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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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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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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6대 국회의원
김두한
金斗漢 | Kim Du-han
파일:장년김두한.jpg
출생 1918년 6월 23일[2][3]
경기도 경성부 삼청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사망 1972년 11월 21일[4] (향년 54세)[5]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
묘소 장흥 신세계공원
본관 신 안동 김씨[6]
의송(義松)
부모 아버지: 김좌진
어머니: 김계월
형제자매 여동생: 김석출
남동생: 김철한[7]
배우자 이재희[8], 김부미[9], 박정인, 김순옥[10]
자녀 아들: 김경민[11], 김주택[12], 김현성[13], 김범상[14]
딸: 김을동, 김영채[15]
친인척 외손자: 송일국
외손녀: 송송이
진외증손자[16]: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신체 176cm[17], 93kg[18]
학력 교동공립보통학교 (1학년 / 중퇴[19])
병역 해당사항 없음[20]
종교 불교[21]
사인 고혈압, 뇌출혈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3, 6
최종 당적

[[신민당(1967년)|
파일:0789.png
]]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논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소속 정당8. 선거 이력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정치깡패, 정치인.

독립유공자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근현대사 인물이다. 광복 후 김구 염동진 백색테러 단체인 백의사[22] 신익희, 유진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주요 간부를 맡은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 감찰부장으로 활동하며, 반공활동과 본인의 부하들과 학도병을 이끌고 6.25전쟁에 참전하는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6.25 전쟁 이후에는 제3대 민의원 선거 및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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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거물급 정치인은 되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까지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즉,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인 셈이었으며 김두한은 본인의 이익, 감정, 정의감에 따라 여러 활동을 했다. 그는 독립군이나 투사만큼 특출나지는 못했고 한편으로는 잘못된 행동도 많이 한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의 한을 풀어주고 통쾌함을 준 적도 있는 인물이다. 이승만, 김구 등 거물 정치인들이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사람이라면 김두한은 그들이 주도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갔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흐름에 언제나 예스맨처럼 따라가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국회의원 재임 중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반대 의사를 표현해[23] 4.19 혁명에 참여한 것과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벌여 내각 총사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등 반 독재의 모습과 사망 직전까지 꼬박꼬박 기부를 행한 선행이 세간에 유명해져서 여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박문영 작사 · 작곡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다른 인물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김두한은 정치깡패 시절 여러 차례의 백색테러, 살인, 학살[24] 등 각종 중범죄를 저지르고 과거에 친구였던 정진룡을 살해한 사건으로 법정에 서서 그간의 행적들로 인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등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확실한 것은 김두한은 공과 과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점,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온갖 역사적인 인물과 극히 밀접한 관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이다. 관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승만이 군직을 주거나 자유당[25]이나 민주당[26]에서 우리와 함께 하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의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역사적 인물 중에서 극단적으로 미화, 과대평가[27]되거나 극단적으로 헐뜯어서 과소평가[28]되기 쉬운 인물이다.

또한 정치인이 아닌 싸움꾼으로써 평가할 때, 그가 당대의 압도적 최강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공식적인 매치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한 증언들에만 의존해야 하는 영역이고 김두한 본인의 발언은 워낙 허풍이 강하기 때문에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조직 보스임에도 싸움 실력이 영 별로였다는 증언이 많이 나왔던 이정재에 비하면 김두한은 잇뽕[29]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방에 사람을 기절시켰다는 무용담 증언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만큼, 허풍만 떠는 빈강정 수준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30]

사실 김두한에 대한 극단적인 미화나 과소평가는 어디까지나 김두한 자기 스스로 부려댔던 허풍과 엮인 사건들로 인해 실제보다 더 거물급 인물로 보는 데서 시작된 것일 뿐이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정의감에 불타는 협객이 아닌 그저 시정잡배 양아치에 불과했고, 당시 사람치고는 싸움 좀 하고 말빨이 좋아 운 좋게 정치인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다. 막말로 혼란스러웠던 근현대사에 영합해 정계에 목숨줄이라도 붙였던 것이지, 현대 같았으면 정치인 자리는커녕 어디 뒷골목에서 허세나 부려대다 소리없이 살해당했을 졸부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정치 말년에 일으킨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31] 한국 역사 및 정치사에서 김두한이 남긴 족적은 그냥 완전히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별 볼일없는 일일 뿐이며, 근현대사를 논할 때 김두한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연구대상이 될 위인들은 무수히 많다.

