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이교 | |
대교 | 소교 |
小橋
(? ~ ?)
1. 개요
후한 말의 여성이자 교공의 작은 딸, 대교의 동생으로 주유의 아내. 성은 교씨(橋氏), 이름은 불명, 통칭은 소교(小橋).2. 정사 삼국지
언니와 더불어 국색(國色), 즉 나라에서 으뜸가는 미인으로 199년 12월, 환성을 점령한 손책군에게 언니와 같이 사로잡혀 주유와 혼인했다. 주유와 결혼하고 10년 후 주유가 병사해서 언니처럼 과부가 되었으며, 주유의 자식들이 소교의 소생인지 불명이다.3. 기타 기록
청나라 시대의 야사 용합필기(庸盒筆記) 5권에서는 명염일류(明艷一流), 즉 맑고 아름다움이 일류라는 미녀들 중 한명으로 주유의 교부인(소교)이 기재되어 있다.당나라 시인 두목은 시 '적벽'을 지으면서 만약 적벽에서 주유가 패배했다면 조조가 이교를 동작대로 데려갔을 지 모른다는 창작한 구절을 넣었고, 이는 나관중이 연의를 집필할 때 영향을 주었다.
동풍이 만약 주랑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봄 깊은 동작대에 이교는 갇혔으리라.
東風不與周郎便,銅雀深宮鎖二喬。
번천문집 적벽
東風不與周郎便,銅雀深宮鎖二喬。
번천문집 적벽
4. 무덤
현재 대교의 묘는 현존하지 않으나 전(傳) 소교묘만 중국에 네 곳이 있다. 하나는 후난성 웨양시에 있고 과거 주유의 본적지 여강이었던 안후이성 허페이시 루장현에도 있고, 같은 성의 우후시 난링(南陵)현에도 소교묘라고 전해지는 무덤들이 현존한다. 난징시에도 소교묘라는 곳이 하나 있다. 물론 실제 인물이 정말로 여기에 묻힌것인지 아니면 전해지기를 소교의 무덤인 것인지는 좀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는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는 현대로부터 1800년이나 전인 오래된 과거이고 이 시기의 유명한 인물들의 묘소도 세월이 지나면서 다수가 실전되었는데 확실하게 연원이 쭉 내려오거나 발굴이 이루어 진게 아닌, 기록에 한줄 등장하고 사라진 여인의 묘가 세 곳이나 서로 소교묘라고 주장한다면 이곳들이 정말로 진짜인지 판단하기엔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중국인들 삼국지 유명인물들에 대한 사랑- 안후이성 허페이시 루장현의 소교묘는 공식적으로 주유묘로 모셔지는 묘소와 가까이 있는데, 루장은 옛 양주 여강현으로 주유의 본적지이다. 여기서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서기 210년, 주유가 병사하여 루장(여강) 동문 횡가 조묘항(朝墓港)에 묻혔고, 소교는 루장을 지키며 주유의 자식들을 부양하였다고 한다. 여기의 주장에 따르면 이후 13년 후인 223년에 소교가 향년 47세로 현도 서교에 묻혔다는 것이다. 옛 이름은 교부인묘이고 한나라 양식의 별독 무덤이며 명숭정 때 병란으로 훼손되어 토총 하나만 남았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묘의 문은 동쪽으로 향하여 성의 동쪽 주유묘와 멀리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2001년에 루장현 정부는 현급 핵심문화재 보호단위로 이 묘를 고시하였다. 출처: 바이두 백과 소교묘 - 안위여강소교묘(安徽庐江小乔墓) 문서
삼국시대
오나라의 이교의 묘는 부의 치소 북쪽에 있다. 오나라의 손책이 환을 공격하고 교공의 두 딸을 얻었는데, 스스로 대교를 들이고, 소교는 주유에게 시집 보냈다. 나중에 죽어서 이곳에 묻힌다.
