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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삼은(高麗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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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길재.jpg
시호 충절공(忠節公)
이름 재(再)
재부(再夫)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 해평 길씨(海平 吉氏)
출생 1353년( 공민왕 2년)
고려 경상도 선산부 문성
사망 1419년 4월 12일 ( 세종 2년) (향년 66세)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부모 부친 - 길원진(吉元進)
모친 - 김희적(金希迪)의 딸
배우자 - 아주 신씨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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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재부(再夫)이며 호는 야은(冶隱) · 금오산인(金烏山人). 길원진의 아들로 해평 길씨의 중시조이다. 고려삼은 중 1명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 3은'으로도 불린다.[1]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어릴 적부터 맑고 깨끗하면서 영리했다고 한다.[2][3]

2. 생애

1353년( 공민왕 2년) 경상도 선산부의 속현인 해평땅 봉계리(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있다가 8살에 외가에 머물렀으며 혼자서 시냇가에 놀면서 가재 한 마리를 붙잡아 가재를 삶아먹고 싶지만 가재도 자신처럼 어머니를 잃은 것 같다면서 가재를 놓아주면서 슬프게 울었다. 이를 듣고는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후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해 어머니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자식이 어버이에게 불의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되고 바르게 행동해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고 했으며 이에 어머니는 감동해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1세가 되던 해에 냉산 도리사(冷山 桃李寺)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고 18세에는 상산(商山-지금의 상주)에 사는 사록(司祿, 목이나 도호부의 행정 책임자) 박분(朴賁)에게 < 논어>와 < 맹자>를 배우며 성리심학에 관한 학설을 듣게 된다.

집이 매우 가난해 말이나 종도 없었고 어머니에게 하직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개경으로 갔으며 아버지를 섬겨 효성이 지극했고 계모 노씨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경과 효도를 다해 노씨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이 대접해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할 정도였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1383년 사마감시에 합격했으며 1386년 문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받지 않았고 이 때 이방원과 같은 마을에서 살아서 그와 교류했다고 한다. 1387년 드디어 성균학정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388년 순유박사와 성균박사, 1389년 문하주서에 임명되었다가 1390년 고려의 사정이 나빴기 때문에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해 낙향했고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상복을 입은채 해장을 먹지 않는 등 3년상을 지내면서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봉양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으며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려를 그리워하며 조선에게 협력하지 않은 사대부는 길재 말고도 더 있었지만 길재의 이름이 남게 된건 1400년 주어진 태상박사(太常博士) 벼슬을 거부하고 집에 돌아간 사건 덕분이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세자[4] 이방원이 태상박사 벼슬에 임명해 관직에 나와 줄 것을 수차례 권유했으나 길재는 이전의 인연을 생각해 불러준게 고마워서 온거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면서 끝내 거절했다. 이방원은 좀 뻘쭘했는지 벼슬을 내린게 자기가 아니므로 왕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보냈다. 결국 길재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왕을 섬기지 않으니, 자기도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며 하사받은 벼슬을 완곡히 거절한다.[5]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한게 정종이 보기에도 괴이했는지 신하들에게 길재가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당시 신하들은 한미한 유자라고 답한 걸 보아 확실히 집이 가난했던 모양. 정종이 어찌 해야하는지 권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권근이 벼슬을 더 올려주거나 아니면 두고 두고 이름을 남겨 모범으로 삼으라고 해서 결국 정종은 권근의 조언으로 길재를 충절의 아이콘으로 삼게 된다. 이방원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의 집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 주자가례>에 의거해 제사를 지냈다.

이 때문에 이방원은 늘 대신들에게 길재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인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데 한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길재의 명성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복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현재 도량동 밤실마을 일대)에 전원을 주고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받은 전답을 그 가용에 준하여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뒤에 세종이 길재의 자손들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후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면서 자손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며 길재는 제사를 당하면 나물밥으로 공양하고 우는 것을 초상 때와 같이 했다. 밤에 조용히 앉았다가 밤중이 되면 잠들거나 옷깃을 여미면서 날을 세우기도 하며 이 처음 울 때 의관을 갖추고 사당에서 조상에게 절을 하면서 자제들과 <경서>를 강론했다. 병이 들어도 손에서 을 놓지 않았고 병으로 죽기 전에 장사지내는 것을 <주자가례>에 의거하도록 했다. 세종 1년(1419년) 4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금오산 기슭에 안장되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좌사간대부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旌閭)[6]했다. 현종 10년(1669년) 금오서원(金烏書院)이라는 사액 서원이 그를 위해 세워졌으며 영조 17년(1741년) 그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서 그의 절의를 기리었고 물질적인 보상도 주어졌다.