3.1. 긍정적 평가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구[32][33]
"뭐랄까, 유교적으로 좋다는 가치, 예의라든가 성실이라든가 그런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죠. 한자로 표현하자면 '조잡하다' 할 때의 (거칠 조)자 이미지,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일단 강했죠. (들 야)자가 갖는 이미지도 있었고. 사람들이 흔히 '깡패'하면 떠올리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야비하다' 할 때의 그 (낮출 비)자일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건 없었어요. 粗(조)하고 野(야)하지만 卑(비)하지는 않았다고 할까요. 원래 제대로 된 큰 깡패는 야비하지 않은 법이거든요. 간단치는 않았어요. 왜 설명할 때 그냥 한 문장으로 하면 안되고, ' 그러나' 하면서 주석이 붙어야 되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따를 만한 표상이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협객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웅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꼭 한 명쯤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길거리 보통 깡패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죠. 다양한 지점에서 복잡한 의미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
권오기[34]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 안타깝다."
이만섭[35]

3.2. 부정적 평가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한홍구

4. 논란

4.1. 김좌진 친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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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 여부 관련 논란

김두한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 측에 붙어서 부역을 한 적이 있다. 또한 고려공산당(독립군사령관 김좌진 장군님을 암살한 박상실이 소속되어 있던 공산주의 정당)의 당원이자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여운형을 습격한 적도 있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한 목록에도 김두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친일인명사전도 일제 부역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즉, 강제적인 징역이나 징병, 그리고 이를 피해 대체부역한 사람들이 제외되었다. 그래서 김두한을 친일파 목록에 삽입하면 친일파 기준이 급격히 내려가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는 몇 배로 두꺼워진다. 이 점은 김인호의 《태평양전쟁과 조선사회》(2014)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데 일제 부역자로 분류될 민중들이 많다.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숭실사학 2015, vol., no.34, 통권 34호 pp. 255-294 (40 pages))에선 김두한도 그런 인물로 보이는데, 일제의 부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해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B,C급 전범 판정을 받은 조선인도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 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한다. 2차대전 조선인 전범은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당연히 위의 사전이나 보고서에서 제외되었다. 김두한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면 형평성에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 것이 문제다.

