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라틴어: Aulus Postumius Alb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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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9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폼페이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미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9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동기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티투스 디디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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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기원전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의 동생으로 유구르타 전쟁에서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떠난 형을 대신해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으로서 군대를 이끌었다가 유구르타에게 참패한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사전 편찬자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1813 ~ 1893)는 그가 유구르타에게 패한 아울루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저명한 고대 로마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사촌이라고 주장했다. 레가투스를 맡은 아울루스와 그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도 제기되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학자들은 행정관의 법적 연령 제한을 둔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에 의거해 그가 기원전 102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00년 말,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 그리고 가이우스 멤미우스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로부터 호민관을 연임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자신의 측근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당선시키는 걸 도와달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제안에 따라 글라우키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추종자들이 반발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겨우 빠져나왔지만, 멤미우스는 폭도들의 집단 구타로 살해되었다.
집정관 당선자가 피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 결의(Senatus Consultum Multatum)을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여 국가를 구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마리우스는 고심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벌어진 시가전 끝에 사투르니누스 일당은 참패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루키우스 에퀴티우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마리우스에게 투항했다. 마리우스는 이들을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지지자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어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피살되었다. 그의 집은 파괴되었고, 추종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마무리된 뒤, 그는 살해당한 멤미우스를 대신해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그가 취임할 즈음에 신성한 물건이 보관된 누마 폼필리우스 궁전의 사카리움에서 마르스 신의 창이 움직였다. 포스투미우스와 안토니우스는 이를 불길한 징조로 간주하고 신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추가 희생제를 드리기로 결의했다. 이후 원로원에서는 사투르니누스에게 추방당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복귀시키는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지만, 고대 기록에서는 그가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동맹시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89년, 그는 레가투스로서 폼페이 시를 포위 공격했다가 도중에 휘하 병사들에게 돌과 막대기로 얻어맞고 살해되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병사들이 반역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참을 수 없는 오만함을 보여 병사들의 분노를 샀다고 기술했다. 알비누스의 군대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술라는 장차 집정관에 당선되려면 병사들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레가투스를 살해한 병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이 그 죄를 공적으로 덮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싸우도록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