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0:37:02

하나회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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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과정
2.1.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전2.2. 취임 이후 ~ 숙청 이전2.3. 1차 숙청2.4. 2차 숙청2.5. 3차 숙청2.6. 4차 숙청
3.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4. 12.12 군사반란 장성 축출5. 잔당들의 반발과 최후6. 의의7. 부작용?8. 비판?9. 매체

1. 개요

파일:하나회vsYS.jpg

속으로 ‘웃기지 마라, 내가 대통령 하면서 그렇게 더럽게 안 한다, 왜 (군부와) 동거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김영삼, 2009년 SBS '한국 현대사 증언' 방송에서 하나회 숙청을 회상하며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군부에서 " 고려 시대 무신정변이 왜 일어났는 줄 아는가?"라며 반발하는 발언이 나오자 김영삼이 보인 반응[1]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김영삼이 1993년 문민정부에서 군 내부 불법 사조직 하나회에 몸담았던 전-현직 군인들을 모두 숙청한 사건.

금융실명제와 더불어서 문민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사건으로 하나회의 숙청을 통해 대한민국은 문민통제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으며 현재까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누리게 된다.

2. 과정

김영삼 숙군(肅軍)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영삼의 다른 업적들과 행보가 유사했는데, 기존 행정조직이 아니라 측근들하고만 의논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깜짝쇼를 하듯이 터뜨리는 것이다.[2]

하나회가 반발하다가 극단적으로는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회 숙청에서는 이러한 기습적인 방식이 더 알맞았다. 실제로 정승화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천천히 물갈이하려다가 정보 라인을 장악한 전두환[3] 하나회 세력에게 역으로 12.12 군사반란을 당한 전례도 있었다.

2.1.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전

김영삼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하나회 숙청을 계획하고 있었다. 권영해[4] 국방부차관으로부터 "하나회를 숙청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계속 들었었다. 그리하여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철저히 비선 조직을 통해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다. 당시 김영삼의 비선 조직은 절친한 사이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거사 이틀 전인 3월 6일 우선적인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 등을 최종 점검했다.

한편 김영삼의 최측근인 박관용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하나회의 수장격인 김진영 제29대 육군참모총장과는 부산중학교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 때문에 박관용이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에 "많은 사람이 하나회 척결을 언급합니다"라고 말하자 김영삼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고만 했고, 여기에 하나회와 연결되어 일종의 청와대 빨대로 사용된 현역 장성 김희상 국방비서관[5]과도 아무런 상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 둘은 김영삼이 하나회를 치려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현 상태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하는 등 상황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했고 당연히 하나회 소속인 김진영도 긴장을 놓고 있었다. 오히려 김진영은 김영삼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고, 종교마저 개신교로 동일했기에 당연히 자신이 선배인 이필섭을 대신하여 합참의장이 될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6]

참고로 노태우가 퇴임하기 1년 전인 1992년 2월 마지막으로 짜놓은 군부 진용은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영 육참총장, 조남풍 1군 사령관(8월 임명), 김연각 2군사령관, 구창회 3군 사령관, 김동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김진선 육참차장, 서완수 기무사령관, 안병호 수방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인데, 이 중에서 김진선은 하나회에서 배척받다가 뒤늦게 들어간 쪽에 가깝고 김형선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지만 노태우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최측근(9-9 인맥)이었다.

2.2. 취임 이후 ~ 숙청 이전

김영삼은 취임 후 3월 3일 청와대에서 군 주요 지휘관 접견 및 국방부장관의 보고를 받던 중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는 대통령에게 직보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세요."라고 말했고,[7] 동년 3월 5일에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때 '장성들의 얼굴을 모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소집된 육해공 중장 이상의 장성들이 참석한 3월 보고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내 이들을 안심시켰다.
3월 5일에는 육사 49기[9] 졸업식 연설에서 "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기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국방부 청사 내부 주차장에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맥이 이어진 군내 비(非)하나회파가 뿌린 듯한 이 전단을 두고서 권영해[10] 누가 살포한 건지 찾으라고 조사를 명령한 뒤 김영삼에게 보고했다. 이때의 전단은 몇 장 안 되어 금방 회수되었고 해프닝으로 끝났다.

2.3. 1차 숙청

김영삼이 본격적인 하나회 숙청에 들어간 때는 대통령 취임 11일째 되는 날인 1993년 3월 8일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 중 단 한 명도 김영삼의 의도를 몰랐다. 김영삼은 철저히 비선 조직들과 일을 의논하다가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권영해 국방부장관에게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날 권영해와 독대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물었고, 권영해는 "군은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되어있습니다."라고 답했다.[11] 그러자 김영삼은 "아, 그래요? 그라모 됐구마는(그러면 됐구만)."라고 말하더니 대뜸 폭탄 선언을 했다.
파일:MGVKM3GI55NZCS2ZBP2VDCFX7Q.jpg
1993년 3월 9일 조선일보 1면
곧이어 권영해는 극비리에 국방부장관으로서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김영삼과 권영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하나회 출신이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보직해임 처리했다.[12] 육군본부와 기무사령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회의를 하고 있던 김진영과 서완수는 전화로 당장 방을 빼라는 통보를 받고 그대로 쫓겨났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정확히 4시간 5분 만에 후임이 임명됐다. 비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제9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육사 22기)이 각각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나회 숙청의 시작이었다.

김진영과 서완수는 하나회의 핵심 인사였다. 김진영은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강경파로 불리며 1980년대 신군부의 막후 실세였으며, 하나회에서 11기 전두환 - 14기 이종구의 뒤를 이어 군부 내에서 전두환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존재라 노태우도 자기 사람인 이문석을 제치고 그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할 정도였다.[13] 취임 직후인 1992년 2월 중순( 노태우 정부 말기) 지휘서신 1호로 "상하 계급으로 구성된 군 내부의 종적 사 조직을 단시일 내에 모두 해체하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국민과 언론이야 군의 민주화와 정치 중립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그가 하나회의 핵심 멤버인 걸 알던 군부에서는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ROTC를 견제하는 발언으로 판단했다.[14][15] 출신 지역까지 거제도로 일치했고 종교( 개신교)마저 동일했던 김영삼이 당선되자 정말 같이 잘 지내보려고 했다고 한다.[16]

서완수 기무사령관도 전두환계로, 1991년 12월 최고의 요직인 특전사령관에서 또 다른 요직 기무사령관으로 옮겨간 터라 군 내에서는 '역시 하나회'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런데 과거 노태우에게 김영삼 불가론을 내세웠고 김영삼이 여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그의 친인척 비리 조사를 하는 바람에 완전히 찍힌 상태였으며, 김영삼의 취임을 전후해 언론에 김영삼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과 청와대 수석에 대한 제보가 들어와 그들은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가 이끌던 기무사의 행위로 의심되었다. 게다가 그가 기무사령관으로서 김영삼에게 처음으로 독대를 시도할 때 권영해의 비리 파일을 들고 가서 정보 보고를 시도했다고 한다.[17]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김영삼이 임명하려는 안보 라인에 대한 군부의 비토로 해석되었다.

해임 당일, 김진영은 계룡대 집무실에서 혼자 있다가 권영해에게 해임 통보를 받고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말했으며, 물러난 후에는 "이제 내가 나왔으니, 쿠데타 위험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임자인 김동진은 이발소에 있다가 장관에게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고 속으로 "6공 때 대장 달았다고 이제 물러나라는구나"라고 생각하여 장관이 자신에게 경질 통보를 하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권영해는 그에게 "자, 이제부터 육군은 당신이 맡아주는 거야"라며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음을 알렸다.

서완수는 기무사에서 전국 40명의 기무부대장들을 모아 하는 월례회의를 평소보다 앞당겨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동석한 참모장 김도윤 소장이 전화가 왔다는 부관의 말을 듣고 나갔다 왔고, 이어 서완수가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권영해에게 해임 통보를 받고 돌아왔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서완수는 자신의 해임 사실을 기무부대장들에게 알렸고, 신임 사령관 임명 통보를 받은 김도윤은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은 "힘이 센 자리는 계급도 높으면 안 됩니다."라며 그의 철학을 권영해에게 말했다고 한다. 서슬 퍼런 기무사령관 자리가 대장 진급까지 노려볼 수 있던 중장 2차 보직에서 소장 보직으로 격하(환원)된 것이다. 대통령과 독대 중단은 물론 국방부 회의 때도 계급이 내려갔으니 자리가 말석으로 바뀌었다.[18][19] 이때 해고된 서완수는 한직인 제1야전군부사령관으로 이동했고, 후술하듯이 거기서도 해임되자 연구관을 잠깐 하다가[20] 전역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소식조차 전해지고 있지 않다가 2024년 사망했다.

그렇게 3월 8일 1차 숙청에서 7개의 별이 떨어졌다. 그것도 군부 최고권력자들인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이 일이 하나회 전체를 숙청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과 극소수의 최측근 뿐이었다.

