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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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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3대 대전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파일:attachment/red_wall_canvas_oil.png
<colcolor=#000> 적벽 전투
赤壁之戰
시기 208년 11월
장소 중국 후베이성 셴닝시[1] 츠비시[2]
원인 전국(戰局)의 주도권을 장악한 조조의 강동 진공(進攻)
교전 조위 손오· 촉한 연합
황제 황제 유협
군주 승상 조조 토로장군 손권
좌장군 유비
지휘관 조조군 손권군
조인
악진
서황
가후
장료
이전
허저






주유
정보
노숙
황개
한당
감녕
여몽
주태
능통
여범
유비군
유비
제갈량
병력 조조군
160,000명[A][4]
손권군
20,000명[5]~30,000명[6]
유종군
80,000명[A]
유비군
2,000명[8]~20,000명[9]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조군의 대참패.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대승리.
영향 조조, 남형주 지배력 및 천하통일의 기회 상실.
1. 개요2. 배경3. 정사에서
3.1. 유비와 손권의 연합
3.1.1. 노숙과 유비3.1.2. 제갈량의 꾀3.1.3. 동맹의 최초 제안자는 누구인가?
3.2. 손오 내부의 분열
3.2.1. 노숙
3.2.1.1. 이에 대한 위나라의 기록
3.2.2. 주유
3.2.2.1. 시기의 문제
3.2.3. 사실은 아직도 불안하다
3.3. 유비와 주유
3.3.1. 이 기록의 신빙성
3.4. 전투 진행
3.4.1. 전초전3.4.2. 사항계3.4.3. 불타는 적벽3.4.4. 조조의 도망길3.4.5. 기타 다른 기록들
3.5. 결말과 평가
3.5.1. '수전'이었나?
3.5.1.1. 수전의 비중이 미미했다3.5.1.2. 수전의 비중이 컸다
3.6. 허구인가?
3.6.1. 유비군의 병력은 2만이 맞는가?
3.7. 화계의 실제 전공
4. 삼국지연의에서
4.1. 시작4.2. 모략전4.3. 전투
5. 연의에서 각색된 부분6. 여담7. 기타 창작물

[clearfix]

1. 개요

赤壁大戰 / 赤壁之战
파일:Battle_of_Red_Cliffs_208.png
Xinye는 신야(新野), Fancheng은 번성(樊城), Xiangyang은 양양(襄阳), Battle of Changban은 장판파 전투, Hanjin은 한진나루, Jiangling은 강릉(江陵), Xiakou는 하구(夏口), Fankou는 번구(樊口), Chaisang은 시상(柴桑), Wulin은 오림, Huarong은 화용도, Baqiu는 파구(巴丘), Dongting Lake는 동정호를 뜻한다. Yangtze River는 장강, Han River는 한수, marshland는 습지대이다. Liu Bei(유비) Guan Yu(관우), Liu Qi(유기)는 빨간색, Sun Quan(손권) Zhou Yu(주유)의 군대는 노란색, 보라색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 Cao Cao(조조)의 군대는 초록색이며 초록색 점선은 조조의 퇴각로이다. 마지막으로 Battle of Red Cliffs는 적벽대전이다.

관도대전, 이릉대전과 더불어 삼국지 3대 전투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 삼국지를 안 본 사람도 들어봤을 정도의 명성을 자랑한다.

관도대전과 이릉대전은 전투의 규모를 떠나서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조조 혹은 제갈량 등의 활약이 크게 없었거나 아예 참여조차 없었던 경우도 있는 반면에 적벽대전에서는 조조는 패배, 유관장에 조운, 제갈량, 손권, 주유는 승리라는 포지션으로 전통적으로 삼국지에서 인기를 끄는 캐릭터들이 거의 전부 참가했다. 특히 애시당초 유비 손권이 우세하던 상황이 아니었고 조조가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하던 시기에 조조의 천하통일의 염원이 박살나고 천하삼분지계가 시작된, 분수령과도 같은 사건이었기에 단순히 전쟁의 규모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의 흐름에서도 몹시 중요한 전쟁이었고 유명할 만하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는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난 지 약 1000여 년이 지난 1363년 진우량 주원장의 대결인 파양호 전투로부터 나관중이 모티브를 얻어서 각색한 것이다.[10]

2. 배경

파일:external/ss1.bdstatic.com/u=3050341169,3601014136&fm=23&gp=0.jpg

실제 적벽대전이 벌어진 츠비(赤壁: 적벽). 한국에서 위와 같은 사진만 보고 "등애가 오르내린 친링산맥에 비하면 동네 뒷산 아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직접 찾아가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바로 저 엄청난 수역으로 보는 사람을 너비로 압도해버린다. 20만 대군이 배를 묶어놓고 싸운 게 이해가 된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푸이(蒲圻: 포기)였으나, 1998년, 도시 이름을 츠비로 변경했다. 사실 양쯔강의 수역이 계속 변화한지라 지금의 츠비가 정말 그때의 전쟁터인지도 잘 모른다. 참고로 저 사진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적벽'이란 글자는 적벽 대전의 승리 이후 주유가 크게 기뻐하며 손수 쓴 글씨라고는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당시 조조 원소와 그 아들들의 잔당을 모두 처리하고 208년 6월 한나라의 승상에 오른 후, 7월에 남하하여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이은 형주를 침공해 9월에 항복을 받아낸다. 유비군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을 받았으나 하구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조조는 가후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강동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운다.[11]

한편 패퇴한 유비를 보고 조조 휘하 의논하던 사람들이 손권이 반드시 유비를 죽일 거라 여기니, 정욱이 이를 헤아려 보고서 말하길
손권이 이제 막 자리에 오른지라 해내(海內)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공께선 천하에 적이 없고 이제 막 형주를 점령하셔서, 그 위엄이 강표(江表, 장강 이남 지역. 즉 동오)에 떨쳤으니, 손권에게 비록 지모가 있다한들 능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비에겐 빼어난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손권이 필히 그를 빌어 우리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력을 풀어 나누기는 어렵고, 유비의 도움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으니, 또한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손권은 유비가 없으면 조조를 막아낼 수 없으니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여긴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3. 정사에서

3.1. 유비와 손권의 연합

3.1.1. 노숙과 유비

유비가 거듭 패퇴할 동안 208년에 오범의 예측대로 유표가 죽었다. 오나라에서는 노숙이 유표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유비를 설득할 것을 손권에게 권하였고,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노숙이 유비가 이끄는 군세에 도달하기 전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고, 유비는 장판파에서 추격해오던 조조의 오천 기병에게 한바탕 당한 뒤였다. 이후 노숙전 주석 오록에서는 노숙이 이 당시 유비군이 장판에서 '一校'도 안 되었다고 언급하는데 一校는 천 명이니 장판파에서 천 명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비군이 패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황을 말한 것이지 이후 강하에서 정비된 유비의 전군이 아니다. 장판에서 날려먹어 장판 당시에는 1천 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을진 몰라도 곧이어 합류한 관우가 보존한 병력과 패잔병을 수습하고 흩어졌던 유비의 병사들도 다시 유비를 찾아왔고 추가로 유기가 1만 명을 보충해 줬기에 적벽과 남군 공방전에서는 거의 손권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제갈량은 자신있게 유비군에는 2만 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걸 손권이 보충해 준 것은 단 한 푼도 없다.

당양의 장판에서 유비를 만난 노숙이 이제 어찌할 요량이냐고 묻자, 유비는 옛 친구 오거에게 의지하러 가겠다고 한다. 노숙은 오거에게 가기보다는 손권과 결합하기를 설득하였고, 이어 제갈량에게 제갈근과 친분이 있음을 밝혀, 양측은 즉시 함께 수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유비는 노숙의 말을 따라 손권의 영지[12]였던 악현 번구[13]에서 행군을 멈춘 후, 제갈량을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나아가게 해 동맹의 서약을 맺었다.

여담으로 손권이 6군의 군주고 유비가 땅 한 뙈기 없는 난민 신세라고 하면서 유비가 종속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적벽대전 당시 유비는 유기와 함께 강하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선주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강표전에서도 엄연히 양측관계를 처음부터 '동맹관계를 맺었다'(結同盟誓)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치통감과 제갈량전에서도 '지금 장군께서 진실로 맹장(猛將)에 명령하시어 수만 군사를 통솔하여 유예주와 함께 협칙(協規, 협정과 규칙을 세움, 협력함)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을 격파하면 조조는 북으로 돌아갈 것이고 형, 양의 세력이 강해져서 정족(형주의 유비, 양주의 손권)의 형태가 됩니다'라고 하자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이 문제를 여러 부하들과 논의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둘 간의 관계가 처음부터 협력관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자치통감과 노숙전에도 손권이 보낸 노숙과 유비, 제갈량이 만나 '즉시 함께 수교하기로 정하였다'(即共定交)라고 했다. 즉 동맹 간의 역학관계에서 힘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유비와 손권은 동맹이 맞다. 유비는 이후 주유를 맞이할 때도 동맹으로서 가 보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고 자치통감과 오주전에서조차 익양대치로 동맹관계가 파탄났다가 다시 화해할 때 '다시 곧바로 동맹을 맺었다.'(更尋盟好)라고 써서 이전의 동맹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3.1.2. 제갈량의 꾀

시상에서 정국을 고민하고 있던 손권을 만난 제갈량은 그를 만나자마자 "유비 님을 도와주어 싸우도록 하십시오. 만약,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조조한테 항복하시든가요."하고 말하며 오나라의 국력을 무시했는데 만일 오나라의 국력을 추켜세우는 발언을 하면 유비가 손권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다는 걸 환기시키는 꼴이므로 손권이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장판파에서 조조한테 신나게 쫓겼던 유비가 보낸 제갈량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손권은 부아가 치밀어 되물었다. "그럼 어째서 유비는 조조한테 항복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제갈량은 자신의 주인 유비를 손권과는 격이 다른 인물로 추켜세움으로써 손권을 겁 많은 졸장부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 정도의 인간은 항복한들 어떠한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항복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오 정도의 의미였다.[14]

이런 말을 들으니 손권은 발끈하여 결연하게 항전의 의지를 밝혔다. 젊은 손권이 안 그래도 긴장되는 국면에 놓여 성마르게 되었으니 발끈하기야 했겠지만, 손권이 놓인 현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제갈량이 딱 원하는 결정이 났으니, 제갈량은 아직 유비에게 2만 명의 군사가 있다면서 강노지말 고사를 예로 들어, 조조군은 밤낮으로 달려 남하하였으므로 지친 데다가, 형주의 인심마저 얻지 못하고 있으니[15] 유비와 손권의 군세가 힘을 합하면 솥의 세 발과 같은 균형잡힌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유심히 들은 손권은 납득이 되어 부하들과 유비와의 동맹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의논을 하였다.

3.1.3. 동맹의 최초 제안자는 누구인가?

내용을 보게 되면 노숙이 동맹을 제안했는지 제갈량이 동맹을 제안했는지 확실하지가 않은데 배송지는 노숙전에 이렇게 주를 달았다.
신 배송지가 생각하기는 이와 같습니다. 유비가 손권과 협력하여 함께 중국(조조군)에 저항하였던 것은 이미 노숙이 꾸민 계략입니다. 또한 제갈량에게 '나는 자유의 친구요.'라 말했던 까닭으로 제갈량도 곧 노숙의 의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촉서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동맹의 계책을 손권에게 설파하자 손권이 크게 기뻐하였다.'라 말하고 있어, 마치 그 계략이 제갈량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적고 있습니다. 양국의 사관들이 각기 견문을 기록하고, 자국의 우위를 칭송코자 다투어, 서로 그 공적을 빼앗으려 하는 듯합니다. 지금 이 두 글(오서 노숙전과 촉서 제갈량전)은 한 사람(진수)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술로서의 체계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양측의 사관들이 자기네들 재상이 공적이 있다고 다투었는데 진수가 제대로 정리를 안 했다는 뜻이다.

자치통감의 타임라인을 따르면 노숙이 장판까지 쫒아와 동맹을 맺자고 하고 유비는 이미 제갈량한테 융중대를 듣고 손권과의 동맹이 최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오거에 의탁하겠다' 하고 노숙에게 말을 해보았다. 이에 노숙이 손권이야말로 최상의 동맹감이라며 동맹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이에 유비가 기뻐하며 노숙의 설을 따랐다. 이후 제갈량에겐 제갈근과의 친구임을 말하고 서로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제갈량은 하구에서 자기가 사자로 가겠다고 나섰다 하여 양측을 적절히 조합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사나 연의나 거의 비슷하다. 노숙이 장판에서 유비를 만나 번구에 주둔시키기까지 하면서 동맹하자고 나서는 거 빼곤 말이다.

따지고 보면 노숙이 먼저 나섰지만 원래부터 손권과의 동맹에 뜻이 있던 제갈량이 맞장구치는 형태로 이 두 사람이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보면 될 듯한데 어차피 제갈량 역시 융중대에서 오와 화친하여 동맹으로 삼아 조조에 대항하자는 의견은 이미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둘은 유손동맹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만. 제갈량은 "형주를 토대로 촉을 삼켜라"고 말했고, 노숙은 "형주를 삼켜서 촉을 어렵게 만든 뒤 조조에 맞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형주를 두고 불같이 싸우게 된 것. 그리고 이후 서로 형주를 익양대치로 적절히 나누어 형주 분쟁을 종결하려 했는데 노숙 사후 여몽은 형주 분할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유손동맹은 파탄을 맺고야 만다. 일설에 의하면 제갈량이나 노숙 외에도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렸던 말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만의 계책이 맞다.

3.2. 손오 내부의 분열

3.2.1. 노숙

손권은 싸울 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부하들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이때 조조가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근래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 지은 자를 처벌하였소.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모았소. 지금 수군 80만 명의 무리를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함께 오에서 만나 사냥하려고 하오.

유종도 그냥 항복했으니 이제는 손권의 양주를 정복하겠다는 뜻. 손권 자신이 10만이라고 칭할 정도의 병력이었으나 각지에 흩어져서 반란병들을 토벌하던 세력들도 있어서 전군은 동원할 수는 없었는데 조조는 손권군 전군이라고 쳐도 8배가 되는 군사를 끌고 온다는 편지가 떡 하고 오니 이 편지를 본 오나라의 신하들은 장소 진송을 필두로 항복을 주장한다.[16][17]

이들은 조조는 천자를 끼고 있어 명분이 있다는 점과 오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인 장강을 이미 조조가 형주를 얻었기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유표의 몽충 1천 척을 비롯한 잘 조련된 수군을 얻었으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이때 동오의 명분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손책과 손권이 구축한 세력은 어디까지나 동오 지역의 호족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측의 세력 차이가 너무 나기도 했고. 많은 인물들이 그저 일시적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손씨의 세력에 가탁했을 뿐, 한나라 황실이라는 중앙의 권위에 대항하여 할거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18] 손책이 공들여 영입했던 화흠 같은 경우는 이미 손권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붙어버렸다. 심지어 손씨 내부에서도 손권의 사촌형인 손분은 아들을 볼모로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려고 할 정도였고 이는 주치가 나서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오직 노숙만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화장실에 가는[19] 손권을 따라잡아 처마 밑에서 만난다. 노숙이 무슨 뜻으로 왔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손권은 노숙의 두 손을 잡고 의중을 물으니 이에 노숙은 다른 사람은 모두 항복해도 주공(손권)만큼은 항복할 수 없다. 신하들이 항복하면 모두 적당히 대우를 받고 태수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으나 손권만큼은 갈 곳이 없으니 항복하자는 개소리는 무시하고 어서 대계를 정할 것을 권한다.

이는 다른 신하들은 조조의 세력으로 전향하면 벼슬을 하면서 출세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뜻인데 실제로 다른 세력에 있다가 조조 측에 투항하여 높은 벼슬을 받은 사례는 여러 명이 있었다.[20] 하지만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손권은 투항해봤자 잘 해야 목숨만 건지고 견제 받으면서 한직이나 내도는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이 견지한 의견은 나의 소망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었소. 오늘 그대가 원대한 계획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나와 생각이 일치하오. 이것은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내려 준 것이오!
그 말에 손권은 탄식하며 곧장 파양에 있는 주유를 돌아오게 한다.
3.2.1.1. 이에 대한 위나라의 기록
노숙전에 주석으로 있는 위서와 구진춘추에는 제갈량이 손권을 도발한 것이나 싸우자고 주장한 것도 모두 노숙이 한 것으로 되어 있어 다른 기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손성은 《오서》 및 <강표전>에는 노숙이 처음으로 손권과 회견하였을 때부터 조공을 막아야 한다고 진술하여 제왕의 계략을 논하였고, 유표가 죽은 뒤, 곧 사자를 보내 정세를 관찰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제 와서 의견을 바꾸어 조공을 맞이하도록 권하여 도발하려 한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행동인 데다가 이때 조공을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자가 많았는데, 노숙 한 사람만을 베려고 하였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평했다.

3.2.2. 주유

파양에서 돌아온 주유는 사실상 한황실의 적인 조조를 오히려 이 기회에 무찔러야 한다며 항복 측의 의견을 반박하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인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지상전만 해온 조조군이고 수전에 그나마 익숙한 군은 조조에게 복속된 형주군인 것에 비해 오나라는 수전에 익숙하니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
  2. 북쪽에는 아직 마초, 한수 같은 배후의 세력이 남아있다는 것.
  3. 지금은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것이 없다는 것.
  4. 중원의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라는 것.
주유의 이 같은 말에 손권은 전쟁을 결심하고
사악한 적이 한 황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 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 명[21], 여포, 유표만을 꺼렸을 뿐이오.[22]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그리고는 칼을 뽑아 앞에 있는 주안[23]을 찍으며[24]
제장과 관리들 가운데 감히 다시 마땅히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게 되리라!
하고는 회의를 끝마쳤다.
3.2.2.1. 시기의 문제
주유전에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자 주유가 나서 이들을 물리쳤다고 되어있는 반면 노숙전에는 다른 이들이 모두 항복을 논할 때 노숙이 혼자 반대하고 주유를 불러온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배송지는 주를 달아 노숙이 먼저 반대를 한 뒤 주유를 부른 것이 맞다고 확정하며 주유전의 내용은 노숙의 기록을 가로챈 것이라고 기록했다.

3.2.3. 사실은 아직도 불안하다

주안까지 내려찍으며 결의한 손권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80만 대군은 상대하기 너무 벅차고 두려운 숫자였다. 지금이야 각종 사료와 정황을 가지고 당시 병력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상대방이 호왈백만하면 백만이구나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던 만큼 그 수가 80만에 달한다고 알려졌던 조조의 군대는 그에게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주유는 그런 손권에게 밤중에 다시 찾아가 80만은 아무리 봐도 무리이며 조조가 원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는 많아야 16만 명, 거기다가 아직 확실하게 항복하지 않은 유표의 병사 8만이 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5만의 병사만 주면 이들을 무찌르겠다고 한다. 손권은 주유의 등을 어루만지며
공근, 경이 여기까지 말한 것을 들으니 아주 내 마음과 같소. 자포와 원표[25]와 같은 사람들은 각각 처자식을 생각하며 사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품어서 기대하던 것을 깊이 잃었으며 오직 경과 자경만이 나와 같을 뿐이고, 이것은 하늘이 경 두 사람으로 나를 돕게 한 것이오.
5만 명의 병사를 군사를 갑자기 모으기는 어려우나 이미 3만 명을 뽑아놓았고, 배와 양식, 전쟁도구를 다 갖추었소. 경과 자경, 정공[26]은 편리한 대로 앞서 출발하면, 는 마땅히 인원을 계속 발동하고 자신과 양식을 많이 수레에 싣고서 경을 위하여 후방에서 지원하겠소. 경은 이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니 진실로 해결하시오. 해후하는 것이 의도대로 아니 된다면 편리한 대로 에게 돌아오시오. 고가 당연히 맹덕과 이것을 결판내겠소.

그런데 건강실록에 따르면
유비는 제갈량으로 하여금 손권에게 이르게 하였고, 손권은 주유, 정보와 장병 2만, 제갈량과 더불어 유비를 따르게 하여 남쪽에서 조조와 맞섰고, 손권은 스스로 장군이 되어 중군 1만으로 이어나가게 했다.
라고 되어 있다. 오주전에도 정보와 주유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가 2만 명으로 되어 있는데 건강실록과 함께 해석하면 실제로 싸운 군대는 주유, 정보의 2만 군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는 주유와 정보를 좌우독으로 삼아서 유비와 함께 힘을 합쳐서 조조와 맞서게 하고 노숙을 천군교위로 삼아 방략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다. 사실 이 당시 정보는 주유를 그렇게 좋게 보고 있지 않았으니 주유 입장에선 내부 균열을 봉합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을 듯하다.

