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和
중국의 연호.
1. 삼국시대 조위 제2대 황제 조예가 사용한 연호
조위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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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조위의 제2대 황제인 조예가 226년에 즉위한 뒤 사용한 첫 번째 연호이다. 233년까지 사용되었다.
위나라에서는 촉한의 지속적인 북벌과 오나라의 북벌을 막은 시기이다.
1.1. 주요 사건
- 태화 원년( 227년): 태화 개원, 국영의 난, 맹달의 난
- 태화 2년(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 석정 전투, 제갈량의 2차 북벌
- 태화 3년( 229년): 제갈량의 3차 북벌
- 태화 5년(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
- 태화 7년( 233년): 청룡 개원
2. 오호십육국시대 후조 초대 황제 석륵이 사용한 연호
후조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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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초대 황제인 석륵이 사용한 첫 번째 연호이다. 328년부터 330년까지 사용되었다. 석륵은 319년부터 330년까지 왕을 칭했고 328년까지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가 328년에 태화 연호를 사용하였다.
3. 오호십육국시대 성한의 황제 이세가 사용한 연호
성한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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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의 황제인 이세가 황제로 즉위한 뒤 사용한 연호로 344년부터 346년까지 사용되었다.
4. 동진 제11대 황제 사마혁이 사용한 연호
동진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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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의 제11대 황제인 사마혁이 즉위한 뒤인 366년에 사용한 연호로 371년까지 사용되었다. 폐위된 이후에는 사마욱이 즉위하여 함안(咸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5. 북위 제7대 황제 효문제가 사용한 연호
북위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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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제7대 황제인 효문제가 재위 기간 중에 사용한 세 번째 연호로 477년부터 499년까지 사용되었다.
6. 금나라 제6대 황제 장종이 사용한 연호
금나라의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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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제6대 황제 장종이 재위 기간 중에 사용한 세 번째 연호로 1201년부터 1209년까지 8년 1개월 가량 사용되었다.
6.1. 주요 사건
* 태화 6년(1206년): 개희북벌이 일어나다. 남송의 주전파 대신 한탁주가 대규모로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송군은 대패하였다. 동부 전선에서는 금나라 병사들이 회하를 건너 회남의 여러 주와 현을 점령하였고, 중부 전선에서는 금나라 병사들이 양양을 공격하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송나라 장수 오희(吳曦)가 사천에서 금나라에 붙었으나, 곧 일이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송영종은 한탁주를 죽이고 금나라에 화의를 요청하였으며, 태화 8년(1208년)에 '가정화의(嘉定和議)'가 성립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고, 매년 세폐를 은 30만 냥, 비단 30만 필로 늘렸으며, 금나라에 '군대 사기 진작금' 300만 냥을 바쳤다. 이에 금나라는 남송이 잃었던 영토를 반환하였고, 상황은 소흥 화의 때의 국면으로 돌아갔다. 한탁주의 북벌 전, 장종은 이미 송과 금의 관계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송나라가 일방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완안아루대(完顏阿魯帶)가 남송에 사절로 다녀온 후 한탁주가 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 장종은 오히려 아루대가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 생각하였다.
* 태화 8년(1208년) 11월: 금나라 장종이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그의 여섯 아들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그래서 유언으로 위왕(衛王) 완안윤제(完顔允濟)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하였다. 위왕은 사양하였으나, 결국 조서를 받아들여 곡을 하고, 영구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정월에 연호를 대안으로 바꾸고, 대사면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