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0:50:04

인민행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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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국회 의석 수, 우측은 표결권 없는 의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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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PAP
창당일 1954년 11월 21일
중앙당사
싱가포르 뉴어퍼 창이로드 (#01-1402)
스펙트럼 중도우파[1]
역사적(1954~61) :[A]
중도좌파
이념 사회보수주의
아시아적 가치
다문화주의
세속주의
시민국민주의[3]
경제적 자유주의
역사적(1954~61) :[A]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의장 헹스위킷
서기장 로렌스 웡
싱가포르 국회
79석 / 104석 (76%)
당색
파란색 (#0052A1)
빨간색 (#EA312D)
흰색 (#FFFFFF)
청년 조직 인민행동당 청년
당원 수 632,060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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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념3. 조직4. 역사5. 역대 의장

[clearfix]

1. 개요

파일:People's Action Party Headquarters.jpg
인민행동당 당사

싱가포르 정당. 1954년 11월 창당되어 1959년 이래 지금까지 싱가포르의 여당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정당이다.
1955년 4월 총선에서 4명의 후보자를 출마시켜 3명을 당선시켰으며, 1959년 5월 총선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리콴유가 초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선거를 통한 형식적 민주주의는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야당 언론에 대한 탄압과 권위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던지라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 다만 2020년 싱가포르 총선거를 기점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옅어져서, 현재는 사회보수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당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2. 이념

창당 초창기인 1961년까지만 해도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인을 위한 빅텐트 정당으로 당 내에 다양한 이념 분파가 있었고, 심지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좌파 성향이 더 돋보이기도 했던 정당이었으나, 계파 갈등 끝에 사회주의자들이 탈당하고 싱가포르의 자국 언론 탄압 등이 논란이 되기도 했고, 결국 1976년에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떠난 이후의 인민행동당은 전반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를 지향해왔다.

보수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의 역사성이나 다양한 인종 구성원[6] 때문에 다문화, 다인종 공존을 지향하고 있으며, 시민 내셔널리즘을 옹호한다. 또한 싱가포르의 고질적인 저출산으로 인한 노동인구 절벽 문제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친이민 성향도 드러내고 있다.[7] 서구 선진국들과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오히려 중도좌파 성향의 야당들이 더 반이민적이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인다.

3.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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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간킴용 부위원장 마사고스 줄키플리
서기장[A] 리셴룽
수석서기차장
헹 스위 킷
차석서기차장
챈천싱
회계 케이지비스워너썬 섄무검 부회계 옹 예이 컹
조직비서 그레이스 푸 · 데스몬드 리
위원 알렉스 얌 · 에드윈 통 · 인드라니 투라이 라자 · 조세핀 테오 · 로런스 웡
응치멍 · 탠 추안 진 · 빅터 라이 · 비비언 발럭리쉬넌
본부집행위원회
위원장 챈천싱 부위원장 헹 스위 킷
고문 터치헌 · 타르만 샨무가랏남
정부의회위원회
통신정보위원장
틴 페이 링
문화, 공동체 및 청소년위원장
시토 이 핀
국방외교통상위원장
비크람 나이어
교육위원장
패트릭 테이
금융무역산업위원장
량엥화
보건위원장
탄우멩
행정법률위원장
무랄리 필라이
노동위원장
데스몬드 추
국가개발위원장
셰릴 찬
사회가족발전위원장
시어 키언 펭
지속가능성 및 환경위원장
루이 응
교통위원장
삭트얀디 빈 수팟
[A] 보통의 경우 싱가포르 총리가 겸직 }}}}}}}}}


인민행동당은 중앙집행위원회(Central Executive Committee)를 두고 있으며 이 기구에서 당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 위원회의 장은 서기장(Secretary General)이라 하며, 사실상 서기장 당수로서 기능한다.[8] 창당 이래 1992년 11월 1일까지 38년간 리콴유가 서기장직에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받은 총리들 모두 리콴유의 아들이자 前 총리인 리셴룽을 포함해서 서기장직을 맡았다. 현재 서기장은 現 총리이자 리셴룽의 후계자인 로렌스 웡이 맡고있다.

