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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FRS The Right Honourable 바이런 남작 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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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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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바이런 경 The Lord Byron |
작위 |
제6대 바이런 남작 6th Baron Byron |
출생 | 1788년 1월 22일 |
잉글랜드 런던 | |
사망 | 1824년 4월 19일 (향년 36세) |
오스만 제국 메솔롱기[3] | |
직업 | 시인, 정치인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
배우자 | 앤 이자벨라 밀뱅크[4] (1815년 결혼/ 1816년 이혼) |
자녀 |
에이다 러브레이스 알레그라 바이런[5] 엘리자베스 메도라 리 (추정) |
아버지 | 존 바이런 |
어머니 | 캐서린 고든 |
이복형제 | 어거스터 리 |
서명 |
1. 개요2. 생애
2.1. 17세, 케임브리지 대학교2.2. 상원의원 진출2.3. 여성편력
3. 가족2.3.1. 잉글랜드에서
2.4. 31~36세, 서사시, '돈 후안' 집필(1819~1824)2.5. 1823년, 35세,
그리스 독립 전쟁 참여2.6. 1824년, 36세, 병사2.3.1.1. 24세, 캐롤라인 램(1812)2.3.1.2. 24~25세, 제인 엘리자베스 스콧(1812~1813)2.3.1.3.
어거스타 리2.3.1.4. 1815년 27세에 앤 이자벨라와의 결혼, 1년 후 이혼
2.3.2. 잉글랜드를 떠난 후3.1. 후손
4. 작품5. 여담6. 어록7.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제6대 바이런 남작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와 더불어 2세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영어권에서는 George Gordon Byron이란 이름보다는 주로 Lord Byron, 바이런 경(卿)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1788년 1월 22일에 존 바이런과 그의 후처[6] 캐서린 고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바이런은 잘생긴 귀족이었지만 품행이 개망나니 수준이라서 많은 빚을 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 존 바이런은 1791년 아들 조지 고든이 고작 3살 때 객사했다.유모 메이 그레이가 독실한 청교도 신자라 금욕적이어서 조지는 수시로 짜증을 냈다고 한다. 한편 그 유모는 7세부터 조지를 성적으로 추행했다고 한다. 덕분에 유모 메이 그레이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가 엄청났다.
9세가 되었을 때에는 증조부가 죽어 조지 고든은 바이런 경의 타이틀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가 조지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데려가, 13세가 되는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다. 안짱다리에 선천적으로 오른발을 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컴플렉스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아들에게 냉담했다고 한다.
2.1. 17세, 케임브리지 대학교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해, 어려서부터 잘 했던 문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일면을 닮았는지 1학기를 술로 지새다가 큰 빚을 졌고, 이 빚을 갚기 위해 시집 <게으른 나날>을 발표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문학 잡지 <에든버러 리뷰>에서 이 작품을 대차게 깠고, 이에 대해 열받은 바이런은 익명으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라는 책을 써서 <에든버러 리뷰>를 먼지나듯이 깠다.2.2. 상원의원 진출
졸업 후에는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24세가 된 1812년에 방직공의 임금인상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시기 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했다.그는 조각 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으나 오히려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동정을 샀고, 얼굴이 워낙 우월하다 보니 크게 문제는 안 된 모양이다. 당시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고 바이런이 지나가면 온 동네 여자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2.3. 여성편력
그러한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부친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여러 상대들과 만나 사귀었는데, 남녀도 귀천도 가리지 않았던 성편력때문에 현대의 관점으로 보기에도 파격적일 것이다. 유부녀, 과부, 얀데레뿐만 아닌 이복 누나도 있었고, 심지어 그리스로 가는 도중에 어느 유부녀와 하룻밤 NTR했다가 남편에게 걸려서 결투를 한 적도 있다. 그 밖에도 내키는대로 생활을 하며, 귀족이자 상원의원이면서도 하층민 여성과 성관계하기를 꺼리지 않았다.결국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1816년 추방당하듯이 잉글랜드를 떠나지만, 오히려 이 때부터가 그의 본격적인 여성편력의 시작이었다.
잉글랜드를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여러 여성들과 관계했는데, 문헌에 따르면 당시 그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 최대 약 2백여 명에 달한다고 써있다. 심지어 스폰서였던 '메리 셸리'의 의붓여동생 '클레어 클레어몬트(Claire Clairmont)'와도 성관계를 맺어 딸이 생기면서 사이가 복잡해졌다. 참고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고, 메리의 어머니는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저서 <여성의 권리옹호>를 발표하며 평생을 여성 인권 향상에 매진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이다.
