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라틴어: Gnaeus Pompeius Stra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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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피케눔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할아버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아버지) 섹스티우스 폼페이우스(남자형제) 폼페이아(여자형제) 루킬라(아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아들) 폼페이아(딸) |
참전 | 동맹시 전쟁, 로마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9년 |
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동기 |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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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막대한 재산과 막강한 사병을 기반삼아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사이에서 정치적, 군사적 술수를 구사하며 권력을 쟁취하려 한 야심가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로, 여자형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상 중 한명인 폼페이아이다.성씨 뒤에 붙은 스트라보(Strabo)는 그의 신체적 특징인 사시, 사팔뜨기를 뜻한다.
2. 생애
피케눔 출신의 노빌레스 가문인 폼페이우스 씨족 출신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141년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로마 정계에 진출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할아버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으며, 아버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18년 마케도니아 총독을 역임했다가 켈트족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했다. 형제로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여자 형제는 폼페이아이다. 폼페이아는 노빌레스 출신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를 낳았다. 스트라보의 조카인 아티우스 발부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둘째 누나 율리아와 결혼해, 세 딸과 아들을 얻었는데, 이중 한명이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모계 직계조인 아티아이다. 코그노멘인 '스트라보(Strabo)'는 ' 사시'를 의미한다.그는 피케눔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이 지역의 무수한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두었다. 기원전 104년 조영관에 선임되었고, 티투스 알부티우스가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사르데냐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알부티우스가 로마로 돌아온 뒤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자행한 혐의로 고발당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는 알부티우스의 악행에 대해 증언하려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부관이 상관을 고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금지했다. 그 후 법무관으로 선임된 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그를 기리는 비문이 발견되었지만, 그가 언제 총독에 부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늦어도 기원전 92년에 총독을 역임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그는 이 시기에 아버지를 죽였던 켈트족과 전쟁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91년 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이듬해 집정관을 맡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지휘하에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다. 그는 피케눔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우선 봉기가 시작된 아스콜리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티투스 라프레니우스가 이끄는 수비대가 철저하게 방어했기에 조기에 공략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베티우스 스카토가 이끄는 마르시족과 가이우스 비다킬리우스가 지휘하는 피케니족이 도시를 구하러 달려왔다. 그는 역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팔레르니아 산으로 퇴각했다가 추격해온 적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피르무스 시에 후퇴하여 티투스 라프레니우스가 이끄는 적군에 포위된 그는 현지인들을 징집해 병력을 보충하고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으며 방어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군단장 술피키우스가 이끄는 구원군이 남쪽에서 그를 구원하러 왔다. 일부 학자들은 미래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이 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동맹시 전쟁과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활약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라고 추정한다. 그는 술피키우스의 구원에 힘입어 라프레니우스를 전사시켰다. 살아남은 적군은 아스쿨룸으로 도주했고, 전직 집정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들을 포위했다. 스트라보는 여세를 몰아 피케니족을 물리쳤다.
기원전 89년 집정관에 선출된 스트라보는 북방 전선 전체를 관할했다. 그는 75,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베티우스 스카토와 대결했다. 베티우스 스카토는 아스쿨룸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스트라보에게 격파되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8,000명의 마르시족족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비다킬리우스가 이끄는 피케티군을 격파했지만 섬멸엔 실패했다. 이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아스쿨룸은 기원전 89년 11월에 함락되었다.
그는 승리를 거둔 뒤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칭송받았고, 자신을 따라 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한 히스파니아 기병들에게 로마 시민권, 목걸이 및 곡물 배급 특권을 부여했다. 당시에는 총독이 속주민에게 임의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극히 드물었지만, 그는 원로원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처리했다. 그 후 기원전 89년 12월 25일 로마에서 아스쿨룸과 피케티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동맹시 전쟁 기간에 열린 유일한 개선식이었다.
