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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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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
2.1. 합비의 중요성
3. 전개
3.1. 제1차 합비 전투(208년 ~ 209년), 吳 공격3.2. 제1차 유수구 전투(212년 ~ 213년), 魏3.3. 환성 전투(214년), 吳3.4. 조조의 손권 정벌?, 魏3.5. 제2차 합비 전투(215년), 吳3.6. 2차 유수구 전투(216년 ~ 217년), 魏3.7. 일시적인 양양 점거, 吳3.8. 조비의 1차 남정(222년 ~ 223년), 魏3.9. 기춘 공략(223년), 吳3.10. 조비의 2차 남정(224년), 魏3.11. 조비의 3차 남정(225년), 魏3.12. 조비의 죽음(226년), 吳3.13. 석정 전투(228년), 魏3.14. 제3차 합비 전투(230년 ~ 233년), 吳
3.14.1. 230년3.14.2. 231년3.14.3. 232년3.14.4. 233년3.14.5. 매체
3.15. 제4차 합비 전투(234년), 吳3.16. 1차 조중 정벌(237년), 吳3.17. 요동 진출(239년), 吳3.18. 작피 전투(241년), 吳3.19. 육안 공략(243년), 吳3.20. 2차 조중 정벌(246년), 吳3.21. 왕창의 이릉 정벌(250년 ~ 251년), 魏3.22. 동흥 전투(252년 ~ 253년), 魏3.23. 제갈각의 북벌(253년), 吳3.24. 관구검의 난(255년), 吳3.25. 제갈탄의 난(257년 ~ 258년), 吳
4. 강동으로 온 강북 유민들5. 실패 원인
5.1. 손권의 군사적 재능5.2. 세병제(世兵制)5.3. 강북 강남의 차이
6. 기타 창작물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오나라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들이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가 건국되기 전인 조씨 정권 시절의 조조 시절부터 서술한다.

2. 발단

2.1. 합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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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성은 남쪽으로는 강호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여 (중략)
- 삼국지 만총전, 만총의 상소 중 -

합비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중부 차오후호(巢湖) 북쪽에 있는 성도(省都)로 예로부터 중원(中原)과 강남(江南)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노주(蘆州)라 불렀으며 합비라는 지명은 한나라 때부터 불리었다.[1] 비슷한 이름의 하비 때문인지 서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는 서주도, 예주도 아닌 양주(揚州)의 구강군이다.

손책이 임명한 여강태수 이술이 양주자사 엄상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 199년 여강 매성· 뇌서· 진란 등이 장강과 회수 일대에서 수만 명을 모아서 일어나 은 파괴되었다.

당시 조조는 강대한 원소 막 교전에 들어가기 시작한 참이라 형편이 영 좋지 않아, 당시 사도연이었던 유복이 동남쪽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겨 그를 양주자사로 파견한다.

과연 유복은 조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진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혼자 몸으로 말을 타고 가 합비의 빈 성으로 가' 의 관소를 세우고, 도망치고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학식 있는 유생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둔전을 보급하고, 제방을 건축해 논에 물을 대고, 성벽과 보루를 높게 만들고, 나무와 돌을 쌓고, 풀 수천만 더미를 엮었고, 물고기 기름 수천 석을 저장하여 전쟁 시 방비 용품으로 삼아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떠돌던 백성들은 강과 산을 넘어 앞다투어 그에게 귀순해 왔다. (유복전)

무주공산이 되었던 합비는 유복의 위대한 공적으로 인해 무주공산이 되기 이전보다 훨씬 발전하여 위와 오의 관계에서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형주를 제외하면 합비는 오가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점이었고, 위나라는 합비만 잘 방비하면 오군의 침입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합비 말고 다른 경로는 오나라 인구 밀집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길을 통해 돌아가는 경로다. 당시 강남의 오나라에서 북쪽으로 가려면, 서주의 광릉을 거쳐가는 해안길[2], 합비를 거쳐 수춘으로 진군하는 길, 형주 강릉에서 출발해서 양양과 완으로 가는 길, 이렇게 3개가 있었다.

당장 형주 강릉은 양주 호족연합 체제인 오나라 특성상 합비 수준의 본격적인 진군 기록이 드물다. 그래도 4차 합비공방전 당시 조공으로 광릉길과 함께 들어간 적도 있고 육손이 양양을 찔러보다가 사자가 잡혀서 공격도 못 해보고 천천히 후퇴한다든지 손권이 5만 명 가지고 강하의 문빙을 공격하다가 20일 만에 포위를 풀었는데 오히려 추격해 온 문빙에 의해 격파된다든지 주연이 5만으로 번성을 포위하고 다른 장수들이 조중, 작피 등을 공격했는데 한 달 후 다른 사람들이 '번성 튼튼한데 걍 오나라 애들 무시하시지요?'라고 한 것을 사마의가 이를 변방의 근심이라며 군사를 일으켜 도착하자마자 오군이 바로 후퇴한다든지[3] 이후 주연이 조중 쪽을 찔러서 수천 명 규모의 전투를 두 번 치르는 등 아예 공격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예전 관우 때처럼 한수가 범람하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릉을 거치는 해안길을 쓰자니 이쪽은 길 주변이 습지가 많고 측면이 노출되는 길이다. 합비 안 거치고도 해릉 라인으로 서주방향 북진은 가능하고 여몽 논의에서도 이쪽을 의식한 발언은 나오는데, 합비가 버티고 있는 이상 물길에 뒤가 잘리게 되는 모양새가 된다. 위군이 장강 이남에 기습적인 병력 상륙은 가능해도 물길을 상대가 쥔 이상 결국 고립되어 전멸할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합비 자체가 오에겐 교두보이자 심복지환인 것이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오를 감시하고 남정을 할 경우 전초기지가 되는 곳이다. 합비가 위나라에 있는 이상 오는 합비를 뚫어서 위의 관측망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합비에서 서주를 공략하든 장강 중류로 나아가든 결정할 수 있다. 합비가 없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은것이다.