사실 귀족 + 명문대 엘리트 + 고위 정치인 + 유명한 시인이라는 엄청난 스펙에다 외모까지 뛰어난 남성이 낭만시로 단련된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면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매력에 빠져들지 않기가 힘들다. 현대로 비교할 만한 인물이라면 역시 같은 잉글랜드인이자 예술인이며 여자 4천여 명, 남자 4백여 명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롤링스톤즈의 보컬 믹 재거가 있다.[7] 무엇보다도 둘 다 쾌락주의자이자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그래도 믹 재거는 자기 자식들을 끔찍히 아끼고 경제적 지원을 해주며 돌보기라도 했지만, 바이런은 사생아인 알레그라부터 유일한 적자인 에이다도 버리다시피 할만큼 아버지로서도 함량 미달이었다.
2.3.1. 잉글랜드에서
2.3.1.1. 24세, 캐롤라인 램(1812)
캐롤라인 램(Caroline Lamb).
바이런과 사귄 여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멜버른 자작부인 캐롤라인 램으로 후에 영국 총리가 되는 멜버른 자작 윌리엄 램의 아내였다.[8] 남편 윌리엄이 정치에 신경쓰느라 아내에게 소홀한 틈을 타 캐롤라인은 젊고 진취적인 낭만파 시인이자 상원의원인 바이런에게 빠졌다.
하지만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런에게도 캐롤라인과의 스캔들은 상당한 타격[9]이었던지라 슬슬 그녀를 피해다녔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바이런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편지 세례는 물론 그가 가는 파티마다 모두 참석해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며 스캔들에 더욱 불을 붙여버렸다. 그런데도 바이런이 자신을 계속 피하며 거리를 두자 캐롤라인은 바이런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해 그가 아끼는 책에 "Remember me!(절 기억해 주세요!)"라고 휘갈긴 글씨를 남긴다. 그 스토킹에 바이런은 캐롤라인에게 공포마저 느껴 노골적으로 피해다니던 중 어느 사교계 파티에서 딱 마주쳤는데, 캐롤라인은 바이런과의 심한 말다툼 끝에 열받은 나머지 바이런이 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손목을 대놓고 그어버렸다. 이런 캐롤라인에게 질려 바이런은 결국 이별편지를 보냈는데 캐롤라인은 평생 이 편지를 간직했다고. 이후 바이런을 모델로 한 소설 <글래나번>을 쓰기도 했다.
반면 바이런은 이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방탕했던 여태까지의 자신을 반성하고 이후 여성편력을 자제하게 되었다.
2.3.1.2. 24~25세, 제인 엘리자베스 스콧(1812~1813)
이 여인 역시 유부녀였다.2.3.1.3. 어거스타 리
이 여인은 자신의 이복누나였다.2.3.1.4. 1815년 27세에 앤 이자벨라와의 결혼, 1년 후 이혼
중증 얀데레 캐롤라인에게 크게 데여서인지 진지한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1815년 웬트워스 여남작 앤 이자벨라 밀뱅크(Anne Isabella Milbanke)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딸도 한명 낳았지만[10] 워낙 부부간의 성격 차가 커서 1년만에 이혼해버리고 만다. 아내와 별거했던 이 시기에도 여성 편력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한 뒤에 바이런은 친딸에게 어떠한 양육권이나 친권도 행사하지 않았다.앤이 낳은 이 딸은 바이런의 유일한 정식 결혼에서 태어난 단 하나뿐인 적출 자식이다.[11] 이 딸은 나중에 홀로 자수성가해 자라서 최초의 컴퓨터인 찰스 배비지의 애널리틱 엔진을 프로그래밍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최초의 프로그래머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어거스터 에이다 킹이다. 천재적인 재능은 집안의 내력인 듯.
2.3.2. 잉글랜드를 떠난 후
2.3.2.1. 스위스
2.3.2.1.1. 1816년 28세, 클레어 클레어몬트
이번에는 클레어 클레어몬트라는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 여인의 의붓자매가 메리 셸리였다.1816년, 클레어(18세)는 메리(19세)에게 함께 영국을 떠나 제네바 호수 근방에서 살고 있는 당대의 셀럽이자 시인 바이런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클레어는 얼마 전까지 런던에서 바이런과 짧은 사랑을 했었지만, 클레어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기도 했고, 바이런의 아이[12]를 임신한 사실에 대해 알려주고자 바이런을 다시 찾아가고자 했던 모양이다.
