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4왕조 제2대 파라오
쿠푸 𓐍𓅱𓆑𓅱 | Khuf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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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된 쿠푸 왕의 석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쿠푸 | 𓐍𓅱𓆑𓅱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566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23년) | ||
전임자 | 스네프루 | |
후임자 | 제데프레 | |
부모 |
아버지 :
스네프루 어머니 : 헤테페레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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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메리티테스 1세, 헤누트센 | |
자녀 | 제데프레, 카프레 | |
무덤 | 기자의 대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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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제2대 파라오.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건설자다.
2. 상세
대피라미드라는 거대한 유물을 남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쿠푸 자신의 유물은 7.6cm의 작은 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1][2] 심지어 이 작은 석상도 프랑스 고고학 팀이 고대 유적의 모래를 거르다가 발견한 것이었는데, 처음 발견했을 때는 머리가 없이 몸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저 흔해 빠진 조그마한 석상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했으나 석상 밑동에 떡하니 새겨진 쿠푸라는 글자를 알아보고 기절초풍해서 머리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결국 주변의 모래를 약 3주 동안 이 잡듯 뒤지고 거른 끝에 겨우 머리를 찾아 붙여 복원했다. 현재 완성된 석상은 카이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쿠푸왕의 시대는 '제2차 이집트의 평화 시대'라고 불렸다. 후대에 람세스 2세가 전쟁 전에 기자의 대피라미드 앞에 가서 "그대의 평화 시대는 끝났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반면에 그리스인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쿠푸를 허영심이 많고 잔학무도한 폭군으로 묘사했다. 그가 묘사한 쿠푸왕은 엄청난 자기도취에 빠진 인물로 국가 경제의 안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헤로도토스는 쿠푸왕이 자신의 피라미드를 세우기 위해 노예 200,000명을 동원해 채찍 아래 노동을 강제하고, 딸에게는 매춘을 시켰다고 기록했다. 다만 헤로도토스 또한 쿠푸왕의 시대로부터 2,000년이 지났을 때의 인물이라서 옛날 이야기만 듣고 기록한 것에 불과했고, 그 주장을 완벽하게 논파하는 각종 증거들이 쏟아진 현대에는 빼도박도 못할 역사 왜곡이 되었다.
2013년 3월, 이집트 기자에서 200km 떨어진 홍해 연안의 와디 알 자르프의 항구 유적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에서 돌을 움직이는 노동작업을 지휘했던 메러라는 남자의 일지였는데, 쿠푸왕이 철권통치를 했음을 의미하는 부분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철권통치가 곧 폭군의 상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집권체제에서는 왕권을 확실히 잡아놔야 반역의 위험을 낮추고 국왕 중심의 국정 운영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군이라 칭송받는 국왕들도 스스로 또는 그 전후시대에 왕권을 다져놨다. 당장 쿠푸왕 재위 시절이 평화의 시대라는 호평을 받는데, 정말로 국가의 안녕에 관심이 없었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쿠푸의 시대는 파라오가 곧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시기였으니 왕권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름의 뜻은 "크눔으로부터 보호받다"이며, 그리스어로는 Χέωψ, '케오프스'라고도 한다. 마네토의 연대기에는 수피스 1세로 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
아내
이복남매 메레티테스
헤누트센[4]
-
형제
형이 한 명 존재했지만 병으로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 둘째인 쿠푸가 왕이 되었다.
3.1. 자녀
이들의 이름은 각종 동상이나 무덤 등에 기록된 경우도 있으나, 많은 수는 1823년에 영국인 헨리 웨스트카가 발견한 《웨스트카 문서》에 적혀 있다. 아들로 카와브[5] , 제데프레, 카프레[6], 제데프호르[7], 바우프라[8] , 바베프, 쿠푸카프[9] , 민카프[10], 호르베프가 있었다.장남 카와브는 요절하여 차남이었던 제데프레가 쿠푸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 제데프레가 형 카와브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오해도 있었는데, 이에 관해선 《 제데프레 문서》 참조. 딸로는 네페르티아벳[11], 헤테프-헤레스[12], 메레샹크, 메레티테스[13], 카메레네브티[14]가 있었다.