파일:회수.jpg
바로 합비가 왜 중요한가를 보면, 합비 - 거소 - 유수구를 통한 장강 진입이 가능한 곳이다. 손권의 중앙 진출(그 과거의 손책의 허창 습격)을 위해서 합비-수춘 라인을 확보해야 비수 → 회수 → 와수를 통해 초를 공략하여 진류/ 허창 모두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회수에 대한 부분은 앞서말한 회수 방어라인에서 나오듯, 광릉방향으로 가게 되면 서주(하비)까지 노릴 수 있다. 추가로 장강 이북의 오나라 군대는 여강에 군대를 주둔하여 갇혀있는 꼴이다. 오군이 수춘까지 정복하기 위해서는[4] 육안이든, 합비든 공략을 마쳐야만 한다. 이미 212~213년 유수구 전투 당시 조조가 회남의 백성을 전부 북쪽으로 이주시켰고, 거기에 반발한 사람들 10만호는 손권한테 달아났고 회수 이남에 남은 것은 사실상 합비 뿐이었다. 위나라로서는 합비가 마지막 거점인 것이고, 오나라로서는 합비만 먹으면 회남의 상당 부분을 영토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호족연합체인 오나라 입장에서 양주 호족의 맹주인 손권이 이들의 힘을 집결해서 가장 합리적으로 쓸 만한 정상적 진군 경로가 합비와 수춘을 거치는 길뿐이었다는 것. 합비를 뚫으면 중원에서 화북으로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지고,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과는 가까운 위치이면서 위나라의 수도와는 멀리 떨어진 위나라 변방이라 상대적으로 오나라 측의 보급이 수월했고 호족들 또한 자기들 본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다른 침공로보다는 호응이 컸다. 거기에 합비 - 수춘 침공을 성공한다면 수춘 바로 앞의 서주, 예주까지도 공략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루트였다. 그 외 합비-회수 방어선의 중요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형주 공방전/평가 참고

즉 오나라 입장에선 사실상 선택지가 하나뿐이면서도 성공한다면 최선의 선택지였다.

3. 전개

3.1. 제1차 합비 전투(208년 ~ 209년), 吳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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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1차 유수구 전투(212년 ~ 213년), 魏

3.3. 환성 전투(214년), 吳

19년(214년) 5월, 손권이 환성을 정벌했다. 윤달에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태수(廬江太守) 주광(朱光)과 참군(參軍) 동화(董和),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오주전」

3.4. 조조의 손권 정벌?, 魏

가을 7월, 공이 손권을 정벌했다.

(중략)

겨울 10월, 부한을 함락하고 송건을 참수하니 양주(涼州)가 평정되었다.

공이 합비로부터 돌아왔다.
「무제기」

무제기를 보면 214년 7월에 손권을 정벌하였다가 10월에 합비에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213년, 217년 유수구 전투 때에는 10월~3월까지, 즉 겨울~봄 때 5개월 기간 정도로 공격했지만 214년의 경우에는 가을에 공격했고, 그 기간도 최대 4개월 정도로 짧다는 것, 기타 장수들의 열전에 이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조가 단지 합비까지 왔다 돌아간 것이며 교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5. 제2차 합비 전투(215년),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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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차 유수구 전투(216년 ~ 217년), 魏

3.7. 일시적인 양양 점거, 吳

3.8. 조비의 1차 남정(222년 ~ 223년), 魏

3.9. 기춘 공략(223년), 吳

5월, 손권은 장군 하제(賀齊)에게 명하여 미방(糜芳)과 유소(劉邵)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토록 했다. 유소 등이 진종을 생포했다.
『삼국지』 권47 「오주전」 링크
당초 진종(晉宗)은 희구(戱口)를 지키는 장수였는데, 부하들을 데리고 모반하여 위나라로 갔다. 위나라에서는 그를 돌려보내 기춘태수로 임명했다. 임지에서 진종은 안락(安樂)을 습격하여 그곳에 있는 인질들을 탈취하려는 기도를 했다. 손권은 그의 행위에 치욕과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전쟁이 막 끝났으므로 6월, 성하(盛夏)에 뜻하지 않게 하제에게 미방과 선우단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결국 진종을 생포했다.
권60 「하제전」 링크

3.10. 조비의 2차 남정(224년), 魏

3.11. 조비의 3차 남정(225년), 魏

3.12. 조비의 죽음(226년), 吳

가을 7월, 손권은 위 문제(魏文帝)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江夏)를 치고 석양(石陽)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권47 「오주전」
황무(黃武) 5년(226)에 손권(權)이 석양(石陽)을 공격할 때, 손환은 그곳의 태수였으므로 배속된 장수 선우단(鮮于丹)으로 하여금 5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회하(淮)의 길을 끊어 버리게 하고는, 자신은 오석(吳碩)ㆍ장량(張梁) 등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고성(高城)을 항복시키고 세 장수를 붙잡았다. 대군을 이끌고 돌아올 때, 손권은 명을 내려 손환으로 하여금 군대를 멈추도록 하고는 말을 타고 그의 군대를 지나가 보니, 손환의 군대는 정제되어 있었다. 손권은 기뻐하며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더디고 아둔한 것을 걱정했는데, 지금 군대를 다스리는 것에 있어서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자들이 적으니, 나는 걱정거리가 없다.”
권51 「손환전」 링크
황무 6년 (227), 손권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양(石陽)을 공격했다. 군사를 돌릴 때에는 반장이 적군의 추격을 차단하는 일을 맡았다. 밤에 행군하는 사이에 혼란이 발생했고, 적군이 반장을 추격했다. 반장은 추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주연이 즉시 돌아와 주둔하면서 적군에게 대항하여 앞에 있는 배로 하여금 아주 먼 곳 까지 가도록 하고, 자신은 천천히 뒤에 출발했다.
권56 「주연전」 링크
(226년)8월, 손권이 (형주) 강하군을 공격했지만, 태수 문빙文聘이 굳게 지켰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구원하는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명제가 말했다.

“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이보다 앞서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순우(荀禹)를 보내 변방(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순우가 도착하여, 강하군에서 지나가는 현마다 징발한 군사 및 따르는 보병과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 횃불을 들자(병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 손권은 물러나 달아났다.