5. 기타

  • 김두한은 학력과 달리 머리 매우 좋았다. 실제 증언 심영을 저격할 때 미행했는데 머리를 교묘하게 써서 종로구 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인 광교에서 저격을 해 중부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중 어디의 담당 구역인지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다. 권모술수에도 매우 능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깡패들을 죄다 잡아죽였는데 김두한은 이정재, 임화수 등이 잡혀 죽는 와중에도 자기 조직을 반공청년단으로 바꿔버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협조하는 등 놀라운 처세술을 보여 살아남았다. 물론 이 때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었기는 했으나 명백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쪽이였으며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프락치까지 심어 잡아넣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 때 죽지 않은 것은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36] YS도 김두한을 "머리, 언변은 좋은데 글을 잘 못 읽는 사람[37]"이라고 평가했다. 노변야화 출연 당시에도 그 화려한 언변 덕분에 청취자의 반응이 매우 좋아서 동아방송에서 당초 기획보다 방송기간을 늘린 게스트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머리가 좋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정치운은 그리 잘 풀린건 아니었다.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는 했다만 정작 자유당에 있었을 때는 일방적인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며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도 했다가 결국 거부당하고 이후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된 뒤, 마지막엔 국회 오물 투척 사건[38]에 나서면서 반 독재 투쟁에 나선 인물로 조명받으면서 거물급으로 성장하나 싶었는데, 신민당에 영입되기까지 하고도 3선에 실패[39]하며 재기하기도 전에 사망[40]했기 때문에 거물급 인사로 성장하지 못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반공을 하면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저항한 양심적인 야당 인물로 명예롭게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반대로 아버지 김좌진은 태어날때 기준으로 흙수저였던 김두한과 다르게 은수저로서 시작했으나, 말년에는 재만동포들에게 독립자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학살하여 동포들의 증오를 받았고 결국엔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는 빼도박도 못하는 김좌진의 흑역사로 남았다.
  • 그의 행적과 별개로 가족에게 정말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어서 김을동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할아버지 김좌진 명의로 나오던 국가유공자 연금을 기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하고, 이후 김을동은 자신의 아들인 송일국에게 할아버지 김두한은 훌륭한 분이셨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송일국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41]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할아버지를 동경했으며 배우로 데뷔한 후에는 김두한을 연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야인시대 기획 당시 송일국에게 청년기 김두한 역 제의가 들어왔지만[42] 어머니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청년기 김두한 역은 안재모에게 돌아갔다.[43]
  •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 자국이 심했다.
  • 현역 시절 별명은 '잇뽕(한방)'이었는데, 노변야화 출연 당시 김두한 스스로의 증언에 따르면 누구든 자신에게 한 대만 맞으면 뻗었기 때문이라고 한다.[44] 발차기 또한 상당히 잘 썼다고 하는데 특기가 상대방 어깨 짚고 양발차기. 발차기도 잘 썼지만 실제 김두한이 1대1로 싸움을 할 때 많이 썼던 건 바로 태클을 걸고 마운트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박치기를 하거나 파운딩을 해서 끝냈다고 한다.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남긴 증언을 들어보면 그가 몸무게를 이용한 양발차기( 드롭킥)과 태클에 이은 마운트 모두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체격적 우위를 이용하기 좋은 기술들이다. 반면 구마적 같은 경우 김두한이 주장한 자신의 몸무게 25관(약 93.75kg)[45]보다도 월등히 큰 30관(약 112.5kg)이었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잡히면 다룽다룽 메달렸다 죽을 정도"였기 때문에 "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 거꾸러졌다 일어나는 것을 눈과 코 사이 급소를 쳐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구마적이 자신보다 크고 힘이 셌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하지 않고 몸무게를 실은 드롭킥을 날린 다음 헤롱거리는 상대의 안면을 가격해 쓰러뜨린 것. 본인의 묘사대로라면 덩치가 큰 장사 체형임에도 굉장히 민첩하고 격투 감각이 뛰어난 사람인 듯 보인다. 실제로 김두한이 살아 생전 저지른 악행들은 모두 폭행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인성이 어땠냐,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냐'와는 별개로 싸움을 매우 잘 하는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 위에 언급한대로 그의 주력기는 발차기지만, 실제로는 주먹도 핵펀치급이였고 박치기도 잘썼다. 게다가 잘 언급되진 않았을 뿐, 구마적이나 신마적, 김관철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구마적의 부하 뭉치[46]와 대결했을때, 뭉치는 씨름에 능했고 구마적도 인정할만큼 힘이 장사였는데 김두한은 뭉치와 맞붙었을때 뭉치와 힘을 겨루어도 뒤지지 않을정도였다고 한다.[47] 젊었을 때는 국회의원 시절 100kg에 육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80킬로 이상은 나갔던 근육질의 거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두한이 가장 뛰어났던 점은 상대와 맞붙었을때 심리전과 함께 상대의 공격 스타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약점을 간파하여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는 등 상당히 두뇌회전이 빨랐다.[48]
  • 김두한은 회고록이나 라디오 방송 등에서 자신이 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과 밀접하게 엮였다며 사실 여부를 따질 수 없는 이야기로 온갖 양념을 쳤다.[49] 얄궃게도 김두한 본인은 사망한 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이름을 팔아먹는 유명인이 되었는데 김두한보다 한참 어리면서 자신이 김두한의 보스였다던 거지왕 김춘삼이 대표적인 예. 김두한과 비슷한 연배인 김동회 종로꼬마 이상욱 역시 이런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50]
  • 김두한의 구술과 회고록은 당대 그의 인기 만큼 그 분량이 풍부하나 질이 매우 떨어져 사료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언행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최고위급 정치인들과 죄다 인연이 있었다는 피상적인 허풍과 역사적으로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자잘한 사건들을 자랑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부 사실이라 치더라도 역사적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논쟁에 붙이는 연구자도 없으며, 그런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쓸 시간에 허풍의 당사자인 고위 정치인을 직접 연구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나 꽤나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수많은 창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 일본,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해외에서는 전두환과 종종 오기되기도 한다. 과 비슷하기도 하고, 둘다 두()를 쓰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 발음으로도 성씨를 떼고 이름만 놓고보면 매우 비슷하기에 간혹 김두환, 전두한 등으로 잘못 얘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편이다. 이런 것 때문인지 윤민혁의 홈페이지 화이트 데스 소설게시판에 한제국건국사 2차 창작물에서는 전두환이 김좌진의 양자로 들어가 부자지간이지만 원수지간이 된 김두한에 대적하는 카운터 파트가 되었다는 신문기사 형식의 창작도 있다.
  • 증언에 따르면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만나자마자 욕지거리를 퍼부었고 휘하의 부하들을 보내 전력을 탐색한다. 하지만 거구의 부하가 시라소니의 주먹 두 방에 뻗어버리고 만다. 증언자는 김두한이 시라소니와 한 판 붙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지만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부르며 사과를 한다. 시라소니와 김두한 세기의 격돌은 어땠나?
  • 음성 기록이 남아있다. 개중엔 그 유명한 심영 저격 사건을 진술한 인터뷰도 있다. 유튜브에 꽤 올라와 있으니 궁금하면 직접 찾아서 들어보자.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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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5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 1946 우익 전향으로 인한 탈당

