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2:19:23

비의

촉한사영
,蜀漢四英,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

蜀漢
촉한의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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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장완 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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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대장군
費禕
비의
시호 <colbgcolor=#fff,#000> 경후(敬侯)
작위 성향후(成鄕侯)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상서령(尙書令) 영 익주자사(領 益州刺史)
(費)
(禕)
문위(文偉)
생몰연도 ?~253년
고향 형주(荊州) 강하군(江夏國) 맹현(鄳縣)
사망지 한수(漢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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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유선)
태자사인(太子舍人)→황문시랑(黃門侍郎)→소신교위(昭信校尉)→행중호군(行中護軍) 편장군(偏將軍)→사마(司馬)→후군사→상서령(尙書令)→겸 대장군(大將軍)→겸 영 익주자사(領 益州刺史) }}}}}}}}}


費禕
(? ~ 253년)

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이며 자는 문위(文偉)로 형주 강하군 맹(鄳)현 사람.

제갈량, 장완의 뒤를 이어 촉한의 실질적 1인자 역할을 하였으며,[1] 여기에 동윤이 추가되어 촉한의 사상(四相) 또는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다. 호방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여러 사람들과 두루 친분이 두터웠으며, 제갈량으로부터 장완과 더불어 직접 탁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또한 촉에서 마지막으로 내정과 군정을 총괄하는 1인자 역할을 겸한 인물이다. 그가 집권했을 때 유선이 친정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암살당한 후 군사 부문의 1인자는 강유, 내정 부문의 1인자는 진지가 된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비씨 집안의 종가라 할 수 있는 비백인[2]에게 위탁되어 성장했다. 더하여 당시 비백인의 고모가 익주목 유장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덕분에 익주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연의에서는 이에 착안하여 유장의 가신으로 있다가 유비에게 투항하는 인물로 소개되지만, 실제 정사 기록에는 유장이 등용했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한 것은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고,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한중왕에 오른 이후로 기록되어 있다. 때마침 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비의는 마침내 익주 땅에 머물게 되었고 여남(汝南)사람인 허숙룡(許叔龍) 및 남군(南郡) 사람인 동윤(董允)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허정(許靖)이 자식을 잃으니[3] 동윤이 비의와 더불어 함께 그 장소(葬所,장지葬地)에 가고자 하였다. 동윤이 부친인 동화(董和)에게 아뢰어 수레를 청하니 동화가 뒤쪽이 열려있는(開後) 녹거(鹿車,수레의 일종으로 사슴 한 마리를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수레)를 보내주었다. 동윤은 수레를 타는 데 난색을 표했으나 비의는 곧장 앞쪽으로 먼저 올라탔다. 장소(喪所)에 도착해보니 제갈량(諸葛亮) 및 여러 귀인(貴人)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탈 수 있는 수레가 매우 화려하니 동윤의 안색은 편안하지 못한 반면 비의는 태연자약하였다. 수레를 몰았던 이가 돌아온 뒤 동화가 그에게 물어 사정이 이와 같았음을 알고는 동윤에게 말했다.
나는 늘 너와 문위(文偉, 비의)의 우열이 아직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후로 내 생각은 분명해졌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촉한 내에서 어느 정도 명성은 갖췄지만, 실질적인 지위를 보면 말단 하급 관리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여러 관리들 중에서 특별히 비의를 지목하여 수레에 나란히 앉도록 하고, 추후 정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약 촉한의 주요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4] 이때 공명에게 자신의 충분한 식견을 보여준 비의는 제갈량의 추천으로 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손권과 접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의 전문이 기록된 것은 아니나, 기록상으로 보면 손권이 이죽거리는 말투로 비의를 자극해 본 모양이다. 제갈량이 남쪽으로부터 막 돌아온 뒤 비의를 소신교위(昭信校尉)로 삼아 오(吳)에 사자로 보냈는데. 손권은 성정이 골계(언변이 좋고 익살스러움)하여 거침없이 남을 조롱하고 제갈각 양도등은 재주가 많고 과감하게 말을 잘하여 비의를 향해 논란(論難,변론과 힐난)이 왕성하게 쏟아졌으나 비의의 언사는 의(義)를 따르며 돈독하고 이치(理)에 의거해 답변하니 끝내 굴복시킬 수 없었다.[5] 비의는 이렇게 그는 이에 일절 동요하는 모습없이 원만하게 논의를 풀어나갔다. 이러한 비의의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은 손권은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군자이오. 예상컨대, 틀림없이 촉왕조의 고관(高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나라에 자주 오지 못할까 걱정이다."[6]라며 비의를 극찬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촉에서 오에 사절을 파견할 공무가 생기면 비의가 그 역할을 맡곤 했다.

2.2. 제갈량의 북벌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참모로서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황제 유선을 위시한 촉한의 조정의 대신들과 제갈량이 주고받던 서찰을 직접 전달하는 역할이나 오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맡았다. 조운이 죽은 지 1년 후인 230년에 조운이 맡던 중호군(中護軍)으로 전임하였다가 뒤에 또 사마(司馬)가 되었다. 231년 이엄 탄핵문에는 비의의 직책이 행중호군 편장군이라고만 되어 있기에 사마는 이후에 받았을 직책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촉한 진영에는 위연 양의의 갈등이란 큰 골칫거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승상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막말을 해가며 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갈량도 이 두 사람이 조정 내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재능을 버리기에는 촉한 내부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형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에 성격 호방한 비의가 나서서 두 사람이 맞부딪히기 시작하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뜯어말리고, 두 사람을 찾아가 다독이는 형태로 갈등을 무마시켜 나갔다. 이러한 비의의 행동은 효과가 있어 두 사람이 자주 다투긴 했어도 별다른 돌출 행동없이 북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연과 양의의 불안한 관계는 제갈량이라는 쿠션이 사라지자 겉잡을 수 없는 사태까지 치닫게 된다. 제갈량이 북벌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촉군의 후퇴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위연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자, 자청하여 위연을 찾아갔다.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찾아온 것으로 위장한 비의는, 위연이 양의에 대한 디스를 퍼붓자, 이에 맞장구치는 형태로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덕분에 촉군은 위연의 돌발행동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고, 위연은 그를 납치구금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기지로 빠져나온 비의는 강유, 왕평, 양의와 함께 제갈량의 시신을 옮기며 촉군 본대를 퇴각시키는 한편 위연의 반란을 조정에 알려 무사히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2.3. 제갈량 사후