12일, 아들 조경(曹冏)을 내세워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오(吳)나라의 장군 제갈근(諸葛瑾)과 장패(張覇) 등이 양양(襄陽)을 침공했지만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이 격파시키고 장패를 참수하였으며,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조휴(曹休)도 별동 부대의 대장을 심양(尋陽)에서 격파시켰다. 이들의 공적을 논하고 상을 주는데 각기 차등을 주었다.
권3 「명제기」 링크
석범에 숙영하며 스스로 일대를 이끌고 적을 막아 전공을 올려 후장군에 영전되었고 신야후에 봉해졌다. 손권은 군세 오만을 이끌고 스스로 석양에서 문빙을 포위, 그 기세가 격렬하였는데, 문빙은 굳게 지켜 동요치 않았으므로 손권은 20여일 지나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문빙이 이를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위략」에 이른다. 결국 손권이 스스로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돌연히 공격해왔다. 때는 폭우가 쏟아져 성책이 붕괴하였으나, 백성들이 논밭에 흩어져있으므로 아직 보수치 못하였다. 문빙은 손권이 도래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그리고는 침묵하며 그에게 의심을 품게 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성중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또한 스스로 관사에 들어가 누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손권은 결국 의심을 품고 그의 부하에게 말했다. "북방에서는 이 사람을 충신이라고 여겨 이 군을 위임한 것이다. 지금 내가 도래하였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혹여 뭔가 계략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라면 필시 밖으로부터 원군이 온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에 공격을 멈추고 철퇴하였다. 「위략」의 이 말은 본전(本傳)의 기록과는 반대이다.
권18 「문빙전」 링크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 장패(張霸)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선제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진서』 권1 「선제기」 링크
명제(明帝-위명제 조예)가 즉위하자(226년) 남쪽으로 보내 형주(荊州)에 주둔하게 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함께 손권의 별장(別將)인 유아 등을 공격(劉阿)했는데, 기구(祁口)에까지 추격하여 교전해 이를 격파했다.
권17 「장합전」 링크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오나라 장수 제갈근(諸葛瑾)과 양양에서 맞섰다.
권17 「서황전」 링크
오나라 장수 심덕審德이 환(皖-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하자 조휴가 이를 격파하고 심덕의 목을 베었다.
권9 「조휴전」 링크

3.13. 석정 전투(228년), 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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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제3차 합비 전투(230년 ~ 233년), 吳

정확한 시점이 언제인지 불확실하다. 「오주전」과 「만총전」의 기록이 다른데 이를 교차검증할 다른 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합비를 공격한 것은 이번이 세번째이고 합비 신성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제3차 합비 전투 혹은 제1차 합비신성 전투라고 부른다. 오나라는 229년에 공식적으로 황제가 있는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위-오 전쟁은 이 전쟁이 최초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231년과 233년 두 문서가 따로 작성되어 있다.

3.14.1. 230년

2년(230년) 봄 정월, 위나라는 합비 신성(合肥新城)을 지었다.
권47 「오주전」
4년(230), 만총은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려 한다고 선전했다. 만총은 표를 올려 연주(兗州)와 예주(豫州)의 각 군대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적군은 매우 빨리 물러났다. 만총은 병사의 움직임을 멈추라는 조서를 받았지만, 적군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가 갑자기 돌아간 것은 본의가 아니고 반드시 거짓으로 물러나서 우리 구원병을 멈추게 한 연후에 허점을 이용하여 재차 돌아와 공격하고, 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습격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구원병을 멈추지 말자고 표를 올렸다.

10여일이 지난 후, 손권은 과연 다시 와서 합비성에 이르렀으나 공략할 수 없었으므로 되돌아갔다.
권26 「만총전」 링크

3.14.2. 231년

(231년)겨울 10월, 손권은 대군을 부릉(阜陵) 등에 잠복시켜 왕릉을 기다렸는데, 왕릉은 이것을 알고 달아났다.
권47 「오주전」
그 이듬해(231년), 오나라 장수 손포(孫布)가 양주(揚州)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원하였는데, 편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길이 없어서 스스로는 나갈 수 없으니, 군대가 와서 영접하기를 원하오.〉

자사 왕릉(王淩)은 손포의 편지를 상정하고, 병마를 갖고 그를 맞이하기를 청했다. 만총은 틀림없이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병사를 주지 않고 왕릉을 위해 편지를 써서 말했다.

〈그대가 그른 것과 옳은 것을 식별할 줄 알고, 화를 피하여 순조로운 데로 나가려고 하고, 폭력을 떠나 도덕이 있는 군주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매우 칭찬 할만하오. 그러나 지금 병사를 파견하여 맞이하려고 하는 것은 병력이 적으면 서로 호위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병력이 많으면 일은 반드시 먼 곳까지 들리게 될 것이오. 우선 비밀리에 계획하여 본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오. 때에 임하여 절도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만총은 조서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가야만 했으므로, 남아 있는 부의 장사(長史)에게 명령했다.

"만일 왕릉이 가서 영접하려고 한다면, 병사를 주지 마시오."

왕릉은 후에 병사를 요구했지만 얻지 못하였으므로 단지 한 명의 독장에 보병과 기병 7백 명을 보내 손포를 맞이하러 갔다. 손포가 밤에 매복하여 습격하였으므로 독장은 도주하였고, 반 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 이전에 만총은 왕릉과 함께 일을 처리하는데 어그러지게 됐다. 왕릉의 지지자들은 만총이 게으르고 늙고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그 때문에 명제를 그를 불러, 그의 신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강함을 확인하고서 돌려보내려 했다.

《세어(世語)》에서 말하길, 왕릉은 표를 올려 만총이 나이가 많고 술을 좋아하여, 변방의 일을 맡기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알렸다. 황제는 만총을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급사중(給事中) 곽모(郭謀)가 말했다.

"만총은 여남태수, 예주자사 등 20여 년간을 복무하여 변방 지방에서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지금 그가 회수 이남을 맡고 있자 오나라 사람들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왕릉이 보고한 내용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니, 살짝 알아볼 겸 궁궐로 불러들여서 요즘 국경 지방의 상황을 들어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황제가 이 말에 따라 만총을 불러 들었는데, 만총은 술을 한 말이나 마셨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다시 임지로 되돌려 보냈다.

만총은 여러 차례 상주하여 남아 있기를 청하였으나 조서를 내려 대답했다.

〈옛날 염파(廉頗: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장)는 강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무리한 식사를 했고, 마원(馬援: 후한의 무장)은 말안장에서 살다시피 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늙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이미 늙었다고 하니 어찌 이리 염파, 마원과 상반되는가? 변방 지역을 안정되게 하여 이 중원에 은혜를 주려는 생각을 하라.〉
권26 「만총전」

3.14.3. 232년

다음해(232년), 오나라 장수 육손(陸遜)이 여강으로 향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빨리 구원하러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만총이 말했다.

"여강이 비록 작지만, 장수가 우수하고 병사도 정예이므로 오래 지킬 수 있습니다. 또 적군은 배를 버리고 2백 리 들어가 후미와의 사이를 텅 비게 하여 우리 군을 유인하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의 진격에 따라야만 합니다. 단지 그들이 도주하여 이를 수 없게 될 것이 걱정될 뿐입니다."

