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1:01:57

한화 이글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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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정보 한화그룹 | 한화 이글스 · 한화 이글스/2군 | 빙그레 이글스
구단 기본 정보 팀 컬러 | 선수단 | 스타 플레이어 | 등번호 | 유니폼
{{{#!wikistyle="margin: -16px -11px" 역사 우승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영구 결번
일반 정보 }}} 1999
35 장종훈 | 21 송진우 | 23 정민철 | 52 김태균
구단 역사 | 암흑기( 5886899678) | 역대 트레이드 | 사건사고
경기장 1군 대전 베이스볼 드림파크(가칭) · 청주종합경기장 야구장 | 2군 서산전용연습구장
이전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지역 연고 학교 북일고등학교 | 대전제일고등학교 | 공주고등학교 | 한국K-POP고등학교 | 대전고등학교 | 세광고등학교 | 천안상업고등학교 | 청주고등학교 | 강원고등학교 | 원주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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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표
2.1. 1986 시즌 ~ 1987 시즌2.2. 1988 시즌 ~ 1992 시즌2.3. 1993 시즌 ~ 1998 시즌2.4. 1999 시즌2.5. 2000 시즌2.6. 2001 시즌2.7. 2002 시즌2.8. 2003 시즌2.9. 2004 시즌2.10. 2005 시즌 ~ 2007 시즌2.11. 2008 시즌 ~ 2017 시즌
2.11.1. 김응용 감독 체제 (2013~2014)2.11.2. 김성근 감독 체제 (2015~2017.05.22.)2.11.3.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 (2017.05.23~2017.10.03)
2.12. 2018 시즌 ~ 2020 시즌
2.12.1. 한용덕 감독 체제 (2018~2020.06.07.)
2.12.1.1. 한용덕 감독 1년차 (2018)2.12.1.2. 한용덕 감독 2년차 (2019)2.12.1.3. 한용덕 감독 3년차 (2020)
2.12.2. 최원호 감독 대행 체제 (2020.06.08~2020.10.30.)
2.13. 2021 시즌 ~
2.13.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체제 (2021~2023.05.11.)
2.13.1.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년차 (2021)2.13.1.2.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2년차 (2022)2.13.1.3.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3년차 (2023)
2.13.2. 최원호 감독 체제 (2023.05.12.~)
2.13.2.1. 최원호 감독 1년차 (2023)2.13.2.2. 최원호 감독 2년차 (2024)
2.13.3. 김경문 감독 체제 (2024.6.4~)
3. 연도별 시즌 요약

1. 개요

빙그레 이글스 시절에는 2위를 4번이나 하는 강팀이었으나 한화가 된 이후에는 한동안 중위권을 전전했다. 이글스는 원년 이후 2008년까지 최하위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대신 1992년 이후로 2008년까지 정규시즌 1위는 물론, 정규시즌 2위조차도 없었다. 이 중에는 끈질긴 승부로 사상 첫 우승을 이룬 1999년[1], 2006년[2]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김인식이 떠나고 류현진이 본격적으로 고독한 에이스로 활약하기 시작한 2008년부터는 장기적 암흑기가 시작되며 약체가 되었다. 암흑기 문서의 기간은 전부 2008년 이후이다.

2. 연표

2.1. 1986 시즌 ~ 1987 시즌

빙그레는 분명히 강팀이었지만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1군 진입 첫해인 1986년 시즌에서는 그 청보에게 밀리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청보는 만약 빙그레가 86시즌 꼴찌를 면했다면 구단 역사를 모두 꼴찌로 장식하는 진기록을 세울정도의 약팀이었으니 이 시기 빙그레가 얼마나 못했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3] 이 해 승률은 아예 3할도 못 하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2020년 한화가 문자 그대로 폭망해서 승률 3할 2푼을 찍었는데 프랜차이즈 역대 최악 승률이 아닌 이유가 이 시즌 때문이다. 이듬해인 87시즌도 간신히 청보에게 꼴찌를 뺏기며(?) 6위를 기록했을 뿐 특별한 성적을 내비치진 못했다.

2.2. 1988 시즌 ~ 1992 시즌

해태(현 KIA)에 3번(1988년, 1989년, 1991년), 롯데 삼성에게는 한 번씩 한국시리즈에서 패해서 준우승을 했다(vs 롯데=1992년, vs 삼성=2006년).

더구나 1989년, 1992년 시즌은 정규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는데도 하위 팀(각각 2위 해태, 3위 롯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단일리그로 치른 25번의 시즌 중 단 5번 일어났는데(1989 빙그레, 1992 빙그레, 2001 삼성, 2015 삼성, 2018 두산), 그 중 두 번을 당한 것이다.

이때 당시는 빙그레 이글스 시절로, 80년대 후반부터 화려한 투타 선수진으로 강팀으로 평가받았다.

당시에 해태 다음갈 정도의 에이스들[4]을 보유하고 있던 강팀이었으며, 88년부터 92년까지 5년간은 22422의 준수한 순위를 기록한 바 있다. 게다가 1989년과 1992년에는 앞서 언급했듯 정규 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직행했다.[5]

특히나 1992년에는 단 38경기만에 30승을 거뒀고[6] 단일 시즌 81승을 기록했다. 이 81승은 현재까지도 역대급 강팀으로 회자되는 1994년 LG와 동일하며, 2000년 현대가 경신하기 이전에 단일 시즌 최다승을 기록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시즌 3위 롯데한테 업셋을 당했다. 그리고, 이 시즌 이후 이글스는 정규시즌 우승이 없다.

2.3. 1993 시즌 ~ 1998 시즌

그러나 1993년부터 타선 주축이었던 이강돈, 이정훈, 장종훈 등의 선수들이 슬럼프와 부상으로 무너져버리기 시작하며 타선이 난국을 겪었다. 이 시기의 한화는 정민철, 구대성 등의 초일류급 투수들과 강석천, 이민호 등의 타자들로 겨우내 순위를 유지하는 형국이었다.[7] 이 시기의 신인지명은 실로 실패 그 자체인데 잘 된 게 1996년 신인 드래프트밖에 없다... 또한 1998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뽑은 둘( 부시, 치멜리스)은 부진하면서 제값을 못했다. 특히 부시... 숀 헤어처럼 입 털땐 언제고... 이 시기에는 신인드래프트의 연이은 실패로[8] 계속 특정 투수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9년 외인 타자 둘의 대박으로 기적적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재건에 성공하면서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팀의 이미지가 변하게 되는데, 1998년까지가 리그 정상급의 투수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다면 1999년부터는 강력한 타선을 앞세운 공격야구로 변화하게 된다.

1993시즌 시작 전 빙그레에는 몇 가지 악재가 겹쳤다. 동계훈련 도중 이정훈이 발목 부상, 장종훈이 무릎 부상을 당했고 마운드의 핵심으로 부상한 정민철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노쇠화로 경기력이 하락한 한희민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장종훈은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17홈런과 0.295로 나름 제몫을 했지만 이강돈은 0.233의 타율로 노쇠하고, 이정훈은 단 41경기 출장에 그쳤고 강석천은 시즌 도중 부상을 당했다. 유승안의 은퇴 공백을 잘 메워준 김상국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마무리를 잘 담당했던 강정길 역시 부진했다.[9] 결국 한용덕이 10승, 정민철이 방위병임에도 13승, 진정필이 전천후 투수로 나와 9승으로 분전했지만[10] 결국 1993 시즌 61승4무61패의 성적으로 5위에 그쳐 6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가 끝났다.[11] 신인들의 활약도 미미했는데 구대성은 아마추어 시절 혹사 여파로 시즌 내내 개점휴업했고, 공주고 시절 노히트노런으로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던 노장진은 3승 4점대 방어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2] 6월 초까진 겨우겨우 4위권을 유지했으나 6월 들어 10연패로 급추락하면서 가을야구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8월 중순 승패마진 -15까지 추락하며 쌍방울, 태평양과 꼴찌 경쟁까지 갔으나 이후 귀신같은 연승행진으로 61승4무61패로 5할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93 시즌 최초의 감독 700승 달성을 끝으로 김영덕 감독은 감독직에서 은퇴했고[13], 1988~1990년 빙그레의 수석코치였다가 김영덕과의 불화로 롯데 감독으로 떠났던 강병철이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한 뒤 이글스의 새 감독이 됐다. 한국화약 회장 김승연과 동생 김호연 간 재산 분할로 빙그레가 계열 분리되어 김승연의 자사 계열사의 이름인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그룹명도 한국화약에서 한화그룹으로 변경됐고, 구단 로고도 바뀌었다.

한화의 이름으로 참가한 첫해인 1994년에는 초반 부진을 딛고 상위권으로 도약해 8월 한때 2위였다가 65승2무59패로 해태와 공동 3위로 마감하며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을 무너뜨리고 구대성의 1승 1세이브로 활약하며 2전 전승으로 포스트시즌에서 처음으로 해태를 이겼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강력한 투수진에 김경기가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린 태평양 돌핀스에 맥없이 물러났다.[14] 원투펀치였던 한용덕이 시즌 막판 교통사고를 당해 포스트시즌에 나오지 못했던 점이 아쉬운 점이었다. 이 해 신인 박지상이 3할을 치며 이정훈의 공백을 메우고[15] 2년차 신인 이민호가 63경기에만 나서고도 팀 내 최다인 14홈런을 치며 강석천의 부상 공백을 메우고[16] 세대교체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장종훈의 홈런이 17개에서 10홈런으로 줄었고, 이정훈의 악바리 근성은 자신을 부상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팀 타선은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가 김상국 강정길 둘 뿐이었고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팀 컬러와는 정반대로 물방망이였다. 하지만 30승[17]을 합작한 정민철 한용덕의 원투펀치, 선발과 구원을 오간 더블스토퍼 송진우(9승10세이브)와 구대성(7승12세이브), 삼성에서 트레이드된 유망주 이상목과 원년 에이스 이상군 등이 골고루 활약해주며 버틸 수 있었다. 마이너스 득실에 팀 득점력도 최하위권이었지만 마운드의 힘으로 가을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18]

1994 시즌 이후 한화 팬들을 분노하게 만든 삼성과의 2대2 전격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부상으로 노쇠화가 왔다고 판단된 프랜차이즈 스타 이정훈 장정순을 내주고 정경훈 정영규를 데려왔다. 이 트레이드는 빙그레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선수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9]

