]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의 줄임말. 증거능력이 없는 전문증거 증거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요건으로, 진술내용이나 조서 또는 서류의 작성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용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있는 경우다. [33] 법률용어의 경우 교도관 시험 볼 때 법전을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합격 가능하기 때문에 충분히 알고 있었다. [34] 이전에 네덜란드 해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해적도 난생 처음으로 하루 3끼 식사와 침대에서 잠을 자는 호강을 누리고 "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족까지 데려다가 감옥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35]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는 인터넷과 사회로부터 단절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큰 징계이지만 저 해적들이 여가는 커녕 한 끼 먹기도 힘든 모국에서 인터넷 같은 걸 썼을 리가 없고 소말리아와 같은 막장국가는 언제 상대방에게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개판이라 사회로부터의 격리도 별 장애가 아니었을 것이다. [36] 대한민국의 국적법상 강력범죄자의 귀화나 망명을 불허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에 의하면 전과자라고 모두 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질이 심하고 고의성이 강하면 통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형기가 끝나면 강제추방 형식으로 쫓아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해적들의 모국인 소말리아가 세계에서 악명높은 무법천지라 인도적/윤리적 문제로 인해 실제로 쫓아낼지는 석방까지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난민으로 받아들여줄 가능성도 있긴 하다. 비단 인도적 문제뿐만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 강제추방 명령을 받은 해적들이 막장 상태의 고국인 소말리아로 돌아가는것이 싫어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3끼 꼬박꼬박 먹으면서 건강에 이상 없이 살까지 찐 마당에 다시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활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충격을 받고 교도소 내에서 무슨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교도소를 나오면 바로 강제로 감시받으면서 귀국할 테니 일반 시민에게 해를 저지를 가능성은 없고 교도관들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을 가능성은 낮지만 문제는 같은 시설에 수감된 동료 죄수들이다. 쇼생크 탈출에서도 가석방을 앞둔 무기수와 관련해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37] 유탄발사기의 그 유탄(榴彈)이 아니다. 발음만 같고 한자도 뜻도 전혀 다른 단어다. 인터넷에서 이 두 단어를 혼동하여 잠시 논란이 있었다. 애초에 유탄발사기의 유탄(榴彈)에 사람이 맞으면 시체가 산산조각이 난다. 여기서 말하는 유탄(流彈)은 눈 먼 총알을 의미한다. [38] 기사 제목 '이국종 "석해균 선장, 해적 탄환에 치명상"' [39] 유탄은 다른 곳에 맞고 튕겨나오면서 운동 에너지의 상당량을 손실하기 때문에 직사로 맞는 것에 비교하면 위력 차이가 많이 난다. [40] 돈을 받아낼 기대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사실상 병원 측에서 비용을 대신 부담한 셈이 되는 것이다. [41] 실제로 소말리아 해적은 러시아는 잘 안 건드리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는 해적들이 건드렸다 하면 바로 대기 중이던 해군과 특수부대가 달려들어 해적들을 가차 없이 사살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42] 설사 해적들을 다 사살해서 아덴만에 수장시켰어도 인질 중 사망자가 나왔다면 기뻐하기는 힘들 것이다. [43] 엠바고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에서도 몇 천 명의 생명을 살린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V2 문서 참조. [44] 심지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덮은 뒤에 모자이크를 하기도 한다! [45]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2021년 1월이 지났음에도 아무 소식도 없다. [46] 작전 당시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