군대를 정돈하여 직접 양의구(楊宜口)로 달려갔다. 적군은 위나라 대군이 동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 밤에 달아났다. 당시 손권은 해마다 공격해 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권26 「만총전」

3.14.4. 233년

(233년)이 해, 손권은 합비 신성(合肥新城)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육안(六安)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권47 「오주전」
청룡(靑龍) 원년(233), 만총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 합비성은 남쪽으로는 강호(江湖)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壽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는데, 우리 관병이 그들을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른 연후에 포위망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적군이 가서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병사들이 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안의 병사를 이동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의 서쪽 30리 쯤 되는 곳에는 기이하고 험준한 요새가 있어 의지할 수 있고, 다시 성을 세워 굳게 지킨다면, 이것은 적을 평질 끌어내서 그들의 퇴로를 막는 것이므로 계략 면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

호군장군(護軍將軍) 장제(蔣濟)는 이 계책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는) 천하에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또 적군의 연기를 보고 성을 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공격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함락되는 것입니다. 한번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적의 침략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회수(淮水) 북쪽에서 지켜야만 합니다."

명제는 장제의 건의를 비준하지 않았다. 만총이 재차 상주하여 말했다.

─ 손자는 '군대를 다룰 때는 지략을 운용하여 변화가 가득한 싸움이 되게 해야 한다. 때문에 힘이 있지만 연약하여 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형세로 교만해지도록 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적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외형과 실질이 반드시 서로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손자는 또 '적을 잘 유인하는 사람은 약한 외관을 보인다' 고 했습니다. 지금 적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성을 내지로 옮기고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형체를 드러내 적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적군을 물에서 멀리 떨어지게 유인하고, 유리한 시기를 선택하여 병사를 움직여 밖에서 싸워 승리하면 복이 국내에 생길 것입니다. ─

상서(尚書) 조자(趙咨)는 만총의 계책이 우수하다고 생각하였고, 명제는 조서를 내려 받아들인다고 응답했다.
그 해, 손권은 직접 출동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려고 했는데, 그곳은 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20일이 지나도록 감히 배를 띄워 진격하지 못했다. 만총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손권은 우리가 옮긴 옛 성을 차지하고, 반드시 그의 군대 속에서 스스로 위세 있는 말을 할 것입니다. 지금 대거 진격해 오는 것은 일체의 성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감히 성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해안으로 올라와 병력을 과시하고 여유가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

즉시 보병과 기병 6천 명을 은밀히 파견하여 합비성의 은폐된 곳에 매복시켜 손권을 기다리게 했다. 손권은 과연 해안으로 올라와 병력을 과시하였다. 만총은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그들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 중에는 물 속으로 도망가다가 죽은 자도 있었다.
권26 「만총전」

3.14.5. 매체

삼국전투기에서는 성산 전투 파트에서 각각 짧게 나오는데, 성산 전투 파트에서는 공손연에게 당하여 바보취급 받게 된 손권이 흥분해서 합비를 치다가 만총이 파놓은 간단한 함정에 걸려 패퇴했다고 그려진다.

3.15. 제4차 합비 전투(234년),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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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1차 조중 정벌(237년), 吳

(237년)손권은 대장 주연(朱然)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江夏郡)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권3 「명제기」
적오 5년 (242), 조중(租中)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 장수 포충(蒲忠)과 호질은 각자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대항했는데, 포충은 요충지를 차단시켜 주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고, 호질은 포충을 위해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주연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먼저 사방에서 나와 공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러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연은 수하의 현재 있는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역습했다. 포충은 싸움이 불리하게 되었고, 호질 등도 모두 물러났다.

{{{#951015 손씨(손성)의 이동평(孫氏異同評)에서 이르길: 《위서》[5]와 ‘강표전(江表傳)’에서는 (주연이) 경초 원년(237년)과 정시2년(241년)에 두 차례 출정하였으며, 호질과 포충을 격파시킨 것은 경초 원년(237년)이라고 했다. 《위지》[6]는 《위서》에 의거하여 호질 등이 주연에게 격파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직접 주연이 물러갔다고 말했다.

《오지》(주연전)의 말에 따르면 적오 5년(242년), 위나라의 연호로는 정시 3년에 위장 포충이 주연과 싸웠고, 포충이 불리해 호질 등이 물러간 것이지만 위소제기와 손권전을 보면 이 해(242년)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이것은 진수가 가화 6년(237)을 적오 5년(242)으로 착각한 것 뿐이다.}}}

권56 「주연전」

3.17. 요동 진출(239년), 吳

2년(239년) 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茞), 정주(鄭冑), 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 장지(張持), 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
권47 「오주전」

공손연한테 배신당한 것이 불과 몇년 전인데 어떻게 가서 전과를 올렸는지 의문이다.

3.18. 작피 전투(241년), 吳

(241년)여름 4월, 위장군(衛將軍)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회남(淮南)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피(芍陂)를 무너뜨리고 안성(安城)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威北將軍) 제갈각(諸葛恪)이 육안(六安)을 공격했다. 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이 작피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中郎將)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주연(朱然)이 번성(樊)을 포위하고, 대장군(大將軍) 제갈근(諸葛瑾)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권47 「오주전」
이에 앞서 고담의 아우 고승(顧承)과 장휴가 함께 북으로 수춘(壽春)을 정벌했는데, 전종이 당시 대도독이 되어 위의 장수 왕릉(王淩)과 작피(芍陂)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군세가 불리하니, 위의 병사가 승세를 타고 오영장(五營將) 진황(秦晃)의 군대를 함몰시키자, 장휴와 고승이 분격하여 싸웠다. 마침내 위나라 군대를 주춤거리게 했다.