[[대한민주청년동맹|
대한민주청년동맹
]]
1946 - 1947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7 정당 해산

[[백의사|
백의사
]]
1947 - 1948 입당


1948 - 1953 합당[51]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3 - 1954 자진 정당 해산


[[자유당(1951년)|]]
1954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4 제명[52]


[[자유당(1951년)|]]
1954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4 - 1956 제명[53]


1956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노농당|
노농당
]]
1956 - 1959 입당

[[민족주의민주사회당|
민족주의민주사회당
]]
1959 - 1960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0 - 1965 탈당


1965 - 1966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6 - 1967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인한 탈당


[[신민당(1967년)|
파일:0789.png
]]
1967 - 1969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9 자진 정당 해산


[[신민당(1967년)|
파일:0789.png
]]
1969 - 1972 정당 재등록
사망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을

[[무소속(정치)|
무소속
]]
8,762 (28.63%)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노농당|
노농당
]]
8,987 (23.93%)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

[[무소속(정치)|
무소속
]]
9,593 (18.37%)
1960년 재보궐선거 서울 종로구 갑 8,738 (46.08%)
1965 11.9 재보궐선거 서울 용산

12,049 (28.40%) 당선 (1위) 재선[54]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수원

[[신민당(1967년)|
파일:0789.png
]]
21,770 (44.97%)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선거 공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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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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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일협정 채결 반대로 사퇴. [2] 음력 5월 1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생년월일은 선거 때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3]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에 대한 검사의 심문 과정에서 언급한 생년월일은 음력 생일이다. [4]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사인은 뇌출혈이다. 야인시대 김두한은 오랜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해 길에서 사망한 것으로 실제와 전혀 다르게 묘사되었다. 물론 고혈압이 뇌출혈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이긴 하다. 그리고 2022년 11월 21일 그가 사망한 지 50주기가 되었다. 이날은 야인시대 합성러들에 의해 '두한절'로 불리고 있다. [5] 야인시대에서의 향년 55세는 세는 나이이다. [6] 문충공파 27세 ○한(○漢) 항렬.( 족보) [7] 1924~1996 [8] 1986년 사망. [9] 1999년 사망. [10] 1945년생으로 딸 김을동이랑 동갑이다. [11]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경동(慶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경민(慶珉)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경동 족보 사진.png [12]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13]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현동(賢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현성(賢成)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아버지 묘비에는 현성(賢城)이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김현동 족보 사진.png 파일:김두한 묘비.png [14]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범동(範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범상(範相)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아버지 묘비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범동 족보 사진.png [15] 두 번째 부인 김부미 사이에서 낳은 딸. [16] 딸(김을동)의 손자.