다음 날 3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영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유명한 "놀랬제." 발언을 하여 뒷날 화제가 되었고, 이후 개그 작가 장덕균이 자신의 김영삼 개그집 YS는 못말려에서 이 말투를 인용해 일종의 드립으로 승화시켰다. 이어 김영삼은 "저짝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기야."라고 말했고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동아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군부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 하며 충격을 넘어 경악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1993년 초의 하나회는 김진영 - 서완수 같은 전두환계가 아니라 노태우계가 주류였으므로 당시 주류였던 노태우계 인사들은 김진영 - 서완수의 해임을 "전두환계를 날리는 쇼를 하는구나" 정도로 판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ROTC(학군단) 그룹을 정리하기 위한[21] 일종의 명분 쌓기용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당장 본인네부터가 노태우 정부 시절 전두환계 하나회를 날려버렸던 전적이 있으니 김영삼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적절한 명분을 쥐려는 행보겠거니 하고 마음을 놔버렸다. 하지만 김영삼의 의도는 명분 쌓기가 아니라 숙청의 서막이었다.

2.4. 2차 숙청

1차 숙청이 있고 한 달이 채 안 돼서 열린 4월 2일 국방부 회의에는 중장 이상의 장군들이 모여있었는데, 육사 19기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육사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불참한 채로 회의가 시작되었고 1시간 만에 권영해 국방장관이 통수권 차원에서 그들을 경질했다고 참석자들에게 알려주었다.[22] 이에 회의장에 참석했던 장군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김형선은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으나 과거 노태우가 9공수여단장일 때 작전 참모 및 대대장으로 근무했으며, 김진영이 물러난 뒤 대장 진급 떡밥이 돌 정도로 떠오른 노태우의 최측근이었다. 수방사는 12.12 군사반란 이후 그 자리에 노태우가 앉은 뒤 계속 9-9 라인만 임명되던 요직으로, 안병호는 12.12 군사반란 때 9사단의 노태우 사단장 휘하 작전참모였던 인연으로 그가 대통령이 된 후 5년간 군의 실세였다.

육참총장, 기무사령관에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까지 경질되면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수장들이 한 순간에 숙청되었다. 국방장관인 권영해조차 전날 식사 때 통보받았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극도의 보안 속에 오직 김영삼의 비선 라인으로 하나회 청산 작업을 하고 있는 예비역 그룹의 머릿속에서만 작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는 특수전 병력과 수도권 인근의 사단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 수도방위사령관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23] 도일규 소장(육사 20기).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가 발각되었을 때 하나회 색출 작업을 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역공을 받고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비서실장이 도일규였다. 이 때문에 도일규는 하나회의 견제를 받으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스토리가 있어 하나회와는 완벽하게 깨끗한 신분이다. 실제로 동기들은 중장 1차 보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소장으로 막다른 골목 보직이었다. 게다가 숙부가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인척이라는 혈연관계까지 더해져 결국 수도방위사령관을 찍고 바로 2차 보직도 안 하고 핵심 요직인 3군 사령관으로 갔으며, 아예 1996년에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며 장관만 못했을 뿐 문민정부에서 새로운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특수전사령관은 육군본부 동원참모부장 장창규 소장(육사 21기)이 진급과 동시에 내정되었다.[24] 강단 있는 장성으로 8사단장 시절 김동진 5군단장 아래 있었는데,[25] 이 관계가 다시 참모총장과 특전사령관이 되어 재현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계속 한직만 돌다가 2차, 3차 진급 때야 겨우겨우 승진하던 무명 용사들이었으며, 둘 다 사령관 임명과 동시에 중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드디어 비하나회·비9-9라인도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교체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원래 군부 내에 줄을 대어 새 정권에서도 살아남으려고 했던 노태우의 최측근인 김형선 특전사령관은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목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짐을 빼서 본가로 보내버린 후, 아예 포기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야"라며 사령부 헬기장에서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고 안병호 수방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김영삼의 상도동계에 줄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26] 물론 결과는 사이좋게 모가지.

그나마 김형선은 노태우 줄을 탄 사람, 즉 9-9 인맥이기는 했어도 하나회 인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에서 물러난 지 2주 만에 김진선 육참차장이 진급과 동시에 2군 사령관으로 진급하자, 육참차장 자리로 이동했지만 2차 진급자[27]였기 때문에 동기들이 대장 진급을 해버리면서[28] 그게 마지막 보직이 되었으며, 육군참모차장은 휘하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명예직에 가까웠다.[29] 안병호는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12.12. 군사반란 참여자[30]들을 5월에 숙청하면서 2달 만에 전역했다.

이렇게 2차 숙청까지 총 13개의 별이 떨어졌다.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특수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4명을 먼저 교체한 것은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핵심 보직이기 때문이다. 12.12 사건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체포하며 발생한 일이다. 이런 사태를 견제하기 위해 서울 근교에 주둔하고 한미연합군사령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병력으로 특전사와 수방사가 있었으나 예하 공수여단장[31]과 경비단장[32]들이 죄다 하나회였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은 보안사령관(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정승화)를 체포하며 시작하여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수도방위사령관( 장태완)을 그 부하들이 체포하며 끝났다. 그만큼 이 4자리가 쿠데타 실행 및 방지의 핵심이었는데, 전 정부에서 이 자리들을 전부 하나회 혹은 9-9인맥으로 채워뒀기 때문에 김영삼은 이들을 모조리 교체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벌어진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여인형 방첩사령관( 기무사령부의 후신인 방첩사령부의 사령관),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이 계엄을 주도했고 4명 모두 직무가 정지됐다. # 이후 4명 모두 구속수감됐다. ##

2.5. 3차 숙청

이제는 야전의 실병력 지휘관들을 교체할 차례였다. 4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중장 3명을 대장으로 승진시키면서 2군사령관에 김진선 육군참모차장, 3군사령관에 윤용남 합참 전략기획본부장(19기), 합참차장에 편장원 육군교육사령관을 새롭게 내정한다. 이들 세 자리는 노태우가 임명한지 1년 되었기 때문에 정기 인사라고 할 수 있으며 조남풍[33] 1군 사령관만은 임명된 지 6개월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유임되었지만 3달 후에 경질되었다. 그 외 공석이 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는 합동참모차장인 김재창 대장이 임명되었다.[34]

다만 하나회도 9·9라인도 아니었지만 김연각은 정통 TK여서 그런지 동기인 김동진 신임 참모총장과 함께 17기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1위 그룹은 김진영 전임 참모총장이었다.[35] 똑같이 비하나회였지만 문민정부에서 자신은 출세하고 김연각은 배제된 것에 대해 김동진은 "그는 TK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36] 참고로 하나회는 17기부터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분리되었다.

구창회 3군 사령관은 조남풍 1군 사령관과 함께 18기 9·9인맥 핵심이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의 9사단 참모장을 한 공으로 이후 수방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을 둘 다 한 초특급 경력을 갖고 있다. 비하나회가 하나회에게 이를 가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자기들끼리 요직을 다 해먹기 때문이다. 구창회는 여기에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라 김진영 다음은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고 차기 참모총장 후보로 꼽혔지만 그런 거 없고 대신 전역을 명받았다.

그런데 이들의 후임자 중에서 이질분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바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으로, 충북 출신의 육사 19기인데 9·9인맥임에도 불구하고 승진했다. 이것도 따져보면 다 이유가 있는데 김진선은 노태우가 21연대장, 9공수여단장, 수경사령관일 때 계속 참모로 일한 확실한 노태우 사람이었지만 하나회 가입을 거부당한 과거가 있다. 이에 개인적인 분노를 갖고 있었고 그가 수방사령관이 되자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장 안병호[37]에게 하나회 명단을 받은 후 이를 바탕으로 하나회를 배제했다. 일단 수방사 참모직에서 하나회를 전부 배제시켰고 진급도 막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계 하나회를 친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이쯤 하면 됐다는 윗선의 신호에도 계속 밀어붙이다 노태우의 눈 밖에 나 2개월 근신 처분을 당했다.[38]

이런 전적이 새 정부의 공적으로 인정받아 9·9 핵심 인맥임에도 김영삼 아래에서 승진했다.[39] 사실 여부야 어떻든 김진선은 하나회를 때려잡는데 앞장서는 이미지였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 있으며 장태완 사령관을 방해한 역사적인 과오가 있는 것은 도저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2군 사령관 임명 후 2달 만인 5월 말 12.12 관련자 숙청 때 경질되어 군복을 벗었다.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은 경남-부산고 출신의 육사 19기인데 평소 하나회에 치여 산 덕분에 새 정부에서 승진했다. 일설에 의하면 사단장 승진할 차례였을 때 인사담당자가 " 당신도 누가 먼저 나가야 하는지 알잖아. 이번에 쉬고 다음 차례에 나가라"고 했다 한다. 본인은 알겠다고 말했지만 생각할수록 분해 밤새 통음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윤용남의 하나회에 사무친 감정은 보통이 아니어서, 대장 달자마자 공식 석상에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 시점에도 군 요직을 독점하며 군을 파행으로 몰고 갔던 하나회 출신들이 건재하고 있다. 이들을 당장 군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에 측근들이 하나회는 아직 살아 있어 표적이 될 수 있다며 자제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회 척결 강경론자 이미지 + PK 출신이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합참의장으로 영전한 김동진 대장의 후임이 되어 1994년 12월에는 아예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편장원 신임 합참차장은 육사 18기에 충남-휘문고 출신 순수 야전군인이다. 비하나회 출신으로 동기 내 가장 늦게 사단장을 달았고 중장 진급은 3차, 대장 진급은 4차에 했지만 고향이 김영삼과 불편한 관계를 맺던 김종필과 같은 충청권인 것이 걸려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이 보직만 수행하고 1995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한다.