당시 전종의 아들은 전서(全緖)와 전단(全端)도 모두 장수가 되었는데, 적이 물러가는 틈을 인하여 이에 진격하였고, 왕릉의 군대는 퇴각하게 되었다. 당시 논공행상을 하는데, 적을 머뭇거리게 한 것을 큰 공이라 하고, 적을 퇴각시킨 것을 작은 공이라 여겨, 장휴와 고승은 모두 잡호(雜號)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편장군이나 비장군에 그칠 뿐이었다.
권52 「고옹전」 링크
주연이 번성을 공격할 때는 여거와 주이가 성 밖의 포위를 격파시켰으며, 돌아올 때 편장군으로 임명됐다.
권56 「여범전」 링크
적오 4년(241), 주연을 수행하여 위나라 번성을 공격하러 갔을 때, 번성의 외부 포위벽을 무찌를 계획을 건의했다. 주이는 돌아와서 편장군으로 임명됐다.
권56 「주환전」 링크
여름 5월 오(吳)의 장군(將) 주연(朱然) 등이 양양(襄陽)의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간보진기(干寶晉紀) - 오나라 장군 전종(全琮)이 작피(芍陂)를 침범하고, 주연(朱然), 손륜(孫倫)의 5만 병력이 번성(樊)을 포위하고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조중(柤中)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당하였으나 번성(樊)이 에워싸여 급박해졌다. 선왕이 말하길 「조중의 백성 10만이 강의 남쪽에 떨어져 갈팡질팡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으며 번성은 공격을 당하여 수개월 동안 포위가 풀리지 않으니 긴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이를 토벌하고자 합니다.」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적들은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는데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의 아래에서 (기세가) 꺾였으니 스스로 파멸당할 형국에 있으므로 응당 좋은 계책으로 방어해야한다.」고 하였다. 선왕이 말하길 「병법에 이르길 : 장군이 유능한데 수비하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속박하는 것이요 장군이 무능한데 맡기는 것은 군대를 복멸시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경이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직의 커다란 걱정입니다.」 6월에 제군을 통솔하여 남정하였고 거가(車駕:황제)가 진양성의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선왕은 남방이 무덥고 습하므로 응당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경기병을 시켜 도발하였으나 주연이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제군들로 하여금 휴식하고 목욕하도록 명령 내리고는 정예를 고르고 선봉에 설 병사들을 모아 호령을 펼치고는 반드시 공략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 등이 이를 듣고는 마침내 밤중에 도망갔다. 추격하여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러 크게 살육하고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6월 29일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권4 「삼소제기」 링크
정시 2년(241), 오나라 장수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乙修)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鄧塞)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 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하후유를 겁쟁이라 했지만 몇몇 이들은 이게 적은 숫자로 적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았으며, 소리로 그들을 구원한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후유는 오히려 이 때문에 소환당했으며 태복이 되었다. - 「위략」
권15 「장기전」 링크
오나라 대장 전종(全琮)이 수만 병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다. 당시 양주의 병사들은 대부분 휴가 중이었고, 남아서 지키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손례는 직접 자신의 위병(衛兵)을 인솔하여 적에 대항하여 작피(芍陂)에서 교전했다. 싸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장수와 병사의 과반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손례가 탄 말은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손에 북을 쥐고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분투하였으므로 적은 퇴각했다.
권24 「손례전」 링크
오(吳)나라 대장(大將) 주연(朱然)이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호질은 경무장한 군대를 인솔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므로 가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호질이 말했다.

“번성은 지세가 낮고 병력도 적으므로 마땅히 군대를 진격시켜 그 외곽에서 구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마침내 병마(兵)를 추슬러서 포위된 번성에 다다르자 성안이 곧 안정되었다.
권27 「호질전」 링크
정시(正始) 초년(240), 왕릉은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임명되었고, 가절도독양주제군사(假節都督揚州諸軍)가 되었다. 2년(241) 오(吳)나라 대장(大將) 전종(全琮)이 이끄는 수만 명의 군사가 작피(芍陂)를 침범해 오자, 왕릉은 각 군대를 이끌고 맞아 토벌하러 갔으며, 적과 제방을 차지하려고 힘껏 싸운지 며칠 만에 적군이 물러나 달아났다. 왕릉은 승진하여 남향후(南鄉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1,350호를 받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하였다.
권28 「왕릉전」 링크
정시 2년(241)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芍陂)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孫倫)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柤中)을 약탈하자 선제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廟堂)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선제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주선(舟船-배),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 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진서』 권1 「선제기」

3.19. 육안 공략(243년), 吳

6년(243년) 봄 정월, 신도군(新都)에서 백호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제갈각(諸葛恪)이 육안(六安)을 정벌하고, 위나라 장수 사순(謝順)의 진영을 격파시켜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권47 「오주전」
是歲,諸葛恪大破六安,殺魏將謝景,[35]收其民而還。魏司馬懿率軍入舒,恪遷於柴桑。
이 해, 제갈각(諸葛恪)이 육안(六安;여강군 육안현)을 대파하여 위나라 장수 사경(謝景)을 죽이고[35] 그곳의 백성을 거두어 돌아왔다.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거느리고 서(舒;여강군 서현)로 들어오자 제갈각은 시상(柴桑)으로 떠났다.
『건강실록』 권2
정시 4년(243) 가을 9월, 선제가 제군(諸軍)을 이끌고 제갈각을 공격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군이 서(舒-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선제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둔수(屯守)를 크게 일으키고 회양(淮陽), 백척(百尺)의 두 수로(渠)(회양거, 백척거)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潁水)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개전漑田이) 만 여 경(頃)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 회북(淮北)에 창유(倉庾-쌀 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양(壽陽-수춘)에서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9] 농관(農官), 둔병(屯兵-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9] 壽陽(수양)은 (진서) 식화지에는 壽春(수춘)으로 적혀 있다. 살펴보건대, 동진(東晉) 때 처음으로 壽春(수춘)을 壽陽(수양)으로 고쳤으니 이곳에서는 응당 壽春(수춘)으로 적어야 한다. 진서 중에서 수춘, 수양이 뒤섞여 나오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는 이하에서 다시 교정하지 않는다.
『진서』 권1 「선제기」
적오 연간, 위나라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이 제갈각을 공격하려고 도모했을 때, 손권은 마침 병사를 출동시켜 이에 대응하려고 했지만, 점을 쳐서 형세를 살피는 자가 불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제갈각에게 시상(柴桑)으로 옮겨 주둔하도록 했다.
권64 「제갈각전」

3.20. 2차 조중 정벌(246년), 吳

적오 9년(246년) 봄 2월, 거기장군 주연(朱然)이 위나라의 조중(柤中)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권47 「오주전」
9년 (246), 주연은 재차 조중으로 출정하였다. 위나라 장수 이흥(李興)등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주연의 퇴로를 끊었다. 주연은 밤에 출격하여 이홍 등을 반격했다. 주연의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
권56 「주연전」
{{{#951015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이 해에 오나라 장수 주연(朱然)이 조중(柤中)에 들어와 수 천명을 참하고 노획하므로 조중의 백성과 관리들 만 여가가 면수를 건넜다.

