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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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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한문 張聞天
한국식 독음 장문천
영문 Zhang Wentian
가명 뤄푸(洛甫)
출생 1899년 8월 30일 청나라 장쑤성 송강부 난후이 현[1]
사망 1976년 7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우시 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캘리포니아 대학 재학
직업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2.3. 중일전쟁 시기2.4. 국공내전 시기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2.6. 비참한 최후
3. 평가4. 가족 관계5.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공부하며 왕밍, 보구 등이 결성한 28인의 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으로 귀국한 뒤 보구의 파트너로서 활동했으나 대장정 시기 쭌이회의에서 보구를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지지해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의 1인자로 등극하는 데 기여했다. 그후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초대 소련주재 중국대사가 되어 1955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1959년 루산회의 때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마오쩌둥의 분노를 샀고 문화대혁명 류사오치, 펑더화이의 일파로 몰려 호된 탄압을 받았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899년 8월 30일, 장원톈은 장쑤성 송강부 난후이현의 등삼촌 장가택에서 태어났다. 장원톈의 선조는 북송 말기에 전란을 피해 청하군에서 푸둥으로 이주했다고 하며,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대부분의 장씨 일족이 베이징으로 이주했지만 장중청(張仲清)만이 푸둥 일대에 은거해 장쑤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장원톈의 조부 장상복(張祥福)과 아버지 장근매(張芹梅)는 농민이었고 어머니 금단화(金甜花)는 서당을 다닌 적이 있었다. 장원톈은 이 집안의 장자로 어릴 때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장원톈은 일찍이 서당, 장가택 소학교, 혜남 소학교에서 잇달아 공부했다. 그후1915년 장쑤성 공립 수산학교(현 오송 수산학교)에 입학한 후 2년 동안 공부했다. 그러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중퇴했고 1917년 난징 공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장원톈은 <신청년(新青年)>을 접하고 공산주의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5.4 운동이 발발한 후, 장원톈은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문예창작과 서양서적 번역에 참가했다. 그후 그는 난징에서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했다. 1920년 7월, 장원톈은 일본에 유학가서 일본어 공부를 하는 한편 철학, 사회과학 서적 및 기타 서적들을 탐독했다. 1921년 1월 귀국한 장원톈은 8월에 <중화서국>의 편집을 맡아 좌순생(左舜生), 톈한(田漢), 리다(李達), 하숙형(何叔衡)과 동료가 되었다.

1922년 1월 5일, 장원톈은 <중국의 근원적 문제점 및 해결>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나는 불합리적인 사회를 불안하게 생각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고쳐야 하는 가, 어떤 모양으로 변모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 무저항주의? 투쟁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나는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번민했다. 하지만 사람의인생은 영원하지 않은 법. 그렇다면 장점을 취하고단점을 버려야 하며, 마땅히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장원톈은 그해 8월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가서 몇 과목을 수강했지만 정식 학생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1924년 1월에 귀국해 중화서국 편집인을 계속 맡았다. 1924년 10월, 장원톈은 소년중국학회 성도별회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고 가입했으며 충칭 제2여자사범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 5월, 장원톈은 혁명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그리고 그해 6월, 그는 천윈(陳雲)의 소개를 통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0월에 모스크바의 손중산 대학으로 유학갔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장원톈은 계획경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도 민간 경제의 자율성을 허용한다는 부하린의 이론을 배웠고, 이는 장원톈의 경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레닌 주의 외에도 부하린의 이론을 철저히 익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1928년 초, 손중산대학 소공지국 일부에서는 학교지부국의 업무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학교 지부국은 당의 영도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선봉주의(先鋒主義)'라는 낙인을 찍고 공산당 소공지부를 개편했다. 1928년 여름 학교지부와 소공지국 간의 대립이 절정에 치닫자, 손중산대학은 열흘간 회의를 열어 학교지부국의 업무에 대해 토론했다. 당시 파벨 미프 손중산 대학 부교장은 학교지부국을 지지했으나 여전히 소수의 학생들은 학교지부국을 공격했다. 반대파는 학교 지부국 옹호파를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렀는데, 장원톈은 그 중 한 명이었다.

1928년 9월, 장원톈은 '붉은 교수 대학'에 입학했다. 1930년 5월 19일, 장원톈은 <양 노선의 투쟁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각국의 공산당은 당의 우경화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당내 좌경화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리리싼 리리싼 노선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다.