이때 메리는 당시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불륜 관계이자 미래의 남편이 될 유부남 퍼시 비시 셸리(24세),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윌리엄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기에 이를 승낙하고 '바이런'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제네바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바이런은 당시에도 엄청난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모두 잠깐씩이라도 바이런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바이런 집 근처의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에게 바이런을 훔쳐볼 수 있는 망원경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관련 위키 참조
당시 바이런은 21살의 젊은 의사이자 작가 지망생이었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를 주치의로 고용해 함께 지냈다.
그렇게 메리 일행과 바이런, 폴리도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바이런과 클레어는 셸리와 폴리도리의 주재로 잠시 밀회를 즐겼으나 결국 바이런은 클레어를 거부했고 클레어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딸을 출산한다. 하지만 딸인 알레그라는 요절했는데, 알레그라의 출산 후 다시 베네치아까지 쫓아가서 매달린 클레어를 바이런이 또다시 거부했으며 바이런은 클레어가 자신과 거리를 두는 조건으로 알레그라를 키우기로 했지만 바이런은 매정하게도 딸을 자기 친구에게 보내버렸다.
애를 영국에서 우리가 키우겠다고 권유한 클레어와 아이의 외삼촌인 퍼시 비시 셸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은 알레그라를 이탈리아 수도원의 기숙학교로 보내버린다. 알레그라는 결국 말라리아(혹은 발진티푸스)로 추정되는 고열로 1822년 4월에 사망했고, 아이가 아프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버지인 바이런은 쿨하게 무시해버렸던지라 본국에서도 바이런은 또다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2.3.2.1.2. 프랑켄슈타인과 뱀파이어의 탄생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다섯 사람은 바이런의 별장 안에 모였다. 다섯 사람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따분해하고 있었는데 그 때 바이런이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한다. 각자 자기만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써보자는 것이었다. 메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퍼시는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바이런은 흡혈귀를 소재로 하는 단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죄로 처벌당한 해골 아가씨 이야기를 했다.훗날 폴리도리는 바이런이 버린 흡혈귀 단편을 소재로 《 뱀파이어》를 집필했는데, 이는 영어로 출간된 최초의 흡혈귀 소설이 된다. 그러나 폴리도리는 도박빚에 시달리며 겨우 26살 나이로 음독 자살하여 요절했다. 관련 위키 참고
메리는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메리는 퍼시와 바이런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 갈바니즘'(galvanism)에 관한 대화였다. 갈바니즘은 죽은 개구리 뒷다리가 전기 자극을 받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의사 갈바니의 실험에서 유래한 용어였다.
이 대화를 들은 메리는 꿈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괴물 옆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게 된다.[13] 후에 이것을 토대로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해 대성공을 거둔다.
2.3.2.2. 베네치아에서
2.3.2.2.1. 마리아나 세가티
베네치아에서 만난 여인1. 기혼녀.2.3.2.2.2. 마가리타 코그니
베네치아에서 만난 여인2. 기혼녀. 문맹이었고, '조지 고든 바이런'과 만나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후에 바이런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자살한다.2.4. 31~36세, 서사시, '돈 후안' 집필(1819~1824)
미완성 풍자 서사시. 비평가들에게는 혹평을, 대중들에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린 작품.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출신의 돈 후안이라는 주인공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그리스,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여인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
후술하듯이 "그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언제나 이상하니까, 소설보다 더 이상한 것이니까."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실이 소설보다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2.5. 1823년, 35세, 그리스 독립 전쟁 참여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
- 유럽 각국을 향한 조지 고든 바이런의 그리스 독립전쟁 지원 호소문
- 유럽 각국을 향한 조지 고든 바이런의 그리스 독립전쟁 지원 호소문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하였는데 유명한 시인이자 젊은 정치가 귀족으로 19세기판 세계적 인기 아이돌이자 연예인이었던 그의 참전은 그 당시 오스만 제국에게 지배당하던 약소국이었던 그리스인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가 생판 타국인 그리스 독립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낭만파 시인답게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과 그리스 시 등, 그리스 고대 문학에 매료된 대표적 그리스빠였기 때문. 고대 그리스 문화를 소재로 한 시도 적지 않다. 본 문서의 바이런의 초상화가 그리스식 옷을 입은 모습인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독립전쟁 참여를 위해 그리스에 가니 거대한 오스만 제국[14]에 맞서 하나로 단결해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서로 파벌이 나뉘어 다투고 있던 그리스 독립군의 개판 오분전의 현실에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2.6. 1824년, 36세, 병사
이듬해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후, 현지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이 더 심해져 그리스 메솔롱기에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사후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사원에서 거부했고, 할 수 없이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런이 영국 낭만시에 끼친 영향이 워낙 지대했기에, 1969년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건립되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그를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근처에 남자를 안고 있는 여성의 동상이 있는데 바로 바이런을 안고 있는 아테나 여신으로, 이런 동상이 있는 것만 봐도 바이런의 대접이 그리스에서 어떠한지 알 수 있다.