이 4.8 인사로 인해 2군사령관 김연각(17기) 대장과 3군 사령관 구창회(18기) 대장이 군인사법에 의해 즉각 전역 처리되며 별 8개가 떨어졌다. 이제까지 떨어진 별이 총합 21개.

2.6. 4차 숙청

일주일 후인 4월 15일에는 군단장· 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몰아냈다. 이른바 'YS장군'은 군단장 4명,[40] 사단장 8명이었다. 하나회들을 요직에 배치시키던 국방부 인사국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도 교체되었다. 후임자는 갑종 157기의 정연우 소장(당시 육군보병학교장)과 육사 22기인 임종섭 소장(당시 제7보병사단장)이 내정되었다. 정연우 - 임종섭 두 장군은 순서대로 7사단장을 지낸 인물이다.[41][42][43] #

이 중 핵심은 육본 인사참모부장 최승우의 좌천이다. 인사참모부장은 18기 구창회 3군 사령관 → 19기 김진선 2군 사령관 → 20기 안병호 수방사령관 → 21기 최승우 순서로 하나회끼리 물려받아 온 핵심 요직이다. 똑같은 요직이었음에도 작전참모부장은 양보해도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참모부장은 남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 것이 자신들끼리 관례이다. 역대 인사참모부장들은 모두 수도권 사단장 → 육본 인사참모부장 → 수방/특전/기무 사령관 → 중장 또는 대장으로 전역하였고, 이후 장관 또는 정부투자 기관장으로 나갔지만 이 4명은 시대가 바뀌어 모두 나가리.[44]

새로 임명된 사람들 중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하나회나 9-9라인 중에서 쓸만한 사람은 남겨두자는 인식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육군참모차장에서 대장 진급한 김진선 신임 2군 사령관이 9-9라인이었고, 특전사령관에서 경질되고 새 육군참모차장으로 이동한 김형선 특전사령관(9-9 라인) 역시 9-9라인이었다. 또한 19기 하나회 이택형 중장이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으로 나갔고, 21기 하나회인 표순배는 3사관학교장을 하다가 진급하여 군단장이 되었는데 권영해 장관 내외와 절친이어서 뒷말이 많았다. 다만 표순배 중장은 후방 군단장인 제9군단장으로 이동했는데 9군단은 향토, 동원사단들로 구성된 탓에 실제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가 적었다.[45]

하지만 이번 인사를 끝으로 하나회가 완전히 뿌리 뽑히기 전까지[46] 하나회원이 실병력 지휘관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47]

준장급 중에서는 육사 26기인 이상학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24기인 권중원 국방장관 군사보좌관이 조용히 보직을 내려놓았다. 비서실장의 경우 무조건 하나회끼리 주고받는 자리이며, 권중원은 전두환 밑에서 영남군맥 엘리트로 승진했던 인물이다.

4.15. 인사(4차 숙청)의 특징은 그동안 승승장구해오던 1차 진급자들의 영전에 제동을 걸며, 2, 3차 진급자들과 비육사(ROTC, 갑종)들을 중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1차 진급자들은 상당수가 하나회 출신 또는 9-9 라인이었다.

이렇게 기습적인 4번의 교체(3.8. 인사 육참총장-기무사령관, 4.2. 인사 특전-수방사령관, 4.8. 인사 군사령관, 4.15. 인사 군단장-사단장급)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3.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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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도(白承道) 준장(육사 31기. 당시 대령. 2005년 1월 31일 전역.)

시간은 2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안병호 수방사령관이 전격 교체된 것과 같은 날인 4월 2일. 당시 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을 맡고 있던 대령이던 백승도가 육사 20기(중장급)~36기(중령급) 하나회 125명의 명단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48]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졌다. 문서의 제목은 <육사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16절지 크기[49]에, 앞서 김영삼 초 국방부 주차장에 뿌려진 명단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언론에서 나온 각종 하나회 명단은 이른바 '백승도 명단'에서 일부 이름과 기수 오류 같은 오타를 수정한 버전이다.

이날 아침 기무사를 통해 보고받은 장관과 총장은 항상 있는 음해성 투서 정도로 생각하고 청와대에 전달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지만 관사에 입주하고 있던 非하나회 장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윤필용 사건(1973년) 이후 26기 정도에서 명맥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전설적인 하나회가 중령급에 30대 중반에 불과한 36기까지 시퍼렇게 살아있던 것을 문서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나 합참에서 근무하고 있던 非하나회 장교들은 이 유인물을 들고 동료들에게 갔다. 그리고 복사기가 바쁘게 돌아갔으며, 팩시밀리를 통해 지방으로 문서가 넘어간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너무 확대돼버린 것이다.

이에 범수단에 조사를 시키려 했으나 단장인 육사 24기 채문기 준장이 하나회 소속이었고, 결국 육사 23기 이문도 준장이 있는 법무감실로 넘겼다. 그리고 11일이 지난 4월 13일 드디어 언론에 이 명단이 떴다. 모든 장교들이 그들 동기 중 잘나가는 사람은 하나같이 그 명단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진급이 정체되어 있던 장교와 장군들은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고 "하나회를 군에서 즉각 추방하라!"는 여론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이제 장관과 총장도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윤용남 신임 3군 사령관의 하나회 척결 강성 발언도 이 시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나왔다. 4월 24일에는 육군범죄수사단장인 채문기 준장(육사 24기)과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장[50]이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둘 다 백승도의 하나회 명단에 포함되어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명목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책연구관으로 내쫓기고 전역했다.

이제 백승도 대령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자면, 육사 31기의 육군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이었고, 소령 시절 육군대학에서 국무총리 상을 받은 전도유망한 군인이었으며, 대령 1차 진급자에 31기 동기회장이었다. 그는 좋게 보자면 사람이 좋아 대인관계가 뛰어났지만, 나쁘게 보자면 주로 부관 생활[51]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정치색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모셨던 사단장이 서울로 상경한다면 밤새 주차장에 기다려서라도 반드시 만나 인사를 꼬박꼬박 드렸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부관 생활을 하며 얻은 고급 정보와 동향을 전해 주니 장군들의 예쁨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정치질을 했는데도 자기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외 없이 특정 사조직임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가 받은 큰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백승도 대령은 본격 하나회 족치기에 나서게 된다.

앞서 설명한 대로 4월 2일 백승도 대령이 동빙고 군인 아파트에 문서를 뿌렸고, 수사망이 좁혀 오자 언론에 제보하러 갔다가, 우연히 같은 카페를 방문한 도일규 신임 수방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도일규 사령관이 그를 알아보고 왜 여기에 사복을 입고 왔냐고 물었고, 백 대령은 괴유인물 살포를 본인이 하였으며 기자회견을 하러 왔다고 이실직고하였다. 이에 도일규 사령관은 '당장 총장님을 뵙고 사과 드리라'고 하였고, 이에 김동진 총장 공관에 갔다가 '여긴 왜 왔냐, 범수단에 가서 자수하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승도 대령을 잘 아는 사람들은 원래 그가 호기심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면서도 돌출 행동을 하는 성격이어서 하나회 명단을 뿌렸다는 소식에 그럴 법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하나회 측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6공 당시 9-9라인 핵심 장성[52]의 주도 아래 파워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새 정부에 대비하고 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미리 계획한 명단 살포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 어떻게 일개 대령이 갑자기 총장 공관에 가서 만날 수 있냐는 것. 두 사람은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53] 공식 수사 결과는 백승도 단독 범행이지만, 이후 사석에서 명단 살포는 자기 말고 다른 한 명과 함께 했다고 하거나, 자기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대신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말도 하였다.

명단을 살포한 백승도 대령(31기)은 자수 후 헌병대[54]에 끌려가 호텔 사우나에서 조사를 받은 후 귀가 조치되었으며, 내부 일을 편법적으로 고자질했다는 원죄 때문에 근신 처분 받았지만 이후 동기 중 가장 먼저 연대장(25사단)으로 진출했다.[55] 이후 육군대학 방어학처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산하 국방비서관실 행정관 근무를 거쳐 1999년에 준장 1차 진급에 성공했고 66동원사단장까지 올랐으나 계속해서 소장 진급에 실패하고[56] 전투지휘훈련단장으로 보임되자 이에 반발하여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57] 결국 전역 지원서를 제출하여 2005년 1월 동기생인 최광준 준장과 같이 준장 예편했다.

이제 범수단 수사의 초점은 누가 살포했냐가 아니라 문서의 진위 여부였다. 이상도 준장이 이끄는 범무감실은 장성들을 하나둘씩 일일이 조사하고, 손태진이 이끄는 헌병단은 장교들을 담당했다. 장군들은 쉽게 자신이 하나회임을 인정했으나 장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장군 승진을 눈앞에 둔 27기와 대령 진급을 앞둔 32기는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을 불러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거쳤다. 이에 등급을 나누었는데, A는 본인이 하나회원임을 인정한 경우, B는 본인은 부인 동기생들이 인정, C는 본인 부인 동기생은 일부만 인정, D는 확실히 아닌 경우였다.