이건 주유뿐만 아니라 손권도 마찬가지였던 듯, 주유가 말한 5만 명도 모아주지 못해서 기껏해야 3만 명밖에 모으지 못했고 그나마도 1만은 자신이 중군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제갈량 앞에선 10만 대군을 논했던 당찬 모습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인데 워낙 주전파와 항복파 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일이 결정된 것이라 정작 싸우기로 결정되었어도 몸을 사린 호족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본적으로 호족 연합체인 동오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3.3. 유비와 주유

번구에서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드디어 손권이 보낸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한다. 그런데 주유는 부서를 떠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유비보고 오라고 말하였다.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말하는데 동맹이지만 강하게 나오는 주유의 이런 태도에 저 둘이 화가 난 모양이라 달랜 모양이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주유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유비는 주유의 군대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3만인 것을 주유에게 듣고 발견한다. 노숙의 말에 허풍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겨우 3만?[27] 유비가 실망감을 나타내며 적다고 말하자 '그냥 자신이 공을 세워 적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강하게 나왔다. 유비는 예전에 만났던 노숙 등을 불러다가 함께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본인이)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고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말한다.

그에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3.3.1. 이 기록의 신빙성

이 기록은 선주전의 강표전에 있는 기록인데 이 뒤에 유비는 주유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고 2천 명을 이끌고 형세를 관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손성은 이 기록에 대해
유비는 웅재로, 필히 죽을 형편에 처하자 위급함을 오에 고해 도움을 얻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 다시 강변을 고망[28]하며 훗날의 계책을 품을 까닭이 없다. 강표전(江表傳)의 말은 응당 오인(吳人)들이 전미[29]하려는 말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자치통감 또한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강표전 기록에는 저렇게 나와있는데 자치통감에는 이후 유비가 느낀 감정이 딱 네 글자로 서술되어 있다. 저 위의 서술도 이 네 글자를 보고 해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선 유비가 주유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異瑜)는 기록이 없으며 그저 유비(備)가 심히(深) 수치스러워하고(愧) 기뻐했다(喜)는 기록뿐이다.

3.4. 전투 진행

3.4.1. 전초전

그리고 두 군대는 적벽에 집결했다. 과연 주유의 예측대로 조조의 군사들은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때문에 첫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하여 장강 북쪽으로 물러났다. 주유는 조조군을 견제하고자 하여 남쪽 강 언덕에 진영을 세웠다. 하지만 양측의 병력 차이는 여전히 컸을뿐더러, 시간을 끌면 끌수록 오나라가 불리해져 갔다. 그렇게 속절없이 대치하던 어느 날, 황개가 주유를 찾아왔다.

3.4.2. 사항계

주유를 찾아온 황개는 적이 배를 서로 붙였음을 지적하며 화공을 사용할 것을 건의한다. 주유는 그 계책을 받아들여 몽충 10척에 마른 억새와 장작을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휘장으로 덮어서 위장한 다음 위에는 정기를 세우고 미리 주가[30]를 준비하여 그 끝에 맨다.

그리고는 조조에게 항복의 편지를 보내니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만나 자세히 묻고는 결국 황개의 사항계에 속아 넘어가 버린다.[31] 사실 오나라의 신하들은 이미 항복론자가 많이 나올 정도로 정치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주유와 노숙만이 주전론을 펼친다'는 말은 온전히 거짓은 아니었고, 조조 역시 이러한 내부 사정은 정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황개의 사항계를 믿을 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주유의 항전과 풍토병에도 시달리니 전황을 뒤집고 빨리 끝내고픈 조조의 심리도 사항계의 성공률을 매우 높였을 터이다.

3.4.3. 불타는 적벽

동남풍이 급하게 불자, 다급해진 황개는 열 척의 함선을 최전방에 내세우고, 강 가운데서 돛을 올려 나머지 배와 함께 차례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조조군의 병사와 관리들은 이를 보고는 "황개가 진짜로 항복하러 왔다!"며 좋아하였지만, 황개는 조조의 배들에서 2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인화물질에 불을 붙여 조조의 함선들과 충돌시켰다. 강한 바람을 타고 사이좋게 엮어져 있던 조조의 배들은 불에 타 침몰하는 배가 부지기수였으며, 곧이어 거센 불길은 강 언덕 위에 있던 군영에까지 이어졌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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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이 하늘에 피어올랐고, 사람과 말은 쉴새없이 낼름거리는 불길에 사로잡혀 불타올랐으며, 뜨거움을 해소하고자 강에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뒤이어 주유는 경무장한 정예병을 인솔하여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뇌고[33]를 쳐서 오림의 조조군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 역시 이 공격에 참여해 조조와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배를 불태웠다.

하지만 일등공신 황개는 날아왔던 유시에[34] 맞아 부상을 입었고,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배에서 떨어져 강에 빠졌다. 그가 인솔하던 병사들이 그를 구출해줬으나 어둠속에 그가 누군지 몰라서 그냥 화장실 안에 넣어버렸다. 가끔씩 이걸 평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원문에는 置廁床中 이라고 하니 평상이 맞긴 하다. 다만 문제는 측상(廁床)이라는 게 화장실 속에 비치된 평상이라는 것… 결국 황개는 병사들의 실수로 위생상태 괴악한 당시의 화장실 속에서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이다. 다행히도 황개가 한당을 보고는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쳐서 한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전쟁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운 구국영웅 장수가 화장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될 뻔했다.

3.4.4. 조조의 도망길

유비와 주유가 계속해서 진격하니 조조는 화용으로부터 도보로 달아난다. 그런데 중간에 진흙탕을 만나서 길이 통하지 않고 날씨 또한 바람이 엄청 불어서 군사들에게 풀을 져다가 그것을 메우게 하고서야 기병이 마침내 지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병들에게 길을 만들어준 파리해진 군사들은 사람과 말에 밟혀서 진흙 속에 빠져 죽고 만다.

유비와 주유는 계속해서 조조를 쫓아 남군까지 도착하는데 도망쳐 나온 조조는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주위 제장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는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고 잠시 후 유비가 불을 놓았으나 이미 조조는 지나간 뒤였다.

이 부분은 패주하는 와중에 유비를 콕 찝어서 언급하며 내가 유비라면 진작 화공을 해서 꼼짝 못하게 했을 거라는 발언은 제발 유비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했는데 소원대로 돼서 안도함과 동시에 자기가 인정한 적수지만 그래도 자기보다는 아래라고 여기는 심리를 반영한 거라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둘의 마지막 맞대결인 한중 공방전 때도 유비가 법정의 조언을 따라 하후연을 계책으로 전사시켰다는 말을 들은 조조가 '그럼 그렇지. 유비 혼자서 그런 계책을 짜냈을 리가 없다.'고 유비를 헐뜯으며 쉽사리 유비를 자기와 같은 급의 맞수임을 내심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화용도 추격은 육지에서 펼쳐졌고, 연합군은 수전을 펼친 직후 조조가 퇴각할 시간을 벌려고 남은 조조군의 후미를 뚫는 과정과 상륙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3.4.5. 기타 다른 기록들

태평어람에서는 당대 1차사료인 영웅기의 기록을 보여주며 조조가 뗏목을 만들었고 그걸 주유가 불태웠다고 말한다.

또한 오주전에서는 조조가 남아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고 한다.

후한서 효헌제기에 따르면 조조를 오림,적벽에서 격파한 인물은 주유라고 서술되어있다.

무제기에서는 대놓고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라고 하여 상대의 대장을 유비로 기록하고 있으며 산양공재기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의 군선을 불태운 것을 유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비 역시 유기와 관우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전에 함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35] 또 같은 기록에서는 화용도에서 조조가 달아나며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비가 조조가 지나간 지역에 불을 질렀다고 나오니 유비가 조조를 화용도까지 추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주전에서는 '손권은 주유, 정보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배를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역병이 돌아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고 서술했다.

다만 rafe 교수가 지적했듯 유비군의 병력은 온전치 않았으며 1차사료 영웅기 및 중립적 사료 효헌제기에 주유의 이름이 명백히 언급되는데 반해 유비는 언급되지 않고, 주유군은 영웅기 외에도 오서,강표전,건강실록 등 오나라 장수들의 활약상이 자세한 것과 달리 유비군의 기록은 선주전의 짤막한 기록과 산양공재기에만 언급되는 관계로 연합군 중 적벽대전을 실질적으로 이끈건 주유라고 볼수있다.

3.5. 결말과 평가

20년이 넘도록 숱한 전쟁을 치러왔지만 이렇게 굴욕적인 패배는 처음이다.
조조

실제 역사에서는 유비와 손권이 조조를 상대로 군단 단위 전투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한 방 제대로 일격을 가하고 엿을 먹인 사건이다. 족히 수십만 대군을 거뜬히 징집하고 유지하고 운용할 능력이 있던 조조의 기세가 제대로 한 풀 꺾이며, 반대로 조조의 눈치를 안 보고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 손권과 유비는 주변의 작은 군벌들을 우걱우걱 집어삼키면서 각자의 땅에 뿌리를 박았다.

이로서 조조라는 극초강대한 세력과 유비/손권이라는 군소세력들 간의 일방적인 진압의 구도를 벗어나 천하삼분지계의 서막이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조조는 손권과 유비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으며, 결국 잠시나마 유지되는 듯하던 천하삼분지계는 조조가 예상보다 빠르게 피해를 회복하면서 깨진다.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작품들은 제갈량의 극적인 활약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대부분 연의의 내용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조조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주유에게 남군을 빼앗기는 등, 형주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반대로 유비의 세력이 이를 거점으로 급격히 팽창했다.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을 참고하자.

사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노련한 전략가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조급증에 뻔하디 뻔한 사항계에 속았고...[36][37] 수전에는 당연히 서툴렀고 또 수전에 약하다해도 20만 넘는 군사가 다 배에 타고 있는 게 아니다. 물리적 공간으로도 불가능하고, 배가 그렇게 많을 수도 없다. 적벽에서 수전이란 도하를 놓고 벌이는 일부 병력의 전초전이라 수전에 참여한 병력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오림 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조군이 수전에서는 패배할 수 있는데, 오림의 진을 지키지 못하고 조조 자신부터 혼란에 빠져서 역으로 도하한 유비군과 주유군에게 미친듯이 썰리며 화용도까지 도망간 것은 조조의 전술 실책과 형편없는 통솔력의 잘못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육상 병력은 오림에서 압도적이었으니 오림에 방어선을 치고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해서라도 도하하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 결과는? 조인에게 간신히 남군을 수비할 병력만 남기고 형주를 거의 포기한 채 하북으로 피할 정도로 궤멸적인 참패였다.

실제로 참패에 의한 조조군의 손실이 상당히 컸는지, 조조는 화용도를 황급히 빠져나오는 구절이 정사에 보이며, 남군을 지키라고 남겨둔 조인의 경우 손권, 유비의 연합군보다 열세의 병력으로 지켜야만 했다. 적벽대전 이전에 조조가 거느린 병력의 수가 유비, 주유의 연합군을 크게 웃돈 것을 감안해보면 조인이 이토록 적은 수의 병력을 거느린 것은 사실상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고 봐야 된다.

따라서 조조군의 적벽에서의 참패는 삼국지 연의에서 묘사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정도의 대참사로 추측된다. 이때의 손실의 여파 때문인지 조조는 그 이후로 대규모 총력전을 통해서 유비나 손권을 멸망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국지적인 전투의 승리에 만족하며 병력을 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기다가 사실상 거저 얻은 남형주는 그대로 유비와 손권에게 넘어가버렸고, 덕분에 유비는 훗날 익주로 진출할 발판을 얻게 된다.

흔히 조조군이 역병 때문에 졌다고는 하는데 그게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준이었다기엔 조조군의 장수 중에서 누구도 역병에 걸린 기록도 없고 그러니 전투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병은 없진 않았더라도 무제기에 나올 정도로 큰 영향이 아니라 미미한 수준이지만 진수가 위진 건국 시조인 조조의 패배 책임을 피하기 위해 면피성 핑계로서 사용했을 공산이 크다.
신 배송지는, 가후의 이 전략은 시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한수나 마초 등의 무리는 관우(관서)지방에서 승냥이같이 (중원을) 노리고 있었고 위의 무제가 영주(형주)에 느긋하게 앉아, 위광으로 오지방을 다룰 여유가 없던 게 명백한 상황이었다. 형주는 손권, 유비 쟁탈의 목표였던 지방이다. 형주의 주민은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유주(유비)의 웅세를 흠모하고 손권의 무략을 두려워 했다. 실제로 조씨의 제장이 방어해낼 만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조인은 강릉을 수비한 때, 곧바로 패배를 겪고말았다. 어째서 '위애'하는 것이 가능하며, '머리를 숙이고 귀순'시키는 걸 기대한단 말인가. 장강과 한수에 끼인 지역(형주)를 새롭게 평정하고, 양주와 월주(오 지방)를 떨게 만드는 이때에. 유표의 수전용 무기를 이용해 형초의 지방에 수오의 손을 빌리는 것은 말 그대로 강남을 제압할 호기, 천하를 넓게 평정할 큰 기회였다.

이 기회를 타고 오를 빼앗지 않고서, 언제 찾아올 기회를 노릴 것인가. 적벽의 패배에 있어서는, 아마 그렇게 될 운명이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역병이 대유행해 예리한 창끝을 잃어버리고, 남풍이 불어와서 불의 기세를 타버렸다. 하늘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책임인가. 그렇다면 위무제의 동진은 실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후의 이 계략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위무제가 후년(215년) 장로를 평정한 때 촉 내부에서는 하루에 수십 번이나 패닉상태가 일어나 유비는 그들을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때 무제는) 유엽의 계략을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촉을 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계획에서 벗어난 뒤에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도 마치 여기서 논한 일과 같은 실패와 같다.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유엽의 계략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이상, 결국 가후의 의견에 잘못이 있는 게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아닐까.
배송지의 평가.

다만, 배송지의 경우는 가후전에 가후가 더 이상의 진격을 반대하는 대목에 주석을 달아 조조의 이런 결정을 옹호하며 결과가 나빴을 뿐이지 의도는 좋았다며 득롱망촉의 고사까지 들어가며 설명을 한다.[38] 거대하게 일을 망친 건 맞지만, 조조가 성급하게 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다.

사실 조조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가후의 지연책은 온전한 전략인 듯 보이지만, 해당 기사에 주를 단 배송지가 지적하였듯 한수와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이 언제든지 조조의 배후를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유비와 손권이 쉽게 굴복할 만한 인물들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자칫 기약없는 기다림에 빠져서 형주에 군사를 묶어만 놓고 있다간, 대군이 체제하고 있는 형주의 민심과 물산이 더 빨리 바닥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정세의 상황이 너무나도 좋았다. 형주의 군대를 유비가 이끌것을 고려해 대군을 끌고 왔더니, 정작 형주가 항복해서 무혈입성한 것도 모자라서 형주의 수군이 조조의 손에 들어왔다. 또한, 손오에다 항복을 촉구하는 서신이 예상 이상으로 손오 내부의 분열을 불러일으켰고, 결과는 적벽에서 대치한 손오의 군대로 나타난다. 실제 손오의 역량에 비해서 부족한 병력을 마주한 조조가 보기에는 손오 내부의 분열이 심각한 것을 느꼈을 테고, 황개의 사항계를 너무 쉽게 믿고 속아넘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장 형주에 무혈입성하고, 장판에서 유비의 무리를 대파시킨 기세를 타 강동까지 벼락같이 들이쳐서 빠르게 병합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정세의 이치에 맞았다. 만약에 공격을 포기하고 대책없이 주저앉아만 있다가 후방에 일이 생기거나 해서 형주 현지에다 대군을 더욱 주둔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간 소득도 없이 그냥 회군해야 할 판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제껏 피해 없이 점령한 형주를 놓고 유비, 손권 등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될 수도 있음을 고려했다고 하면 가후의 전략을 거부한 조조의 판단을 마냥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수만도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전을 제지한 가후 등의 식견이 결국엔 옳았다고 후대 사람들이 믿어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적벽대전을 결행한 조조의 그릇된 판단이 유례가 없는 대참패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가후의 전략을 비판하고 조조의 선택을 지지한 배송지조차도 "(조조가) 손오 지역을 얻음에 장차 이보다 더 안전한 기회가 없었으나, 결국 적벽에서 대패함은 그의 운수가 사나웠기 때문이며… 하늘이 이와 같이 한 것일 뿐 사람의 노력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면서 깊은 허탈감이 느껴지는 견해를 제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조조가 이처럼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고 시기도 좋지 못한 상황에서 굳이 전면전을 감행하였다가 대참패를 초래한 원인을 조조의 연령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당대의 기준으로는 이미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나이였다는 점을 잘 생각해보자. 옛날 사람들이 나이가 예순을 넘어가면 괜히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른 것이 아니다.

환갑을 넘기기도 쉽지 않고 고희를 넘기면 드물게 장수한 것이라고 하던 당시 기준으로 조조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몇년 남지 않은 노인이다. 그런데 한 번 출병한 군대를 되돌린다면 이제 갓 점령한 형주를 안정시키고 다시 출병을 준비하는 데는 수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고, 이 경우 나이 예순에 가까운 조조가 다시 직접 출병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던 것이다.

노년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될 가능성도 상당하고, 이순의 노인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한다고 하면 주변의 만류나 불신 등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도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뭐 실제로 삼국지(정사든 연의든)를 보면 이후에도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 사례가 몇 차례 더 있었으니 지나친 걱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39], 어지간하면 내일이 보장되는 젊은이의 사고방식과 다르게 하루하루 늙고 쇠약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인의 사고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이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까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제패해왔던 조조로서는 보장되지 않는 훗날을 기약하기보다는 가능하다면 당장에 쌓여있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쪽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조조의 라이벌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복기한다면 더더욱 조급해질 동기가 충분하다. 하북 4주를 영유했던 그 강대한 원소 세력도, 사실상 황제놀음을 하던 유표 세력도 모두 중심을 잡아주던 주군이 사망하자 후계자 선정의 난맥상을 타고 맥없이 격파당하거나 항복을 택했고, 그나마 버티는 서천의 유장 역시 전형적인 호부견자였다. 조조 자신도 조비와 조식을 두고 고민중이었으니 당장 유종에게 맥없이 항복을 받아 형주를 손에 넣은 지금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후가 어떤 모습일지 아찔할 일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에 맞선 손권-유비 진영의 주요 인물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조조와 비슷한 세대인 유비를 제외한 손권, 주유, 제갈량등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조조보다 20세 이상 젊었다. 즉,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한 세대 아래의 젊은, 아들뻘 되는 세대들이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충분한 활력을 가지고 대두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벽대전 당시의 조조는 원소, 원술, 여포, 유표 등 동세대를 제패하고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젊은 세대가 새롭게 성장해서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대론의 시각으로만 고심했다면 당장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이 당연하다. 조조 자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고 점점 늙어가면서 쇠약해질 것이고, 젊은이들은 경험을 쌓아서 성장하고 강해질테니까 말이다. 이래서야 조조가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게다가, 조조는 기본적으로 꽤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인물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든든한 뒷배경과 기반이 될 수 있는 풍요로운 서주 땅을 완전히 작살내버렸고, 아끼던 장자를 날려먹어 정부인이 떠나버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유부녀를 탐했던 호색한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이성적이고 냉철하던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떨어지고 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면 감정기복도 심해지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인데, 이미 젊을 적부터 이성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멀었던 조조가 환갑을 눈앞에 둘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면 매사에 항상 감정적이고 조급함을 느끼는 것은 안 봐도 불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나마, 조조군에서 가장 발언권이 크고 처음부터 큰 군사를 내지 말고 가볍게 무력시위 정도를 벌이라고 조언했던 순욱[40] 종군하지 않고 허도에 남아있으니 조조를 제어할 아무런 방도도 없는 판이었다.