4. 역사

4.1. 창당

1954년, 싱가포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리콴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같은 싱가포르 출신의 화교 학우인 토친체(杜進才, Toh Chin Chye), 고켕스위(吳慶瑞, Goh Keng Swee)와 함께 결성한 정당이다. 당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슬슬 세계적 추세가 탈식민주의 흐름이 보이고 영국도 싱가포르를 놓아줄 기미를 보이자 싱가포르 독립을 주장하는 싱가포르인들의 여망을 담아 인민행동당을 창설한 것.

다만 지금의 권위주의 우파 성향과 달리 이때만 해도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가나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당원 가입을 받아주고 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는 등 이념의 폭이 넓은 빅텐트 정당에 가까웠다.[9] 이를 바탕으로 토착 싱가포르인이 처음 선거권을 얻었던 1955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선거로 선출되는 25석 중 3석을(무소속 당선 뒤 입당한 아마드 이브라힘을 포함하면 4석) 차지했다.

1959년부터는 완전한 자유 총선이 치러졌고, 이때도 인민행동당은 전체 51석 중 43석을 점유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리콴유는 영국령 싱가포르 총리에 취임했다. 한편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싱가포르 현지 사회주의자들도 공산혁명을 꿈꾸며 몇차례 소요를 일으켰으나 식민 당국에 의해 진압당했고, 이때 몇몇 인민행동당의 사회주의자들도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리콴유 총리의 요청으로 이들은 풀려나 다시 당권에 복귀했다. 이후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를 발전시키며 인기를 얻었다.[10]

4.2. 사회주의 갈등

인민행동당이 커지면서 현지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인민행동당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영향인지 당내에서도 이념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그리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문제는 이런 이념 갈등에 확실한 불을 붙였다.

싱가포르는 당시 영국령 해협 식민지( 말레이 반도 + 싱가포르 + 북보르네오)의 한 지역이었는데,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소왕국들에 대해서는 속국으로 부리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했고, 싱가포르는 중요 지역으로서 직할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영국령 해협 식민지 내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영국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 화교들을 싱가포르에 데려오면서 싱가포르는 해협 식민지의 다른 지역과 달리 말레이인보다 화교가 더 많았다. 애초에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가 새 무역항 입지를 물색하다 싱가포르를 발견하였을 당시 인구수가 약 150명에 불과했을 만큼, 말레이인이 전통적으로 터를 잡아 살던 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국이 물러가고 해협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는 한 식민지로서 서로 교류가 많았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 유입된 화교가 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바람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화교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일단 말레이 반도는 1957년 말라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달성했고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리콴유는 말레이 반도에 물자를 대주는 항구 무역 중개지로서 발전해온 싱가포르의 역사를 볼 때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해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말라야 연방 가입에 반대했다. 당시 반공 성향이 강했던 말라야 연방의 여당 UMNO가 자신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또한 말레이인 위주의 UMNO가 화교들 위주의 싱가포르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1961년 UMNO의 당수이자 당시 말라야 연방의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 리콴유와 함께 싱가포르의 연방 가입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는 UMNO가 화교만큼 싫어했던 인민행동당 내 좌파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으며, 실제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싱가포르의 가입 계획에 충격을 받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리콴유를 비롯한 당내 반대파들을 이기지 못하고 당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인민행동당은 점차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반공 정당이 되어간다. 하여튼 그렇게 싱가포르는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여 말레이시아의 한 가 된다.

4.3. UMNO와의 갈등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 연방의 정당이 되었지만, 말레이인 우선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UMNO 화교 위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은 합방 직후부터 갈등을 벌였다.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 하원이 가결한 ‘Malaysia Act’ 결의안은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3개 주가 말라야 연방에 기맹하고, 말라야 연방이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재편되는 연방 헌법 개정안이었다. 당시 Malaysian Act에 의해 연방 헌법에 추가된 Title 2, Chapter 3, Article 31은 ‘싱가포르 주민은 싱가포르를 제외한 지역구에서의 참정권을 갖지 못하며, 싱가포르 주민이 아닌 자는 싱가포르 지역구에서의 참정권을 갖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사바 주정부 제공. 이 말레이시아 연방 헌법 31조는 말레이 반도와, 신생 3개 주의 정치를 서로 일정수준 이격시키는 목적을 갖고 제정된 조문이다.

