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라틴어: Marcus Valerius Messalla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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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03년 ~ 기원전 27/2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증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아버지) 호르텐시아(어머니)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사촌) 발레리아(여동생)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장남) 포티투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차남)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3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
후임 |
폼페이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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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으며, 여러 문학 작품을 집필하기도 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기원전 16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라는 이름을 썼으나 별다른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동맹시 전쟁 때 활약한 정치인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그의 아버지이거나 사촌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친척인 니게르(검은색)과 구별하기 위해 루푸스(빨간색)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어머니는 저명한 웅변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누이인 호르텐시아였다. 누이 발레리아는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삼은 아내였다.기원전 103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82/81년에 로마 다신교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80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아이밀리아누스라는 인물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그를 지원했지만, 아이밀리아누스는 그가 소심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변호를 키케로에게 맡겼고, 키케로는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그 후 기원전 61년경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54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기원전 54년 집정관 선거는 로마 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로 악명을 떨쳤다. 후보로 출마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가이우스 멤미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리고 그 모두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선거인단에게 뿌리고 현직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지원을 얻어내려 사력을 다했다. 이로 인해 후보 4명 모두 고발당했고, 비록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차기 집정관은 좀처럼 선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3년 여름이 되어서야 정치 세력들의 합의로 그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최종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기원전 52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려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서로 패거리를 결성했다. 옵티마테스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밀로가 한 편이 되었고, 카이사르 파인 풀케르와 힙사이우스가 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곧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고, 로마 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그는 이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관저를 떠나야 했다. 결국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의해 특별 권한을 맡아 혼란을 수습하였고, 기원전 52년 집정관을 일단 단독으로 맡았다가 9월부터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51년, 그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처형인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가 변호해준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유죄라고 확신하여 고르타루스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그는 얼마 안가 또다시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기원전 48년부터 카이사르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활동했다. 기원전 47년 제 5군단의 반란으로 메세나에서 포위되었다가 카이사르가 수습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가하였고, 탑수스 전투 이후 우티카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기원전 45년 히스파니아 원정에도 참여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정계를 은퇴하여 사제로서의 업무에 종사했으며, <조점술에 관하여>, <가족에 관하여> 등을 집필했으며, 12표법에 대한 논평을 출판했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27년 또는 2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장남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기원전 3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차남 포티투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기원전 29년 집정관을 맡았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자식을 두지 못해서, 기원전 38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아들을 입양하여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로 이름을 지어줬다. 이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의 손녀가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아내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