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ece5b6> 星山 李氏 |
}}} | |
관향 | <colbgcolor=#fff,#191919> 경상북도 성주군 | ||
시조 | 이능일(李能一) | ||
집성촌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대양리 |
||
인구 | 75,210명(2000년) | ||
웹사이트 | 성산이씨 대종회 |
[clearfix]
1. 개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2. 유래
시조는 신라 지방 호족 가문이였던 이능일이다. 이능일은 신라 말기 호족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인 벽상공신으로 왕건의 신라병합을 도왔으며 조물성 전투와 일리천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본래 이름은 이능필이었으나 삼한통일에 기여했음을 칭찬한 태조가 이름에 일 자를 하사하여 이능일이 되었다. 고려 건국 이후 태조의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정1품)에 이르렀다. 훗날 성산백에 봉해지고, 이에 후손들이 성산을 관향으로 삼는다. 현재 성주군청 부근에 시조 이능일의 생가터에 자리한 문중재실로 성산서원이 위치해 있다.3. 성주의 이씨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육이씨는 성산 이씨 이외에도 경산 이씨, 벽진 이씨, 성주 이씨, 광평 이씨, 가리 이씨 등이 있다. 성주는 가야 시절에는 벽진, 신라 시절에는 성산, 고려 시절에는 경산, 조선과 현재에는 성주로 그 지명이 변화했다.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성산 이씨와 성주 이씨 등이 같은 씨족으로 착각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고려초 인물 이순유를 시조로 삼는 성주 이씨 등의 성주군을 관향으로 삼는 다른 성씨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연원을 지니고 있다.
성주육이씨 중에서도 성산이씨는 성주에 난 두 이씨가 있으니 하나는 벽진장군 이총언(李悤言)의 후예며, 다른 하나는 사공 이능일(李能一)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어[1] 조선시대까지도 벽진이씨와 함께 성주 지방을 양분했던 유력 가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시조 이능일
이능일 문서 참조.5. 여담
|
- 2014년도에 대대로 내려온 보물이었던 환도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해 주목받기도 했다. 희귀성과 예술성, 역사성까지 고루 갖춰 국보급이라 평가받았는데, 이는 무관이 아닌 선비의 호신용 칼로서 첫 발견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인구 2000년도 통계 기준으로 75,210명이다. 성산 이씨의 파는 인주공파, 금산공파, 정언공파, 봉익공파, 기국공파가 있다.
*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성산 이씨 집성촌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인 1450년 처음 형성돼 500년이 넘는 오래된 세거지에 75채의 고택이 들어 서있어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로 지정된 곳이다.
5.1. 전근대 인물
- 이능일: 후삼국시대 호족. 성산 이씨의 시조.
- 이여량: 우왕 대의 문신.[2]
- 이세인: 성종· 연산군 대의 문신.[3]
- 이득춘: 임진왜란 대의 의병장.[4]
- 이동길: 임진왜란 대의 의병장.[5]
- 이춘형: 임진왜란 대의 의병장.[6]
- 이국빈: 임진왜란 대의 의병장.
- 이현룡: 정묘호란 대의 의병장.[7]
- 이사룡: 병자호란 대의 병사.[8]
- 이상화: 무신란 대의 의병장.[9]
- 이의소: 정조 대의 고승.[10]
- 이진상: 헌종 대의 유학자.[11]
- 이승희: 독립운동가, 유교개혁운동가.
- 이두훈: 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12]
-
이순호:
조계종 초대 종정.[13]
5.2. 현대 인물
- 이효상: 前 국회의장
- 이순호 : 청담 스님. 전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 이상연: 前 내무부장관
- 이기욱: 前 재무부차관
- 이원영: 前 스페인대사
- 이길영: 前 KBS 이사장
- 이규석: 前 국민대학교 총장
- 이수빈: 前 삼성생명 회장
- 이우석: 동아수출공사(주) 회장
- 이창규: DK메디칼솔루션(주) 회장
- 이경재: 대구지검 차장검사
- 이택천: 前 서울경찰청 차장
- 이문기: 역사학자
- 이문희: 대구교구장
- 이명규(1956): 18대 국회의원.
- 이영욱(1932)
- 이완영: 전,19, 20대 국회의원.
