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8:44:21

신생활운동

{{{#!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aa> 파일:장제스 투명.svg 장제스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사상과 성격 · 여담 · 한국과의 관계 · 관련 문서 · 대인관계 · 창작물 · 4대가족
인물
가족 장사천 · 장조총 · 쑹아이링 · 쑹칭링 · 쑹메이링 · 쿵샹시 · 쑨원 · 장징궈 · 장웨이궈 · 장샤오옌 · 장완안
사건
사건 신해혁명 · 영풍함 사건 · 제1차 국공합작 · 광저우 상단 사건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중산함 사건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 · 난창 군무선후회의 · 천도논쟁 · 4.12 상하이 쿠데타 · 영한합작 · 장제스-다나카 회담 · 장황사변 · 국민당의 2차 북벌 · 제남 사건 · 편견회의 · 호남 사건 · 반장전쟁 · 제1차 장계전쟁 · 제1차 장풍전쟁 · 제2차 장계전쟁 · 제2차 장풍전쟁 · 장당전쟁 · 중원대전 · 초공작전 · 제1차 초공작전 · 제2차 초공작전 · 제3차 초공작전 · 제4차 초공작전 · 제5차 초공작전 · 탕산 사건 · 제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장왕합작 · 제1차 상하이 사변 · 왕징웨이 저격 사건 · 제2차 양광사변 · 7군자 체포 사건 · 시안 사건 · 국공합작 · 중일전쟁 · 상하이 전투 · 동 공작 · 1939년 동계공세작전 · 대륙타통작전 · 국공내전 · 2.28 사건 · 재정경제긴급처분령 · 대만 계엄령 · 백색 공포 · 국부천대 · 국광 작전 · 장제스의 사망
단체 중화민국 국민정부 · 중국국민당 · 황포군관학교 · 국민혁명군 · 남의사 · CC단
기타 중정기념당 · 중정구 · 장공기념가 ·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 · 장제스의 학설 · 신생활운동 · 탈장화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파일:파스케스(세로).svg 파시즘 }}}}}}}}}
파일:s11125078-1a.jpg
1934년 쑹메이링이 제작한 신생활운동 홍보 포스터
1. 개요2. 배경3. 내용4. 경과
4.1. 중일전쟁 이전의 신생활운동4.2. 중일전쟁 시기의 신생활운동4.3. 종결
5. 영향6. 참고문헌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272b5ca30f5efe7.jpg
신생활운동 개시를 선포하고 있는 장제스
做個堂堂正正的中國人
정정당당한 중국인이 되라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 온갖 곳에 강조한 어구이자 신생활운동을 통해 중국인에게 바랐던 핵심.
나는 중국이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소.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1]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 / New Life Movement)는 1934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국민당에 의해 주도된 국민 계몽운동이다. 명목상의 목적은 중국인들이 과거의 퇴폐적이고 낙후된 생활에서 벗어나 규율, 도덕, 질서 및 청결을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지만, 그 내면엔 전 중국을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국가 대가정' 이념으로 다스리려는 장제스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1949년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시행하면서 중단되었다.

2. 배경

1928년, 장제스는 제2차 북벌을 단행해 장쭤린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그후 그는 편견회의를 개최해 군벌의 군사력 감축을 논의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시키려 했다. 이에 반발한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의 군벌들이 반기를 들어 반장전쟁이 발발했지만, 장제스는 봉천군벌 장쉐량과 연합해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중국의 명실상부한 1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군벌을 꺾는데 성공한 장제스는 초공작전을 개시, 여러 번의 실패를 무릅써가며 공산당 토벌을 단행해 마침내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당을 궤멸시켰다. 비록 공산당은 대장정을 단행해 가까스로 전멸을 면했지만 남은 군사력은 얼마 되지 않아 곧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될 게 뻔해 보였다.

이로서 자신에게 대항할 적들을 모조리 굴복시키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관심을 내치로 돌렸다. 장제스는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로 약화된 이래 군벌의 난립과 공산주의의 침투로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무지를 척결하지 않으면 이미 만주를 빼앗아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장제스는 중국인들의 의식 전반을 개혁하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신생활운동을 단행한다.