1995 시즌 장종훈이 지난 두 시즌 간 부상으로 인한 부침을 극복하고 타율 0.326과 22개의 홈런으로 막판까지 타율왕과 홈런왕 경쟁을 펼칠 정도로 부활에 성공했다.[20]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정영규는 2할대 후반과 11홈런, 주전 2루수 김용선[21]은 10홈런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의 성적은 뛰어나지 않아 팀 전반적인 공격력의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해부터 주전 포수는 김상국에서 신인 강인권 전형도 대신 OB에서 트레이드된 조경택으로 넘어갔다. [22] 투수에서는 정민철 송진우가 동반 13승에 각각 3.21과 3.20의 방어율로 활약하고, 구대성도 4승 18세이브 14패[23] 방어율 3.54, 161탈삼진으로 활약하고 지난해 말 교통사고를 겪었던 한용덕도 비록 승운은 8승13패로 불운했지만 180.1이닝 소화에 3.29의 방어율로 건재함을 증명했으며, 유망주로 가능성을 보였던 이상목 역시 전천후로 134.1이닝을 소화하며 7승5세이브 3.75의 방어율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독수리 5형제 이외에 활약한 투수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이상군은 혹사와 노쇠화 여파로 4점대 후반의 방어율로 부진했으며 무엇보다 신인 투수 신재웅이 부상으로 인해 11경기 등판 5점대 방어율로 부진했다. 결국 투타 부조화로 인해 한화는 전반기 롯데와 3, 4위 경쟁을 하며 4위로 마치고도 후반기 급격하게 추락하여 55승 71패, 승률 0.437로 6위에 그쳤다. 1987년 이후 8년만의 4할대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6년 신인 드래프트로 신인 4인방( 홍원기, 송지만, 이영우, 임수민) 외 기타 알짜 신인[24]들을 발굴해내며 타선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96년 신인 4인방이 활약하고 구대성을 굴려서[25] 정규시즌 3위(70승1무55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26] 정규시즌에서 9승9패로 팽팽하게 맞섰던 현대 유니콘스에 1차전 0-15 대패를 당하는 등 2전 2패로 광탈했다.[27] 이 해 송지만은 입단하자마자 0.287의 고타율에 18홈런을 쳐주고 이영우 홍원기, 임수민도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장종훈이 2할대 중반의 타율로 주춤했지만 15개의 홈런으로 일발장타 능력은 아직 남아있었고, 부상 및 부진으로 허송세월했던 강석천이 2할대 후반의 타율로 재기에 성공했다. 마운드에서는 구대성 이외에도 송진우 정민철은 나란히 200이닝 이상 소화에 15승과 13승[28]을 거두며 원투펀치 역할을 해줬고 이상목은 9승13패로 다패왕이 됐지만 3.97의 방어율로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용덕은 이전 시즌보다는 부진했지만 4점대 중반의 방어율과 8승으로 버텼다. 이상군이 8점대 방어율로 망하며 쓸쓸히 은퇴했지만 한화는 지난해보다 향상된 투타 전력으로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새로운 신예들의 발굴과 함께 3년 동안 2번의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던 강병철은 재계약에 성공했고, 1997 시즌에는 우승후보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그러나 홀수해에는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징크스를 이어가며 1997시즌 시즌 초반부터 최하위권으로 내려간 끝에 51승2무73패로 7위에 그쳤다. 최하위였던 롯데에도 6승12패를 기록했지만 6위 현대를 11승2무5패로 호구잡았기 때문에 7위라도 할 수 있었다. 방어율 4위에 팀타율은 6위였지만 순위는 7위로 1점차 패배가 잦았다. 지난해 15승을 거뒀던 송진우가 6승 투수로 추락해버리며 14승을 올린 정민철 혼자서 팀을 이끌었다.[29] 그 외엔 구대성이 8승 25세이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30] 신재웅은 이 해 3점대 방어율과 규정이닝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타선에서는 강석천이 0.322의 고타율과 17도루, 장종훈이 2할 후반대의 타율과 22홈런으로 활약했고, 몇 년 간 한화 유격수로 활약하는 백재호가 16홈런을 기록했고, 삼성에서 방출되어 한화로 온 전상렬도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지난해 가능성을 보여준 신인들이 대거 소포모어 징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31] 이강돈은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주전 유격수가 된 백재호와 중간계투에서 활약한 김해님 정도만 건졌다. 1차지명인 이성갑은 1군에서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은퇴했다.[32]

1998 시즌에는 짝수해 포스트시즌 공식 그런거 없이 55승5무66패로 시즌 7위로 마감했다. 개막 직전만 해도 정민철, 구대성의 활약과 타자용병들의 가세로 인해 OB, 현대 등과 함께 우승후보로 거론될 정도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시즌 초반에는 선두를 질주하다가 순위가 내려가면서 올스타 브레이크 도중 강병철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었고[33] 이희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 해 한용덕이 중간계투에서 맹활약하며 7승 4세이브 2점대 방어율로 부활하고 뒷문은 구대성이 8승24세이브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민철은 그동안의 누적된 이닝으로 인한 부상 여파로 간신히 10승을 채우는 데 그쳤고, 송진우는 전년도와 똑같은 6승으로 마무리했다. 이 해 팀내 최다 이닝과 노장진[34]과 함께 최다선발등판을 기록했던 이상목은 9승17패로 다패왕을 기록했다. 외국인 용병제가 시작된 1998년 한화는 타자용병 마이크 부시와 조엘 치멜리스를 뽑았는데 부시는 MLB 경력에 마이너리그에서 100홈런 이상 때려낼 정도로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변화구에 약점이 잡히고 부상으로 드러누우며 2할대 초반의 타율과 10홈런에 그친 채 퇴출되었다. MLB 경력이 없고 마이너만 전전한 뒤 대만야구에서 한 시즌 활약했던 치멜리스는 17홈런 63타점으로 타선에서 활약했지만 수비 불안으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외국인 타자를 제외한 국내 타자는 16홈런-25도루를 기록한 송지만과 13홈런을 기록한 유격수 백재호 외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장종훈은 17홈런을 기록했지만 한창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활약이었다. 이 해 현대의 독주로 유례없는 순위싸움이 벌어져 시즌 막판까지 포스트시즌 경쟁을 펼쳤지만 마지막 14경기에서 경쟁팀 해태와 OB와의 연이은 맞대결에서 밀리는 바람에 2승1무11패에 그치며 4위에서 7위로 추락하고 말았다.[35] 시즌 118경기를 치른 시점까지 한화는 4위였으나 이후 1무 포함 7연패하면서 쌍방울에도 뒤진 7위로 마쳤다.

2.4. 1999 시즌

1999년에는 감독을 강병철에서 이희수로 교체하고[36], 기존의 촌스럽던 유니폼을 새롭게 변경했다. 그리고 지난해 저조했던 외국인 선수들을 모두 교체하고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37]를 영입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38] 드디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을 푸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만 해도 '세기말의 패자' 라는 칭호를 얻었다.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3연전을 싹쓸이한 한화는 개막 후 7승2패로 매직리그 1위를 달렸다. 하지만 곧바로 투수 로테이션에 문제를 겪으며 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부족한 마운드를 보강하기 위해 두산으로부터 김경원을 받는 대신 야수 홍원기 전상렬을 보내는 1:2 트레이드를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4월 28일 3위로 추락한 데 이어 5월 한 달 동안 장종훈의 연일 통산기록 갱신 소식[39]과는 별개로 월간 팀 승률은 10승16패로 3할대 승률에 그쳐 이번에도 가을 야구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였다. 급기야 대전 홈경기에서 10연패에 빠지며 매직리그 1,2위 삼성과 LG에 7~8경기차로 벌어졌고, 홈관중으로 1,000명도 채우지 못하는 등 홈팬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이희수 감독은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구대성이 완투승을 앞두고 심판의 석연치 않은 볼판정으로 밀어내기 동점을 허용하고 역전패를 당하자 이영재 심판에게 격분하여 폭행을 휘둘러 12경기 출장금지 징계를 받고 유승안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았다. 하지만 이 일이 반등의 포인트가 되었는지 한화는 살아나기 시작하며 마침 이 무렵 투수진 붕괴로 성적이 내려가기 시작한 LG를 야금야금 쫓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 다소 부진했던 로마이어가 적응을 마치며 미친듯이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한 6월에 15승 2무 9패를 기록하며 월간 6할대 승률로 반등한 한화는 올스타브레이크에 들어서는 시점인 7월 10일에는 다시 LG를 제치고 매직리그 2위에 복귀해 LG와 치열한 순위 싸움에 들어갔다. 리그 재개 후 다소 부진하며 잠시 LG에 매직리그 2위 자리를 내줬으나 전반기에 다소 약했던 LG와의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에 성공하며 8월 6일에는 매직리그 2위에 올라섰고 8월 8일 이후로는 단 한 번도 2위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산, 롯데, 현대 등 강팀들이 모인 드림리그 구단에 비해 쌍방울이라는 최약체가 있는 매직리그 구단들의 승률이 떨어졌다는 점이 문제점였다.[40] 심지어 시즌 중반에는 드림리그 3위 현대가 매직리그 1위 삼성보다 승률이 높았던 기간도 있었다. 한 리그의 3위 팀이 다른 리그의 2위 팀보다 승률이 높을 경우 와일드카드로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해 한국시리즈 진출을 위해서 한화는 여유로운 2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안주할 수 없었다. 지난해 압도적인 우승을 거둔 현대는 에이스 정민태가 20승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전력을 보여주며 8월 한때 롯데의 추락을 틈타 드림리그 1위에도 도전하는 등 좀처럼 한화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 들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연이은 태풍으로 경기가 계속 중단된 이후 현대에 승차 1.5경기차로 뒤진 상황에서 인천에서 현대와의 단두대매치 3연전을 치르게 됐다. 한화로서는 행운이 따랐는데 앞서 LG전과 삼성전이 모두 우천취소되며 현대와의 3연전에 전력손실 없이 온전히 총력전을 펼칠 수 있게 됐다. 9월 24일 현대와의 운명의 시리즈 첫 경기에서 정민철의 완봉으로 정민태를 제압하며 4-0으로 기선제압한 한화는 다음날 이상목의 호투로 6-1로 승리해 현대를 추월하는데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마지막 경기까지 타선이 폭발하며 9-7로 역전승하며 1.5경기차 열세를 도리어 1.5경기차 우세로 바꾸며 준PO 생략 가능성을 높였다. 기세가 오른 한화는 연승을 10연승으로 늘리며 현대를 탈락시키고 도리어 삼성을 제치고 매직리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드림리그 순위가 마지막 날에 바뀐 것처럼 한화 역시 마지막날 삼성과의 경기에서 패배해 매직리그 2위로 마쳐 드림리그 1위를 차지한 두산을 플레이오프에서 만나게 됐다.

