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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주류 에스니시티 집단인 한족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에 대한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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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民族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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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내셔널리즘 또는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2]/Chinese nationalism)[3]는 혈통적 정체성[4]에 더 초점을 맞춘 한국, 일본에서의 민족주의나 한민족, 야마토 민족 개념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민적 정체성에 더 초점을 둔다. 때문에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중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중시하면서도 은근슬적 한족 내셔널리즘으로 이끌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국족주의(中國國族主義)[5]라고도 한다.중국 내셔널리즘이 다른 동북아시아 국가들(한국, 북한, 일본, 몽골 등)[6]보다 에스닉 내셔널리즘 성격이 약한 이유는 중국이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혈통이나 주류민족( 한족)을 강조할 경우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한몫한다.[7][8]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중국 내셔널리즘은 '시민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다민족적 내셔널리즘'(multi-ethnic nationalism)이나 영토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2. 역사
2.1. 전근대
전근대 종족의식도 내셔널리즘에 포함시키는 전제라면, 이 시기 중국 내셔널리즘은 주로 한족 내셔널리즘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중화사상이 여기에 속한다. 조선의 식자층 등은 소중화라고 해서 중국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악비는 당대 한족들에게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여겨졌는데, 오늘날에도 악비는 중국 내셔널리즘의 상징적 인물이다.명나라의 홍무제는 당시 중국인의 주류인 한족 입장에서 오랑캐 족속들로 여겨졌던 몽골족이 중추가 된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우수성과 자부심을 내세웠다. 홍무제는 한족 중심의 민족국가인 명나라를 건국했다.
2.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중국에서 초기 (근대적)내셔널리즘은 청나라 말기 후술할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강조하였다. 신해혁명까지만 해도 이들은 멸만흥한을 외치며 청나라에서 한족의 국가를 독립시키려 하였으나 신해혁명이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지자 말을 바꾸어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며 신해혁명과 동시에 독립한 티베트, 몽골을 중국의 당연한 영토라고 했다.[9] 중국국민당은 한족 뿐 아니라 모든 중국을 포용하기 위해 중국 국민주의(중국 내셔널리즘) 내지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웠다.[10][11]2.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화 이후 중국 대륙에서 내셔널리즘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이다. 국공내전을 거친 끝에 중국 대륙은 1949년 마오쩌둥에 의해 공산화되었고, 사회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념은 금지된다. 중화민족주의도 반동적이라고 인식되어 장려되지는 않았지만 적극 탄압하지 않았다.[12] 이때까지만 해도 중화사상은 민간에 퍼져있던 일종의 동양 특유의 사회문화적인 자문화 중심주의에 불과했다.[13]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집권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중화사상을 국시마냥 밀어주지 않았다. 중국의 국시는 사회주의였지 민족주의가 아니었으니... 그런데 중국의 이념적인 상황을 뒤집는 사태가 터졌으니, 다름아닌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이었다. 중국인들은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앞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중국 정부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가들을 전차로 밀어버리고 체포해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 이후 중공정부는 '국민들이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네? 이젠 사회주의론 국민들 선동 못 시킬듯. 이렇게 된 이상 민족주의로 간다'를 시전하며 국가주의 및 중화민족주의를 중국 정부 차원에서 밀어주기 시작한다. 특히 1990년대에 집권한 장쩌민은 민족주의에 기반해 외부의 적도 설정한다. 바로 일본. 장쩌민이 지지율을 위해 내세운 반일감정은 중국을 최고의 반일국가로 만드는데에 일조했고[14], 이 반일 기류는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 대만, 일본, 한국 등에 대한 반감이 강하긴 했다. 다만 이는 사회주의 및 반자본주의에 기반한 감정이었지 민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15]
이런 중화민족주의 및 자국주의는 시진핑(특히 시진핑 사상) 및 시진핑 정권의 중국공산당 주도 하에 더더욱 강조되는 중이다. 특히 시진핑 이전 시대에는 그저 권장 및 장려의 수준이었다면, 요즘은 이에 반대할시 탄압되는, 즉 강요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현대 중화민족주의의 특이한 점은 보통 민족주의라고 하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민족의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들을 강조하며 '우리민족 짱임'을 시전하는 형태인 반면, 역설적이게도 시진핑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오히려 자신들의 조상인 청나라가 근대에 당한 치욕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나라 때 심한 굴욕을 당했고 서구 오랑캐들은 우리 중화의 정체성을 흐뜨려놓았다.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다시 중화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자" 식의 논리를 펼친다는 것.[16][17] 이런 식의 선동은 최소한 1980년대에 강조되던 사회주의에 비하면 효과는 굉장했다. 특히 중공 국민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중이고, 이젠 심지어 자국을 오빠/형 등으로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 자체를 연예인처럼 보는 기류까지 새로 생겨나는 중이다.
