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08:04

장평대전

<colbgcolor=#C0C0FF><colcolor=#000> 장평대전(長平大戰)
파일:external/listverse.wpengine.netdna-cdn.com/Battle-of-Changping.jpg
시기 기원전 260년 음력 9월
장소 조나라 장평 (현 중국 산서성 가오핑 시)
원인 진(秦), 한(韓) 공략과정에서 조(趙)와의 관계 악화
교전국 진(秦) 조(趙)
지휘관 백기
왕흘
사마근[1]
조괄
염파
병력 65만 45만 이상
피해 불명[2] 방어군 궤멸
포로 45만 명 참수
결과 진나라의 압승, 조나라의 쇠락.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주의3.2. 전투3.3. 포로 학살
3.3.1. 포로 학살은 진나라에 이득이 되었는가?
3.4. 결말
4. 후일담5. 규모에 대한 논란
5.1. 조군의 규모5.2. 포로학살의 실제 규모에 대한 추측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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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長平大戰
「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
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 소양왕의 명령으로 자결하는 백기의 유언

기원전 260년 전국시대 막바지 진나라 조나라간 치러진 최대의 전투.

전투의 결과는 진나라의 압승이었으며, 기록상으로 조나라 병사 약 40만 명이 참수당하고 묻혔다. 구덩이 '갱'자를 썼기에 일반적으로는 산채로 묻혔다고 후술하듯이 진나라 특유의 군공수작제 때문에라도 참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3]

수치는 고대 기록 특유의 과장일 가능성이 있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긴 어렵지만, 이 전투에서 조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력을 상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진나라의 제도는 '목 하나를 베어오면 일계급 승진'이어서, 이미 장평대전 이전에도 한(韓)나라의 15만 병사를 참수한 사건,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 24만 명을 참수한 사건 등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악명을 떨쳤다.

2. 배경

기원전 262년 조효성왕이 꿈을 꾸었는데, 좌우가 다른 색깔의 편의를 입고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니 금으로 된 금산과 옥으로 된 옥산이 있었다. 꿈에서 깬 조효성왕은 해몽을 잘하는 숙부 조숙과 서사 감을 불러 해몽하게 하였는데…….
조숙: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진 것은 영토를 얻는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는 것은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쪽난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보기는 좋으나 쓸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쯤에 진나라의 대외 전략에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합종연횡이었다. 이쯤에 진은 6국에게 '성 안 내놓으면 쳐들어 간다'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공갈협박을 일삼았다. 겁을 먹고 성을 주면 좋고, 반항하면 그걸 꼬투리 삼아 짓밟아버리고 성을 빼앗는 식으로 실속을 챙겼다. 자연히 6국은 서로 힘을 합쳐 진에 대항했으니, 이것이 '합종책'이었다. 한편 진나라는 자칫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합종 연합군이 단숨에 함곡관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결국 매번 죽기살기로 싸워야 했으며, 6국을 각개격파할 궁리를 하니 이 전략이 '연횡책'이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진 소양왕(昭襄王)이 범수를 승상으로 앉힌 것이었다.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 즉 가까운 곳을 공격하고 먼 곳과는 화친을 맺는 전략을 국시로 삼아 제나라 공략을 보류하고 인접한 한나라와 위나라를 주적으로 설정했다.

기원전 265년 진은 명장 백기를 보내 한을 공략했고, 한은 영토가 남북으로 두 토막나 북쪽 상당(上黨) 지방[4]이 고립되었다. 이렇게 되자 상당군수 풍정은 진나라에게 땅을 뺏기느니 조(趙)나라에게 준다고 기원전 262년 덜컥 조에 항복해버렸고, 효성왕(孝成王)은 좋다고 받았다. 그러자 당연히 진나라는 빡돌았다.[5][* 효성왕의 꿈속에서 나타난 바로 금산과 옥산이 바로 상당군을 뜻한다. 조숙과 감의 해몽이 정반대로 갈렸으나 결과적으로 둘 다 [[
델포이|틀린 말을 하진 않은 셈]].]

이때 평원군은 한나라의 성을 받는 것을 찬성했으나 군사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던 염파는 반대했고, 인상여는 병으로 회의 참여 자체를 못하게 된 상태였다. 그런데 결국은 효성왕이 지도를 받음으로써[6] 진과 조, 양국의 운명을 건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개

3.1. 주의

'전개' 단락의 내용은 소설 열국지》와 독자 연구를 포함한다. 사서의 기록만 읽고 싶다면 <백기왕전열전>을 참고하자.

3.2. 전투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7]의 명을 받들어 장수 왕흘(王齕)은 진군을 이끌고 상당을 접수하기 위해 진격했다. 상당의 군민들은 빠르게 조나라로 도주했고, 이러한 보고를 받은 진나라는 상당의 군민들을 추격했다. 조나라 군대는 빠르게 남하하여 상당의 군민들을 접수함과 동시에 진나라의 만행을 천하에 공표하며 다른 5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범수를 필두로 한 진나라의 원교근공 전략에 조나라는 고립되어 다른 5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그 후 상당의 군민들을 추격하던 왕흘이 장평에 도착했다.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의 군대가 이를 막아서며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 차례의 전투를 치른 조군은 병력에 손실을 입었다. 전초전을 치른 이후, 강력한 진군을 정면승부로 압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방어진을 건설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 이에 진군이 공세를 퍼부었지만 염파는 번번히 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급문제로 인하여 진의 대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조나라에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진나라에게 화해를 청하는 한편, 위나라, 그리고 초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절단이 진나라의 첩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진나라는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한나라의 땅인 원옹을 이용하여 수몰시키겠다고 협박해 위나라와 초나라의 연합계획을 중단시켰다.[8]

양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원활하게 병력을 보충하고 충분한 보급을 받는 조나라에 비해 진나라 군대는 왕흘의 지휘 아래에서 치러진 수차례 공세의 실패로 인하여 병력소모가 막심해 전투력이 낮아져 있었다. 장평까지 늘어진 보급선이 한나라나 위나라에 인접해있어 다른 5국에 공격받기 쉬운데다가, 초나라까지 이어진 넓은 전선은 진나라에 병력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9] 반면 조나라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방어전으로 진나라가 자멸하거나 철수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나라의 전군을 총동원해 지친 진나라군을 요격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진나라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만일 여기서 진나라가 물러난다면 조나라를 필두로 한 삼진의 반격은 기정사실이었고, 이것은 여태까지 진나라가 쌓아올린 공적이 물거품이 되어 조나라 침공을 기획한 진나라 재상 범수는 실패의 책임을 피하기 힘들 것이었다.

