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21:43:49

나헌

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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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나헌등전(羅憲等傳)」
나헌 등수 마륭 호분 도황 오언 장광 조유
羅憲/羅獻[1]
(? ~ 270)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관직 활동, 그리고 황호와의 불화2.3. 촉한의 멸망2.4. 오의 침공2.5. 서진의 대신
2.5.1. 촉한의 인재들을 사마염에게 추천하다
3. 평가4. 미디어 믹스

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촉한 조위,[2] 서진의 무장이며 자(字)는 영칙(英則).

그의 사적은 진서 나헌전에 전하지만 곽준전에 곽준의 아들 곽익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면서 배송지가 양양기를 주석으로 달아 정사 삼국지에도 전하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본래 양양에서 살던 아버지 나몽은 난을 피해서 촉으로 피난 왔는데 관직이 광한태수까지 이르렀다. 덕분에 양양의 유명인사중 한명으로 인식되어 습착치의 <양양기>에 거의 열전에 가까운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나헌은 어려서부터 재능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13살부터 능히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초주에게 가르침을 받고 초주의 제자들은 나헌을 자공으로 높이 불렀다고 한다.

호방하고 쾌활하면서 엄정한 성품을 갖고 있어서 선비를 대우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2.2. 관직 활동, 그리고 황호와의 불화

238년에 유선이 태자를 세우자 나헌은 태자사인으로 임명되었다.[3] 그후 서자, 상서이부랑으로 관직이 올랐다. 선신교위로 임명되어 오나라에 두 차례 사신으로 갔는데 이때마다 오나라의 대신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후일의 오나라와의 지독한 악연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그때까진 나도 몰랐다 저렇게 질긴놈인줄

나름의 출세가도를 달리던 나헌이지만 황호가 득세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황호가 정치에 관여하자 여러 무리들이 황호에게 붙었지만 나헌은 황호에게 붙지 않았고 분노한 황호는 나헌을 파동태수로 좌천시켰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종예가 내지로 돌아가자 나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하는데 이때가 258년으로, 곧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가 파동도독을 맡자 영군, 독영안사가 되어 염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파동태수, 영군, 독영안사에로의 활동은 <양양기>와 진서 <나헌열전>에서 동일하게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후일 영안에서 미친 방어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염우와 함께 영안 정비에 힘쓰지 않았냐는 추측 뿐이다.

2.3. 촉한의 멸망

263년, 종회 등애가 십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촉한을 침공했다. 끝내 한중을 잃은 강유는 검각에서 종회의 주력을 발묶었으나 등애는 음평의 산길을 돌파해 성도를 공격했다. 염우는 나헌에게 2000명의 병력을 맡기고 영안을 수비하도록 지시하고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방으로 향했다. 이때만해도 오에서 정봉의 지원군이 오는 중이라 오의 공격을 전혀 예상 못했기에 일부러 나헌에게 소수의 병력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성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 안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여 변방과 강의 장리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나헌이 이들 중 한명의 목을 베자 비로소 성이 안정되었다. 유선이 항복한 사실이 확인되자 나헌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도정에서 삼일간 주둔했다. 도정에 잠시 머문 것을 두고 유선에게 해를 끼치면 묵인하지 않겠다는 묵언의 메세지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다.

2.4. 오의 침공

촉한이 멸망하자 본래 지원군까지 보냈던 오나라는 도리어 침공을 기획했다. 원래 형주 공방전당시 여몽이 기획했던 장강 방어선은 영안까지 포함했는데 당시 얻을 수 없었던 곳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손휴는 장군 성헌(盛憲)을 보내 구원을 가장하여 영안을 공격하고자 했다.

나헌은 오나라의 침공을 보고 말했다.
우리 왕조가 전복되어 망했는데, 오는 우리와 순치脣齒[4]의 관계임에도 우리를 구하려 하는 대신 이로움만 찾는구나. 내 어찌 항복하여 포로가 되겠느냐! - 진서 <나헌열전>
본조(本朝)가 무너졌는데 오나라는 순치(脣齒)의 동맹국이면서도 우리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탐하니, 이는 맹약을 저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짓이다. 게다가 한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오나라도 오래 버틸 수 없다. 어찌 오나라의 항로(降虜-항복한 포로)가 되겠는가?[5] - 촉서 <곽준전> 주석 <양양기>
나헌은 결의를 다진 이후 성을 보수하고 병기를 수선하며 절의를 다할 것을 맹세하자 이를 따르지 않은 장병이 없었다고 한다. <나헌열전>에 의하면 오나라 또한 나헌의 말에 순응해 일시적으로 물러섰다.[6]

그러나 강유 종회가 성도에서 죽고, 역적으로 몰린 등애가 아들 등충과 함께 죽은데다가 촉한의 관료들이 모두 낙양으로 끌려가자 파촉은 사실상 공백지역이 되었다. 이에 오는 다시 촉을 겸병하기로 마음 먹었다. 손휴는 장군 보협을 보내 나헌을 공격했다.