1993년 이후 한화는 투수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으며, 당시 한화에는 정민철, 구대성, 송진우, 이상목이라는 탑급 투수진이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외국인 선수를 잘 뽑은 덕에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탑급 투수진과 다이너마이트 타선 2기가 맞물린 게 바로 1999년 시즌, 우승이었다.[41]

사실 이 우승은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당시 드림-매직 리그로 나뉜 제도 덕을 봤다. 승률상 4위로 턱걸이했는데 그마저도 후반기 10연승으로 전체 5위이자 드림리그 3위 팀인 현대 유니콘스를 간신히 따돌리고 준플레이오프를 무산시켰을 정도였다. 드림리그의 두산과 롯데는 더 만만한 한화와 맞붙기 위해 막판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팀 투타 WAR 총합은 롯데 다음으로 2위였고, 댄 로마이어(45홈런)와 제이 데이비스(30-30클럽)라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듀오와 당대 최고급 거포 송지만(20-20클럽), 그리고 전성기만은 못해도 제 몫은 다한 장종훈(27홈런 86타점)까지 이어지는 상위 타선과, 포텐터진 이영우, 임수민의 테이블 세터, 심지어 백재호, 강석천과 같이 쉬어갈 수 없는 하위 타선(강석천이 이영우, 임수민 포텐터지기 전엔 1번 붙박이었는데 하위타선으로 내려온 것) , 그리고 송진우, 정민철, 이상목이라는 확실한 선발진과 철벽 마무리 구대성으로 이루어진 투수진까지 단기전이라면 충분히 사고 칠 수 있는 조합이었고[42],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전체 승률 1위 팀이었던 두산을 4전 전승으로 스윕하고 삼성과의 준결승에서 방전된 롯데를 4:1로 비교적 손쉽게 제압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가 존재하는 기존 방식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당시 드림-매직 리그 1, 2위 간 교차로 이루어진 플레이오프는 기존 제도의 5전 3선승제와 달리 한국시리즈와 같은 7전 4선승제로 한화는 이 플레이오프를 4승으로 스윕해 전력누수를 최소화한 반면 상대 팀 롯데는 그렇지 못했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OB 베어스가 84년도에 우승했을지도 모르는 법.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 하지만 4위 팀의 우승이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준플레이오프 제도가 실시된 1989년 이래로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은 단 2팀(3회) 뿐이란 사실이 증명한다. 그 사례는 정규 시즌 3위로 우승을 차지한 1992년 롯데와 2001년, 2015년 두산인데, 준플레이오프부터 어드밴티지가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4위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옛날로 거슬러 가면 예외는 있는데 1984년에 종합 승률 4위였음에도 삼성의 져주기 시전으로 후기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를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가 있다.

여담으로 한화는 1988년 이후 11년만에 해태와의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43]

2.5. 2000 시즌

그러나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정민철이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에 큰 구멍이 뚫렸고, 이후 몇 년 간 한화의 야구는 강타선에 뭔가 모자란 투수진이라는, 90년대와는 180도 다른 이미지가 된다. 일단 2000년에는 장종훈이 전성기만큼은 못 미쳐도 28홈런-81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건재했고, 이영우 송지만이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재계약에 성공한 외국인 타자 제이 데이비스 댄 로마이어[44]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맹활약하는 등 팀 타선은 리그 상위권으로 여전히 괜찮은 편이었지만, 정민철의 일본 진출과 이상목의 부상, 한용덕의 연이은 부진으로 인해 믿을만한 투수가 승률왕 송진우[45]와 방어율왕[46] 구대성, 10승에 성공한 고졸신인 조규수밖에 없을 정도로 투수진이 망하면서 7위에 그쳤다. LG에 최익성을 주고 송유석 신국환을 받는 트레이드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한용덕은 SK 김원형과 함께 13패로 공동 다패왕이 됐다. 현대와의 개막전에서 1경기에서만 홈런 10방을 허용하며 17:10으로 패한 것은 투수력 붕괴를 보여줬다.[47] 승률도 0.391로 3할대에 그쳤고 당시 압도적인 최하위를 찍은 신생팀 SK에도 상대전적에서 9승1무9패로 동률에 그쳤다.

한화와 SK가 같은 리그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두 팀인 LG와 롯데는 5할 승률에 겨우 턱걸이하는 실망스러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2.6. 2001 시즌

2001년 시즌을 앞두고 감독을 LG 시절 신바람 야구를 선도한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였고[48], 구대성이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하게 되며 투수진이 더욱더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시즌 초반 장종훈의 회춘으로 연일 맹타를 휘둘렀고 4월에 마운드가 완전히 붕괴된 LG에[49] 6전 전승하는등 일정상의 행운도 따르며 선두권 경쟁을 했다. 그러나 이후 급격하게 추락하며 7위까지 떨어졌다가 후반기에 선전하며 유례없는 난전 끝에 4위로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50] 이해 해태에서 KIA로 바뀐 타이거즈와의 4위 경쟁이 마지막까지 치열했는데 광주에서 열린 단두대매치 2연전에서 1승만 거두면 4위를 확정짓는 상황에서 송진우 대 최상덕 에이스끼리 등판한 10월 2일에 열린 첫 경기를 잡으며 4위를 확정지었다.

송진우는 185이닝을 소화하면서 여전히 선발 한 축을 맡아줌과 동시에 한용덕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이상목이 복귀하며 어느정도 숨통이 트였다. SK에서 주워온 베테랑 좌완 김정수 역시 구원에서 쏠쏠한 역할을 했다. 타선에서는 이영우-데이비스-송지만으로 이어지는 외야 공격력이 건재한 가운데 주전 3루수 강석천의 노쇠화가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졸 신인이던 김태균이 규정타석을 채우지 않고도 0.335의 고타율과 20홈런으로 신인왕을 수상하며 자리잡음과 동시에 전년도에 두산에서 현금트레이드로 온 김종석이 지명타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세웠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체제에 돌입한 두산에게 1승도 못거두면서 상위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잠실에서 열린 준PO 1차전에서 김태균의 홈런 등으로 4-1로 앞선 상황에서 내준 우즈에게 내준 동점 쓰리런에 홍원기에게 부메랑을 맞아 허용한 4-6 역전패가 뼈아팠다. 대전에서 열린 2차전은 두산전 3승 방어율 0의 두나쌩 리스가 선발등판했지만 1회부터 8실점으로 털리면서 5-14로 져 2패로 탈락했다.

또한 이해 한화가 외인을 4번[51]이나 엄청나게 교체해대는 바람에 2002년부터 외인 교체 제한 규정이 생기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나마 마지막 선택이었던 리스가 7승에 3.19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두산 킬러의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준PO 두산전에서 무너지면서 재계약에는 실패했다.

2.7. 2002 시즌

2002년에는 정민철이 요미우리 퇴단 후 국내로 복귀했고, 백전노장이던 송진우가 220이닝을 소화하며 선동열의 프로야구 최다승인 146승을 경신하고 150승 이상을 달성했으며 시즌 18승을 거두며 커리어 유일한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타선에서는 송지만이 38홈런-104타점을 기록하고 이영우와 데이비스 역시 24홈런과 21홈런, 그리고 두산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온 공격형 포수 이도형도 16홈런으로 활약해 팀 타선을 이끌었고 주전 유격수 백재호와 제대한 주전 2루수 임수민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민철이 에이스가 아닌 평범한 투수로 전락하고, 장종훈은 프로야구 최초의 15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 기록을 세웠지만 급격히 노쇠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김태균은 라식수술 후유증과 2년차 징크스를 겪고 2001 시즌에 활약했던 김수연과 김종석도 부진해 7위로 추락, 이광환 감독은 시즌 후반부터 거의 태업에 가까운 운영을 선보이다가 시즌 후 사임한다. 59승5무69패로 7위로 마쳤는데 이해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패 타이인 97패와 승률 0.265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최하위 롯데와의 승수는 24승, 승률은 0.196 차이가 났다. 월드컵이 열렸던 6월 한 달 동안 4승15패로 월간 3승에 그친 롯데 다음으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것이 시즌 전체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위안거리는 이범호가 데뷔 3년만에 프로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점이었다.

2001 시즌 무려 6명의 외국인이 한 시즌에 출전하며 외국인 교체는 1번밖에 할 수 없는 규정이 만들어졌는데 이 해 역시 외국인 잔혹사를 겪었다. 시즌 전 브랜든 리스를 대체할 외국인으로 프란시스코 캄포스를 낙점했으나 밀워키와의 이중계약으로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레닌 피코타를 데려왔다. 피코타는 확실한 보직 없이 선발등판 8경기, 구원등판 34경기를 소화하며 6승6패14세이브 ERA 3.51의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3.39의 WAR로 7.18의 송진우에 이어 이해 한화 투수 WAR 2위였다. 또다른 외국인인 내야수 아모리 가르시아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강한 어깨, 주루까지 갖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는데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유격수로 뛰다가 시즌 개막과 함께 발목부상을 당하고 무리하여 0.260의 타율과 2홈런 8타점의 초라한 성적으로 중도 퇴출되었다. 가르시아를 퇴출시키고 데려온 새 외국인 투수 댄 세라피니는 '외국인 선수 고용 규정' 에 맞지 않아 한국프로야구에서 뛸 수 없는걸로 밝혀졌다. 이는 구단이 까맣게 몰라 구단 행정력 부재를 드러냈다.[52][53][54] 결국 1998 시즌에 삼성 라이온즈 마무리로 활약했던 호세 파라를 영입했지만 파라는 3승1패4세이브 ERA 6.00으로 기대 이하의 모습만을 보였다.

2.8. 2003 시즌

이광환 감독의 사임 이후, 빙그레 선수 출신인 유승안이 2003년 시즌을 앞두고 한화 이글스의 새 감독으로 취임하며 팀 전체를 추스르게 된다.[55] 문동환 재활, 이범호의 레벨업, 간판타자로 성장한 김태균 등 김인식 초창기 잘 나가던 한화의 기초는 유승안 감독 때 마련되었다. 반면 고졸신인이던 송창식을 혹사시키고, 송지만을 현대로 조공하다시피 트레이드한 것 등의 그림자도 있어서 과대평가란 시각도 있다.