3. 가족
- 이복누이: 어거스터 리(Augusta Leigh)
- 딸: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어거스터 에이다 킹(Augusta Ada King, Countess of Lovelace)
3.1. 후손
유일한 적출 태생의 자식인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초대 러브레이스 백작 윌리엄 킹-노엘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으나, 현재는 에이다의 딸인 앤 블런트를 제외하고는 후손이 끊긴 상태이다. 웬트워스 남작 위는 앤 블런트의 쪽의 후손에게 내려오고 있다.[15][16]에이다의 딸 앤 블런트(1837–1917)와 외증손녀 주디스 모녀는 영국의 말 브리더 역사에서 업적을 남겼다.
- 첫째 바이런 킹 노엘(1836–1862): 12대 웬트워스 남작으로 26세로 후손 없이 요절했다.
- 둘째 앤 블런트[17](1837–1917): 브리더이며 조카 에이다 밀뱅크가 후손 없이 죽어서 15대 웬트워스 남작위를 받았다. 남편과 중동을 여행하며 캐러번으로부터 아라비아 말(馬)을 입수해서 영국으로 가져왔다.
- 주디스 블런트-리턴(바이런의 외증손녀, 16대 웬트워스 남작[18]): 앤 블런트의 외동딸이자 같은 브리더로 16대 웬트워스 남작이자 리턴 백작 부인이다. 영국 말의 90프로 이상이 아라비아 말의 혈통을 가지게 만들었다.
- 셋째이자 차남 레이프(랠프) 밀뱅크(1839–1906): 13대 웬트워스 남작이자 1893년에 2대 러브레이스 백작이다.
- 에이다 밀뱅크(1871–1917): 차남 레이프 밀뱅크의 외동딸로 레이프 밀뱅크의 사후 14대 웬트워스 남작이 되었다. 후계자 없이 46세에 사망했다.[19]
- 앤 블런트의 후손
4. 작품
- 해럴드 도령의 순례(1812 ~ 1818)
- 시옹의 죄수(1816)
- 프로메테우스(1816)
- 마제파(1819) + 프래그먼트(fragment)
- 돈 후안(1819 ~ 1824, 미완성)
5. 여담
-
케임브리지 3학년 때 신학 시험에서 아래의 한 문장만을 적어서 이 시험을 최고점으로 통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창조주를 뵙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도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일화는 유독 한국에서만 돌아다니는 근거없는 썰에 불과하다. 원래 외국에서 어떤 이름 모를 학생이 시험에 단 한 문장을 남겼다는 스토리로 돌아다니던 것이며, 바이런의 일화가 아니다.
위 문구는 리처드 크래쇼(Richard Crashaw)의 시에 등장하는 내용을 약간 바꾼 것이다. 바이런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출간된 'Epigrammatum Sacrorum Liber'[23]라는 시집에 등장한다. 'Nympha pudica Deum vidit, et erubuit'라는 라틴어로 쓰였고, 크래쇼 스스로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라 영역하였다.
-
또 다른 잘 알려진 설화가 있다. 1812년 <해럴드 도령의 순례> 1, 2권을 발간했는데, 이 2권이 당시 영국 사교계에 일약 반향을 일으키면서 바이런이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설화는 술에 취해 비몽사몽한 바이런에게 편집장과 발행인이 그가 순식간에 유명해졌음을 말하자, 차근차근 듣고 있던 바이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이 말은 '문학에 대한 조예가 없음에도 작품을 소모하는 대중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그런 대중에 의해 형성되는 문학시장에 매인 자신에 대한 자조'가 섞인 말로 여겨진다.
그러나 편집장과 발행인에게 술에 취한 채로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해당 문구는 바이런의 메모에 적혀있다가 바이런 사후 토마스 무어의 책에서 인용[24]되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이름 높은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바로 바이런의 딸이다. 에이다의 어머니는 바이런 집안에 흐르는 방탕함과 무절제함이 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딸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문학공부를 철저히 방해하고 이과 분야만 배우게 했는데, 그 결과 에이다는 희대의 공순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신경 썼지만 결국 바이런의 피는 어디 가지 않았다.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켰고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36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와인과 여인과 유희를 예찬하며 아래와 같은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Let us have wine and women, mirth and laughter, Sermons and soda water later."
"와인과 여인, 기쁨과 웃음을 즐기자, 기도와 소다수는 뒤로 미루고."
