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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3대 국왕
엔리케 3세 Enrique I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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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 |
출생 | 1379년 10월 4일 |
카스티야 연합 왕국 부르고스 | |
사망 | 1406년 12월 25일 (향년 27세) |
카스티야 연합 왕국 톨레도 | |
재위 |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 |
1390년 10월 9일 ~ 1406년 12월 25일 | |
배우자 | 랭커스터의 캐서린 (1388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카탈리나, 후안 2세 |
아버지 | 후안 1세 |
어머니 | 아라곤의 레오노르 |
형제 | 페란도 1세, 레오노르 |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3대 국왕. 일생 내내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고통받는 왕"(el Doliente)이라는 별칭이 붙었다.2. 생애
1379년 10월 4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딸 레오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페란도 1세, 레오노르가 있었다. 어렸을 때 투이-비고 주교 디에고 데 아나야 말도나도와 쿠엔카 주교 알바로 데 이소르나의 가르침을 받았다. 디에고와 알바로는 엔리케 3세가 즉위한 후 각각 세비야와 산티아고의 대주교가 되었다.1388년, 후안 1세는 페드로 왕의 딸 콘스탄사의 남편인 점을 근거로 삼아 카스티야의 왕을 자칭하다가 지난해에 카스티야를 침공했다가 격퇴되어 아키텐으로 달아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화해를 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이때 곤트의 존과 콘스탄사 부부의 딸 캐서린과 자신의 아들 엔리케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는 것을 단념한 존과 콘스탄사 부부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1388년 9월 17일 팔렌시아의 산 안톨린 대성당에서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엔리케 2세의 내전으로 비롯된 카스티야 왕실의 내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약혼식이 거행된 직후, 후안 1세는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공고히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 공을 아들에게 수여했다. 이때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은 대대로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390년 10월 9일 후안 1세가 부르고스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 궁전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는 왕의 유해를 깊숙한 장소에 숨긴 뒤 당시 미성년자였던 엔리케 왕자가 엔리케 3세로서 즉위하고 섭정이 정해질 때까지 "왕은 그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며 사망 사실을 숨겼다. 후안 1세 사후 엔리케 3세가 11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친모 레오노르는 1382년에 사망했고, 계모 베아트리스는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카스티야 귀족들에게 경원시된 데다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귀족으로 구성된 섭정 평의회가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 산티아고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 빌에나 후작 알폰소,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곤살로 누녜스 데 구즈만, 히혼과 노레나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 알마잔 후작 후안 후르타도 데 몬데사 등 6명이 이 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이후 왕의 행렬이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왕과 수행원들이 산 마르틴 교회 내부로 들어갔을 때, 베나벤테 공작이자 후안 1세의 의붓 형제인 파드리케 엔리케스, 트라스타마라 백작이자 파드리케의 아들인 페드로 엔리케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교회를 에워싸고 자신들도 섭정 위원회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섭정들은 이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 역시 섭정 위원회의 일원으로 들어가게 했다.
1391년, 흉년과 경제적 불안정, 전염병 창궐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때 페르난도 마르티네스라는 설교자가 세비야에서 유대인 때문에 재앙이 닥쳤으니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에 선동된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 구역을 습격해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여기에 상류 귀족들이 국가 행정부의 최고 위치에 있는 하급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섭정 평의회 내부에서도 심각한 권력 다툼 끝에 파드리케와 곤살로 누녜스, 페드로 테노리오가 섭정 위원회에서 배제되면서 금방이라도 내전이 벌어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엔리케 3세는 이런 상황을 유심히 지켜본 끝에 1392년 13세의 나이에 친정을 선포했다.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 줄곧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가 무력한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우선 섭정 위원회에서 배제되었던 귀족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귀족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했다. 이후 유대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가해 학살을 유도한 페르난도 마르티네스를 비롯한 선동가들을 모조리 체포해 투옥하고 유대인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했다. 여기에 비리를 저지른 신하들을 엄격히 처벌하고 재정을 건전하게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베나벤테 공작 파드리케, 노레나와 히혼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 그리고 트라스타마라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는 이러한 왕의 행보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이 제한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394년 3월, 그들은 나바라 왕비 레오노르[1]와 공모하여 엔리케 3세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여기에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와 종교적 최고 지위를 놓고 다투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도 가세했다. 파드리케는 보병 2,000명과 기병 600명을 시스네로스에 집결시켰고,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는 아무스코에 보병 1,000명과 기병 500명을 배치했으며, 페드로 엔리케스는 갈리시아에서 추종자들을 모았고, 나바라 왕비 레오노르는 부르고스 지방의 빌라 로아에 공모자들을 잠입시켰고, 알폰소 엔리케스는 아스투리아스에서 가신을 모았다.