三國吳二喬墓,在府治北。吳孫策攻皖,得喬公二女,自納大喬,而以小喬歸周瑜,後卒葬於此。
파릉현지 인용 일통지
三國吳二喬墓,在府治北。吳孫策攻皖,得喬公二女,自納大喬,而以小喬歸周瑜,後卒葬於此。
파릉현지 인용 일통지
- 후난성 웨양시의 소교묘는 파릉현지 인용 일통지에 기록이 전하는 곳이다. 여기의 주장에 따르면 이 묘지 일대는 삼국시대 당시 주유의 군부가 있던 곳으로, 소교의 묘는 당시 군부의 화원이었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 화원이라서 그런지 묘지의 환경은 조용하고 꽃과 나무가 무성하며 묘지 꼭대기에는 두 그루의 정자가 심어져 있다. 정원 내 건축물은 벽돌과 나무 구조로 청록색 유리로 덮인 강남의 정원 양식을 가지고 있다. 무덤 앞 묘비는 높이가 약 1m로 '소교의 묘'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청나라 가경제 이전에는 무덤의 수리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던 곳이라는데 파릉현지에 따르면 '가경 2년(서기 1797년), 지부 심정영이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또 기록이 없다가 광서 7년(서기 1881년)에 육보종(陸保宗)이 다시 짓고 무덤 위에 여정 2주를 다시 심었다고 한다. 1993년에는 묘를 증축하여 둘레에 담장을 쌓았다. 또한 묘에는 송나라 소동파의 필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곳은 악양루와 함께 국가급 중점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출처: 바이두백과 소교묘 - 호남성악양시경점(湖南省岳阳市的景点) 문서
- 안후이성 우후시 난링현 국경문화관에도 중산공원 옆에 작은 묘가 있다. 남릉현지(南陵縣志)에 따르면 이 묘는 건륭 44년(1779년)에 조성됐다. 당시 지현(知縣)이 꿈에서 소교가 자신의 묘가 향유사 옆에 있다고 하소연하여 다시 묘를 짓게 한 것이라는데 주유가 이곳의 장을 지냈고, 소교가 죽은 후 남릉에 묻히면서 그 근거가 마련돼 세간의 인정을 받았다는에 이쪽의 주장이다. 여기는 아예 주유와 소교가 합장되었다고 주장하는지라 난릉 소교묘 앞에는 '동오대도독 주공근과 교부인의 묘'라고 양각한 거대한 비석이 있다. 출처: 바이두백과 소교묘 - 안휘남릉소교묘(安徽南陵小乔墓)
5.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교 자매가 손책과 주유의 정실부인들로 취급되며, 성씨가 다리 교(橋)에서 높을 교(喬)로 바뀌어서 나오는데, 이는 삼국지 시대에 성씨로 쓰이던 다리 교(橋)가 당나라 시대를 전후해서 높을 교(喬)로 간략화 되어 쓰였기 때문이다.주유가 조조와 싸울 것인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인지 갈등하던 중 제갈량이 주유에게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란 시를 살짝 바꿔서 '조조가 절세미녀 이교를 원한다'는 시로 전하자 격노한 주유는 조조와의 결전을 단행한다. 이는 정사에서는 없는 장면으로, 사실 주유는 갈등하지도 않고 곧바로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조조가 단가행을 읊기 직전에 자신이 교공과 친분이 있었던 시절부터 이교 자매를 키잡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 전에 손책과 주유가 가로챘다며 강남을 평정하고 나면 이교를 동작대에 두겠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진짜로 조조는 이교 자매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유가 죽자 손권이 주유의 영구를 고향으로 보내 후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하였고, 주유에게 아들 둘( 주순, 주윤)과 딸 하나( 주씨)가 있다는 것이 언급되며 손권이 주유의 남은 가족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정사에서는 이들이 소교 소생의 자녀인지 나오지 않는다.[1]
6. 기타
손책과 주유의 환성 공략 직전까지 대교, 소교는 교공과 함께 지냈다는 걸 추측할 수 있기에 그 당시 대교, 소교 모두 아직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못한 15세 전후의 나이이거나 아예 그보다도 어린 나이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손책과 주유 둘 다 이교 말고는 다른 아내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정실 여부로 여겨지는지에 대해서는 다르다. 손책은 대교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교를 첩이나 후처로 들였다고 여기지만, 주유는 따로 처가 있었다는 걸 증명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연의를 토대로 만든 창작물(게임,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에서는 소교가 본처로 여겨진다.
일설에 따르면 주유가 죽은 후 주유의 영전에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