3. 내용

장제스는 신생활운동의 기본적인 요구는 삶의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즉, 삶의 수준을 혁신시킴으로서 중국인들의 전통 윤리, 의식 및 정직을 준수하는 정신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식사 예절'과 '옷 입는 법' 등 일상 생활 전반에 유교 윤리 및 기독교적 신념을 적용해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습관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국가 도덕'과 '국가적 지식'을 갖추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신생활운동의 내용은 크게 '사유(四維)'와 '삼화(三化)'로 나뉜다.
파일:48ebb3d2db354191bf46664ecf65e55c.jpg
* 사유(四維):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를 가리킨다. 유교에서는 이 ‘예(禮)·의(義)·염(廉)·치(恥)’를 국가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네 가지 근본이라고 간주했다. 장제스는 이 윤리를 일상생활 전반에 적용했다. 그는 신생활운동을 통해 중국인이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예의염치를 확실히 익힘으로서 기존의 낙후되고 퇴폐적인 생활에서 완벽하게 탈피하기를 기대했다.
파일:삼화.jpg
* 삼화(三化): '예술적 삶, 생산적인 삶, 군인 정신을 갖춘 삶'을 의미한다. 예술적 삶에서의 '예술'은 모든 인간의 삶의 기준으로서의 예술을 의미하며, 비인간적인 삶의 이별을 촉구하고 사람들을 돌보는 자세, 음악, 의식, 서적 등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 장제스는 예술이 인간의 양식을 증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며 적극 권장했다. 그리고 생산적인 삶의 '생산'은 돈을 절약하고 명품에 돈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서 중국에 만연한 빈곤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군사적인 삶'은 전 국민이 군인으로서의 정신을 갖고 국가를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4. 경과

4.1. 중일전쟁 이전의 신생활운동

'신생활운동'이라는 용어는 1934년 2월 17일에 처음 나타났다. 장제스는 난징에서 열린 설문조사 설계 회의에서 <새로운 삶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새롭고 진보적인 이념에 기반을 둔 혁명가들은 인적 자원을 사용하여 각 개인과 국가 전체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개선한다. 간단히 말해서, 혁명은 삶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국가의 삶의 방식이 결코 향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생활운동'이 국가의 기본 생활에서 네가지 기본적인 생활의 향상을 추구하는 사회교육 운동이며, 이것이 국가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국을 부활시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2월 19일, 장시성 난징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루칭 영화관에 모여 '난징의 봄 축제'를 즐겼다. 장제스는 이 축제에서 신생활운동의 서막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신생활운동의 요점"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신생활운동의 본질은 사회의 후진성을 광풍으로 모조리 휩쓸고 사회의 활력과 정당한 정신을 촉진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신생활운동은 "의식과 정직"을 중요한 사고로 간주했으며, 장제스는 이 사고야말로 중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것이 쑨원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쑨원은 과거 삼민주의를 주창하면서 서구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중국 고유의 충성, 효도, 사랑, 평화와 같은 오래된 윤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중국의 장점이기 때문에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1934년 2월 21일, 난징 신생활운동 진흥협회가 설립되었다. 장쯔런(蔣自任)이 회장이었고 덩원위(鄧文儀)는 감독관을 맡았으며 샤오춘쥔(蕭純錦)은 부국장에, 리환즈(李煥之)는 서기에 임명되었다. 신생활운동 진흥협회는 다음날 첫 사회 책임자 회의를 열어 다양한 사회게획과 규정을 촉진하기 위한 신생활운동을 연구하고 발표했다. 회의는 난징을 시험 지역으로 정한 뒤 점차적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3월 11일, 신생활 스포츠 진흥협회는 난징 공공체육관에서 신생활운동 시민 모임을 열었다. 난징 시민 20만 명 중 10만명이 이 전례없는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장제스와 아내 쑹메이링도 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장제스는 "모두 힘을 모아 신생활운동을 주도하자."는 연설을 행했다. 이후 3월 18일, 난징 신생활 스포츠 진흥 협회는 시민들을 위핸 새로운 빛의 운동 모임을 개최했다.

장제스는 1934년 6월 '신생활운동 개요'의 초안을 집필했다. 이후 7월에 신생활운동 개요가 전국적으로 발행되었고, 신생활운동은 난징 주변으로 확산되다가 1935년 말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1936년 2월, 신생활 스포츠 협회에서 '신생활운동 여성 운영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쑹메이링이 이사로 임명되었다. 3월에는 신생활운동 진흥협회의 조직이 약간 바뀌어 사무총장 제도가 도입되었고 황렌린이 사무총장으로 이명되어 실제 업무를 담당했다. 쑹메이링은 가족 생활의 변화를 위한 여성운동을 강력하게 홍보했으며 전국의 중국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중국의 대다수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아직도 수백년 전부터 이어져온 낡은 삶을 살고 있다. 지식이 많은 여성들은 이웃을 안내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며 집안일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주변 여성들에게 책을 읽도록 가르쳐야 한다."

