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01:53:31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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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라틴어: Publius Ventidius Bassus
파일: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jpg
생몰년도 기원전 91년/90년 ~ 기원전 38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아스쿨룸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평민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미상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무티나 내전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43년
전임 옥타비아누스
퀸투스 페디우스
동기 가이우스 카리나스
후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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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장군. 동맹시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어머니와 함께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받았고 이후에는 비천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 들어가 그의 총애를 받아 출세를 거듭하였고, 카이사르 사후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탁월한 활약을 하여 동방 속주를 수호했다.

2. 생애

그의 가계와 유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그의 이름 조차도 논쟁의 대상이다. 동시대 기록에는 '바수스(Bassus)'라는 명칭이 없었고, 후대 로마 역사가들인 에우트로피우스, 아울루스 겔리우스, 페스투스의 기록에서만 등장했다. 그래서 현대의 거의 모든 역사가들은 바수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기원전 91/90년에 아스쿨룸에서 출생했으며, 피케네 가문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9년 동맹시 전쟁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1]가 아스쿨룸을 공략하고 약탈했을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후에 스트라보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쇠사슬에 묶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린 채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집정관들에게 노새와 마차를 제공하는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일반병으로 복무하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을 단행할 때 가담하였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도 카이사르를 충실히 섬겼다. 그는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았고, 카이사르가 기원전 45년 독재관으로서 원로원을 재조직할 때 호민관으로 발탁됨과 동시에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암살당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44년 늦여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규합했다. 이때 그는 캄파니아와 루카니아 일대를 돌려 그곳의 식민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카이사르 휘하 참전 용사들을 불러들여 안토니우스에게 지원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함께 북상하진 않고 고향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3년 4월 21일,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에게 패배하고 갈리아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고향에서 신병을 모집한 뒤, 아펜니노 산맥을 횡단하여 400마일을 행군한 끝에 바다(Vada)에서 안토니우스와 합류했다. 당시 무티나 패전으로 인해 군대가 와해되었던 안토니우스는 그의 합류에 힘입어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옥타비아누스와 만나 이틀간 논의 끝에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을 사임하기로 했고, 벤티디우스는 보결 집정관으로서 가이우스 카리나스와 함께 선출되었다. 이후 로마 시내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한동안 나돌았다고 한다.
Nam mulos qui fricabat, consul factus est.
노새를 문지르던 자가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42년 10월 필리피 전투 후, 옥타비아누스가 병사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주민들로부터 농경지를 강제로 빼앗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민심이 악화되자,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기원전 41년 9월 로마로 진군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곧바로 반격을 가하자, 두 사람은 페루시아 요새로 후퇴한 뒤 벤티디우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루시아 내전) 아그리파는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에게 페루시아 요새를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폴리오와 벤티디우스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폴리오는 라벤나로 이동했고, 벤티디우스는 리미니로 후퇴했다. 이후 풀리오와 벤티디우스는 플란쿠스 휘하 병력과 합세한 뒤, 페루시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페루시아에서 20마일도 채 되지 않은 풀기니움에서 아그리파에게 저지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벤티디우스와 폴리오는 즉시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플란쿠스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데다 아그리파의 압도적인 군세에 밀리자 페루시아를 운명에 맡기고 안토니우스가 올 때까지 버티고자 아드리아 해로 후퇴해 주군이 상륙할 장소를 마련하고 식량 창고를 준비했다. 페루시아가 끝내 함락당하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가 그리스로 피신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해군을 이끌고 기원전 40년 하반기에 브룬디시움에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그와 대치했지만, 양군은 카이사르의 용사들끼리 싸우기를 거부했다. 이후 양측간의 논의 끝에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가 결혼하고,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브룬디시움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탈리아 내전은 종식되었다.

기원전 39년, 벤티디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지시에 따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파르티아군을 물리치러 동방으로 향했다. 그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자격으로서 부하 폼피디우스 실로와 함께 2개 군단을 이끌고 빠르게 진격해, 킬리키아에서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날뛰고 있는 퀸투스 라비에누스(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을 습격했다. 라비에누스는 시리아로 후퇴하여 파르티아 지원군과 합세했다. 벤티디우스는 타우루스 산맥의 칼리키아-시리아 경계 지역에서 그를 따라잡았다.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가볍게 여겨 고지대에 세워진 적진으로 섣불리 다가가자, 그는 병사들에게 적이 바로 앞에 이를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다. 적이 진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즉각 출격하여 그들을 덮쳤고, 투석병들은 적군을 향해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이로 인해 혼란에 빠진 파르티아군은 패주했고, 라비에누스는 탈출하려다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로마 병사 대부분은 벤티디우스에게 투항했다.