자신의 몰락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범수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률이 낮은 도박수를 던졌다. 조군이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범수는 조나라에 첩자를 보내 지구전을 펼치는 염파를 비방하고,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뿐이라는 소문을 내어 효성왕과 염파 사이를 이간질하고 조나라로 하여금 장평의 굳건한 진지에서 나오게 하려고 했다. 동시에 몰래 장평 주둔 진군의 총사령관을 자신의 정적이지만 당시 진나라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던 백기로 교체하고, 왕흘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이를 발설하는 자는 참수에 처하게 하도록 했다.

염파의 방어전으로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조 효성왕은 내심 염파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해를 넘기는 총력전은 조나라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며 진군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는 염파가 못마땅했다. 이로 인해 진나라에 저자세로 외교를 해야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고 생각했다. 효성왕은 염파가 나가 싸워 진군을 물리치길 바랬지만 염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를 파악한 범수는 조나라 정계에 염파가 진나라에 투항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진나라 첩자가 흘린 유언비어가 조나라에 퍼지자 효성왕은 이를 핑계로 염파를 해임하고 단기결전을 주장했으며 뛰어난 젊은 인재라는 평을 듣던 조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괄이 똑똑하기는 하나 경험이 없습니다. 이는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놓고 연주하는 것처럼 현실에선 응용할 줄 모르니 염파 장군을 그대로 두십시오. 아군의 2배나 되는 진나라 군세를 보면 잘 지키는 게 이기는 일입니다.
인상여
제 아들은 종이 위에서 공부만 했지 자질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 남편(조사)도 아들에게 미관말직도 주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 아들이 나라에 해를 주는 일은 막아주십시오.
조괄의 모친

총사령관을 실전 경험이 전무한 조괄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의 반대가 있었다. 조사는 아들 조괄이 장군이 된다면 필시 군대를 파멸시킬 것이라 생전에 염려했다. 조괄의 모친도 조왕에게 조사의 말을 전하며 조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고, 결국 조왕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와도 자신의 가문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약조를 얻어냈다. 당시 조나라에는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전하면 일족까지 처벌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효성왕은 초기의 예봉이 다 꺾이고 극심한 병력소모로 약해진 진군이 손쉬운 먹잇감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진나라와 장평의 보급선은 멀고 조나라와는 가깝기 때문에 보급의 시간차를 이용해 조나라가 군대를 총동원하여 장평으로 보낸다면 조군이 상당한 숫적 우위를 지니게 되어 진군을 제압할 것이라 보고 효성왕은 조나라의 동원 가능한 장정을 모두 동원하여 조괄에게 25만의 군사를 주고 장평으로 향하게 했다.

문제는 장평이 장기간 빗물에 의해 침식이 일어난 황토고원지대로 협로와 골짜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매복과 포위가 쉬운 지형이었다는 것이었다. 조군의 공격을 예상한 백기는 이를 이용해 미리 견고한 방어 시설들로 이루어진 U자형의 포위망을 건설한 후 조군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조괄은 새로 징집한 25만 군사와 장평에서 대치 중인 20만 군사를 합쳐 진군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는 진군은 염파의 지구전으로 인한 손실이 누적되어 있는 상태였다. 백기는 조군을 상대로 몇번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사를 후퇴시켰다. 무안군 백기가 아닌 왕흘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공언하던 조괄은 총사령관이 백기로 바뀐 것을 모른 채 자신감을 얻고 진군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하며 추격했다.[10]

승리감에 취한 조괄은 계속해서 병력을 장평의 협곡안으로 진군시키며 진군을 추격하였고, 이에 주변에서 위험을 경고했지만 조괄은 무시했다. 진군은 조군의 진격에 계속 후퇴하며 포위망의 종심까지 조군을 끌어들였고, 포위망의 양 날개에 매복군을 남겨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조군의 공격이 진군이 계획한 포위망의 끝단까지 다다랐을 때 전열을 정비한 조군은 진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묵가로 대표되는 건축기술자들을 진나라가 대대적으로 영입했던 덕택에 진나라의 야전건설 기술은 당대 최고였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백기는 공격해오는 조군에 맞서 미리 세워놓은 장평의 험지와 연계한 보루들로 강력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후 백기는 전투의 방향을 당시의 대세이던 진형 전투에서 분대 전투로 바꾸었다. 조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하고 전열이 느슨해졌을 때, 백기는 당시 보병이 대부분이었던 조군에 강력한 5,000기의 진나라 기병을 출격시켜 조군의 방진을 갈라놓고, 보병을 뒤따라 진입시켜 조군의 지휘체계를 끊어버렸다. 법가의 엄격한 규율과 군공수작제, 수많은 전투로 다져진 진군 병사 개개인의 역량은 조군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고, 지휘체계가 붕괴된 조군은 서서히 분대 단위로 사냥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백기는 조군의 후방에 매복시켰던 25,000명의 군사로 한왕산(韓王山)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조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놀란 조나라 군대는 일단 보루를 세우고 전열을 정비해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막아낸 후 퇴각하려 했으나, 퇴각로를 막아놓은 진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여 결국 진군에 포위당하게 된다. 하지만 진나라 병력의 배에 달했던 조나라 군대였기에 쉽게 쓰러지지 않았고, 조괄은 수차례 포위망 돌파 시도를 하며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백기 또한 포위는 했으나 조나라 군대의 대부분이 온전한 상태고, 조나라가 소수의 구원병이라도 보내서 협공을 가하면 전황이 단숨에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장평대전의 승부는 진, 조 양국의 행정력에 달리게 되었고, 여기서 법가로 다져진[11] 진나라가 저력을 발휘했다. 소양왕은 포위 소식을 듣고, 전국 15세 이상의 장정들에게 작위 1계급 특진과 총동원령을 동시에 내렸다. 또한 장평과 가까운 하내에 행차하여 장평에 일단 하내의 장정들을 보낸 후, 동원된 수십만의 지원군을 보내서 조나라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다. 반면 조나라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행정력이 부족했던데다가 이미 동원 가능한 장정의 대부분을 장평으로 출진시킨 상태였다.

결국 장평이라는 요새에 스스로 갇힌 조군은 진군의 포위망에 갇혀 파멸을 맞이했다. 포위된 지 46일이 지나 식량과 물이 고갈되었다.[12] 속수무책이 된 조괄은 포위망을 뚫어보기 위해 최후의 공격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으며, 결국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물론 진군의 피해도 적은 것은 아니어서 십만 단위의 사상자가 나왔다.