신생활 스포츠 진흥협회는 국민의 사생활부터 간섭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벤트도 주최했다. '깃발 뽑기 대회'가 종종 개최되었고 청결을 위해 '여름 건강 캠페인, "이빨 닦기 캠페인', '쓰레기와 하수 처리', 그리고 '파리 박멸 켐페인'이 시행되었다. 또한 문맹 퇴치 캠페인, 마약 퇴치 캠페인 등 나쁜 습관과 나쁜 행동을 겨냥한 켐페인도 개최되었다. 또한 이시기에 신생활운동의 사회 교육 방법 중 하나로 노래가 사용되었다. 이 노래들은 주로 '좋은 민족', '국가의 도덕', '예의', '늙은이와 약자 돕기', '지도자에 대한 존경', '의리 중시', '순결한 마음', '공중 보건', '절약', '신체 운동', '국산품 사용'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장제스가 이같은 운동을 추진하면서 얻어내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천년 역사 동안 중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해온 유교를 기독교적 도덕 윤리와 결합시키고 지도자와 국민의 관게를 대가족에서의 가장과 자식간의 관계로 해석함으로서, 국민들이 지도자를 어버이로 여기고 지도자의 지시에 순종하기를 바랐다. 장제스는 이러한 신생활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매력이 공산주의의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신생활운동은 당대 중국인들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공산주의의 대안으로서 고려되지도 않았다. 신생활운동이 제시한 이념은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도덕 이념에 치우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토지 분배에 매력을 느끼던 중국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은 신생활운동이 제시한 도덕 관념과 예절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신생활운동이 제시한 복잡한 규칙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장제스 정권의 통치력은 여전히 중국 전역에 일관된 정책을 수행, 감독하기엔 역부족이었으며, 아직도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군벌들은 신생활운동의 집행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생활운동의 규칙을 강요한 남의사의 테러는 신생활운동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남의사는 처음엔 네 가지 미덕과 추가 95가지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을 수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장제스의 이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온갖 테러를 자행했다. 역사학자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1936년에 결성된 남의사가 신생활운동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상대로 폭탄 테러 및 암살을 자행하는 등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행동을 분출한 결과 신생활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혹평했다.

4.2. 중일전쟁 시기의 신생활운동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신생활운동 진흥 협회는 한커우로 이전했다가 다시 충칭으로 옮겼다. 이후 신생활운동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사유'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정부는 국민에게 '사유' 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군에게 저항하라고 요청했다. 장제스는 "의식과 정직, 그리고 수치"라는 슬로건을 주창하며 자신이 모든 이익을 희생하고 전심으로 국가에 헌신했다고 단언했다. 이에 따라 신생활운동은 '도덕적인 삶'에서 '군인 지원 운동'으로 바뀌었다. 기부금 모으기 운동, 부상병 및 난민 구호, 부상병을 위한 친선 클럽 운영, 유아 및 아동 보호, 군수 물품 지원 등이 실시되었고 신생활운동 조직 네트워크는 국민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한편, 일본에 붙어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한 왕징웨이는 자신이 진짜 중화민국이라는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신생활운동을 본뜬 '신국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4.3. 종결

중일전쟁이 끝난 후, 장제스는 중국의 패권을 확고히하기 위해 공산당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연이은 참패를 맛본 장제스는 결국 1949년 대만으로 도피했고 신생활운동 역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에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중국 지배로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며 ' 중화문명부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신생활운동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신생활운동만큼은 아니더라도 위생개선운동이나 의식개선운동을 벌였고, 이 중에서도 위생부문은 어느정도 성과를 내서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이 냉수는 건강에 안 좋다는 이유로 뜨거운 물을 선호하는 습관을 정착시키게 했다. 사실 2000년대까지의 중국의 평균적인 화장실 위생상태를 보면 뭐, 틀린말이 아니기도 했다. 다만 도중에 제사해 운동까지 벌이다가 말아먹은 일도 있었고, 사람들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습관은 근절되지는 못해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기차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 많았다는 증언도 있고, 분리수거가 2020년대가 되어서야 정착된 일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1970~80년대에는 해외에서 어글리 재패니즈 소리 들었던일이나, 대만인이나 홍콩인들도 1970~80년대에 매너가 영 좋지 못하다는 얘기도 들었다거나 한국인들이 1990년대에 어글리 코리안 소리를 들었고, 이 당시 공중화장실 위생상태가 개판이라는 말이 많았던걸 보면, 아무리 강압적인 독재체제라 해도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일일이 개선시키는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것을 반증하는 예이기도 하다(...)

