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 الواحات البحرية
콥트어: ϯⲟⲩⲁϩ `ⲙⲡⲉⲙϫⲉ
영어: el-Bahariya
1. 개요
이집트 상형문자로 쓴 와흐트 므흐트, 즉 북쪽의 오아시스
이집트 중북부 기제 주의 행정구역. 미냐에서 서쪽으로 160km, 다클라에서 북쪽으로 240km, 시와에서 동쪽으로 250km 떨어진 오아시스에 위치한다. 인구는 4만명이고, 바와티 (باويطي)가 그 중심이다. 지명 바하리야는 아랍어로 본래 바다의로 해석되지만 여기서는 '북쪽의'라는 의미이다. 이는 나일 강과 서쪽으로 평행하게 펼쳐져 있는 바하리야 - 파라프라 - 다클라 - 카르가 오아시스들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의 주요 부분은 동서 30km 정도이지만 남쪽으로 분포하는 작은 경작지들까지 포함하면 남북 50km가 넘는다.
고대 이집트 시기의 지명은 제스제스였고, 고전기에는 가장 가까운 나일 강변 도시인 옥시린쿠스의 별명인 바흐나사로 불렸다. 역사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연구가 덜 되었고 유적도 정비된 것이 별로 없다. 대신 서남쪽에 위치한 검은 사막 투어가 유명하다. 그외에 주요 이집트 최대의 화석 발견지이다. 주민들은 주로 관개 수로를 이용한 농업에 종사하고 구아바, 망고, 대추야자, 올리브 등을 생산한다. 기원전 3천년 전에 사막화가 된 이후로 거의 비가 내리지 않지만 지하수가 풍부한 덕에 수확량이 적지 않다. 농업과 함께 일대에 풍부한 철광석을 채굴하는 광공업 역시 발달하였다.
2. 역사
2.1. 리비아 방면 전초기지
다클라 오아시스와 달리 바하리야는 고왕국 시대에는 이집트령이 아니었고, 오히려 금발벽안의 리비아계인 체헤누 족의 거점으로 종종 양측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다 중왕국 시기에 일대는 이집트령이 되었고, 제스제스로 명명되었다. 제스제스는 리비아 인들에 대한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고, 질좋은 포도주를 생산하여 당나귀 대상들을 통해 본국과 교역하였다. 그후 제2 중간기에 힉소스 인들의 침공 이후 교류가 뜸해졌다가 신왕국 시기 들어 투트모스 3세의 지시로 새 우물이 파이는 등 중앙 집권력이 회복되었다. 당시 제스제스는 아비도스에 귀속되어 연공을 바쳤고, 이는 투트모스 3세의 재상 레크미레의 무덤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다만 18-19왕조 시기의 총독 아멘호테프 후이의 무덤에서 드러나듯, 총독은 현지인 중에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왕국 시기에 제스제스는 현 지명과 같은 '북쪽의 오아시스'를 의미하는 와흐트 므흐트로 불렸다.신왕국의 전성기인 19왕조에 들어 일대는 풍부한 광물 자원 덕에 중시되었다. 일대의 철광석은 룩소르 신전에 남아있는 람세스 2세의 벽화에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후
2.2. 고대
알렉산드로스 신전 유구
그리스 인들에 의해 벰드제라 불린 오아시스는 이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서부 사막 전역에 대한 총독부 및 상설 군사 기지가 세워지는 등 번영하였다. 헬레니즘 기에 일대에서는 토트 신이 따오기의 형태로 숭배되었다. 인근의 카라트 알 파라기는 토트의 화신으로 여겨진 따오기들의 미라가 매장되었는데, 후대인들이 닭으로 착각하여 '닭의 언덕'이란 뜻으로 현 지명이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외에 하토르와 콘수, 아문 역시 일대의 수호신 혹은 영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추앙받았다. 당시의 유적으로는 '황금 미라의 협곡'이 유명하다. 로마 제국기에는 수로와 우물이 정비되었는데, 일부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 바위티와 만디샤 사이에는 로마 시대 유적이 일부 남아있고, 엘 하이즈에는 개선문 유구도 있었으나 1847년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한편 콥트교 전승에 의하면 예수 12 제자들 중 바르톨로메오가 일대에 선교했다고 한다.[1]
2.3. 중세 ~ 근대
근대 시기까지 성당으로 활용되어 외형이 잘 남아있는 성 요르요스 성당 |
바와티 구도심 (카스르)의 셰이크 하마드 영묘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 자위야 모스크 |
3-4세기 알 바흐나사라 불린 일대는 유목 민족들의 침공에 시달렸고, 몇몇 교회와 수도원이 지어졌다. 7세기 중반 이슬람 정복 후에는 현재의 바하리야 혹은 알 카스 오아시스로 불렸고, 이슬람 교리에 따라 특산물이던 와인 수출이 중단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자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파견한 우크바 빈 나피는 일대에 잔존하던 다신교도들을 개종시켰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17세기까지 기독교도로 남았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바위티에는 다르 알 아브라스라 불린 수도원이 옛 성화를 간직한 채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1813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바하리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매년 2천 피아스터의 세금을 거두어갔다. 이는 후일 2만 리얄로 증가하였고,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른 오아시스보다 더 많은 수인 5백의 주둔군이 배치되었다. 1819년부터는 유럽 여행가들이 방문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2.4. 근현대
19세기의 개선문 묘사 삽화 | |
지진으로 붕괴된 후 현재의 개선문 유구 |
그러던 1916년 서쪽 리비아 내륙 ( 페잔)에 세력을 구축한 사이드 무함마드 빈 알리 알 이드리시 휘하의 세누시 부족이 사막을 건너 바하리야를 점령하였다. 10개월 후 영국군은 수단인 보조병과 함께 진군하여 하라 고개에 주둔하던 세누시 군을 격퇴하고 일대를 수복하였다. 당시 영국군이 세운 초소가 일부 잔존한다. 1934년부터는 바하리아사우루스 등의 공룡 화석이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0년대 들어 농업의 쇠퇴로 바하리야의 인구는 6천으로 줄어들었는데, 70년대부터 이집트 정부의 관개 농업 장려로 다시 2만을 넘어 현재에 이른다. 1973년에는 옛 대상로를 따라 기제와의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 관광업 역시 활성화되었다. 그러면서 기존 와하티 방언이 점차 이집트 아랍어로 바뀌고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로마 시대 미라나 5세기 콥트 교회 등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향후 일대의 유적 정비 및 관광지화가 기대된다.
3. 갤러리
피라미드 산
검은 사막
일대의 광물 원석
일대의 모래 사막
- [아흐메드 사파르 호텔 사진들]
-
파일:이집트 바하리야 호텔.jpg
3.1. 주요 유적
고대 이집트 고분 벽화
알렉산드로스 신전
3.2. 황금 미라의 협곡
1999년에 발견되어 선풍적인 관심을 받은 황금의 미라
3.3. 신전과 성채
헤라클레스 신전
알렉산드로스 신전 주변
로마 시대 성채 유적
4. 참고
이집트의 오아시스 & 사막 | |||||
서부 사막 | 와디 엘 나트룬 |
나 일 강 협 곡 |
엘아리쉬 | ||
시와 | 카타라 저지대 | 파이윰 | 시나이 사막 | ||
대사해 (大沙海) |
바하리야 검은 사막 |
동부 사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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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사막 파라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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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클라 | 카르가 |
[1]
아부 살리흐에 의하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함. 어쨋든 일대의 여러 교회들이 바르톨로메오라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