확인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하나회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경우와 9-9라인이었다. 30기 이후에는 선배의 일방적인 선택에 자기도 모르게 강제로 회원가입을 한 경우도 다반사였는데다 이 무렵에는 '하나회'라는 조직명이 잘 사용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런 단체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아무개 선배 장군과 수방사 앞에서 밥을 먹었는가?', '그런 모임이 1년에 몇 번이나 있었는가?'를 꼭 물었고, 그리고 보직경로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했는데, 이렇게 하나회원들과 어울리며 잘 나가는 것은 노태우의 총애를 받던 9-9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그렇다면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라며 잘못 자수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러다 기무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회원 여부를 판별해 주었다. 기무사에는 절대 치트키인 존안카드[58]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하나회 명부 자체는 없었지만 하나회로 의심 받은 개개인이 하나회원인지 아닌지는 확인해주는 건 가능했다. 여기에는 하나회원이 非하나회원인 척하여 숙청을 피해가거나, 非하나회원이 오해를 받아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된다는 논리에 납득한 기무사 내부의 하나회원들의 도움이 컸다.

이 과정을 거쳐 1993년 말에 가서는 하나회 명단 최종본(105명)이 완성되었다. 백승도 버전과 비교해 본 결과 90%가 일치했고, 특히 장성은 3명 빼고는 다 맞았다. 참고로 이 조사 과정에서 뒤늦게 알려진 일이기는 하지만, 12.12 이전인 26기까지는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이후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7년,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세상도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유사시 우리 말을 잘 들을 젊은 놈들을 군내에 박아둬야 한다."라며 30기 ~ 36기(1980년 임관) 하나회를 한두 달 사이에 급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수 장교들은 선배 장군이 호출해서 회식에 가서 몇 마디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하나회 모임이었고, 자신이 가입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후 진급에서 계속 누락된 것은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하나회 명단 확인 결과는 非하나회원들에게 충격을 넘어 헛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5~6공 당시 육참총장 6명 중 5명,[59] 보안사령관 10명 전원, 수방사령관 10명 중 8명, 청와대 경호실장 5명 전원, 육본 인사참모부장 15명 중 13명, 수방사 30 경비단장 6명 전원, 33 경비단장 7명 전원이 하나회원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 때로 올라가도 당시 영관급 요직이었던 수방사 경비단장, 보안사 실·처·지구대장, 수방사 대대장·작전참모, 특전사 작전참모, 수도권에 있는 9사단, 30사단 연대장·작전참모가 대부분 하나회원이었다.

이제 명단도 다 확인됐겠다, 이들을 어떻게 처분하는지만 남았다. 대장과 중장은 보직을 안 주면 자동 전역이나, 소장 이하는 군 인사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에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진급 대상자는 한 차례 진급에 불이익'을 주며 진급 대상자가 아닌 경우는 '주요 보직에서 좌천'[60]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회측에서는 '말이 1차례 불이익이지 한 번 한직으로 가면 보직 관리가 안 되어 더 이상 진급이 안 된다'라며 사형 선고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4. 12.12 군사반란 장성 축출

같은 해 5월 8일 국회에서 야당의 박계동 의원은 황인성( 육사 4기) 국무총리에게 " 12.12 쿠데타냐 아니냐?"라고 물으며 OX로 답하라고 했고, 이에 황인성은 "하나의 군사적 행동으로 위법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그러자 민주당 이해찬 의원이 "부대를 이탈해 서울특별시까지 탱크를 몰고 온 것이 합법적인 행동이냐?"라고 재차 질의하자 황인성은 다시 한 번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하였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이고 흐리멍텅한 대답이 아니라 위법사항이 아니라는 딱 부러진 답변을 한 것이다. 당장 국회에서 민주당의 반발과 하나회 출신 여당 의원들[61] 간에 고성이 이어졌다. 결국 다음 날 황인성은 사과하였고, 그래도 반발이 이어지자 13일에는 "12.12. 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었다."라는 청와대의 공식 답변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 쿠데타를 일으킨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12.12 군사반란 당시 쿠데타의 주역은 보안사( 전두환)와 병력을 출동시킨 특전사, 수방사, 9사단( 노태우)이다. 이 중 앞서 3개 부대의 지휘관들은 군내에서 출세할 만큼 다 출세한 후 이미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반면 중앙청에 탱크를 몰고 쳐들어간 9사단 출신 등 일부는 아직 군문에 남아있었는데, 당시 사단장 노태우 이하로 구창회 참모장,[62] 이필섭 29연대장(현 합참의장, 16기), 안병호 작전참모(현 2군 부사령관, 20기)가 바로 그들이다.[63] 또한 수방사에서 이중 플레이를 했던 김진선 상황실장(현 2군 사령관, 19기)이 현직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을 사살한 당시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현 56 보병사단장, 23기)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당사자들이야 12.12 군사반란 당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12.12 군사반란 당시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반란 모의를 한 다른 장수들과 달리 이들 4명(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선 2군사령관, 안병호 2군 부사령관, 박종규 56사단장)은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듣고 일선에서 근무만 하다가 상관들의 지시를 받고 따랐다. 특히 당시 29연대장으로 중앙청에 군대를 출동시킨 이필섭은 "그때는 정말 사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며 자신은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이후 9사단장까지 역임하며 9-9 인맥의 성골로 온갖 꿀을 빨아온 것이 사실이다.[64] 안병호 당시 작전참모는 어떻게 한 번 좌천시킨 사람을 또 자르냐며 기자회견까지 하려고 했지만 측근들이 말렸다. 김진선은 개혁 성향의 인물로, 전두환 시절에 이미 하나회를 공격한 공적으로 새 정부에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방사 상황실장으로 허위 보고를 하면서 장태완 장군을 헷갈리게 만들었는데, 김진선의 변명은 "아군끼리 피 흘리게 만들 수 없었다"였다.

이번 12.12 군사반란 장성 전역 조치에 하나회 측에서는 같은 12.12 군사반란 가담자라도 하나회만 자른다고 불만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 중앙청까지 군을 밀고 들어간 대대장 출신 장성 3명은 비하나회여서 그런지 아무 처벌이 없었다. 하지만 박종규 소장만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박종규는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 체포 명령을 최세창 3여단장에게 받았을 때 "사령관 체포 명령을 거부하고 여단장을 잡아야 한단 말인가?"라며 정황상 어쩔 수 없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한쪽 팔에 총을 맞고 박종규에게 개처럼 질질 끌려갔던 것을 가장 수치스러워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결국 의문의 자살[65]로 생을 마감했고, 참군인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는 충격에 눈이 멀었다는 비극적인 스토리는 박종규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필섭 함참의장 등 12.12 군사반란 가담 장성 4명의 예편이 발표된 5월 23일, 박세환 교육사령관이 대장으로 승진 후 김진선의 후임으로 2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박세환 사령관은 고려대 ROTC 1기로 학군 출신 첫 대장이었다. 드디어 비하나회, 비육사 출신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ROTC는 1965년에 시작되어 1993년 당시 현역 장교의 절반, 초급 장교의 70%(육사의 7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무 복무 후 90%가 전역하지만 남은 10%의 단결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파워 집단으로 노태우 정부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의 취임 일성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이는 ROTC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세환 사령관 이후 ROTC 3기인 임재문 준장이 기무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문민정부 내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렇게 김영삼 대통령 취임 3달 만에 장군 18명이 옷을 벗었고, 떨어진 별이 40개[66]가 넘었는데, 이는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상급 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 군 내 숙청 작업이었다. 이때 새로 임명된 중장 이상의 인사가 너무 많은 탓에 대통령이 달아줄 계급장이 모자라서 현역인 국방부 국장급 인사들에게 계급장을 빌려서 달아줬다는 일화도 있다. 평소 인사가 6월, 12월에 있으니 이를 예상치 못하고 별들을 준비 안 해놔서 생긴 후문이다. 그 정도로 급박하게 인사이동이 부랴부랴 이뤄졌음을 대변해 준다.

여기까지를 1차 하나회 숙청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최초 의도는 여기까지였다. 하나회 완전 숙청이 아니라 대통령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만 도려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하나회의 수장들만 날렸을 뿐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터치하지 않았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보도 제목인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 등이 말해주듯이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수뇌부만 숙청하는 것이었다. 장성급이야 정치색으로 찌들 대로 찌들었지만, 원래 영관급 이하들은 기수별로 영남 출신의 성적 최상위권자들을 수뇌부가 미리 찍어놓고 집요하게 스토킹하여 꾸역꾸역 가입시킨 이들이 꽤 많았고, 최소한 공부는 잘 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나름 우직하게 군 생활을 하면서 하나회에게 당한 게 어지간히 많았던 권영해 국방부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권영해의 경우 소장 출신인 것을 두고 군부 쪽에서 여태까지 국방부장관은 예비역 대장이 하던 관례를 들먹이며 일개 소장 출신이 장관에 올라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비난 첩보를 듣던 상황이었고, 김동진은 육사 17기 수석졸업자로 엘리트 중 엘리트였지만 비영남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대구 및 영남권 기반으로 구성된 사조직인 하나회에게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육참총장 이전 김동진의 보직이었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21세기에는 근 20년간 가장 많은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한 요직 중의 요직이 되었지만,[67] 당시에는 육군참모총장 경쟁에서 패한 퇴물 대장이 가는 자리였다.[68]

그래서 권영해와 김동진 모두 하나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는데, 박관용 전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유능한 초급장교 보호 차원에서 일정 선까지는 살려보자고[69] 대통령의 동의를 얻은 후 박관용이 직접 H호텔 일식당에서 이들을 만나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권영해는 그런대로 납득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동진은 정색했는데, 김동진은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일이 터진다.