본국으로 귀환한 비의는 후군사에 봉해졌고,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장완이 상서령으로 임명되어 촉한 조정의 실무를 승계받았다. 이때 중군사로 임명된 양의가 "어떻게 장완이 승상의 뒤를 잇고, 공이 큰 자신은 한직으로 밀릴 수 있냐"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자, 비의는 그를 직접 찾아가 위로했다. 하지만 양의가 이 자리에서 차라리 그때 위에 투항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며 선을 넘어버리자, 비의는 즉시 이를 유선에게 상주하여 양의를 숙청했다. 이후 양의는 압송 명령이 내려지자 자결하여 생을 마감한다.

이후 뚜렷한 활약은 언급되지 않으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수습될 때까지 내부를 단속하였고, 혹시 모를 위의 군사행동에 대비하는 역할과 함께 장완이 북벌 계획을 수립하는 동안, 그의 뒤에서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35년 대장군이 된 장완이 상서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비의가 그 뒤를 이어 상서령에 임명되어 촉한 제일의 문관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장완은 상용 방면으로의 진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대신 상서령 비의, 중감군 강유와 상의하여 강유를 양주자사로 세워 북벌을 시행케 하고 자신은 그 뒤를 지원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 계혁은 장완의 지병이 심해짐에 따라 시행되지 못하였다.

243년에는 대장군에도 봉해져 한중에 머무르면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등 제갈량-장완을 잇는 명실상부한 촉한 최고의 문무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244년에는 위가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촉을 침공하는 일이 있었다. 흥세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한중 방위를 담당하던 진북장군 왕평이 휘하의 3만 병력을 거느리고 지연작전을 펼치는 동안, 유선의 칙령을 받은 비의가 증원부대를 이끌고 나가 왕평을 지원했다. 비의가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위군이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후퇴를 하려던 참이었기에 그 뒤를 추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구체적인 전개는 해당 문서에 나와 있다. 어쨌거나 이 전공으로 성향후(成鄕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9월, 비의는 성도에 돌아왔고 장완이 지병으로 주직(州職, 주자사 직)을 굳게 사양하자 비의가 또한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하였다.(영領 익주자사) 비의가 국사(國事)를 맡으니 공로와 명망이 대략 장완에 비견되었다.

연희 9년(246년) 여름 6월, 비의가 성도에 돌아왔고 가을에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사농 맹광이 이를 비판하자 비의는 맹광을 보지 못하고 쩔쩔 맸다. 이는 제갈량 시대의 엄격한 법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제갈량은 국정을 맡으면서 유선이 즉위할 때를 빼곤 사면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이후 대사마 장완은 강유를 선봉에, 자신이 백업한다는 북벌 진출 계획을 결국 이루지 못한 채, 246년 11월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상서령 동윤 또한 죽었다. 동윤의 빈자리는 촉군태수 남양사람 여예를 등급을 초월하여 상서령으로 삼았고, 강유를 위장군에 진급시키고 자신은 녹상서사를 겸했다. 또한 대장군으로도 봉해져 한중에 머무르면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등 제갈량-장완을 잇는 명실상부한 촉한 최고의 문무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촉한은 처음에 삼공의 자리를 비워놓고 천하의 현인을 기다렸다. 그 경사(卿士, 고관대작)들은 모두 공훈과 도덕이 현저하였고 모두 훌륭한 인재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로 태상 두경, 위위 진진 사농 맹광은 모두 훌륭한 인재였다. 대장추 허자, 광록대부 내민도 있었다. 태상 광한 사람 담승(鐔承), 광록훈 하동 사람 배준(裴雋)상서 파서 사람 사학(司學), 의양 사람 호박(胡博), 복야 파서 사람 요주, 시중 여남 사람 진지가 더불어 사업을 도왔다.

연희 11년(=248년), 나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장완으로부터 비의에 이르기까지 비록 스스로 몸은 (수도) 바깥에 있었으나 경상형위(慶賞刑威: 포상과 형벌)를 모두 먼저 멀리 (그들에게) 자단(諮斷: 자문하여 판단함)한 연후에 실행하니 그들을 추임(推任: 높이 받들며 신임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뒤에 (연희) 14년(=251년) 여름에 성도(成都)로 돌아왔는데, 성도(成都)의 망기(望氣: 기운을 살펴 길흉을 점침)하는 이가 도읍에 재상(宰相)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한수(漢壽)에 주둔하였다. 250년, 상서령 여예가 죽었다, 이에 시중 진지를 수상서령(守尚書令)으로 삼고 진북장군을 더했다.[7]

강유의 북벌을 컨트롤하였고, 강유가 병사를 요청할 때마다 많은 군사를 내주지 않았다는 한진춘추의 기록이 있다. 이때 강유에게 한 말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승상만 못 하거니와 또한 많이 뒤떨어지오. 승상께서도 중하를 능히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소!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신중하게 사직을 지키느니만 못하오. 공업을 세우는 것은 능력있는 자를 기다려야 할 것이며, 요행을 바라며 일거에 성패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되오. 만약 뜻대로 되지 못한다면 후회해도 다시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진지를 높이 평가하여, 장완과 같은 해 동윤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유선을 보좌하게 하였다. 이후 비의 사후에 진지가 촉한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동윤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던 만큼 진지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바른 말 잘하고 엄격하게 궁안 질서를 바로잡아 환관의 발호를 막았던 동윤과 달리 시세에 영합하는 성격이었던 진지는 군주 듣기 좋은 말만 하고 환관 황호와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황호가 유선 옆 중앙권력에 진출하는 길을 터준 셈이 되어 버렸고, 결국 진지 본인이 사망한 이후엔 황호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촉한 내에 아무도 없게 된다.