3.3. 포로 학살

「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출처: 《사기》 <백기왕전열전>

조괄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조군은 항복했고, 진군은 45만에 달하는 전쟁 포로를 결국 전부 참수하고 갱살했다. 그나마 15살이 안 된 소년들은 살려줬는데, 《사기》에 따르면 고작 24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3]

포로를 노예로 파는 방안은 고대 중국에 노예 시장 같은 제도가 없어서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나라가 다른 나라의 사람 수십만을 포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나라로 돌려보내자니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어서, 적을 고스란히 보내주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이라면, 투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가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던 방식 등이 있다.

포로를 죽이지 않으면 진군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었다는 주장의 경우, 진나라의 군공수작제는 적의 수급을 갖고 가야 신분을 상승시켰으며, 포로를 풀어주는 것은 병사들의 신분 상승의 길을 막는 것과 다름없었고, 이는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백기왕전열전>에는 "먼저 포로의 목을 '베고' 매장했다." 라는 대목이 있다. 다만 이 설은 신뢰도가 낮다고 할 수 있는데, 훗날 장평대전 현장을 발굴하고 보니, 사기의 기록에 나오는 '목을 베고 매장한 시체'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3.3.1. 포로 학살은 진나라에 이득이 되었는가?

고대 및 중세 시기에는 포로 학살은 당연한 것이고, 백기 입장에서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당나라에서 배향한 명장 75인에도 당당히 뽑혔으니, 고대~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백기의 학살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허나 고대 및 중세에도 장평대전의 학살은 계속해서 비판받아왔다. 삼국지로 유명한 하안도 '백기론'이라는 저서에서 백기의 학살을 대놓고 깔 정도였는데, 논지는 '이렇게 학살을 하면 대체 누가 항복을 하냐?'라는 것. 또한 진나라는 호랑지국이라 불리며 강대국인 것은 둘째치고 다른 국가들에게 힘만 센 오랑캐 취급을 받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자국민을 법가 사상으로 가혹히 통치하는 것과 더불어 장평대전과 같은 잔혹한 전쟁 때문이었다.

여기에 눈여겨볼 점은, 호왈백만으로 불린 숫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무려 45만에 달하는 포로를 백기의 뜻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진왕이었던 소양왕이나, 재상 범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학살인데, 학살에 대해서는 왕과 범수도 문책하지 않았으며[14] 사서에서는 '진나라 사람들이 백기는 죄가 없었다 여기며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진나라 사람들은 백기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대 진나라 지도부와 사람들의 마인드는 전선 지휘관이 포로 수십만 명을 학살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만행은 타국의 증오심을 키웠다. 훗날 항우를 따르던 초나라 군대가 신안대학살에 반발하기는 커녕 항우의 지시를 군말없이 따랐다는 것을 보면 항우가 유독 잔인한 학살자이긴 하나, 그러한 학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에게 당한만큼 갚아 주자는 심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항우의 측근 중에서 머리가 잘 돌아갔다는 평을 듣는 범증도 신안대학살과 그 이후 함양에서의 학살을 제지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항우를 따르던 자들 대부분은 진나라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신안대학살의 계기가 된 거록대전이 장평대전의 안티테제에 가까울 정도[15] 라 분위기를 몰기에도 좋았다.[16][17][18]

장평대전과 같은 전쟁들이 과연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그리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타국의 국민들을 어떻게 보았을지, 이것을 생각한다면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나서도 빠르게 멸망한 이유를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진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학살들이 단기적으로 진나라에게 이득을 가져왔을지언정, 훗날 있을 초한쟁패기와 신안대학살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장평대전과 초한 쟁패기 사이에 여불위가 진나라의 승상으로 집권했을 때 군법에 적군의 포로를 함부로 죽이거나 대규모로 참수 하는 행위를 금지 시켰는데 규정을 어긴 장수들은 군법을 어긴 이유로 참수시키거나 공이 있었던 자들은 그것을 고려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식읍을 몰수하여 빈털털이로 낙향시켰다. 이 덕분인진 몰라도 이후 진나라군에서 함부러 포로를 대량생매장 한다던가 참수하는 행위가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육국백성들에게 진나라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을 지언정 진시황 집권기 한정으로 발빠르게 항복과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여불위가 진나라의 군대를 호전적인 성격에서 다소 유순한 성격으로 체질개선을 해놓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4. 결말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가[19]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되어 장차 있게 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20][21]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도록 소양왕을 설득해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韓、趙恐,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를 설득하게 했다.
「武安君禽馬服子乎?」
「무안군이 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又曰:
또 소대가 말했다.
「即圍邯鄲乎?」
「곧바로 한단(邯鄲) 땅을 포위할 것입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趙亡則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武安君所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定鄢、郢、漢中,北禽趙括之軍,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今趙亡,秦王王,則武安君必為三公,君能為之下乎?雖無欲為之下,固不得已矣。秦嘗攻韓,圍邢丘,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韓、魏,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故不如因而割之,無以為武安君功也。」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남쪽으로 언 땅ㆍ영 땅ㆍ한중 땅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의 공적도 이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22]
於是應侯言於秦王曰:
이에 응후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말했다.
「秦兵勞,請許韓、趙之割地以和,且休士卒。」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ㆍ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王聽之,割韓垣雍、趙六城以和。
진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 땅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
正月,皆罷兵。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武安君聞之,由是與應侯有隙。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몇 달 이후 진나라 군대는 장평대전의 피로로 병이 든 백기 대신 왕릉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한단을 공격했지만 한단 백성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오랫동안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신릉군이 위나라에서 지원군을 훔쳐오고, 평원군 모수의 재치로 초왕으로부터 춘신군이 이끄는 지원군을 받아 올 수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신릉군, 평원군, 모수 항목 참조).

평원군은 한단에 초나라의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자신의 공을 자만했다. 한단 밖에서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사치를 벌이고 있자 한 문객이 조나라가 멸망하면 평원군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어째서 그러느냐고 간언했다. 이에 크게 깨달은 평원군은 자신의 처첩들로 하여금 전부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고, 전재산을 풀어 3,000명의 군사를 조직해 진나라의 군대가 한단을 정복하는 시간을 늦추었다.

이때 진나라에선 왕릉이 한단 공략에 번번이 실패하자 초조해진 소양왕이 백기를 불러들였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이를 매번 거절했다. 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조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범수는 자신이 가장 신용하는 측근이었던 정안평[23]에게 30,000명의 병사를 보내 진나라 병사를 돕게 했지만, 그 측근은 조,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포위를 당해 30,000명의 병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태행산맥을 넘어 하동까지 진군을 추격했고, 서로의 시체로 분수가 메워질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다. 중국 위키에선 진군의 8할이 사상했다고 기록한다.

4. 후일담

조나라는 중요한 노동력인 장정이 십만 단위로 증발하는 바람에 쇠락하고 말았다. 이후 조나라는 국력을 짜내어 약 30년 정도 버텼지만 결국 기원전 222년에 멸망했다.