2.2.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1931년 2월, 장워톈은 상하이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31년 6월 말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샹중파가 공산당 경호대장이었다가 국민당으로 변절한 구순장의 밀고로 체포된 직후 처형되고 공산당원 30여 명이 잇달아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장원톈은 9월에 보구, 루푸탄(盧福坦), 리주성(李竹生), 캉성, 천윈, 황평(黃平), 류사오치, 왕운정(王雲程) 등 9명과 함께 임시중앙정치국을 구성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난 후, 장원톈은 상하이에서 일본에 맞서 싸우는 군대를 '항일 군벌'로 규정하고 당의 투쟁노선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1932년 12월, 상하이 지하 공산당은 또다시 파괴되었다. 정치국장 루푸탄 등은 체포된 후 변절했고 장원톈과 천윈은 하마터면 체포될 뻔했다. 이에 보구는 중앙 수뇌부를 전부 이전해 장시성 중앙 소비에트 지역에 자리잡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장원톈은 임시 중앙위언회를 따라 중앙 소비에트지역으로 이주해 중앙 정치국 선전부장, 공농민주정부 주석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장제스가 제4차 초공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보구는 중국 공산당 중앙국 회의를 소집해 중국 공산당 복건성 당서기 대리 뤄밍(罗明)의 "진지를 사수하며 게릴라전을 전개하자."는 주장을 '기회주의'라고 비난하고 반뤄밍 노선 관련 운동을 전개해 여러 간부들을 숙청했다. 1933년 2월 18일, 장원톈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관지에 '투쟁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논설에서 "뤄밍 동지의 기회주의 노선을 비판했고 보구를 지지했다.

1934년 1월, 장원톈은 중국 공산당 6기 5중전회에서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뒤이어 중앙 서기처의 서기가 되었다. 그해 2월, 그는 중앙 소비에트 제2대 회의에서 중앙저치국 인민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광창(廣昌)이 함락된 후, 장원톈은 중앙 혁명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보구, 오토 브라운의 군사 지휘를 비판했고, 이로 인해 그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34년 8월, 중앙 소비에트의 관청이 국민혁명군의 폭격을 받았고, 중앙 기관은 어쩔 수 없이 서금 운석산(瑞金雲石山)으로 이전했다. 그후 장원톈은 보구에게 기대를 접고 마오쩌둥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장원톈은 대장정에 참가해 마오쩌둥, 왕자샹 등과 함께 군사위원회 제2종대에 편입되었다. 세 사람은 행군하면서 여러 차례 교류해 얼마 안가 동맹을 맺고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공동으로 반대했다. 1935년 1월 15일 열린 쭌이 회의에서, 장원톈은 보구 등의 군사 노선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마오쩌둥의 1시간에 걸친 보구 등 28인의 볼셰비키 일당의 전면전 노선 비판에 찬성했다. 결국 보구는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 등 소련 고문단은 소련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군사 지휘관이 되었고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취임했다.

2월 5일, 홍군은 구이저우 임커우 진계명삼성 촌락에서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장원톈은 보구를 대신해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고 상무위원회의를 이끌었다. 또한 장원톈은 홍4군 지휘관 장궈타오의 "남하하여 쓰촨성과 티베트 국경 지대에 자리잡자"는 주장을 반대하고 마오쩌둥의 "북상하여 산시성 일대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자."는 주장을 지지했다.

홍군이 대장정을 완료하고 옌안을 근거지로 삼은 뒤, 장원톈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민당에게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장원톈은 사변 대응회의를 주재했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에서 장제스를 제거하자고 주장했지만, 장원톈은 "난징 정부와 대립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장제스와 협력해 일본과 맞서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공산당은 서안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37년 1월, 장원톈은 비밀리에 서안으로 가서 저우언라이, 보구 등과 함께 평화적 해결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논의했다.