3. 기타

  • 길재가 길러낸 후학들이 훗날 조선의 사림파를 이루기에 길재는 나중에 사림파의 조상 중 1명이 되는데 사림파의 시작점인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손제자이기 때문.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강호 김숙자(金叔滋)가 바로 길재의 제자 중 한 명이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숙자, 배인경, 최운룡이 있다.
  • 저서로는 <야은집>, <야은속집>이 있으며 맥수지탄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로 시작하는 시조가 바로 길재가 지은 것이다. 고사성어 격세지감은 길재가 지은 시조에서 유래되었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초상에는 늘 한 쪽 귀만이 그려진다. 길성 문중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에 출사하지 않는 댓가로 귀가 베였다고도 한다.[7] 전근대에 신왕조를 따르지 않고 몸 성히 나오는 케이스는 극히 드물었으며, 여러 초상화에서 일관된 특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말년의 길재는 한 쪽 귀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 사극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인지도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조선 500년 내내 길재는 충절의 교과서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많은 사대부 중에서도 길재가 뽑혔는지 알 수 있다. 이하 그 기록들.
    • 신씨 왕조(우왕과 창왕)[8]가 정통한 왕조가 아니며 이미 망했는데도 절개를 지켰다.
    • 문하주서가 높은 벼슬이 아님에도 그 작은 은혜조차 저버리지 않았다.
    • 다른 사대부야 다들 한가닥씩 하던 잘 나가는 집안이지만 길재는 집이 가난한데도 한사코 벼슬을 거부했다.
  • 흔히 고려의 충신으로 꼽히는 정몽주도 처음에는 충신으로 쳐주지는 않았고, 세종대까지는 길재 혼자만 고려의 충신으로 쳐주었다. 1430년 11월 23일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만들 당시 충신으로 누구를 써야 하는지 묻자 신하들이 '고려 말에는 길재밖에 없음'이라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길재는 1431년 11월 11일 <삼강행실도>에 충신의 대명사로 기록된다.
  •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밑바탕에 깔려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도 했지만, 그가 추켜세워줘도 부담이 가지 않을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 당시는 고려가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들을 적극적으로 표창하기에는 크게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9][10]
    이에 반해 길재는 중국 귀화 가문으로 권문세족이 아닌 가문에, 벼슬도 청요직이나 고위직이 아니었으며, 학문적 업적도 첫 손가락에 꼽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에조차 충신 대우를 해주는 것이 가능했다는 해석이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김숙자의 아들이 바로 사림파의 시조로 꼽히는 김종직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결국 길재는 정쟁 한 번 휘말리지 않고 실질적인 목숨과 명예를 모조리 챙긴 것이다.[11] 나중에 그가 길러낸 사림이 조선을 이끄는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여말선초의 숨겨진 승리자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숱한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떻게 되었는지 고려하면 정말 대우가 좋다고 밖에 할 수 없다.

4. 대중매체

조선 건국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당한 정몽주, 이름 알려진 신진 사대부들의 스승으로 조선 건국을 막으려다 귀양가서 죽은 이색, 고려 삼은의 자리를 꿰차지만 각종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이숭인, 조선을 건국했지만 무인정사로 살해되는 정도전도 사극에 나오지만 길재는 등장이 없다시피한데 이는 여말선초 중앙정계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각본에 따라 등장시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등장시킬 수는 있겠지만 나오지 않는다고 극 전개가 이상해지는건 아니다. 조선 초부터 높게 평가받았고 후일 조선을 이끌게 된 사림을 키워냈다는걸 생각하면 결코 비중이 낮은 사람은 아니지만 죽거나 고문당하거나 정쟁에 휘말려야 하거나 기타 갈등이 일어나야 할 사극에서 별 일 없이 평온하게 살다 갔으니 앞으로도 사극에서 등장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 1996년작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배우 강태기[12]가 연기했다. 이방원이 한 때 같이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는지라 자신이 직접 찾아가 조정에 출사하라고 설득하나 부드럽게 말하며 제안을 거부한다.[13]
  • 2014년작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등장도 하지 않았으며 '고려 삼은' 자리는 도은 이숭인에게 뺏겼다. 사실 정도전에서도 이색이 마지막으로 등장했을 때의 인물 소개 나레이션 중에서 언급은 된다.