나헌은 강에서 보협군과 교전했으나 군세가 약해 막아내지 못하자 참군 양종을 보내 서진에게 급보를 보냈다. 포위망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양종은 서진의 안동장군 진건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양종은 문무관료의 인수를 전하고 자식을 볼모로 맡겨 사마소에게 보냈다. 이는 나헌이 위나라에게 완전히 투항함을 의미한다.

보협이 다시 영안을 공격하자 나헌은 출전하여 수성전도 아닌 야전에서 보협의 군세를 대파했다. 일찍이 양종을 보내고 서진에게 복종을 표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나헌이 도리어 야전에서 수적우위를 점했으리라 예상되는 보협군을 크게 깨뜨렸다는 사실은 상당히 미스테리하다. <양양기>, <나헌열전>, <자치통감>을 막론하고 모두 나헌의 대승만 기록할 뿐 어떤 지략이나 전술로 보협군을 대파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진수는 나헌과 동시대 인물에 같은 동문으로 물어봤을 법도 한데 <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는 단지 <손휴전>에서 손휴가 보협을 보내 나헌을 공격했다는 기록만 수록했다. 상당히 아쉬운 부분.

분노한 손휴는 후일 오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칭송받는 육항에게 3만에 이르는 대군을 쥐어 주고 영안의 포위망을 강화시켰다. 6개월간[7] 육항은 영안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은 것은 나헌도 마찬가지라서 병사 태반이 병에 걸려 역질을 앓았다. 어떤 이가 나헌에게 모두 도망쳐야한다고 건의하자 나헌은 답했다.
무릇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으면서, 위태로움을 능히 평정시키지 못하고 위급하다 하여 그들을 버리는 것은 군자의 할 도리가 아니오. 나는 이곳에서 목숨을 다할 것이오.
다행히도 진건이 사마소에게 나헌의 어려움을 보고하자 사마소는 형주자사 호열을 출전시켜 서릉을 공격했다. 이에 육항은 오군을 지휘해 물러났다.

2.5. 서진의 대신

사마소는 투항한 나헌에게 이전의 임무를 그대로 맡겼고 능강장군[8]에 임명하고 만년정후로 봉했다. 무릉의 4개의 현이 서진에게 투항하자 서진 조정은 나헌의 직위에 감파동군사에 무릉태수로 임명했다.

태시 초[9]에 입조하자 조서를 내려 나헌을 칭송했다.
「나헌은 충성스럽고 과단성이 있으며 꾀가 뛰어나니 이에 고취(鼓吹)를 내린다.」 - 진서 <나헌열전>에 수록된 조서
또한 서진조정은 나헌에게 산의 검은 옥으로 만든 패검을 내렸다.

265년에는 나헌의 작위를 서악현후로 고쳤다. 더불어 사마염은 낙양에서 거주하던 나헌의 처자들중 그의 아들 나습을 급사중으로 임명했다. 267년에 관직을 더욱 올려서 관군장군 가절로 봉해졌다.

268년, 혹은 269년에 나헌은 오나라를 습격해서 무성을 습격해 빼앗았고 더불어 오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상주했다.

태시 6년(270년)에 죽으니 안남장군으로 추증되고 열후(烈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나습은 작위를 이어 능강장군에 임명되고 아버지의 부곡을 이끌며 작위가 광한태수까지 이르렀지만 요절했다고 한다. 나습의 아들 나휘는 순양내사로 있었지만 영가 5년(311년) 영가의 난 때 도적 왕여에게 피살되었다.

조카로 나상이 있었고 나헌의 인척중 가장 출세한 격이나 탐욕스럽고 잔인해 사실상 숙부의 얼굴을 먹칠하는 격이었다. 그나마 군재라도 조금 있는게 다행이려나.