이런 조조의 개인적 상황에 맞물려서, 예상보다 훨씬 쉽게 형주를 점령한 결과, 형주를 점령하기 위해서 준비한 군대와 군비가 온전히 남았고, 약점이었던 수상전력도 역시 형주를 흡수하면서 어느 정도 보충된 상황이라면 준비가 불충분하고 상황이 최적은 아니었더라도, 조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늙어서 죽기 전에 촉한 손오를 미리 짓밟아놓는 선수방어 예방전쟁으로 싸워서 승리하여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고 멸망시켜서 하루라도 더 빨리 천하통일의 꿈과 목표를 달성하는 쪽이 더 낫다고 느끼는 것도 별로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형주에서 강동보다 익주를 먼저 정리한다는 게 말은 좋지, 강동은 그나마 장강 수로와 회수 방면 육로가 있으니 일이 끝나면 주력병력을 빠르게 빼낼 수가 있는데 익주는 한번 병력을 들여놓았다가는 언제 다시 관중으로든 형주로든 이동시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험난한 지형이다. 게다가, 무려 10만이나 되는 민간인이 우르르 조조를 피해서 유비를 따라갈 정도로 형주의 민심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시간을 질질 끄는 것도 역시 정치적인 위험부담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해서, 손권 + 유비를 배후에 놔둔 상태로 익주를 먼저 칠 경우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오히려 형주를 장악하고 조조의 배후를 사전에 차단하여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10만이나 되는 인구가 우르르 조조를 피해서 유비를 따라갈 정도로 적대적인 형주 민심 + 10만이나 되는 인구를 따라오게 할 정도로 상당했던 형주 내에서 유비의 인망 + 유표의 장자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와일드카드 유기까지 있으니 유비가 의외로 손쉽게 형주를 장악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형주에 믿을 수 있는 병력과 장수를 충분히 남겨둬야 하는데, 전력을 이렇게 분리하면 당연히 익주 공략에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채모 등이 이끄는 형주군도 수로를 통한 동오 방면 공세에는 충분히 써먹을 만하지만 산악지대를 돌파해야 하는 익주 방면으로는 미지수였다.[41]

이 경우, 유약한 성격의 유장이 저항을 포기할 경우에 익주를 생각보다 쉽게 장악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그나마 조조에게 유리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유장의 신하들도 바보들만 모여있는 것은 아닌 이상 '조금만 버텨내면 손권 + 유비가 조조의 배후를 끊어줄 것이다' 라는 기대감으로 익주의 지세에 기대어서 우주방어만 하는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유장은 진짜로 내부에서 신하들이 배신해버리는 뒷통수를 맞았음에도 무려 3년이나 유비에게 저항하면서 길게 버텨냈다. 물론, 유비의 세력이 조조의 세력보다야 규모가 작긴 했지만 조조는 조조대로 제일 거대한 세력답게 내부에서 견제하는 세력도 많은 만큼 세력이 크다고 무조건 익주 공략에 몰빵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으니 아무리 유장이라고 해도 조조를 상대로 길게 시간을 끌면서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조조는 시간을 날려먹고 허비하는 것이니 더더욱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익주 내부로 침투하여 입촉에 성공했던 유비와 달리 조조는 처음부터 익주를 치러 가는 입장이므로 아예 입구를 열어주지 않고 우주방어 전술로 일관한다면 더욱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 유장은 유약한 인간이지만 법정이나 장송같은 주변의 참모진들이 유능하므로 절대로 무시할 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조조가 형주를 손에 넣은 직후 유장의 행보는 예물을 보내서 조조를 달래고 살려달라 하면서 익주를 보전하는 것이었으며, 조조가 무섭다고 익주를 그냥 갖다바칠 인물도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이 늦춰질수록 위험요소는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최악의 경우 익주를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촉한-손오 연합군에게 장악된 형주와 익주 사이에 갇혀버릴 수도 있으며, 설령 어찌저찌 익주를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형주를 다시 빼앗긴다면 한중이 아직 장로의 손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방금 점령하여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익주에 고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비가 괜히 익주를 정면 공격한 것이 아니라 유장의 초대를 받는 방식으로 내부에서 침투하는 입촉 루트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째서 역으로 촉에서 형주 방면으로 지상군을 이끌고 공격하려던 이릉대전이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무엇보다도, 이런 고립 상황에 빠질 경우 조조 자신이 중원과 하북에 걸친 광대한 세력권과 단절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평소였다면 설령 패전하더라도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퇴각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지만, 이런 고립 상태에서 패배할 경우는 다시 본거지로 돌아갈 길도 막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고립-패배의 가능성을 낮게 보더라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감당해야 할 정치적인 리스크가 너무 막대하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방금 장악한 형주에서 충분히 머무르면서 정치적인 기반을 충분히 안정시키거나, 일단 본거지로 물러난 후 다시 한중 장로를 복속시키고 익주로 넘어가는 것과 같은 방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형주를 쉽게 얻음으로써 발생한 이점을 포기하고 재원정을 한다는 의미이니 아예 논외로 봐야한다.

사실 적벽대전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순수하게 촉한의 세력으로 따지자면 유비의 세력은 조조는 커녕 유장이나 손권보다도 한참 뒤떨어질 정도로 보잘 것 없었지만, 종실 출신 + 헌제의 밀명 + 좌장군-예주목의 직위와 같은 강력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경시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조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다스리는 익주조차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고 있는 무능하고 유약한' 유장이나 '나이로 따지면 조조의 아들뻘 정도밖에 안 되는 애송이' 손권에 비해 한 평생을 전란 속에서 보낸 조조 자신과 같은 시기에 전란 속에 뛰어들었으며, 조조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생동안 전란의 한복판을 헤쳐나왔고, 조조 자신보다 훨씬 불리한 처지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줄 정도의 유능함과 명망을 가지고 살아남은 유비 쪽이 훨씬 신경쓰이는 상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실제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거의 끝나가던 적벽대전 당시 남아있던 세력들 중 한수, 마등 같은 관서지역의 군벌이나 요동의 공손씨 정권, 교주의 사섭 등은 전란의 한복판에서 크게 벗어난 변방에 위치한 세력들이었고, 익주의 유장 역시 아버지가 평정한 익주를 물려받아 지형의 유리함에 힘입어 전란의 한복판에서는 비껴나 있었으며, 강동의 손권은 군웅할거 시대에 활약한 아버지 손견 및 형 손책의 세력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한중의 장로는 전란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천하를 노린 군웅이라기보다는 험지로 보호받는 한중에 세력을 구축하고 웅거했던 종교 지도자였다.[42] 즉, 군웅할거 시대 천하의 패권을 노리면서 서로 다투던 군웅들 중에서 조조 입장에서 적벽대전 시점에서 남아있는 인물은 변방의 잔챙이들을 빼면 '군웅할거 시대의 최종 승리자' 인 조조, 자신의 유일한 맞수이자 라이벌이었던 유비 뿐이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삼국지를 읽어내려갈 수 있는 현대의 독자들은 별로 실감이 안 갈 수도 있겠지만, 십여 년간의 처절한 전쟁 끝에 천하를 다투던 군웅들을 제패하고 1인자로 등극한 조조의 입장에서는 한때 자신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던 군웅 중 마지막으로 남은 인물인 유비를 의식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유비는 몇 번이고 조조가 박살냈지만 계속해서 세력을 재건하여 다시 도전하는 조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협을 느끼고 기겁할 만한 상대였다. 그렇기에 조조로서는 어차피 유비 하나만 확실하게 잡을 수 있으면 중국 천하에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조조에게 맞설만한 담력도, 명분도 보여줄 군웅이 없었기 때문에[43] 조조가 무리를 하더라도 적벽대전을 일으킬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이후의 전개를 보더라도 조조의 선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조조는커녕 형주도 다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비의 공격을 받고도 허무하게 항복해버린 유장보다는 강동의 호족 연합체를 효과적으로 규합하여 제대로 된 세력을 구축, 칭제하기에 이른 손권+적벽대전 이후 조조의 위세가 축소된 틈을 타서 당장 자기 세력을 구축할 정도의 역량을 가진 유비를 여유가 있는 김에 한큐에 몰아서 처리를 해버리는 쪽이 더 중요한 과제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조조가 조급하고 경솔한 대처로 인해 적벽대전에서 참패하면서 촉한 손오의 급성장을 허용하고 말았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게다가, 유비에게 마지막 발 붙일 땅이었던 강동의 상황은 위에서도 살펴봤지만 심지어 서주 출신인 장소가 항복파의 수장이었을 지경으로 항복파의 목소리가 워낙 컸으니, 조조로서는 "내가 지금 적벽으로 쳐들어가서 손권이랑 유비 둘 다 박살내도 되겠는데?" 라고 자신감을 가질 만도 했다.

한편 손권으로서는 권력을 물려받고 난 후의 과정이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적벽대전 전에 자신과 맞서려는 손권을 보며 조조가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손권) 같은 아들을 얻어야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다!" 라고 했을까. 조조 입장에서도 손권은 애송이겠지만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운 애송이였을 것이다.

실제로도 조조는 적벽대전 이후 "손권 스스로가 형식상으로 숙이는 것을 받을 수 있었지, 스스로 손권을 복속시키지 못했다."라는 사족을 다는 이들도 있으나, 강동의 손씨 가문은 강력한 권위와 권력구조에 의해 지탱되는 통합된 단일세력이 아니라 손씨 일족(손견+손책)을 중심으로 강동의 호족들을 규합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손권같은 애송이가 이 세력을 온전히 물려받아서 손오 정권을 경영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애송이의 정치적 기량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문무를 겸비한 백전노장으로 노련한 정치적인 능력을 갖춰서 1인자가 된 조조가 모를 리도 없다.

예를 들어, 조조가 공격해오기 전 동오 내에서 고개를 든 항복론 역시, 동오의 핵심 세력이던 호족 입장에서는 자기들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아 대장노릇하려고 드는 굴러온 돌 손씨 애송이 하나만 잡아다 넘기면 어차피 조조로써는 강동지방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줄 것이 뻔하고, 이 상황에서 손씨 일족의 친위세력이 되어줘야 할 유입세력[44]까지도 조조의 강력한 세력과 권위 앞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자고 하는 판인데 이 상황에서 영토와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는커녕, 호족들의 미적지근한 협조에도 불구하고 조조에 맞설 만한 세력까지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조조가 바보가 아닌 이상 '손권의 능력은 기대 이상으로 무서운 애송이다' 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다만, 앞 주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 입장에서 손권은 '급성장하는 무서운 애송이' 이지 유비와 같이 '평생을 갈등하고 싸우다 가끔 손을 잡았지만 다시 싸워온 숙적' 으로써 '다른 모든 적수들을 다 자기 손으로 쓰러트린 와중에 단 하나 쓰러트리지 못한 상대' 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가진 상대는 아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적벽대전의 대참패로 인해 입지가 약해진 조조는 이후 동작대를 세우면서 "내가 다른 애들은 다 잡았는데 유비랑 손권 등만은 평정하지 못했으니 군권 못 내놓는다"라면서 입지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후로도 조조에 반항하는 이들은 많았다. 군사적 세력으로는 여전히 조조가 최강자였지만 적벽대전 이후 정치적 세력으로는 유비와 손권이라는 라이벌들이 힘을 얻어서[45] 조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 인생의 말년을 앞둔 상황에서 평생동안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머리가 골치아픈 일을 만들게 된다. 결국, 조조의 정치적 위상에 금이 가고 커다란 타격이 가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도, 관도대전의 승리와 원씨 가문의 잔존세력을 소탕한 이후에도 그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던 조조의 위상에도 금이 가버렸고 자신의 정치적인 커리어에도 상당히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11년 뒤에도 유비와 제갈량의 원대한 꿈이자 계책인 천하삼분지계의 길을 열어줬던 한중 공방전에서도 또 다시 그 둘에게 한 방 크게 당해버리고 참패하는 거대한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적벽대전은 조조 본인이 그토록 평생을 바쳐서 목표와 꿈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천하통일의 달성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역사에 길이남을 대참패로 인해 극적으로 놓쳐버리고 천하통일의 기회가 좌절되어 완전히 무너져버린 천추의 한이 남는 패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조조 본인은 물론이고 조씨 가문 전체에게도 이후 두 번 다시는 천하통일의 기회를 손에 넣지 못한 채로 되찾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결국 조조가 건국한 조위 정권은 천하통일의 목표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다.

또한 적벽대전에서 참패함으로써 조조는 자신의 남은 일생을 세력 내부의 체제개혁에다 사용할 시간이 없게 되었고, 결국 사대부와 결탁한 맏아들 조비가 다른 황족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되면서 체제개혁의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적벽대전 패전 이후 40년 남짓 지난 뒤 고평릉 사변으로 인해 조씨 가문이 건국한 조위 정권도 조조 자신의 심복이었던 사마의 일족의 쿠데타로 인해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내려와 선양되어 완전히 멸망하면서 조씨 일가의 천하통일 기회도 영원히 좌절된다.

3.5.1. '수전'이었나?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팬덤 내에서 으레 "중국사상 대표적인 수전" 중 하나로 알려져있으며, 정사나 연의 내에서 주유가 필승론을 펼칠 때의 주요 근거로 "수군으로 이길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삼국지를 다룬 이런저런 전략게임의 팬덤에서도 '육전 뿐만이 아니라 수전/해전에 대한 묘사를 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올 때면 으레 적벽대전을 그 근거로 들고는 한다.

그러나 정작 "적벽대전"은 ( 관도대전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에서 ~전투, ~회전을 일컬을 때처럼 며칠 사이에 일어난 한두 번의 결정적인 전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적벽대 전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양상이 복잡하다.

엄밀한 구분은 아니긴 해도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특정한 전역에서 발생한 결정적인 전투에 대하여 "The Battle of ~" 라는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고, 적벽대전도 마찬가지로 "The Battle of Chibi"로 번역이 되며, 서양이 아닌 동양, 한국에서의 대중적인 인식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적벽대전을 "어떤 특정한 하루의 큰 전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는 손오의 도하/화공작전 + 조조 진영의 붕괴 + 오림전투 + 화용도 퇴각이 발생한 그 하루를 "적벽대전"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동양에서 "~대전"은 대개는 '전투'가 아니라 '전역'에 해당하며, 몇 주에서 몇 달까지도 이를 수 있는 긴 시간 동안 발생한 일군의 전투의 집합 및 그 최종결과를 일컫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ex. 초한대전, 장평대전, 관도대전, 적벽대전 등)

문제는, 적벽대전이라는 '전역'에서 발생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소규모 수전들이나, 최후 단계의 하루 동안 발생한 손오의 도하작전만 갖고 적벽대전을 "중국전사상 대표적인 수전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느냐이다.
3.5.1.1. 수전의 비중이 미미했다
여러모로 따져봤을 때 실제로는 "수전"이라고 부르기 매우 곤란하다. 즉, 적벽대전 기간 동안 소규모의 수전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적벽대전을 수전의 대표적인 예로 부르고자 한다면 그럴만한 근거는 거의 없는 반면, 그러지 않을 근거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두 가지 정도를 든다면:
  • 고대 중국은 수전/해전을 거의 안 하는 민족이다
    고대 중국과 고대 유럽의 생활권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대륙 전체를 유럽/그리스와 소아시아/중동/북아프리카로 반띵해버리는 지중해가 자리잡고 있는 고대 지중해문명과는 달리 중국문명은 그 기원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천 년 동안 역사상 모든 활동이 육상의 대륙에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이웃동네 갈 때도 배타고 다니던 그리스, 페니키아인들이나, 공화국/제국 안보에 매우 중요했던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해 생고생을 해가며 바다에서 싸웠던 로마인들과는 달리 중국인들에게서는 상고시대에서부터 근세,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물위에서 박터지게 싸운 기록이 거의 없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이나 조비의 동오정벌 시도 등 사건에서 단편적으로 수군이 언급되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나마 등장하는 경우도 대부분 물길을 이용한 운송, 수송의 맥락에서 더 자주 언급이 된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1363년에 군벌들인 주원장 진우량이 패권을 다툰 파양호 대전인데, 이 경우에는 중국사상 매우 드물게도 넓은 파양호 한복판에서 정말로 배타고 함대 단위로 맞붙어 싸운 진짜 "수전"이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국사서에서 수군이 등장하는 것은 물길을 막거나, 도하를 하거나, 도하를 저지하는 등 육전에 딸린 병력수송의 일환으로서이며, 정말로 수상전투를 벌이는 것을 전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46]
  • 적벽대전 과정에서 실제 수상전에 대한 묘사 및 기록이 거의 없다
    위의 다른 항목들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주유와 동오는 수군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유비에게도 관우가 지휘하는 수군이 있었으니 어떠한 형태로든 수상전이 발생을 했음은 확실하다. 문제는, 전투의 진행에 대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전초전 단계에서의 정찰전, 주유와 황개가 조조군을 기습하여 조조군에게 화공을 한 초전, 산발적인 소규모 싸움 등을 제외하고는 적벽대전에 대한 서술 전부를 통틀어도 수상에서 함대끼리 교전하여 승부를 본 싸움이 중요하게 서술된 예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기승전결 구조로 흘러가는 연의는 물론이고, 정사나 자치통감 또한 마찬가지지만, 결국 적벽대전의 서술은 (1) 전략적인 차원에서 조조주력인 육군의 남진이 장강에서 가로막히고, (2) 적벽에서 양 진영이 대치하면서 신경전을 벌이는 대치전이 이어지다가, (3) 유비-손권 동맹군의 화공 및 도하작전으로 조조군 진영이 혼란에 빠지고 오림에서의 육상전을 통한 섬멸 시도가 이어지면서 조조군의 주력=육군이 소멸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전개에서 중간 과정인 대치전에서 조조의 남진을 막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 수군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수군이 수상에서 함대전을 통해 조조군의 도하를 저지하거나 섬멸한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적벽대전의 마무리에서 손오의 수군이 기습적으로 대기/정박 중이던 조조의 함대를 모조리 불사르면서 강 건너편에 상륙한 건데, 출격조차 못 한 상태의 함대를 죄다 불태웠으니 수상에서 싸울 적이 없지 않은가(...).

    결국 동맹군의 결정적인 공격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도하 및 상륙 작전, 그리고 그에 수반 된 화공이었고[47], 기습적인 적의 상륙과 불바다로 인해 혼란에 빠진 조조군을 섬멸하기 위한 공격은 조조군 영채와 오림 방면에서의 육상전이었으며, 이후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의상의 "화용도 추격전"에 해당되는) 조조군의 퇴각전 및 유비군의 추격전 또한 당연히 육상전이다. 앞서 언급했듯, 대중적으로는 전투가 결판이 난 그 단 하루의 그 싸움을 적벽대전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했지만, 정작 그 결정적인 하루의 싸움에서도 수상전은 정사, 연의 모두 거의 언급조차 없다. 불길이 피어 오르면서 분명 조조군의 일부 선박은 반격을 할 요량이든 도망칠 요량이든 간에 영챠에서 탈출하여 수상으로 나아가고자 시도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수상전이 발생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문제는 그러한 산발적인 시도들은 이미 육상에서 본무대가 열린 상황에서는 전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사소하고 지엽적인 싸움이었을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사서에 수전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이 아예 누락이 되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적벽대전은 "전역에서 일부 수전이 발생하기는 한" 싸움이었지 "수전이 주가 된 싸움"이거나 "대표적인 수전"으로 여길 수는 없다.
3.5.1.2. 수전의 비중이 컸다
위와 같은 주장에 반하여, 적벽대전에서 수전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의견도 있다. 위에서는 적벽대전의 최후 단계에 발생한 중요한 싸움들이 전부 육상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1)조조군의 배를 화공으로 불태운 것(수전)과 (2)그 뒤에 육군까지 괴멸시킨 것(육전),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경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황개의 화공만 보아도 처음에는 조조군의 수군이 화공에 당해 섬멸되었고, 그 다음에 육지로까지 불길이 번지면서 조조군의 육군도 화공에 당한 것이다. 오나라 장병들이 단지 도하 상륙 작전만 펼친 것이 아니며, 그 전에 조조군 함대를 격파하는 수전 과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출격조차 못 한 상태의 함대를 죄다 불태웠으니 수상에서 싸운 적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조조군 함대는 당연히 출격했든 출격하지 않았든 수상에 주둔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조 측 함대의 괴멸은 어떻게 보아도 '수상전'을 통한 것일 수밖에 없다. 주유전에도 익사한 병사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나오는 것이 그 증거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려 남군(南郡)을 지켰다.
정사 삼국지 주유전
게다가 주유전 외에 선주전을 보아도 조조군의 함선이 불타 없어진 것은 적벽대전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사건으로 주목되고 있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을 불태웠다.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이 돌아 북군(北軍)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
또한 영웅기나 산양공재기에는 아예 조조군의 후퇴 이유가 배가 다 불타서라고 되어 있기까지 하다.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48]과 주가(走舸)[49]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영웅기
공의 선함(船艦)이 유비에 의해 불태워지자 군을 이끌고 화용도(華容道)로부터 걸어서 귀환했는데, 진창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고 또한 하늘에선 큰 바람이 불었다. 지친 군사들까지 모두 풀을 짊어지고 진창을 메우게 하여 말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지친 군사들 중에 말과 사람에게 밟히고 진창에 빠져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산양공재기
따라서 화공으로 조조군의 함대를 괴멸시킨 사건이 수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벽대전에서 수전의 비중은 도저히 과소평가될 수가 없다. 조조군 수군의 괴멸은 육군의 괴멸과 동등한 한 축이며 수군의 괴멸은 수군으로만 가능하다. 게다가 조조군 육군의 괴멸은 수군을 괴멸시킨 불길이 육지로 옮겨붙음으로써 발생했다. 결국 적벽대전은 수전의 여파로 육전까지 승기가 넘어감으로써 조조군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전투이지, 오로지 육전만 중요했던 전투는 아닌 것이다.