3. 한족 민족주의
자세한 내용은 한족 민족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3.1. 대한족주의
자세한 내용은 대한족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4. 지방민족주의
자세한 내용은 지방민족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5. 중국 내셔널리즘 기반 외교정책
5.1. 하나의 중국
자세한 내용은 하나의 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중화민족주의자들은 티베트 독립운동, 위구르 독립운동, 홍콩 독립운동, 대만 독립운동에 강하게 반대하며 하나의 강력하고 단결된 중국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5.2. 전랑외교
자세한 내용은 전랑외교 문서 참고하십시오.시진핑 집권 이후 급부상한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 외교 정책이다.
6. N세대
자세한 내용은 N세대(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7.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자세한 내용은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문서 참고하십시오.현대 들어서 '중국'은 보통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내셔널리즘을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8. 인물
- 덩샤오핑[18]
- 량치차오
- 마오쩌둥 - 논란의 여지 있음. 현재 중국마냥 대놓고 장려한 것은 아니기에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자이지 민족주의자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영어권에서 중국 내셔널리스트로 분류하기도 한다.
- 마잉주
- 쑨원
- 시진핑
- 악비
- 왕징웨이
- 위안스카이
- 자오리젠(趙立堅)[19]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공보부 부부장인데 거침없는 언행과 트위터 사용으로 전랑외교의 상징격인 인물이다.
- 장쉐량
- 장제스 ( 장제스의 학설)
- 펑린
- 홍무제
- 후시진(胡錫進)[20] - 중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국수주의 성향의 언론인으로 환구시보 전 편집인으로 유명했다. 현재 강연 등을 나가기도 하고 위챗, X(SNS) 등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9. 같이 보기
- 국수주의/행태/중국
- 남중국해/영토 분쟁
- 범람연맹(대만), 친설립파(홍콩)
- 분청
- 신권위주의
- 중국공산당 - 개혁개방 이후, 그 이전에는 논란의 여지 있음.
- 중국국민당 - Chinese Nationalist Party
- 중국몽
- 중국 제국주의
- 중뽕 (Sinophilia)
- 중화민족
- 중화사상
10. 둘러보기
중국의 이념 中国意识形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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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셔널리즘 |
[1]
중화민국(
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도 현재는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Taiwan,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China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中国民族主义
[3]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中华民族主义
[4]
실제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는
race의 의미도 포함된다.
영한사전(국립국어원) "민족"
영일사전(Jisho) "民族"
[5]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中国国族主义
[6]
대만도 한국, 북한, 일본, 몽골과 비교했을 때 에스닉 내셔널리즘보다 시민 내셔널리즘이 강세이긴 하다. 현재 대만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족은
한족(
외성인과
본성인 모두 해당) 계통인데, 이들은
중국 대륙에서 기원하여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 원래부터 대만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니므로 '우리(한족 계열 대만인)가 대만의 주인'이라는 에스닉 내셔널리즘을 주장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물론 중국이 대만을 개별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7]
예를 들면 (모든 조선족의 입장은 아닐 수도 있으나)
캡틴따거가
조선족 친구에게 물었을 때, 조선족이라서 중국 내에서 차별받은 경험 자체가 없었고 한족들이 소수민족을 바라볼 때 다른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직접적 차별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 한국에서 비한민족 계열 화교나 일본에서 한국계가 겪는 고충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상대적으로 더 시민적이긴 하다.