2.5.1. 촉한의 인재들을 사마염에게 추천하다

268년 3월, 사마염이 화림원에서 연회를 배풀자 나헌은 사마염을 수행하며 참석했다. 사마염은 나헌에게 촉 대신들의 자제 중 쓸만한 인재가 있는지 물었다.

이에 나헌은 진수, 제갈경( 제갈첨의 차남), 상기, 두진, 수량, 고궤, 여아( 여예의 동생), 허국, 비공( 비의의 아들), 진유( 진지의 아들)를 천거했다. 사마염은 이들 모두에게 벼슬을 주었고 모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다만 조금 묘한 점은 나헌이 사마염에게 추천한 인물들은 상당수가 초주의 제자[10]로 추측되는 인물들이다. 초주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 중 하나는 결국에는 익주의 인재풀 중 초주가 키운 인물들이 많으니 이 중 한 명이라도 임관할 경우에 초주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잃는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부분이다. 추측에 불과하므로 곧이곧이 받아들여야할 필요는 없지만 나헌을 통해 제자들 중 상당수가 한큐에 중히 임용되는 잭팟 덕분에 서진시대에도 충분히 대우받으며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허무맹랑한 추측이 아닐지도.

다만 제갈경이나 비공은 촉한사영의 자손들이고 여아 같은 경우에도 옛 촉한의 고위 관리의 동생이었으며 상기는 종제인 상욱(常勗)과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상욱은 촉군 비현(郫縣, 성도 바로 북서부에 인접)의 현령으로서 정사가 간소럽고 백성들을 번잡하게 하지 않았으며 제갈첨이 면죽에서 격파되고 촉한 전체가 놀라 다른 이들이 도주하거나 항복할때 상앙은 독자적으로 관리와 백성들을 통솔하여 성을 지켰으며 유선이 이후 항복했을때야 투항했고 비현의 재물을 그대로 보전한 인물이었다. 수량은 이밀과 함께 (초주를 옹호한)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와 사이가 틀어지고 후일 이밀이 또 다른 초주의 제자인 문립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진수가 제갈경와 같이 천거를 받았고 천하에 명성을 날린 사실을 정사 삼국지에 기록하지 않은것도 그렇고 또 다른 초주의 제자로서 안회에 비견한다는 얘기를 들은 문립도 제갈량, 장완, 비의의 자손을 추천하여 파촉의 인심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한 것을 봤을때 나헌이 동문뿐만 아니라 옛 촉의 대신들의 자손이나 충성스러운 자들을 기용해 촉의 인심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공산도 있다. 툭하면 도참론을 주절거렸지만 막상 항복 이후 별 달리 한게 없는 초주와 달리 나헌은 촉한 멸망 이후 남아 있던 인사중에선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적어도 나헌이 초주마냥 도참론을 떠들진 않고 옛 왕조가 망하고 그 이후에까지 충실한 군정관 역할을 했던 정황을 보면 그렇다.

3. 평가

각정(郤正)은 충신(忠臣)이라면 충신은 되겠으나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신하는 아니었다. 임금 섬기는 도리는 그 의리를 따라야 하지 그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굽히고 나라를 욕되게 하면서 죽건 살건간에 임금의 명령만을 따랐던 것이니, 이는 첩부(妾婦)의 도리인 것이다.

그리고 곽과(藿戈)[11]와 나헌(羅憲)은 비록 임금을 배반하고 적에게 항복한 자와는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들의 몸은 한 나라의 신하이고 살고 있는 땅도 한 나라의 강토인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한실(漢室)을 중흥(中興)시킬 수 없으면 죽음으로써 그 강토를 지키어 신하의 절개를 보전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나라를 멸망시키고 임금을 부하로 삼는 저 원수에게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 홍대용의 <담헌서>
오랫동안 한국의 삼국지 커뮤니티에서 나헌은 촉한의 마지막 명장에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나헌이 명장인건 인정하더라도 충신으로 평가하기에는 좀 묘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홍대용이 <담헌서>에서 꼬집었듯이 주군을 배신하지 않고 나름의 예를 다하며 적에게 항복했다지만 결국에는 임금을 부하로 삼는 적에게 항복했다. 황권의 경우에는 직접 말했듯이 이릉에서 유비가 패퇴당하자 퇴로가 끊겨 위나라로 투항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싸우던 적군이었던 오나라에게 투항하는 짓은 유비의 은혜를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릉 전투 당시에는 위가 적이 아니었으니 황권의 행동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나헌이 격퇴한 오나라의 경우에는 지원군을 보내기 위해 정봉을 파견보내기도 하고 위나라와 달리 수십년간 동맹을 맺은 사이였다. 홍대용의 의견처럼 죽음만이 신하의 절개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은 좀 급진적이긴 하지만 <양양기>에 기록된 나헌은 서촉에 진입하는 동맹 오나라의 군세를 막아세운다. 몇개월 전만해도 촉한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끝내 유선을 신하 삼은 조위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끝내 오나라 역시 멸망할 것이라는 이유로 오나라의 군세를 막아선 행동은 어찌보면 기회주의적으로까지 보인다.

