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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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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시즌별 성적
2011 시즌 2012 시즌 2013 시즌
한화 이글스 2012년 페넌트레이스 월별 일정
4월 5월 6월 7월 8월 9~10월
한화 이글스 2012 시즌 성적
순위 승률 1위와의 승차
8 / 8 53 3 77 0.408 26.5
  • 2011년 대비 팀성적 변화
    • 59승 2무 72패, 승률 0.450(공동 6위) → 53승 3무 77패, 승률 0.408(8위)
    • 팀타율 : 0.255(7위) → 0.249(7위)
    • 팀출루율 : 0.338(공동 6위) → 0.338(3위)
    • 팀장타율 : 0.362(7위) → 0.351(7위)
    • 팀득점 : 568점(7위) → 509점(공동 7위)
    • 홈런 : 93개(6위) → 71개(5위)
    • 도루 : 100개(7위) → 107개(7위)
    • 팀평균자책점 : 5.11(8위) → 4.55(8위)

1. 개요2. 2012 시즌, 그리고 스토브리그3. 페넌트레이스4. 4월5. 5월6. 6월7. 7월8. 8월9. 9~10월10. 총평11. 시즌 후, 대대적인 팀 개혁
11.1. 한화의 차기 지도자는 누구?11.2. 최후의 한 수, 김응용의 현장 복귀 한화 타이거즈11.3. 암울한 스토브시즌
12. 부록 : 2012년 한화 준대첩급 경기13. 둘러보기 틀

1. 개요

한화 이글스의 2012 시즌을 정리한 문서.

2. 2012 시즌, 그리고 스토브리그

파일:attachment/hanwhaeagles_temp.jpg.png
불암콩콩코믹스에도 인용된 명짤방.
한화는 못말려[1]

2012년 한화팬들의 응원 풍경

2011년, 5월의 대각성 이후 한화 이글스는 희망을 보았다. 프런트가 개선되었고,[2] 팀의 오랜 숙원이었던 2군 구장이 서산에 지어지고 있었다. 팀의 약점이었던 센터라인도 준수한 성적을 내주었고, 특히 유격수 이대수는 3할 고지에 입성하며 골든글러브까지 꿰차는 쾌거를 올렸다. 중간계투가 불안하긴 했지만 투수진 역시 어느 정도 리빌딩이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김승연 한화 회장도 크게 고무되어 한대화 감독과 선수진을 격려하면서 우승을 노릴 것을 요구했고, 프런트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선수들도 우승을 목표로 2012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승이라는 절대목표를 위해 겨울을 맞이한 한화팬들은 2006년 이후 6년만에 뜨거운 스토브리그를 보냈다. 이 때 너무 뜨겁다 못해 홀랑 타버린 구단도 나왔다 김태균이 일본에서 돌아왔고, 최저 연봉 신인한국인 메이저리거 최다승에 빛나는 박찬호도 왔고 송신영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외국인 선수 데니 바티스타도 분명히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 믿었다. 브라이언 배스도 프런트가 신경을 써서 데려왔다고 했으니 분명 좋은 선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2차 드래프트에서는 팀의 약점도 보강했다. 풀타임으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신경현의 백업으로 있었던 이희근이 입대하면서 점빵마님 최승환을 지명하여 백업 포수를 보완했고, 2011년 내야 백업이 없어서 주전들이 고생했던 걸 감안해 이시찬 임익준을 내야 백업으로 데려왔다. 거기에 수비력이 떨어지던 내야진의 수비 강화를 위해 전 김성근 사단에서 수비를 맡던 후쿠하라 미네오[3] 코치도 데려오면서 수비진의 강화도 노렸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요소들은 존재했다.