유승안 감독 부임 첫 해인 2003년에는 스프링캠프를 따뜻한 해외가 아닌 제주특별자치도로 가는 바람에 시즌 초부터 부상 선수들이 속출하는 등 악재가 터졌다. 대표적으로 이 해에는 롯데와 두산이 시즌 초반부터 신나게 병림픽을 벌였는데, 두산의 개막 8연패와 롯데의 개막 12연패가 전부 한화전에서 끊어졌다. 두 경기에서 송진우가 전부 패전투수가 된 것 덤.

시즌 내내 5할보다 약간 밑에서 시즌을 보내 줄곧 6위에 머물고 있었고, 9월 11일에는 51승4무61패로 승패마진 -10까지 내려가며 사실상 가을야구는 일찌감치 실패하는듯 했다. 그러다가 시즌 최후반에 7연승과 5연승으로 14경기에서 12승1무1패를 기록하는 기적같은 연승가도를 달리며 전반기에 선두를 달리다가 후반기에 급추락한 SK와 막판까지 4위 경쟁을 하기도 했다.[56] 그리고 기어이 SK를 5위로 밀어내고 시즌 종료까지 얼마 안 남긴 시점에서 잠시나마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57] 하지만 두산 베어스한테 고춧가루를 얻어맞으며 4위 자리는 2일 천하가 되었고, 4위 경쟁자 SK 와이번스와의 사실상의 와일드카드 결정전 단두대매치에서도 패하면서 5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치게 된다.[58] 시즌 최종전도 패배해서 63승 65패로 5할 승률에 1승이 모자랐던 것도 아쉬웠던 부분.

하지만 스토브리그에 들려온 소식은은 전력 누수였다. 시즌 종료 직후 2003년 에이스였던 이상목이 FA를 통해 롯데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 해 부진했던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송지만 현대 유니콘스에 내주고 투수진 보강 차원에서 권준헌을 영입하는데, 이는 구단 역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를 논할 때 한번씩 회자되는 트레이드이다.[59]

2.9. 2004 시즌

2004년에는 유승안 시프트를 처음으로 실현했다. 그러나 시프트의 결과는 싹쓸이 2루타...

빙그레-한화 역사상 최악의 관중 흥행을 보였다.

팀 성적은 8월 중반까지는 그래도 5할승부를 하며 4강의 희망을 이어나갔지만, 8월 이후 투수진이 초전박살나서 한 달 동안 27경기 3승1무23패라는 야구 대신 개그를 하게 되면서 8위에 겨우 세 경기차[60] 앞선 7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정민철이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내고 이상목이 FA로 롯데로 떠나며 팀 전력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정작 이상목은 롯데에서 이적 첫 해 3승 9패 ERA 5.03으로 먹튀를 했다 팀 실점은 750점으로 압도적인 최하위. 팀실점 7위 SK와도 무려 105점이나 차이가 났다.

2.10. 2005 시즌 ~ 2007 시즌

그러다가 2005년, 김인식 감독을 영입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준우승 한 번을 비롯해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61] 2006년 한국시리즈엔 삼성과 함께 명승부를 펼치기도 하며 강팀으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2006,2007년에는 똑같이 67승57패2무를 거두었다. 이는 92년 김성근의 삼성이 거둔 성적과 동일하다. 2018년 반짝하기 전까지 이글스의 최후의 전성기. 구대성, 정민철, 송진우, 문동환 등의 노장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며 이범호와 김태균은 20대 초 중반의 나이에도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으로 소년가장 역할을 했고 2006년 에는 혜성같이 등장한 괴물 류현진을 앞세워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한화팬들에게 1999년과 같이 말 그대로 자랑스러운 시기였다. 실제로 당시 야갤에서 팀이 분리되기 이전, 롯데의 키보드 워리어들과 맞설 수 있는 건 칰키워 뿐이라는 말까지 있었고, 골수 대전팬들은 그야말로 자부심이 넘치던 시기였다.그러나......

2.10.1. 2005 시즌

유승안 감독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를 강팀 반열에 올려놓은 김인식 감독이 선임되었다. 하지만 시즌 전까지만 해도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았는데, 일찌감치 '최하위 후보'로 꼽혔고 심지어 취임 두 달만에 김인식 감독이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사태가 터지며 팀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거기다 송지만 대신 트레이드로 들어온 마무리 권준헌과 직전시즌 8승을 거뒀던 고졸 2년차 송창식은 각각 팔꿈치 수술을 받아 전력에서 이탈했다. 거기다가 몇 년 동안 리그 상위권의 공격력을 보였던 이영우가 뒤늦게 군입대를 하면서 투타에서 전력이 불안정했다.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던 김인식 감독은 KIA에서 방출된 김인철과 앞서 두 번이나 은퇴했던 지연규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김인철은 당초 대타감으로 데려왔다가 4월에만 6홈런을 기록하는 깜짝 활약으로 이영우의 공백을 메웠고, 지연규는 마무리 투수로 20세이브를 올리며 한화의 뒷문을 지켰다. 직전시즌 0승과 15패 투수였던 정민철 문동환이 선발투수로써 부활을 신고했고, 노장 불펜 오봉옥 차명주도 제몫을 했다. 경험이 적은 백승룡 한상훈이 맡았던 불안한 유격수 자리에는 시즌 중 틸슨 브리또를 대체 용병으로 영입하면서서 안정을 찾았고, 2005년 시즌을 앞두고 신고선수로 합류한 '풍운아' 조성민 역시 적절한 시기에 1군에 데뷔하여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화룡정점은 조원우였는데 6월 3일 SK에서 트레이드된 그가 오자마자 한화는 죽음의 현충일 9연전에서 전승을 거두는 놀라운 행보를 보였고[62] 조원우는 한화에 온 뒤 타격감이 제대로 살아나면서 시즌 막판에는 규정타석을 채워 타격왕 경쟁까지 했을 정도로 한화의 리드오프 역할을 잘 수행해냈다. 여담이지만 이 9연전 기간에 4강 진입여부가 불투명하던 한화는 롯데를 제치고 3위로 뛰어들었고[63], 후반기 SK의 연승행진에 4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안정적으로 4강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SK,두산과 치열한 2위 다툼을 벌이기도 했으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체제에 들어갔다.

최영필은 112이닝 8승 8패 5세이브 ERA 2.89로 선발과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마당쇠 역할을 했다. 송진우는 전반기 3승에 ERA 5.09에 그쳤지만 후반기 ERA 2.53에 8승 1패를 거두며 부활했다.

이해 한화는 팀실책 110개로 1위에 오르는 좋지 않은 기록을 보였지만 팀홈런 159개, 팀 2루타 211개, 팀 OPS 0.775로 1위를 차지하며 강력한 홈런군단의 행보를 보였다. 제이 데이비스 김태균, 이범호, 이도형이 20홈런 이상을 올렸다.

2.10.2. 2006 시즌

2.10.3. 2007 시즌

2.11. 2008 시즌 ~ 2017 시즌


단순히 행복야구 등의 약팀의 이미지로 바뀐 것이 아니라 팀의 통산 성적도 크게 좀먹었다. 2007년까지는 팀 성적이 5할에 +9승, 2008년까지는 5할 +11승이었는데, 이 암흑기 동안 2008년에는 SK 와이번스, 2013년에는 LG 트윈스한테 통산 승률이 따라잡혔고, 신생팀 키움 히어로즈 NC 다이노스,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2020년 기준 롯데 자이언츠, 2023년 기준으로 막내 구단 kt wiz까지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를 제외한 모든 구단들에게 통산 승률이 따라잡혔다.[64]

프랜차이즈 스타를 오랫동안 기용하는 팀 특성과 김인식 감독의 지나친 노장 선수 신뢰+그로 인한 혹사 등이 겹치면서 한화의 기둥뿌리는 밑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기존 선수들의 뒤를 이을 신인 선수 육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이후 송지만, 장종훈, 정민철, 문동환, 김민재, 송진우, 구대성 등등 팀을 지탱하던 주축 선수들이 차례차례 은퇴하거나 타 팀으로 이적하고[65] 그나마 젊은 피로 꼽히던 이범호[66], 김태균의 일본 프로야구 진출[67], 김인식+ 한대화로 이어지는 선수 혹사와 리틀 야구단식 투수 운용, 그리고 철밥통 코치진의 결과물로 보이는 현기증 나는 수비, 병맛 쩌는 중계플레이로 막장으로 변해갔다.

흔히 지금의 암흑기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68], 그 하락세의 조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보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8888577, 6668587667 비밀번호를 작성하지는 않았기에 공론화가 되지 않았을 뿐 2000년에는 투수진의 약화로 전년도 우승팀이 전체 7위로 추락했고, 4위 자리를 두고 역대급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2001년에는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끽해야 승률 0.473이었던 데다가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두산에게 2패로 스윕당하며 광탈. 2002년~2004년에는 순위로 757에 그쳤다. 그렇게 2000년부터 2005년 김인식 감독 이전까지 승률 5할도 못 해봤다.

김인식 감독 부임 이후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나 노장 선수의 비중이 너무 높았고 2군 구장도 없었던 상황에서[69][70] 리빌딩, 신인 선수 육성은 어불성설이었다.[71][72] 2008년 당시 한화는 베이징 올림픽으로 인한 휴식기 전까지 56승 46패(여담으로 이 해에는 연장 무승부가 없었다) 승률 .549로 3위로 당시 2위였던 두산 베어스와는 승차없이 따라가고[73]있었지만, 베이징 올림픽 이후 무려 3주 동안 류현진 등판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에서 전패했고(3승 12패), 그 뒤에 분전했지만 8승 16패로 승패마진을 제대로 까먹어서 64승 62패 승률 .508로 삼성에 1경기차인 5위로 마감한다. 이게 2018년 3위로 가을야구 하기까지 마지막 5할 승률이였다.

그 이듬해인 2009년에는 초반에 살짝 반짝했으나 무너진 선발진과 얇은 선수층, 주축 선수들의 부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연패를 밥 먹듯이 하며[74] 압도적인 최하위를 기록하게 된다.