5. 잔당들의 반발과 최후

"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나?"
하나회 숙청에 반발한 모 하나회 장성의 발언[70]
하나회 1차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1993년 7월 9일,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한달 기념으로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71]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72] 이충석 소장(육사 21기)[73]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74]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불만 섞인 발언을 했고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이양호 합참의장은 일어나 나갔으며, 합참1차장 편장원 대장은 직접 말렸고, 하나회 19기 선배인 김상준 작전본부장과 이택형 전략기획본부장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충석 소장은 술에 취해 업혀 갔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KBS 뉴스

김영삼과 非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전해듣고서 하나회가 청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 통수권자에게 저항하려 한다고 판단했으며,[75] 새 합참의장인 이양호 대장은 분노했다. 결국 하나회 잔당들의 복수를 우려해 일부러 내버려뒀던 일부 장성과 영관급 회원까지 모조리 갈아 엎어버리기로 방침을 바꾼다. 먼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을 16일에 보직 해임[76]함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하나회 장성들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장성급을 정리한 이후에는 영관급을 숙청했다. 하나회 출신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진급과 직위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했으며, 그렇게 5공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하나회는 말 그대로 몰락했다.

이충석은 전두환의 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로 하나회 계보를 보자면 12기 박희도 - 14기 이종구 - 17기 김진영 - 19기 서완수의 뒤를 잊는 21기의 전통 전두환맨이다. 전두환이 1사단장일 때 예하 대대장이었고 이후 수경사 30경비단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역임했다. 그야말로 진퉁 1-1 라인.

게다가 며칠이 지나고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내쫓긴 최승우 소장(21기 하나회)이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2군단장 김길부 중장(20기)과 모의해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는 문건이 기무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더 커졌으나[77] 무혐의로 결론났다. 그럼에도 최승우 소장은 육본 정책위원이라는 집에서 노는 자리로 옮겼다가 8개월 후 예편되었고, 김진영 전 육참총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뒤이어 제1야전군사령부에 피바람이 불게 되는데, 하나회 인사인 조남풍 1군 사령관(육사 18기)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군 장성들 상당수가 하나회 인사였는데 부사령관 서완수(육사 19기)[78], 참모장 유회국(육사 22기), 작전처장 윤영정(육사 24기), 2군단장 김길부(육사 20기), 3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등 하나회 회원들이 1군사령부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순차적으로 교체되었다. 후임은 이준(육사 19기) 국방부 군수본부장으로, 군단장을 지내지 않은 채 대장으로 진급한 이례적 케이스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인사에서 하나회원인 김정헌(육사 18기) 육사 교장,[79] 이택형(육사 19기) 합참 작전기획본부장, 안광렬(육사 20기) 국방부 시설국장, 최기홍(육사 22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덕선(육사 20기) 11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3군단장, 최승우(육사 21기) 교육사 참모장이 모두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발령받았고 이후 다른 한직으로 다시 내쫓긴 최승우 소장을 빼고 전부 전역했다. 6개월 뒤인 1994년 4월에는 김재창(육사 18기) 연합사 부사령관, 장석린(육사 18기) 국방대학원장, 박광영(육사 19기) 육군교육사령관, 최권영(육사 19기) 777사령관, 김길부(육사 20기) 2군단장, 표순배(육사 21기) 9군단장, 김현수(육사 23기) 22사단장, 길영철(육사 23기) 11사단장이 교체되었다. 모두 하나회원이었고, 이로써 중장급 이상에 하나회원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가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물색했는데, 이때 김영삼은 "5.16 또는 12.12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하고, 하나회 출신이거나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하나회가 득실거린 터라 김영삼이 내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군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등학교 라인인 국가보훈처장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김영삼은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80]라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했다. 이후 이병태가 일산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81]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82] 결국 이병태는 4개월 만에 경질된다.[83]

심지어 하나회 중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참총장 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에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84]에게 시켰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방영된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이 험악하게 나오게 되는데,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영입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외에도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일화들로 짐작하건대,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 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비영남권 출신 非하나회 군인들이었다.

숙청이 마무리돼 가던 1994년 10월 25일에 3사관학교장인 오형근 소장[85]이 1군 부사령관(사실상 전역대기 명령)으로 발령받자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하였다."는 이임사를 하였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후 본인은 부인하였는데, 이는 하나회의 마지막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김영삼의 초기 전격적인 숙청과 93년 10월 정기 인사, 연말 전격 인사, 94년 4월과 10월 정기 인사까지 계속해서 하나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하나회로 바뀐 군부에서는 하나회 출신 장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역시키길 원했지만, 이병태 장관을 거쳐 청와대에서는 중장, 대장까지만 쓸어 버리는 것으로 결론 냈다. 대장은 김재창 한미연합사령관을 마지막으로 모두 전역, 중장급은 김길부, 김종배, 표순배까지 모두 전역하였다. 이 기간 중 하나회 장성 진급자는 한명도 없으며 대령 진급자는 3명뿐이었다.

그래도 22기 이하 36기까지 하나회원 약 100여 명이 군부에 남아 있었다. 명령에 의한 강제전역은 중장과 대장만 가능하고, 소장 이하는 계급 정년까지 임기를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한직에 처박아두는 것이 한계였다. 이 시점에 22기 2명(육본 정책위원 유회국 소장, 최기홍 소장), 23기 4명(김영철 국방대학원 부원장, 박영일 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손수태 3사관학교장, 정정택 합참군수 차장)이 있고 24기는 전원 준장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 25~26기는 준장으로 한직인 동원사단장. 27~31기는 대령에서 승진이 안 되고 있으며, 32~36기는 중령이었다.

반면 오랜 세월 모진 핍박에 시달려 오던 非하나회 장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사단장, 군단장까지는 자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대령~중령급에는 정치장교인 선배 기수들과 달리 육사시절 엘리트였던 군인들이 많이 포섭되어 있었는데, 승진철만 되면 '하나회는 안된다'라는 온갖 압력에 의해 계속 배제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승진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은 더이상 누릴 수 없었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대령들은 요직에서 잘려 행정부사단장으로 좌천, 중령들은 전부 부연대장 같은 한직으로 내쳐진 것이다. 심지어 전방지역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로 근무하던 중령을 후방 지역으로 보내 향토, 동원사단이나 경비연대 대대장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26기까지는 어찌저찌 진급을 했지만[86] 27, 28기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이 끝났으며, 29, 30, 31기는 각각 1, 2, 3명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32, 33기는 그나마 대령까지는 갔지만 34기부터는 2명 빼면 중령 예편, 35기는 4명 빼고 중령 예편했고[87] 36기는 10명 중 5명이 대령으로 진급했다.[88] 한 마디로 26기 이후로는 오히려 진급에 페널티를 크게 받아 오히려 올라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후문.

6. 의의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구속기소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반란 수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선고.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사면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89]이기는 하지만 김영삼의 회고록에서는 김영삼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고 나온다. 9분 43초부터 그런데 전반적으로 회고록의 성격이 "잘한 건 다 내가 하고, 못한 건 다 김대중이 했다"는 식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김대중 역시 특별사면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본인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 정치 보복을 하지않고 오히려 청와대에 초청해서 잘해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굳이 김영삼이 특별사면을 안했다고 해도 김대중 정부 시절에 특별사면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도 DJ 시절이 전직 대통령들이 살기가 가장 좋았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었다.

김영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전두환 정부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흘러나왔다. 그만큼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할 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민주정의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내세울 만한 사람을 못 찾고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기 때문에[90]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 소속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 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과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김동진 육군참모총장( 경복고등학교), 김희상 국방비서관(경복고)[91],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경복고) 등 이른바 경복고 라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 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김현철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92] 흥미롭게도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 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철 본인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면 자신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굳이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숙청 과정에서는 김현철이 개입하지 않았고 숙청 이후 인선 과정에서 경복고등학교 라인으로 일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회 숙청 브레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영삼의 절친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 그룹이 한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중에 하나가 문민통제이고 이것이 미흡하여 수도 없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나라들이 있는 것을 본다면, 하나회 숙청은 문민통제를 완성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7. 부작용?

하나회는 사관학교 우등생들을 권력에 빌붙는 정치군인으로 타락시켰다. 이들은 선후배 간 ‘끈끈한 정’으로 국방부, 육본, 특전사, 수방사, 기무사 등 서울에 위치한 요직들을 독차지하며 공정한 진급 경쟁을 차단시켰다.[93] 그 과정에서 출세를 위해 뇌물과 아부를 동원하며 군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비리를 등에 업은 군대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윗 문단에서 하나회를 옹호한 노태우 역시 이런 썩어빠진 하나회의 풍습에 기여한 인물이다.[94] 독일 1차대전 에이스들이 모여서 후학을 양성한 항공클럽[95]처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한 사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회에도 유능한 인물은 꽤 있었다. 하나회의 후기 구성원 중에는 사관학교 성적 우수자가 많았기에[96], 하나회는 자연스럽게 국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김영삼의 숙청으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렸다는 것. 노태우의 2011년 발간한 회고록도 궤를 같이 한다.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와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등을 거론했다. 몇몇 군사전문가들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회의 존재로 유능한 장교가 조기 전역하기도 했다. 하나회 가입을 거부한 장교나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非하나회 군인들은 이 하나회 때문에 대부분 높아봐야 영관, 심하면 대위에서 끝나버리는 판국이었다. 하나회의 해체 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때 당시 장성 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하고 이걸 하나회의 두목 전두환과 부두목 노태우가 승인하는 게 관행이었다. 요직과 진급을 철저하게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의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른다. 이게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비하나회 군단장이 자기 휘하에 있는 하나회 연대장의 눈치를 봤다! 조천성 사단장이 자기 휘하인 전두환 연대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다가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10년 넘는 기간 동안 어디서 뭐를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겨우 나타난 사례만 보더라도 하나회의 계급 무시는 실로 엄청났다. “국군의 허리인 하나회를 들어낸 것이 잘못되었다”라는 비판은 오류다. 하나회가 국군의 허리를 편법적으로 장악했기에 도려낸 것이다.