2.3. 중일전쟁 시기

중일전쟁이 본격화한 직후인 1937년 8월, 장원톈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보고서를 통해 '항일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던 1937년 11월 말 왕밍, 캉성 등이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돌아와 마오쩌둥의 소극적인 항일 노선을 비판하고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스탈린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장원톈은 12월에 정치국 회의를 주재해 '현재의 정치 형세와 당의 임무'를 보고했다. 이 회의를 통해 왕밍, 천윈, 캉성이 추가로 중앙위원회 위원에 편입되었고 장원톈 본인은 마오쩌둥, 왕밍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결성했다. 한편 장원톈은 1938년에 장칭과 결혼하려는 마오쩌둥의 뜻에 반대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

장원톈은 6기 6중전회 이후 사실상 최고 지도자 지위에서 물러나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 교육을 맡았으며 당 중앙서기처 서기를 겸임했다. 그러나 그는 1941년 환남사변 이후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좌편향 오류를 여러 차례 자아비판해야 했다. 그러던 1942년 2월,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을 실시해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반대하며 왕밍을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숙청했다. 장원톈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호응해 1년 동안 산시성 농촌을 돌며 정풍운동을 전파했다. 또한 그는 공산당 중앙조직을 개편하고 중앙서기처 주석직을 설치해 마오쩌둥을 주석에 추대함으로서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의 명실상부한 1인자로 등극하도록 기여했다.

이후 장원톈은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산시성 경제 발전 실태를 조사했으며 당 기관지에 국내외 정세에 관한 논평을 여러차례 게재했고 1945년 6월 엔안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대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으며 중앙정치연구실 주임을 겸임했다.

2.4. 국공내전 시기

중일전쟁이 끝난 뒤, 장원톈은 당원들에게 자발적으로 중국 동빅 지역으로 가서 지방 업무에 종사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몇몇 도시에 근거지를 세우는 데서 그치지 말고 농촌으로 분산해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서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12월, 장원톈은 중공 허장성 당서기를 맡았다. 당시 허장성에는 무장한 도적떼가 많아 교통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원톄는 닝안현에서 먼저 도적떼의 실태를 조사하고 허장군구와 협력해 도적떼 토벌에 착수했다.

1946년 5월, 장원톈은 자무쓰(佳木斯)에 정식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허장성 지방정부를 건설하고 도적 토벌, 토지개혁 등의 업무를 주관했으며 허장군구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또한 1946년 7월 3~11일에 하얼빈에서 열린 동북국 확대회의에 참석해 <7.7결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그러던 1947년, 동북부 토지개혁 운동이 좌편향 경향을 띠면서 폭도들이 부농과 싱인들의 집을 파괴하는 등의 과격행위가 일어났다. 이에 장원톈은 허장 지역 신문에 폭도들의 행동을 성토하고 허장성 공업 및 상업 보호를 명령했다.

1948년 5월, 장원톈은 중국 공산당 동북국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동북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도 맡았다. 그후 그는 <동북경제 구성 및 경제건설의 기본방침에 관한 제강>을 기초로 '5가지 경제 성분'사상을 제기했다. <제강>은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고 전당대회에서 발표되어 각 해방구 경제건설의 방침으로 지정되었다. 1949년 3월, 장원톈은 중국 공산당 7기 2중전회에 출석했으며 4월엔 랴오닝성 당서기 및 랴오둥 군구 정치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생산 발전, 인민생활 개선 등을 주도했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1년 4월, 장원톈은 초대 소련 주재 중국 대사를 맡았다. 그는 중국 대사로서 국제 정세 분석과 정책을 중앙위원회에 적극 건의했는데, 특히 1951년 6.25 전쟁과 관련해 휴전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54년, 장원톈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고 9월엔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당선되었다. 이에 장원톈은 1955년 1월에 귀국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제1부부장을 맡아 저우언라이 총리의 외교 업무에 협조했다.뒤이어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던 1959년 7월 2일, 장원톈은 루산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및 국방장관 펑더화이 대약진 운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1958년의 정책 집행이 너무 급했고 일부 자금을 분산시켜 일부 필수 항목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1959년 이후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7월 17일에 회의 석상에서 펑더화이의 편지를 공개해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펑더화이가 당의 지도에 도전했다고 비판했으며 백단대전 때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일본군을 공격했던 일을 끄집어내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7월 19일 후난성위원회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는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결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현지 간부들의 실적 왜곡 및 성과 과장 문제는 상부의 계획이 지나치게 높은 것과 관련이 깊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정책의 이상은 위대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실패가 더 많고 득실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회의 석상에서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지지세력과 펑더화이 지지세력이 충돌하던 7월 21일 오후, 장원톈이 나섰다. 그는 3시간 동안 더욱 정확한 이론 용어를 써가며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그의 발언은 13개 항목으로 나뉘는데, 주로 대약진운동의 성과 및 결함, 문제점 분석, 주관주의와 편면성, 정치 경제 등 세가지 간의관계, 민주집중제의 결함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결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주관과 객관, 정신적 및 물질적 관계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이라고 지적하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당국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했다. 그의 발표 도중 마오쩌둥의 추종자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반격에 나섰다. 8월 2일부터 16일까지 여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8기 8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노선 문제를 거론하며 "루산회의는 우경향 기회주의로 기울어졌다."고 비판했다. 뒤이어 린뱌오가 "펑더화이는 큰 영웅이 되기 위해 마오쩌둥을 반대하고 있다."고 몰아세웠고 다른 상무위원들도 모두 펑더화이가 당권을 찬탈하려 하고 마오쩌둥의 퇴진을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그후 8월 11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 일파를 "자산계급 민주주의자로서 공산당에참가했다."며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웠고 참석자들은 마오쩌둥을 비판한 펑더화이, 황극성, 장원톈, 주소주 등을 비난했다.

