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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카우레의 피라미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 ―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역 |
영어 |
Memphis and its Necropolis – the Pyramid Fields from Giza to Dahshu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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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 ممفيس ومقبرتها منطقة الأهرام من الجيزة إلى دهشور | |
프랑스어 |
Memphis et sa nécropole – les zones des pyramides de Guizeh à Dahchour |
|
상형문자 | 𓉴 (Mer, 메르)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86 |
هرم منقرع
Pyramid of Menka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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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파라오인 멘카우레의 무덤이자 기자의 피라미드들 중 가장 작은 피라미드. 원래라면 높이 65m 정도의 그럴듯한 크기의 피라미드였겠지만, 바로 옆에 거대한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는 바람에 비교적으로 한참 작아 보인다.2. 모습
관이 있던 매장실 | 입구로 통하는 방 |
피라미드의 원래 높이는 65.5m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파손되며 몇 m 정도 약간 낮아졌다. 현재 높이는 약 61m 정도이며, 기단 아랫면의 길이는 약 108.5m x 108m 정도 된다. 피라미드 사면의 경사각은 대략 51°20′25″이며 석회암과 아스완에서 채석한 붉은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외벽의 아랫쪽 16층까지는 붉은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위쪽으로 갈수록 석회암의 비중이 높아지는 식이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화강암 외장재 일부가 완전히 마감처리가 되어있지 않아 꽤 거친 상태로 남아있다.[4]
처음으로 멘카우레 피라미드를 발굴한 학자는 영국의 군인이자 이집트학자였던 호워드 비셰였다. 1837년 발굴을 시작했고 그해 7월 28일에 피라미드의 안치실, 그리고 그 안에서 멘카우레의 이름이 새겨진 목재 관과 인간의 뼈를 발견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목재 관은 멘카우레보다 한참 뒤의 제26왕조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탄소연대추정 결과 뼈는 2,00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 시대에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에 사람들이 드나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누군가가 몰래 유골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호워드 비셰는 발굴 작업을 계속하던 중 피라미드 깊은 안쪽에서 아름답게 장식된 검은색 석관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석관 내부에는 젊은 여성의 유골이 들어있었다고. 비셰는 유골과 관을 배에 실어 영국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1838년 10월에 지중해에 가라앉아버리면서 현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이 관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아마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관이었을 것이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주위의 계곡에는 여러 신전들과 소규모 피라미드들이 흩어져 있다. 계곡에 위치한 신전에는 1908년과 1910년 사이 즈음에 미국 고고학팀에 의하여 발굴 작업에 들어갔고, 모래를 치우고 돌들을 정리한 결과 그 안에서 수십 개의 멘카우레를 묘사한 조각상들을 발견했다. 모두 상당히 정교한 품질로 깎아져 있어 그 보존 상태가 굉장히 좋은 편으로, 현재 남아있는 멘카우레의 조각상들 대부분은 이 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멘카우레 피라미드 바로 옆에는 3개의 작은 피라미드들이 있다. 모두 왕비들이 묻힌 피라미드들로,[5] 각각 G3-a, G3-b, G3-c라고 부른다. 맨 동쪽에 있는 피라미드가 3개 중 가장 큰 편에 속하고, 내부는 이미 도굴당해 딱히 볼만한 건 없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를 보면 북쪽 사면에 유난히 크게 돌들이 굵은 선 모양으로 푹 파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훼손 자국은 1196년에 생긴 것이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이자 살라딘의 아들이던 알-아지즈 우스만은 기자에 세워진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우상숭배의 유물로 보고 아예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우스만은 시험삼아 가장 작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부터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인부들을 시켜 밤낮으로 피라미드를 헐어내라고 다그쳤는데, 정작 피라미드 해체 작업을 시작해보니 이게 또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피라미드 석재가 너무나 무거워 옮기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돌들이 해체 도중 굴러떨어지는 등 온갖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 결국 우스만은 해체 작업을 포기했지만, 이 작업 때문에 피라미드 북쪽에 큰 훼손 자국이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자국이 바로 그것이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4]
고고학자들은 이를 보고 피라미드의 건설 원리를 추정하기도 한다.
[5]
학계에서는 멘카우레의 왕비가 아니라 그의 누이나 친척이 묻힌 피라미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