3.6. 허구인가?

무제기(조조전)에서는 역병으로 군사를 물렸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전투가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주유전에서는 화공으로 조조군이 다 불탔으며 연기가 하늘을 메웠다고 되어 있으며, 산양공재기에도 조조가 패배했다고 분명히 쓰여 있다. 기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든 정사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적벽에서 실제로 전투가 있었고 조조가 패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우선 무제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록에는 적벽에서의 전투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래 기전체 역사서가 각 전의 주인공을 다소 옹호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어떤 사건을 재구성하려면 참가한 인물들의 열전을 다 함께 읽어야 하므로, 무제기에 기록이 없다 해서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50]

일단 대체적으로 군사의 규모는 비슷하지만 살짝 살짝 차이가 난다.
  • 먼저 선주전에 주석으로 딸린 강표전의 기록에 따르면 주유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갈 때 유비는 2천의 군사로 뒤에 남았다고 나와있다. 다만 선주전 본전에 따르면 유기의 1만여 군사+관우의 수군이 유비 수중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관우가 한진에서 합류할 때 이끈 수군과 유기군의 병력을 합치면 무시할 전력은 아닐 걸로 추정할 수 있다.
  • 유비에게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병력이 있었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가 유표에 귀순할 당시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고 당시 유비에게 귀부하는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많아져 유표가 이를 경계할 정도였다 한다. 유비가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 우금 바른 것도 그렇고 애시당초 유표가 유비에게 신야를 준 게 거기서 조조 막으라고 국경지대에 배치한 것인 만큼 병력은 꽤 있었다고 보인다. 또 양양에서도 수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이 유비에게 귀속되어 그 수가 십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 중에선 소수나마 장수도 있었을 것이고 병사도 있었을 것이니 유비 진영의 병사수는 좀 더 불어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으로 거의 한 도시급 민간인들이 모조리 유비에게 붙었기 때문에 선주전 표현대로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자는 적었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고.
  • 관우전과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한진으로 튀다가 관우의 함대를 만나서 한진을 건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구 인근에서 유기의 1만 이상 군사를 만나는데 관우와 유기의 병사는 위에서 보듯이 별개의 병사다. 관우가 강릉이나 강하에서 원군을 더 들고 왔든지 아니면 무리를 이끌고 내려오다가 유비일행을 만난 건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는데 하여간 두 무리는 다른 별개의 주체다. 설령 강하에서 원군을 가져왔다고 쳐도 관우 함대를 지원하고도 유기가 만 명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된다. 어쨌거나 유기가 지원해줬건 그렇지 않건간에 원래 관우는 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이 말한 관우의 수군 정병이 이것이다.
  • 또 유비의 군사는 근본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각자 모인 경우가 꽤 있다. 유비가 형주에 보냈던 세월까지는 고생이 많아 그에 대한 기록인 선주전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을 보면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예컨데 여포한테 통수맞고 소패에서 다시 만 명을 모은 전적이 있고 조조한테 대차게 깨지고는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뒤 한 달쯤 지나 흩어져 달아났던 병사들이 다시 모였다."는 정사의 기록이 나오며 조운전을 보면 유비가 원소 밑에 있을 적에 조운이 은근히 모은 수백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원소 밑에서도 대놓고 스스로를 "유좌장군의 군사"라 칭하면서 유비를 끝까지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썼듯이 형주 신야에서도 형주의 호걸들이 유비한테로 몰려들었기도 했다.
  • 조조는 장판에서 유비를 더 이상 추격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자 유비군을 치기보단 바로 강릉성으로 내달린다. 이런 여태까지의 맥락을 보면 상당수의 병사들이 목숨을 보전해서 정말로 유비에게 돌아갔을 확률도 상당하다, 이 혼란통에 조운도 단기로 방금 전까지 자기 추격하던 조조군 사이를 역으로 돌파해서 감부인, 유선을 구해왔으니까.
  • 정사 제갈량전의 제갈량의 말에 따르면 유비에게 돌아온 전사에다가 관우의 수군을 합쳐 정병 만 명, 강하의 유기가 지원한 병력 만 명, 이 둘을 합쳐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고 나오고 손권은 3만의 군사를 지원했다고 나온다.
  • 마지막으로 오주전의 기록을 보면 정보와 주유가 각기 1만을 이끌고 갔다는 말이 나온다. 거기다가 주유전 주석에는 5만을 달라는 주유에게 손권은 갑자기 5만을 주기는 어렵고 이미 뽑아놓은 3만이 있다는 말이 있으며 주유가 유비에게 3만의 병력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걸로 손권 측의 군대는 3만이 거의 확실해지나 유비 쪽은 손성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말한 강표전의 2천이라는 말과 제갈량이 주장한 2만이라는 말밖에 없어서 2만으로 추정된다.
  • 오주전에는 주유와 정보가 이끈 군대가 2만이라고 하고 건강실록에는 1만의 군사가 손권의 중군이라고 한다, 실제로 손권군의 군사 중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군사수는 2만 명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의 군대의 규모는 유비군 2만(유기군 1만, 관우군, 유비의 패잔병 중 돌아온 병사까지를 합친 것에 대한 제갈량의 주장)+손권군 3만(주유와 정보 2만, 손권 1만) 해서 5만의 병력 정도. 추가적으로 적벽에 참가한 오나라의 장수는 주유, 정보, 노숙, 황개, 한당, 감녕, 여몽, 주태, 능통, 여범, 서성이 확인된다. 유비군에선 정확하게 어떤 장수가 참여했는지 기록이 나오진 않으나 정황상 유비와 함께 하구로 같이 도망친 관우, 장비, 조운 등과 유비에게 군사 1만여 명 이상을 보태준 강하태수 유기가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3.6.1. 유비군의 병력은 2만이 맞는가?

유비군의 병력이 2만이 맞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맞다는 증거는 없다. 우선 전근대 사학자들(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주석을 단 호삼성을 비롯해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 배송지, 손성, 습착치) 등은 제갈량의 2만 주장에 별 코멘트는 달지 않았지만,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같은 학자는 제갈량의 발언이 과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probably exaggerating)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그래도 모여든 상당한 군대(had likely accumlated a sizable force)가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질과 사기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3.7. 화계의 실제 전공

기록에 따르면 결국 전투를 결정지은 화계는 10여 척의 배와 동남풍 두 가지만으로 효과가 극대화되었다는 기록뿐이다. 다만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어림잡아도 10만 명 규모를 실을 배들을 끌고 왔는데 기껏 10여 척의 화공선에 허무하게 패퇴했다는 점에서 조금 의문이 든다.

대형 산불과 같은 경우에 큰 불덩이가 강한 바람을 타고 왕복 4차선 도로 정도는 우습게 뛰어넘어 날아가서 불을 옮겨 붙인다. 적벽대전에서도 오군이 배에 기름과 장작을 가득 싣고 강한 동남풍을 이용해 화공을 펼쳤다는 기록을 볼 때, 거대한 화염이 강한 바람을 타고 사방을 넘나들면서 불바다로 만들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조군은 수전에 익숙지 않은 병력을 고려해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화염이 더욱 빨리 번질 수 있다. 다만 자치통감에는 실제로 쇠사슬을 연결했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다른 기록에서는 발견되기 때문에 쇠사슬 부분은 자세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사실 쇠사슬 같은 것 없이도 배 수백수천 척을 강에 꽉꽉 눌러 끼우면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고, 일단 붙은 불은 생각보다 금방 번진다.

다시 대형 산불의 예를 들자면, 강한 바람을 탄 산불의 전파 속도는 초속 30-40m 정도나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우사인 볼트 정도는 가뿐히 넘어서 자동차보다도 빠른 속도이다.[51] 그래서 만약 조조군의 진영이 적벽에 집결되어 있었다면, 제대로 불길을 잡기도 전에 강한 동남풍을 타고 불이 순식간에 전군으로 번졌을 수 있다. 실제로 조조군 병력이 적벽에 모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당시 중국의 강남 지역이 개발이 덜 되어서 사방이 늪지와 밀림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가 기동하고 막대한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끼고 작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먼 바다에서의 해전과는 달리 강에서의 수전은 강가에 배치된 육군이 전투에 큰 도움이 된다. 강가에서 발사한 화살이나 다른 원거리 무기가 배에 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 중에 강가로 밀려나온 배들은 육군의 좋은 먹이감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수전에서 오군에게 밀리고 있던 조조군의 입장에서는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을 강가에 근접하게 배치하고 나무로 방어용 시설을 많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적벽에 화공이 성공할 요인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도, 인류의 오랜 전쟁사에서 화공선을 이용해 보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제대로 성공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점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는 배에서 내려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배를 더이상 조종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 화공선이 목표에 제대로 돌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시에 수비자의 입장에서도 화공선을 발견하면 미리 밀어내거나 파괴를 시도하고, 가능한 빨리 아군의 배들을 대피시키기 때문에 화공의 성공 확률이 낮은 것이다. 만약 적벽에서 오군의 화공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면, 화공선들이 강한 동남풍을 타고 직선으로 달려가서 제대로 목표로 돌진했고, 동시에 수전에 미숙한 조조군이 쇠사슬로 묶어 놓은 배들을 가지고 우왕좌왕하다가 제대로 피해를 입었어야 한다. 즉, 운칠기삼 식으로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어야 한다.

황개가 화계에 동원한 배가 겨우 10여 척뿐인 것도 화공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요인이 되곤 한다. 이 배들이 모두 성공했을 경우 배에 가득 채운 인화물질과 강한 바람의 도움을 고려하면 10여 척으로도 충분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조조군의 거대한 규모를 고려했을 때 수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감이 있다. 그래서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화공에 동원된 배들은 수십여 척이라는 기록도 존재하기는 하다. 다만 배에 불을 붙인 다음에는 선원들이 대피해야 하기 때문에 더이상 배를 조종할 수 없고, 따라서 화공선끼리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거리를 널찍널찍 띄워놔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화계에 가장 적절한 화공선의 숫자가 10여 척뿐일 수도 있다. 실제 연의에서의 적벽대전 묘사에 큰 영향을 준 파양호 대전에서 사용된 화공선의 규모는 고작 7척이며, 이 7척으로 주원장군은 진우량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물론 화약 등까지 활용 가능한 명대와 삼국 시대를 동급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는 화공선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화공선 7척을 고르게 퍼뜨릴 경우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불을 지를 수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조조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횃불이나 모닥불 등이 관리되지 못해 화재에 일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20만 대군이 먹고 자는 데에 사용되는 불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화공선의 전과에 의구심을 가지는 입장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의견 중에 대표적인 것은 주유전과 무제기를 조합한 결과이다. 화공으로 큰 성과를 거둔 것도 맞지만 실제로 결정적인 패주 요인은 전염병이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화계는 전염병으로 저하된 사기를 결정적으로 터뜨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52] 하지만 화공으로 인해 전세가 바뀌질 않았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부분이니 마냥 깎아내릴 수 없다.

4. 삼국지연의에서

4.1. 시작

조조군의 남하와 바로 항복해버린 유종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유비군은 간신히 신야에서부터 도망쳐서 당시 하구에 머물게 된다. 유비군의 참모 제갈량은 직접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장소, 우번, 육적 등의 오나라 투항파 문신들과 설전을 벌여 주장을 논박하였다.(이 설전에 관해선 제갈량 문서 참고.)

이후 손권 앞으로 간 제갈량이 설득을 계속하지만 손권은 결단을 못 내리고 '나라 안의 문제는 장소에게 물어보고[53] 나라 밖의 문제는 주유에게 물어보라'는 오국태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유를 호출한다. 노숙, 제갈량과 만난 주유는 조조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싸워도 승산이 없을 것이니 항복해야겠다는 말을 하지만, 제갈량은 그것도 현명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며 역사에 길이 남을 패드립을 남긴다.
조조가 업에 동작대를 올리면서 자기 아들인 조식에게 동작대부란 시를 짓게 했는데, 그 시에 강동의 두 미녀 대교 소교 자매를 동남쪽에 거느리고 아침 저녁으로 즐기고 싶다는 시구가 있었다. 그러니 둘을 조조의 첩으로 보내면 된다.

실제 동작대부에 "連二橋於東西兮(연이교어동서혜)"라는 문구가 있긴 했지만 여기에서 이교는 대교와 소교를 칭하는 것이 아닌, '두 다리'로 한자가 달랐다. 이 부분을 제갈량이 "攬二喬於東南兮(남이교어동남혜)"로 슬쩍 바꾼 것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대교와 소교의 남편 각각 손책과 주유의 부인이란 것이다.

물론, 제갈량은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두 사람을 자극하기 위해 시구를 살짝 바꿔서 읊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제안은 손권한테는 자기 형수를, 주유 입장에서는 자기 처도 모자라 처형까지 대놓고 조조에게 갖다바치란 말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고, 제갈량의 계획대로 손권과 주유는 제갈량이 읊어준 시를 듣자마자 화를 버럭 낸다. 어느 누가 자기 아내를 NTR 해간다면 좋아하겠냐만은 제갈량은 이교가 손책과 주유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사과하고, 열이 뻗힌 손권과 주유는 바로 조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손권은 칼로 책상을 반토막낸 뒤 부하들에게 전쟁을 반대하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꼴이 될 거라고 한다.[54][55]

이후 손권은 노숙,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물리칠 계책에 대해 논의한다. 조조군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대부분이 내륙지방 출신이기에 수군이 강한 손권군과는 반대로 수전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었다.

4.2. 모략전

적벽대전의 서전에 해당하는 조조와 주유의 모략전은 아주 흥미진진한 장면이다. 단순히 동오와 조위 사이의 치열한 두뇌전 뿐만 아니라, 제갈량의 재주를 경계하는 주유와 이로 인한 둘의 견제 및 암해도 일미. 그 와중에 노숙은 양자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느라 참 바쁘다.

일단 손권은 제갈량에게 설득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내심 불안해하였고 이를 간파한 제갈량은 이 사실을 주유에게 알린다. 확인 결과 제갈량의 추측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때부터 주유는 제갈량을 위험인물로 경계하며 제거하려 한다. 노숙이 말려서 일단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을 시켜 제갈량을 스카웃하려고 시도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형님께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셈"하고 역으로 스카웃 제안을 받는다.[56]

하지만 어쨌든 동맹 관계인지라 대놓고 제갈량을 살해할 수는 없는 노릇. 하여 주유는 관도대전 때 조조가 소수로 다수를 이긴 건 군량을 털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리고는 '소수의 병력을 지원하겠으니 조조가 군량을 쌓아둔 취철산을 공격하라' 라고 제갈량에게 퀘스트를 내준다. 물론 실제로는 조조의 손을 빌어서 제갈량을 제거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걱정되어 찾아온 노숙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는 어떠한 싸움에든 모두 능하니 문제없다. 주유처럼 수상전밖에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주유를 디스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주유는 길길이 날뛰며 자신이 직접 공격하겠다고 나선다. 그제서야 제갈량은 "조조가 평생 해온 짓이 군량 털기이니 그만큼 대비도 철저하게 했을 것이다. 가봤자 역관광이나 당한다." 라고 조언해서[57] 자연스럽게 없던 일로 만든다.

그리고 양측은 전초전을 벌이는데, 조조군은 허접한 수군 실력 때문에 패배하고 이에 조조는 수전에 능숙한 채모 장윤을 수군 도독으로 기용한다. 이에 주유는 채모와 장윤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을 미리 짐작하여 이간질의 계책을 써서 제거하려고 한다. 마침 조조 측에서 주유를 항복시키겠다고 장간이 직접 나선다. 하지만, 주유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장간은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쩔쩔맨다. 오히려 주유는 장간을 거꾸로 이용하여 장간에게 조조군의 수군 담당자인 채모 장윤에게 보내는 거짓 밀서를 가져가도록 상황을 꾸미고, 결국 주유에게 제대로 낚인 조조는 그들을 의심하여 처형대로 끌고 가서 목을 치게 된다.[58]

물론, 주유의 이 신묘한 계책도 당연히 천하가 인정하는 희대의 천재였던 제갈공명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이를 노숙에게 설명한 뒤, 주유에게는 내가 알아차렸다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노숙은 전부 일러바친다. 이에 주유는 핑계를 잡기 위하여 제갈량에게 '화살이 부족하니 열흘 내에 10만 발의 화살을 만들어 내라'고 퀘스트를 준다. 물론 장인들이나 필요한 재료들은 일부러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제갈량은 한술 더 떠서 사흘이면 된다고 하고, 주유는 옳다구나하며 군령장까지 적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갈량의 큰소리를 미심쩍게 생각한 주유는 노숙을 보내어 제갈량이 무슨 속셈인지 염탐하게 한다.

제갈량은 찾아온 노숙에게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책임지셈 하여 필요한 물자를 뜯어내면서 입단속을 시킨다.[59] 하지만 약속한 기일 바로 전날까지 장인을 동원하지도 않다가 그날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동오군에게 배를 빌려 짚을 실은 뒤 조조군 진영 근처로 갔다. 의심 많은 조조는 접근하려 하지 않고 대량의 화살을 밤새 쏘아댔으며, 짚더미에 꽂힌 화살을 회수하니 무려 10만 발이 넘었다고 하며 보고를 들은 주유는 기겁했다고 한다.[60][61]

화살 10만 발만 잃은 조조는 뭔가 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처형당한 채모의 사촌 동생인 채중 채화를 주유에게 거짓으로 투항시킨다. 채중과 채화는 채모가 조조에게 처형당해 분노했다면서 주유에게 믿음을 사는 듯 했으나 주유는 이미 그들이 첩자라는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채중과 채화가 투항하면서 일가족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편 조조를 어떻게 격파할지에 대해 주유와 제갈량의 의견은 화공으로 통일되었고[62] 때마침 황개도 주유를 찾아서 화계를 진언한다. 그러면서 보다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황개는 손견-손책-손권까지 손씨 3대를 섬겨온 자신이 나서서 고육계를 실행해 완벽히 속여야된다고 간청하고 주유도 받아 들인다. 그 후 군사회의에서 황개는 일부러 주유의 명에 딴지를 걸면서 태형을 맞고 스스로 중상을 입는다. 채중과 채화는 이를 그대로 조조에게 보고했고 조조는 제대로 속아 넘어간다. 물론 제갈량은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고육계라고 눈치를 깠는데, 그래도 주유에겐 모른 척 하며 오히려 장수를 매질한 것을 비난하는 척 했다.[63]

여기에 의문을 품은 조조는 다시 장간을 보내는데, 주유는 자신과 내통하던 채모와 장윤이 장간의 정보 누설 때문에 죽었다고 분노하는 척 하면서 장간을 붙잡아 한 암자에 가둬버린다. 여기서 장간은 방통을 만나는데 방통은 주유가 자신의 재능을 질투하여 암자에 가뒀다고 말하고, 조조에게 등용되고 싶다면서 장간과 함께 탈출하여 조조 진영으로 간다. 조조는 복룡과 함께 '봉추', 즉 새끼 봉황으로 이름 높은 방통이 자신에게 왔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방통은 북쪽 병사들의 배멀미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조조에게 연환계를 진언하여 배를 전부 쇠사슬로 묶게 해버린다. 정욱은 이 상황에 화공을 걱정하지만 조조는 풍향이 맞지 않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이 판단은 제법 합리적이었는데, 때는 겨울이라 북동풍이 불고 있어 상대가 화계를 들고 나와도 자기 쪽을 불태울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방통은 주유에게 불만을 가진 오나라 인사들을 회유해서 조조 편으로 만들어보겠다는 핑계를 대며 조조 진영을 빠져 나온다. 조조 진영을 빠져나오기 직전 연환계의 정체를 모두 눈치챈 서서에게 뒤를 잡힌다. 방통이 "이 책략은 우리 강동 81주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네."라고 말하자 "그럼 이 80만 장병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대화를 나눈다. 서서는 방통과의 친분도 있고 이전의 유비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 방통의 모략은 눈감아줄 생각이었지만 대신 화공을 피해서 도망칠 방도를 찾고 있었다. 이에 방통은 서량의 마등이 허도를 공격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도록 조언했다. 그래서 서서는 조조에게 '소문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제가 허도로 돌아가서 방비를 잘 하고 있겠습니다.'라는 핑계를 걸고 허도에 돌아갈 수 있었다.