사마선왕이 조상에게 말했다. "만약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반드시 다시 도적들을 불러올 것이니 응당 당분간 머무르도록 해야 하오."

조상이 말했다. "지금 면수의 남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면수의 북쪽에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선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사물은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한 것이고 위태로운 곳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서 이르길 : 성패는 형(形)에 있고 안위는 세(勢)에 있으니 형세는 무리를 이끄는 요체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소. 만약 적 2만명이 면수를 끊고 3만명이 면수 이남의 군대와 대치하며 만명이 육로로 조중을 습격한다면 그대께서는 장차 어찌 구하려고 하시오?"

조상은 듣지 않고 끝내 (면수 이북으로 간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주연이 이후에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권4 「삼소제기」
정시 7년(246) 봄 정월, 오나라가 조중을 침범하자 이하(夷夏;이민족과 한족) 만여 가(家)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를 건넜다. 선제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曹爽)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장책(長策)이 아니오.”
선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물건은 안전한 땅에 두면 안전하고 위태로운 땅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런 고로 병서(兵書)에서 이르길, ‘성패는 형(形)에 달려있고 안위는 세(勢)에 달려 있다’고 했소. 형세는 여러 사람을 부림의 요체이니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소.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沔水)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제군(諸軍)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柤中)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조중(柤中)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진서』 권1 「선제기」

3.21. 왕창의 이릉 정벌(250년 ~ 251년), 魏

12월 27일 동해왕 조림이 세상을 떠났다. 18일, 정남장군 왕창(王昶)이 장강을 건너 급습하여 오나라 군사를 격파시켰다.

가평 3년(251) 봄 정월 형주자사 왕기(王基), 신성태수 주태(州泰)가 오를 공격하여 격파시키자 수천 명이 항복하였다.

2월 남군(南郡)에 이릉현을 설치하여 항복하여 온 사람들을 거주시켰다.

3월 상서령 사마부(司馬孚)를 사공으로 삼았다.

4월 9일 정남장군(征南將軍) 왕창(王昶)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임명했다.
권4 「삼소제기」

3.22. 동흥 전투(252년 ~ 253년), 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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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제갈각의 북벌(253년),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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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관구검의 난(255년),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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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제갈탄의 난(257년 ~ 258년),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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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동으로 온 강북 유민들

한편 강북의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도록 하는 노력 또한 많았다.

손유는 영안 사람 요조를 양안현의 장으로 임명하고 무석 사람 안연을 거소현의 장으로 삼아 구강, 여강에서 항복하여 귀의하는 자들을 얻었다.

손교도 역시 지속적으로 귀의를 노렸다. 한번은 그의 부하가 위나라 변방의 장리 미녀들을 붙잡아서 손교에게 바친 적이 있었지만 손교는 거기서
지금 우리가 주살하려는 자는 조씨(曹氏)이거늘,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지금부터는 그의 노약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라고 하니 거꾸로 장강(江)과 회수(淮)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귀의한다. 이 두 명의 행동은 시기가 모호하다.

회남의 인구들이 계속하여 손권한테 귀의하자 조조는 212~213년의 유수구 전투 이후 다음과 같은 말로 백성의 이주를 생각한다.
옛날 내가 관도에서 원본초(원소)와 대치하고 있었을 때, 연(燕) 땅과 백마(白馬)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백성들은 도주하지 않았고, 적 또한 감히 침략하지 않았소. 지금 회남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오?
이를 들은 장제
그때 조정의 병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성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을 이주시키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들을 잃었을 것입니다. 원소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유성을 제압하고, 남쪽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향하고, 형주가 항복한 이후로 위세는 천하에 떨쳤으며, 백성들은 다른 나라로 가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옛 땅을 연연해 하지만 실제로는 이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마음 속으로는 반드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만류에도 불구하고 근처 백성들을 모두 내지로 옮기려하지만 고향을 떠나기 싫던 장강과 회수의 주민 10여만 호가 오나라로 이주해버린다.

손권이 어떻게 해서도 얻을 수 없던 일이 조조의 삽질 하나로 덜컥 넘어온 셈. 조조는 이런 결과에 나중에 장제를 보며
본래는 단지 적을 피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모두 쫓을 줄이야.
라며 크게 웃을 뿐이었다.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이냐 하면, 손성의 진양추나 진서 지리지에서 멸망 당시 오나라의 호구수가 52만 3천 정도로 나온다. 물론 이 10여만 호가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많은 수가 이주했다는 뜻일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손소는 수십 년 동안 변방의 장수가 되어 있으면서 병사들을 잘 훈련시켜 죽을 힘을 다해 서로 돕도록 했다. 그는 항상 변방을 경계함에 있어, 멀리까지 정탐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먼저 동정을 알고 그에 대비했으므로 지거나 패하는 일이 드물었다. 청주(青)ㆍ서주(徐)ㆍ여남(汝)ㆍ패군(沛) 일대의 사람들이 자못 와서 귀의하였다. 그 결과 회남(淮南) 땅과 장강 연안에 주둔해 있던 병사들과 척후병들도 모두 군대를 철수하고 멀리 이주하여, 서주(徐)ㆍ사수(泗)ㆍ장강(江)ㆍ회수(淮) 일대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각기 수 백 리나 되었다.
「손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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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패 원인

오나라는 여러 자잘한 승리를 거뒀고, 석정과 동흥제에서는 위나라의 침공군을 대파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으나, 결국 회남의 요충지인 합비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위나라 방어군의 규모가 손권군보다 크게 강했던 것도 아니기에 더욱 아쉬운 성과다.

다만 참패했다기에는 군사의 손실이 크지 않다. 오나라의 전략은 국력을 쥐어짜서 북벌을 행한다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찔러보고,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점령하는데 실패하면 후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관점에 따라 전투의 승리를 전략적 성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다시 반격당해 오히려 큰 패전을 겪는 것보다는 낫다고 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합비를 점령하지 못한 결과, 오나라의 중원 진출은 성공할 수 없었다.

어째서 오나라는 합비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을까?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꼽는다.

5.1. 손권의 군사적 재능

손권의 수명이 긴 터라 위-오 전쟁의 대부분은 손권의 집권기에 이루어졌는데, 해당 기간의 전쟁들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총사령관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손권 항목을 보도록 하자. 물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료, 이전, 악진이라는 백전노장 조합인 것도 어느 정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결과가 너무 심하게 나빴고, 이는 손권의 군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성전은 어려운 싸움이다. 천하의 항우조차 공성전에선 의외로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만 공성전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은, 야전에서도 장료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에게 처참할 정도로 털렸다는 점이다.

