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라틴어: Lucius Appuleius saturn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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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30년대 ~ 기원전 100년 12월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평민 귀족(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아들)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데키아누스(양자) |
직업 | 로마 공화국 호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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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기원전 103년과 기원전 100년에 호민관을 맡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퇴역 군인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공유지를 몰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무리수를 두다가 기원전 100년 집정관 당선자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살해된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원로원 최종 권고를 선고받고 마리우스에 의해 진압되어 목숨을 잃었다.2. 생애
저명한 평민 귀족( 노빌레스) 집안인 아풀레이우스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00년에 퀸투스 아풀레이우스 판사가 집정관을 역임한 것을 시작으로 로마 공화국의 고위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그의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대표적인 평민 귀족 집안으로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행사한 만큼 큰 어려움 없이 자랐을 것이다. 기원전 104년 조영관에 당선되어 오스티아 항구에서 로마의 공공 곡물 창고로 향하는 곡물의 수령과 운송을 통제했다. 그러나 빵 가격이 갈수록 오르자,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가 무능하다고 여겨 그의 직위를 빼앗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넘겼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원로원이 평민들에게 제공되는 빵을 자기들이 통제해 그들로부터 경의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키케로는 그가 이 일로 원로원과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고 민중 선동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기원전 103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그는 당시 집정관에 잇따라 당선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를 활용해 귀족들에게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적 권익을 얻고자 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강력한 권위와 권력을 활용하여 평민과 퇴역 군인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했다. 그는 먼저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채택하여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가 재판에 소환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마리우스의 정적이었으며 당시 감찰관을 맡고 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공격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규합하여 누미디쿠스의 집을 포위해 사임을 요구했고, 뒤이어 원로원 의사당을 포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누미디쿠스가 끝까지 버티면서 결국 실패했다.
그는 이와 더불어 마리우스의 참전 용사들에게 아프리카 토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제시했다. 베비우스라는 이름의 또다른 호민관이 반대하려 했지만, 사투르니누스의 추종자들이 돌을 던져 몰아냈다. 이리하여 법안은 통과되었고, 마리우스는 그를 더욱 신임했다. 이후 기원전 102년 집정관 선거가 임박하자,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는 일종의 '연기'를 선보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자기가 이번에도 집정관에 당선되는 것은 공화국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며 불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는 킴브리 전쟁이 한창이라 조국의 운명이 위태로운데 물러나는 것은 반역이라며 선거에 출마하라고 강력히 권고했고, 민중 역시 사투르니누스에 호응하여 마리우스에게 지지를 표했다. 이에 마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출마 의사를 밝혔고, 며칠 뒤 열린 집정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기원전 102년 사투르니누스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되자 새로 부임한 감찰관 누미디쿠스는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동맹자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축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감찰관인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가 반대하자 결국 포기했다. 이후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인 루키우스 에퀴티우스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을 사칭하자, 누미디쿠스는 로마 시민권을 박탈했다. 사투르니누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누이 셈프로니아에게 에퀴티우스를 조카로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셈프로니아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얼마 후 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절단이 로마에 찾아왔다. 그는 이들이 원로원에 뇌물을 줘서 폰토스 왕이 소아시아를 정복하는 걸 눈감아주게 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원로원은 이에 분개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했지만, 군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사투르니누스를 유죄로 선고했다간 신변이 위험해질 것을 두려워한 재판장이 무죄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기원전 101년 가을 집정관 선거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6번째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당시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을 섬멸하여 로마를 구한 영웅으로서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사투르니누스가 기원전 100년 호민관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우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민관 후보 중 하나였던 아울루스 노니우스는 사투르니누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밝혔다가 선거 전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아피아노스는 노니우스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선거 전에 사망했다는 다른 기록과 불일치하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렇게 또다시 콤비가 된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로마의 빈민들에게 분배하는 빵 가격 제한을 대폭 인하했다. 재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그렇게 했다간 국고가 텅 비어버린다며 반대했고, 원로원은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것은 반국가 조치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한 호민관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는 무시하고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카이피오와 지지자들이 투표함을 뒤집으며 저항했지만, 법안은 끝내 통과되었다. 이후 카이피오는 앞서 그가 만든 반역에 대한 아풀레이우스법(lex Appuleia de maestate)으로 그를 고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투르니누스는 뒤이어 시칠리아,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갈리아 등지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이탈리아의 토지들을 민중에 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시했다. 농지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투표 날에 몽둥이로 무장하여 투표 장소를 덮쳤지만, 마리우스의 퇴역 병사들과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사투르니누스를 방해하려 했던 호민관은 모욕을 당한 뒤 집에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리하여 농지법 역시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에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20달란트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은 새 법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누미디쿠스를 몰아내기 위해 관원들을 보냈다. 누미디쿠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누미디쿠스를 끌어내지 못하자, 사투르니누스는 민회에서 누미디쿠스 때문에 아무도 땅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선동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누미디쿠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야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이렇게 승리를 거듭했지만 귀족들의 증오를 샀고, 호민관의 급진 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많은 민중과 에퀴테스 역시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는 자신이 추진한 법안을 공고히하려면 기원전 99년 호민관 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마리우스의 지원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 선거에서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의 집정관 선임을 지원했다. 그는 글라우키아의 집정관 당선을 밀어주기로 하고, 지지자들을 총동원해 집정관 선거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또다른 후보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과정에서 멤미우스가 살해되고 말았다.
집정관 당선자가 피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 결의(Senatus Consultum Multatum)를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여 국가를 구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마리우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원로원의 명령대로 사투르니누스를 잡아다 처형한다면, 마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그의 지지자에 대한 배신이므로 정치생명은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투르니누스를 지지하고 원로원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이는 로마의 구체제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벌어진 시가전 끝에 사투르니누스 일당은 참패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루키우스 에퀴티우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마리우스에게 투항했다. 마리우스는 이들을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지지자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어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피살되었다. 그의 집은 파괴되었고, 추종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그렇게 사투르니누스를 죽음으로 내몬 마리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를 구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고 동맹시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은둔했다.
기원전 6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가 연회에서 사투르니누스의 수급을 보여주며 자랑했다며 고발했다. 라비리우스는 처음에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지만, 하늘에서 유성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에 놀란 시민들이 "하늘의 징조가 불길하니 재판을 중단해야 한다"라고 여겨 중단했고, 재판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는 기원전 58년 마케도니아 총독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아들로 두었다. 기원전 99년 사투르니누스에 대한 추모 의식을 거행했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몇년 간 추방된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데키아누스는 그의 양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원전 7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술라 사후 반란을 일으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내가 사투르니누스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