2011년 한화의 약진은 후반기 신경현(포수)- 이대수- 한상훈- 강동우의 센터라인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해줬기에 가능했는데, 문제는 이게 상수인지 변수인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저 성적을 이번 시즌에도 그대로 유지해주면 좋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대수는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부터 실책을 남발하면서 우려를 샀고, 한상훈의 타격 성적 역시 이것이 단순한 플루크였는지, 정말로 본인의 타격 능력이 개선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현은 원래부터 시즌 초반에 주춤하다가 후반부터 비로소 페이스를 내는 슬로우 스타터였고, 강동우는 나이가 나이였던지라 언제 추락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을 대체할 마땅한 선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부진하면 시즌은 그대로 끝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투수진도 마찬가지였는데, FA로 데려온 송신영은 시범경기부터 얻어맞기 일쑤였고, 박찬호도 시범경기 내내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김혁민은 왼손에 실금이 가는 바람에 선발에서 계투로 임시로 보직을 변경한 채로 시즌을 시작해야만 했다. 박정진은 2010년과 2011년 워낙 무리를 한 탓에 시즌 초반까지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브라이언 배스 역시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부터 박살이 나면서 불안감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선수단 외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는데, 홈구장인 대전 한밭야구장의 리모델링 공사가 길어져서 임시로 청주구장을 홈구장으로 써야 했다. 거기에 청주에는 야구단이 머물만한 호텔도 하나밖에 없어서 대전-청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실상 한 달 이상을 홈경기 없이 원정경기로만 시즌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범경기 순위는 3위를 찍었다.[4] 불안한 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올해만큼은 다를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았다.

불안과 기대 속에서, 많은 팬들의 기대와 함께 2012 시즌이 시작됐다. 한대화 감독은 빈약한 팀 뎁스로는 시즌 초반에 치고 나가지 않으면 힘들 것이라 판단, 4월에 모든 것을 건다라는 전략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시즌 시작과 동시에 야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선수단, 코칭스태프, 프런트가 삼위일체로 멘붕을 겪고 시즌을 그대로 물에 말아먹어 버렸다.

3. 페넌트레이스

4.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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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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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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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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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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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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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총평

단 한 번도 최하위를 못 벗어난 와이어 투 와이어 꼴찌KBO 리그 최초로 달성했다. 2011년이 한화 이글스라는 팀의 긍정적인 부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팀의 희망을 보여준 해였다면, 2012년은 한화 이글스의 부정적이었던 면들, 특히 고질적인 문제들이 전부 드러나면서 한꺼번에 폭발한 해였다.

그동안 투자를 안 해주다가 고작 1년 투자해 주고 성적을 내라고 압박하는 모기업, 야구에 대해서 아는 건 없고 계속해서 병크만 저지른 프런트. 레전드라는 이름 하에 코치, 운영팀장 등 요직을 차지한 무능력자들, 프런트의 우승 선언에 조급증에 걸린 감독, 한화 이글스 구단 내에서 까이지 않는 인물은 이제 소년가장 류현진, 응원단장 홍창화와 치어리더들밖에 없다.

다른 항목들에도 정리되어 있지만, 한화 이글스의 근 10년간 구단 육성은 형편없었고 올림픽 브레이크를 기점으로 09년 그 병폐가 폭발하면서 몰락했다. 한대화 감독 영입 이후 이것을 극복해내려고 노력했다. 2012년의 극도의 부진으로 인해 모두 묻혀버렸지만 한대화 감독 시절을 보내면서 그동안 성적이 좋지 않았던 김혁민, 양훈에게 꾸준히 기회를 주어 선발진의 구색을 만들어냈다. 또한 이대수, 김경언 등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팀 세대교체를 위한 기본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1년이 비정상적으로 운이 좋은 해였다는 걸 2012년에 증명해버렸다. 시즌 종료 후 2011시즌과 2012시즌의 피타고리안 승률을 비교하면 오히려 12시즌이 약간 높다.[5] 그래도 공동 6위에 후반기 약진을 보여준 팀의 기세에 김태균, 박찬호의 가세 및 송신영 영입이 무조건적으로 플러스가 되기만을 기대했고, 또한 작년의 선수들의 호성적이 그대로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2012년, 한화 이글스의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는 이런 기대와 기대에서 오는 거대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작년의 팀의 성적에 대한 큰 부담없이 경기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들은 성적에 대한 부담이 현실로 밀려오자 이러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부분 급격한 부진에 빠졌다. 문제는 멘탈을 다잡아주고 팀의 방향을 제시했어야 할 코칭스태프가 같이 멘붕하여 삽질을 계속해서 해댔고, 그 코칭스태프를 뒷받쳐줘야할 프런트는 코칭스태프를 흔들고 압박해서 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결국 시즌 도중 감독의 목이 날라가고 한용덕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시즌이 어떻게 끝나든 한화는 다시 기로에 서게 됐다. 3년 전 어찌할 수 없이 우울한 상황에서 한대화 감독은 나름대로 팀의 틀을 잡았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꼴찌로 다시 추락, 팀에서 떠났다. 프런트는 팀의 최대의 숙원이었던 2군 구장을 2013시즌부터 사용 가능하도록 짓기 시작했다. 또한, 비록 최악의 결말로 이어졌지만 김민재 이후로 끊겼던 FA 영입도 시도하고 근 몇 년간 몰락의 원인 중 하나였던 선수의 포텐셜보다 북일고를 우선시하는 경향과 최소한의 선수들만 뽑고 신고선수로 땜빵하던 희대의 삽질을 그만두고 제대로 된 신인지명을 하면서 선수들을 모으기 시작하여 이전의 프런트와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시작 이후 프런트는 치명적인 삽질을 연이어서 해버리면서 시즌을 망치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류현진의 해외진출, 양훈의 군입대같은 문제도 눈앞에 닥쳐왔다. 이제 감독 선임과, 다음 시즌을 철저하게 준비하는 데 이 팀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한화는 팀의 시스템조차 다른 팀에 비해 잘 짜여지지 않았다고 평가받는 팀이다. 부족한 시스템을 채워서 팀의 역량을 강하게 만들고 그 팀을 이끌 수 있는 감독이 필요한 시점이다.