- 이왕근: 36대 공군참모총장
-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
- 이종호: 현 과학기술부장관
- 이성용: 38대 공군참모총장
- 이동환: 고양시장
- 이진숙: 前 대전 MBC사장, 現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이병환: 現 성주군수
- 이창우: 前 성주군수
- 이태근: 前 고령군수
- 이남철: 전국법무사회 협회장
- 해찬: 가수, 본명 이동혁
- 이동수: 前 야구선수, 1995 KBO리그 신인왕
[1]
대동운부군옥 권 9 상성지장리자조(上聲紙章俚字條) 기사. 원문은 星州李有二派一則碧珍將軍李悤言之後又有司空李能一之後다.
[2]
상당히 고지식했는지, 당시 예부좌랑이던 이여량은 우왕이 나들이를 할 때마다 호종했다고 한다. 이에 우왕이 이여량을 불러 "나는 구중궁궐에 살면서 허전하고 무료한 나머지 나가 놀면서 고요하고 쓸쓸함을 달래려는 것일 뿐이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호종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찌 길거리에 나갈 때마다 호종한단 말인가(予深居九重, 忽忽無聊, 是用出遊, 以遣寂寥耳. 若城外, 則扈從宜矣, 安可每從街陌遊乎)"라며 따라오지 말 것을 명했는데(『고려사』 「열전」 48권 우왕 10년 1월), 그런 뒤에 우왕이 말을 타고 남산(男山)에 오르니, 이여량은 또 우왕을 호종했다. 이에 우왕은 또다시 이여량에게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와 같이 하느냐? 지금부터 다시는 나를 호종하지 말라(何不從命, 敢如是乎? 自今, 無復我從)”라고 거듭 명령한 일이 기록에 남아 있다. 우왕도 우왕인 것이, 이날 9차례(...)나 궁을 나가 노영수의 집에 갔다. 이여량은 여기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방금 왜구가 침범하고 초적(草賊)은 날뛰고 간첩이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이때 어찌 편안한 날만 보내셔야 되겠습니까?"라며 간언했고, 결국 우왕은 이여량을 외직인 강원도안렴부사로 돌려 내쫒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금오산에 은거했다.
[3]
갑자사화에 유배된 후, 중종 대에 와서 복직했다.
[4]
이득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가산을 군자금으로 헌납하여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창기했고
무계 전투와 정진 전투 등에서 맞섰다. 전란 이후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의 임계별록(壬癸別錄)에 의하면 “선조 26년 계사년에 곽가수(郭假守) 율(𧺝) 이내장(李內將) 대기(大期) 등이 송암 김면 도대장을 고령 아림(娥林) 진중(陣中)으로 찾아가서 뵙고 공(이득춘)을 비롯하여 이홍우(李弘宇), 배응곤(裵應坤), 전영기(全永期) 등과 함께 기밀을 요하는 군무를 모의하였다”고 되어 있어, 군중에서 어떤 일을 맡았는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과 백성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질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그 근거로서 흔히 예시로 들리는 「고령향안(高靈鄕案)」(
*참고)이 이득춘이 작성한 것이다.
[5]
이동길은 이득춘의 차자(次子)로, 마찬가지로 김면의 휘하에서 금산(金山), 개령(開寧), 죽현(竹峴) 전투 등에 종군했다. 이후 이동길은 선조 27년(1594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훈련원 봉사를 지냈다. 이동길이 사망하자 어모장군(禦侮將軍) 류여백(柳如栢)이 지은 만시(輓詩)가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사마(司馬)가 떠나니 북을 울린다(鼓鳴司馬走), 자기(子期)가 잠들어 거문고 현도 끊누나(琴斷子期亡)"라는 내용이다. 금단자기망(琴斷子期亡)이란 춘추전국 초나라 대에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伯牙)가 음조를 잘 이해하던 종자기(鍾子期)의 죽음 뒤 거문고 줄을 끊었던 고사를 빗댄 것이다.
[6]
누군가 대를 이어야 하는 조선시대에, 차자라 하더라도 부자가 함께 의병으로 종군한 이득춘·이동길의 기록은 상당히 드문 사례다. 그런데 이춘형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형 이운(李雲), 아우 이수(李需)와 아들 이영숙(李永淑), 조카 이영해(李永海)·이영순(李永淳)·이영청(李永淸)·이영항(李永沆)·이영택(李永澤), 종질 이종인(李種仁) 등까지 12인 일가족이 모두(...) 의병으로 종군했다. 이춘형은 일족과 더불어 고령을 중심으로 방위하다가 난리 이후 통덕랑에 제수했다.