오나라는 위를 공격할 모든 준비를 전부 마쳤지만 풍향이 맞지 않아서 화공을 시도할 수 없었다. 남쪽에 있었던 오군이 화공을 펼치려면 동남풍이 불어야 했는데 전쟁을 준비하던 때는 한겨울이어서 서북풍이 불고 있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람이 부니 자칫하면 오히려 오군이 역으로 화공을 당할 것이 분명했었다. 주유는 너무 고민한 나머지 한 차례 쓰러진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위나라의 대장기가 바람에 부러지는 걸 보고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는 신호다!"라고 좋아하다가 오나라 대장기도 바람에 부러져 주유의 뺨을 스치자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 쓰러진다. 상처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데도 식음을 전폐하며 일어나질 못하자 노숙이 제갈량에게 가서 하소연하니 제갈량이 주유를 찾아가 동남풍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주유는 '이놈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구나!'라며 자기 병명을 알았으니 처방전도 있을 거라 믿는다고 하기도 한다. 제갈량이 약이 있다며 술법으로 동남풍을 불러오겠다고 한다.

주유는 이를 믿지 못하나 제갈량은 기도를 하여 천문을 움직여 풍향을 바꾸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주유는 경비병까지 배치하며 제갈량이 남병산에 칠성단[64]을 만들어놓고 기도를 올리는 동안 지켜본다. 제갈량이 며칠간 기도를 마치자 정말 풍향이 바뀌어 동남풍이 불었다. 주유는 천문까지 바꾸는 제갈량의 능력에 경악하여 제갈량을 죽이려 하나 조운이 제갈량을 구출해 가면서 실패하고 만다. 심지어 이것마저도 제갈량이 미리 예측하고 유비한테 조운을 보내달라 요청했다고 묘사되었다.

여담으로 작중에서 '이 절기에 가끔씩 동남풍이 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면 아예 '추운 겨울의 서북풍이 이틀에서 사흘 정도 동남풍으로 역류한다는 사실을 공명은 알고 있었다' 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서 과연 제갈량이 동남풍을 요술같은 술법으로 일으켰냐는 논쟁이 존재하고, 심지어 일부 작품에서는 아예 제갈량의 속임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단 적벽대전 당시의 시점으로 보자면 제갈량이 진짜로 요술을 써서 동남풍을 불러왔고, 조조가 착각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그렇지 않으면 동오의 수많은 사람들이 현지 기후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는 건 둘째치고, 제갈량이 하는 일도 너무나 불확실한 도박이 된다.

동오의 수많은 인물들 중, 한 명이라도 풍향이 자연스럽게 변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제갈량의 사기극은 그대로 간파되는 것이고, 풍향 전환도 조조의 말처럼 해당 절기에서 가끔씩 우연히 생기는 수준이라면 원하는 타이밍에 동남풍이 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그저 전술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날씨의 예측만을 노리기엔 리스크가 너무나도 크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제갈량이 이 시기에 어느 정도는 가끔씩 동남풍이 불어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쯤 불어올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삼고초려 이전부터 초야에 묻혀 남양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을 때 계절의 날씨를 예측했던 경험이나 야생동물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름대로 자연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으로 동남풍이 불어올만한 정확한 시점을 미리 찾아서 예측했다는 정도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날씨를 예측할 때도 고작 물을 떠놓고 기도만 올리는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바람이 바뀌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65]

그렇담 왜 이걸 굳이 동남풍을 불러오는 술법인 척 꾸몄냐고 한다면, 동남풍이 불어온 것을 제갈량이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는 영리한 계책이자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후 "형주는 우리 동오의 차지이니 돌려달라!" 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오는 동오에게 제갈량은 "내가 술법을 써서 동남풍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정말로 적벽에서 화공이 성공했을 것 같습니까?" 라고 맞받아쳐서 이 부분을 이용해먹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4.3. 전투

전투 전날, 조조는 휘하 장졸들을 강가에 모아 놓고 연회를 벌였다. 연회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자 조조는 창 한 자루를 쥐고 단가행이라는 시를 지어 즉석에서 읆는다. 하지만 시를 듣던 사람 중 유복이 전쟁을 앞둔 시점인데 시구 하나가 불길하다는 말을 조조에게 했다가 조조의 노여움을 사 그 자리에서 조조의 창에 맞아 죽어버리고, 이로 인해 연회는 흐지부지 끝나 버린다.[66]

이튿날 주유의 오군은 진격을 개시한다. 첩자 노릇을 하던 채중은 감녕에게 오림으로 잡혀가서 목을 잘리고, 채화는 주유에게 끌려와서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군사들 앞에서 처형당한다.

파일:external/i1.read01.com/0CJ6Yy00.jpg 황개는 짚을 가득 실은 배를 싣고 조조군 진영으로 오는데, 깃발에는 '선봉황개'라고 써있고 양곡을 실어놨다는 배가 흘수선이 너무 높아 충돌 직전에 정욱에게 들키게 된다.[67] 형주 출신이라 그나마 수전에 능한 문빙이 저지하려고 나섰지만 일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서 화공에 당해버리고 사슬로 묶인 배들은 뗄 수가 없어서 서로 붙어 깔끔하게 타버렸다.

조조군은 그 가운데서 떼죽음을 당하고 만다. 조조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지만 오군과 유비군이 이를 추격한다. 적벽을 벗어나기 전에 오의 맹장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튄 조조는 복병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복병이 없는 줄 알고 껄껄 웃으면서 주유와 제갈량을 비웃지만[68] 그때마다 장비, 조운에게 차례차례 복병을 당해 군사들을 잃고 만다.

제갈량은 조조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며, 조조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 화용도에 관우를 배치한다. 그리고는 관우에게 일부러 연기를 피우라고 지시한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그 연기는 반대쪽으로 자기를 유인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라 생각하여 화용도로 올 것이라는 제갈량의 허허실실계다. 이런 중요한 곳에 관우를 배치한 것은 제갈량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 제갈량은 천문을 통해서 조조가 이 전쟁으로 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우를 보낸 것은 어차피 조조는 살 것이니, 관우에게 조조의 은혜를[69] 갚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관우가 명령을 어기고 조조를 살려주는 것을 빌미로, 유비군 내 서열 2위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란 해석도 있다.[70]

5. 연의에서 각색된 부분

국방TV 순삭밀톡. - 삼국지 하이라이트 '적벽대전', 소설보다 재미있는 팩트폭격!!
국방TV 순삭밀톡. - 나관중이 생략한 적벽대전보다 더 치열했던 '적벽, 그 후'
연의에서는 주원장 진우량이 싸운 파양호에서의 싸움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 파양호 대전 항목도 알차니 보면 얼마나 닮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의에서는 나관중의 문학적 재능에 의해 상당히 극적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적벽대전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벽대전은 아래서 읽을 수 있듯이 중요한 싸움이었다. 나관중의 각색은 워낙 중요한 싸움이니 그에 걸맞게 극적인 각색을 거쳤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아무튼 연의에서 각색된 부분은 앞에서 말한 동남풍은 말할 것도 없고 몇 가지 더 말한다면…
  • 채모 장윤이 수군 대도독, 부도독을 맡다가 조조에게 죽게 하도록 장간을 이용했다는 것은 허구. 주유와 장간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고 전쟁이 끝난 뒤에 생애 딱 한 번 만난 사이다. 더욱이 장간은 사실 당대의 유명한 거상이었다. 이중 스파이로 삽질을 거듭하는 채중 채화 역시 허구의 인물들이다.
  • 본래 역사에서 태사자는 적벽대전 이전에 풍토병으로 병사하지만 연의에서는 멀쩡히 살아서 조조를 추격하고, 훨씬 뒤인 합비 공방전에서 전사한다.
  • 조조가 패퇴 중 이리저리 복병에게 쳐맞는 묘사 역시 허구다. 실제론 형주 수비군들에게 나름 할 일을 다 제시한 뒤에 여유있게 허(許)로 철수한다. 그 뒤에 형주는 제대로 관광을 타지만… 그나마도 제갈량은 조조가 형주/남군 길에서 형주 쪽을 택하고 남이릉/북이릉 갈림길에서 북이릉으로 갈 테니 조운은 형주 길을, 장비는 북이릉 길을 막을 것을 명령하지만 조조는 남군 강릉으로 가기 위해 남이릉으로 이동하고, 조운은 남군 가는 길에[71], 장비는 남이릉 길에서 조조를 습격한다.

어찌 보면 삼국지 연의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좋은 부분이다. 이 사건 전에 사실상의 진 주인공 제갈량이 등장하고 서서히 제갈량의 활약이 쌓여간다. 오나라 군권 1인자인 주유를 철저히 농락하면서 손해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모든 이익을 다 취하는 점에서, 제갈량이 다른 인물들과는 격이 다른 넘사벽 캐릭터인지 보여준다.[72] 지금까지 거의 불패에 무적이던 조조가 크게 패배하며 이야기가 조조 1강 체제에서 조조, 유비, 손권이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하는 본격적인 삼파전이 시작된다. 게다가 제갈량, 방통, 주유라는 삼국지연의에서 탑 클래스로 꼽히는 모사들이 이중간첩, 연환계, 고육계, 10만 개 화살 얻기, 동남풍 등의 여러가지 계책들을 정교하게 계획해서 조조군이 여기에 완벽하게 박살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할 정도이다.
적벽대전의 구성도 거대한 적 한 명을 두 약한 동맹이 극적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만들기 좋은 구성이라 적벽대전만 다룬 작품도 많을 정도다.[73]

그전까진 강동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정도로만 나오던 오나라가 본격적으로 스토리에 개입하는 부분인지라 오나라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진 부분이다.

제갈량이 대폭 부각된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선 제갈량의 활약이 외교뿐이라고 까는 사람이 있지만 연의는 정사에서 간략하게 묘사된 부분을 소설적으로 묘사하고 흥미를 위해 과장된 부분이 있다.

우선 동오의 설전. 물론 작중 묘사된 것과 같은 설전은 없었겠지만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할 때 손권이 순순히 넘어갔을까? 손권의 마음을 잡고 혹시나 모를 항복론자들의 논리를 논파하기 위해 제갈량도 무던 애를 썼을 것이다. 최소한 손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전한 부분은 나와있지만…

그리고 작중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런 손유동맹이 속으론 다소 위태한 상황이었음을 예고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론 동맹파였던 주유가 악역이 된 건 아마 도독이었던 그가 더 위협적인 인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선 형주를 지키거나 빼앗는 게 이득이었기에 같은 편이라 해도 뒷날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74]

6. 여담

파일:적벽 중국.jpg
실제 적벽 (무적벽)
파일:적벽 중국 황강.jpg
우한 옆의 황강에도 동파적벽이란 명승이 있다. 송대에는 이곳이 적벽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황주였던 그곳으로 유배된 소동파 적벽부를 쓴 것에서 유래하였다. 기존 적벽은 무적벽, 이곳은 문적벽이라는 별명이 있다. 본래 장강 강변에 있었으나 수로가 바뀌어 작은 호수가 되어 있다.

그 명성 때문에 조선에서 ' 적벽가'라는 판소리로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조조는 장승을 보고 "장비도 끔찍한데, 그 사촌이냐!"하면서 덜덜 떠는 추태를 보였다. 원래 민담에서 조조가 추태보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재밌는 것이 적벽대전은 삼국지 연의 120화 중 50화 정도에 끝난다.[75] 즉, 절반도 안 된 부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보통 아동용 삼국지 각색물(보통 5권 정도 하는,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끝나는 책들.)들에선 4권, 즉 최후반의 빅 이벤트로 나온다.

7. 기타 창작물

삼국지 최고의 하이라이트이자 최고로 유명한 장면인 만큼 수많은 삼국지 관련 게임/영상물에서는 끊임없이 언급되고 활용된다. 특히 삼국을 대표하는 유비, 손권, 조조와 지혜의 대명사인 제갈량, 적벽의 공신인 주유, 장비, 관우, 조자룡 등 삼국지를 잘 몰라도 들어봤을 정도의 네임드급 인물이 대량으로 등장하는 만큼 어느 창작물에서나 적벽대전이 최고급 이벤트로 나온다.

대부분의 미디어에서는 연의 기준으로 나가는데 물론 정사 내용을 참고하는 작품들도 없진 않고, 아예 연의와 정사 둘 다 생까고 제3의 루트(?)를 타는 작품들도 많다.

7.1. 삼국전투기

제3의 루트를 타는 최훈 삼국전투기에서는 유비군과 제갈량 둘 다 전쟁 내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와 위 둘 사이에 끼여서 기회주의적인 면모만을 보인다.

7.2. 창천항로

창천항로에서는 계획 된 전쟁이 아닌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그려진다.[76]

오는 주유를 중심으로 한 무관들은 주전론을, 장소를 중심으로 한 문관들은 항복론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손권을 별 다른 말 없이 관망하는 상황이었다. 주유는 노숙을 시켜 유비와 접촉케 한다. 그렇게 형주에 온 노숙은 형주에서 쫓겨나 조조를 피해 달아나는 유비에게 수많은 민초가 따라붙는 모습을 보고 감명 받고 자의로서 손권과 유비의 동맹을 제의하게 된다. 유비가 천하삼분 천하삼배를 선언하고 한진을 넘어 도피에 성공한 뒤 제갈량과 함께 양주로 돌아온 노숙은 유비와 동맹을 맺기를 손권에게 제의하지만 항복파의 비웃음과 함께 장소에게 그 논리가 논파당한다. 허나 이때 손권에게 도착한 조조의 협밥이 담긴 서장이 도착하면서 손권은 유비와 손 잡고 조조에 대항하기로 결심한다.[77]

유비를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유종의 항복을 받고 형주의 문관들과 수군을 흡수한 조조는 장강을 타고 내려가 대해를 거슬러 황하를 통해 업으로 귀환하는 대유람을 실행한다. 대선단과 함께 장강을 따라 내려가던 조조군은 손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게 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감녕이 이끄는 오군의 기습을 받는다. 감녕이 직접 조조가 탄 배에 도선해 조조를 암살하려 하나 허저에 의해 저지당한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이뤄진 공격으로 인해 조조가 탄 배가 침몰하고 수천의 병사가 수몰 당하는 큰 타격을 받는다.

침몰한 배에서 허저가 필사적으로 조조와 같이 타고 있던 가후를 구해내었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순유와 조조의 문관들은 큰 슬픔에 빠진다. 허나 순유는 조조의 군사로서 감정을 추스리고 군대 수습해 오림에 진을 치고 오군과 대치한다. 대치하는 도중 주유는 조조군을 계속 도발하지만 조조군은 흔들리지 않는다. 가후는 허저와 빈사 상태에 빠진 조조를 인근 마을에 맡겨두고 오림의 진영으로 귀환해 조조가 죽었다면서 거짓말을 하고, 이 죽음을 이용해 오군을 흔들고 각지에서 조조의 위엄에 짓눌려 나서지 못하는 인재들을 불러일으키겠다는 계책을 세운다.

빈사 상태로 잠자고 있는 조조에게 초현실의 세계에서 접촉한 제갈량은 조조에 반하여 하나가 되고 싶다며 조조와 합체 퓨전하였고, 빈사 상태에 누워만 있던 조조가 깨어나 일어난다. 그러나 금세 조조에게서 떨쳐진 제갈량은 조조가 자신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에 상처 받는다. 이때 깨어난 조조는 다시 마을로 찾아온 가후와 허저와 함께 오림의 진영으로 귀환하고 때마침 적벽의 소식을 들은 서황, 이통, 하후연, 악진, 정욱, 장료가 도착하게 된다.

평소와 같이 조조군을 도발하던 오군 앞에 조조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계속된 대치와 매일 같은 도발 속에도 흔들림 없는 조조군의 진영에 초조함을 느끼던 오군과 화공을 계획하던 주유에게도 조조의 생환 소식이 닿게 된다. 갑작스레 등장한 조조 때문에 당황한 사이에 황개가 자진해 거짓으로 투항하여 조조군의 진영 안에서 스스로 도화선이 되기로 한다. 화공선을 이끌고 조조군 진영에 도착하여 조조를 면전에서 만나게 되지만 조조의 위엄에 화공선의 병사들이 굳어버렸고, 그렇게 주저하는 동안 조조가 황개의 책략을 눈치채고 체포 명령을 내리며 화공의 계획이 실패하려 한다. 그러나 조조에게 떨쳐져 상처 받고 조조에게 상처 입히고 싶다는 욕망에 가득찬 제갈량이 초현실적인 힘으로 굳어있던 화공선 병사들의 손에 있던 부싯돌에 불꽃을 일으켜 화공선에 불을 붙여 버린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오의 계획대로 실행된 화공과 함께 동서에서 오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정욱은 이 정도 기습엔 대비하고 있었다면서 오늘 밤 안으로 적군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전하지만 조조는 퇴각을 명령한다. "패도에 있어서 대패이나 그저 한번의 패배"일 뿐이라는 조조의 독백을 마지막으로 그 뒤의 자세한 전투의 모습과 전황에 대한 묘사는 함께 정사의 기록을 인용하며 적벽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대유람이 시작될 당시 가후가 조조 거병 이후 청주군, 여포군, 원소군, 뒤이어 유표 사후의 형주군까지 흡수하며 조조군의 규모는 거대해졌지만, 이들은 각기 다른 출신,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뒤 조조의 휘하로 흡수되었을 뿐이라 군 전체의 유대감이 희박하다는 것이 문제를 지적한다. 이에 조조가 제시한 해법이 대패를 통해서 결정적인 패배감을 공유 시킨다는 것.[78] 때문에 작품 내에서 조조는 불리하지 않은 전황에도 퇴각을 명령하고, 대패 하였으나 그저 한 번의 패배일 뿐이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조조 찬양 일대기인 창천항로다운 재해석이다.
적벽 이야기 마지막에 제갈량은 진영에서 탈출하는 조조를 죽이려고 하지만 조조는 작품 내에서 처음으로 제갈량을 똑바로 인지하면서 제갈량에게 사람다움을 더 묻히고 오라 일갈한다. 이후 삼국지 관련 창작물들 중에서 가장 파격적으로 재해석 되어 마치 신선이나 선인 같은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제갈량은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바뀌며 이후 작품 내에서 등장할 땐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7.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관련 이벤트가 시리즈마다 나오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삼국지 11에서는 적벽대전 이벤트가 안 나온다. 웃기는 건 삼국지 11 매뉴얼에서는 이벤트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에서 적벽대전이 언급되어 있었다.[79] 6 PK 이후로 전통이 된 전술시뮬레이션 모드에서도 관우의 죽음 부분과 함께 전부 재현된 전투.[80]

예를 들어 삼국지 10 PK의 전쟁사모드 적벽대전 시나리오에서는(조조군 기준 서술), 초반에 역병으로 인해 병력이 감소한 뒤 몇 턴 후에 감택이 조조에게 거짓항복을 하러 오는데, 이때 설전 이벤트 할래? 말래? 선택지가 나온다. 당연히 안 하면 나중에 황개가 조조군 아무 배로나 접근하면 화공 때문에 개발살이 나므로 조조로 이기고 싶으면 해야 한다. 물론 신들린 컨트롤로 황개를 접근하기 전에 죽이면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지만…

명령을 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물살에 쓸려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지원군들과 오군의 배가 제일 좋은 배(투함)들이라 설전 전에 도발을 이용한 유인으로 죽이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근데 유인을 가지고 있는 게 조조 혼자인 데다가 2턴 정도면 풀리기 때문에 엄청난 화력 집중이 필요하고, 조종 가능한 궁병부대가 채모 혼자이므로 포기하는 게 좋다. 만약에 이 설전을 이기면 오히려 황개가 조조군 배로 접근했을 때 조조군이 역화공을 걸어서 적군들을 다 개발살낼 수 있다. 그럼 승리가 거진 확정된다. 반대로 설전을 졌을 경우에는 이미 끝났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조조로 적벽대전을 클리어한 후에는 허저로 개인 플레이가 가능한데, 이 경우에는 허저로 조조와 설전을 떠서 이겨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온다. 물론 다른 군대를 선택시에는 그냥 원작대로 플레이 하면 된다. 져서 도망가다가 화용도에서 관우를 만나는 경우도 있으며, 이때 조조가 불리한 상황에서 관우와의 설전이 시작된다. 패가 나빠서 설전에서 졌을 경우 조조로 관우와 일기토를 떠서 이겨야 하는 상황이 나온다. 둘 다 지면 당연히 끔살.

