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범(希范). 본관은 고령(高靈).2. 생애
신중엄(申仲淹)은 1522년(중종 17)에 태어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광윤이며, 작은할아버지가 좌찬성을 지낸 신광한이다.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과거(科擧)에 뜻이 없더니 1550년(명종 5) 작은할아버지 신광한과 조사수(趙士秀)의 천거(薦擧)로 동궁선수감역관(東宮繕修監役官)에 임명되었다. 1554년(명종 9) 조부상(祖父喪)으로 3년 복결(服闋)하고, 1557년(명종 12)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으로 제수되어 예빈시 주부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1560년(명종 15)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갔는데 1565년(명종 20)에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가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복관되었고, 종부시 주부와 상서원 판관, 장례원 사의(司儀)를 역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여름에 순천부사(順天府使)로 나갔는데 선정(善政)으로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1584년(선조 17) 겨울에 사옹원 판관에서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나가 선정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으며, 1589년(선조 22) 상의원 판관으로 들어왔는데 이듬해 작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595년(선조 28)에 곡산군수(谷山郡守)로 임명되었는데, 1598년(선조 31) 봄에 왜란(倭亂) 중 가자(家資)를 내어 명나라의 지원군에게 군량 삼백석을 공급하는 등 국난대처에 노력한 공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1601년(선조 34) 겨울 팔순에 수질(壽秩)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한준겸(韓浚謙), 이수광(李睟光), 최립(崔岦), 이산해(李山海), 한호(韓濩) 등의 헌수(獻壽)와 하장(賀狀), 친필(親筆), 경수도(慶壽圖)를 조정에서 받았다.
1604년(선조 37) 9월 6일에 동지중추부사[1]로 다시 제수되었으며, 12월 27일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