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의 아들들이다. [17] 출처 김두한의 후계자였던 조일환이 김두한의 키를 176cm라고 말한 적이 있다. [18] 출처 자신이 구마적과 싸울 때 자신의 몸무게를 25관(93.75kg)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본인이 밝힌 것이나 관련 자료 부족으로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20] 6.25 전쟁에 참전을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군인이나 경찰관으로 참전을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김두한이 청년이었던 1930년대에는 병역의무가 없었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초졸도 아닌 무학력(초등학교 중퇴)이기 때문에 병역의무가 주어지지 않는다. [21] 백과사전 [22] 실제 백의사였는지는 불분명하나, 김두한 자신은 후일 "과거 백의사에 몸담았으며, 백의사에서 벌인 활동 가운데 몇몇은 나의 소행이었다."고 회고했다. 야인시대에서는 백의사에 직접 몸담지는 않은 대신 백의사의 지시를 일부 받아 한 것으로 묘사했다. [23] 물론 김두한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처음에는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개헌에 반대했다. 원래 사사오입 개헌도 경제 부분과 관련한 개헌이었다가 여기에 자유당의 의도대로 정치적인 부분을 슬그머니 집어넣어 커진 것이다. 근데 김두한은 처음부터 경제 부분과 관련해서 반대했고 이게 독재 / 민주의 문제로 번지자 자연스레 독재에 맞섰다는 이미지로 바뀐 것이다. [24] '동두천 주민 학살', '노조원 학살' 등 한둘이 아니며 모두 김두한 자신이 직접 증언한 것이다. 김두한/생애 문서로. [25] 처음은 공천 관련으로 행패를 부렸고 2번째는 사사오입 개헌 관련 사건에서 장경근을 폭행하는 바람에 자유당과 결별했다. [26] 우호적인 관계나 친한 사람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김두한의 성격 때문에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래도 이후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벌인 뒤에는 신민당에 입당해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27]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일제강점기에는 그저 이나 뜯는 깡패에 불과했던 김두한이 협객이었다고 왜곡하는 등. [28] 반(反) 이승만 / 친(親) 김구 단체는 김두한이 김구 아래에서 행한 반공 테러는 전부 다 이승만의 부하로 저지른 일이라 왜곡하고, 대한민국 대통령 종신제 개헌 발의로 인한 장경근 폭행 사건과 4.19 혁명 참여 여부 그리고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하기도 한다. 또 그가 독재자들에 맞선것도 큰 대의가 있는게 아니라 걍 상황에 편승한거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정재의 반례만 봐도 알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독재자에 맞서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29] 유효타 한방에 상대를 뻗게 만든다. [30] 조양은이 밝힌 일화에 따르면 덩치가 엄청나게 컸다고 하며 선배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원터치가 엄청나게 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았다고 한다. 다만 조양은은 싸움실력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신상사 식의 전국구 조폭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31] 4.19 혁명 참여나 대통령 종신제 개헌 반대로 인해 벌어진 장경근 폭행 사건도 있지만 전자는 김두한 본인이 자유당의 보복이 두려워서 참여에 소극적이라고 했고, 후자는 야인시대에서만 묘사되어서 반쯤 묻혔다. [32] 김구가 남긴 글은 1948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김두한의 재판 중 할복 시도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일어난 정진룡 납치 및 살인 사건으로 대한민청의 별동대원들은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고 체포되어 미군정의 법정에 서게 된다. 법정에 선 김두한은 자신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나라 공산당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애국적 동기로 저지른 일들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재판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김두한이 사실상 퍼포먼스에 가까운 할복을 시도(야인시대에서 묘사되는 재판 도중에 통조림 통 뚜껑을 이용해 김두한이 할복을 시도한 사건이다.)했다. [33] 김구의 발언을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후대의 미화에 의해 대중들은 김구가 평화주의자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백색테러를 할 정도로 강경한 성향이 있었기에 김두한의 행동을 좋게 볼 만 했다. 그리고 당시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감찰부장 및 별동대의 행동대장, 김구는 대한민청의 명예 회장임과 동시에 김두한에게 호의적이었다. 일종의 상사 관계였던 셈이다. [34] 권오기는 노변야화-김두한 편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35] 소속정당은 달랐으나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김두한 순서 전전(바로 전이 김대중, 김대중의 발언 직전이 이만섭이었다.)