[8]
반대로 말하면 한국과 달리 소위 교포/동포에 대한 혈연적 의식도 약한 편이다. 즉 미국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보다 자국 내 소수민족을 더
중화민족의 일부로 바라보는 편이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국외의 화교는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9]
이는 후일 몽골의 독립을 보장한
소련이 중국 군벌들과 협상을 할때 난항을 겪게 만드는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봉건적이라고 매도 당하던 군벌들마저도 중국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단지 이권이 된다면 열강들에게 손을 빌릴 뿐.
[10]
이 방식도 골때리는 것이
소수민족의 기원을
무조건 한족 내지는 한족의 방계민족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만약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안정된 정부였다면 현재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국민당이 주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11]
그렇다고 날강도 짓을 한 건 아닌 게, 아무리 그래도 헌법상 티베트, 몽골의 자치권, 소수민족 지위와 자치권은 보장되어 있었다. 현재도 마찬가지.(중화민국 헌법 119~120조, 168~169조.)
[12]
사실 마오쩌둥도 민족을 정치적 홍보에 일부 사용했지만,그냥 민족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 특유의 분위기에 맞춰서 별첨되는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반대편에 서있던 동시대의 동양의 지도자인
장제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또한 비슷하게 민족을 정치분위기에 끌어들였다.
[13]
중화민국 시대에는 군벌로 분열되어 있었고,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 중국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을 때에도 중화 우월주의라기보다는 침략자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적 스탠스에 더 가깝다.
[14]
장쩌민 이전 중국은 그
난징 대학살조차 딱히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일본에는
반미
반자본주의에 기반한 반감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관심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제1주적은 일본이 아닌
대만이었다.
북한의 주적이 다름아닌 한국인 것과 똑같은 맥락.
[15]
예를 들어 옛 중국의 항일매체에는 공산군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으며, 국민혁명군은
일본군과 더불어 빌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대표적으로 뮤지컬 동방홍이 있다) 반면 요즘 중국의 항일매체에는 국민혁명군이 주역이 되는 경우도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이전까지 중국인들의 국민혁명군에 대한 인식은 '일본보다도 중공을 적대시한 반동주의자들의 군대'였던 반면, 요즘 중국인들의 국민혁명군에 대한 인식은 '이념은 다를지언정 함께 일본에 저항한 엄연히 우리 민족의 군대'로 바뀌어가는 중이다.대만군 의문의 1패 게다가 모 항일 드라마에는
미군이 일제에게 고문받는, 즉 그때는 미군도 일본에게 고통받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한 장면도 나오는데, 일방적으로
친러 및 반미 성향을 띄었던 옛 중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16]
사실 이런 식의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는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당장
러시아 민족주의 역시 '우리는 서방의 침략의 피해자며, 그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조국을 지키는 것이 신성한 의무이다'라는 것을 핵심 논리로 내세우며, 한국 역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불리는 경향이 있으며, 일본
넷우익 역시
피해자 행세를 하기를 좋아한다.(물론
일본 제국은 아예 피해자조차 아니지만). 도한 서구의
대안 우파 역시
무슬림이나 외부 집단에 의해
화이트 제노사이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우월감'에 의존하는
국뽕 프로파간다에서 '피해의식'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 변하고 있는 신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뽕과
국까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어기제 및 반동 때문인지, 타자를 비난할 때는 타자가 거만하다고 비판하기보다는 '열폭한다'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17]
미중 무역분쟁을 비롯한 갈등으로 인해
신냉전 구도가 잡히며, 드라마틱하게 당시 개입했던 국가들 중 러시아 정도를 제외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과 다시 각을 세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다만 청나라 시절
동아시아를 아우르던 중화사상, 혹은 아시아주의와 같이 타국이 동조할만한 허울뿐인 명분도 없는지라, 오직 중국만을 위한 선동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한국과 중국을 어우러지게 하자는 맥락에서
중화사상을 언급하였다가 한국이 통째로 뒤집어진 전례가 있어, 실리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막자는 정도가 친중 의견의 주요 명분이다.
[18]
Gao, Mobo (2008). The Battle for China's Past: Mao and the Cultural Revolution. London, England: Pluto Press
[19]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赵立坚
[20]
정체자 표기 기준. 간체자로는 胡锡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