그러나 UNMO는 이러한 헌법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합방 직후부터 싱가포르의 정치에 개입하고자 했다.[11][12] 말레이시아 연방 출범 불과 5일 뒤인 1963년 9월 21일에 치러진 싱가포르주 총선에서, SPA[13]와 UMNO 싱가포르 지역당[14]이 합당해 창당한 Singapore Alliance Party가 툰쿠 압둘 라만 총리, UMNO 총재를 비롯한 다수의 UMNO 중앙당 지도부의 현지 지원 유세까지 받아가며 51개 지역구중 44개 지역구에 후보를 공천하였다. 이는 인민행동당에 UMNO가 헌법 31조의 취지를 어기고 싱가포르 지역 정치에 개입하려 들었다는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양측의 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작 이러한 대규모 도발을 벌이고도, 1963년 싱가포르주 총선은 인민행동당과 구 인민행동당 좌파로 구성된 BS[15]의 경쟁 구도였지, Singapore Alliance Party는 기존의 7석을 모두 상실하며,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았다.[16]

이렇게 UNMO가 싱가포르 정치에 개입한 것은, 말레이계의 중국계에 대한 경계감에 원인이 있다. 화교에 비해 경제력이나 학업 성취도 면에서 말레이계가 너무 뒤쳐져 있으니 이대로 똑같이 평등하다면 말레이인들은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인들의 말레이시아'(Malaysian Malaysia)를 주창했다. 인종에 상관없이 '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말레이시아인에게는 똑같은 권리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말레이인들을 비롯한 UMNO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밀어붙이려는 UMNO를 견제하기 위해 196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 참여했다. 비록 2.0%의 득표율로 페낭에서 1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꽤 많은 호응을 얻었다.[17] 이는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지역정당으로 남길 원했던[18] UMNO에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말레이인과 화교의 갈등이 엄청났는데 싱가포르 가입 후 국내 화교가 더 많아지니 말레이인들의 불안감은 더해져갔고, 이는 여러 번의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싱가포르에 혼란을 부추겨 공산혁명을 시도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의 선동도 한몫했다.

결국 말레이시아는 국가 안정을 위해 싱가포르를 1965년 연방에서 축출했다.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 싱가포르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싱가포르의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는 국내에서 인민행동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한다. 이에 싱가포르인이 아닌 인민행동당 당원들의 당적도 말소되었고, 이들은 말레이시아에서 민주행동당을 차렸다. 이 민주행동당은 인민행동당과는 반대로 초창기의 색채가 유지되어 우경화가 진행된 인민행동당과 다르게 중도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

4.4. 싱가포르 독립 이후

싱가포르의 독립 이후 인민행동당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동남아에서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교역과 금융, 그리고 첨단 제조업 도시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19]

하지만 인민행동당은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기에 사회적으론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는데, 독립 이후 첫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총 58석 중 58석을 석권했고, 이런 현상이 1984년까지 계속 이어지며 싱가포르의 발전을 이끌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여러 정당들이 있고 이들의 활동도 명목상으론 보장되어 있지만 선거법 문제( 싱가포르/정치 참조)로 인해 인민행동당 이외의 다른 정당은 집권당이 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또한 오랜 집권으로 사법부를 사실상 종속시키고, 이를 통해 당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하는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언론을 통제해 반대 세력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리콴유 시절엔 아예 물리적인 방법도 꽤 동원했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 덕분에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었다.

그나마 1980년대부턴 싱가포르 내의 비판을 의식해 야당에 좀 더 유리하게 선거법을 고쳤고, 이후 야당 국회의원들도 조금은 등장했지만 그 의석은 대개 2석에서 6석 내외 극소수로 그마저도 맘에 안들면 광고 제한, 발언권 박탈, 신상 제한 등의 구박을 꽤나 받았다. 리콴유가 물러나고 21세기 들어서부턴 과거에 비해 야당이 성장하고 있다.