손권 자신은 한 나라의 군주였기에 선봉으로 싸우진 못했으며, 나름 뛰어난 무재를 지녔다고 해도 장료와 비교할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고,[7] 총사령관으로서 더더욱 중요했던 군략에서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손권이 성공적으로 군사 작전을 행했던 이술의 반란을 격파할 때나 조조와의 유수구 전투를 감안하면, 손권의 군략이 절대적으로 낮은 정도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아버지인 손견이나 형인 손책에게는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손견은 (아무리 원술이 사재 탈탈 털어 줬다지만) 병주군과 중앙군을 흡수한 양주군벌인 동탁을 상대로 사실상 혼자의 힘으로 낙양을 수복했고,[8] 일단 최정예에 해당할 중앙군의 일원으로 서량쪽 변장 한수 토벌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손견의 뒤를 이은 손책 강동을 평정한 것, 손책 사후 주유가 강릉에서 조인이랑 대등하게 싸운 것을 보면 분명히 손권의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을 듯 하다. 물론 손권 사후의 합비 전투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문제.

5.2. 세병제(世兵制)

손오 세력은 세병제를 군사 제도로 사용하였는데, 손오식 세병제는 타국의 병호제와는 달리 손권이 오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장수들에게 봉읍이라는 명칭의 일정한 토지를 분배하고, 그 토지의 수입과 주민들로 독자적으로 군비를 갖추게 하여, 유사시 손권의 소집에 응하도록 하는 체제였다.[9] 즉,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수들이 저마다 군비와 군제, 사용하는 무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조직한 사병을 이끌고 손권의 지휘하에 연합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요컨데 손오의 군대는 이때까지도 촉나라나 위나라와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정치가 아닌 호족의 영향이 한나라 말기 때와 비교해 별반 약해지지 않은 만큼 반동탁 연합군과 그 맹주인 원소의 축소판이 오나라의 호족들과 오왕인 손권인 셈이었다. 이는 장수(호족)들이 스스로 전쟁준비를 하기에 중앙 측에서 군비 부담이 적다는 경제적 이점이 있지만 그만큼 통솔이 잡히지 않아 호족들과 분쟁이 생기면 그대로 분열이 될 가능성이 높고 각개격파에서 대처하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방어전 같은 상황이면 자신들의 이권을 위협받으니 호족 측도 활발히 지원했지만 오의 지역을 넘어선 점령은 대부분이 중앙 측이 득보는 구조라 호족 측에선 어쩔수 없이 참전하는 상황이라 의욕이 없어 총공세에선 상당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고, 중앙측도 마냥 이득이라고 보긴 힘든 게 이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다간 중원전체도 아니고 오나라 안에서 군벌을 양산할 위험성도 있었다. 즉 중앙 측은 군벌의 양산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면서도 활약을 시키지 못하는 영 애매한 입장이었고 호족 측도 중앙을 위해서 자기 군세를 날리기 싫은 총공세에 대해 영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5.3. 강북 강남의 차이

적벽 전투에서도 그렇고, 북방군은 강남으로 내려오면 전염병 등으로 영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걸 반대로 적용하면 강남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남군은 장강 이남에서는 결코 북부군에 밀리지 않는 전투력을 발휘하였으나, 장강을 건너가 공격했을 때의 전적은 처참할 정도다. 기후와 풍토적인 문제도 있고, 위나라의 병사들이 장강의 페널티를 입지 않고 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기병의 비중이 적은 강남군이 평지인 합비 방면에서, 조조군의 기병과 맞서기가 쉽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합비 공방전이 대다수 공성전이었기에 기병이 개입할 여지가 부족하긴 하다는 반론 또한 존재하나, 공성이란 것은 장기전으로 넘어가기 쉽고, 장기전이 되면 기병을 중심으로 한 위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결국 오나라는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즉, 공성전이었다고 기병 전력과 무관하단 것은 아니란 것이다.

통상적으로 강남군이 강북의 군대에 약한 것은 중국의 전통(...)이었고, 이를 기병 중심의 북부와 보병, 수군 중심의 강남의 병종차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사를 살펴보면 선진시대에 남방의 강국으로 (楚)가 있었는데 서주 소왕이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춘추시대에는 북방 제후국들과 크게 붙은 3번의 회전 중 1번을 이기고 2번을 졌다.

첫번째는 성복 전투인데 이 경우는 영윤 자옥이 후퇴하라는 초성왕의 명령을 듣지 않자 성왕이 분노해서 증원군을 보내주지 않았고, 북방 제후군은 진(晉), 진(秦), 제(齊)라는 3대 강국이 모두 참여한 전투였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있다.

두번째는 필 전투 초장왕 진(晉)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세번째는 언릉 전투로 이번엔 진여공이 친정한 진(晉)이 초공왕이 친정한 초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이 경우는 첫째 날 전투가 끝나고 공왕이 지휘관을 불렀으나 지휘관이 마침 술에 취해 있던 상태였고 이 때문에 공왕이 겁먹어 도망간 사례다. 다만 필 전투도 진(晉)의 지휘부가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진과 초는 필과 언릉의 전투에서 한번씩 승패를 주고받음으로서 나름 자웅을 겨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전체적인 국력은 진(晉)이 더 강력했지만 남북 군대의 전투력 차이보다는 군벌국가인 진(晉)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남방과 북방이 붙은 사례는 가 붙은 애릉 전투가 있다. 이 전투는 오-노 연합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을 보면 마냥 남방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초나라의 패전은 이상하게 많아진다. 초소왕 시절에 입은 피해는 초혜왕 대에 나름 복구하여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초도왕 오기(전국시대)를 등용했을 때는 잠시나마 북쪽의 나라들을 압도했고 초선왕 초위왕까지만 해도 강력했으나 초회왕 시절부터는 싸우기만 하면 지는 군대가 되어버린다. 이 무렵에 조무령왕이 호복기사 개혁을 단행하는 것을 고려하면 기병의 전투력이 아직 후대처럼 강하지는 않았어도 척후, 정찰 쪽에 활용하기 시작하자 말을 기르기 어려운 초나라가 패전을 거듭했을 수도 있다.