이 싸움에 얽혔던 세 걸물은 비참하게 몰락했다. 염파는 연나라의 공격을 저지하고 대승을 거둬[24] 임시 상국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화려한 복귀를 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의 아들 도양왕이 즉위하고 자기를 해임해버리자, 후임 장군 악승을 공격하고 위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크게 중용되지 못했고, 조왕도 다시 자기를 불러들이려고 하니 귀국하려 했는데, 간신배 곽개의 농간으로 퇴물 취급을 받고 귀국하지 못했다. 결국 염파는 이후 초나라에서 쓸쓸히 죽었다.

장평대전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기는 장평전투 직후 바로 한단을 공격하자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자신의 측근이 바로 항복해버린 것 때문에 범수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고, 결국 범수로부터 모함을 받았다. 그 때문에 소양왕의 눈밖에 나서 승산이 없는 전쟁에 출전하라는 억지 명령을 거부하다가 끝내 두우에서 자결했다. 이때 백기는 유언으로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참회했다.[25]

범수 또한 자신이 낙하산으로 꽂았던 왕계와 정안평이 이어진 한단 공성전에서 갖은 추태를 벌인 끝에 패배하자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서에는 채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안락하게 생을 마무리했다고 전해지나, 20세기에 발굴된 죽간에 의하면 왕계와 연좌되어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50여 년 뒤 진나라 병사 20만은 일단 항복했지만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학살을 당했다.

수십만명을 참수하고 파묻은 이 때의 원한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서 산시 요리 중에는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라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 혹은 바이치러우(백기육)라는 음식이 있다. 물론 백기의 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부 요리다.[26]

5. 규모에 대한 논란

장평대전에서의 학살은 실제가 아니며 그 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사망자가 어마어마하리라는 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정말 진나라와 조나라가 각각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렀는지, 수십만 명이 한 장소에 산 채로 묻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을 품은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중국사를 뒤져보면 대표적으로 남송 주자(철학자)[27]와, 호삼성[28]이 '40만 병력이 생매장당했다는데 이들이 순순히 생매장당했을리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표했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일단 장평대전이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전투였던 것은 맞고, 전투가 벌어졌던 산시성 가오핑 시에서는 해골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이는 최근의 일이 아니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당현종대에서도 이 지역에서 다수의 해골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다. 중국 웹사이트의 토론에서도 과거에도 가오핑 시 인근 지역에서 해골이 계속 발굴되었다는 사례들을 예시로 든다.

그 후로도 산시성에서는 1970년대까지 지층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1995년에 이어 2011년에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20년에도 산시성 가오핑 시의 농민들이 사람의 뼈로 이루어진 지층을 발견하고 신고하면서 공안과 국가문물국이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

1995년 중국 국가문물국은 산시성에서 장평대전에서 묻은 것으로 추측되는 현장을 발굴했다. 참고. 발굴 보고서[29]를 보면, 시신 대부분은 위에서 내려친 흔적, 화살을 맞은 흔적이 있고 몇몇 시체는 몸통만 있을 뿐 머리가 없고, 화살에 맞은 시체 중에서는 화살촉도 함께 발견된다. 이것은 조나라 병사들이 모두 죽은 다음 매장된 것임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산 채로 매장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또한 시신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대부분 전투 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진군이 의도적으로 학살을 한 게 아니라 어차피 항복해 봐야 죽을 거라고 판단한 조군이 스스로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소지가 있으며, 중국 학자들은 산 채로 묻은 게 아니라 죽인 시체들을 파묻은 거라고 보고 있다.

이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백기왕전열전에서 조군은 46일 동안 보급이 끊긴 채 포위당했는데, '모든 병사가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절히 저항했다. 그때 조군 대다수가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리며 진군과 싸우다가 죽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진나라의 학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장평대전이 끝났을 때 조군의 규모는 크게 줄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것을 다 감안한다 하더라도, 과연 45만명[30]이나 되는 조군이 학살당하여 매장당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며, 이에 대한 반론도 꾸준히 제기된다.

장평대전 현장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유골의 수는 130개에 불과하며 1호7갱과 2호갱이 각각 크기가 너비 5m / 길이 11m, 너비 3m / 길이 55m이기 때문에 이곳에 수십만 명을 다 묻을 수는 없다. 물론 그동안 시간이 흘러 유실된 유골이 매우 많은 것은 감안해야겠지만[31] 이는 사기의 기록과 달리 너무나 작은 규모다.

또한 장평대전이 벌어졌던 산서성 가오핑 시 인근은 장평대전 이후에도 중국사에서 여러번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그동안 발견된 모든 유골이 장평대전의 유골이 아니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중국의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연대측정법도 없던 시기에는 가오핑 시 인근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전부 장평대전에서 죽은 자들의 유골로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다른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유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각에서는 당대 중국 총인구 규모 자체가 2천만 안팎이고 진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인구는 다들 수백만 정도임을 감안할 때 조군의 사망자는 실제로는 10만 명 정도고, 대부분 학살당한 게 아니라 퇴로가 막힌 뒤 전멸당하고 나서 진군이 집단으로 매장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병력을 부풀리는 관습이 있었고, 겨우 수백만 규모의 인구로 40만씩이나 되는 대군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조괄의 군대도 중국사가 의례 그렇듯이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공산이 크고,[32] 시신 한 구를 일일이 셀 여유 따위가 전장에서 있을 리 없으니, 백기가 그 과장을 그대로 믿고 호왈 40만이라고 보고했거나, 백기가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서 40만이라고 보고한 뒤, 여기에 6국을 겁주기 위해 40만을 모두 학살했다고 발표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과장이 있었다 할지라도 장평대전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국운을 건 전쟁이었던 것은 사실이며 전례없는 규모로 진행된 전쟁이었다.[33] 그 결과 사서에 40만으로 기록될 만큼 많은 수의 조나라 청년들이 죽었고, 이 여파로 조나라는 끝끝내 이때 잃은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
장평조고(長平弔古)

趙兵四十萬 生聚自何年
조나라 병사 사십만, 언제부터 모였던가?

一朝爲秦坑 是孰驅之前
하루아침에 진나라에게 파묻히니, 누가 그 앞에서 말 몰아 지휘했나?

陰雲慘白日 西風號九泉
음산한 구름이 환한 해 가리고, 서방에서 부는 바람 구천에 울부짖네.

林林億兆衆 竪子頭可縣
하고 많은 억조 군중이니, 더벅머리 아이의 머리 정도는 매달 수도 있었으리.

甘心受大戮 白骨深谷填
널리 죽임당함을 달게 받아서, 백골이 깊은 골짜기 가득 메웠네.