8월 16일, 공산당 8기 8중전회는 "당의 총노선 수호, 우경 기회주의 반대 투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펑더화이, 황극성, 장원톈, 주소주 등을 '팽황장주 반등그룹'으로 지정해 자아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후 장원톈은 8월 24일 전국 외사회의에서 비판받았고 외교부 부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분노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고, 장원톈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2.6.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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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1일, 장원톈은 건국절 경축행사에 참가해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마오쩌둥은 환한 얼굴로 장원톈을 혁명 동지로 칭하며 그의 공헌을 칭찬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미 장원톈을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고, 장원톈은 곧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직면했다. 1968년 5월 17일, 장원톈은 집에 갇혀 감시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7월 12일, 중앙위원회는 장원톈을 중앙위원회 위원 직에서 제적하고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8월 9일, 장원톈은 높은 모자를 쓰고 "삼반분자(三反分子)"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든 채 쑨즈팡(孙冶方)과 함께 홍위병들의 욕설과 구타를 받으며 거리를 행진했다. 당시 고혈압과 심장병을 앓았던 장원톈은 그날 날씨가 무더워 견디기 힘들자 허리를 숙여 한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다가 결국 체력이 버텨주지 않아 거꾸러졌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그가 "죽은 척한다."고 욕하며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5시간 동안 끌려다니는 동안 그의 옷의 단추들은 전부 뜯겨졌고 코는 시퍼래졌으며 눈은 퉁퉁 부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집에 돌아온 장원톈은 부인에게 경과를 설명하면서 "오늘은 거의 죽을 뻔했다."며 탄식했다. 아내 류잉(刘英)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홍위병들에게 규탄받는 그 이를 볼때마다 하루종일 조마조마해졌고 해질녁이 됐을 때 문에 기대어 그 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장원톈은 10개월 동안 219건에 걸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조사 때마다 욕설과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지만 끝까지 참으며 침착한 태도로 자신을 변호했다. 캉성은 류사오치에게 불리한 증거를 얻기 위해 장원톈에게 류사오시의 '60인 반당 집단 사건'을 입증하라고 요구했지만 장원톈은 끝까지 거부했으며 그가 제공한 자료는 "61명 출소는 내가 서명한 것으로 당 중앙 지도부도 일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밝혀 캉성이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성은 이 자료를 왜곡 해석해 "류사오치, 장원톈의 반란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며 장원톈 부부를 반역도당으로 몰아갔다.

사흘 뒤, 장원톈 부부는 문혁 전담팀의 호송을 받으며 열살 된 양녀 샤오첸과 함께 광둥성 쟈오칭군 분구로 내려가 산중턱의 단층집에 갇혔다. 장원톈은 그곳에서 '장보'라는 가명으로 불렸고 본명을 밝히는 게 금지되었고 전화를 걸지 못하고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했으며 매달 군분구 보위과에 사상과 언행을 서면으로 보고해야 했다. 그후 장원톈은 매일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산보하는 것으로 가슴 속에 품은 한을 달랬다.

