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라틴어: Gnaeus Octav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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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조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아들 또는 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7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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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로마 진군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살해당한 인물이다.2. 생애
옥타비우스 씨족은 기원전 230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푸스가 재무관에 선출되었을 때부터 로마 정계에 진출한 평민 씨족이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푸스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낳았는데,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후예가 바로 그이고,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후예가 훗날 로마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에퀴테스 가문이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푸스의 장남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205년 법무관을 맡았고, 그의 아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165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손자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12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렇듯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씨족은 집정관 직임을 연이어 맡으며 노빌레스로 거듭났다.기원전 128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인 그는 기원전 100년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는 데 가담한 귀족 무리에 참여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조영관을 맡았고, 기원전 90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한 뒤 기원전 90년에 그리스 동부에서 총독을 역임했다. 이 사실은 델로스 섬에서 그를 기리는 비문이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기원전 88년, 옥타비우스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는 술라가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여 마리우스 일당을 모조리 몰아낸 후 치러졌다. 술라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를 집정관에 당선시키려 했지만,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군이 로마 시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에 격분한 유권자들은 술라 쪽으로 기울지 않은 옥타비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를 차기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술라는 선거 결과에 태연한 체하면서, 이것이 자신을 폭군이라 칭한 정적들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집정관들이 자기가 동방으로 떠난 사이에 배신하는 걸 방지하고자 신임 집정관들의 취임 선서를 집행할 책임자로서 그들이 자신의 정치 개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두 집정관은 많은 군중 앞에서 그렇게 서약했고, 약속을 어길 시 추방형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바닥에 돌을 던졌다. 술라는 이 정도면 안심할 만하다고 여기고 카푸아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떠났다.
술라가 동방으로 떠난 후인 기원전 87년 초, 킨나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법안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옥타비우스는 기존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대파를 이끌었다. 투표 당일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킨나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으로 이끌어 킨나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킨나는 로마 시에서 탈출했고, 옥타비우스는 민회를 움직여 킨나를 집정관 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형을 내린 뒤 신관단의 일원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로 대체했다.
킨나는 로마를 떠난 뒤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해 순식간에 10개 군단 이상을 모집했다. 여기에 술라에 반감을 품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귀족들을 대거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옥타비우스는 이에 대항해 로마 북쪽의 피케눔 일대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킨나도 스트라보에게 자기 편을 들라고 권했다.
스트라보는 양자에게 자신이 가담하는 대가로 2번째 집정관 직임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옥타비우스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킨나는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이에 스트라보는 킨나와 합류하려 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킨나 쪽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킨나파가 승리하면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될 거라 여기고 옥타비우스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킨나, 마리우스 측과 전면전을 감행하지 않고 로마에 본군을 주둔시킨 뒤 소규모 병력만 보내서 적과 작은 규모의 전투를 치르는 등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한 번은 옥타비우스가 야니쿨룸 언덕에서 마리우스를 공격했다. 스트라보는 6개의 코호트를 보냈지만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면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초기에 승기를 잡는 듯했던 옥타비우스는 추가 지원을 받지 못하다가 마리우스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옥타비우스에게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징집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그는 "법을 지키기 위해 마리우스를 추방했는데, 이제와서 노예를 무단으로 해방시킬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법치를 준수하려는 열망이 지나쳐서 유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놓쳤다고 평했다. 그러던 중 전염병이 로마 시 전역에 퍼졌고, 스트라보는 11,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삼니움족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메텔루스는 "옥타비우스를 지휘관으로 삼으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스트라보를 따랐던 병사들은 옥타비우스를 경원시했기에, 마리우스에게 귀순하는 쪽을 택했다.
이후 메텔루스는 킨나와 계약을 맺고 이탈리아를 떠났고, 원로원은 로마 시를 마리우스와 킨나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로마에 입성한 뒤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옥타비우스는 주변으로부터 어서 피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모두 뿌리치고 야니쿨룸 언덕의 집정관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킨나는 기병 분견대와 함께 가이우스 켄소리누스를 파견했다. 켄소리누스는 옥타비우스를 죽이고 그의 수급을 킨나에게 바쳤다. 그 후 옥타비우스의 수급은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올려졌고, 뒤따라 살해된 다른 원로원 의원들의 수급이 그 옆에 전시되었다.
기원전 75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옥타비우스는 그의 아들 또는 형제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