磷火夜夜明 難消萬劫冤
도깨비불 밤마다 일어나 비추니, 만겁의 원한은 풀기도 어려워라.

快哉杜郵劍 庶幾稍有天
통쾌하도다 두우의 검[34]이여, 아마도 하늘은 있었나 보구나.

丹河流不盡 此恨終綿綿
단하의 흐름은 다하지 않으니, 이 원한 마침내 면면히 이어지리.
-
명나라 시인 복여량의 시. 출처,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 2권.[35]

5.1. 조군의 규모

사실 호왈백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조군의 규모이다. 일단 장평대전은 보통 진군 40만, 조군 40만이 붙은 전쟁으로 알려져있는데,[36][37] 당시 상황이 기록된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至九月,趙卒不得食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
9월이 되어 조나라 병사가 식량을 받지 못한 게 46일이나 되자, 모든 병사가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來攻秦壘,欲出。
이윽고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해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為四隊,四五復之,不能出。
군대를 네 부대로 나뉘고, 너댓번을 반복해 시도했으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秦軍射殺趙括。
그러자 장군 조괄이 정예병을 이끌고 선두에서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화살에 쏴서 조괄을 사살했다.
括軍敗,卒四十萬人降武安君。
조괄의 군대가 패하자 병사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武安君計曰:
무안군은 생각했다.
「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乃挾詐而盡阬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이에 간사하게도 모든 병사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나이 어린 240명만을 남겨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포로로 잡힌 45만 명을 모두 죽인 것이다.
趙人大震。
조나라 사람들은 크게 경악했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즉 처형당한 조군은 45만 명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보면 이상하다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46일 동안 굶어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적힐 정도로 참혹한 상황에 처한 조군의 규모가 40만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조괄이 진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투에 나섰다가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이 당시 조군은 포위당한 상황에서 그냥 가만히 굶어가며 버틴 것이 아니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계속 전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총대장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 아무리 고대~중세시대의 전투에서 부상자, 사망자의 숫자가 적은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전투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만 해도 꽤 많았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런 내용을 다 감안한다면, 저 40만이라는 규모도 원래 조군의 규모에 비해서는 한참 줄어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추축군 33만 명이 포위망에 갇혔는데 이들은 소량이나마 보급을 계속 받은 상태에서 두 달을 버텨 9만 명만 살아남아 사로잡혔고 그나마도 포로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쇠약해진 독일군 병사들이 역병으로 죽어 나중에 독일로 돌아온 병사들은 6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군은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가며 한달 반을 버텼는데 남은 포로만 40만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일단 40만의 포로에 앞서 설명했듯이 백기와 진군이 전공을 뻥튀기하기 위해서 전투 중 죽은 사망자와 굶어 죽은 아사자까지 포함했다고 가정해도, 앞서 인용된 기록보다 조금 앞선 시점의 기록을 보면 중간에 포함된 5만 명의 포로가 있다.
趙括至,則出兵擊秦軍。
조괄이 조나라 군대에 이르자 곧 출병하여 진나라 군대를 쳤다.
秦軍詳敗而走,張二奇兵以劫之。
진나라 군대는 패하는 척하며 달아나면서 두 갈래의 병사들을 매복시켜 조나라 군대를 기습하기로 했다.
趙軍逐勝,追造秦壁.
조나라 군대는 승리를 좇아 진나라가 쌓은 보루까지 쫓았다.
壁堅拒不得入,而秦奇兵二萬五千人絕趙軍後,又一軍五千騎絕趙壁閒,趙軍分而為二,糧道絕。
보루가 굳게 막으니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진나라 복병 2만 5천 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끊고, 또 5천 명의 기병 한 부대가 조나라 군대와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뉘고 보급로도 끊어졌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이 기록을 본다면 저 5만의 포로가 붙잡힌 경위는 총 3가지 경우로 추측 할 수 있다.
  • 1.백기 부임 이전 왕흘이 진군을 지휘했을 때 포로로 잡은 조군 : 일단 백기는 부임하자마자 조군을 유인하기 위해 계속 퇴각하였으니, 진군이 적극적으로 전투하던 왕흘 시기에 잡은 포로도 적잖은 수였다고 볼 수 있긴 하다. 그런데 군공수작제 때문에 잡힌 포로를 죄다 죽일 정도로 잔혹했던 진군을 생각한다면, 이 당시 잡힌 포로는 잡히자마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 2.조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한 전투에서 붙잡힌 포로
  • 3.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힌 조군

1번은 서술한 이유로 빠르게 죽었다 가정하면, 저 5만의 포로는 결국 2번과 3번의 이유로 잡혔다고 볼 수 있다. 저 전투에서 포로만 5만 명이 잡혔을 정도라면, 못해도 조군의 규모는 45만에 추가로 수만의 군대가 있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조군의 규모는 총 45만이었으며, 백기가 전공을 뻥튀기시키기 위해 중간에 죽은 사망자나 아사자도 포로에 넣었을 것이다.'라고 볼 수도 있긴 한데, 이러면 이제 이 기록들이 걸린다.
진소양왕 47년 (기원전 260년)
四十七年,秦使左庶長王龁攻韓,取上黨。
47년,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王龁)을 보내 한나라를 공격해 상당 땅을 빼앗게 했다.
上黨民走趙。
상당 땅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趙軍長平,以按據上黨民。
조나라는 군대를 장평(長平) 땅에 보내 상당 땅의 백성들을 보호했다.
四月,龁因攻趙。
4월, 왕흘이 조나라를 공격했다.
趙使廉頗將。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장수로 삼았다.
趙軍士卒犯秦斥兵,秦斥兵斬趙裨將茄。
조나라 군대의 병사들이 진나라의 정찰병을 공격했으나, 진나라 정찰병이 조나라의 부장 가(茄)를 베었다.
六月,陷趙軍,取二鄣四尉。
6월, 조나라 군대의 진채를 무너뜨리고 두 개의 보루를 빼앗고 도위 4명을 잡았다.
七月,趙軍筑壘壁而守之。
7월,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쌓아 굳게 지켰다.
秦又攻其壘,取二尉,敗其陣,奪西壘壁。
진나라가 또 그 보루를 공격해 도위 2명을 잡고 그 진을 무너뜨렸으며, 서쪽의 보루를 빼앗았다.
廉頗堅壁以待秦,秦數挑戰,趙兵不出。
이에 염파는 보루를 튼튼하게 쌓아서 진나라에 대비하였으며, 진나라가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음에도 조나라 병사들은 보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기 백기왕전열전

바로 개전 초기의 기록이다. 이 당시 조군은 진군을 장기전으로 끌고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유인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때 조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부장과 도위 6명이 죽고 보루 3개를 빼앗길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못해도 이때 죽은 병사는 수만에 달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결국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장평대전에 투입된 조군의 총규모는 못해도 45만에 수만이 더 있었고, 희생자를 크게 잡으면 충분히 수십만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뻥 좀 섞으면 백만대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수치는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전국칠웅 중 진나라, 초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운용했던 것은 조나라가 맞다. 그리고 이 조나라가 전력을 기울인 싸움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망했던 것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이다.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기록, 특히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신뢰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의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기록이 굉장히 단순하다. 분서갱유 초한쟁패를 거쳐 소실된 기록이 굉장히 많아서 사마천 사기를 쓸 때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또한 사기에는 병력의 규모가 자세히 나와있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다.