홍대용이 충신으로 꼽은 강유의 경우에는 종회를 이용해 등애를 제거하고 촉한을 부활하고자 계획하다 성도에서 전사했다. 나헌의 행동이 당대 충신의 행동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옅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해석에 따라선 그의 행적을 세세히 드러내면 촉한에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바친 충신으로 꼽기엔 부족한 행동들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헌은 한이 망했으니 오나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촉오간은 (몇십년간) 순치의 동맹이라면서 결국 촉이 망한지 1년도 안 된 시간만에 옛 촉땅을 침공한 오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나헌의 지적만 봐도 그렇고 나헌이나 촉에 남은 촉한의 옛 구신들의 태도는 '우리하고 순치의 동맹이라더니 이제와서 이러면, 우리가 망했는데 너희는 무사할 거 같냐?' 라는 분노로 읽을 수도 있다.

나헌이 유선을 배신한 것은 분명히 아니며 위나라에게 투항한 것은 유선이 항복한 이후다. 도정에서 며칠간 군사를 인솔하여 머문 것도 유선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 충성심과 별개로 나헌은 파서 지역의 군정관으로 오나라 군세를 끝내 막아세우고 절망적인 병력차에 병사 태반이 질병을 앓아서 어떤 이가 모두 도망쳐야한다고 간언했음에도 성에서 '목숨을 다할 것' 이라 맹세해서 끝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충신이라는 타이틀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거듭하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조정에 충실하여 맡은 지역을 보호하는데 성공한 매우 책임감 있는 군정관으로 해석하는 게 더욱 어울린다.

반대로 나헌이 기회주의자도 유선의 충신도 아닌 위에 대한 항복주의자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나헌이 유비와 유선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항복하자는 말을 하고 다닌 초주의 제자였다는 점을 감안한 해석이다. 즉 원래부터 위에 항복하자는 쪽이었기 때문에 유선이 위에 항복하자 즉시 위에 충성을 맹세하고 위의 충신으로서 오군과 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헌은 오에 대해 곧 망할 것이라고 비난하는 등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위의 공격이나 유선의 항복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의 공격을 보고 위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등 완전히 위군처럼 움직였다. 유선에 대한 충성심과 관련시킬 부분은 기껏해야 도정에 사흘간 주둔했다는 것을 유선에 대한 충성심으로 풀이하는 정도다. 나헌이 위에 대한 항복주의자라는 해석이 옳다면 나헌이 북벌에 종군했다면이라는 가정은 전혀 의미가 없는 셈이다. 또 나헌은 정사 삼국지를 기록한 진수의 동문이자 출세의 은인이므로, 스승인 초주와 함께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능력치만이 아니라 인간성 면에서도 상향기록 되었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유선을 걱정해 싸울 각오까지 했던 곽익 역시 위의 관헌이 되었고 나헌이 영안을 방어할때 위나라에 처음부터 항복할 마음을 먹어 충성하면서 거길 막아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나헌은 이미 망한 촉한에 대해서 '촉과 오는 순치의 관계로 본조(本祖)가 망했는데 도와주지 못할 망정 우릴 치다니! '라며 촉한을 자신의 나라로 표현하고 촉한의 관헌이었던 입장에서 오나라의 배신행각에 대해 격렬히 비난했다. 오나라가 망할것이라는 저주 역시 촉한이 망했는데 신의없이 촉한의 옛땅을 차지하려는 오나라의 행태에 대한 분노이다. 애당초 마음이 위나라에 가 있었다면 '위나라에 대한 반역자들'이라고 분노했어야지 '옛 나라 촉한에 대한 배신행위'에 분노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런 발언은 오히려 '나는 아직 옛 나라인 촉한에 대해 마음이 남아 있다'라고 해석해 나중에 꼬투리가 잡혔어도 무리가 없을만한 발언이다.