2.4. 비의와 북벌

비의가 촉한 조정을 이끄는 동안 전임자 전전임자에 비해 눈에 띌만한 수준으로 북벌이 언급되는 기록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북벌에 소극적인 인물이란 평을 듣는다. 하지만 말년을 보면 비의 자신이 총지휘하는 형태로 대규모 북벌이 계획되고 있었다고 여길 만한 내용이 〈비의전〉에 존재한다.

우선 248년에 비의는 한중으로 진출하여 주둔했고, 휘하 강유에게 1만 남짓의 병력을 주어 제한적인 군사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251년 성도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 다음 해인 252년 후주 유선으로부터 부를 개설하도록 명받았다. 그리고 〈장완전〉을 참고하면, 전임 대장군이자 대사마인 장완 역시 238년에 대장군부를 개설했고, 이때 부서 개설 명령을 내린 유선이 그에게 북벌을 명했다. 또한 253년에 오와 촉의 북벌이 약 3개월 간격으로 연타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함께 〈장억전〉에 나온 기록처럼 비의가 죽자, 촉에서 오의 출병을 말리려 했던 점을 감안하면 오의 태부 제갈각과 함께 촉오동맹이 공동으로 북벌을 추진했을 개연성이 있다. 참고로 비의가 암살당한 한수는 가맹을 개명시킨 이름으로 한중 지역이다. 비의가 죽은 시점이 정월 때의 대연회란 걸 감안한다면 정말로 북벌을 앞두고 한중에서 정월 기념 연회를 하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위서 제왕기에 이 연회에 대해 '촉나라의 대장군 비의가 많은 군사를 인솔하여 위나라 변방을 침범하려는 음모를 세우고, 한수(漢水)를 지나면서 많은 빈객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상고해보면 비의가 과연 북벌에 소극적이기만 한 사람이었는가는 의문이다. 이때 대규모 북벌론을 주장하던 강경파 강유를 달래며 '승상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히하고 능력있는 인재가 나오길 기다리자'라고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말하긴 했으나 이후에 아예 전쟁을 자제하자고 하는 의견과는 달리 비의는 비록 1만의 한계가 있다고 해도 강유나 요화를 통해 끊임없이 위나라 농서지역의 행정력 확보를 방해하고 해당지역 강, 저족과의 연결을 이끌도록 했다. 비의 사후 제기된 북벌반대론과는 달리 비의시대엔 소규모라도 위나라를 끊임없이 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49년 하후패가 귀순하는데 하후패는 위나라 사정에 매우 정통한 인물로 비의 입장에선 본격적인 위나라 정벌에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것이라고 판단했을 공산이 있다. 비의 자신이 언급한 '공업을 세우는 것은 능력있는 자를 기다려야 한다'에 맞는 상황. 하후패 귀순 이후 성도로 돌아가 유선에게 부를 개설하라는 명을 얻어낸것도 이 일환일 수 있다. 또 월수태수 장억이 성도로 돌아가기를 여러 번 요청하는데 장억은 기록에서도 나오듯이 아픈 몸에도 북벌에 나서겠다고 할 정도로 강경한 북벌찬성론자였다. 또 장억이 대장군이 된 비의에게 충고를 하는 부분이 있으며, 강유와 하후패의 귀순 이후 상호 교류 기록이 있다.[8] 북벌에 적극적인 인물들이 비의 주변에서 상호 간 교류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은 아니며 후일 강유의 북벌 전공에 장억과 하후패는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즉 250년대 초반, 비의는 자신과 강유-하후패-장억등 군부 내 북벌 찬성론자들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253년 쯤에 역시 북벌을 준비 중이던 손오의 제갈각과 연계하여 본격적인 북벌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9]

비의는 제갈량 시대에 오와 교섭을 벌이면서 손권에게 그 역량을 인정받았던 외교관이기도 했다. 비의의 관점에서 볼 때, 촉이 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제갈량의 5차 북벌 때처럼 촉오 공동전선을 펴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비의가 집권 시절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북벌만 벌인 것은 당시 동맹인 오나라의 내부사정이 상당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촉오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제갈가문의 제갈각이 손권의 탁고대신이 되어 위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비의와 강유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시사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제갈각이 한창 위와 싸우고 있을 때 비의의 한수 출병 준비는 분명 예사로운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비의가 죽은 후 이런 북벌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줄고 본격적으로 북벌 반대론이 활개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비의 사후 장익은 강유의 적도 출병을 반대했고 요화는 대놓고 강유의 잦은 북벌을 비꼬았으며 진지와 초주는 구국론을 지어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고[10] 제갈첨 동궐은 아예 강유를 익주자사[11]로 두어 외정 대신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북벌을 막고 황호를 견제하려고 했다. 이는 그동안 비의가 억눌러왔던 북벌 반대론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장억이 전사하고 하후패도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자 촉한 군부 내에서 적극적인 북벌을 주장하는 인물은 강유 혼자만 남게 되며 이는 강유의 촉한 정계 내 운신폭을 줄이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비의의 내정우선론과 강유 1만명 병사 한정,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위나라 견제를 시도한 점은 이런 북벌 반대론이 내부적으로 본격적으로 나오지 못하는 일종의 회유책을 씀과 동시에 기회가 되면 북벌을 시도할 준비였다는 추측도 가능해 보이는 부분이다.