일각에서는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대응에 하나회 해산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지만, 진실은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에 문제가 생긴 진짜 이유는 ' 지나친 보병 위주의 군사작전'이다. 죄다 소총수밖에 없으니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들에게 화력으로 계속 밀리기 일쑤였고, 그나마 제대로 활약한 부대가 육군특수전사령부였음을 생각해보자면, 되려 하나회 회원들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보병 만세'가 원인이다. 그래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육군 보병 편제에 유탄발사기 사수가 추가된 것이다. 또한 이때 활약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하나회원이라서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게 아니다. 그는 애초에 부사관으로, 오직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이 경상도인 장교들만 받아들였던 하나회와는 거리가 멀다.

노태우가 주장하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박정희가 유신에 반대하는 채명신[97] 등을 내치고 노재현 같은 정치군인을 기용하면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게릴라전 대처 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이것이 곪아 터져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강릉 무장공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장용 식수(飾樹)를 여유 있게 가져가지 않는 점과 인식되기 쉬운 흰색(장교용) 및 노란색(병 및 하사관용)을 계급장으로 사용한 점 등이다.[98]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휴전선에 배치된 9사단의 29연대, 30연대를 반란에 동원했다. 당시는 박정희 암살로 인해 2급 비상사태[99]가 선포돼 있었는데, 전방 사단의 병력 반 이상을 빼돌려간 것이다. 만에 하나 김일성이 이것을 알아채고 대남 공격을 시도했다면 한국군은 한순간에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다.[100] 결국 노태우가 말하는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두 노태우가 소속된 하나회의 악영향이고, 결국 노태우는 졸지에 셀프 디스를 해버린 셈이다.

게다가 위의 결성 과정 문단에서 서술했듯 하나회의 수뇌부인 육사 11기와 12기 회원들은 대체로 무능했다. 말단이 아무리 유능해봤자 수뇌부부터가 무능하고 썩으면 말짱 도루묵이다.[101] 일례로 박희도의 경우 무장공비를 놓친 일로 인해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하마터면 현역부적합전역을 당할 뻔했다. 하나회의 숙청이 아니라 하나회의 존재로 인해 군이 약화되었던 것이다.[102]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자국을 혼란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던 반란 세력이다. 불법 조직을 해체하고 그 조직원을 처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군인에게 능력만큼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명령 복종이다. 명령 불복종을 넘어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순간부터 이들은 능력이 있든 없든 무조건 뿌리째 다 뽑아버려야만 할 조직이었고, 하나회 해체는 자연히 필연이었다. 파생되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하나회를 해체해서 그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보다는 하나회가 처음부터 없었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문제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훗날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인해 한 나라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하나회 해체는 김영삼 정권의 큰 업적으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103] 스페인도 문민통제에 실패해 스페인 내전으로 나라가 뒤집히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붕괴와 민주화로부터 4년 후[104]인 1981년 독재정권 잔당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했다는 것[105]을 고려하면 하나회 숙청은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2024년 12월 3일 하나회를 숙청했는데도 대통령이랑 군대가 합심해 계엄령 시도를 했음에 따라 하나회 숙청은 더더욱 높이 평가받을 여지가 생겼다.

8. 비판?

<한국일보> YS는 '군화 대신 등산화' 盧는 '386'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군인 출신들을 각종 인사에서 배제했다. 그 대신 김영삼 대통령을 따랐던 상도동계 및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 등의 사조직 출신 인사들이 정부와 산하기관에 대거 배치됐다. 이렇다 보니 해당 기관에서는 "군화가 퇴장하니 등산화(민주산악회 출신)가 대신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물론,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한 뒤 대놓고 국정을 농단했던 신군부와 비교할 바는 못 된다.