또한 사기에 기록된 병력 규모를 무작정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장평대전으로 조군의 피해는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한단 공성전부터 시작해서, 몇년 지나지 않아 연나라의 침공을 악승이 막고, 그 다음 진나라의 장수 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조군 9만명의 목을 베었고, 마지막은 염파가 조나라를 구한 연조전쟁이다. 이때 사기와 자치통감은 연나라가 전차 2천 승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보통 전차 1천 승이 10만 대군을 의미함을 뜻하니 20만 대군으로 침공해왔다는 소리다.

여기에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었지만 과장이 심한 전국책이나 소설인 열국지는 한술 더 뜬다. 전국책에서는 장평대전이 끝나 '나라에 남자가 없다.'라는 소리를 듣던 조나라가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무려 13만 명을 동원하고, 연나라는 무려 60만(!)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침략한다!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라면 몰라도 연나라의 국력으로는 60만 대군이건 20만 대군이건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38] 거기다 사기의 기록이 옳다 가정하면 당시 조군은 포로 45만명이 죽은 뒤에도 9만명의 포로가 더 죽고, (전국책의 비율대로라 가정한다면) 최소한 4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연나라의 20만 대군을 상대로 싸워 이겼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당시 조나라의 인구로는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규모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제대로 피해를 집계할 수 없는 이목의 흉노족 토벌 및 기타 잡다한 전투를 감안하고 사상자 수를 늘려 잡는다면 장평대전을 전후하여 염파가 지휘한 연조전쟁까지 15년 기간 동안 조군의 사상자수는 최대 59만 가까이 불어난다.[39] 여기에 집계되지 않은 민간인 피해, 조나라가 잃은 영토에 살던 국민들의 숫자까지 감안한다면 피해는 더욱 불어난다.

59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얼마나 큰 것인지 다른 전쟁에 비추어 보자.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의 사상자는 50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마저도 16년에 걸쳐 생긴 사상자의 총합이며, 이 피해로 로마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군대는 30만이 몰살당하여 결국 패전하였는데, 이 후유증으로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춘추전국시대의 전쟁 규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5.2. 포로학살의 실제 규모에 대한 추측

논란이 많기 때문에, 중국쪽에서는 이런 저런 추측들이 많이 나오나, 일단 45만명의 포로가 있었다면 학살 자체는 가능하다는 의견이 대세다. 또한 발굴된 유골들의 상태를 보니 사기의 기록대로 수급을 취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묻은 유골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약 포로학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면 진군은 부수적인 목적 없이 그저 조군을 죽이는데만 집중했다는 뜻이다.
  • 과장없이, 45만 포로가 학살당했다. : 의외로 이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다. 가오핑 시에서 발굴되는 당시의 무기나 갑옷, 유골의 숫자가 꽤 많기 때문. 그러나 반론으로는 가오핑 시는 중국사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기에, 모든 유골이 장평대전의 사망자는 아니라는 반론 또한 있다. 또한 당시의 행정체계, 인구수로 과연 이런 대규모의 동원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40]
  • 사기의 규모가 과장되어 있었으며, 실제 규모는 수만~10만이었다. : 제일 설득력을 얻는 의견. 앞서 설명하였듯이 사기의 병력 규모는 과장되어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는 발견되는 유골과 유물이 너무 많다는 것. 가오핑 시에서 발견되는 유골의 숫자가 매우 많고, 유실된 유골까지 감안한다면 규모는 더 커진다. 다만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가오핑 시 근처는 중국사에서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던 지역이며, 정확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은 여러 유골들은 장평대전의 유골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 진군은 전쟁이 끝나고 상당의 주민들까지 모두 학살했다. : 조나라 병사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졌던 인근 지역을 진나라가 접수한 뒤, 상당의 주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하여 45만을 죽였다는 의견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악행이니 포로학살과 같이 당대의 사서에 충분히 기록될만한 내용인데,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그 어떤 저서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6. 대중매체