비의의 북벌 시도가 아쉬운 부분은 제갈량 시절처럼 촉의 문무 1인자가 대규모 북벌을 실행하며 북벌에 많은 부분을 지원할 수 있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비의가 주도하는 대규모 북벌이었다면 이후 휘하 실무자인 강유에게도 힘을 실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한편으론 강유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의 자신도 흥세 전투 등에서 상당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준 바가 있었고. 또 내정에 있어서 황호 등이 날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선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또 비의의 업무 스타일이 다른 사영들의 업무 스타일과는 달리 과로를 상당히 지양하는 타입이었던걸 생각하면 좀 더 오랜 기간 집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2.5. 최후

253년 1월 1일 비의는 한수(漢壽)에서 연회를 열던 도중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미처 몸을 방어하지 못하고 위나라 출신 항장 곽순에게 살해당했다. 곽순의 원래 의도는 촉에 항복한 뒤에 후주 유선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선 주변의 무사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아 꿩 대신 닭으로 대장군인 비의를 목표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비의가 지절로서 술을 따라 권하는데 곽순이 말채찍 안에 숨긴 작은 칼로 비의를 찔렀고 비의는 며칠 후 죽었다고 하는 한표전의 기록이 있다. 물론 곽순도 체포되어 얼마 못 가 처형되었다. 위에서는 이와 같은 뜻밖의 낭보를 듣고 곽순에게 작위에 시호까지 내렸다. 장억전과 원희지의 한표전에 따르면 장억은 비의가 항상 위의 항장을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절을 부여 받은 권력이 있었으나 자객에게 살해된 잠팽 내흡의 예를 들어 존경받는 지위와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으니 몸조심하라 경고했는데 결국 이와 같이 되고 말았다.

아들인 비승(費承)이 후사를 이었고 황문시랑(黃門侍郎)을 지냈다. 비승의 동생인 비공(費恭)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비공(費恭)은 상서랑(尙書郎)을 지내고 당대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나 일찍 죽었다. 비의의 장녀는 태자 유선(劉璿)의 배필이 되어 태자비가 되었다. 비의는 본성이 겸손하고 검소하여 집에 재물을 쌓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모두 포의(布衣)을 입히고 소식(素食)하도록 하며 출입할 때에 수레와 말이 뒤따르지 못하게 하니 평범한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의별전)

2.6. 일화

실제 정사에서 남은 기록을 보면 업무 처리 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자치통감에는 일을 하면서도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고, 친한 사람들과 담소와 식사를 하면서도 일에 빈틈이 없고 오히려 남들보다 처리속도가 우월했다고 한다. 동윤이 비의의 후임으로 상서령에 임명되어 업무를 이어받자, 한 달 만에 업무가 꼬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사람의 재주와 힘이 차이가 나는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좇아갈 바가 아니다." 라고 한탄하며 이에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을 하루종일 하였으나 오히려 쉴 틈이 없었다[12]는 일화가 있다.[13][14]
  • 이 일화는 두 사람의 능력 차이를 비교하는 일화가 아니라, 상급자에게 필요한 업무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도 있다. 상서령이 지금으로 치면 행정부 수반에 해당하는 위치로 당연히 업무량이 무시무시한 자리다. 호방하고 낙천적인 비의는 윗자리에서 대강 훑으며 아랫 사람들 이용하는 식으로 당연한 듯이 업무를 수행했지만, 반대로 엄격하고 매사에 철저한 동윤은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검토하다 업무가 지체된 것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쉴틈도 없이 일하다가 겨우 1년 만에 사망했는데 과로사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장교의 4가지 유형으로 보자면 비의는 최고 관리자에 적합한 똑똑하고 게으른 유형, 동윤은 참모에 적합한 똑똑하고 부지런한 유형에 부합한다.
  • 더불어 제갈량의 놀라운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그는 동윤보다 훨씬 고위직인 승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윤과 비슷한 방식으로 업무처리를 했다. 그리고 업무 수완은 동윤이든 비의든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 다만 사신을 통해 제갈량의 업무스타일을 들은 사마의는 제갈량이 스스로를 너무 혹사하여 오래 못살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예측대로 되었다.

세설신어에서 위나라의 군대가 흥평에 주둔하자 비의에게 부절을 주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할 때, 광록대부 내민이 비의의 집으로 가 작별하면서 바둑을 두자고 청했는데, 그때 우격이 빗발치고 수레 채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대국에 몰두하면서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내민이 비의를 보고 잠시 그대를 살피면서 시험했는데, 진실로 합당한 사람이니 틀림없이 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한(武漢)의 유명한 명승지 황학루는 비의가 신선이 되어 노닐었다던 자리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걸 소재로 이백, 육유, 최호 등등 유명한 시인들이 작품을 남겼다.

은기(殷基)의 통어(通語)에 따르면 사마의 조상을 주살하자 비의는 갑을론(甲乙論)을 펼치며 그 시비를 평하였다. 갑(甲)의 의견은 이러하다.
조상(曹爽) 형제는 범품(凡品,평범)의 용렬한 사람들인데 실로 황제의 자제의 방계 친속으로 고명(顧命,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의 임무를 받을 수 있었으나, 교만사치하며 참람하여 적당하지 않은 자들과 교제하고 사사로이 붕당(朋黨)을 심어 나라를 어지럽힐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사마의가 분격해 이를 주벌하여 하루아침에 모두 멸하니 이는 바로 사마의 자신의 임무에 부합한 것이며 사민(士民)들의 바람에 부응한 것입니다.