9. 매체

  • 공화국 시리즈 제5공화국 22회 '비밀 사조직 하나회'의 프롤로그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권영해를 불러 하나회에 대해 의논하는 것으로 취임 후의 하나회 숙청을 시사한다. 다만 주배경은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인 만큼 후일담을 미리 일부 보여준 것일 뿐 본격적으로 나오진 않았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 3에서 2024년 3월 7일 방송에서 다뤘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 김영삼 대통령의 배우자였던 손명순 여사가 17시 39분, 향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영화 서울의 봄의 후속작으로 동 제작사에서 하나회 숙청을 다룬 영화 ' YS 프로젝트(가제)'을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1] 애초에 민주공화국 사회랑 왕정 사회를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명분론적으로 봐도 무신정변은 당시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차별이 억눌리고 억눌려서 터진 일이지만, 12.12 군사반란 자신들 잇속만 챙기기 위한 명분없는 반란이었다. [2] 김영삼의 이런 전략은 이후 금융실명제 실시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런 철통 보안이 가능했던 건 당시 환경 덕분도 있었다. [3] 전두환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보 기관인 보안사의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거기에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하나회 정동호와 동생 전경환 등을 통해 차지철이 정보망을 구축한 대통령비서실, 경호실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4]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으로, 현역 시절 하나회의 견제와 외면을 받다 한직인 올림픽지원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했던 설움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하나회 청산을 밀어붙였다. [5] 김희상은 하나회가 아니었지만 1988년부터 1993년 10월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당연히 하나회 인사들과도 접점이 있을터. [6] 노태우 정부 시절에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을 지내며 잘 나가던 김기춘 경남고등학교 학맥 + 거제도 출신이어서 독재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KBO 총재 신한국당 거제 지역구 공천까지 받으면서 문민정부에서도 잘 나갔다. [7] 김동일 전 대통령 정무비서실 행정관의 회고에 따르면 동석해 있던 하나회 소속 군 수뇌부들은 이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경직됐다고 한다. 정례적으로 있던 대통령과 국군기무사령관과의 독대 제도를 하루아침에 날린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8] 이 연설을 했을 때 김영삼은 문민정부 최초로 군사 행사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원래 원고는 육사 측에서 으레 준비해 보내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날 원고는 청와대가 직접 준비했다. [9] 참고로 2019년에 처음으로 준장으로 진급하고 2021년에는 소장, 2023년에는 중장에 진급한 기수다. [10] 문민정부 출범 때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1] 직업 군인은 사직서(사표)가 아닌 전역지원서를 내고 전역명령을 발령받는 절차로 자진 퇴직한다. [12] 정확히 김진영은 전역처리였고, 서완수는 대기발령이었다. 장군은 보직이 없으면 전역처리되기 때문. [13] 다만 이문석이 참모총장에 오를 수 없던 것은 그가 초기 환자였다는 점도 한 몫했다. 이문석은 보상격으로 총무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4] 당시 최고 선임자가 소령 언저리에 불과했지만 초급 장교들이 속해 있던 알자회를 해체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의견도 있다. [15] 또한 김희상 등이 속한 사조직인 만나회나 지리멸렬해진 청죽회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선임자가 겨우 대위인 알자회일 가능성은 낮다. [16] 때문에 김진영은 친구였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박관용을 만난 자리에서 "며칠 전까지도 내게 신임을 보낸 대통령인데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라고 물었고, 박관용은 "정치인의 속뜻을 군인인 네가 어떻게 알겠냐?"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17] 권영해가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에 100평대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매입 자금 중 일부가 방산업체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결과적으로 권영해의 동생이 율곡사업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는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졌다. [18] 7개월 뒤 김도윤 기무사령관의 후임은 ROTC 3기인 임재문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준장이었지만 2달 후 소장, 1년 10개월 후 중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심지어 대통령과의 독대도 임재문 때 부활했다. 즉 김영삼은 힘이 센 자리의 계급도 낮추고 독대도 없앴으나 군부 물갈이가 끝나자 몇 달 만에 전부 본인 손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내로남불을 자행했다. [19] 참여정부에서 다시 한 번 소장 직위로 격하를 시도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박근혜 정부 초기에 임명된 장경욱 전 기무사령관(36기)도 소장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다만 장 사령관은 중장 진급을 앞두고 김관진 국방부장관, 박흥렬 대통령경호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등의 인사 관련 보고서를 제출한 것 때문에 괘씸죄로 취임 6개월 만에 예편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재수 중장부터는 다시 기무사령관은 중장 보직이 되었고, 안보지원 - 방첩사령관으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중장 보직으로 유지되고 있다. [20] 연구관이라는 보직은 사실 이름뿐으로, 전역이 예정된 장군이 이전 보직의 임기가 끝났는데 전역까지는 기한이 남았을 때 전역 때까지만 있는 자리다. 하는 일은 거의 없고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다. [21] 이 학군단 그룹의 선두 주자는 하나회는 아니었지만, 하나회의 수장이었던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갖추고 있던 박세환 당시 육군교육사령관이었다. [22] 전두환계였던 김진영, 서완수와는 달리 김형선과 안병호는 확실한 노태우계였고 9-9라인으로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23] 예나 지금이나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자리는 소장으로서 더 이상 진급이 안되는 일명 '막다른 골목' 보직이었다. 위에서 설명했듯 직속상급자인 한미연합군부사령관이 바로 새 육군참모총장인 김동진 대장. 둘 다 한직에서 물 먹던 사람들이 진급에 성공하는 역전극이 일어난 것이다. [24] 다만 이쪽은 다음 보직이 육사 교장이었고 그대로 전역했다. 그의 소장 진급은 1차가 아니었지만 21기 선두 주자들이 전부 하나회였던지라 중장은 1차 진급했다. [25] 12.12 군사반란 당시 특전사령부에서 작전처 교육훈련과장을 맡고 있었다. [26] 안병호는 권영해의 "나를 좀 도와서 잘 해보자."라는 말만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육본 정훈실에서 수방사령관의 업적을 묻는 전화가 왔다가 석연치 않은 반응과 함께 끊기는 등의 일이 있어 경질인지 승진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27] 전임 특전사령관이었던 서완수는 그의 육사 동기였으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2차 보직인 기무사령관을 하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전임 육군참모차장인 김진선은 아예 대장 1차 진급자였다. [28] 심지어 군단장을 안 해본 이준 중장이 진급하여 1군 사령관에 올랐다. [29] 물론 군사정권 시절에 참모차장 자리는 대장 진급과 가장 가까웠지만, 이미 동기들이 대장 TO를 다 잡아먹은 상황이니 한직이라고 볼 수 있다. [30] 안병호는 12.12 당시 9사단 작전참모였다. [31] 정확히는 서울과 근교에 있던 1·3·5·9공수여단. 단 9공수여단장은 12.12 당시 하나회와 연관이 없었기에 12.12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허무하게 날려먹었다. [32] 30경비단, 33경비단. 이 시절에 수방사 예하에 있던 핵심전력은 당연히 경비단들이었고 향토, 동원사단의 전신 격인 훈련단들은 경비단에 비해 규모도 영세했고 예비군 훈련 부대였기 때문에 정예병력도 아니었다. 물론 71훈련단장이 여기에 가담해서 결국 중장까지 달았다. [33] 18기 9-9라인의 핵심. 보안사령관으로 근무 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윤석양 사건이 터져서 해임되고 보안사도 기무사로 바뀌는 수모를 당했다. 그럼에도 9-9라인인지라 대장으로 승진하여 군 사령관까지 올랐다. [34] 다만 김재창 한미연합군부사령관은 하나회원인 것이 뒤늦게 알려져 1년 만에 경질되었다. 김현철에 따르면 처음에는 김재창이 하나회 인사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실제로 하나회 인사 중에는 활동을 잘 하지 않아 핵심 멤버가 아니면 헷갈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35] 사실 17기의 최고 핵심인 허화평, 허삼수(12.12. 당시 보안사 처장급)는 이미 정치권에 들어섰다. [36]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같은 경상도라도 고향 사람인 TK를 중용한 것처럼 김영삼은 PK 출신들을 중용했다. [37] 역시 9·9인맥으로 이문석, 김진선과 함께 전두환계 하나회를 쳐나가다가 적당한 시기에 빠지면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였지만 수방사령관까지 갔다가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때문에 이미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38] 이때 하나회 명단은 하나밖에 없다고 알려졌는데도 불구하고 백승도 대령의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이 일어난 점을 보아 배후가 김진선 육군참모차장이었다는 설도 있다. [39] 그러나 김진선이 하나회 명단에 있는 것을 보면 뒤늦게나마 가입했다는 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니면 9-9로 잘나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원으로 의심받은 걸 수도 있고. [40] 표순배, 김정신, 배문한, 이재관. 단, 이 중에서 표순배 중장이 하나회 인사였다. [41] 이 중 정연우 소장은 이듬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이동한 후 1996년에 전역했으며 1998년에 사망했다. [42] 임종섭 소장은 인사참모부장으로서 하나회 청산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하나회의 역공으로 의심되는 투서를 받고 사단장 시절의 당시 관행으로 여겨지던 지역 업체로 부터의 장병 위로금 수수에 관한 수사가 진행 되었고 이후 공병대대장과 사단 참모장이 수수한 장병 위로금 전부가 부대 운영에 쓰였다는 수사 결과가 발표 되며 기소 유예 처리 되었다. 하지만, 군 개혁기에 하나회 청산의 첨병에 있는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계속 유지 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한 임종섭 장군은 지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사임했고 군 당국은 임종섭 소장을 9군단 부군단장으로 임명하고, 후임으로 육사 22기 곽동도 소장을 인사참모부장에 임명한 후 하나회 청산 작업을 이어갔다. 이후 임종섭 소장은 9군단 부군단장, 군 개혁추진위원장을 거쳐 국방정신교육원장을 역임하며 1998년 만기 전역하였다. [43] 보직해임된 인원은각각 육사 21기 전영진 소장(전두환계 하나회), 육사 21기 최승우(전두환계 하나회. 21기에는 9-9라인 없음.) 소장이며, 이들은 국군의 날 제병지휘관과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44] 이 과정에서 경질된 최승우 소장은 한직을 떠돌다가 1995년 6월에 전역했으며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이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예산군수에 당선되고 내리 재선했다. [45] 결국 뒷말이 나왔던지라 1994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조치되었다. [46] 하나회가 완전히 박살나고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하나회 말단이던 류제승은 8군단장, 김현집은 5군단장, 최익봉은 특전사령관을 지냈고, 한 술 더 떠서 김현집은 3군 사령관까지 지냈다. [47] 군에 하나회가 너무 많다보니 한번에 다 잘라 버리면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회 인원을 남기되 진급 가능성이 없는 보직(소장급은 교육사령부 OO부장, 병과학교장, 국방무관, 부군단장 등)으로 보내서 근무시켰다. [48] 이태원동 남산 대림아파트. 남산2호터널, 남산3호터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남측 입구 근처에 있었고, 이 사건 직후에 철거되고 민간 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 [49] A4보다 더 작은 노트 수준의 크기이다. 삐라를 생각하면 쉽다. [50] 지금도 헌병 병과에서는 상당한 요직이다. [51] 하나회+9-9인맥의 핵심이었던 15기 이진삼 육군참모총장의 비서실장 및 전속부관을 3번이나 역임했다. [52] 일단은 김진선 당시 육참차장으로 추정. 하나회 명단은 육본 인사참모부장에게 딱 1부 밖에 없었는데 김진선이 전임 인사참모부장인 안병호에게 물려받았고 이후 없어졌다. 