원로원은 스트라보가 확보한 전리품을 재정난에 시달리는 국고에 충당하려 했지만, 스트라보는 이를 거부하고 장교 및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줬다. 또한 포 강 북쪽의 갈리아 부족들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트란스파다나에 대한 폼페이우스의 법(Lex Pompeia de Transpadanis)>을 통과시켰고,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거나 일정 기간 내에 귀순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그는 이를 토대로 피케눔 전역의 주민들과 포강 이북의 갈리아인들을 클리엔테스로 삼을 수 있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88년 집정관에 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그가 집정관 연임을 도전했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기원전 88년 집정관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맡았고, 그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북방 전선에서 계속 활동해 베스티족을 복종시켰다. 이 무렵 이탈리아인들의 봉기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고발당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동맹시 전쟁 이후 선거권을 얻은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존의 35개의 투표 부족들에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 그들의 투표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을 8개의 새로운 부족에 배치하려 했던 원로원은 결사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치를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법안을 통과시킨 뒤,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놀라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던 술라는 지휘권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후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정적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누구든지 그들을 죽이거나 자신에게 끌고 올 수 있다고 공표했다. 그 후 북방에 군림하던 스트라보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현직 집정관이자 술라파 인사인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에게 넘기는 조치가 내려졌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기술했고, 아피아노스는 민회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호민관 가이우스 헤레니우스가 술라가 귀국할 때까지 법안 통과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술라는 스트라보의 지휘권을 빼앗는 결정의 배후에 있었다. 그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에 잠재적 경쟁자인 스트라보를 배제하고 루푸스에게 강력한 군대를 맡겨서 로마의 질서를 잡아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엇나갔다. 스트라보는 군영에 찾아온 루푸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겠다고 밝혔지만, 루푸스는 다음날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스트라보는 병사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했기에 명령 없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도 누구도 처벌하지 않고 지휘권을 계속 맡았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병사들에게 루푸스를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주장했고, 현대 학계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당시 브룬디시움에서 출항 준비를 하고 있던 술라는 루푸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경호를 강화할 뿐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고 이내 동방으로 떠났다. 이는 동방에 가서 막대한 전리품을 약탈하고 싶어하는 병사들이 스트라보를 토벌하기 위해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술라가 떠나면서 원로원은 스트라보를 처벌할 여력이 없었고, 스트라보는 북방에서 계속 군림할 수 있었다.
기원전 87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이탈리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기존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대파를 이끌었다. 투표 당일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킨나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으로 이끌어 킨나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킨나는 로마 시에서 탈출했고, 옥타비우스는 민회를 움직여 킨나를 집정관 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형을 내린 뒤 신관단의 일원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로 대체했다.
킨나는 로마를 떠난 뒤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해 순식간에 10개 군단 이상을 모집했다. 여기에 술라에 반감을 품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귀족들을 대거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옥타비우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스트라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킨나도 그에게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권했다. 스트라보는 양자에게 자신이 가담하는 대가로 2번째 집정관 직임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옥타비우스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킨나는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이에 스트라보는 킨나와 합류하려 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킨나 쪽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킨나파가 승리하면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될 거라 여기고 옥타비우스 쪽으로 기울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킨나는 옥타비우스에 가담하려는 그를 막기 위해 스트라보의 장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건넸고, 장교들은 지휘관의 천막에 불을 지르고 스트라보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죽이려 했다. 스트라보는 병사들에게 과도한 형벌을 가하곤 했기에 그들의 증오를 샀기 때문에 음모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스트라보는 겁에 질러 천막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아들 폼페이우스는 군인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서 아버지를 배신하지 말아달라며 눈물로 간청하고 천막 문 앞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여기에 병사들에게 아버지를 해칠 거면 먼저 자신을 짓밟아달라고 했다. 이에 병사들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폼페이우스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스트라보와 화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스트라보의 병사들이 사령관을 정말로 미워했는지 의구심을 제기하며, 플루타르코스가 젊은 폼페이우스를 과도하게 띄워줬다고 본다. 아무튼 군대는 스트라보를 지지했고, 800명만이 킨나와 마리우스의 편으로 넘어갔다.
그 후 스트라보는 군대를 이끌고 킨나파와 교전했다. 먼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적군과 맞붙었는데, 전투가 해질녘까지 이어졌지만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고 양쪽에서 6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스트라보는 철군하는 세르토리우스를 쫓지 않고 킨나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이는 옥타비우스와 원로원이 언제까지나 자신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야니쿨룸 언덕에서 마리우스를 공격했을 때, 스트라보는 6개의 코호트를 보냈지만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면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초기에 승기를 잡는 듯했던 옥타비우스는 추가 지원을 받지 못하다가 마리우스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스트라보는 두 번의 전투 이후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로마가 굶주림에 시달리자 킨나와 비밀리에 협상을 재개했다. 그는 마리우스 대신 자신이 집정관을 맡거나 피케눔에서 지휘권을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킨나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전염병이 로마 시 전역에 퍼졌고, 그는 11,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몇몇 사료에서는 스트라보가 낙뢰에 맞아 사망했다고 말하지만, 학계에서는 스트라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신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하고자 꾸며낸 이야기라고 본다. 평민들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아 재앙을 초래했다고 여겼기에 스트라보의 장례식 때 적의를 공공연히 표출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시신을 싣고 가던 상여로 달려가서 시신을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고 거리로 끌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역시 꾸며낸 이야기라고 본다. 그 후 로마 수비대는 킨나와 마리우스에게 항복했고, 킨나와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한 뒤 대숙청을 단행했다.
스트라보는 풍자 시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의 누이인 루킬라와 결혼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폼페이아를 낳았다. 폼페이아는 훗날 폼페이우스와 함께 세르토리우스 전쟁에 참여한 가이우스 멤미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기원전 83년 술라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뒤 술라의 내전을 단행했을 때 아버지의 클리엔테스로 구성된 3개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게 가담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그는 로마 공화국 후기 최고의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1]
로디 시의 시청 아치에 설치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대리석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