그리고 오가 처음 익주 병합 의사를 내비친 때는 아직 강유가 죽기도 전이었다. 형주 공방전때 오가 관우의 등뒤를 쳐 패사시켰던것, 이어진 이릉대전, 동맹 회복후에도 손권의 칭제 등으로 양국 관계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걸 감안하면 촉한 관헌이었던 나헌이 보협과 육항에게 관우를 공격한 여몽을 대입해 이를 갈았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또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동문이었으로 그가 미화되었을 거라는 주장은 정사 삼국지 본전과 배송지 주석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소치이다. 정사 삼국지에 남은 나헌의 열전은 배송지가 인용한 습착치의 양양기 주석이다. 심지어 나헌이 진수를 추천해주기까지 했는데도 본전에 그의 열전은 없다. 애당초 진수는 초주에 대해서는 한껏 과장하면서 정작 촉한의 관헌이었던 자신의 동문들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열전을 단 한줄도 써주지 않았다. 자료가 없다고 계한보신찬까지 인용했으면서 정작 자신이 사적으로 잘 알만한 인물들의 얘기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12][13] 거기다 초주의 제자들이라고 무조건 위나라에 항복론을 주장하고 초주를 미화하지는 않았다.[14] 엄밀히 따지면 초주의 제자들 가운데 초주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인물은 진수 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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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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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삼국지 9에서 첫 등장했는데 자신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지닌 육항을 상대로 6개월 이상을 버텼다는 점이 반영되어 대대로 통솔은 후기 시나리오 장수들 중에선 최상위권이고 다른 능력치들도 떨어지지 않는 만능형 장수지만 본인이 막아냈던 육항과 비교하면 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에서 처진다. 실제 저 능력치로 게임에서 정사와 동일한 상황을 재현해 놓으면 나헌은 일기토가 아닌 이상 죽었다 깨어나도 육항을 이길 수 없다. 물론 이건 나헌만 이런 건 아니고 같은 상황에서 장특 제갈각을 절대 이길 수 없다거나 학소 제갈량을 절대 막지 못하는 등 게임 시스템 자체가 공성측에 유리하고 수성측에 불리하게 돌아가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현실을 반영해서 공성이 수성보다 10배는 어렵게 설정 되었더라면 나헌의 능력치 정도로도 육항을 막고도 남았다.

234년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성도의 재야로 나오지만,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 양양의 재야로 나와 유표군의 에이스로 등장한다.

삼국지 3을 리메이크한 삼국지 DS에서는 삼국지 10의 능력치로 나온다. 대신 무력이 장군이 되기 위해 70으로 올라가고 수군지휘가 74이다. 이 정도면 할 만한 장수이지만, 다른 시리즈와 달리 생년이 191으로 설정되어서 40대의 나이로 임관하는 총공깽급의 위화감을 느낄 수가 있다. 거기에 양양의 재야로 등장해 위나라의 신하가 되기도 한다. 숨겨진 능력치는 의리 83, 야망 7, 행운 9, 냉정 10, 용맹 12, 수명 B으로 나름대로 보정을 받았다.

삼국지 4를 리메이크한 삼국지 DS 2에서는 SP무장으로 등록되어서 실질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열세에 있는 촉한은 강유와 부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능력치는 통솔 85/무력 71/지력 75/정치 72/매력 73[15] 특기는 정보, 인재, 제조, 화공, 궁장, 화계, 낙석, 혼란, 수복, 매성, 진화, 난사, 연사, 철벽, 수습.

삼국지 9에서는 통솔력 80/무력 70/지력 75/정치력 70의 만능적인 능력치다. 강유, 부첨과 더불어 제갈량 사후 촉한의 셋 뿐인 희망이다. 병법들도 쓸 만한 분투, 연사, 충차, 고무를 가지고 있으며 조영도 가지고 있지만 조영의 효과을 감안하면 없어도 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6/무력 67/지력 75/정치력 68/매력 73. 특기는 기술, 보수, 치안, 화시, 일제, 진정, 나선. 총 7개다. 나헌이 처음부터 등장하는 PK전용 고전분투 시나리오에서 나헌보다 통솔력이 높은 장수는 등애, 강유, 육항, 양호 단 4명이며 곽회와 같은 수치의 통솔력이다. 물론 무력, 지력 둘 다 적당히 높은 수준이라 저 먼치킨들과 효용도를 비교하긴 무리지만.