을(乙)의 의견은 이러하다.
사마의가 조중(曹仲)[15]이 자기에게 부탁한 것이 하나가 아님을(조상에게도 함께 부탁한 것을) 원망하였으니(憾) 어찌 조상과 더불어 서로 상관하였겠습니까? 사세(事勢)상 사마의 혼자 정권을 오로지하지 못하므로 이런 까닭에 조상의 하자,허물을 은밀히 조성한 것입니다. 당초 충고하거나 강직하게 가르치는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도륙하였으며 그들의 예상치 못함을 틈타 찌르니 이것이 어찌 대인(大人)이 나라를 경영하며 근본을 두터이 여기는 일(행동)이겠습니까! 만약 조상에게 정말로 임금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대역할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군대를 일으킨 날에 또한 황제인 조방(曹芳)이 조상 형제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상황에서 사마의 부자는 뒤로부터 성문을 닫아걸고 거병하고는 강박하며 조방에게로 향하였으니 필시 조방이 완벽하게 안녕함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 이를 충신(忠臣)의 임금을 위한 심려(深慮)라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조상에게 대역의 계획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조상이 사치하고 참람하다고 사마의가 여겼다면 그를 폐하거나 형벌을 내리는 것은 가하나, 그 갓난아기까지 멸하여 불의(不義)의 이름을 씌우고 자단(子丹)[16]의 혈식(血食)을 끊으며 아울러 하안(何晏)의 아들은 위(魏)(황실)의 친 외조카임에도 또한 함께 주륙되니 참람의 죄에 대한 형벌로는 부당합니다.

3. 평가

진수 장완은 반듯하고 단정하며 위엄과 진중함이 있었고 비의는 너그럽고 남을 도우며 널리 사랑하였는데, 모두 제갈량의 작성된 규칙이나 제도를 계승하여 고치지 않았으니 이로써 변경에는 근심거리가 없고 국가는 하나로 화합하였으나 작은 나라를 다스릴 때 의당해야 할 바와 고요하게 거처하는 도리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고 했다.

배송지는 이에 대해 장완과 비의는 재상으로서 정제(整齊)의 도리를 능히 준봉하였으며 일찍이 공을 좇아 망령되어 행동한 적이 없었으며 손상을 입지 않고 밖으로는 흥세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으로는 (위연의 반란 진압 등) 내부의 결속을 이끌어 실질을 보전한 것이었으니 작은 나라를 다스릴 때 의당 해야 할 바와 도리에 있어 어찌 과오가 있느냐며 반박했다. 또 진수가 그들을 비판하여 미진하다 하면서 그 구체적인 사건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고 평가했다. 사실 도리가 미진하다는 것은 진수는 위진의 신하 입장이다보니 무작정 찬양할 수 없고 따라서 위나라를 섬기지 않고 적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4. 삼국지연의

여기에서는 이런저런 피해를 본 인물이기도 하다. 진수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와 이후에 편찬된 삼국지 관련 기록에는 모두 이름이 비의(費禕)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나관중이 연의를 집필하면서 비위(費褘[17])로 잘못 쓰는 바람에 이후 나타나는 삼국지 관련 기록에는 비위로 개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더불어 연의의 경우 북벌 시에는 간간이 이름도 언급되고 하는 역할도 있으나, 제갈량 사후에는 아무래도 강유가 촉의 주인공 격인 인물로 격상되어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실제 비의의 지위나 능력에 비하면 공기에 가까운 비중을 자랑한다.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파일:삼국지3비의.png
삼국지 3
파일:Fei_Yi_3_(1MROTK).png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Fei_Yi_%28ROTK11%29.png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749.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등의 영향으로 문관 정치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대장군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론 군정 모두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을 볼 때 비의를 단순히 문관 정치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장수제 시리즈인 경우 인물의 성격 설정도 그렇고 대략적으로 오나라의 노숙을 약간 다운그레이드한 느낌으로 설정되는 편.

삼국지 3에서는 B급 군사 정도 된다. 능력치는 육전지휘 23/수전지휘 6/무력 25/지력 75/정치력 82/매력 84에 야망 7, 운 8, 냉정 8, 용맹 7로 장완이나 동윤에 비해 통솔력과 무력이 많이 떨어지고 어느 정도 올리면 군사적 용도로도 써먹을 수 있는 장완과는 달리 비의는 철저하게 내정용이다. 시나리오 6에서는 분명히 생존해 있을 시기인데도 사망 처리되어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5에서는 이름이 역시 비위로 표기되며 정치력이 무려 96이나 된다. 정치력으로는 전 무장 탑5 안에 든다. 비위보다 정치력이 높은 장수는 장소 (98), 진군 (98), 조조 (97)뿐이고 제갈량(96)과 같다. 인사, 내정, 외교 다방면에서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본인이 활약하는 시나리오는 재야에 있는 장수들이 얼마 없는 후반 시나리오라서 인사 담당으로는 활약이 어렵다. 무력 55/지력 77/정치력 96/매력 81에 학익, 어린, 장사 진형을 들고 나와 병력만 있으면 의외로 전장에서도 쓸 만하다. 특기는 진립, 화계, 수습, 혼란, 낙석, 침착.

그러나 삼국지 5에서는 높은 정치력을 가진 장수에 대한 체감이 지력 높은 장수에 비해 낮은 편이다. 또한 정치 하나, 지력 하나만 높은 것보다는 지력 90 이상과 정치 80 이상을 동시에 만족하여 군사 신분을 가지는 것이 더 쓸모가 많다.[18] 지력이 낮은 비의는 군사는 당연히 안 되고, 무력이 낮고 특기가 좋지 않아 용명을 쌓기도 힘든 데다가 막상 용명이 높아져서 고위장군직을 주려면 무력 높은 장수들이게 우선 순위가 밀린다. 신선들마냥 차라리 지력만 높으면(지력과 정치가 바뀐다면) 참모로 쓸 가능성이라도 있지.[19] 그렇다고 학소처럼 수행을 통해서 지력 로또 한 번이면 군사로 써먹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내정셔틀이나 외교담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위에 나열한 정치력 탑 5 중 유일하게 비의만 지력이 90 미만이라 군사가 되지 못한다.