다만 경양왕 대에 영(郢)을 잃은 후 초나라의 수도는 진(陳), 수춘 등 강북에 있었기 때문에 강남에 위치한 국가는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장강과 그리 멀지 않은 수춘이라면 또 모를까, 진은 장강에서 한참 먼 중원 동부의 한복판에 있다.(...)

이후 처음으로 오월-형초 땅에 기반을 둔 세력이 손오 정권이다.[10] 이후 남북조시대에는 남조 정권이 일시적으로 북벌에 성공한 사례는 다수 존재하나 대부분 화북이 분열된 상태거나, 아니면 내분으로 혼란한 상태였고 화북이 안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토해내고 역으로 쭉쭉 밀렸다.

오대십국시대 때는 화북의 오대와 강남의 제국(諸國)으로 나뉘어졌는데,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나씩 오대 및 그 후신인 송나라에게 각개격파당해 흡수되었다.

주원장의 명나라가 강남을 기반으로 통일한 후에야 이런 잔혹사가 끝났다. 또한 명나라는 전근대 중국사에서 유일하게 남방 정권이 북방 정권을 멸망시켜 흡수한 사례이기도 하다.

정리해보면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명나라 단 한 나라만이 남쪽에서 일어나서 천하를 통일했다. 손오 정권 역시 이런 강남 정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북조가 안정적일 때는 남조의 북벌이 성공한 사례가 한 손에 꼽을 정도며, 북조가 불안정한던 때, 손오의 경우 회남삼반 때는 지휘관의 능력이 떨어졌다. 남조로서는 북조의 혼란을 틈타는 것이 한세충, 맹공 같은 희대의 명장이 나오지 않는 이상 기대해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데 그 기회인 관구검의 난과 제갈탄의 난을 허무하게 놓쳤으니 이는 손오 정권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6. 기타 창작물

6.1. 창천항로

파일:attachment/4-newhdol.jpg
장료가 온다!!(遼來來)

합비 전투를 유명하게 한 계기가 된 만화. 료래래(遼來來) 또한 이 만화를 통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위의 2차 합비 전투에 나온 만화도 창천항로의 한 장면이다. 작중의 장료무쌍을 보면서 괜시리 쪽수 믿었다가 제대로 개털린 오나라 병사들의 장료에 대한 공포를 간접체험 할수 있다.[11] 위 장면의 경우, 이마가 좀 튀어나온 양반이 손권.

6.2. 진삼국무쌍 시리즈

6.2.1. 합비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합비 전투(215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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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합비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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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많은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합비를 도시로 구현하지 않아서 주로 수춘을 합비라고 여기고 합비 공방전을 치러야 한다.[12] 그런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수춘과 건업은 거리가 꽤 멀어 실제 합비와 유수구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들과 상황이 다르다. 삼국지11 같은 경우 육지[13]vs해상전 식으로 간접경험할 수 있지만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팬들이 염원중 하나가 바로 합비성과 합비신성 구현일 정도다.

6.4. 삼국전투기

역대 삼국지 2차 창작물중 합비 전투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그려내고 많은 공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총 5차례의 합비 전투가 그려진다. 애초에 삼국전투기 자체가 최훈이 밝히듯 '장료가 주인공인 삼국지'인데 그 장료가 맹활약하는 전투니까 소홀히 그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 장료가 활약하는 합비 전투는 215년 단 한번 뿐이다.

6.5. 삼국지톡

장로를 치기 위해 한중으로 원정을 가 위기에 처한 조조의 다음 장면으로 합비 공방전이 시작되는데 시작은 장료가 이전의 생일날 생일빵을 줬더니 숙부 이건의 죽음을 꺼내들어 악진과 장료를 싸하게 만든다.


[1] 중국사 내내 화북 지방에서 강남 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루트는 세 가지가 있었다. 합비를 위시한 회하 일대를 돌파하는 길, 양양성 일대를 통과하는 길, 마지막으로 사천 지방을 건너 양자강 상류에서 내려가는 길. 후대의 영락제가 회하를 직접 돌파해 응천부(난징)을 점령했으며, 원나라는 양양을 점령하는 루트를 이용했다. 전국시대 (秦)이 (楚)를 공략할 때는 백기가 무관을 통해 남양으로 나와(남양은 이미 진나라의 땅이었다.) 초나라의 수도 지역인 언영을 공격했으며, 동시에 사마조가 파촉에서 이릉 쪽으로 나오며 지원했다. [2] 춘추시대 ,이 이 루트로 서주를 넣고 산동 반도 제나라와 패권을 겨뤘다. 한때 지도에 표기된 낭야 월나라의 수도였던 적도 있을 정도. 손책의 경우 죽기 직전 허도 기습 당시 광릉태수 진등과 싸운 적이 있다. 반면 손권은 별로 안 써먹고 조비가 두 번 이쪽으로 온 적이 있는데 뭐 결과는 알다시피 4차 합비공방전 때 조공 병력이 이쪽으로 좀 가긴 한다. [3] 선제기에 만여명을 참획했다고 나온다. 선제기의 과장이 심하단 말이 있는데 만여 명이라는 수가 나온건 선제기이지만 기본적인 서사는 배송지주에도 있는 간보의 진기를 바탕으로 했기에 사마의가 큰 승전을 거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4] 수춘은 허창까지 이어지는 물길의 나누어지는 요지이다. [5] 왕침의 위서 [6] 삼국지 위지 [7] 215년 소요진 전투의 경우 후퇴할 때 최후미에 섰다가 장료의 추격을 받았는데, 능통과 뭇 장수들의 희생, 장료가 손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면 퇴각전에서 손권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8] 나머지 연합군들 중 교전 기록이 있는 인물은 하내태수 왕광, 조조 이 정도밖에 없다. 이들은 모두 동탁에게 패했으니 말 그대로 손견 혼자 싸워 수복한 것이다. [9] 손권의 오왕 즉위 후 손권은 절도(節度)라는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여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보급체계를 중앙정부의 재량으로 일원화하는 것을 시도하게 된다. [10] 항우 유방은 초나라의 유민이기는 하나 고향은 예주, 서주 쪽이었다. 항우의 수도인 팽성 역시 서주에 있다. [11] 오죽하면 위의 장면에서 오나라 병사들이 돌파당하며 생긴 피의 길이 1년이 지난 후에 조조와 장료가 무용담 주고받을 때에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 [12] 삼국지9와 10에서는 적벽대전 시나리오 이후 합비 지역에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13] 이때 손권쪽은 도시의 시설물을 파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