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이교 | |
대교 | 소교 |
大橋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의 여성이자 교공의 큰 딸, 소교의 언니로 손책의 아내. 성은 교씨(橋氏), 이름은 불명, 통칭은 대교(大橋).2. 정사 삼국지
199년 12월, 손책과 주유는 유훈의 본거지 환성을 빈집털이하고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들이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들였다.[1]대교와 소교를 아내로 맞이할 때 들일 납( 納)을 썼으니 첩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조비가 정실인 견씨를 취한 것도 들일 납( 納)을 쓰고 조예가 정실인 우씨를 비로 삼았다는 표현도 해당 한자를 썼다. 종요가 70세의 나이에 정실을 들인것도 배송지가 納을 써서 표현했다. 목황후 오씨도 유모랑 결혼할때 納쓰고 유비랑 결혼할때 納를 쓴다. 오히려 納자를 쓰고 첩실로 들인거면 조조가 변부인를 들인 것이나 유비가 첩실인 감부인을 취한 것처럼 첩이라고 명시를 하는데 정사 원문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얼치기 해석이 아직도 한국에서 무비판적으로 통용되는 감이 있다. 손책은 이전에도 자식이 있었기에 대교가 첩실일 가능성도 높긴 하지만 전란 와중에 정실을 잃은 사례는 여러 사람에게 관측되기 때문에[2] 대교가 손책이 정실이 없었던 시기에 새로 얻은 정실 후처인지 아니면 단순 첩인지를 한자로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손책은 대교 이외에 다른 처첩 기록이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다.
손책은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교공의 두 딸이 비록 떠돌게 되었으나 우리 둘을 사위로 삼았으니 역시 충분히 기뻐할 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 기록을 보면 정식적인 혼인이 아니라 약탈혼이며, 손책이 주유에게 한 말로 보아 이교는 물론이고 그녀들의 아버지인 교공의 의중을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처첩으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교는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손책이 살해당해 과부가 되었다. 청나라 시대의 야사 용합필기(庸盒筆記)에서는 대교가 손책이 죽고 몇 달 후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빙성은 불명이다.[4]
오나라 장사환왕(손책)의 부인은 교씨로, 교부인은 환왕에게 시집갔지만 두 해도 안 되어 환왕이 급히 죽었고, 부인은 몇 달 소리내어 슬피 울다가 또한 죽었으니, 절렬이 존경할 만하다.
吳長沙桓王夫人橋氏,橋夫人歸桓王未及兩年,桓王遽薨,夫人哭泣數月亦卒,節烈可欽。
용합필기 5권
吳長沙桓王夫人橋氏,橋夫人歸桓王未及兩年,桓王遽薨,夫人哭泣數月亦卒,節烈可欽。
용합필기 5권
청나라 시대의 야사 용합필기(庸盒筆記) 5권에서는 무미불해(無美不該), 즉 갖추지 않은 아름다움이 없다는 미녀들 중 한명으로 장사환왕(손책)의 교부인(대교)이 기재되어 있다.
두목은 시 '적벽'에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패배했다면 조조가 이교를 동작대로 데려갔을 것이라는 구절을 넣었다.[5] 이교의 무덤은 부의 치소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6] 현재는 소교의 무덤만 존재하고 대교의 무덤은 현존하지 않는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교 자매가 손책과 주유의 정실부인들로 취급되며, 성씨가 다리 교(橋)에서 높을 교(喬)로 바뀌어 나오는데, 이는 삼국지 시대에 성씨로 쓰이던 다리 교(橋)가 당나라 시대를 전후해서 높을 교(喬)로 간략화 되어 쓰였기 때문이다.연의에서 대교가 직접 등장하는 장면은 딱 한 장면으로, 손책이 임종하면서 아내 교부인을 불러 제부(弟夫) 주유에게 후사를 부탁하길 유언했다.
제갈량이 주유를 격노시키기 위해 동작대부를 살짝 바꿔서 말할 때와, 조조가 단가행을 읊기 직전 이교를 노리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대교가 언급되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동작대부의 문구 자체는 제갈량이 고의로 바꾼 것이지만 실제 조조가 이교를 노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보니 술에 취한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밝힌다.
4. 기타
손책과 주유의 환성 공략 직전까지 대교, 소교는 교공과 함께 지냈다는 걸 추측할 수 있기에 그 당시 대교, 소교 모두 아직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못한 15세 전후의 나이이거나 아예 그보다도 어린 나이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손책이 대교를 맞이할 때 당시 노총각 취급을 당하는 25세였다. 그리고 정사에 손책의 자식으로 아들 손소와 딸 3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교와 손책의 결혼 생활은 채 1년도 안되어 손책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에 유복자가 아니라면 대교가 손책의 자식을 낳았을 확률은 낮다. 다만 역시 상술된 대로 어떠한 이유로건 정실이 있다가 이 시기에는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정실이 아니라고는 못한다.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대교(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출처: 주유전.
[2]
유비도 정실이던 미부인을 전쟁 통에 잃었다. 아들이 촉한의 황제가 되어 추증된 감부인은 원래 첩이었고, 진짜 정실은 미부인.
[3]
출처: 주유전 주석 강표전.
[4]
이 기록이 사실일 경우 대교는 10대에 과부가 된 것도 모자라
요절 징크스의 끝판왕이 된 것이다.
[5]
출처: 번천문집 적벽.
[6]
출처: 파릉현지 인용 일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