참고로 비의처럼 지력에 비해 정치력만 높아 이래저래 쓰기 힘든 이들[20]로는 종요(지력 76/정치력 92),[21] 동윤(지력 84/정치력 90), 왕윤(지력 72/정치력 92), 사마소(지력 87/정치력 90), 육개(지력 71/정치력 92), 장굉(지력 89/정치력 95),[22] 하후현(지력 73/정치력 91) 등이 있다. 왕루(지력 80/정치력 89), 사마랑(지력 67/정치력 89)도 비슷한 케이스.

삼국지 6에서는 72/26/73/97/80으로 엄청난 정치력을 부여받았다. 무력이 55인 전임자 장완에 비해 전장에서 굴리긴 애매하지만 통솔이 적당해 총대장으로 출진시킬 정도는 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4/무력 22/지력 83/정치력 92. 제사가 있지만 무력이 낮아서 위력은 처참하고 내정용으로 굴리다가 필요하면 혼란이나 배반, 고무으로 지원을 해주는 식으로 쓰게 된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공성계 병법인 투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장완은 투함이라도 있어 수전에서라면 굴릴 필요가 있지만, 비위는 인재 많은 촉에서는 전장에서 잘 안 쓰는 무장이고 아무래도 내정용으로 많이 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29/지력 84/정치력 94/매력 83. 여기서도 이름은 비위로 나온다. 무력을 제외하곤(장완 무력은 39) 장완과 거의 능력치가 동일하다. 어차피 둘 다 군사 특기, 전투 특기가 없어서 전장에서 쓰긴 조금 애매한 것도 동일하다. 직접 두고 내정 셔틀로 쓰거나, 후방 지역의 태수로 놓고 굴리면 좋다. 특기 개수는 총 12개로(농업, 상업, 보수, 치안, 진정, 위압, 항변, 반론, 반박, 명사, 간첩, 주호) 기술 특기가 없다는 건 아쉽지만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매력적이며 논파가 없긴 해도 위압, 반론, 반박을 들고 있기 때문에 설전에선 나름대로 강력하다. 특이사항으론 호방해서 그런지 문관들 중엔 드물게 주호 특기가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30/지력 83/정치력 92/매력 83, 병종적성은 창병B/극병B/노병A/기병C/병기A/수군B이며 특기는 비의에게 어울리는 능리, 친애무장은 동윤이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왼손을 턱에 대면서 조상 침공을 막으러 가기 전에 내민과의 바둑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 전법은 전방어강화. 비책은 전투용 비책은 없지만 내정에 유용하게 쓰이는 구재지책과 명공지책을 가지고 있고 외교용 절충지책까지 가지고 있어서 어떤 세력이라도 필수적으로 영입할만한 인재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30/지력 83/정치력 92. 중신특성은 농업중시이며 전법이 궁병동요였지만 PK에서 꽤 쓸 만한 전법인 금족으로 변경되었다. 병과적성은 창병 B/기병 C/궁병 A이며 특기는 농업 6, 설파 6, 교섭 5, 언변 6으로 전수특기는 농업이다. 농업중시가 있고, 정치력도 90이 넘기 때문에 내정중신으로 상당히 좋다. 외교관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설파와 언변이 모두 있어서 군락회유도 잘 해온다. 이번작에서도 호방한 성격을 살렸는지 문관 타입 무장들 중 드물게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술 사들고 찾아가면 친해지기 쉬운 편.

삼국지 14에서 일러스트는 전작 삼국지 13을 그대로 쓴다.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30/지력 83/정치력 92/매력 83. 개성은 독려, 조달, 진흥, 능리, 논객이 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세출개선 Lv 5, 진형은 안행, 학익, 투석이 있고, 전법은 연노, 업화, 진정, 투석, 강습, 친애무장은 내민, 동윤, 장완, 제갈량, 진지, 혐오무장은 없다.

통솔 77의 학익, 안행 진형은 나쁘지 않지만 단기접전을 피할 방원 진형이 없기 때문에 전투에 사용 시 주의가 필요하는 것 빼면 전투에도 써도 괜찮은 책사다. 내정도 높은 지력과 정치에 지역 개발 보정이 걸린 진흥 덕분에 존재감이 크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는 레벨 30의 발석차로 등용할 수 있지만 존재감은 제로. 능력치는 무력 23/지력 80/통솔력 25로 무력, 레벨[23]이 워낙 낮아서 써먹을 이유가 없다. 같이 등장하는 장완도 레벨 때문에 쓰이지 않는데 비의는 같은 레벨인데다 모든 능력치가 장완보다도 더 낮아서... 초중반에야 탁류가 강력하니까 지력 높은 궁병이 입지가 있었지, 클래스 업을 완료하여 무력이 가장 중요하고 후방에서 돌 날릴 발석차의 스탯 배분이 저래서야 도저히 사람이 써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능력치가 아니다. 애초에 방통 등용할 때 인재를 찾아다니다가 강하에서 나오는데, 회의장을 나갔다 바로 들어가면 방통이 나오고 이벤트가 진행되기 때문에 얘도 등용가능 했나 하는 사람도 있다. 유봉, 이적 같이 자동으로 아군이 되는 장수와는 다르게 비의, 장완은 아군으로 등용할지 내버려둘지 선택까지 가능하다. 개인조형조차 문관이 아닌 산적으로 나와 푸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삼국지 공명전에선 물자대로 등장한다. 역시 존재감은 없지만 마속을 죽일 경우 처음 합류할 때부터 레벨이 25인데, 노가다 없이 클래스업 책략인 승격 책략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아낄 수 있다. 노가다를 했을 경우라면 기본적으로 여개보다 통솔력이 높고, 내구력도 10 이상 차이가 나며, 책략치 역시 1렙 높은 여개와 동등할 만큼 높기 때문에 갈아타기 괜찮은 장수다. 하지만 노가다를 아예 안 할 경우엔 굳이 물자대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역시 버려진다.