그러던 1971년,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린뱌오 9.13 사건으로 죽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71세였던 장원톈은 문화대혁명의 형세와 자신의 운명이 바뀔 것임을 직감하고 사회주의의 기본 이론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971년 10월 12일부터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며 비밀리에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논문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무산계급 독재 하의 정치경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공적인 관계, 당내 투쟁, 당의 노선 정책 등을 다루었다. 그는 극좌 노선과 문화대혁명의 실책을 비판하고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문제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다. 그가 본 사회주의 사회의 임무는 생산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적과 아군의 모순이라고 과장해 공산당에 지대한 위해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1972년 4월 2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마오쩌둥에게 장원톈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복직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중앙위원회는 1972년 5월부터 장원톈 부부에게 연금을 지급해주기로 결정했다. 이후 장원톈은 1974년 10월 18일에 마오쩌둥에게 서신을 보내 "중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으나 시골에선 치료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시력을 거의 잃었던 마오쩌둥은 비서에게 편지를 낭독하게 한 뒤 주위 직원들에게 "그가 베이징에 사는 건 허용할 수 없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가도 된다."라는 지시를 작성하게 했다. 이리하여 장원톈 부부는 1975년 8월 23일 광둥을 떠나 장쑤성 우시 시로 이주했다. 장원톈은 심장병에 시달려 여러차례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는 베이징에 가서 치료받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마오쩌둥은 끝내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6년 7월 1일 오후 7시 30분, 장원톈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후 1979년 8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제명을 철회하고 장원톈을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3. 평가

중국 공산당 주류사학은 장원톈이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자로서 공산당을 위해 공헌을 했다며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 역시 "장원톈은 중앙 소비에트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이것은 단지 그의 지위와 신분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며 높게 평가했다. 1979년 8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에서 열린 장원톈 추도대회에서, 덩샤오핑은 "우리 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우리 당의 상당한 기간 동안 중요한 지도자."라는 추소사를 보냈다. 또한 인민일보는 장원톈을 "중국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구세대 무산계급 혁명가"라고 평가했다.

장원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루산 회의 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삼반분자"라는 비난을 받은 것 외에 주로 옌안 정풍운동 시기를 조명한다.마오쩌둥은 왕밍 등 소련 유학파들이 공산당을 잘못 이끌어갈 때 장원톈 역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장원톈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장원톈이 전반적인 국면을 고려하지 않고 자아비판의 정신을 잃었다고 봤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장원톈에 대한 불만은 1959년 루산회의 때 증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장원톈이 혹독한 탄압을 받는 계기로 작용했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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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톈과 부인 류잉(刘英)

장원톈은 18세 때 부모의 권고로 위월련(衛月蓮)과 결혼헀다. 두 사람은 큰 딸 장유영(張維英)과 둘째 딸 장인영(張引娣)을 낳았다. 1928년, 장원톈은 소련에서 안나 레오니도프나 구르빈스카야를 만나 성관계를 가졌고,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1931년 장원톈이 귀국한 후, 구르빈스카야와 그녀의 아들은 소련에 남아있었는데, 이 아이는 1941년 독소전쟁 도중 전사했다.

장원톈은 중앙 소비에트에서 당시 공산당 중앙국 순시관이었던 류잉과 만났다. 두 사람은 대장정에 가담해 기나긴 행군을 완수했고, 산시성 북부 지역에 도착한 후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아들 장홍생(張虹生)을 낳았다. 류잉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장보, 유엔 주재 경사이사회 부대표, 주소련 대사관 참사관, 외교부 당위원, 인사국장, 부감위 서기 등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류잉은 전국 정치협상위원, 상무위원, 중기위원 등의직책에 선출되었고 2002년 8월 26일에 사망했다.

장원톈의 차녀 장인영은 외교부 타자원으로 근무했고 상하이의 한 자전거 공장에서 일반 직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장홍생은 신강생산건설 병단에서 일했고 난징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1997년 정년퇴직했다.

한편, 장원톈과 류잉은 1961년엥 베이징 시내를 떠돌고 있던 샤오첸이란 이름의 고아를 입양했다. 이 여자아이는 현재 성인이 되어 베이징에서 살고 있다.

5. 참고 문헌


[1] 현재 상하이 시 푸둥 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