11. 시즌 후, 대대적인 팀 개혁

11.1. 한화의 차기 지도자는 누구?

감독 후보로 당초 유력하게 김성근 감독이 거론되었지만 김성근 감독은 결국 고양 원더스와 2년 계약을 연장했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한 바로는 한화 구단에 한대화 감독을 시즌 종료까지 경질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중도 경질되면서 한화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9월 초에 조범현 감독이 낙점되었다는 기사가 나와 파란을 일으켰으나 한화 구단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10월 초 언론 보도에 의하면 김재박 감독 선임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재박 감독이 대전구장과 한화 2군경기에서 자주 목격되면서 사실상 확정된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중이었으며, 일단 한화구단은 10월 5일 또는 늦어도 6일에는 감독 선임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0월 6일에도 감독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이러자 일부에서 김응용 내정설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감독급 현역 야구인[6]이 수석코치로 김응룡 감독을 보좌할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대체적으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부재 중인 상황이라 의사 결정 과정이 늦어지는 탓에 프런트가 올린 감독 내정자에 대한 결재가 늦어져서 발표도 늦어지는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11.2. 최후의 한 수, 김응용의 현장 복귀 한화 타이거즈

결국 10월 8일, 김응용이 2년 계약에 총액 9억원에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김응룡 감독은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강팀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다른 기사에서는 FA 2명만 잡아주면 해볼만 하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류현진의 해외진출 문제에 대해서는 구단의 방침을 따르겠다고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2년만 감독을 하고 그 뒤에는 후배에게 물려주겠다고 천일평 기자에게 밝혀기도 했다.

김응룡 감독의 부임에 따라 코칭 스태프 인선에도 관심이 쏠렸다. 2년 후에 후배에게 감독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말 때문에 수석코치의 인선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한화의 프랜차이즈 스타출신을 고려한다면 팀을 잘 수습한 한용덕 감독대행이나 미래의 한화 감독 감으로 꼽히는 이정훈 천안북일고 감독이, 김응룡 감독과의 인연을 고려한다면 이순철 기아 타이거즈 수석코치나 김성한 기아 전 감독등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정훈 감독은 2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김응룡의 밑에서 선수생활을 한 레전드급 선수출신인 이종범 양준혁이 코칭스탭으로 기용될거라는 말까지 떠도는 중이었다. 때마침 이종범은 LG 코치 영입설이 떠돌아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결국 이종범은 주루코치로 한화에 합류했고, 양준혁은 고심 중인 것으로 보였다. 양준혁이 재단 사업 등 워낙 하는 일들이 많은 탓에 코치를 하게되면 이런 것들을 다 정리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7]

이런 가운데 한용덕 감독대행에게 구단에서 연수를 제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응룡 감독이 한화 프랜차이즈 스타를 수석코치로 삼을 일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에 이대진의 재활코치 부임 소식이 전해졌고, 김성한 기아 전 감독도 한화 합류가 예정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결국 김성한 전 감독이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응룡 감독의 공언대로라면 2년 뒤에 감독직을 물려줄 후보로 유력한 인물이 수석코치라는 점에서 재미있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한화는 무조건 팀 분위기를 갈아야 한다.