  •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주간 출신의 김성한이 집필한 '진시황제'에서 중요 이벤트로 나오는데, 백기가 부임하자마자 조나라 포로들을 석방해서 진나라는 조괄의 이름만 들어도 떨고, 염파는 발바닥의 때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게 하자 조나라 조정은 거기에 홀딱 속아서 염파를 파직하고 조괄을 임명한다. 조괄은 역사대로 삽질을 반복하다가 죽고 조나라 병사 45만명이 참살당하자 흥분한 한단의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 진시황의 아버지 영이인의 집을 습격한다. 조나라 조정에서 볼모가 죽으면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병사들을 보내 영이인의 집을 지키지만 병사들도 원한에 차서 폭도들을 그냥 보내주었는데, 문제는 한단의 백성들이 영이인의 이름은 들었어도 얼굴은 본 적이 없어서 변복한 영이인이 백성들 틈에 섞여 같이 "영이인을 죽이자!"라고 외치고 다니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내주었다. 이어 백성들이 여불위의 집을 습격하지만 거기서도 여불위의 하인으로 변장해서 대문까지 직접 열어주는데도 다들 못알아봐서 무사할 수 있었다.
  • 킹덤에서 장평대전에 관한 부분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었다.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패전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염파의 경질과 조괄의 무모한 작전, 백기의 40만 생매장 에피소드 등 굵직한 부분에 대해서 역사서의 기록을 따르면서, 염파가 경질된 이유를 간신배 곽개의 농간이 아니라 2년에 걸친 장기전을 견디지 못한 조나라 왕의 실책으로 설명하고 있다.[41] 그리고 가공인물로서 장평대전의 생존자인 만극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다뤄진 바 있다.[42]
  • 킹곤타의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왕흘과 염파의 대치, 조왕에 의한 염파의 경질과 애송이 조괄, 냉혈한 백기에 의한 대학살까지 그려진다. 좀 다르게 묘사된 건 조괄이 듣보잡 진나라 졸병에게 화살을 맞고 죽는 것. 백기가 일부러 듣보잡 추남 졸병을 시켰는데 활 좀 잘 쏜다는 졸병을 골라 시켰다. 조괄을 잘 맞춰 죽이면 금 100매와 진급같이 졸병으로선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지만 실패하면 노역병으로 힘겨운 노역만 시킨다는 엄명이라 그 졸병은 긴장하지만 숨어서 기다리다가 먼저 온 조괄을 침착하게 쏴서 등에 맞춘다. 조괄로서는 함정에 걸렸다는 걸 알자마자 등 뒤에 날아온 화살이라 그 고통에 정줄놓고 뒤돌아보는데 그 졸병은 다시 한번 침착하게 이마를 쏴서 조괄을 죽여버리고 총사령관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자마자 조군은 당황해하며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난다. 낙마한 조괄의 시체를 보며 백기는 그 졸병을 칭찬하고 약속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 조군은 이후에도 부장을 중심으로 저항하나 이미 사기가 바닥난 상태에 패하고 항복하려고 하지만, 역사대로 백기는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범저의 명령으로 온 다른 대신이 "장군! 재상께서 조군이 항복하면 교섭을 위하여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막으려 하지만 백기가 살기어린 눈으로 쳐다봐서 그 대신도 움찔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그 대신이 그렇다면 소년병이라도 일부라도 살려달라고 거듭 간청하여 18살 이하 소년병 240명만 살려줘서 보낸다. 이 소식에 진왕은 잘했다고 하지만 거꾸로 범저는 격분해하며 "백기 이놈이 내 명령도 씹고, 닥치는 대로 40만을 다 죽이면 누가 항복하겠느냐! 세상 인심을 다 잃고 우리 진나라를 악랄하게 만들었구나!"라며 왕에게 간청해 백기가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상관인 재상의 명령을 어겼다는 점으로 사령관직에서 일시 파면해 근신하라고 하여 진왕도 40만을 다 죽인 건 아무렇지 않게 여기나 재상이나 신하들이 안 좋게 보니 할 수 없다며 백기를 근신하게 한다.
  • 진소양왕 시기를 다룬 중국 사극 대진제국지굴기(대진제국3)에서도 당연히 비중있게 등장한다. 조군의 소년병들을 등장시켜 전쟁의 참혹함을 배가시켰다. 포위가 계속되자 지치고 굶주린 조군은 싸울 힘도 없어서 그저 누워서 멍때리고 진군은 그저 포위만 한 채 그런 조군을 지켜볼 정도. 남은 조나라 군대도 계속 버티다가 끝내 항복한다. 이 때 다른 매체에서의 묘사와 다른 점이 다른 작품들은 40만명을 한 번에 죽인 것으로 나오는데, 이 사극에서는 조나라 군대 25만명은 죽었고 포로로 잡은 건 항복 후 20만명으로 묘사된다.
    다만, 진나라 군대도 이 과정에서 20만 명이 전사했다. 결국 조괄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나 전사한다. 여기서는 조군 20만을 다 죽인 것은 백기가 아니라 범저가 진왕에게 어차피 살려두면 다시 조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며 충동질한 것으로 묘사된다. 진왕도 범저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나 차마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못해 범저에게 승상이 명령한 걸로 처리하자고 제안하자, 범저도 자기의 지시로 죽이면 나중에 자기가 외교활동을 할 때 문제가 생긴다며 백기가 알아서 죽이도록 유도한다.
    그러니까 왕이 범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범저는 백기에게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를 한 것이다. 백기는 명령은 하지만 자시에 실행케 하는데, 그러면 어두워서 잘 안 보여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조군의 얼굴이 안 보일 테니까." 라고 대답하여 죄책감을 표현한다.[43]
  • 헉 내가 조괄이다의 시작 부분이 바로 이 장평전투이다. 주인공이 조괄인만큼 당연히 역사가 바뀌어 전투 자체가 조나라의 승리로 바뀌었으며 이로 인한 나비효과가 소설의 줄거리가 된다. 여기서는 조군의 비현실적인 규모를 실제 전투병력 15만에 수송대 30만의 병력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조나라 성인장정 총동원+상당 17성의 성인장정 총동원[44]+제나라의 지원이 있었고, 그럼에도 동원상태를 몇 달 동안 유지한 것 만으로도 조나라가 몇 년정도는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이 있었다고 서술하여 어느정도 현실성을 취했다.