삼국지 12에선 수전이 없어서 적벽대전을 실제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이벤트로 진행된다. 물론 스토리 전개는 연의를 따르며 내정 좀 하다보면 각종 이벤트가 알아서 진행되면서 조조가 그냥 물러가고 유비가 강릉을 낼름 먹어치운다. 동영상으로 연의 이벤트를 나름대로 충실히 재현하지만 실제로 인게임으로 진행할 수 없는 것은 마이너스 포인트. 조조군으로 하면 고육지책 파트에서 선택지가 생긴다. 이때 그냥 스킵했거나 투항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아는대로 황개의 불쇼에 조조군이 정신을 못차리면서 퇴각하는거고, 스킵하지 않고 겉으로만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대책을 세우는 선택지를 선택하면 적벽에서 우위를 점한 뒤 물러나는 식으로 이벤트가 종료된다. 당연히 불쇼를 당하면 명성이나 병력 등 물자가 감소되고 앞에서 서술한대로 강릉까지 뜯기니 조조군으로 하면 그냥 곱게 고육지책을 막아주는 게 낫다.

삼국지 13에서는 영걸전 스테이지와 본편 시나리오로 등장하며 수전도 추가되었다. 물론 이벤트도 존재.

삼국지 14에서는 PK 추가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이벤트로는 형주분열(양양이 조조 세력이 되며 강릉이 공백지로, 강하가 유비 세력이 된다)손오동맹[81], 유비와 손상향의 결혼[82], 주유의 이간책, 연환계, 적벽염상 등의 이벤트가 진행되고 이후에 연의 시나리오대로 강릉공방전과 유비의 형남 4군 이벤트들을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시킬 수 있다. 특이하게도 이전 시리즈와 달리 이벤트에서 적벽 전투의 공로는 오나라 장수들과 총사령관 주유의 공로로 묘사되며 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10만 화살, 동남풍 이벤트는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남풍의 경우엔 바람의 방향을 노숙이 걱정하자 주유가 이 계절에는 잠시 동남풍이 부는 때가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노숙을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최신 시리즈에서 정사의 비중이 예전보다 조금이나마 높아졌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후 형주쟁탈전은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간다. PK에선 전기제패 시나리오로도 존재하는데 이때는 제갈량의 화살 이벤트가 재현되는 등 연의의 재현도가 좀 더 높다.

7.4. 삼국지톡

시즌 7에서 다뤄지며 본 시즌의 부제이기도 하다.

연의와 정사를 섞어 착실히 빌드업을 하다가, 마침내 대망의 64화에서 손권군이 조조군에 화공을 가하여 황개의 배가 조조 진영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조군이 화공으로 궤멸해 조조가 쫓기는 장면까지 모든 컷을 단 하나의 그림처럼 롱테이크로 이어서 보여준다. 그 덕에 "컷툰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조조군이 느끼는 공포를 생생히 표현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팬들에게서 큰 비판을 받았던 이전 시즌인 관도대전[83]보다 나아졌다는 평가 역시 많다.

무적핑크 작가가 SNS를 통해 푼 에피소드 뒷이야기에 의하면, 가로로 넘겨보는 컷툰포맷과 두루마리 그림을 접목해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형식은 원래 후에 연재될 이릉대전 에피소드에서 쓰일 계획이었으나 제일 먼저 적벽대전에 접목해 보았다고. 유비에게 배달된 폭탄이 조조에게 배달되었다

7.5. 영걸전 시리즈

7.5.1. 삼국지 영걸전

짤막하게 이벤트 씬 한두 장면으로 처리되고, 전투가 없다. 아마도 수상전을 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7.5.2. 삼국지 공명전

주유 제갈량을 처치하려고 보낸 군사들로부터 도주하는 전투와 패주하는 조조군을 발라먹는 전투가 있다. 일방적인 추격전으로, 조조군이 모두 정상이 아니다.

이벤트 영상으로 황개가 불을 당겨 조조군의 함대를 불태우는 장면이 적벽 전투 I에서 등장한다.

7.5.3. 삼국지 조조전

보기 드물게 아군 부대 수가 적보다 많은 전투다.[84] 뭐 그래봤자 1부대 차이에다 이건 컨트롤이 불가능한 아군 잡궁병과 잡보병을 포함한 숫자다.[85] 게다가 아군 부대들은 흩어져 있어서 각개격파당하기 쉬우므로 수적 의미가 거의 없다.[86]

이때 곽가가 살아있으면 주유의 화계를 간파하나 그렇지 않으면 물 위에서 보정을 받는 손권의 수군을 상대하느라 애먹게 된다. 그래도 불탄 배들이 오히려 적당한 장애물이 되어주기 때문에 의외로 상대하기 쉬운 구석도 있다. 하지만 이건 조조가 원체 능력이 좋고 패기를 써서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데다 이 덕에 레벨이 높아서 그런 거지 조조와 같이 있는 정욱은 함부로 나서다간 끔살당하기 쉽다. 조조와 정욱 외에 한명이 더 편성되는 데 이 한명을 누구를 쓰느냐도 은근히 중요한 면, 책사나 풍수사를 쓰면 뒤로 물려야 하고 근접계로 가면 보병을 넣어주는 편이 좋다. 궁수는 책사, 풍수사와 동일. 해상전이고 적의 수가 많고 해적의 책략[87]/상성이나 주유/육손의 책략 및 허보 등이 아픈 등의 이유로 해전에서는 조조전 전체의 전투들과 비교해 볼 때 난이도가 상당하다. 다만 육지에 파견된 병사는 능력이 좋을지 몰라도 우리도 비슷하게 맞설 수 있는 관계로 책사 여몽과 상당한 대미지를 주는 감녕(특히 바다)과 능통 정도만 조심해주면 된다. 해적들은 육지로 올라오면 별볼일 없기 때문이다.

화계를 간파하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혹은 간파했어도 아군 피해가 누적되면 화용도를 통해 도망치는 전투가 구현되는데 조조전에서는 다소 어려운 전투로 나온다. 주인공에 따라 입장이 뒤바뀌기 때문. 대신 전투에서 상당히 많은 보물을 얻을 수 있는데 황개를 잡으면 청낭서, 한당을 잡으면 용린갑옷, 주유를 격퇴시키면 태평요술서를 얻으며, 항전을 택하고 적 전멸에 성공했을 경우 쌍편을 얻는다. 적 전멸로 승리할 경우 적벽 탈출전을 진행하지 않는다.

적벽 탈출전은 사용 가능한 아군 무장이 조조, 장료, 정욱, 허저, 서황 5명뿐인데다 적은 초반에 나오는 여몽의 추격대를 제외하더라도 2부대[88]의 매복대가 있어서 난이도가 꽤 높다. 무엇보다 풍수사를 못 써서 조조와 정욱의 소보급이나 회복 도구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데, 전위를 죽이고 얻는 봉황깃옷이나 적벽에서 황개를 잡고 얻는 청낭서를 쓰면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사실 모드에서는 동남풍이 그냥 기후상으로 나온 것이었지만, 가상 모드의 엔딩에서는, 누군가로 인해 동남풍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사실모드에서는 적벽 전투 2, 가상모드에서는 적벽 전투 3이라는 또다른 적벽 전투가 있는데, 기존 적벽 전투와의 차이점이라면 조조군이 남쪽에서 상륙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7.6.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도 빠짐 없이 등장하는데 특히 진삼국무쌍 4에서의 조조의 대사가 하나하나 큰 웃음을 주어서 명대사로 꼽히고 있다.

진삼국무쌍 2에서는 위나라 시나리오로 할 경우 제갈량의 기도소를 습격하여 화계를 저지하는게 목표인데, 기도소로 쳐들어갈때 조작 캐릭별로 대사가 하나하나 준비되어있어서, 프리모드 내지 2인 플레이라면 오나라나 촉나라쪽 인재들로 제갈량 각오해라!!!! 를 외치며 쳐들어오는 배신극 스러운 장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플레이어 캐릭이 제갈량 본인이라면 그냥 "각오하십시오…" 로 끝.

진삼국무쌍 5에서는 수영 시스템의 추가로 적을 배에서 날려 물로 떨어뜨리거나 직접 물로 뛰어들 수 있다. 문제는 배에서 뛰어내리면 다시 올라갈수 있는 계단이 꽤 멀어서 한참 수영해야 된다. 그리고 이전까진 움직일 수 없었던 배가 이번 작에선 징을 울리면 실시간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배를 육지에서 떼어놔 선상을 방해하는 등의 행동이 가능… 하지만 적벽전 맵이 바쁘게 이동해야 하는 맵이라 잘 쓰이지는 않는다. 조조군 시나리오로 할 때 방통을 없애거나 제단을 파괴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클리어가 수월해진다. 손권군 시나리오의 경우는 제갈량의 기도를 방해하는 적을 처단하고, 황개를 화공선까지 무사히 인도하면 화계가 벌어지고 적군 사기가 대폭 하락하므로 쉬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번외로 여포군 시나리오가 존재하는데, 조조vs손권 싸움에 끼어들어 깽판을 치는 스테이지. 황개를 잡거나 제갈량을 잡거나 하는 식으로 화계를 방해할 수 있고, 그냥 방치해뒀다가 다 잡을 수도 있다. 특기할 점으로 조조를 잡으면 전위가 격분하고, 손권을 잡으면 주유가 격분하는데, 조조와 손권을 잡고 나서 주유와 전위가 다 살아 있다면 조조군과 손권군이 연합하여 공격해온다. 킬수를 왕창 늘리고 싶다면 이쪽이 나을 것이다.

진삼국무쌍 6에서는 조조군일 경우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연환계, 동남풍, 화계 저지가 전부 불가능하다. 허저가 암만 무쌍펼쳐봤자 무조건 화계이벤트가 일어나고 전 부대가 속속들이 나가떨어지니 조조 탈출에만 신경쓰자. 후편은 적벽탈출전. 손권군은 주유로 본진과 제단을 노리는 조조군을 막다보면 화계이벤트가 일어나고 황개로 플레이무장이 바뀐다. 이후는 학살타임. 유비군은 조운으로 공작선의 연노에 탑승해서 배에 올라타는 조조군 장수들을 격파하면 된다. 후편은 관우로 조조추격. 여담으로 연합군의 적벽 전투 테마곡인 'thousand suns'가 인기가 좋다. 팬들로부터 역대 최고의 적벽 전투 ost로 꼽힐 정도로 고평가를 받았으며, 인기에 힘입어 7편에서 편곡되어 조조군 적벽 전투 if루트의 테마로서 다시 한번 쓰였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정사와 IF로 분기가 나뉜다. 다른 세력에 비해 분기가 이른 편.[89]
진삼국무쌍 7 분기 전투
여포
번성 전투 적벽 전투 합비 전투 허창 전투 정도 전투

위군은 사실 모드면 6편처럼 대패하고 도망치는게 승리 조건이 되지만, 곽가가 살아있는 IF면 오히려 역관광하는 시나리오.

IF에서는 허저가 바람, 즉 동남풍이 불길하다는 말을 곽가가 찍어 화계를 확실시하며 발빠르게 움직이라고 지시. 일단 손권군 선봉을 몰아내면 서서가 따라오라는데, 따라가면 아군으로 위장해있던 방통이 계략이 들켜 덤벼온다. 방통을 몰아내면 곽가가 황개와 한당의 화계지점 통로를 막아 화계를 약화시킨다. 두 명을 몰아내면 이번엔 채모가 적이 되어 덤벼오는데, 쓰러트리면 다시 아군이 되어 배를 내준다. 배를 타고 손권군 진영으로 쳐들어가 분탕치면, 다른 아군들도 속속들이 배 타고 손권군 진영을 공격한다.

오나라 시나리오는 화공준비를 위해 우선 조조군 예봉을 몰아낸 뒤, 제갈량을 엄호해 책략을 성공시키는 시나리오다. 촉군 시나리오는 유비, 제갈량, 조운이 손상향과 노숙의 엄호를 받아 동남풍을 일으키고[90], 연환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조군 내부에 잠입한 방통 증원을 위해 조조군 선단에 진입해 책략을 마무리하는 것. 여기서 IF조건을 만족시킨 상황[91]이라면 서서를 설득시켜 전장을 이탈하게 한 뒤 클리어 후 다시 유비에게 돌아오게 된다.

진삼국무쌍 7 엠파이어스에서는 플레이어가 조조/손권/유비 세력에 속해 있을 경우 발생하는 이벤트 전투인데 발생에 필요한 무장은 손권 세력에 황개, 유비 세력에 제갈량 뿐이고 주유가 아무 상관이 없다(...). 연합군 세력으로 참가하여 동남풍 발생에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이 트로피 도전과제이기도 하다. 합비 한 지역을 두고 다투는 싸움이라 누가 이기든 상대 세력이 멸망하지는 않는 이벤트 전투인데, 문제는 한 시나리오에서 한쪽 세력으로만 발생한다는 제한은 없기 때문에 손권군으로 적벽에서 승리해서 합비를 지킨 후 배반해서 조조 세력에 들어가면 조조 세력 입장으로 제 2차 적벽대전이 발생해버리기도 한다.

진삼국무쌍 8에서는 아예 적벽대전을 위한 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투는 각각 적벽 전초전, 적벽 전투, 적벽 추격의 3개의 메인 임무로 나뉘어서 진행되며 적벽 전투와 적벽 추격의 경우 서브 임무들도 푸짐하게 준비되어있다. 본작의 관도 전투가 메인 임무 1개에 서브 임무 8개 정도[92]로만 구성된 것과 비교하면 제대로 푸시를 받은 것. 전초전의 경우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명장면들인 제갈량의 화살 10만개 탈취, 주유의 장간 살해 등을 구현해냈다.

다만 역대급으로 밀어준 것과는 별개로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거의 모든 전투는 오로지 육지에서 행해지며[93] 화공은 이벤트로만 등장한다. 전작들처럼 불타고 있는 조조군 선박 위에서의 전투는 나오지 않는다. 시리즈상 적벽 전투의 아이덴티티라고 볼수 있었던 화공 속 전투는 전혀 체험할 수 없으며 거의 모든 전투는 불타지 않은 평화로운 초원 위에서 펼쳐진다(...). 막상 적벽 직전의 오림 전투나 직후의 유수구 전투는 수상 전투를 구현해 둔걸 보면 수상 전투를 구현할 수 없었던게 아니라 rpg화된 본작 특유의 시나리오 진행 방식에 맞추느라 수상 전투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94]

게다가 적벽 전투의 임무들 중 연합군 선착장 부근에서 일어나는 전투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선착장은 군데군데 뚫려서 물에 빠지기 쉬우며 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줄 난간 따윈 없다. 물 속에 빠져도 바로 빠져나올 수 있는 플레이어에겐 문제될게 없는데 본작의 멍청한 AI가 꽤나 발목을 잡는다(...). 적 AI는 물 속에 빠져도 바로 나올 생각을 안하고 벽에 붙어서 엉뚱한 곳을 보며 헤엄만 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물속에 빠진 적을 잡을 방법은 딜량이 약한 화살 공격 뿐이다. 잠깐 물어빠진 적들을 등지고 딴 곳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위치에 워프되어 있긴 한데 이 경우 8편 특유의 이상한 시스템 탓에 적의 피가 다시 풀피로 되돌아 와있다(...). 이 때문에 적장을 때릴 때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콤보를 넣어야한다. 하지만 선착장에는 수많은 아군들도 배치돼있고 아군 장수나 유격대장이 적장을 물 속으로 날려버리는 일도 잦다. 적이 물에 빠지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면 모를까 숙련된 유저들에게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잦게 일어나기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빡침을 유발했다. 선착장에서 진행하는 임무는 여러개지만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건 연합군 메인 임무인 조조 격파. 메인 임무라서 생략 할수도 없는데 하필 조조가 배를 타고 도착하는 위치는 가장 물에 빠지기 쉬운 선착장 한복판이며 조조를 적벽 진지 문 앞까지 데리고 오면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조조를 물에 떨군다. 심지어는 조조 AI가 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이동 중에 허무하게 물에 빠지기도 한다. 적벽 전투 연합군 시나리오는 대부분의 오, 촉 무장들이 스토리상 거쳐가야 하는 임무였기 때문에 더더욱 플레이어를 불편하게 한다. 편하게 조조를 잡고 싶다면 조조가 도착할 곳에 미리 항아리들을 배치한 뒤 폭사시키거나 오림에서 배가 출항하기 직전에 빠르게 조조에게 접근해야한다.

시나리오 구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데 조조군 시나리오의 경우 적벽 전투의 총대장이 뜬금없게도 클론 무장인 손광이며 추격전의 경우 오나라 무장 4명을 잡는게 메인 임무다. 연의 혹은 정사의 각종 일화들을 집어넣기 편한 8편의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온갖 창작된 이벤트들이 실제 일화들을 밀어내고 서브 임무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진삼국무쌍 영걸전에서는 판타지인 본작 특성상 여하의 오행의 힘을 이용하여 큰 파도를 일으켜 위군의 배도 묶게 하고 동남풍도 마법으로 불러온다. 한편으로 주유랑 제갈량이 짜고 따로 가짜 기도 쇼를 해서 적의 사기를 떨어트린다는 식으로 나온다.여러 번의 전투로 나누어져서 진행해야 하는 스토리.

7.7. 태조 왕건

태조 왕건에서 삼국지연의를 차용한 부분이 많은데, 특히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금성(나주)을 공략하는 금성전투에서 이 적벽대전 부분도 상당수가 차용되었다. 왕건의 책사인 태평이 동남풍을 부르기 위해 제사를 지내자 동남풍이 분다거나, 패전 후 견훤이 퇴각하면서 자기라면 갈대밭에 매복군을 두겠다고 하며, 거기까지는 왕건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자 곧이어 신숭겸이 이끄는 매복군을 만나 고생하는 것은 판박이 수준이다. 이에 대해 KBS 측에서는 실제 나주 영산강 일대에 동남풍이 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지적이 되었던 부분은 삼국지를 과도하게 차용한 것이지 실제로 동남풍이 부느냐가 아니었다.

이것 이외에도 견훤의 아들 금강이 전투 중 화살촉에 박힌 눈알을 먹는 장면도 삼국지빠였던 이환경 작가의 삼국지 패러디로 유명한 장면.

7.8. RPG 게임 적벽대전

삼국지 무장쟁패 폭소피구로 유명한 대만의 팬더에서 적벽대전이란 RPG 게임을 발매하기도 했다. RPG게임으로서는 독특하게 주인공이 3명이었으며, 유비, 조조, 손견 3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대신 게임의 전체적인 길이는 조금 짧다. 무장들이 무장쟁패의 그래픽 그대로 도트화되어 등장하는 것도 특징. 제목은 적벽대전이지만 시나리오는 황건난 때부터 시작한다. 최종전은 역시나 적벽대전으로 마무리. 성내 주민들이나 영채 내의 병사들 같은 NPC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며 약간의 삼국지 배경지식도 얻을 수 있다.

실제 게임 플레이 영상 (유비) https://www.youtube.com/watch?v=7A6FFgIG5GQ

7.9. 천지를 먹다

패미컴용 RPG 천지를 먹다 2와 유명한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천지를 먹다 II 에서 모두 적벽대전이 등장한다.

패미컴용 천지를 먹다 2에서는 시나리오의 중요한 이벤트로 등장하며 화살 조달, 연환계, 동남풍 기원 등 나름 연의의 요소들을 많이 구현했다. 다만 화살 100만 개는[95] 양양성의 채모를 물리치고 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으며, 동남풍은 제갈량이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일본에 가서 오로치를 없애고 히미코에게 비법서를 받아온다. 전투시 비법서를 사용하면 동남풍이 불고 주유의 화계와 100만개의 화살이 날아와 조조군은 거의 전멸하고, 패주하던 조조가 조운, 장비를 간신히 따돌리고 마지막에 화용도에서 관우를 만나는 장면까지 구현되어 있다. 적벽대전 후 필드 배경음악이 바뀌며 후반부로 넘어간다.

액션게임 천지를 먹다 II는 부제가 아예 적벽대전이다. 다만 적벽대전은 후반 7~9스테이지 정도에 불과하며 7스테이지는 보스로 장료, 8스테이지는 서황, 마지막 화용도에서 여포, 조조가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7.10. 영화 적벽대전

영화로는 적벽대전이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7.11. 명탐정 코난

명탐정 코난의 애니메이션 558~561화의 에피소드인 사망의 저택, 붉은 벽 에피소드에서 붉은 벽이라는 의미의 赤い壁에서 의미가 없는 글자인 い를 제외하면 적벽대전이 일어난 장소인 적벽(赤壁)을 가리키는 글자가 된다.

실제로 명탐정 코난 내에서의 붉은 벽은 피해자가 만들어낸 다잉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모로후시 타카아키 경부가 제갈량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중의적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 3부작 에피소드에서 사용된 부제 또한, 삼국지와 관련된 고사이다. 삼고의 예, 장중의 물건, 죽은 공명[96], 공성의 계.[97]

7.12. 화봉요원

화봉요원에선 특이하게도 오군의 모든 계략이 이미 조조에게 들통난 상황.