11.3. 암울한 스토브시즌

코칭스태프 전면 교체로 분위기를 일신했지만 스토브시즌의 상황은 전혀 녹록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암흑속으로 빠져드는 상황이었는데, 팀 투수진의 유일한 기둥인 류현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해 버렸고, 박찬호는 2012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양훈까지 군입대가 결정되면서 2012시즌 선발 로테이션 5인 중 3인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8] 류현진의 이적금 280억원으로 FA 시장의 큰손으로 나서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빈손이었다. 이 와중에 장성호 롯데 자이언츠의 신인 송창현과 1:1 트레이드했는데, 아무리 김태완의 복귀로 포지션이 겹친다지만 한화 팀내에서 유일하게 쓸만한 트레이드 카드를 고작 4라운드 대졸 미필 신인 한명으로 퉁쳐버렸다는 점에서 팬들은 벙찔 수밖에 없는 상황었다. 그나마 희망은 김태완, 정현석이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것 뿐이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새로 부임한 코칭스태프의 의견에 따라 홈구장인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의 펜스를 뒤로 밀고 구장 잔디를 천연잔디로 바꾸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탁구장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될것으로 보인다.

12. 부록 : 2012년 한화 준대첩급 경기

류현진/2012년 또는 박찬호/2012년과 같이 보면 이 팀의 병맛을 좀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기들은 대첩으로 분류되지 않은 경기들이다.
  • 6월 3일(일): 한화 7:7 LG, 잠실
  • 6월 7일(목): 롯데 9:7 한화, 대전

  • 7월 19일(목), 삼성 6:5 한화, 대전
    • 이 날 선발은 박찬호, 삼성에서는 브라이언 고든을 냈으나, 고든은 이대수에게 3점 홈런을 맞는 등 2회에만 5실점하고 강판되었다. 한화가 쉽게 이길 것 같았으나 이번에도 불펜이 방화를 저지르면서 7회에 3점, 8회 1점, 9회 1점, 10회 1점씩을 헌납하고 6:5로 역전패를 당했다. 이 와중에 9회말 오승환의 실수로 1사 1, 3루 찬스를 잡았지만 그 찬스에서 성공했으면 여기 올라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 8월 25일(토), KIA 16:4 한화, 대전
    • 경기 자체는 16:4로 한화가 일방적으로 깨진 경기였으나 내용 면에서는 양 팀 통틀어 실책 7개가 터진 막장 경기였다.[15]

13.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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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첨언하자면, 이 영상에 나온 실책 장면들은 전부 '2012년 6월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만'(한화는 못말려 영상은 6월 16일에 올라왔다.)에 나온 거다! 게다가 이 경기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2] 2012년의 삽질을 보면 한숨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 전의 프런트는 이것보다 더 했고 적어도 2011년에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3] 한국에서는 최정을 정상급 3루수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일본에서는 바로 그 스즈키 이치로를 키워내는 등 수비 조련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명코치였다. [4] 2010년에는 시범경기와 정규시즌 모두 8위, 2011년에는 시범경기 6위, 정규리그 공동 6위를 했다. [5] 2011시즌 .387, 2012시즌 .392 [6] 일각에서는 김시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7] 다만 양준혁 본인은 김응룡에게 코치 제의를 받았고, 고심 끝에 거절했다고 밝혔으나, 막상 김응룡은 여러 인터뷰에서 양준혁에게 코치 제의를 한 사실 자체가 없다고 발언을 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준혁은 어떻게 보면 해설이나 전복갈비찜이 아닌 다른 걸로 까이는 건 피했다. [8] 류현진이 떠난 건 확실히 치명적이고, 박찬호와 양훈은 크게 전력에 도움이 안 된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남아있는 한화의 막장 투수진 중 바티스타 정도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박찬호보다 상태가 좋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9] 당시 등근육 경직이 발생해 5이닝만 소화했으며, 7:3으로 앞서있었던 상황이라 승리투수 요건을 채웠다. [10] 이때 포수 강민호의 콜이 좋았다. [11] 1루주자는 바티스타가 볼넷으로 출루를 허용한 주자인 박준서를 빼고 대주자로 기용한 주처님이였다. [12] 기록은 투수 앞 희생번트였으나 야수 선택이 되었다. [13] 기록은 3루수 앞 번트 안타. [14] 이날 무려 류현진의 부모님이 직접 관람하러 온 날이기도 했는데, 역전 당한 후 애써 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들도 부모도 쿨한 집안 [15] 기아가 실책 4개, 한화가 실책 3개를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