[1] 사마착의 손자. 사기 태자공자서에는 백기가 두우에서 자결할 때 사마근도 같이 자결하라는 명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백기가 한단 공성전에 종군할 것을 거절하면서 '우리 군사도 절반이 상했고, 관중이 비었다' 라고 언급한 것이 기록된 바 있으나, 이 말은 장평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나온 말이라 사서에서 장평대전 당시 진군이 입은 피해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3] 다만 후일 장평대전 전장을 발굴해보니 사기의 기록대로 목을 베고 매장한 시체는 극히 드물었다. [4] 현재의 창즈시, 진청시 일대의 평야지대로, 한나라 본토와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었으나 황하 유역을 진나라가 점거하게 됨으로써 분단되고 만다. [5] 일각에서는 상당 군수 풍정이 물귀신 작전으로 일부러 조나라에게 줬다고 하지만, 학계에서는 무시받는 신세다. [6] 고대 중국에서 그 지방의 지도를 준다는 것은 그 지방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형가 진시황을 죽이러 갔을 때 미끼로 진시황이 잡아오라고 한 번오기의 목과 독항 지방의 지도를 가져갔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컨셉은 《 삼국지연의》에서 장송 유비에게 서촉지형도를 바침으로써 주인을 바꾼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7] 항목에도 있지만 사서에 따라서는 이름이 범저(范雎)로 되어 있다. [8]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고, 약 30년 후 위나라는 진나라의 명장 왕분에 의해서 수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 진나라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하고 상당수의 영토를 빼앗았기 때문에 초나라는 영토수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0] 냉병기 시대 전쟁에서 두 군대가 벌판에서 회전을 했을 때 회전 자체에서 발생하는 사상자는 5% 밖에 되지 않는다. 사상자의 95%는 전투에서 패배해 진형이 무너져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면서 발생한다. [11] 당시 진나라의 행정체계는 우수하다 못해 가혹할 정도였는데, 병력의 이동이나 인부의 모집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 이유가 악천후건 천재지변이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임자를 참수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훗날, 이 가혹한 법체계는 결국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된다. [12] <백기왕전열전>을 보면, 병사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죽여 잡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13] 한 나이대를 모두 합쳐도 240명뿐이라 전체 병력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거 아니냐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전근대에는 대부분 15~16세를 성인 기준으로 삼고 그때부터 징병했기 때문에 15세도 안 되었는데 징병된 사람은 원래 징병될 나이가 아닌데 잘못 징병된 행정오류의 산물이라 수가 매우 적은 것이다. 이들의 숫자를 기반으로 정상적으로 징병된 병력의 숫자를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4] 심지어 당시 범수와 백기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수가 백기를 학살로 비난했다는 말은 《사기》를 비롯하여 어느 저서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5] 조나라와 달리 초나라는 내부 갈등으로 지휘관이 바뀌었으며 항우가 파부침주로 필사의 각오를 다지게 만든 다음 진나라의 보급을 끊는다는 승부수를 성공시켜 단기결전을 이끌어냈다. [16] 항우의 멍청함을 상징하는 속담인 금의환향이 나온 일화마저 진나라인을 학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항우에게 한 조언이 아니다. 진나라인을 실컷 학살하고 나서 폐허가 된 함양을 버리고 떠나는 항우를 만류하면서 나온 고사다. [17] 물론 그렇다고 항우의 신안대학살이 당시에도 통쾌한 복수만으로 여겨진 것은 절대 아닌 것이 유방을 비롯한 항우와 조금 거리를 둔 자들은 이 학살에 경악하여 항우를 극렬히 비판했다. 게다가 신안대학살에서 진나라인만 학살당한 것도 아니었다. 영포는 과거에 죄를 지은 후 여산에서 노역하다 도망친 바 있는데 신안대학살 당시의 피해자들은 여산에서 노역하던 죄수였다가 진나라 군사가 된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초한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그나마 복수의 대상이라 여겨진 진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의 포로와 민간인들에게도 학살로 일관한 항우는 완전히 민심을 잃어버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결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적어도 항우의 곁에 있던 측근들과 휘하의 초나라 병사들은 진나라인을 학살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진나라가 다른 나라에 엄청난 원한을 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8] 특히 초나라는 '세 가구만 남아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건 반드시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나라였으며 실제로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진승, 항우, 유방은 모두 초나라 사람이다. [19] 범수는 백기의 은자인 진나라의 재상 양후 위염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재상이 되었다. [20]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의 동생으로, 위키에 항목은 없으나 형 못지 않게 활약한 인물이다. 어부지리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1] 문제는 사기에 기록된 소진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330년인데, 장평대전은 260년이다! 다만 최근 발견된 죽간본에 따르면 소진의 활동시기는 사기보다 꽤 늦었다고 한다. [22] 여기서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라는 말은 단순히 관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백기가 삼공이라 불리는 문공(주), 소공석, 태공망과 같은 급의 공을 세운다는 중의적 의미라 한다. 전국시대의 펀치라인이라고 보면 될 듯. [23] 범수가 위나라에서 치욕을 당해 반 시체로 목숨만 부지하던 시절, 범수를 돌보고 진나라로 탈출시켜준 인물로, 범수가 진의 상방이 된 이후 낙하산으로 장군의 자리에 오른다. [24] 장평대전의 패전으로 조나라가 크게 쇠락하자 연왕 희가 공격을 시도했고, 염파의 활약으로 역으로 연나라의 수도 계가 포위당했다. [25] 다만 이 유언은 참회가 아니며, 조나라를 무찌른 큰 공을 세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6] 비슷한 사례로 한국사에서는 성계육이라는 요리의 유래가 개경 사람을 탄압하고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를 개경 사람들이 원망해 해먹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해당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27] 주자어류 134권에서 주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할 때 '장평대전의 기록은 믿기가 어렵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8] 호삼성 또한 자치통감의 해설을 할때 장평대전의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9] 링크. [30] 심지어 사기에 따르면 조군의 규모는 이것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1] 여기에 본격적으로 발굴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오핑 시의 농민들이 해골을 갈아서 비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32] 고대에는 보급을 위해서 전투병력의 몇 배나 되는 인력이 동원되었는데 이들까지 합쳐서 부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33] 숫자를 최대한 줄여서 잡는 사람도 조군과 진군은 각각 이 전쟁에서 최소한 수만에서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으리라는 예측을 한다. 당시로서는 전례없는 규모의 대전투였던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34] 두우杜郵로 쫓겨난 뒤 연이어 자결을 명받은 백기와, 결국 받아들이고 자결용으로 하사받은 칼 및 그것으로 자결한 백기의 죽음을 가리킨다. [35] 장평대전의 현장으로 추측되는 대규모 유골 발굴단지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 새겨진 한시 [36] 중국 위키피디아에는 진군 65만, 조군은 40만에 당시 상당에 주둔하다가 조나라로 넘어간 한나라 군사 5만으로 총 45만이라 기록되어있긴 하나, 후술하는 내용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규모라 볼 수 있다. [37] 가끔 중국 웹사이트에서 진나라는 100만명을 동원했으며 조나라는 50~60만을 동원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주장이니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38] 한나라도 전국칠웅 중에서 약체급 국가였지만 연나라도 마찬가지라 연소왕 시기를 빼면 뭐 대단한 행적을 남긴 것도 없고 특히나 장평대전 이후 비틀거리는 조나라를 보며 얼씨구나 하고 털어버리려다가 수도인 계가 포위될 정도로 역으로 털린다. 이런 나라가 6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저 정도로 역관광을 당하는게 말이 안 된다. [39] 이목의 흉노족 토벌 당시 10만 흉노 기병이 몰살당했다고 하는데 조군의 사상자가 2만이라 가정하고, 장평대전에서 45만 포로학살, 한단 공성전의 주력은 춘신군 신릉군이 데려온 초나라와 위나라의 원군이었으니 줄여서 5천이라 잡고,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1만, 그 이후 규가 이끈 진군의 침공으로 9만, 마지막으로 연조전쟁 당시 조군의 피해를 1만이라 가정한다면 총합 58만 5천의 사상자가 나온다. [40] 이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 현종대부터 가오핑 시 근방에서 해골이 발견된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나, 고대~중세에는 연대측정법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으며 고고학도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니 당~청대까지는 다른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유골을 장평대전의 유골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41] 곽개 도양왕(기원전 244~236) 때의 염파 재기용 방해부터 조나라가 망한 기원전 228년까지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로부터 십수년 전에 있었던 염파의 경질과 조괄의 기용에 개입했다는 것은 근거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별도의 출처가 제시되지 않는 한 킹덤의 고증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42] 285화 [43] 조나라 투항병들을 방심시키기 위해서 얼마 남지 않은 군량으로 굶고 있던 조나라 투항병들에게 밥을 먹이고, 멀쩡한 장정은 진군에 편입하고 노약자, 부상자, 어린아이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거짓 약속을 하였다. [44] 진군의 침공으로 상당 17성의 주민들이 조나라로 피난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