김진선은 이 명단을 바탕으로 보안사령관 시절 보안사 내 하나회 참모 제거 작업을 하다가 노태우의 눈밖에 난 적이 있다. [53] 김동진 총장은 별다른 대화 없이 호통을 쳐서 백승도 대령을 바로 범수단으로 보냈다고 밝혔다. [54] 범수단에 자수했으나 중간에 헌병대가 낚아챘다. [55] 사실 2010년대 이전까지 연대장은 대령 2~3차 보직이었다. 요즘은 연대장 - 참모 보직 - 한직/준장 순서지만 이 시절에는 참모 보직 - 연대장 - 한직/준장 순이었다. [56] 동기인 한민구는 2003년 상반기에 1차로 소장 진급에 성공한 후 53사단장으로 진출했는데 백승도는 2003년 상반기는 물론, 2003 하반기, 2004 상반기, 2004 하반기 모두 소장 진급에서 밀려났다. 그런 상태에서 준장 한직 발령을 받은 것이다. [57] 2004년 하반기 장성급 장교 인사는 청와대 개입 등 각종 논란이 있었고 결국 이듬해 초에 2년의 임기를 마친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은 장성 진급 비리 사건으로 참여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그대로 전역하게 되었다. [58] 존안카드(존안자료)란 사정.공안기관 등이 공직인사에 대비해 비치해 놓은 대외비 인사파일을 통칭하는 것이다. '없애지 않고 보관해둔다'는 존안이라는 단어 뜻처럼 대상 인물의 행적, 근무 평점, 신상, 업적, 경험을 오랫동안 관찰, 정리해 둔다. [59] 전두환 정부 초대 총장 황영시 장군은 육사 10기이며, 하나회의 후원자이자 12.12의 주역이었다. [60] 국군의 날 제병지휘관, 부군단장, 군단급 기능사령부 부사령관, 교육사 참모부장 등. [61] 이춘구(제천), 박준병(보은, 옥천, 영동), 강창희(대전 중), 김복동(대구 동 갑), 정호용(대구 서구 갑), 허화평(포항), 박세직(구미), 김상구(상주시, 군), 허삼수(부산 동), 정동호(의령, 함안), 배명국(진해, 창원군), 신재기(창녕), 권익현, 안무혁(전국구) 등 하나회 출신 국회의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당연히 군사정권 시절에 여당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인물들이었다. [62] 육사 18기. 3군 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하나회 숙청으로 이미 날라갔다. [63] 김봉규 30연대장은 12.12 군사반란 때 병력을 출동시켰지만, 이건영 군사령관에게 보고를 했다는 죄로 별을 못 달고 군문을 떠났다. [64] 당시 출동한 대대장 3명은 전부 장성이 되었고, 다른 작전 관계로 출동 못한 29연대 2대대장은 전역했다. 대신 예하 대대장을 출동시킨 후 이건영 군사령관에게 상황 보고한 김봉규 30연대장도 역시 장성이 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65] 말이 자살이지 사실 정병주 항목을 보면 자살로 보기엔 의문스러운 정황이 상당히 많다. [66]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에 참가한 의 합계가 22개였다. [67]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북한의 핵개발 및 미사일 도발 등으로 인해 한미동맹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특히 북한의 핵무장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더더욱 필수불가결한 위치로 올랐다. [68]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연합사 부사령관이 한 - 미 군사외교관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어 선택받은 일부만 2차 보직으로 합참의장을 받고, 그 외에는 임기가 끝나면 다 전역한다. 국방개혁 및 자주국방 등을 이유로 야전 지휘관들에게 참모총장이 될 기회를 많이 주기 때문이다. 김승겸 장군만 영전하고 김병주 장군 등 그 외에는 모조리 전역해야 했다. [69] 이때도 초급 장교를 갈아버렸다가 고생한 소련의 예시 등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70] 구군부인 박정희, 신군부인 전두환 때는 본인들의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무신정권을 비교적 옹호하는 식으로 역사 교육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신정권 역시 지도층만 문벌귀족에서 무신으로 바꿨을 뿐, 민중 착취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71]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75. 사파리가든(舊사파리클럽), 폐업, 언제 재건축 되었는지는 모르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그 자리에는 한남 더 리버라는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72] 지금도 작전직능 소장에게는 상당한 요직이다. [73] 당시 제1보병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 중이었다. [74] 먼저 불만 섞인 발언 후 얼마 지나 흥분에 못 이겨 중국식 찻잔을 던져 깨트렸고 이후 추가로 맥주컵을 던졌다는 설도 있다. [75] 저항 수준이 아니라 이미 쿠데타를 벌이기 전 단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래 문단에서 후술. [76] 그 후임은 육사 동기인 이규환 합참 작전기획부장이 임명되었다. 이규환 장군은 21기 비하나회로 중장 진급 후 3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그의 아들인 이진우는 육사 48기로 당시 중위였으며, 이후 장성이 되어 중장까지 올라 수도방위사령관을 맡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엮이며 검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아버지의 얼굴에 단단히 먹칠하고 말았다. [77] 하나회 측에선 안기부의 이 모 소장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나, 본인은 부인하였다. [78] 형식상으로는 자진전역. 이미 핵심 요직이던 기무사령관에서 잘렸을 때부터 전역준비를 하고 있었다. [79] 다만 이쪽은 이미 동기와 후배들이 대장으로 진급한지라 대장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속 중장급 인사에 따라 전역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7군단장에 이어 육사 교장도 2년간 역임한 상황이었다. 이후 2004년 6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이를 비관하여 모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0] 각종 요직을 거쳐 합참 작전본부장이 되었으나 전두환계인 김진영과 노태우계인 이문석, 비하나회인 김동진, 김연각에게 밀려서 대장을 못 달았다. 이병태는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이기도 하며, 특히 김영삼이 민자당 대표시절 전방 순시때 수행역을 맞아 친분을 쌓았다.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의 5촌 조카였던 점도 등용에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심지어 이병태가 국가보훈처장이 된 것도 운빨이 있었는데,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여러 자리를 인선하는 도중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 임명을 빼먹고 이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옮겨심기 식으로 임명된 것이었다고 한다. [81] 유사시 아파트를 무너뜨려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장애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82] 야당에서 이병태 장관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때마침 김일성이 사망해서 묻히고 만다. [83] 김영삼이 이 망언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박관용의 말에 따르면 이병태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영삼에게 ' 새끼'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84] 김진영 숙청 당시에는 비서실장. [85] 하나회 21기로 전두환 아래 공수1여단에서 근무 했고, 1사단 연대장을 거친 1-1인맥. [86] 특히 1차 진급자까지는 진급 막차를 잘 타서 준장을 달았지만, 1차 진급에 실패한 인원들은 3명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을 끝냈다. [87] 이 중에서 류제승 혼자 살아남아 중장까지 진급하여 8군단장과 교육사령관을 하고 전역한다. [88] 이 중에서 김현집과 최익봉이 살아남아 중장으로 1차 진급했으나 최익봉은 성추문으로 잘렸고, 김현집은 끝까지 살아남아 3군사령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까지 하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김현집은 20년 만에 하나회가 배출한 3군 사령관이었다. [89] 사실 사면은 임기 막바지에 당선인과 함께 논의해서 정하는데, 임기가 얼마 안 남은 대통령은 끈 떨어진 갓 신세고 대통령이 가장 힘이 셀 때가 당선인 때다. 김영삼도 당선인 신분 때 장세동을 날렸다. 기사. 이런 정치적 관행이 꼬여서 훗날 문제가 된 사례가 바로 2022년 정권 교체기이다. 후임 정부는 자기들 의견이 반영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주장해서 전임 정부를 물먹였고, 그걸 또 전임 정부는 너무 대놓고 거부해서 후임 정부를 물먹인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관행'이고 이걸 준수해야만한다는 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때문에 상호 합의를 거쳐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후임 정부에서 이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후임은 어디까지나 '후임'이기때문에 현 정부의 임기가 법적으로 종료되기 전까지는 '전임 정부'가 아니라 '현 정부'이다. 때문에 현 정부가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맞다. 후임 정부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관행은 법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력은 없다. 그래서 정부 임기가 시작한 이후에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0] 물론 여기에는 김영삼의 계산도 작용했다. [91] 이후 핵심 요직인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쳤으나, 정권이 바뀌고 좌천되어 중장 한직인 1군 부사령관과 국방대 총장을 지내고 전역했다. 이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과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92] 김희상도 전혀 몰랐다는 말도 있다. [93] 이는 야전을 착실히 거쳐야 할 초급 장교들을 전방이나 베트남 전쟁 같은 실전에서 복무하는 대신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다. 기껏 파견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까운 경기도 등지로나 간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파병 나가서도 현지에서 일부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94] 애초에 하나회의 가입 조건이 꼭 능력주의인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하나회의 수괴 전두환부터가 육사 추가 합격자로, 육사에서는 상당히 무식한 인물이었다. 농담이지만 본인 스스로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드럽게 못했다”라며 자조하는 영상도 유튜브에 돌아다닌다. [95]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이 전투기를 가질 수 없자 파일럿 육성을 위해 꼼수로 만든 집단이다. [96] 한국논단 등 보수 단체의 주장이기는 하나, 육사 수석과 차석 등에 하나회가 열렬히 구애한 것을 보면 아주 빈말은 아니다. 하나회는 마치 꿀벌이 꿀을 찾듯 권력에 과하게 집착하는 특유의 성질을 지녔다. 군인의 출세는 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에서 시작하기에 하나회가 이들에 집착한 것도 같은 연유다. [97] 채명신의 회고록을 보면 박정희의 정권 연장에 반대하고 명예로운 퇴임을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쓸쓸하게 전역하였다. 1972년 5월 30일 오후 5시 유재흥 국방부장관에게서 "국방부로 와달라"는 명령을 받고 국방부로 갔는데, 국방부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여 삭막했고, 유 장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책상에서 전역 명령서를 꺼내주었다고 한다. [98] 다만 계급장은 꼭 하나회의 탓이라 보기 어렵다. 당장 위 문단에서 거론된 채명신 역시 흰색 계급장을 옹호하며 검은색 계급장은 ‘죽음을 연상’시킨다며 반대했다. [99] 전투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전투 상태에 들어가는 작전 명령. [100] 거기다가 9사단과 함께 서부전선 방어의 중핵을 책임지는 제2기갑여단 제1군단 예하 병력까지 반란에 동참하고 있었으니 서부전선 특히 파주시 방면에서의 방어 공백은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101] 전근대긴 하지만 원균이라는 끔찍한 사례가 존재한다. [102] 생각해보면 당연지사다. 하나회가 아니면 사단장이 연대장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 돼버렸는 마당에 군대의 규율이 바로 설까? 하나회 소속이 아니면 실력이 있어도 핵심 보직에 가지 못하는 상황인데 상식적으로 이것은 군의 약화를 불러온다고 봐야 한다. [103] 다만 미얀마는 군부 자체가 수십년간 나라를 통치해온 정치 집단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의회 의석도 군부에 25%가 할당되는 것이 법으로 정해졌을 정도로 정치에 깊게 뿌리박혀 있으며, 군인과 일반 시민간의 교류는 커녕 오로지 군인끼리만 교류를 하는 사실상 신분제에 준하는 상황이다. 수장 역시 군부 내에서 임명하는 문민통제가 이뤄지지 않은지 오래된 상황이라 대한민국과는 상황과 경우가 많이 다르다. 애초에 2016년 ~ 2020년 사이의 민주 정부가 통치하던 시기 역시 군부가 국제 여론을 신경써 약간 뒤로 물러나 준 것에 가깝다. 실제로 2021년 쿠데타 역시 정부가 군부 예산을 삭감하려 하자 바로 들고 터진 것이다. [104] 한국으로 치면 노태우 정부 말기 포지션이다. [105] 심지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3-F 실패 후에도 (민주화 20년 후인) 1997년까지 무려 3번의 쿠데타 모의가 더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무려 참여정부 말기까지 군부의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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