다만 이 암흑기는 역설적으로 그간 전통 비인기팀이던 한화를 KBO의 흥행기관차 중 하나로 올려놓는 역할을 했는데, 맨날 꼴찌만 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라거나 팬들의 보살 이미지가 정립되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2.11.1. 김응용 감독 체제 (2013~2014)

파일:김응용감독취임.jpg
제9대 김응용 감독

2012 시즌 후 대대적인 팀 강화를 위해 김응용을 감독으로, 김성한, 김종모, 이종범, 이대진 등 과거 해태 타이거즈 출신 코치들을 대거 영입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이들은 선수 시절에 무려 빙그레부터 이어지는 한화의 우승을 번번히 눈 앞에서 방해한 이글스의 라이벌들이었기에 올드팬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75] 그러나 KBO 리그 개막 13연패 신기록을 세우면서 시작한 김응용의 2년은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투수진 혹사와 더욱 심각한 팀 운영으로 더 험난한 리빌딩의 여정만을 남겨둔 채 잃어버린 2년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2013년을 기준으로 LG 트윈스한테 통산 승률을 역전당했다.

2014년 10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여 시즌 9위를 확정하면서, 한화는 3년 연속 꼴찌를 기록함와 동시에 KBO 역사상 최초의 7위 꼴찌, 마지막 8위 꼴찌, 최초의 9위 꼴찌에 이어 마지막 9위 꼴찌를 마크하는 대위업을 이루고야 말았다. 2011년을 빼면 2009년부터 꼴찌인 건 함정 결국 비밀번호가 한 자리 더 늘어났다 2014년 10월 13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21점차로 지면서 시즌 평균자책점 6.35를 기록하여 삼미의 시즌 평균자책점 6.23 기록까지도 경신하고 말았다.[76]

2.11.2. 김성근 감독 체제 (2015~2017.05.22.)

파일:김성근감독취임.jpg
제10대 김성근 감독

김응용 감독은 2년 임기를 끝으로 물러나고, 5886899라는 비밀번호를 더 늘리기 싫었던 구단은 이글스 마당에 올라온 글과 한 팬의 한화 본사 앞 1인 시위 보살팬이 아닌, 그리고 다음 아고라 청원에 서명한 팬들의 의지를 담아[77] 제10대 감독으로 야신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다. 김성근 스타일은 일시적인 도핑에 가깝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적어도 비밀번호는 한 번 끊어줄 필요성이 있고 당장 팀의 체질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감독은 김성근 감독뿐이라는 점에 구단과 팬들이 모두 동의한 것.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김성근마저 한화를 살리지 못하면 한화는 아예 구제불능인 팀이니 해체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니 할 말 다 하긴 했다.[78][79]

이어 김광수 수석코치, 박상열 투수코치, 아베 오사무 타격코치로 이루어진 일명 '김성근 사단'[80]을 영입하고 조경택 칰무원 배터리코치와 구단 레전드인 강석천, 송진우 코치, 김응용 前 감독을 따라 한화로 왔던 이종범, 김종모, 이선희 코치 등 9명의 코치와 재계약을 포기했다. 선수들이 신임하는 코치를 쫓아낸 롯데와는 여러모로 반대되는 행보 그리고 새로 영입한 코치들, 특히 일본인 코치들의 면면이 아주 화려하다. 특히 통산 165승에 빛나는 198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니시모토 다카시 투수 코치, 히로시마 카프의 1990년대 붉은 악마 타선의 일원이었던 쇼다 고조 타격코치[81] 등 일본프로야구에서도 레전드급 선수 출신의 코치들이 왔다.

김성근 감독은 취임식 때 선수단 전원에게 이발 및 면도 발언을 시작으로 강훈련을 예고했다. "한 가지 재밌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김태균은 내일부터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다" 등의 발언은 덤. 이제부터는 살 빠진 김태균을 볼지도 모른다. 별명 문서에 김슬림, 김날씬, 김반죽 추가 그리고 1시간도 안 돼서 퍼진 한화 선수들 때문에 좌절했다 이후 야구 관련 커뮤니티들에서는 훈련 받느라 고생하는 한화 이글스 선수들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본격 칰키워 새디스트 각성 과거 편하게 훈련 받던 것과 대조하는 짤방이나 다시 김성근 감독에게 붙잡힌 정근우 별명왕을 소재로 하는 짤방도 흥하는 중.

2014년 11월 10일자로 정승진 대표이사[82][83]가 물러나고 김승연 회장의 비서실장인 김충범 부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확실하게 밀어주기 위한 전략이라고 봐도 될 정도.

FA 시장에서도 내부 FA인 김경언을 잡아두고 외부 FA인 권혁, 송은범?, 배영수를 영입하여 얇은 투수진 뎁스를 크게 보강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각각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셰인 유먼 미치 탈보트를 영입하면서 새로운 외국인 투수를 영입하는 모험보다는 어느 정도 검증된 선수를 영입하는 행보를 보였다.

시범경기에서 10전 2승 8패로 꼴찌를 하며 아직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쌍방울 감독 시절에도 시범경기는 완전 망치고 정규시즌은 3위로 마무리 했던 경험이 있으니 기대감을 가져보자. 설마 김성근 감독에게 입칰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건가?

뚜껑을 열어 봤더니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였을 뿐. 우리가 시범경기를 꼴찌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지난 5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4월의 승률은 5할대를 확정하였다. 입칰효과 입성큰효과의 대결은 일단 입성큰효과의 승리. 5월에는 7위까지 내려가기도 했지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노장이 많은 특성상 무더운 8월 들어 연패횟수가 늘어남으로써 6위로 내려갔고 9월에는 8위까지도 밀려났으나, 날씨가 시원해진 이후 다시 기운을 차려 6위까지 올라갔다. 1년 전에 9개팀 중 꼴찌를 했던 것에 비하면 성적이 대폭 상승했으나 플레이오프 진출은 아쉽게 좌절되었다.

한편 시즌 중 유달리 웨이버 공시되어 팀에서 방출 당하는 선수가 많이 나왔다. 65명 등록선수 명단을 아예 다 채우고 2015 시즌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많은 선수들의 기량과 플레이를 체크하기 위해 65명을 다 채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남에게 퍼주는 혜자트레이드를 한다 특히 기아에겐 선물을 주고 쓰레기를 받아가는데 2015년 노수광, 오준혁, 김광수를 줬는데 김광수는 기아의 불펜 필승조가 되었고[84] 노수광, 오준혁은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차세대 리드오프로 기대를 받고있다. 게다가 유창식까지 주어서 기아는 보유구단이 되었다. 결국 한화시절 승부조작으로 핵이 터졌다 반면 한화로 간 임준섭은 부상으로 경기에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박성호는 육성선수로 전환돼있다. 이종환만 가끔씩 대타로 간간히 비치는 중.

2016년은 시즌 초반 부진하여 빙그레 첫해 이후 최소 경기 30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화, 빙그레 첫 해 이후 '최소경기 30패' 굴욕

그러나 6월 7일까지 12경기에서 11승 1패를 거두는 등 반격을 시작하고 있다. 한때는 9위와 10게임 이상의 차이가 벌어져 영영 답이 없을 것만 같이 보였으나 기세를 몰아 상반기를 7위로 마무리했다.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5위까지 게임차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기대할 수 있는 부분. 다만 같은 이유로 최하위권까지의 간격도 좁은 만큼 하반기의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결국 7월에 기아에게 1번 1승2패를 당한 것 외엔 모두 위닝 시리즈를 기록하였다. 저 기록은 7월 초까지 7전 전패를 당했던 두산에게 얻어낸 2승 1패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전패를 당할 수도 있었으니 정말로 불행 중 다행.

8월 중반까지 기아와 함께 5할 승률을 유지하며 희망고문을 이어나갔으나 안영명의 어깨 수술로 인한 시즌 아웃[85], 배영수[86] 안승민의 복귀 불발, 서캠프의 공인구 부적응으로 인한 부진[87][88], 한화의 미래 김민우의 어깨 관절와순 손상, 권혁의 팔꿈치 통증으로 인한 이적 후 첫 1군 이탈 등 악재가 터지며 월 승률 5할이 붕괴되고 총 승률 5할에 10경기 이상이 남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기아는 5할을 찍다가 올라가고 LG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 9연승을 찍는 와중에 롯데가 아직 승부처가 아닌지 8월 후반에 완전히 무너지며 8월 내내 8위와 7위를 오고가고 있다.

가을마다 김성근이 맡던 팀이 부진했던 걸 생각해보면 30경기가 조금 남은 상황에서 20번 이상 이기길 기대하긴 어려울테니 올해도 포기하는 게 편할 듯. 특히 김민우의 부상은 전병두 류현진이 겪은 어깨 부상인데다가 어깨 부상 후 재활 성공률은 10% 정도라 김성근을 모셔오자고 시위를 하던 팬덤 내부에서 조차 아름다운 이별 아니면 칰복절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단 어깨 부상 후 복귀하는 게 10% 남짓이지 그 후 지속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 선수는 그 중에서 20%를 채 넘지 못한다. 게다가 김민우는 부상 여부를 감독이 계속 숨긴 채 불펜 투구로 쇼케이스를 여러 차례 했고 당장 한 곳에서 재활해도 충분치 않을 시간에 1군 경기가 있는 경기장과 2군 서산을 오가며 재활과 재활 중단을 반복하고 있어서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8월 후반기엔 본인이 수술 없는 재활을 선택하여 30m 롱토스를 하며 몸을 푸는 중이고 본인이 토미 존 수술과 무뤂 수술 등 여러 고비를 넘긴 덕에 긍정적으로 재활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위에 쓴대로 어깨 부상은 복귀율이 처참하게 낮고 보통 어깨 부상은 어떻게 복귀한다 해도 2~3년은 제 기량이 안 나오는 게 보통이라...

20일 태평양 돌핀스식 도박성 선발자원 불펜 투입의 부작용이 제대로 폭발하며 LG에 패하여 5할 승률 불가가 확정되었다.지들이 언제부터 5할 승률을 했다고? 김성근 부임 전해와 전전해는 승률 3할대였는데 2003년부터 10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한 LG 트윈스에 이어 역대 두번째로 오랜기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한 팀이라는 굴욕적인 기록까지 세우게 되어버렸다. 거기에다 선수들 대부분이 사실상 선수 생활에 심각한 타격이 감에 따라, 위약금을 내서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 호응을 얻고 있으며 심지어 구단을 해체하고 선수들 다른 데로 보내줘야 한다는 말까지 진지하게 거론되는 수준이다. 당장 네이버와 구글을 비롯한 공신력 있는 검색 엔진에서까지 '한화 이글스 해체'(...)가 자동완성으로 뜨고 있다.

