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라틴어: Marcus Valerius Messalla Corv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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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아버지) 팔라(어머니) 발레리아 니그라(누이) 칼푸르니아(첫번째 아내) 아우렐리아 코타(두번째 아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아들) 발레리아 메살리나(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1년 |
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
동기 | 옥타비아누스 |
후임 |
마르쿠스 티티우스 옥타비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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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61년 집정관, 기워넌 55년 감찰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와 기원전 72년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의 아내였다가 이혼한 뒤 니게르와 결혼한 팔라의 아들이다. 누이로 기원전 43년 법무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부인인 발레리아 니그라가 있었다. 젊은 시기에 아테네에 유학갔고, 기원전 44년 여름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안치오에서 '해방자'를 자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주동자들의 회의에 참여했다. 기원전 43년 마케도니아로 가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복무했다.기원전 43년 11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를 숙청 명단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를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삼두는 발레리우스 씨족과 척 지면 좋지 않을 것이고 그의 야망과 영향력도 두려웠기에 "그의 친척이 우리에게 증명했듯이 카이사르가 살해되었을 때 로마에 없었기에 사면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응하기를 거부하고 브루투스를 위해 헌신했다.
필리피 전투 당시 브루투스의 우익 부대를 지휘해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적 진영에 침입해 큰 타격을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두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가 패망하자 일부 병력을 수습해 타소스로 도주했다. 전투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장군들은 그가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다음으로 영향력이 크다며 임페리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군대와 보급 물자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넘기고 항복했다.
그 후 수년간 안토니우스의 부관 노릇을 하던 그는 기원전 40년 안티오키아 교외 아프네에서 열린 유대인 대표 회의에서 헤로데 대왕을 유대의 왕으로 받들게 한 뒤 원로원 회의에서 헤로데 대왕의 즉위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안토니우스에게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그는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돌아섰다.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내전 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휘하 레가투스로 복무했으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군 사령관 메노도로스가 두번째로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하기로 했을 때 이를 경호했다. 또한 메시나 해협에 여러 군단을 집결시켜 시칠리아 상륙을 준비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타우로메니아 해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완패한 뒤 해안가로 가까스로 피신한 뒤 동굴에 은신했을 때,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행방을 수색한 끝에 그를 찾아내어 군영으로 이송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고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34년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때 일리리아 부족 중 하나인 살라시 족을 복종시켰다. 기원전 31년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안토니우스를 대신해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었고, 악티움 해전 때 옥타비아누스 함대 일부를 지휘했다. 기원전 30~29년 시리아 총독을 맡아 전임 총독 퀸투스 디디우스를 시켜 안토니우스 편에서 싸웠던 검투사를 군단에 입대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주겠다고 구슬려서 다프네에 집결시킨 뒤 전원 학살했다.
기원전 28~27년 아퀴타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지역 부족의 봉기를 진압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27년 9월 28일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6년 새로 설립된 로마 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치안 장관)에 선임되었지만 며칠 후 자신은 이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사임했다. 히에로니무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이 관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6일만에 사임했다고 한다. 아마도 공화정을 심정적으로 옹호하던 그 입장에서 아우구스투스 정권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을 뒷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것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정치에 관심을 끊은 그는 자신이 겪은 내전과 관련된 회고록을 집필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는 필리피 전투를 집필할 때 그의 글을 인용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카시우스가 자신의 친구이자 지도자였다고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라틴어 문법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고, 저명한 시인 알비우스 티불리우스를 후원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생애 말기에 중병에 걸려 기억을 상실했고 자신의 이름 마저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서기 8년경에 아사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소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 사이의 딸인 칼푸르니아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와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를 낳았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기원전 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는 서기 11년 집정관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와 결혼했다. 포르키아 사후 기원전 7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손녀로 추정되는 아우렐리아 코타와 재혼해 서기 20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