[7]
홍다시(洪多時)
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 진사시에 급제해 참봉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다시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병자호란 전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인
괴당문집에도 경상도 9개읍의 대표 의병장 중 하나로 실렸다. 동생인 문룡(菊圃), 택룡(梅圃)과 함께 도학과 학문으로 삼포(三圃)라 불렸으며, 인조실록 38권, 인조 17년 1월 29일에
이경석이 인재를 천거할 때 학행(學行)한 인물로 추천하는 기사가 실렸고, 그 추천 대로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훗날 예술인으로도 활동하게 되는
인평대군을 지도했다.
[8]
의기와 기개를 지켜 사후 정조실록과 국왕의 일기인 일성록의 1793년(정조 17년) 7월27일자 기사로 "(임금이) 전교하시기를, 우리나라 명장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이로는 오직 이사룡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과장이 있더라도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에 미력하게나마 자긍심을 가지게 할 수 있던 사례로 꼽혔으며, 이사룡의 기개를 존중하여 홍타이지도
소현세자를 환국시킬 때 이사룡의 시신을 함께 운구했다.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실린《이사룡전(李士龍傳)》그리고
김려가
단량패사로 남긴《포수(砲手) 이사룡전(李士龍傳)》등 여러 문인 또한 그의 열전을 집필해 전해진다.
[9]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형인 이세한(李世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 군문에서 영장(營將)에게 계책을 내 고갯길에 병사를 매복시켰고, 성초령(省草嶺)에서 적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때가 무신란의 막바지로, 역도인 정희량 등은 이인좌와 합세하기 위하여 북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주 지역을 거쳐야 했기에 성초령에 진을 치고 무주로 향하려고 했으나, 성초령을 넘지 못하고 거창(居昌)의 천총(千摠) 정빈주(鄭彬周) 등에 의해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상화가 당대에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어서, 정조 대에 조정에서 복호(復戶)를 내려 삼세충효를 기린 일이다. 여기서 삼세충효란 이상화·이숙봉·이용재 삼대의 효자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상화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죽만 먹으면서 시묘를 했고, 아들인 이숙봉은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고 피를 입에 넣어 주어 살렸으며, 훗날 어머니가 작고하니 시묘할 때 호랑이가 지켜주었다. 이숙봉의 아들인 이용재·이용손도 어머니의 종기에 벌레가 생기자 입으로 빨아 살렸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니 다시 호랑이가 나투어 시묘를 지켜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에 삼대가 시묘하던 골을 시묘동이라 하고, 그 산을 효자산이라 하는 지명이 남았다.
[10]
법명은 의첨, 인악대사로 알려져 있다.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상에서도 상당한 대덕(大德)이었는지, 소싯적 정조의 암행어사였으며 말년에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있던
김희순이
의첨대사비를 세워 그 비에 "해동에 대선사가 있으니 일컬어 인악(海東有大禪師曰仁嶽)"이라 한찬(漢讚)했다. 정조도
사도세자의 원당으로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했을 때 증사(證師)로 뽑아 개안식(開眼式) 주재를 맡겼다. 인악대사는 문장에도 뛰어나서, 의첨이 이때 지은 「불복장원문경찬소(佛腹藏願文慶贊疏)」를 보고 감탄한 정조가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다. 화엄경 연구에 필수로 꼽혔던 불경 해설인
『화엄경사기(華嚴經私記)』도 인악대사가 지은 것이다.
[11]
이진상은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임성주(任聖周)·기정진(奇正鎭) 등과 함께 조선 이학(理學) 6대가로 거론됐으며, 유학(儒學)뿐만 아니라 법률·외교·물리·군사·공업·기술 등의 실용학문과 당시 낯선 문물인 서구학문도 중시했던
한주학파를 열었다. 이진상은 연역법인 순추(順推)와 귀납법인 역추(逆推)라는 당시로서 독특한 논리를 썼고, 감각적 인식인 도간(倒看)·경험적 인식인 횡간(橫看)·논리적 인식인 수간(竪看)이라는 3단계 인식방법을 제시하였다.
[12]
이승희 등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렸다.
김상덕이 이두훈의 문하이다. 1896년(고종 33) 곽종석, 윤주하 등과 함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표했으며, 을사조약 이후에는 국권 수호 운동으로서 배일 투쟁을 전개했다. 동문이던
장석영과도 친분이 깊어 만주, 노령 등지의 망명지를 찾아 함께 여행하기도 하였다. 이두훈은 유교적 순수성을 고수하거나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서 벗어나 서구의 신교육과 신학문 등 신사조의 수용을 적극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역사서인 『동화세기(東華世紀)』를 저술하기도 했다.
[13]
법명은 청담(靑潭). 『대한불교』(現 불교신문)의 창간자이며, 해방 후 불교계에 남아있던 왜색 타파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