삼국지 조조전의 경우 풍수사로 등장해 촉의 제갈근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장완과 세트로 나오며 사실모드에서는 성도에서 살아남아 백제성에서 최후의 저항[24]을 펼치나 전사한다. 여담으로 이름이 영걸전 시리즈 모두 비위로 나온다.[25]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도 풍수사로 등장. 30 특성으로 사신소환을 갖고 있어 저렴한 금전으로 백호를 사용할 수 있고, 90 특성으로 주위기합을 장착해서 섬멸전에서 첫 턴부터 아군의 공격력을 손쉽게 끌어올릴 수 있어서 물리덱에서 자주 채용된다. 저코스트 손건, 책략모방 만총, 방능전 진군과 함께 섬멸전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풍수사 중 한 명.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클론 무장으로 등장. 마속과는 달리 기존 무쌍 무장과의 접점이 거의 없는지라 컷신은 커녕 전장 대사도 없는 신세였으나...

진삼국무쌍 BLAST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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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 하후돈, 곽가, 장료, 견희, 순욱(SR), 조비, 조조, 왕이, 문빙(낭아봉)(SR), 조인, 가후, 장합, 만총(요필)(SR), 악진
R 순욱(장검), 조홍(쌍월), 만총(타구곤), 문빙(언월도), 변씨(피리), 문흠(극), 화타(구조), 하후희(위복장)(피리), 조절(권), 장창포(피리), 조모(쌍인검), 조식(비연검), 최씨(양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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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 사마소, 왕원희, 종회, 문앙, 사마의, 사마사, 가충, 하후패, 제갈탄, 등애(나선창)
R 호열(극), 장반(비연검), 초이(극), 문호(용창), 신헌영(순패검), 가남풍(구조), 양호(구조), 두예(비연검)
N 신창(비연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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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장패(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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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수경선생(R), 화웅(극), 우길(폭탄), 기령(쌍모), 화만(귀신수갑), 하태후(구조), 번옥봉(권), 풍씨(권), 마등(극), 한수(쌍월)
N 동백(십자극), 곽사(극), 황조(아벽), 이각(박도), 수경선생(쌍검), 유표(구조),
엄백호(쇄분동), 왕윤(비연검), 원술(신세검), 장수(비연검), 추씨(피리), 장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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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게임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추가 무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12와 13처럼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허리춤에 술병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삼국지 13의 비의가 술을 좋아한다는 인물 설정을 블래스트에서 차용한 걸로 여겨진다. 그가 등장한 이유는 촉나라의 말년을 지탱하고 이끌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정규 시리즈에도 추가된다면 가정 전투, 오장원 전투 등의 후반기 시나리오나, 진나라 시나리오에서 적장으로 나올 확률이 높다. 일단 최신작인 8에서도 출연은 불발됐다.

5.4.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파일:전략비위.png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도 등장하고 곽순에게 죽는 장면이 임펙트있게 나왔다.

5.5. 삼국전투기

5.6. 삼국지톡

시즌 12 5화 마지막에 첫등장하여 제갈량의 차 앞자리에 올라탄다. 회색 포마드 컷과 초록색 브릿지, 선글라스 쓴 양아치틱한 이미지로 등장.