가후가 이미 계략을 다 꿰뚫어 본 상황이기에 오군이 오히려 궁지에 몰려 고생하는 전개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의가 이중삼중으로 첩보전을 벌이며 밀약했음이 밝혀지면서 전개는 반전되고, 결국 조조군 함대는 본래 역사대로 주유에게 박살난다.

다른 연의와 다르게 배를 사슬로 고정 후 판자로 연결시킨 것은 기병들과 물자를 원활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거대한 다리로 묘사 되었다. 조조군의 주요 병력들은 기병 위주이기 때문에 보병을 도강만 지킬 수 있다면 바로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군은 이 거대한 다리를 제거하기 위해 화공을 준비한 것.

적벽에서 황개, 장흠 등이 화공을 시도했지만 이미 대비해놔서 실패했는데, 장강 하류 쪽 해혼 부근에서 주유의 본 함대가 나타났다가 퇴각하는 척 하더니 여범이 만들어놓은 후방의 보급선들을 이용해 가후가 매복한 조조군의 후방에 있는 숲으로 전부 태웠다.오군들은 지형 특성상 수영을 매우 잘한다는 설정까지 붙어서 배가 침몰을해도 익사하지 않고 위군들 눈을 피해 잠수수영을 해서 조조군의 후방으로 재집결을해서 역습을 가했다, 이 부분은 조조군의 책사들도 계산을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남동풍은 강동의 전문가들조차 바람의 방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장담했는데, 이 분야에서 정점에 있었전 좌자는 11년에 한번씩 일어나는 이상기후 때문에 남동풍이 분다는 이미 계산을 한 상태였다. 기존의 연의에선 제갈량이 기도를 통해서 바람을 바꿨지만 원래 도술사 이미지를 가지고 있엇던 좌자가 이 사실을 미리 알려줬다는 것으로 각색.

심지어 화용도를 통해 달아나야 했을 조조는 아예 제갈량과 관우에게 사로잡히기까지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사마의와 제갈량은 여기서 조조가 죽으면 오나라가 너무 급속히 커진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놔준다. 순식간에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름으로 조조를 놔주게 되어 의리의 화신격이 된 관우의 투덜거림은 덤. 이때 동오에서 일어난 역병에 감염된 조조가 좌자의 암살기도 때문에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서 이때부터 심한 두통을 앓게된다.

덤으로 대교와 소교를 조조가 노린다는 이야기를 오나라측에서 헛소문을 퍼트렸는데, 조조의 가신들은 이게 헛소문인 것을 알지만 너무 그럴싸해서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조조가 등장할 때보면 주변에 여자들이 꼭 있긴하다.

7.13. 레전드히어로 삼국전

47화 제목. 극중에서 적벽무술대회라는 무술대회에서 조조 사마의신화가 시작된 장소라는 점을 이용, 카이저 영웅패의 완성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영웅심을 흡수하고자 대회장을 습격한다.

초안은 무술대회가 아닌 흉악범들이 수용된 절벽 끝의 감옥이었고, 조조가 '쓰레기를 없애 나의 정의를 실현한다'면서 흉악범들의 영웅심을 흡수한다는 전개였으나, 촬영지 섭외 문제 및 관람 연령가 문제가 겹치면서 무산되고 현재의 무술대회가 되었다.

7.14. 일본의 삼국지 매거진

일명 '조조와 곽가의 적벽 전투 반성회'

적벽 전투 후 조조가 그 유명한 곽가가 살았다면 안 망했을 텐데 탄식을 하자 곽가 유령이 나타나 자기 있었어도 별 다른 수 없었을 거라고 갈구는 내용. 뭐 실컷 갈군 뒤 '한 번 졌다고 징징대는 것도 당신답지 않으니, 괜히 죽은 나 들먹여서 살아있는 사람들 물 먹이지 마라'고 조언해준 곽가 덕분에, 오히려 이 패배를 거름삼아 훗날 동관과 한중에서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는 훈훈한 엔딩(?)으로 끝나는 물건. 내용을 살펴보면...
  • 첫 번째 반성 - 황개의 고육계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조조: 저런 빤히 보이는 수작에 당한 것이 실수다. 어째서 내가 이런 계책에 넘어간 것일까.

곽가: 넘어갔다기보다는 넘어가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병력은 압도적이지만 병참은 한계 상태고, 중원으로부터의 먼 거리를 강행군 한 데다 익숙하지도 않은 수군 흉내까지 내다보니 병사들의 체력은 바닥나 있었죠. 그렇게 약해진 병사들한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토병까지 닥쳐 왔고. 게다가 남방이라고 해도 대륙의 추위는 만만치 않은데, 월동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아군의 철퇴는 이미 기정사실, 시간의 문제나 다름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그런 시점에서의 투항이라니, 넘어가지 않는 게 힘들죠. 솔직히 말해, 내가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언해도 말귀를 알아 들을 정신상태였나요?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간언했던 것 같은데요.

조조:......
  • 두 번째 반성 - 오림으로부터 재빨리 철퇴했더라면.
조조: 그렇다면, 차라리 진작 철수하기로 결단을 내렸더라면 병력 피해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주유나 손권 놈들의 명성을 높이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곽가: 아, 그거 무리.

조조: 무리라니.

곽가: 적 코앞에까지 와서 철퇴라면 수군은 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능숙하게 물살을 거슬러 철퇴전 할 수 있는 수준의 수군이 아닌 것은 육구 전초전에서 이미 드러났고. 결국 적에게 배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다 불사른 뒤에야 철퇴했을 테니, 결과는 적벽 전투와 다를 바 없어요. 불을 지른 게 우리 쪽이란 것만 다르지.

조조: 결국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건가.

곽가: 뭐 그런 셈이죠. 게다가 주유나 손권 쪽도, 어차피 '무적의 조조군'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은 다를 바 없으니 결국 똑같은 결과였을 겁니다.
  • 세 번째 반성 - 손권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나.
조조: 그럼... 손권에게 '사냥' 따위 도발을 던진 게 잘못이었나. 어떻게든 손을 잡고 유비를 고립시키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곽가: 대장, 천하통일은 포기했어요?

조조: 그럴 리가.

곽가: 어쨌든 황제를 끼고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하고 있는 입장인데, 북방의 지배를 꺼리는 남방의 호족과 백성들을 회유하려면 결국 강동 전역을 재패해 안정 시키는 것은 필수불가결. 그럼 결국 머지않아 또다시 남정을 반복하게 될 텐데, 그건 문제의 연장일 뿐이잖아요. 솔직히 대장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같은 문제를 그렇게 질질 끌어서 좋을 일은 없지요.
  • 네 번째 반성 - 유비를 쫓아낸 후 형주 지배를 안정시킨다.
조조: 생각해 보니, 그렇게 서둘러 손권, 유비와 결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지. 강릉을 점령한 후 형주를 안정시키고, 차분히 녀석들을 상대했으면 좋았을 텐데.

곽가: 뭐, 이상론이지만요.

조조: 무슨 뜻이지.

곽가: 강하에 빤히 위험을 남겨두고 남정이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중원으로 부터 끌고 온 병력을 형주에 세월아 네월아 주둔시키면 그 부담에 짓눌린 형주 정세는 악화될 테고. 그렇다고 병력을 도로 빼가면 유비가 다시 기어 나오는 것을 막기 힘들고.

조조: 단기 결전은 피할 수 없었다는 건가...

곽가: 군사는 신속을 중시한다는 말은 항상 진리인 거죠.
  • 다섯 번째 반성 - 형주의 항복을 받아들인 후, 유비를 쫓지 않고 병력을 보존.
곽가: 말할 가치도 없네요.

조조: 뭐,그렇지.

곽가: 그 시점에서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다면 강릉을 빼앗겼을 테고, 형주 남부 전체가 놈에게 넘어갔을 겁니다. 하나도 좋을 것이 없죠. 솔직히 그때 대장의 결단과 추격전은 굉장히 훌륭했어요.

조조: 하하, 그런가?

곽가: 뭐 그 뒤에 거나하게 말아 드셨지만.

조조:......
  • 여섯 번째 반성 - 형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 서주로부터 침공.
조조: 애시당초 형주로부터 남하한 게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곽가: 이제는 아예 전략 자체를 걸고 넘어지는군요. 확실히 서주에서부터 남하해 단숨에 오군 일대를 공격하면 '손권'은 많이 동요했겠지요.

조조: 그렇지?

곽가: 하지만 유표 세력이 남아있고 그 객장인 유비는 항상 대장의 틈을 찔러 허도를 공격할 생각뿐이었습니다. 대장이 서주에서 남하하면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가 되지요. 아니 애시당초, 형주를 굴복시켜 수군의 인재나 노하우, 거기에 광범위한 남방 정보와 자료 등을 확보하지 않고서 무슨 수로 장강을 도하하고 남방을 억제하겠다는 건가요?

조조: ......
  • 일곱 번째 반성 - 형주를 내버려 둔다.
조조: 솔직히, 내가 공격하지 않아도 그해 유표는 죽어 버렸으니.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 유종과 유비가 싸우고 내전에 돌입한 후에 남하하는 게 좋지 않았을...

곽가: 지금 그 시나리오, 유종이 시원스럽게 항복하고 유비 추격에 성공한 원래의 전개보다 편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조조: ......

곽가: 형주가 내분으로 뿔뿔이 흩어질 경우 유종 하나의 항복을 받는다고 형주 전체가 넘어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 능구렁이 같은 유비가 감쪽같이 형주를 삼켜 버릴 가능성이 높은데 그건 최악의 전개죠. 애시당초 유표의 죽음이 상정외였으니 그걸 전제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고요.

결론적으로 조조가 그 타이밍에 안 내려왔다면 형주는 유비 손아귀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고 단기결전 타이밍은 적절했으나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결국 적벽에서 말아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7.15. 토탈 워: 삼국

토탈워 전통의 '역사적 전투' 중 하나. 전투 난이도는 어려움. 손권군 + 유비 진영의 제갈량 연합군과 조조군의 대결이며 일반적으로 적벽대전 하면 떠올리는 수전이나 상륙전이 아니다. 화공과 상륙 장면은 오프닝 동영상으로만 나오고 플레이어는 그 뒤에 펼쳐지는 육상전을 진행하게 된다. 실제로도 함대에 기습으로 불지르고서 도망나오는 병력을 육상에서 썰어댔던 전투이기도 하고. 다만 난이도는 높은 편인데 다른 전투들은 결투에 강한 장수가 있어 그것으로 전투를 풀어가갈 수 있으며, 수는 적어도 병종 혹은 질의 이점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군 장수인 손권, 유비, 주유는 모두 결투를 할 수 없거나 취약해 서황이 홀로 깽판을 부리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98] 덤으로 유비, 손권, 주유 각자가 하나의 군단 수준의 병종 구성을 갖추고 있으며, 상대도 마찬가지로 구성되었으며, 각지 전선을 형성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전투 3개를 동시에 컨트롤 해야된다. 그나마 가진 장점은 사격유닛이 더 많은 점과, 상대가 후방의 정착지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스킬들을 사용해 최대한 버티며 사격 다구리로 적장들을 죽이며 진격해야 한다.

7.16. 연희 시리즈

기존 삼국지의 사건들이 매우 짧은 시간대 안에 몰아서 일어나는 것이 세계관의 특징인 만큼 적벽대전도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며, 어떤 진영이든 시나리오의 최종장 역할을 하고 있다. 적벽 이후의 삼국지 중후반은 시나리오에서 다 쳐내진 만큼 적벽대전은 모든 갈등과 전쟁의 종결까지 달리는 일종의 계기가 되며 시나리오 상의 차이점도 각 진영마다 가장 큰 편. 이하 근작인 진 연희몽상 혁명의 묘사,

위편 - 혼고 카즈토의 존재 덕분에 위에서는 사전에 황개의 배신 및 화계에 대해 알고 있었고, 촉오연합군에서도 위가 자신들의 계략을 눈치챘다는 점을 깨닫고 적진에 잠입한 황개가 희생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히면 그 때 전군 돌격하여 기세로 밀어붙인다는 전략을 짠다. 그런데 황개가 함정에 빠진 채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촉오연합군 장수에 군주까지 앞다퉈 황개를 구하러 달려가고, 이후 황개가 전사하자 분노한 촉오연합군 장수들이 일제히 위군에 돌격하면서 그야말로 개판이 벌어진다. 위편에서는 위군과 촉오연합군의 전력이 비슷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전략이고 뭐고 모조리 어그러진데다 촉오연합군의 느슨한 연계로는 탄탄한 위군을 당할 수가 없었기에 위의 승리로 끝난다.

오편 - 황개의 고육지계가 성공하여 적벽이 불바다가 되고, 패전한 조조는 신야 근방에서 배수진을 치고 촉오연합군과 일전을 벌인다, 적벽 패전에도 상당한 전력을 보유한 조조였지만, 촉오연합군의 전략에 또 한 번 넘어가 두 번째 패전을 기록하고, 결국 자신의 완전 패배를 인정하며 중신들과 함께 중원에서 모습을 감춘다. 이후 위나라는 촉과 오가 양분하며 천하이분지계 엔딩.

촉편 - 혼고 카즈토의 존재 없이도 위군이 촉오의 화공을 눈치채는 바람에 화공이 실패할 뻔 하지만, 제갈량이 나서 아군까지 속이며 정보조작을 한 끝에 결국 화공을 성공시켜 적벽을 불바다로 만든다. 이후 황개가 적진에 돌진해 조조에게 화살을 쏘고, 순욱이 몸으로 막아 조조를 구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조조는 간신히 후퇴하지만, 이후 촉오연합군의 추격에 따라잡혀 패배하는 게 정식 엔딩, 조조가 무사히 진류까지 후퇴한 뒤 다시금 일전을 벌이는 게 if엔딩.

7.17. 파티피플 공명

삼국시대 당시가 배경이 아니라 제갈량이 현세에 환생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작품이기에, 화살 10만 개가 아니라 좋아요 10만 개 획득을 목표로 했다. 음악 페스티벌 출전권을 두고 경쟁 상대를 이용하는 이야기로 나온다.

7.18. 신삼국

전투 후 조조가 쫓기는 화용도 부분에서 드라마 고유의 해석을 내놓았는데, 촉나라와 오나라 둘 다 조조를 죽이는 것을 꺼리며 서로에게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조조를 죽이는 순간 강대한 위나라가 총력전을 펼치며 사생결단을 낼테고, 다른 나라에서 그동안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기 때문. 조조까지도 이를 알고 있었다. #

