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라틴어: Lucius Caninius Ga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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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투스쿨룸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아버지 또는 조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년 |
전임 |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
동기 | 아우구스투스 →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
후임 |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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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투스쿨룸 출신으로, 기원전 3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의 아들 또는 손자로 추정된다. 그는 여러 사료에서 기원전 20년, 기원전 19년 또는 기원전 18년에 화폐 주조관을 맡았고,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투스쿨룸 시의 조영관을 맡았다. 기원전 2년,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를 대신해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일정 기간 동안 아우구스투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두었고, 이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와 퀸투스 파브리키우스를 잇달아 동료로 두었다.그는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와 함께 <푸피아 카니니아 법>(Lex Fufia Caninia)을 반포했다. 이 법은 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노예의 수에 제한을 두었다. 법학자 가이우스에 따르면, 유언으로 해방할 수 있는 노예의 수는 재산의 규모에 비례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되었다.
1. 노예를 한 명이나 두 명만 보유하고 있을 경우, 유언자는 노예를 자유롭게 해방할 수 있다.
2. 노예를 3명에서 10명까지 보유할 경우, 절반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3. 10명 이상에서 30명까지 보유할 경우, 3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4. 30명 이상에서 100명까지 보유할 경우, 4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5. 100명 이상에서 500명까지 보유할 경우, 5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6. 노예 보유 규모에 관계없이, 100명까지만 해방할 수 있다.
2. 노예를 3명에서 10명까지 보유할 경우, 절반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3. 10명 이상에서 30명까지 보유할 경우, 3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4. 30명 이상에서 100명까지 보유할 경우, 4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5. 100명 이상에서 500명까지 보유할 경우, 5분의 1 이상을 해방할 수 없다.
6. 노예 보유 규모에 관계없이, 100명까지만 해방할 수 있다.
또한 사망자에게 속한 도망 노예는 재산에 있는 노예 총 수의 일부로 계산되었고, 해방될 각 노예는 유언장에 이름이 기재되어야 했다. 다만 유언장이 작성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이 있는 여성 노예의 자녀를 해방하는 것과 같이 별도의 설명이 기재될 수 있었다. 이 법이 도입된 목적은 주인이 노예를 무차별적으로 해방해 장례 의식에 참여하도록 해, 애도자를 최대한 불려서 사회적 위상을 드높이지만 살아있는 후계자에게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세태가 벌어지는 걸 방지하는 데 있었다. 경제사학자 피터 테민(Peter Temin, 1937 ~)은 이 법을 노동 시장 관점에서 노예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제한된 해방 기회 중 하나를 얻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법이라고 추정했으며, 영국 사학자 피터 애스트버리 브런트(Peter Astbury Brunt, 1917 ~ 2005)는 노예 소유주가 로마 시민으로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예만 해방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조치라고 추정했다.
서기 9년 또는 10년에 아프리카 총독에 선임되었고, 티베리우스 치세 때 테베레 강 유역과 로마 시의 하수도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공무원인 '테베레 강 수로와 도시의 은행 및 하수구 관리인(curatores alvei Tiberis et riparum et cloacarum urbi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 시빌라 예언서의 관리자인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에 소속되었으며, 서기 32년 시빌라 예언서에 시빌라 신탁의 새로운 컬렉션을 포함하는 것에 대한 결의안에 대해 원로원이 투표하도록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에 동의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는 새롭게 발견된 시빌라 신탁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았으며, 카니니우스 갈루스가 경솔하고 올바른 종교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고 질책한 뒤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 전체에 이 문제를 회부해서 처리하도록 했다. 한편 갈루스는 아르발 형제 사제단의 일원이었으며, 서기 36년 아르발 형제단의 마기스테르(magister, 지휘관)이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