에 질의를 했고 잠시 후 김두한의 오물 테러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만섭의 증언 [36] 바로 이러한 점이 김두한과 이정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김두한은 정권의 개라고 하기엔 반항기를 자주 보여줬지만 그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시국에 걸맞은 처세술과 대처, 재빠른 상황 판단을 통해 자기만의 구심점을 형성하여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정재는 김두한과 같이 국회의원을 꿈꿨음에도 권력의 개로 이용만 당하다가 끝내 사형당하는 결말을 맞았으니 김두한의 처세술이나 재빠른 시국 판단 능력만큼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37] 실제로 김두한은 한글밖에 읽을 줄 모르고 한자에는 정말 까막눈이었다. 그게 어떻게 글을 못 읽는 거냐고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엔 중졸 정도의 학력자도 자연스럽게 한문을 읽었고 그보다 더 저학력자인 사람도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한문만큼은 따로 공부했던 시대였다. 공문서는 한문을 모르면 아예 못 읽을 만큼 그냥 거의 다 한자였으며, 한문을 모르면 간단한 은행 업무조차 보기 힘들어서 은행원한테 문서 내 항목을 일일이 물어봐야 했고, 신문만 보더라도 90년대까지는 현대의 신문과 달리 한자가 워낙 많았기에 한자를 모르면 신문의 내용을 대부분 알 수가 없었다. 즉 일본어마냥 일상생활에서 국한문혼용체를 당연시한 시대였기에 한문 모르면 그냥 문맹이었다. 이 말을 꺼낸 YS를 포함한 삼김은 모두 평상시 글쓰기에도 국한문혼용체를 고집했었다. [38] 이때 또 감옥에 갔었다. 간첩 조작 사건때 한달간 감옥에 살았던 것부터 죽을때까지 감옥에서 살다가 나오는걸 반복했다. 특히 오물사건때 박정희한테 완전히 밉상으로 찍혀버려서, 재판 전 수사과정에서 중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었다는 게 정설이며, 그 이후로도 정치보복의 집중 대상이 되어버렸다. [39] 이병희에게 졌다. [40] 딸인 김을동 등 지인들의 말로는 그렇게 일찍 갈 분이 절대 아니었다고 증언했을만큼 깡패 시절부터 튼튼한 걸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오물투척 사건으로 수사받을때 심하게 고문당해서 후유증이 크게 남아서 환갑은 커녕 사건 발생 6년 뒤인 1972년 11월 21일에 향년 55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평가가 많다. [41] 김두한이 1972년 11월 21일에 죽었고 송일국이 1971년 10월에 태어났는데, 김두한이 사망했을 당시 송일국은 겨우 생후 13개월이었다. 사람은 5살 이전의 기억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다 까먹는다. [42] 두 사람의 외모는 그리 닮진 않았지만 송일국은 185cm의 장신인데다 기골이 장대한 체격이기 때문에 덩치 큰 김두한과 딱 어울린다. 일제 시대 출생한 한국남성들의 평균신장이 16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176인 김두한은 요새로 따지면 186~187급 장신이었던 셈이다. 안재모는 연기력과 별개로 172 단신에 선이 가늘고 곱상한 외모라 투박한 외모의 김두한과 전혀 싱크로율이 안 맞고, 이 때문에 '곱상하게 생겼는데 싸움을 잘한다'는 설정이 붙었다. [43] 어머니 김을동도 김두한의 친할머니 역을 제의받았지만 아버지 이야기라 냉정하게 연기하기 힘들 것 같다면서 자료나 고증은 도와줄 수 있어도 드라마 출연은 할 수 없다며 고사했다. [44] 김두한은 스스로의 별명에 대해 이걸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원 펀치"라며 자랑하듯 말했다. [45] 다만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은 김두한의 체격에 대해 "전성기 때 선생의 몸집은 키 176cm에 몸무게 80kg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한 바 있다. # 물론 이 정도도 당시 기준으론 평균을 훨씬 웃도는 체격이다. [46] 야인시대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김두한의 회고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47] 물론 뭉치에게 주특기인 발차기 한방으로 갈빗대를 부러뜨려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48] 반대로 이정재는 소싯적에 상품으로 걸린 황소를 여럿 쓸어담던 씨름꾼답게 힘은 장사였지만 둔하고 기술이 부족해 싸움은 영 못 했다고 한다. [49] 해방 직후 대한민청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정계에도 몸담았으니 굵직한 인물들과 엮인 것 자체는 사실로 볼 수 있으나, 이들과 밀접한지의 여부는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 [50] 우연스럽게도 김두한, 김춘삼, 김동회 셋 다 안동 김씨인데 김두한은 신 안동 김씨고 나머지는 구 안동 김씨다. [51]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와 신설 합당 [52] 총선 공천 탈락으로 인해 난동을 부림. [53]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인한 제명 [54] 1966년 9월 24일 의원직 사퇴(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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