심지어 2017년 까지 한화가 김성근을 감독직에 유임시킨다고 하니 이쯤되면 정말 선수들이 남아나지 않겠다. 다행히 외인 원투펀치가 영입되었고, 그나마 나아진 수비, 트레이드로 영입된 군필포수로 16년같은 막장스러운 상황은 없었으나, 햄스트링 부상이 유행(?)하며 선수들이 하나 둘 이탈하더니 삼성과의 벤치클리어링 후 패배로 스윕까지 헌납하며 '야구도 못하면서 연봉은 거품에 팬들은 어그로끌고 선수들은 사고치고 감독은 더럽게 플레이하는 구단' 수준까지 이미지가 나빠져버렸다.[89] 결국 21일 밤 김성근과 프런트의 해묵은 갈등이 2군 선수들의 특타훈련을 두고 제대로 폭발했고 23일 사실상의 경질로 김성근의 야구 커리어는 사실상 마감되었다.[90] 그리고 이 해는 일찌감치 PS 탈락을 확정지었다.

2.11.3.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 (2017.05.23~2017.10.03)


한화 구단은 2017년 남은 시즌을 이상군 감독대행 체제로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한화, 남은 기간 이상군 대행 체제 이상군 감독 대행은 구단의 챌린지 2017 비전과 관련,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면서 팀을 빠른 시간 내 정상화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끝까지 진행한다고 한다. 성적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정상적인 운영은 맞다.[91][92]

9월 13일 삼성전 패배로 14경기를 앞두고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2.12. 2018 시즌 ~ 2020 시즌

2.12.1. 한용덕 감독 체제 (2018~2020.06.07.)

파일:한용덕감독취임.jpg
제11대 한용덕 감독
2.12.1.1. 한용덕 감독 1년차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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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부터 한화를 이끌어갈 수장으로 한용덕 감독이 결정되었다. 한화 새 사령탑, 한용덕 감독 선임 완료 감독 대행직 이후 한화 1군 스태프로는 5년 만에 다시 복귀한다.

결과적으로 감독이 한용덕 감독으로 바뀌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2018 시즌 중 한화는 순위 3위에 도달한데 이어 SK를 꺾으며 2위를 달성하고, 심지어는 1위 두산까지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임 감독의 선발 운용과 비교되는 운영방식이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되도록이면 선발에게 많은 이닝을 맡기는 효율적인 운영을 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7월부터 급작스레 팀이 부진에 빠지면서 위기가 찾아온 상태이다. 그래도 5할에 약간 못미치는 아슬아슬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 큰 이변이 없는 한 가을야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9월 28일 두산전에서 승리하면서 5강을 확정지었고 동시에 비밀번호도 끊어내는데 성공하였다.[93]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시즌 순위 3위 KBO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화는 10년 만에 5할 이상의 승률을 냈다.
2.12.1.2. 한용덕 감독 2년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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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길 잃은 팀이 되어버렸다. 시즌 초 이용규의 항명 파동부터 지난해에도 안좋았던 타격은 계속 안 좋고, 외국인 투수 두 명과 마무리 정우람 빼고는 모조리 멸망해버린 투수진 등 안맞는 투타조화로 인해 시즌 중반까진 어찌저찌 중위권에서 버텼지만 후반기부터는 최하위 자리를 놓고 롯데 자이언츠와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한화가 질 때 롯데가 같이 지고 롯데가 이길 땐 한화도 같이 이겨서 승차 없이 아슬아슬하게 9위를 유지하다가 롯데가 두산을 잡을 동안 한화가 선두 SK에게 패하면서 결국 최하위를 찍기도 하고 다시 롯데가 최하위 자리를 탈환하는 등, 하나뿐인 10위 자리를 놓고 양팀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롯데가 막판에 제대로 맛이 간 반면, 한화는 6연승까지 하면서 꽤나 큰 차이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그러나 순위가 사실상 굳어져 감에도 불구하고 외인 투수가 4일 로테이션을 돌고[94] 베테랑 선수들이 주구장창 나오는 리빌딩도 아니고 윈나우도 아닌 어중간한 행보는 다음 시즌 대재앙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95]
2.12.1.3. 한용덕 감독 3년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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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전 정민철이 새롭게 단장이 됐으며 이용규가 팀에 복귀하고 하주석이 부상에서 돌아왔으며 지난해 외국인 3명과 모두 재계약했다. 롯데와 지성준을 내주는 대신 장시환을 데려오는 2대2 트레이드를 했다. 2차드래프트에서 이해창과 정진호, 이현호를 영입했으나 베테랑 정근우를 LG에 내줬다. 한용덕 감독의 임기 마지막 해임에도 외부 FA 영입은 이번에도 없었다.

코로나로 시즌 개막이 밀린 가운데 개막전 문학 SK전에서 서폴드의 완봉승으로 2009년 이후 11년 만의 개막전 승리를 거두었고 위닝시리즈까지 올렸으나 곧바로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채드 벨의 합류가 늦음에도 불구하고 서폴드가 중심을 잡고 김민우, 김이환, 장시환 등 선발투수들이 연일 호투를 이어가던 시기가 잠시 있었으나 주축 타자들의 노쇠화, 3년차 호잉의 부진으로 인한 빈약한 타선과 불안한 불펜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경기는 적었다.

시즌 초반 팀 ERA 1위였던 선발투수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내야 수비의 핵심 하주석과 오선진이 부상으로 한꺼번에 이탈했고 뎁스가 매우 약한 한화는 브레이크 없이 추락했다. 채드 벨이 뒤늦게 팀에 합류했지만 부진을 이어갔다. 5월 22일 창원 NC전 승리 이후 한용덕 감독의 한화는 더 이상 승리를 얻지 못하며 연패에 빠졌다. 시즌 초 극심한 부진으로 최하위였던 SK에 스윕당하연서 최하위로 굴러떨어졌다. 12연패 다음날인 6월 6일 대전 NC전에서는 코칭스태프 교체를 했는데 올라온 사람이 없어 감독이 직접 투수교체를 담당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그리고 6월 7일 14연패로 구단 최다 연패 타이기록을 세운 뒤 한용덕 감독은 자진사퇴했다.

2.12.2. 최원호 감독 대행 체제 (2020.06.08~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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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2021 시즌 ~

2.13.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체제 (2021~2023.05.11.)

파일:수베로감독취임.jpg
제12대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1월 27일 한화 이글스 역사상 첫 외국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3년이고 연봉은 비공개로 계약에 합의했다고 한다.

우선 정민철 단장을 사단으로 한 프런트진도 이전과 다른 리빌딩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에 따라 수베로 감독도 성적보단 리빌딩을 우선적인 운영 기치로 내걸 것으로 보인다.
2.13.1.1.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1년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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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전문가들로부터 압도적 꼴지가 유력한 한화였지만, 조계현을 위시로 한 기아 타이거즈의 막장 운영 덕분에 막판까지 손에 땀을쥐는(?) 심준석 리그가 되었다.
2.13.1.2.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2년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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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전 스프링캠프에서 수베로 감독이 2022시즌은 리빌딩이 아닌 이기는 야구라는 방향을 잡고 함께 나아가자는 의견을 강조했으나 오프시즌 0입에 더해[96] 프런트의 팬자이 발언으로 기대감이 전혀 없는 시즌을 치렀다. 지난해 잘해준 외국인 투수 듀오가 부상으로 골골대다 교체되고, 지난 시즌보다 투-타 모두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96패로 2년 전 세운 구단 최다패배를 갈아치웠다.
2.13.1.3.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3년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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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역시 시즌 초반을 최하위로 시작했다. 시즌 전 채은성이 영입되면서 경기력은 조금이나마 향상되었으나 외국인 선수 버치 스미스의 부상으로 인한 방출, 브라이언 오그레디의 부진과 더불어 선수단의 극심한 타격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5월 들어서 반등하면서 9위에 올랐으나 결국 5월 11일 경기 종료 후 전격 경질됐다.

2.13.2. 최원호 감독 체제 (2023.05.12.~)

2.13.2.1. 최원호 감독 1년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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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도중 수베로 감독이 경질되면서 최원호 2군 감독이 1군 감독으로 승격됐다. 시즌 초반에 외인 2명이 이탈한 것 치고는 중반까지 5위와 2.5경기까지 좁힐 정도로 분전했으나 아시안 게임으로 인한 문동주와 노시환의 이탈, 후반기 산체스와 채은성의 부진, 얇은 뎁스로 인한 체력저하로 인해 올해도 하위권 탈출에 실패했다.
2.13.2.2. 최원호 감독 2년차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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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시즌부터 몬스터 류현진을 비롯하여 안치홍, 김강민, 이재원 등 대폭적인 외부 자원 영입이 있었다. 초반 10경기에서 8승 2패로 선전하며 1위에 오르기도 했었으나 이후 줄곧 내리막을 탔고 5월 23일 LG전에서 패배를 기록하면서 10위까지 추락했다. 5월 26일 중앙일보 단독 보도로 최원호 감독이 경질됐다는 사실이 들려오면서 최원호 감독 체재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화 이글스로써는 김성근, 한용덕, 수베로에 이어 4연속으로 감독이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 하고 중도 퇴진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2.13.3. 김경문 감독 체제 (2024.6.4~)