5. 영향

1960년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정부 또한 신생활운동을 전개했으며, 뒤이은 박정희 정부는 신생활운동을 참고해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의 경우는 신생활운동보다 만주국 농촌진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6. 참고문헌

7. 둘러보기

중화권 보수주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관련 이념 국가자본주의 ( 당국 자본주의) · 삼민주의(일부) ( 다이지타오주의 · 장제스의 학설)중국 국민당 · 중화제국주의 · 중화민족주의 ( 극단민족주의(極端民族主義) · 한(漢)민족주의) · 신권위주의 · 신유교주의 · 초보수주의
연관 개념 대한족주의(일부) · 반자유주의 · 법가 · 아주가치(亞洲價值) · 유가/ 유교 · 중화민족 · 중화사상 · 하나의 중국/ 양안통일
지역별 대만 · 홍콩
주요 정당* 1949년 이전 진보당△ · 중국국민당당내 우파 ( 남의사 · 서산회의파)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 중국민주당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신당 · 중국국민당 · 중화민족치공당 · 친민당
홍콩 (건제파)* 민주건항협진연맹 · 서구룡 새로운 힘 · 신민당 · 신세기논단 · 실정원탁 · 자유당 · 홍콩 경제민생연맹 · 홍콩 공회연합회** · 홍콩 교육 노동자 연맹** · 홍콩 및 구룡 노동조합 연맹** · 홍콩섬각계협합회 · 홍콩신방향
마카오 (건제파) 광둥마카오동맹 · 마카오 고용주이익협회 · 마카오공회연합총회** · 마카오발전신연맹 · 마카오부녀연합회 · 마카오 전문가 이익연회 · 마카오주민회연합총회 · 문화체육연합 · 민중건오연맹 · 사회복무교육촉진회 · 종업원단체연합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주요 인물 1949년 이전 량치차오 · 셰츠 · 쉬충즈 · 쑨커 · 쑹메이링 · 장제스 · 위안스카이 · 캉유웨이 · 후한민
중화인민공화국 덩샤오핑◎ · 량수밍(梁漱溟) · 시진핑◎ · 왕후닝◎ · 양상쿤◎ · 장시공(强世功)◎ · 후시진(胡錫進)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마잉주 · 쑹메이링 · 쑹추위 · 장완안 · 장제스 · 장징궈 · 주리룬 · 허우유이
홍콩 (건제파)* 레지나 입 · 렁춘잉 · 성룡 · 스태리 리 · 존 리 · 캐리 람 · 퉁치화
마카오 (건제파) 페르난두 추이 · 호얏셍
싱가포르 고촉통 · 리콴유 · 리셴룽
언론 중국시보 · 중앙일보 · 중국 텔레비전 · 환구시보
단체, 그룹 건제파 · 범람연맹 · 왕왕 그룹
관련 사건, 시기 4.12 상하이 쿠데타 · 개혁개방◎ · 국공내전 · 국광 작전 · 국민혁명 · 국부천대 · 난징 십년(南京十年) · 당국 체제 · 동치중흥(同治中興) · 백색 공포 ( 대만 계엄령) · 신생활운동 · 양무운동*** · 의화단 운동 · 중국몽 · 중화제국(1915~1916) · 홍콩 국가보안법
그 외 N세대 · 분청 · 시노필리아 · 중국 위협론 · 중체서용 · 친중화민국 · 통일전선 · 한푸 운동 · 홍콩의 민국파
소멸된 정당은 △ 표시 / 중국 본토의 경우 신권위주의 계열 정당과 인물, 조직 등은 ◎ 표시.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분파
}}}}}}}}}



[1] 오만하게 들리지만 당시 국가 전체의 위기를 두고도 규합되지 못하고 난립한 온갖 군벌에게 허덕이고 외세고문단의 노골적인 무시와 조롱, 수치를 견뎌가며 일본군을 막아내고도 이후 측근들의 배신과 부패, 미국 군사고문인 조지프 스틸웰이 야기한 대륙타통작전의 궤멸적 피해로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밀려 국부천대의 모멸까지 당한 장제스가 혼돈의 중국대륙에서 걸어온 삶이 어떠하였는지도 엿보이게 하는 발언이다. 당시로서는 국부천대 이전이니, 적전도주, 배신, 외세결탁 등 장제스가 스스로 지닌 당시 중국인에 대한 모멸과 그가 재건 하고 싶었던 한족민족국가의 유교적 대인(大人)관을 지닌 국가건설은 쑨원의 뒤를 이은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다는 불신감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