엔리케 3세는 이 음모를 조기에 눈치채고 그들이 형성한 동맹을 깨뜨리기 위해 개별적으로 협상했다. 얼마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가 바야돌리드로 가서 엔리케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파드리케도 얼마 안 가 군대를 해산하고 왕의 자비를 구했다. 엔리케 3세는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의 투항은 받아들였지만, 파드리케는 언젠가 다시 반란에 가담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를 체포하여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군대를 일으켜 로아로 진군해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이모 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1394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트라스타마라 백작 페드로 엔리케스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갈리시아로 도주했지만, 그곳에서 영영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동지들이 잇따라 왕에게 귀순하거나 무너지자, 노레나와 히혼 백작 알폰소 엔리케스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엔리케 3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아스투리아스로 진군했고, 알폰소는 이에 맞서 히혼의 산 마르틴 성채에서 장기간 버텼다. 엔리케 3세의 토벌대는 장기간 포위 공격했지만 지형이 험준한 곳에 지어진 이 요새 공략에 번번이 실패해 포위가 길어지졌다. 그러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엔리케 3세는 알폰소와 6개월 간의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엔리케 3세는 1395년 7월 히온 시를 재차 포위했다. 알폰소는 음식과 무기를 비축하여 농성전을 준비한 후 엔리케 3세가 오기 전에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바욘으로 향했다. 이후 알폰소의 아내 이사벨이 한 달 동안 농성했지만, 남편이 좀처럼 구원군을 이끌고 올 기미가 없자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장받은 후 항복했다. 그리하여 근거지를 잃은 알폰소는 바욘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1396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바다호스 요새를 포위했다. 이에 엔리케 3세는 바다호스 요새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카스티야 함대에 포르투갈 해안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선박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바다호스 포위를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 주앙 1세는 엔리케 3세가 어리고 병약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1402년 8월 15일 양자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후안 1세 치세부터 시작된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1400년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인 모로코의 테투안 시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단숨에 제압함으로써 지브롤터 해협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1402년 프랑스 상인이자 모험가인 장 드 베텡쿠르를 카나리아 제도에 파견해 그곳을 개척하게 했다. 베텡쿠르는 카나리아 제도를 단시일에 장악한 뒤 카나리아 왕국의 국왕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한편 동방의 정복자 티무르에게 에르난 산체스 데 팔라수엘로스와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조가 이끄는 사절단을 잇따라 파견했다. 이들은 앙카라 전투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티무르에게 엔리케 3세가 친히 작성한 친선 편지를 전달한 뒤 카스티야 왕국으로 귀환했다. 훗날 루이 곤살레스는 자신이 1402년부터 1406년까지 티무르를 만나고자 사마르칸트로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티무르 사절단(Embajada a Tamorlán)>을 출간했다.
이 무렵, 그라나다를 근거지로 삼은 나스르 왕조와 카스티야 왕국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393년, 무함마드 7세는 선대 타이파 무함마드 5세가 카스티야 왕국과 맺은 휴전 협약을 깨고 4천 병력을 보내어 무르시아 인근을 습격했다. 하지만 이들이 격퇴되자, 무함마드 7세는 카스티야 왕국에 재차 복속을 표하며 사죄했다.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엔리케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기사단과 지하드를 자처하는 민병대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그라나다로 들어와 선교하다가 처형된 사건이 벌어지자, 엔리케 3세는 1404년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군주들을 불려들어 반 그라나다 연합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두 나라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실패했다.
1406년 10월, 카스티야 왕국은 나스르 왕조와 2년간의 휴전 및 무역 재개에 합의했다. 그러나 마린 왕조로부터 지원 의사를 전달받은 무함마드 7세가 휴전을 깨고 무르시아를 침공하자, 당시 병세가 악화되어 동생 페르난도에게 국정을 위임했던 엔리케 3세는 페르난도에게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페르난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하옌 인근의 콜로하레스에서 나스르 왕조군을 격파하고 지브롤터 해협에서 튀니지와 틀렘센의 술탄 편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자하라(오늘날 카디스) 시를 포위했다.
엔리케 3세는 동생의 연이은 승전보에 고무되어 그라나다를 향한 친정을 준비했지만, 1406년 12월 25일 톨레도에서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톨레도 시로 옮겨진 뒤 톨레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당시 엔리케 3세의 아들 후안은 고작 1살 밖에 안 됐기에 많은 이들이 페르난도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페르난도는 조카를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로 옹립하고 자신은 후안 2세의 어머니 캐서린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랭커스터의 캐서린 (1373 ~ 1418) [2]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아라곤의 왕비 마리아 (Maria, Queen of Aragon) |
1401년 11월 14일 | 1458년 9월 4일 | 알리폰소 5세 |
2녀 |
빌레나 공작부인 카탈리나 공주 (Infanta Catherine, Duchess of Villena) |
1403년 | 1439년 | 빌레나 공작 엔리케 왕자 |
1남 |
후안 2세 (John II) |
1405년 3월 6일 | 1454년 7월 21일 |
아라곤의 마리아[3] 슬하 1남 2녀[4] |
포르투갈의 이자벨[5] 슬하 1남 1녀[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