차에 탄 제갈량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제갈량의 팬이라고 생각해 이 좋은 차를 타면서 왜 맨날 죽상이냐고 물었고 난세라서 그렇다는 답변에 난세치세가 어딨냐며 자길 태어나게 해준 시대가 최고라는 답을 남긴다. 게다가 지금이 난세이긴 하지만 사람의 지혜로 고칠 수 있다며 천하에서 가장 귀한 건 사람이라고 하기까지. 뒤이어 동윤이 차에 들어오면서 제갈량에게 승상이라고 부르자 뒤늦게 제갈량한테 할 말 못할 말 다 했음을 깨닫고 식은 땀을 흘린다. 이어 꼰대가 된 제갈량에게 신나게 털린다. 이 장면 때문에 독자들에게 약간 모자르지만 착한 친구 취급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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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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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유이목전(劉二牧傳)」 2권 「선주전(先主傳)」 3권 「후주전(後主傳)」
유언 · 유장 유비 유선
4권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5권 「제갈량전(諸葛亮傳)」 6권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감부인 · 목황후 · 경애황후 · 장황후 ·
유영 · 유리 · 유선(璿)
제갈량 , 제갈교 제갈첨 동궐 번건, 관우 , 관흥, · 장비 , 장포, · 마초 , 마대, · 황충 ·
조운 , 조통 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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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 방굉 방림, · 법정 허정 · 미축 · 손건 · 간옹 · 이적 · 진밀 동화 · 유파 · 마량 , 마속, · 진진 ·
동윤 , 진지, · 여예
10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11권 「곽왕상장양비전(霍王向張楊費傳)」 12권 「두주두허맹래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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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미 · 주군 · 두경 · 허자 · 맹광 · 내민 ·
윤묵 · 이선 · 초주 , 초수, · 극정
13권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14권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15권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황권 · 이회 · 여개 · 마충 · 왕평 , 구부, · 장억 장완 , 장빈 장현 유민, · 비의 · 강유 등지 · 장익 · 종예 , 요화, · 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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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목상 1인자는 당연히 황제인 유선이지만 실질적인 실무 담당자중 1인자는 제갈량 이하 재상 라인이었다. [2] 비의 족부 비관이 이 인물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비관의 자는 빈백이다. [3] <권38 허정전>에서는 허정의 아들 허흠(許欽)이 요절했다고 하였는데 아마 그를 가리키는 듯 [4] 이때 비의의 나이나 관위가 마중 나온 대다수의 신료보다 아래였다는 기록이나 비의와 비슷한 시기 태자사인이 된 곽익이 204년 생인 제갈교와 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비의 역시 이 당시 나이는 20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5] 비의 별전에 따르면 손권이 매번 따로 좋은 술을 따라 비의에게 먹여 그가 이미 취한 것을 보고는 그 연후에 국사(國事)에 관하여 물으며 아울러 당세지무(當世之務,당세에 힘쓸 일)를 논하여 사난(辭難,논란論難)이 여러 차례 쏟아졌다. 비의는 (그럴 때마다) 늘 술에 취했다고 말하고 물러나서는 질문 받은 바를 순서대로 적고 사안마다 조목조목 답변하여 일실(遺失,빠뜨리거나 놓침)되는 바가 없었다. [6] 비의 별전에 이르길 손권이 이에 수중에 늘 지니고 있던 보도(寶刀)를 주자 비의가 답하였다, “신이 재주가 없으니 어찌 명명(明命=존명尊命)을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도(刀)는 부조(不庭,조정에 조현하지 않는 자 ; 반역자)를 치고 폭란(暴亂)을 금(禁)하는 것으로 다만 대왕께서 공업(功業)을 세우는 데 힘써 (저희와) 함께 한실(漢室)을 돕기를 원하니 신이 비록 암약(闇弱,어리석고 미약함)하나 끝내 동쪽을 돌아보는 것(東顧)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7] 화양국지에는 진군장군(鎮軍將軍)을 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8] 비의 사후의 일이긴 하나 하후패가 직접 성도로 귀환한 장억과의 친분을 요청한 기록도 있다. [9] 이렇게 생각하면 왜 뜬금없이 비의가 죽고 얼마 있지 않아 장억이 제갈각의 북벌을 뒤로 미루고자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내 연락을 시도한 것인지 설명이 되는 부분이 있다. 즉, 비의의 북벌에 장억이 그만큼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0] 그렇다고 해도 장익과 요화는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는데 촉군부 상층부나 촉한조정 내부에선 북벌에 대한 인식 차이는 있었어도 어쨌거나 어떤 식으로든 북벌을 하긴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고는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주조차도 '한고조는 포기해도 주문왕은 될 수 있다, 문왕의 고사를 따르자'고 해서, 촉한의 기본적인 노선인 한실부흥과 천하통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11] 다만 이 익주자사라는 관직은 촉한에서 다른 자사 관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논란이 매우 많다. 이 부분은 제갈첨 문서 참고. [12] 자치통감 권74 [13] 비의별전 왈 당시 군국(軍國,통군統軍과 치국治國)에 일이 많아 공무(公務)가 번외(煩猥,번잡,번다)하였는데 비의의 식오(識悟,식별하고 깨달음)가 남보다 뛰어나 매번 서기(書記)를 성독(省讀,살펴서 읽음)할 때마다 눈을 들어 잠시 보면 이내 그 의지(意旨,취지,뜻)를 통달하니 그 속도가 남들보다 몇 배에 달하였으며 또한 끝내 잊지 않았다. 늘 조포(朝晡,조시朝時(=진시辰時.am7-9)와 포시晡時(=신시申時.pm3-5))에 청사(聽事,정무를 처리함)하고는 그 사이에 빈객(賓客)들을 접납하여 먹고마시며 노는데다가 박혁(博弈,육박六博과 위기圍棋)까지 두었는데, 매번 남을 즐겁도록 다하면서도 일 또한 폐하지 않았다. 동윤(董允)이 비의를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자 비의의 소행(所行)을 본받으려 하였는데 열흘 안에 일이 대부분 건체(愆滯,잘못되거나 지체됨)되었다. 이에 동윤이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의 재력(才力)이 서로 동떨어진(다른) 것이 이처럼 매우 머니 이는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는) 하루종일 청사(聽事)하여도 여전히 여유가 없을 것이다.” [14] 제갈량은 지나치게 호방한 면이 있는 비의와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동윤의 조화를 위해 이 사이에 곽유지를 끼워넣었다. 곽유지는 정사의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성격이 온화하고 화해로웠다는 동윤전의 기록을 미루어봤을 때 개성 강한 둘 사이에서 조율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위魏 명제 조예曹睿를 가리킴. 조예의 字가 元仲 [16] 조상의 부친인 조진曹眞의 字가 子丹임. [17] 衣+韋의 형태. 올바른 한자인 禕는 示+韋의 형태다. 둘 다 '아름답다'의 뜻이 있고 변의 형태가 비슷해서 와전된 듯 하다. [18] 이 시스템 때문인지 삼국지 5에는 정사나 연의 아무리 뒤져봐도 정치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개판을 쳤는데도 정치가 80 이상으로 높은 책사형 문관들이 상당히 많다. 각 세력의 참모급 문관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19] 물론 비의와 궁합이 맞는 유비 세력의 경우는 항상 제갈느님이 계시므로 참모의 임명 가능성도 낮다. [20] 정치력은 90 이상이지만 지력이 90이 넘지 않는 경우로 한정. [21] 참고로 종요의 무력은 무려 8로 유선(7)보다 한끗 높다. [22] 그래도 지력이 89이므로 수행을 통해 지력+1 이벤트를 겪고 군사가 될 가능성은 이들 중 가장 높은 편이다. [23] 한참 전에 합류한 제갈량이 이미 레벨 30을 찍는다. [24] 장완과 함께 나무인형을 소환하며 싸운다. [25] 심지어 일본판도 연의의 잘못된 표기를 따라 '費褘(비위)'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