[1]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여말 3은 중 1명으로 넣기도 한다. [2] 정몽주에게 직접 배웠을 가능성은 적다. 왜냐하면 정몽주의 문집 어디에서도 길재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몽주의 제자와 문생들은 다수가 태조~ 태종 조선에 출사했기 때문에 여말선초 "정몽주 학통 은거 세력"이 학파로 실존했다는 증거도 적다.[출처필요] 이 부분은 후대에 사림파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정몽주와 엮기 위해 조작하는 과정에서 나온 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3] 반면 이색에게 수학한 것은 조선 대에 공인 된 사실로 받아 들여졌다. 실제로 이색 문중에서도 (조선 중기 이색의 후예인 이지 등) 길재를 고려 말 삼은으로 칭하며 높이 평가하였다. 나이 상으로도 따져 보아도 길재는 25살 차이나는 이색의 어린 제자 뻘이지, 15살 차이나는 정몽주의 직제자가 되기엔 나이가 조금 많다. 그러므로 이색의 후세대 제자이며, 정몽주와는 당대 교류가 많지 않은 어린 동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당시 왕이 형이었던 정종이지만 이방원이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세제가 아닌 세자가 맞다. [5]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인물 왕촉 연나라 장수 악의가 투항을 권하자 그에 응한 말이다. 원문은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忠臣 不事二君 烈女 不更二夫). [6]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충신·효자·열녀로 모범이 되는 사람의 집 문앞이나 마을 입구에 붉은 문([ruby(旌門, ruby=정 문)])을 세워 표창하는 행위' 또는 '그 문'을 뜻하는 말이다. (旌)은 깃발의 의미로 '드러낸다'는 뜻이고, (閭)는 마을 또는 마을 어귀에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왕이 충신·효자·열녀에게 정려를 내려줌으로써 해당 인물이나 후손에게 포상을 시행하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행실을 널리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풍속 교화의 방편으로 한 것이다. [7] 후대의 이야기로 보이나 이방원이 괘씸하여 '길재가 순순히 목을 내밀면 한 쪽 귀만 잘라 벤 것으로 치고, 목을 움추리면 목 째 베어라'고 했다는 살벌한 이야기도 전한다. [8] 조선 건국자들이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의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9] 정말로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거나 핍박을 받았던 정몽주, 이색 등은 그 영향력이 거대하고 남긴 업적이나 학맥 등이 대단했던 탓에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추숭하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조선의 태조와 태종에게 살해당하거나 핍박받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표창하는 것은 태조와 태종에게 허물이 돌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10] 당장 정몽주는 공양왕 시절에 정권을 잡은 뒤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실각시켜 유배보내고 이후에 트집을 잡아 매질로 죽이려고 시도했으며 권력 기반이 약해진 태조와 태종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숙청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던 조선 왕조 개국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인물로 후에 문묘에 배향되면서도 당시 왕인 중종이 '이씨의 원수'라고 할 정도였다. 세종 시절에 씌여진 < 용비어천가>에서는 주적으로 묘사될 정도. [11] 다만 귀를 잘렸다는 설화를 감안하면 목숨만 보장 받은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12] 2000년작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환각에 시달리던 궁예가 마신 약을 지은 도인과 견훤이 유폐되어 있을 당시 금산사의 주지승으로 등장했다. 2001년작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무쓰 무네미쓰 김홍집으로 역시 1인 2역을 맡았다. 무엇보다 연극 에쿠우스의 초대 주연으로 유명하다. 2013년 3월 12일 향년 63세에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3] 극 중에서 출사 제안을 직접 받는 사람은 4명인데 누가 봐도 예의바른 방식으로 끝나는건 길재뿐이다. 길재는 이방원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부드럽게 거절했고 원천석은 몸을 숨기고 이색은 태조를 "이보게 송헌"이라 부르고 조견은 "나는 개다! 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