- 애니메이션 빌리와 맨디의 무시무시한 모험에서 유령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주인공 빌리의 입에서 어느 날 튀어나왔는데, 상술된 선천적 오른발 기형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사실도 고증이 되어 있다. 빌리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스퍼그란 불량배를 빌리와 함께 조롱시를 지어 모욕하나, 결국 스퍼그에게 빌리와 함께 세트로 박살난다.
6. 어록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언제나 이상하니까, 소설보다 더 이상한 것이니까. (시 '돈 후안' 中)
고난은 진리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남자의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삶 그 자체이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라.
부를 얻는 것에 절실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부를 얻는 것에 절실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다.
우리는 이들을 난동분자, 위험분자, 무식꾼, 폭도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농지에서 일하고 우리의 집안일을 거들고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도 바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신들의 생계수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락함까지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용할 빵을 얻는데 기계가 정말로 장애물이 되기 전까지 이들은 결코 기계를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안락함을 파괴한 것은 기계를 부수는 그들도 기계도 아닌 바로 정부의 참담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을 수 있습니까?
러다이트 운동 당시 의회 연설 중
그렇지만 우리의 농지에서 일하고 우리의 집안일을 거들고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도 바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신들의 생계수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락함까지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용할 빵을 얻는데 기계가 정말로 장애물이 되기 전까지 이들은 결코 기계를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안락함을 파괴한 것은 기계를 부수는 그들도 기계도 아닌 바로 정부의 참담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을 수 있습니까?
러다이트 운동 당시 의회 연설 중
7. 관련 문서
- 낭만주의
- 존 윌리엄 폴리도리: 그의 주치의
- 메리 셸리
- 퍼시 비시 셸리
- 어거스터 리
[1]
큰할아버지
[2]
사촌 간으로
영국 해군
대장(Admiral)까지 역임했다.
[3]
現
그리스 에톨리아 아나키아 주 메솔롱기.
[4]
제11대 웬트워스 여남작이기도 하다.
[5]
5세에 세상을 떠났다.
[6]
전처 아멜리아 달시는 딸
어거스터 하나만 낳고 사별했다.
[7]
다만 믹 재거는 숫자가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8]
윌리엄 램은 총리 임기 중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 강화에 힘썼고 이후
대영제국의 토대를 닦는 상당한 명재상으로 꼽힌다. 보통 풀네임보다는 "멜번"경이라는 호칭으로 알려져있다.
[9]
그 이전에도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이 있었다.
[10]
바이런은 이 딸에게 자신과 근친상간 논란이(...) 있었던 이복누이 어거스터의 이름을 지어줬다. 딸의 풀네임은 어거스터 에이다 킹.
[11]
즉 나머지는 다
사생아다.
[12]
런던에서의 관계로 바이런의
자식을 잉태했고 이 아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1817~1822)이다. 바이런과 완전히 결별하고 나서 태어났다.
[13]
Mary Shelly, "Author’s Introduction in 1831," Frankenstein (1818; New York: Penguin Books, 2000), p. xxiii.
[14]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가 가속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어지간한 반란을 제압할 국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15]
웬트워스 남작 작위위키백과
[16]
러브레이스 백작위는 여성의 계승이 허용되지 않아 초대 러브레이스 백작 윌리엄이 에이다의 사후 결혼한 후처 소생의 후손들로 이어졌으나 5대 러브레이스 백작 피터 킹이 2018년 1월 31일 별세하면서 대가 끊겼다.
[17]
Judith Blunt-Lytton, 16th Baroness Wentworth위키백과
[18]
Judith Blunt-Lytton, 16th Baroness Wentworth위키백과
[19]
러브레이스 백작위는 웬트워스 남작위와는 달리 여성의 계승이 허용되지 않아 초대 러브레이스 백작이자 에이다의 남편인 윌리엄 킹노엘이 에이다의 사후 들인 후처 소생의 후손들로 이어졌으나 5대 러브레이스 백작 피터 킹이 2018년 1월 31일 별세하면서 대가 끊겼다.
[20]
Noel Lytton, 4th Earl of Lytton위키백과
[21]
리턴 백작위는 빅토리아 시대 유명 소설가 겸 극작가인
에드워드 불워리턴에게서 유래한 작위이다.
[22]
John Lytton, 5th Earl of Lytton위키백과
[23]
A Book of Sacred Epigrams
[24]
Letters and Journals of Lord Byron: With Notices of His Life (1830)
[25]
잔 다르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도 18세기 이후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을 비롯해서 잔 다르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났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 발언에 대해 바이런에게 있어서 하나는 위대한 시인으로서, 또 하나는 귀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며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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