3. 연도별 시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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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 리그 3위인 현대에 승률로 밀려 준PO를 할 위기에 처했지만 10연승으로 현대를 승률로 역전해 위기를 모면했다. [2] 무명투수 지연규의 4이닝 무실점 경기 [3] 결국 빙그레가 첫 해 고전한 것 때문에 앞으로 신생팀은 1년간 2군에서 보내야 한다는 룰이 생겼다. 쌍방울, NC, kt 모두 창단 전 1년은 2군에서 보냈다. 이례적으로 해체 후 재창단 과정을 거친 SK와 히어로즈만 곧바로 1군 무대에서 뛰었다. [4] 투수 부문에선 이상군, 한희민, 송진우, 한용덕 등. 타자 부문에선 장종훈, 이강돈, 이정훈, 강정길 [5] 사실 가운데 4도 정규시즌에서는 3위였는데, 4위 삼성이 PO에서 숙적 해태를 꺾어서 한국시리즈까지 갔기 때문이다. 김영덕 감독의 종신감독 파문으로 인해 정규시즌 1위에서 3위까지 내려왔는데, 포스트시즌 업셋으로 최종순위로는 4위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6] 당시 30승 7패 1무 [7] 그나마 저런 초일류급 투수들조차 없었더라면 이때가 1차 암흑기가 될 뻔했다. 당시 타선이 영 힘을 못 썼던지라... 특히 주전 유격수 허준은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 못 쳤다... [8] 1996년 드래프트 성공도 야수쪽에 몰빵되어 있었다. 이상열은 현대로 트레이드되고 나서야 터졌다. [9] 이들을 대신한건 10홈런 39타점을 기록한 진상봉, 2할 7푼대 타율의 지화선이었다. [10] 그 외엔 이상군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2점대 방어율 7승을 기록했지만 전 시즌까지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장정순은 5승으로 부진했다. [11] 유독 93년은 비와 관련된 불운이 심했다. 태평양과의 개막전에서 장종훈의 홈런으로 앞서나간 것을 우천취소당하며 불운이 시작됐고 이후 LG와 OB전에서 앞서던 경기를 우취당하고 다음날 더블헤더가 열리면 지는 경우도 있었다. OB와의 잠실원정은 우취로 지레짐작하고 대전에 머물다 경기 개시 소식에 부랴부랴 경기 시작 30분 전 겨우 도착해 0대1 영봉패를 당하기도. 6월 2일에는 대전구장에 비바람이 몰아쳐 조명탑이 기우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했는데 이 때문에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청주 홈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홈구장'이 되었다. [12] 시즌 후 선수단 무단이탈로 1994년 초 임의탈퇴됐다가 1997년에 복귀했다. [13] 이후 1996-98년 LG에서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지내기는 했지만 김승연 한화 회장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1군 감독은 맡지 않았다. [14] 정민철은 1차전 패전투수에 이어 3차전 구원등판하여 김경기에게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으로 또 패전투수가 됐다. [15] 고졸선수 최다인 18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이상훈의 노히트노런도 저지했다. 다만 이해 반짝이었고, 다음 해 2할 5푼, 1996년 1할 1푼을 기록하여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끝에 방출되었다. [16] 그러나 이후 방위 복무 및 버거씨병 발병으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쌍방울로 이적했다. [17] 한용덕은 16승, 정민철은 14승을 올렸다. [18] 정민철은 리그 최다 이닝인 218이닝에 2.15의 방어율과 196개의 탈삼진으로 이 부문 1위에 올랐지만 투수 골든글러브는 이해 프로야구 최초 40세이브를 기록한 태평양의 정명원에게 돌아갔다. [19] 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하는 등 활약을 하긴 했으나, 이 둘은 완전한 주전이 되진 못했고 우승 즈음하여 정리된다. [20] 아쉽게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에 만족해야 했다. [21] 2021년 현재 충청팜의 한 축인 세광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 [22] 김상국은 이 해를 마치고 박은진을 받는 대신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 [23] 이해 12번이나 선발등판했다. 선발로 뛸 사람이 없으면 구대성이 선발등판했기 때문에 다패왕이 되고 말았다. 선발이 5~6이닝 먹으면 6~7회 쯤 구대성이 나오고, 4~5선발 자리에 또 구대성이 선발등판하는 방식으로 심하게 혹사당했다. [24] 고졸우선지명으로는 이상열, 심광호 등이 있다. [25]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4관왕(평균자책점&다승&구원왕&승률), MVP,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26] 해태와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 최하위권에서 부진하다가 5월 이후 치고 올라갔다. 꾸준히 3위권에 머물다가 시즌 막바지 해태를 1.5경기차까지 추격하지만 막판에 주춤한 사이 쌍방울의 연승으로 인해 3위로 마감했다. 쌍방울에 11승7패로 우위, 현대에 9승9패로 동률이었으나 해태에 상대전적에서 5승13패로 크게 뒤쳐진 것이 아쉬웠다. [27] 구대성이 혹사 여파로 당초 1차전 선발 예상된 상태에서 갑자기 정민철이 선발등판했고, 결국 5회를 기점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2차전에서 구대성이 4이닝 투구했지만 폭투로 점수를 내주며 패전투수가 됐다. 1차전에서는 성난 대전아재들이 경기장 안으로 오물을 투척하여 현대 외야수들이 헬멧을 쓰고 수비를 하기도 했다. [28] 정민철은 12패로 불운했다. [29] 5월 23일 OB전에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달성한다. 유일한 1출루가 스트라이크 낫아웃 출루였다. 방어율 2위, 탈삼진 1위로 맹활약했지만 MVP는 커녕 투수 골든글러브조차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과 다승만 앞설 뿐 정민철보다 모든 기록이 떨어지는 이대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30] 강병철-이희수 시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선발등판이 없던 시즌이다. [31] 이 중 송지만 홍원기 정도만 어느정도 성적을 유지했고, 이영우와 임수민은 크게 부진했다. [32] 여담으로 이때 향후 배우로 전향한 김대원이 지명되기도 했다. [33] 강병철 경질 시점 한화의 성적은 29승2무33패에 4위 쌍방울과 0.5경기차임에도 경질되었다. [34] 1997년에 한화로 복귀하여 1997 시즌 6승, 1998시즌 7승을 기록한 뒤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35] 반면 9월 9일까지 꼴찌였던 OB는 막판 21경기에서 마지막 8연승 포함 16승1무4패로 막판스퍼트를 내며 극적으로 4위를 차지했다. [36] 1998년 시즌 중에 강병철 감독이 경질되고 이희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다가 정식감독으로 승격. [37] 데이비스를 뽑기 직전 삼성이 그를 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삼성이 빌리 홀을 선택하면서 데이비스를 지명할 수 있었다. [38] 시즌 초반만 해도 한화는 우승전력이라 평가받지 못했다. [39] 1999시즌 초중반 장종훈은 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 루타, 2루타, 득점, 타점 기록을 연일 경신했다. 이해 프로야구의 선수 개인에 대한 화제거리로 전반기는 장종훈의 각종 통산 기록 경신여부, 후반기에는 이승엽의 국내프로야구 최다홈런 및 아시아 최다홈런 경신 여부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40] 다만 정규시즌은 같은 리그 팀들간 20경기, 다른 리그 팀과는 18경기라 정규시즌만 보면 공평하게 붙었다. 포스트시즌 제도가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규시즌 한화의 승률을 양대리그 빨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틀린 서술이다. [41] 이듬해부터 한화의 투수진이 망하면서 팀의 야구 스타일은 투수진 중심에서 타선 중심으로 재편된다. 한화의 우승은 90년대의 투수진 중심 스타일과 2000년대의 타선 중심 스타일, 그 중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2] 쉽게 말하면 다수의 A급 선수들이 포진한, 두터운 선수층이 장점인 조합이라기 보다는 S급의 핵심 선수들 몇몇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 애당초 리그 운영도 송-정-이 세 투수에 구대성으로 확실히 3승 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3승 2패 전략이었다. [43] 1989년에 9승9패 백중세를 기록한 이후 9시즌 연속으로 열세를 기록하였다. [44] 다만 로마이어는 한화 2년차인 2000년 타율 0.296, 29홈런으로 여전히 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와 달리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한다. 이유는 다름 아닌 로마이어가 코칭스태프를 거치지 않고 팀 내 다른 타자들에게 자신의 타격 이론을 과외해주거나 타격폼에 대해 지적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 당연히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로마이어의 이러한 모습들이 월권 행위로 여겨졌고, 이는 준수한 성적에도 재계약에 실패해 한화를 떠나는 원인이 된다. [45]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시즌 스타트가 한 달 늦었으나 나오자마자 노히트노런과 9연승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46] 중반까지 마무리로 나오다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송진우 대신 선발로 보직변경해 규정이닝을 겨우 채웠다. 송진우의 승률왕 등극이 유력한 상황에서 패전을 기록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47] 이후엔 현대 박경완에게 4연타석 홈런, 3연타석 홈런 경기를 조공하기도 했다. [48] 윤동균 최동원이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49] 홍현우 로마이어의 영입으로 준마재현 타선을 갖추며 우승후보로 꼽혔으나 시즌 개막 후 9승1무25패를 기록하며 이광은 감독이 경질되고 김성근 감독대행체제를 맞이했다. 2016년 한화 이글스와 데자뷰. [50] 사실 2001년 시즌은 일찌감치 앞서나간 1~3위(삼성, 현대, 두산)를 제외하면 나머지 5개 구단이 시즌 마지막까지 4위 자리를 두고 다투는 등 포스트시즌 진출을 두고 엄청난 경쟁을 벌였고, 동시에 정규리그 1위 삼성과 최하위 롯데의 경기차가 겨우 20경기에 그치는 등 역대급 평준화시즌이었다. 이때 당시 한화는 피타고리안 승률은 8개구단 중 꼴찌였으며, 당시 최하위였던 롯데와의 경기차도 겨우 2경기였고, 승률 차이는 2푼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해 한화 이글스가 역대 포스트시즌 진출 팀 중 최하의 승률(0.473)이다. [51] 호세 누네스- 브라이언 워렌- 대린 윈스턴- 카를로스 차베스, 데이비드 에반스- 브랜든 리스 [52] 한화 프런트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으며, 세라피니는 선수단과 상견례까지 했었다. [53] 세라피니는 2000시즌 9월 이후까지 피츠버그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장하여 '2000시즌 9월 1일 ~ 2001시즌 9월 1일' 이후 확대 엔트리에 등록된 선수는 계약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외국인 선수 고용 규정이 있었다. [54] 먼 훗날인 2023년, 장인을 살해하고 장모를 다치게 한 것으로 드러나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되 충격을 안겨줬다. [55] 유승안은 팀 창단부터 함께해 왔던 프랜차이즈 스타기도 하거니와, 1999년 감독대행으로 연승을 하는 등의 행적으로 한화 팬들 및 팀 내부에서의 기대가 매우 컸다. 