그는 킬리키아를 되찾은 뒤 그 지역에 잠시 머물며 흐트러진 질서를 재정비했다. 이후 부관 실로에게 분견대를 맡겨 아미누스 고개에 버티고 있던 바르자파르네스의 파르티아군을 유인하게 했다. 적이 실로의 얼마 안 되는 로마 기병대를 깔보고 추격해오자,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벤티디우스의 보병과 투석병이 기습 공격했고, 파르티아군은 이번에도 참패하여 본국으로 달아났다. 당시 파르티아군 사령관 파코로스 1세는 거듭된 패전에 놀라 본국으로 후퇴했다. 벤티디우스는 시리아로 진군하여 통제력을 회복한 뒤,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파르티아군에 의해 유대 왕으로 추대되었던 안티고노스 2세 마티티아스는 그에게 거액의 뇌물을 찔러줬고, 그는 안티고노스의 왕위를 용인해줬다고 한다. 이후 카파도키아로 돌아가 겨울 숙영에 들어가면서 원로원에 승리 보고를 하였지만, 원로원은 그가 안토니우스의 부관에 불과하므로 승리의 영예를 수여하지 않고, 안토니우스에게 임페라토르 칭호를 내렸다.

기원전 38년 이른 봄, 파코로스 1세는 로마군이 아직 카파도키아에서 겨울 숙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시리아를 재침공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당시 시리아 속주 주민들은 로마 관료들의 수탈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민심이 폭발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했다. 또한 키레스티카의 파르네우스 왕자가 로마와 동맹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파르티아를 추종한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며, 왕자가 로마군의 모든 기밀을 파르티아군에게 알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바로 이 점을 노려 파르티아군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로 했다. 그는 파르네우스 왕자를 매우 존경하며 개인사를 솔직하게 털어놔서 경계심을 완전히 풀도록 유도한 뒤,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파르티아군이 그동안 자주 건넌 제우마 마을의 건널목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다만 파르티아군이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의 건널목을 통해 시리아로 횡단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린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파르네우스 왕자는 이 이야기를 파코로스 1세에게 고스란히 전했고, 파코로스 1세는 곧바로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의 건널목을 통과하여 시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제우마 마을의 건널목은 평야 지대라서 기병이 잘 활약할 수 있었지만,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 건널목으로 가려면 수심이 깊은 강물을 통과해야 했고, 주변 지형이 구릉지대라서 로마군이 파르티아 기마 궁수로부터 보다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출진한 파코로스 1세는 강의 수심이 깊어서 그냥 건너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자 40일 동안 재료를 모아서 다리를 건설했다.

그 사이 흩어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성공한 벤티디우스는 적이 강을 건너와 키레스티카로 진군했을 때 간다루스 산지에 세워진 진지에 그대로 남아서 두려워하는 척했다. 이에 파르티아군은 그들이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그 진지로 곧장 쳐들어갔다. 벤티디우스는 적군이 500보 이내로 접근하자마자 급히 적에게 달려들어서 파르티아 궁수대가 미처 화살을 쏠 틈을 주지 않았다. 이어진 격전에서, 파르티아 기병대는 적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언덕 아래로 축출되었고, 뒤따라온 기병대와 서로 엉키면서 진형이 흐트러졌다. 파코로스는 카타프락토이를 이끌고 로마 군단병과 혈투를 벌이다가 끝내 전사했고, 지휘관이 죽은 걸 알게 된 파르티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로마군은 파코로스 1세의 수급을 창에 꽂은 뒤 시리아 전역에 돌려서 로마에 다시 복종하도록 했다.

그는 뒤이어 헤로데 대왕에게 분견대를 맡겨 안티고노스 2세 마티티아스를 예루살렘에서 재차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로마의 동맹국이었다가 파르티아와 손잡은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를 응징하려 출진했다. 안티오코스 1세가 1,000달란트를 줄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하자, 그는 이미 동방으로 오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안토니우스는 벤티디우스에게 그와 타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후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그를 로마로 보낸 뒤 콤마게네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하자 300달란트에 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한편,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7년 헤로데 대왕이 이끄는 친 로마 유대군에게 붙들려 처형되었다.

기원전 38년 말 이탈리아에 돌아온 벤티디우스는 대중의 갈채를 받았고, 원로원은 시민들의 압박에 따라 안토니우스와 더불어 그에게도 임페라토르 칭호를 하사하고 개선식을 개최하는 걸 허락했다. 개선식은 기원전 38년 11월 27일에 개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훗날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치를 때 그를 소환하지 않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내전을 벌일 때 둘 중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기원전 38년 이후 몇년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그가 죽은 뒤 로마에서 공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융숭한 예우를 받으며 매장되었다고 한다.
[1] 폼페이우스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