[1] 후베이성의 2급 행정구역으로는 12개 지급시(부성시급인 우한시 포함)와 1개 자치주가 있는데 셴닝시는 지급시에 해당한다. 셴닝시는 다시 3급 행정구역으로 시할구 1개, 현급시 1개, 현 4개를 보유하고 있는데, 츠비시가 현급시에 해당한다. [2] 중국사에서는 '츠비대전' 이라 기록한다. '츠비'는 적벽의 중국어 발음이다. 오늘날의 우한시 근처에 위치해있다. [A] 주유의 주장. [4] 조조는 편지에 ( 호왈) 8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다고 했으나 실제로 이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 확률은 희박하다. [5] 오주전 정보와 주유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 한정. [6] 선주전 주석 강표전, 제갈량전, 자치통감, 건강실록에 따르면 주유, 정보군 각각 1만씩 보내 유비군과 함께 조조군과 싸우게 하고 손권이 후방 중군으로 1만을 거느렸다 되어 있다. [A] [8]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유비가 후방병력과 함께 남은 2천 병사를 뜻하는데 이 기록은 다른 기록과 달리 유비가 직접 공격한 게 아니라 후방에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오류로 여겨진다. [9] 제갈량전 제갈량의 주장. 다만 선주전을 보면 이전부터 유비와 연관이 깊던 유기의 병사들이 1만이 넘는다는 점은 확인이 되고 제갈량이 언급한 관우의 수군이 있었다는 점 역시 확인이 가능하다. 유비 본인도 최전방이던 번성에서 가지고 있던 병사들이 얼마 정도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 물론 상당수가 패잔병이다지만. [10] 연환진, 사항계, 동남풍 등이 대표적으로 파양호 대전에서 따온 소재들이다. [11] 이 가후의 의견에 대해서는 배송지가 길게 평을 해뒀는데 아래의 결말과 평 문단에서 확인하도록 하자. [12] 호종이 악현장을 지냈다. [13] 강하의 속현 [14] 요약하면 유종은 갑작스레 조조에게 항복했고 또한 유비는 한나라의 황숙이며 백성들이 신야에서부터 유비의 인망을 좇아 따라와 그 백성들을 지키느라 조조에게 깨진 것이지 제대로 싸웠으면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했다. 사실 박망파에서 한 번 물리친 적도 있으므로 허장성세는 아니다. 또한 유비는 조조에게 언제나 도전하였으며 이기고 짐은 늘상 있는 일이나 겁먹고 항복 생각이나 하면서 지 땅에 웅크려 있는 넌(손권) 뭐냐고 물은게 대략적인 내용. [15] 신빙성을 더하자면 유비가 도망칠 때 백성 10만 명이 유비를 따라갔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지배자가 바뀌는 것 이외엔 변화가 없다면 따라갈 이유가 없겠지만 조조 밑에서는 별로 좋을 거 없다고 판단했다면 얘기가 다르다. 즉 조조는 형주의 민심을 얻지 못했고 때문에 백성들은 조조가 아닌 유비를 택한 것. [16] 특히 장소의 경우 선대 손책이 죽기전 손권이 능력이 모자라다면 장소가 대신 나라의 주인이 되라고 유언을 남겼다. 연의 때문에 보통 이릉성에서 죽어가던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선이 능력이 부족하면 그대가 대신하라 한 것이 유일한 것으로 나오지만... 아무래도 항복을 주창한 일 때문인지 손책이 고평가 한 일이 완전 무색해져버렸고 적벽대전 이후 손권에게 단단히 찍혀서 정치적 커리어는 사실상 끝장났다. 그래서 제갈량만이 유일한 창업군주에게 권력을 완전히 이양 받은 유일한 인물로 오해하는 사람도 꽤 있다.(삼국시대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연나라 왕이 재상에게 선양한적은 있었다. 그게 내란으로 이어진게 문제고...) 그래도 합비 공략때 장소가 서주로 진군했다는 기록을 보면 완전 끝장난건 아니었지만....손권이 칭제했을 때 축하하러 온 장소에게 "그대의 말(항복)을 들었으면 내가 지금쯤 황제가 아니라 거지마냥 구걸하고 있었을 거요"라며 꼽을 준다.(...) 장소는 땀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한다. [17] 다만 위와 끝까지 싸운 제갈량과 비교 당하는 장소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아래의 명분 참고. [18] 반면 유비세력은 유비가 황실후손에 의대조라는 명분으로 조조를 맞서려는 명분이 명확했다. [19] 당시 옷을 갈아입는다는 말은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에둘러 이르는 말이었다. 당시 화장실은 사용 방법이 좀 복잡했다. 입고 있던 옷을 꽤 벗고 일 보고 다시 옷을 입었기에 화장실은 일보는 장소만 있는 게 아니라 여유공간이 꽤 되었고, 한무제는 누나 집에 놀러갔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유흥을 위한 가수로 온, 뒤에 황후로 세워주는 위씨)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거사를 치르기도 했다. [20] 대표적으로 조조의 친아들, 조카, 심복을 죽인 것을 포함해서 조조에게 두 번이나 빅엿을 먹였음에도 조조의 생전에는 측근으로 중용되었던 가후를 들 수 있다. 특히나 조앙은 왕조국가에서 가장 정통성이 높다는 맏아들이었고, 조조의 정실인 정부인은 소생이 없어서 친모를 일찍 잃은 조앙을 친아들과 다름없이 키웠기 때문에 사실상 정통성 만렙인 적장자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죽기 직전까지도 조앙이 죽어서 정부인과 이혼한 것을 생애 유일한 후회거리라고 했을 정도로, 조앙의 죽음은 조조 개인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큰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마저 덮어두고 가후를 중용했다. 인재를 대함에 있어서 조조 개인의 그릇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1] 하북의 원소와 회남의 원술로, 조조에게 가장 큰 위협세력이었고 관도대전을 전후로 정복하지 않았다면 남쪽을 평정할 때 후방에서 배후를 치기에 가장 좋은 세력이기도 했다. [22] 이들 전부가 사실상 조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세력들이었다. [23]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놓는 책상. [24] 학자에 따라 칼로 쳐서 쪼갰다는 해석도 있고, 꽂았다는 해석도 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가 다른데, 칼로 쳐서 쪼개는 것은 참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내가 죽이겠다"는 의미이지만, 칼로 꽂는 것은 전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조에게 이용당하고 속아 죽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25] 각각 장소 진송 [26] . 정보를 말한다. [27] 그나마도 건강실록, 오주전 기록에 따른다면 유비가 직접 본 병사는 2만으로 본인이 보유한 병사랑 똑같다. [28] 顧望 - 형세를 관망하며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 [29] 專美 -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함. 그러니까 오나라 쪽이 적벽대전 승리를 자기들에게 좋게만 포장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30] 일종의 쾌속선으로 쇠북종과 기치를 배 위에 설치했고 뱃전 위에는 낮은 담을 세웠으며 노를 젓는 선부는 많고 전투병이 적은 병선이다. 승선원이 전부 힘센 장사에다 정예병이었으며 배의 속도는 마치 갈매기처럼 빨랐다고 한다. 이상 해당 내용에 대한 권중달역 자치통감 주석의 기록. [31] 여기서 주유가 황개를 때리는 고육지책과 조조의 의심에 대한 감택의 답변은 연의 창작이다. [32] 당시 회전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 상황상, 군대가 집결해 있는 곳에 구하기 쉬운 나무로 만든 목책과 나무 마루는 필수적이다. [33] 팔면으로 된 북, 병사를 지휘하는 도구로 북을 치면 공격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으며 특히 뇌고는 전술 시 신속한 공격에 사용된다. 이상 역시나 자치통감의 주석의 기록이다. [34] 연의에서는 장료가 쏜 화살에. [35] 단 무제기의 해당 기록은 강표전을 의심한 손성 또한 합비 공격의 시열 오류를 지적했으며, 오류가 의심되는 기록이다. [36] 황개가 배신할 거라는 징조가 그전부터 보고되었던 것도 아니고 결전을 앞두고 뜬금없이 항복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누가 봐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역정보라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게 원래 오나라는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서 실제로는 조조에 항복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당장에 오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문신인 장소가 항복을 주장했고 손씨 일족 중에서도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그리고 황개라는 인물은 현재 살고있는 우리들한테나 유명하지, 당시에는 중앙에 이름이 알려져있던 장수도 아닌 만큼 정말로 손권에게 딴 마음을 먹었는지 아니면 사항계를 하는 건지 알 수도 없다. [37] 나관중은 그 조조가 단순한 수에 걸렸다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황개가 고육계라도 써서 조조를 속이려고 했다고 각색했다. [38] 배송지 위진남북조 시대 한족 출신 최고의 명장인(간단히 말하자면 촉한+동오에 회수, 산둥 반도, 일시적이지만 관중까지 손에 넣었다) 남조 유송 유유를 따라 종군한 경험이 있어서 싸움에 일자무식은 아니었다. [39] 실제로, 조조는 꽤나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조조닭'이라는 전용 보양식도 직접 챙겨먹었으며, 전복 요리는 즐기는 것을 넘어서 아주 환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지도자같은 위치였으니 건강에 신경쓰는게 당연하겠지만... [40] 태조가 장차 유표를 토벌하려고 순욱에게 어디로 출정해야 하는지 계책을 물으니 순욱이 "지금 화하(華河=중국, 중원)는 이제 평정되었으니 남쪽에서는 곤란함을 알 것입니다. 완성(宛城)이 엽(葉) 사이로 나와 샛길로 가벼이 진군한다면, 불의의 곳에서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태조가 마침내 출정했는데, 유표가 병들어 죽었다. 태조가 순욱의 계책처럼 완성과 섭현 사이를 곧장 내달려 가자,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를 형주를 들어 항복했다. - 삼국지 위서 10 순욱 [41] 익주의 관문이라고 할만한 파촉령은 기술이 발달한 현재도 충분히 험한 지형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마저도 겨울 내에 진군을 포기하고 공중폭격만 하였다. [42] 게다가, 이쪽도 교주 노릇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43] 삼국시대 전부를 볼 수 있는 후대인들 입장에서야 위의 조조, 촉의 유비, 오의 손권이지 당시 조조 입장에서 손권은 "위협적인 세력을 물려받아 아직 안정시키진 못한 젊은 후계자"란 입장에서 차라리 유종에 가까웠을 것이다. 유종 역시 만만찮은 실력자인 유표의 세력을 물려받았고, 당시 손권은 유비나 손책처럼 거대한 외부세력에 정면으로 맞서 전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이력과 관록, 조조가 인정할만한 실력이 있는 자는 당연히 유비뿐이었다. 당장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 같은 아들을 얻어야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다!" 라는 조조의 평가만 보더라도 흔히 손권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인물평으로 흔히 인용되고는 하나, 거꾸로 보면 이 시점에서 조조가 보기에 손권은 유기나 유종과 같은 레벨에서 평가할 풋내기밖에 (하지만 그중에서는 제일 낫다) 안 되어 보였다는 뜻이다. 반면에 유비의 경우는, 손권에게 세력을 물려준 형 손책이 아직 원술의 듣보잡 부하장수이던 시절부터 이미 조조에게 "요즘 세상에서 군웅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역시 너랑 내가 짱인 거 같지 않냐?" 같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이름값의 차원이 달랐던 것. 손권이 '한수 아래의 풋내기'가 아니라 조조, 유비와 동등한 맞수로 인정받을 자격을 얻은 것은 바로 이 적벽대전 이후, 천하에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조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참패를 안겨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44] 예를 들어 조조의 학살을 피해 도망친 서주 출신 피난민 등이 있다. [45] 적벽 이후 유비는 남형주를 얻으며 손권도 적벽 땐 2~3만 정도밖에 군사를 못 모았지만 이후 합비에는 10만이나 되는 병사를 쏟아부을 정도로 세력이 강대해진다. [46] 상술했다시피 연의의 적벽대전 묘사도 이 전투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각색할 정도이다. [47] 인천상륙작전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 미해군의 포격이 있었음에도 인천 해전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48] 날랜 배 [49] 노를 젓는 큰 배 [50] 무엇보다도 적벽대전 이후로 위나라는 촉과 오를 재침공할 여력을 거의 잃었고 그래서 한동안 제대로 남정에 나서지 못했을 정도다. [51] 실제로 2017년 중반의 스페인-포르투갈 산불에서 도로를 달리던 차량 안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도로를 덮친 산불에 갇혀 불에 타 죽은 사례가 있다. 상상하기로야 불이 붙지도 않는 아스팔트 도로 위의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그냥 빨리 차 몰고 빠져나가면 될 것 같지만, 산불이 퍼지는 속도와 화염의 강도는 그런 조악한 상상을 가볍게 초월한다. 역시 2017년도를 강타한 미 서부의 산불에서는 불길이 그런 식으로 퍼져 잡히지 않은 산불의 면적이 뉴욕시를 넘어선다. 제대로 붙은 불은 그냥 인접한 곳에서 붙붙을 만한 것을 철거하고 물 뿌려주는 정도로 잡히지 않는다. [52] 전염병으로 인한 사기 저하는 생각보다 무시하기 힘든데 전염병은 사기뿐 아니라 실제 병력 손실과 부상병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며 동료의 전염병이 자신에게 감염된다는 공포와 전염병 관리로 인해 진영이 어수선해지는 효과까지 나오며 실제 관리도 안돼서 삼국지 무장 중 병으로 죽은 명장만 여럿 된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든지 전염병은 패주 원인으로 매우 좋은 기폭제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2차 합비전인데 이 당시에도 장료의 습격이 충격적이긴 했으나 10만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그냥 돌아간 결정적인 원인은 결국 전염병으로 인한 사기 저하였다. 물론 저 전염병이라는 기록이 기록자가 패자 입장에서 변명차 구겨 넣은 구실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단순 변명용 거짓 기록으로 치부하기엔 시대상 의료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시기의 전염병은 충분히 전황을 좌지우지할 만한 위력을 지녔다는 가능성이 있어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도 있다. [53] 아무래도 손책이 장소에게 탁고를 맡긴 일화를 차용한것으로 보인다. [54]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개드립이었으나, 삼국지연의를 보면, 조조가 적벽대전 전날에 연회를 벌이며 한 말을 볼 때 조조는 진짜로 오나라를 정벌하면 대교와 소교를 취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조조는 장수의 숙부 장제의 미망인 추씨를 건드리는 등 그동안 유부녀를 건드린 적이 꽤 많았으니, 제갈량의 수작을 패드립이라고 알고 있어도 듣는 주유에게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제갈량이 조조의 이런 점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조조의 의중을 맞춘 것. [55] 신삼국에서는 아예 제갈량이 대놓고 "이런, 그 이교가 두 분의 부인이셨다고요? 아이고 헛소리해서 정말 미안해요. 근데 조조 그놈이 유부녀라면 환장하는 놈인데요? 이거 어쩔 거임?"이라며 2중으로 도발을 건다. [56] 정확히 말하면 제갈근은 백이와 숙제 형제 얘기를 꺼내며 "우린 형제니까 함께 해야지?"라고 했는데 제갈량이 "맞는 말이네요. 근데 형님 쪽이 우리에게 넘어오면 크게는 같이 한나라를 섬기는 게 되고 작게는 형제가 함께 하는 것이니 더 좋지 않을까요?"라고 맞받아쳤다. [57] 실제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의 오소에 있는 군량을 태우는 것 외에도 여남에서 유비와 대치할 때에 하후연을 보내서 공도의 보급부대를 공격하는 등(연의 한정), 군량 털어먹기를 자주 했다. 조조: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 [58]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조홍이 겁을 먹으면서 "승상. 지금 저 둘을 처형시켜버리면 이제부터 수군은 누가 지휘합니까?" 라고 건의를 한다. 그리고, 제갈공명의 이간계에 속았다고 짐작한 조조는 크게 놀라서 급하게 "멈춰라!" 라면서 처형을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한탄하여 넋이 나가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조조는 이간계에 결정적으로 걸려든 장간에게 분노하여 독살해버리며 숙청한다. [59] 주유에게로 돌아간 노숙은 "제갈량이 아교, 칠 등의 재료를 쓰지 않는다"고 두리뭉실하게만 보고한다. [60] 현대에는 '조조군이 당시 불화살을 쐈으면?'이라는 IF 시나리오가 제기되는데, 나관중이 불화살을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제쳐두더라도 실제 사서에서 불화살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 위략에서 제갈량의 2차 북벌 때 학소가 사용한 것이다. 즉, 적벽대전 시점에선 불화살이란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불화살을 쏘려면 휘발성이 낮은 가연성 물질과 더불어 불을 붙일 수 있도록 전면부가 가공된 화살이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가는데다, 화약 발명 이전 화살 전면부에 불을 붙여 날리던 방식으로는 날아가다가 불이 꺼질 가능성도 매우 크기 때문에 강한 장력으로 멀리 날려보내기도 힘들었다. 당장 학소가 최초로 불화살을 선보인 상황도 원거리의 적이 아니라 성으로 육박해들어오는 촉군의 운제(사다리차)를 저격한 것이었다. 안개까지 낀 습한 날이면 더 심한데 새벽에 야습을 당한 상황에서 불화살을 쏠 준비를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해당 장면에서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 장수는 육군 지휘관인데 육전에서는 불화살을 쓸 일이 거의 없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불화살은 연의 전개상으로도 실제 역사고증상으로도 등장할수가 없다. [61] 실제 역사상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나라 시절 안사의 난 때 장순은 개원-천보년간 군사활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긴커녕 내지에서 현령을 지내던 인물이었는데, 신당서에서는 장순에 대해 '여러 책에 통달해 싸우고 진치는 것에 밝았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반란군은 756년 2월부터 5월까지 장순을 필두로 한 당군이 지키는 옹구를 수차례 공격했음에도 이곳을 함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순측은 점점 물자소모 문제에 직면했고, 결국 수비군의 화살이 바닥나게 되자 장순은 다음과 같은 계책을 쓴다. '신당서 권192 열전117 충의中: "성 안의 화살이 다 떨어지자, 장순은 사람 모양의 짚을 1000여 개를 엮어 검은 색 옷을 입히고 밤에 성 아래에 그것들을 매달았는데, 영호조(반란군 장수)의 병사들이 앞다투어 그것들을 화살로 쐈는데 오랜 뒤에야 볏짚 인형인 것을 알았다. (인형을) 올리니 화살 수십만 개를 얻었다. 그 후 다시 밤에 사람이 내려오자 적이 비웃으며 대비하지 않았는데, (성에서 내려온) 결사대 500명이 영호조의 군영을 공격하자 반군이 크게 어지러워져 보루와 장막을 불태우고 10여 리를 쫓아갔다.' 그 뒤에도 장순은 계속해서 반군에 저항했다. 끝끝내 옹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되어서야 인근의 수양으로 옮겨 식인까지 해가며 10개월을 더 버텼다. 757년 10월, 수양성이 함락되고 장순은 반군에게 온갖 저주와 험담을 퍼부으며 죽음을 맞이했고 드디어 반군이 강회지방으로 진출하나 했는데, 그때는 곽자의 등이 이끄는 당군이 낙양으로 돌격해오던 상황이었다. [62] 서로 손바닥에 글로 써서 보여주는데 둘 다 불 화(火)자를 썼다. [63] 주유가 이때도 노숙을 제갈량에게 보내 자신의 계책을 꿰뚫어봤는지 확인시켜보는데, 제갈량은 당연히 '눈치 못챘으며 주유를 비난하고 있다'고 전하라고 했다. 노숙은 이번엔 제갈량의 말대로 주유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64] 이를 기념해서 중국에는 배풍대라는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을 세워놨다. [65] 아무리 과거 시대가 현대보다 과학이 덜 발전하고 신에 의지했다고 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한들 당시에도 그러한 과학적인 원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이유를 몰랐을 뿐이지. 쉽게 말해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혀낼 수 없기에 초월적인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듯이 당시에도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어 하늘의 뜻이라고 퉁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작 20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사고력이 크게 발달할 일은 없으니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은 똑같이 사고하는 인간이다. [66] 밝을 때 우는 까마귀가 밤에 울었는데 조조가 술에 취해 이를 시구에 넣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는 일은 필시 불길한 일일지니 실제로 이건 때문에 조조가 졌을리는 없지만 조조가 질 것이라는 복선과 그의 포악함을 담은 장면이다. [67] 정욱은 군량을 실은 배가 저렇게 적게 (물속에) 잠길 리가 없고 저렇게 빨리 올 수도 없다고 말했다. [68] 패턴이 적군이 없는거 보고 조조가 크게 웃으며 "ㅉㅉ 주유와 제갈량은 아직도 2% 부족하구먼. 나라면 여기에 복병 깔아뒀을 텐데 그럼 우리는 다 죽었겠지."라 말하자마자 그 즉시 장비/조운이 나타나고 조조가 개털리는 것. 이 패턴은 화용도에서도 나타난다. [69] 유비 삼형제가 각자 떨어져 지내던 시절에, 관우는 조조 밑에 들어가 있었다. [70] 작가에 따라 묘사는 다르지만, 제갈량과 관우의 서열 싸움을 묘사하는 삼국지도 있다. [71] 이 부분은 묘사가 정확히 되지 않아서 조조가 형주 길로 가다가 조운의 습격을 받고 남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가능성도 있다. [72] 이는 제갈량이 군담소설 지략가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군담소설에서 지략가 캐릭터는 단순히 누군가를 계략으로 패배시키는 수준에 그치지만, 제갈량은 다른 뛰어난 지략가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면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를 실감시켜 주기 때문이다. [73] 우리나라의 판소리 중 적벽가가 바로 적벽대전만 다룬 작품이다. [74] 그리고 주유는 생각 외로 친유비파였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주유는 손책과 매우 친한 사이였던 만큼 손씨를 강동의 왕으로 만드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비의 힘이 생각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손씨는 중앙에서 보면 그냥 강동의 호족 1에 지나지 않았고 손씨가 강동에서 얼마나 세를 떨치고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듣보잡에 지나지 않았다.(설령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어도 이는 변함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손씨가 다른 호족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중앙, 특히 황제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데 당연히 일개 호족따위가 표를 보내봤자 받아주지도 않았을 테지만 거기에 유비가 끼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적벽대전 후 손권은 유비의 도움을 받아 황제에게 표를 바침으로써 (조조가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상관없이) 강동을 다스리는 것을 공식화하는데 성공한다. [75] 화용도가 나오는 부분이 50화. [76] 이렇게 표현된 이유는 22권 말미에 '환상의 적벽'이라는 제목의 작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정사에선 적벽대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으며 작가의 생각으로는 조조의 침공과 협박문에 개연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대중의 인식 속의 적벽대전은 연의의 영향력이라 생각하며, 연의의 창작을 걷어낸 빈 부분에 만화가의 솜씨를 발휘했다고 한다. [77] 이때 서장을 가지고 오는 사자가 조조의 인물이 아니라 작품 내에서 제갈량을 따라다니는 노인인 것으로 보아, 명확하게 표현되진 않지만 손권과 유비의 동맹을 성사 시키려는 제갈량의 계책으로 추측된다. [78] 가후는 함대에 한조의 깃발을 올리는 것을 제의했다. [79] 이후 11 PK에서 결전제패에서 적벽대전 전투가 수록된다. [80] 삼국지 6 짦은 시나리오에서 손권으로 플레이 가능하다 대략 208년 10월 부터 조조에게서 동맹권유가 오고 노숙을 강화의 유비에게 파견 여기서 제갈량 말고 관우 장비를 사신으로 손권에게 보낼수 있다. 제갈량의 논전이 아닌 관우 같은 경우 황개를 비롯한 오의 무장들과 함께 조조와 싸울걸 결의하고 장비를 보내면 장소,보즐,설종의 항복파와 언변을 벌이...는게 아니라 장비가 뭔 잔말이 많고 항복하면 너희는 주군만 바뀌면 그만이지만 주군인 손권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며 일침을 날린다.근데 이건 노숙이 손권에게 지적한 사항같은데? 황개는 장비의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선택지에 따라 손권이 항복할수 있다 다만 종속이 아니라 동맹이 된다. [81] 제목대로 그냥 양 세력이 동맹 맺고 끝 [82] 손상향이 유비 세력으로 넘어가고 동맹을 맺는 걸로 끝. 단, 손오동맹에 비해 조건이 몇개 더 필요해서 보기 쉽지 않다. [83] 지나치게 늘어지는 스토리에 정작 하이라이트를 부실하게 묘사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조조를 찌질한 소인배로 묘사. [84] 엄격하게 말해서 계책을 간파했을 경우의 실제 참전 병력 한정. 스토리 진행상 오나라 측에서 운수대 3기가 본격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퇴각한다. [85] 곽가를 살리지 않아서 계책을 간파하지 못한 경우 이 잡병 보병과 궁병은 모조리 화계에 불타 끔살당하고, 이들이 있던 위치는 이동 불가능한 불타는 배 지형으로 변해 버린다. [86] 물론 곽가가 살아있는 경우 한정으로 적들에게 소모값을 만들어주는 샌드백 역할로는 제격이다. [87] 빗나가는 일도 상당하지만 제대로 집중돼서 맞으면 타격이 큰 편이다. [88] 정확히는 조운, 감녕, 장비, 능통의 부대로 총 4부대지만 갈림길 선택에 따라 조운과 감녕 중 한 쪽, 장비와 능통 중 한 쪽만 나온다. [89] 오는 합비 전투, 촉은 번성 전투로 제일 늦다. [90] 본작에서는 주유가 '어차피 이 시즌엔 잠깐 동남풍 부는 시기가 있는데, 제갈량은 자기가 불러온 양 쇼한다'고 간파하고 투덜거린다. [91] 서서를 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화계 실행 이후 북쪽 선단 지역에 보면 서서가 무적 판정으로 서 있다. 도중에 유비가 서서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때 가서 이벤트를 진행시켜야 한다. [92] 이마저도 제대로 관도 대전과 엮인 임무는 4개뿐이다. 출시전 시연을 위해 만들었던 알파 버전 임무를 출시 버전에 수정 없이 갖고 들어와서 생긴 문제. [93] 임무 중 연환계1은 선박 위에서 진행되긴 하지만 화공 직전이고 적벽 전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곽회를 상대하는 임무라서 별 의미는 없다. [94] 서브 임무들을 생략하고 바로 메인 임무를 노려도 문제될 게 없는 8편 특성상 육지 전투와 추격전 사이의 선상 전투를 구현하려면 선상 전투만을 위한 시나리오를 하나 더 넣어야 한다. [95] 게임속 설명이 10만 개가 아니라 100만 개로 슬그머니 늘어나 있다. [96] 이 경우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쫓는다에서 앞부분만 나온 것으로, 저 문장을 쓰려다가 범인에게 얻어맞고 저 단어만 남았다. [97] 공성의 계에서는, 제갈량과 주유가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계책을 내놓는 대목을 재현한 것도 있다. 손바닥 대신 핸드폰 메모로 [98] 서황을 잡아도 끝난 것이 아닌게 뒤에는 장료가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