이집트 왕실의 근친혼 전통에 따라 카와브는 헤테프-헤레스와 결혼했다. 이후 카와브가 요절하자 제데프레가 헤테프-헤레스와 재혼했다. 호르베프는 메레샹크와 결혼했는데. 호르베프가 죽자 제데프레 또는 카프레가 메레샹크와 재혼했다. 카프레는 카메레네브티와도 결혼했다. 카프레의 제1왕비는 메레샹크로 보이나, 왕위는 카메레네브티의 아들 멘카우레가 잇게 되었다.
[1]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데, 저토록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을 지시할 수 있었다면 쿠푸의 왕권은 매우 강력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무덤 속 유물들은 규모도 크고 화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도굴 1순위였을터인데, 워낙 옛날 사람이라 수천년 전부터 계속 도굴당했을테니 유물이 남아났을리가 없다. 왕권이 매우 빈약해 파라오치곤 작은 규모였던
투탕카멘의 무덤이 도굴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원리다.
[2]
그나마 다른 왕릉은 도굴꾼들이 필요도 없고 꺼림칙해서라도 미라는 안 건드려(이것도 케바케로 저주를 못 걸게 하려고 태워버린 경우도 있었다) 멀쩡하게 남은 경우가 많은데, 대피라미드의 경우 워낙 눈에 띄니 중왕국과 신왕국을 거치며 후대 파라오들이 진작에 안에 남은 부장품을 완전히 꺼내가버리고 아예 자기 묘로 쓰기까지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판에 쿠푸의 미라가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당연지사다. 어디 모시기야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유실되어도 워낙 옛날 사람이라 신경을 안썼을 것이다. 실제로 털린 묘에서 미라를 꺼내 모아둔 곳에서 나온 미라들은 사제들조차 막다뤄서 파손된 것이 있었다.
[3]
재위기간 동안 피라미드를 3채나 지었다.
[4]
이시스 신전의 신상 목록을 기록한 '인벤토리 스텔라'라는 비석의 주인으로 알려졌지만, 해당 비석의 내용을 판독한 결과, 후대의 이집트 사제들이 조작한 비석이라는 것이 판명났다. 이복남매라는 것이 분명한 첫째 아내 메레티테스와는 달리, 이복남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복남매라고 서술한 유일한 기록이 조작된 인벤토리 스텔라라,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5]
쿠푸왕의 장남으로, 메레티테스의 소생이었으며 요절했다. 사인은 오랫동안 제데프레에 의한 살해라 믿어졌으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병사쪽으로 기울고 있다.
[6]
제데프레 이후에 왕위에 오르는 인물로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헤누트센이라는 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 한편 카프레는 쿠푸의 아들이 아니라 제데프레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럴 경우 카프레는 쿠푸의 손자가 된다.
[7]
어머니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제데프레와 카프레의 이복동생이었다고 한다. 실존인물이라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고, 여러 문서와 와디 하마트의 암각 낙서에 이름이 나타난다. 아들인 아우이브라에게 한 조언을 기록했다는 《제데프호르의 강의 문서》로 유명하나, 실제로 제데프호르가 적은 글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지혜가 후대에도 유명하여 제5왕조 시기에 제데프호르의 이름을 빌려 적은 문서로 추정된다고 한다.
[8]
형 제데프호르와 마찬가지로 문서나 암각 낙서에서만 발견된다. 광산 노동자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쿠푸 시대를 다룬 문학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빈도가 잦다.
[9]
카프레와 민카프의 친형제로 헤누트센 소생으로 추정된다. 쿠푸의 치세 후반부터 카프레 치세까지 '비지르'로 일했다.
[10]
카프레의 친형으로, 카프레에게 계승 순위가 밀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쿠푸의 치세때 비지르로 일했다.
[11]
어머니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슬랩 비석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12]
왕세자 카와브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메레샹크를 동생이었던 카프레에게 시집보내 카프레의 시대에도 왕의 시어머니로 군림했다. 무척 장수하여 카프레의 손자인 솁세스카프의 치세때까지 생존했다.
[13]
비왕족 고위 귀족이었던 아케트호텝과 결혼했다. 남편과 합장된 것을 보아 금슬이 좋았던 모양이다.
[14]
그녀의 아들이 멘카우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