삼국지 11에서는 통솔력 85/무력 71/지력 75/정치력 72/매력 73. 특기가 잉여인 철벽이지만 시대 보정상 별 문제없다. 동 시대 장수들 99%가 무력도 어정쩡하고 통솔은 바닥에 무특기인 잉여들인데 통솔 85의 벽은 아득하다. 특히 병과가 노병 S, 공성 S로 유용함을 더한다. PK라면 보좌 같은 보조계나, 능력치를 키워서 강력한 특기를 주는 게 좋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PK에서 다시 등장한다. 능력은 후반기 시나리오에서는 S급으로 강유, 부첨과 함께 촉의 희망이고, 영웅집결에서는 강주에서 등장, 양호군의 A급 장수가 된다. 군사 특기가 있어서 비책을 쓸 수 있다. 능력치는 통솔력 85/무력 70/지력 77/정치력 72 전작과 비교하면 무력이 70으로 내려가는 대신에 지력이 올랐다. 전법은 궁군병격으로, 성도의 엄안, 장임 등의 궁병 장수와 결합해 적군을 일점사하면 맵병기급 화력을 낼 수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이 84로 너프된 것 외에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1, 문화 1, 훈련 6, 순찰 5, 분전 2, 병기 1, 견수 6을 가지고 있다. 전수특기는 훈련으로 전법이 아군의 방어 2단계를 올려주는 전법 포인트 4의 수비명령이였지만 PK에서 연사로 변경되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84, 무력 70, 지력 74, 정치 70, 매력 72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3, 정치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불굴, 견뢰, 소욕, PK에서는 간파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묵수연구 Lv 4, 진형은 안행, 방원, 투석, 전법은 제사, 연노, 철벽, 고무, 투석, 친애무장은 초주, 혐오무장은 황호다.

4.2. 삼국전투기

슬램덩크 윤대협으로 패러디되었다. 나헌이 문무겸비 인재이며 변덕규로 나온 초주에게 배웠다는 걸 생각하면 싱크로가 꽤 맞는 패러디이다. 처음 등장한 영안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문무에 멘탈까지 갖춘 완전체, 천재,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서술되어 있다.

영안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떨쳤으며, 천재에 대한 편견과는 달리 성격도 좋아서 승진을 거듭해 왔지만 황호에게 찍혀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영안으로 좌천됐다고 묘사됐다. 영안에서 우대장군 염우를 보좌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위의 침공 소식이 들려왔고, 이에 염우가 서쪽으로 지원을 가면서 나헌과 2000의 병력만이 영안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촉이 망한 뒤 나헌과 영안의 군은 자연스럽게 위나라에 편입됐다.

이후 종회의 반란으로 혼잡한 사이 오나라가 밀고 들어왔고, 나헌은 2000 병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며 중앙에 도움을 청했다. 이제는 촉이 아니라 위나라라서 성도가 아니라 양양에 있는 형주제군사 진건에게 병사를 요청하라고 명한 건 덤. 병력이 많지 않았던지라 처음에는 농성으로 가려고 했는데, 막상 붙어보니 적인 보협이 많이 약해서 그냥 성 밖으로 나가 교전하여 그대로 박살냈다. 이때 묘사는 보협을 날려버리는 컷에서는 아랑전설 시리즈 죠 히가시의 옷을 입고 타이거 킥을 날린다.

보협이 박살난 후 오에서는 육항을 새롭게 보냈으며, 육항은 본디 촉과 오는 형제와도 같은 나라인데 어찌 위와 손을 잡고 오에게 창을 겨누나며 회유했지만 나헌은 그 형제와 같은 나라인 촉이 사라질 때까지 오는 무엇을 했냐고 반박하고[16] 이제와서 영안을 공격하는 것만 봐도 잇속을 채우려는 양아치짓이 아니면 뭐냐고 말했으며 동시에 그런 당신들과 어찌 일을 함께할수 있겠냐고도 말하며 거절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육항은 공성을 가했다. 보협과 육항은 공격의 질부터가 달랐기에 6개월을 버틴 끝에 결국 한계가 오게 되지만, 시의적절하게 호열의 지원군이 영안에 도착하면서 수비에 성공했다. 나헌은 이 전투를 계기로 인정받아 중용받지만 수명이 받쳐주질 못해 6년 뒤인 270년에 사망했다고 묘사된다. 진수를 추천해서 임관시킨 적도 있었다고 언급되는 건 덤.

