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하테리우스 라틴어: Quintus Hater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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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65년 ~ 서기 2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하테리우스(아버지) 빕사니아 아티카(아내)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아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손자)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년 |
전임 |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동기 |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
후임 |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파시에누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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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서간집에 등장하는 법학자 '하테리우스'가 아버지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그가 집정관에 올랐을 당시 60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65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는 호민관, 법무관, 에풀로네스(Epulones)[1]를 역임했다고 한다. 세네카의 아버지인 대 세네카가 집필한 서간집 <철학자의 담론을 위한 적절한 스타일에 관하여>에 따르면, 그는 당대에 주목받는 웅변가 중 한 명이었지만, 급하고 파토스를 사용하며, 딱 한 번 멈출 뿐 끊임없이 이어지고, 말이 너무 빨랐다고 비평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자기 웅변이 유려하고 조화롭다고 묘사하며 즉흥 연주의 힘을 강조했지만, 그의 웅변가로서의 명성은 말년에 접어들 무렵에 사라졌다고 한다.기원전 5년 루키우스 비니키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뒤이어 그의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 원로원 의원들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물려받으라고 권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제국을 이끌 책임의 일부를 지겠지만 전부 지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발언을 들은 하테리우스가 튀어나와 이렇게 물었다.
"카이사르여, 언제까지 국가에 머리가 없는 상태를 두시겠습니까?"
티베리우스가 이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내자, 하테리우스는 자기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다고 여겼다. 그는 회의가 끝난 뒤 팔라티노 황궁으로 달려가서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의 무릎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그 때문에 땅바닥에 넘어졌고, 경비병들은 이것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하테리우스를 죽이려 했다가 리비아 드루실라가 말리자 그만뒀다고 한다.
16년, 하테리우스는 원로원에서 로마를 지배하는 사치를 비난하는 긴 연설을 하면서, 순금 용기에 음식을 담는 것을 금지하고 남성이 실크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가 반대했고, 티베리우스는 지금은 도덕에 반하는 입법을 할 때가 아니라며 논의를 중단했다. 22년,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자기 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하테리우스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드루수스에게 호민관 권한을 부여한 결정을 금 글자로 새기고 원로원 의사당에 세우자고 주장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 주장은 동료 의원들과 민중의 비웃음을 샀고, 웅변가로서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한다. 26년 말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테리우스는 생전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폼포니아 카이킬리아 아티카의 딸인 빕사니아 아티카와 결혼해 22년 집정관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를 낳았다. 손자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는 5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