이광환 감독이 02시즌 막판 태업에 가까운 운영을 선보인 것도 다음 시즌 감독은 자기가 아닌 유승안이 될 걸 알고 그랬다는 썰이 있고, 이희수 감독이 우승을 하고도 재계약하지 않은 것도 유승안을 밀어주려는 프런트와의 정치싸움이 생겨서라고 한다. 비록 썰이지만, 이런 말이 돌았다는 게 당시 구단 내외부에서의 유승안의 입지와 기대감을 말해준다. [56] 2018년 롯데 자이언츠의 행보와 매우 유사하다. [57] 만약 이해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했다면 1998년 OB의 기적이 한화에서 재현될 뻔했다. [58] 설령 승률제였더라도 한화와 SK가 9승 1무 9패로 상대전적이 동률이었지만 SK가 한화를 마지막 맞대결에서 이긴 와중에 맞대결에서 SK가 98점, 한화가 96점으로 SK가 한화에게 득점이 2점이나 앞서 버렸기 때문에 득실차이로 탈락이었다. [59] 원래 연봉문제로 송지만과 팀 사이가 험악했다고도 하고, 짠돌이인 구단 특성상 이영우와 FA 중 한 명만 잡기 위해 일부러 내보냈다는 설도 있고, 송지만의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구단의 눈 밖에 났다는 설이 있다. [60] 다승제 기준. 현 승률 제도대로라면 반 경기 차이다. [61] 그러나 이 423 충무로 시기는 결과적으로 독이 되었다. 이유는 후술. [62] 여담으로 이 9연승 이후 한화는 지금까지도 9연승은커녕 7연승조차도 달성하지 못하다가 2023년 6월에 8연승을 달성했다. [63] 한화는 롯데에 13승 5패의 압도적 우세를 거두었다. 최영필이 홀로 5승 1세이브를 따냈다. [64] 2007년을 끝으로 해체된 현대의 통산 승률이 .479, 1999년을 끝으로 해체된 쌍방울이 .410이며, 2023년 기준으로 삼성이 .545로 통산 승률이 가장 높다. 나머지 구단들의 통산 승률은 순서대로 SK-SSG가 .525, OB-두산과 NC는 .522, 해태-KIA는 .517, 키움은 .503, LG는 .498, kt는 .472, 롯데는 .470, 한화가 .461이다. [65] 사실 한화 자체가 2군팜 육성이나 선수단 관리의 질적 향상에 극히 인색한 구단이었다. 2군 시설이 열악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당장 군입대 선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한 게 2013년이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 기본적인 군입대 관련 선수 관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송광민. [66] 이후 1년만에 국내 복귀를 했지만 구단과의 마찰 등의 이유로 KIA로 가고 말았다. [67] 2012년 한화로 복귀했으나 혼자서 팀의 암흑기를 끝내기는 역부족이었다. [68] 사실 그 전년도였던 2007년부터 타 팀에 비해 노장 선수들의 비중이 컸고 신인들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에 암흑기의 조짐이 슬슬 보이던 시점이었고 김인식 감독의 팀 운영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긴 했다. 물론 2007년 시즌의 경우 기존의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 등 노장 선수들이 아직까지는 건재했고 시즌 중 유난히 잦았던 우천취소 덕분에 ' 류현진- 정민철-비-비-비- 류현진(...)' 이라는 희대의 선발 전략을 잘 활용해 최종순위 3위를 기록했다. 물론 그 이후부터는... [69] 이 당시 한화는 선수단 육성에 중심이 되어야 할 2군 구장 또는 클럽하우스도 없었다. 때문에 2군 선수단은 대전고등학교 운동장, 청주 야구장, 계룡대 내부 연습구장, 혹은 1군 선수단이 원정을 가서 비어 있는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소화하거나 훈련을 진행해야 했으며, 선수단 숙소도 없어서 인근 아파트를 전세내 여럿이 생활하는 등 KBO 구단 중 2군 인프라가 가장 열악하기로 유명했다. [70] 사실 이 당시 한화 구단 및 모기업도 이러한 사실을 아예 모르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대덕구 신탄진 인근에 2군 구장 및 연습장을 짓는 계획을 세우고 지자체와 양해각서 및 협약을 맺었으나,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신탄진에 2군 구장을 짓는 게 무산되었고 이후 2012년에야 서산 야구장이 완공되며 처음으로 2군 전용구장을 갖게 되었다. [71] 특히 타 팀이 신인선수 지명 권리를 모두 행사할 때 한화는 2년 연속으로 4~5명의 선수만 뽑을 정도였다. 당연히 선수가 없을 수밖에... [72] 2000년 이후 한화가 김태균, 이범호, 류현진, 최진행을 제외하고 제대로 키워낸 선수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그나마 쓸 만했던 유망주들은 혹사로 맛이 갔고 뭔가 해주는 선수들은 죄다 군 미필에 군필 선수들 중 기량이 성장한 선수가 있냐면 그것도... 게다가 저 4명은 각각 은퇴, 이적 후 은퇴, 해외 진출, 방출 상태로 2020년 기준 모두 한화에 없다. [73]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문가들 역시 한화의 4강은 거의 무난하다고 보는 편이었다. 세 팀은 정해졌고 4위 한 자리를 놓고 4~6위팀인 롯데, 삼성, KIA가 경쟁하는 구도였을 정도로 4위권과 승차가 넉넉한 데다가 당시 한화는 잔여경기가 가장 적은 팀이었으니... [74] 두 자릿수 연패가 무려 두 번(12연패, 10연패)이나 있었다. [75] 나쁜 반응은 생각보다 없었다. 대부분 반발하는 반응은 이들이 빙그레의 라이벌이어서가 아니라 대표적으로 김응룡은 현장에서 떠난지 몇년째인데 과연 요즘 야구에 제대로 적응할수 있느냐로 반발하는 심리가 강했다.그리고 이는 적중했다 [76] 사실 2014년은 역대급 투병타신 연도이다. 순위로 보면 투수 조련사라는 김성근이 부임한 2015년에도 똑같은 9위를 기록 중이다. 그 밑의 팀이 신생팀이었던 kt wiz였던 만큼 사실상 꼴찌. [77] 김성근 감독을 싫어하는 국내 구단의 분위기에 편승해 그냥 내부승진을 통해 새 감독을 정하려 했으나, 1인 시위 등의 소식을 접한 회장의 압박회장 : 뭘 잘했다고 내부 승진이야?으로 인해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다는 소문도 있다. 농담이 아닌게 실제 기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했다. 특히나 김승연 회장 성격상 이런 말이 자기귀에 다이렉트로 들어간 상황이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78] 여담으로 이 당시 김성근 감독이 대전에 내려가서 감독면접을 봤니 이상훈코치가 대전 집을 알아보고 있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다 사실무근이였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과 같은 레벨이라면 사장이 감독을 찾아가는게 보통인 크보 상황일 뿐더러, 사장은 애초에 대전에 있지도 않았다. [79] 이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팬들이 원하는 감독이였고 감독 선임에 팬의 입김이 작용한 국내 프로스포츠 최초의 사례이다. 그런데 만약 이 감독체제에서 성과가 없다면 그 후에 한화이글스의 운영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당시 옐로우카드에서도 논의되었다. 물론 15년과 2016년 관중동원이나 구단 굿즈판매량을 보면 양측 모두 아주 행복한 상황이지만. [80] 다만 감독 본인은 사단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실제로 코치진에서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코치고 상당수였고. [81] 다만 쇼다 코치는 2009 시즌에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있었다. [82] 사실 정승진과 김성근은 나름 불편한 관계. 2012년에 한화는 차기 감독으로 김성근을 영입하려고 했었으나 한화 프런트가 김성근과의 약속을 깨고 결국 영입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는 카더라 통신이 아니라 실제 보도된 내용. 그 당시 프런트의 수장이 정승진이었으니... 애초에 이번에 한화팬들이 김성근 감독밖에 없다고 주장했을 때에도 저 2년 전 일 때문에 김성근이 한화로 오는 건 힘들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많았다. [83] 약속을 깼다는 부분이 한대화를 경질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안지켰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막장전력을 맡기 싫었던 김성근이 트집을 잡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무엇보다 이때 김성근이 부임했더라면 메이저리거 류현진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84] 다만 김광수는 한화에 있을때 정말 못했다. 그래서 팬들도 김광수 자체는 아깝지 않다는 평가였다. [85] 어깨 웃자람뼈를 깎는 수술을 받았다. 윤규진이 작년 후반기에 받은 수술과 유사하다. 결국 이 수술 후 150km 초반의 강속구는 더 이상 던질 수 없게 되었고, 17시즌 후반기에야 붙박이 선발이 된 뒤 공 끝의 변화가 심한 투심을 주 구종으로 하는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피칭 스타일을 바꾸어야 했다. [86] 2군에서 130km 초반의 공을 겨우 던지다가 이제서야 구속을 140km 중반까지 끌어올린 덕분에 8월 초 1군에 콜업되어 선발진의 부담을 줄여주나 싶었으나 감독이 '그냥 잠깐 보려고' 부른 것으로 밝혀졌다. 덤으로 같이 올라온 김범수도 다시 2군행. 특투? [87] 1군 엔트리에 이름을 걸고 2군에 잠시 내려가 계형철 코치의 지도를 받았으나 올라온 뒤로도 베팅볼만 뿌리며 거하게 캠프 파이어를 저지른 뒤 진짜로 서산에 캠프를 차려버렸다. [88] 2군 경기에서도 1.2이닝만에 머리로 향하는 사구로 퇴장을 당하며 미치 탈보트 마에스트리에 이어 감독에게 '장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투수로 단단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 [89] 실제로 김성근이 부임한 뒤의 SK는 나머지 7개구단 팬들과 감독들에게 물어뜯기고 뜯기를 반복하다 경질 뒤 겨우 해소되었으나, 적어도 SK는 야구라도 잘했다. 한화는 성적도 못내면서 9개구단의 안티구단이 되어버렸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예정이라...물론 이는 김성근 이전에도 비밀번호를 찍는 와중에 설레발떨며 타팀을 공격하던 칰키워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90] 나이도 나이지만, 프론트와의 갈등, 혹사 논란 등 야신 이미지에 가려진 단점들이 다 드러난 동시에 어쨌든 포스트시즌엔 진출하지도 못했으므로 더 이상 프로야구 팀의 감독을 맡기는 힘들 것이다. [91] 다만 이건 투수 운용에 한정된 이야기. 진루타 순위가 리그 최상위에 희생플라이가 리그 최하위인 팀을 가지고 계속 희생번트를 하고, 2군 선수를 올리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좌우놀이 등 비판받을만한 요소는 충분하다. [92] 물론 투수운용만 봐도 그 사람보다야 훨씬 미래를 위한 운영임은 확실하다. 다만 이 행보를 과연 리빌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중. 그리고 시즌 막바지 인터뷰에서 리빌딩 보다는 성적에 신경을 썼으나,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신인들을 기용하며 나머지 경기들을 리빌딩 기조의 운영으로 선회했다고 밝혔다. [93]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용덕 감독은 진정한 야신이 되었다고 한다. [94] 물론 팀이 토종 선발진 WAR 총합이 음수를 찍는 막장 상황이었음을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95] 이런 어중간한 행보로 인해 신인드래프트때 김진욱, 손성빈을 놓쳐 역대 최악의 9위를 기록했다. [96] FA는커녕 타팀 보류선수명단 제외 방출선수조차 줍지 않았다. SSG가 고효준, 노경은, LG가 김진성, KIA가 고종욱으로 재미를 보았던 것과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