나헌이 능력자라는 점은 잘 묘사했지만 딱히 충신이라는 언급은 없다. 사실 본 항목 상단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나헌을 진짜 촉한의 충신으로 볼 수 있는지는 다소의 이견도 존재하는 편. 충신이 아니다 라고 확언하기도 어렵고 강유와 같은 명백하고 적극적인 충신이었다고도 할 수 없다.


[1] 양양기에 따르면 나헌에서 헌자가 獻이라고 하는데 진서, 자치통감,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는 憲이다. 정사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개인적으로도 나헌을 알고 지내던 인물로 보이므로 憲자가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 [2] 아주 잠시지만 265년 이전에 임관한만큼 1년 남짓하게 위나라의 대신이었다. 이건 나헌 뿐만 아니라 촉한 멸망 이후 조위에 항복해 이후 서진에서 종사하게 되는 관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곽익, 극정, 초주, 진수 등등. [3] 국역 <양양기>의 경우에는 後主立太子(후주립태자)를 "후주(後主=유선)가 태자로 세워지자"로 오역함으로 언제 나헌이 관직에 올랐는지에 대한 논란이 조금 있었다. <동윤전>에서는 거의 동일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先主立太子(선주립태자)가 "유비가 태자를 세우고"로 번역되는데다가 立(립) 자체가 세운다는 의미를 가짐으로 <양양기>의 내용은 유선이 태자를 세운 시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4] 입술과 이빨의 관계를 말함. 즉 서로 돕는 관계 [5] 다만 이 부분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아래의 "충신?" 부분 참고 [6] 오나라가 잠시 순응해서 물러갔다는 부분은 <양양기>와 <자치통감>에서는 없고 <나헌열전>에서만 등장하는 기록이다. 비현실적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촉이 이미 망했으니 촉의 장수와 군사들이 말 한 마디면 동맹국이었던 오에 쉽게 귀순할 거라 생각하고 전투 준비를 안 해 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7] 진서 <나헌열전>에는 1년간 포위되었다고 서술하지만 < 자치통감>과 <양양기>에서는 6개월로 기록한다. [8] 5품의 직책이지만 장강 유역을 능멸하란 뜻을 가진 작위이니 오나라를 처바르라라는 뜻을 가진 직책이다. [9] 태시년이 265년~274년이다. 아마 265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때마침 나헌이 서진에 투항한 것도 264년이고. [10] 진수, 두진은 확실하고 진유의 아버지 진지는 초주와 함께 <구국론>을 지으며 친분있는 사이로 추정되므로 제자관계가 의심된다. 다만 진지가 죽고 진유는 유선이 진지를 추념하여 바로 황문시랑이 되었으며 초주 계열이 비교적 촉한 중앙정계에서 소외된 부분도 있으니 이는 추측의 영역이다. [11] 곽익의 경우는 홍대용이 좀 깐깐하게 평가할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는 촉 멸망 이후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3일간 크게 울었다. 많은 장군들이 빨리 항복해야 한다고 하자 곽익은 유선의 안위를 걱정해 항복하지 않다가 유선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6명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항복했다. 비록 강유처럼 마지막까지 촉한의 재흥을 노리다가 순사하진 않았어도 확실히 옛 군주인 유선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모습은 보였다. [12] 화양국지에 따르면 진수는 동문들을 비롯, 낙양으로 옮겨간 촉한 관헌들과 사이가 다 틀어졌다고 했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이양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 [13] 진수는 극정, 초주의 전을 쓰면서 이 두 사람은 진 왕조 때의 사적이 적고 촉나라 때의 사적이 많기 때문에 전을 만들었다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건 나헌 역시 매한가지다. 영안 공방전 이후 불과 6년만에 죽었으니까. [14] 두진 같이 아예 자신들 같은 촉한의 관헌들을 위나라가 쓰지 않을것이라고 예상하고 위나라 관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낙향한 사례나 할머니를 핑계로 등애의 초청을 거부한 이밀의 사례가 있다. [15] 삼국지 11과 같은 능력치다. [16] 이건 오나라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게 오는 분명히 지원을 보내려고 했었다. 단지 오의 예상보다 촉이 너무 잽싸게 항복해버렸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