5. 역대 의장

<rowcolor=#FFF> 대수 성명 임기 비고
1 토친체[20] 1954년 11월 21일 ~ 1981년 1월 5일 역대 최장기간 재임, 싱가포르 前 부총리
2 옹텡청[21] 1981년 1월 5일 ~ 1993년 9월 1일 싱가포르 제5대 대통령
3 토니 탄 켕 얌[22] 1993년 9월 1일 ~ 2004년 12월 3일 싱가포르 제7대 대통령
4 림분헹[23] 2004년 12월 3일 ~ 2011년 6월 1일 테마섹 홀딩스 회장
5 코분완[24] 2011년 6월 1일 ~ 2018년 11월 23일 싱가포르 前 교통부 장관
6 간킴용[25] 2018년 11월 23일 ~ 2022년 11월 26일 싱가포르 現 보건부 장관
7 헹스위킷[26] 2022년 11월 26일 ~ (현재) 싱가포르 現 부총리

[1]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단순 중도우파 정당으로 평가하고 있다. [A] 초기에는 현재 말레이시아의 민주행동당과 유사하게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꽤 있었다. [3] 화교, 말레이, 인도계 등이 섞여사는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의 역사성 때문에 이런 경향을 띄기도 하나, 권위주의 성향이 강해 변질되었기에 시민 내셔널리즘 개념에 완벽히 부합하진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국가 내셔널리즘이라고 볼 수 있다. [A] [5] 2012년 기준 [6] 화교, 말레이, 인도계 등. 물론 주류는 화교다. [7] 시민국민주의에 따라 외국인에게 싱가포르 국적 따도록 유도하는 것 외에도, 단순 비싱가포르인 외국인 노동자들도 적극 유치한다. [8] Secretary General은 보통 사무총장으로 번역하지만 이 정당이 애당초 사회주의자들의 입김이 강했고 실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이었다는 점, 한국 정당의 사무총장과 달리 지금도 이 직책이 당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무총장보다는 서기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중국어 번역명도 비서장(秘書長)으로 중화권에서 서기장을 이르는 말이다. 좌파에서 우파로 성향이 바뀐 케이스라 이런 혼란이 오는듯. [9] 오히려 이땐 사민주의 정당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 1976년까지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있던 정당이었다. 보면 당명도 사회주의 정당들이 주로 쓸법한 당명이다. [10] 사실 싱가포르는 독립 이전에도 중계무역 중심지로서 꽤나 부유한 곳이었다. [11] Sopiee, M. N. (2007). From Malayan Union to singapore separation: Political unification in the Malaysia nregion 1945-1965. University Malaya Press. [12] Fletcher, N. M. (1969). The separation of Singapore from Malaysia. [13] 인민행동당이 UMNO와 손잡고 ‘콜드스토어 작전’을 통해 숙청한, 림유혹을 수장으로 둔 인민행동당 내 좌익계열 의원 중 생존자 4인 [14] 기존 3석 [15] Barisan Socialis(사회주의 전선). 리콴유를 비롯한 인민행동당 내 우파가 당권을 잡자 좌파들이 탈당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1963년 총선에서 총 51석 중 13석을 얻었으나 1968년 이후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1988년에 노동당에 흡수되었다. [16] 심지어 말레이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말레이계 다수인 지역구 3곳에 말레이계 후보를 공천했으나, 이들이 모두 PAP의 말레이계 후보에게 패배하는 추태까지 연출하였다. [17] 말레이시아에서는 1964년 총선에서 경과 조치로 1963년에 연방 가입을 받았던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에 대해서는 총선을 치르지 않았고 대신에 총선 후 각 주에서 알아서 하원의원을 선출해 연방의회에 파견하도록 했다. 이 중 사라왁과 사바는 연방하원의원을 선출해 파견했으나 싱가포르의 경우 선출 이전에 쫓겨나서 하원의원이 선출되어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18] 이를테면 독일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연방)&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지역) 같은 관계를 추구했던 모양 [19] 의외로 싱가포르 GD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산업은 제조업이다 (2021년 명목GDP 기준 22.3%). 이는 도소매 교역(19.3%)이나 금융(14.6%)을 상회한다. [20] 杜進才, Toh Chin Chye [21] 王鼎昌, Ong Teng Cheong [22] 陳慶炎, Tony Tan Keng Yam [23] 林文興, Lim Boon Heng [24] 許文遠, Khaw Boon Wan [25] 顔金勇, Gan Kim Yong [26] 王瑞杰, Heng Swee K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