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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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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제5대 국왕
카를로스 2세
Carlos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uan_de_Miranda_Carreno_002.jpg
출생 1661년 11월 6일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1]
사망 1700년 11월 1일 (향년 38세)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
재위 스페인 왕국의 국왕
1665년 9월 17일 ~ 1700년 11월 1일
배우자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 (1679년 결혼 / 1689년 사망)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1689년 결혼)
아버지 펠리페 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형제 마르가리타 테레사[2], 펠리페 프로스페로[3]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카를로스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왕위 계승 사연과 어린 시절2.2. 근친혼의 결정체2.3. 스페인의 쇠퇴
3. 가족관계
3.1. 조상3.2. 결혼과 후계
3.2.1. 첫 번째 부인 마리 루이즈3.2.2.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clearfix]

1. 개요

통일 스페인의 제5대 국왕이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일명 바보왕(El hechizado).[4]

1661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계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펠리페 4세의 다른 아들들이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의 출생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가 성장하면서 그 기쁨은 한숨으로 바뀌게 되고 나중에는 이웃나라에서 왕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2. 생애

2.1. 왕위 계승 사연과 어린 시절

원래 펠리페 4세의 4남이라서 왕이 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복이복 가릴 것 없이 형들이 전부 요절했기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카를로스의 이복형이자 펠리페 4세의 장남이었던 돈 발타사르 카를로스[5]는 카를로스 2세보다 무려 32년이나 앞서 태어났다. 펠리페 4세도 이 장남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졌으나 16살 때 병사했다. 첫번째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도 예전에 죽었고 발타사르 카를로스까지 사망하면서 한시라도 빨리 가톨릭 국가의 왕녀와 혼인해 남자 후계자를 얻어야 했던 펠리페 4세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약혼자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를 계비로 맞이했다. 이 마리아나가 낳은 차남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4살 때 사망했고, 3남 토마스 카를로스 역시 1살의 나이에 죽어 4남인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카를로스 2세는 몸이 매우 허약하여 6세가 되어서야 젖을 뗐으며 걸음마도 매우 늦었다. 이로 인해 제대로 교육도 받을 수가 없었다. 또 10살 때까지 유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665년 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인 마리아나가 섭정을 맡았다.

2.2. 근친혼의 결정체

파일:charles II of spain family tree.jpg
<colbgcolor=#c70243><colcolor=#fff>조상들의 근친혼을 정리한 표[6][7]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과도한 근친혼 때문인지 후대로 내려갈수록 안구 돌출, 턱 돌출 및 부정교합에 시달리는 왕족들이 많았다. 유산 및 사산, 미성년 사망율도 당대 농민들보다 높았다. 그 중에서도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이 낳은 폐단의 결정체였다.[8] 그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부계로 4대에 걸쳐 근친혼이 계속되었다. 귀천상혼이 존재하는 이상 조상의 결혼이 완전히 족외혼이 되기는 어렵지만[9], 카를로스 2세의 조상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심한 편이다. 조상들의 근친혼을 정리한 표에서 펠리페 1세 후아나 1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포르투갈의 이자벨,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 크리스티안 2세,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 로렌 공작 프랑수아 1세 이 다섯 명뿐이며 그마저도 포르투갈의 이자벨은 후아나 1세의 자매가 낳은 딸로 남편인 카를 5세와는 4촌이었다.[10]

주걱턱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적인 집안 내력인데, 카를로스 2세의 경우 턱뼈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보니 입을 제대로 다물 수 없었으며, 침을 자주 흘리고 음식을 씹지 못했다. 혀도 너무 커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데 지장이 있었다. 게다가 35살에 탈모가 와서 대머리가 되었고, 상체는 과하게 큰데 하체는 가늘고 짧아서 다리가 상체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절름발이가 되었다.[11] 여기에 뇌전증까지 있었다.

신체적 장애가 심각한 반면 그나마 다행이도 지적장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스 2세 스스로 친정을 하는 동안에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으며, 지적장애인이라면 절대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의 행정을 직접 맡기도 했다. 그와 만난 외국 외교관들도 그가 내성적이고 우울하며 못생겼다는 등의 부정적인 묘사를 했을지언정 지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현대의학계에서는 전해지는 증상으로 미루어보아 뇌하수체 호르몬 이상 혹은 어릴 때 걸린 뇌질환의 합병증 때문에 장애가 생긴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친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장애나 유전병을 앓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금발의 천사같이 너무나 귀엽고[12] 총명하며 발랄하여 부모인 펠리페 4세 부부는 물론, 외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애정을 독차지했고 외삼촌 겸 남편인 레오폴트 1세도 그녀를 매우 아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라스 메니나스(시녀들)가 바로 어린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린 그림.

사실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기 전까진 스페인 왕국의 차기 여왕 후보로 간주되었던 공주다. 유독 초상화가 많이 남은 것[13]은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첫 아이이자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손이었고,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자매들에 비해 심신이 건강한 편이었다.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난 이후로도 스페인 왕실은 여전히 인판타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에 계속 그녀를 왕실에 붙잡아두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략 결혼을 통한 결속을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가 외삼촌 겸 고종사촌인 남편과 혼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14] 그러나 이 집안 특유의 높은 유산율 및 영아 사망률은 그녀도 결국 피해가지 못했고[15] 17세부터 연이은 임신[16]과 출산의 반복 끝에 마지막 아이[17]를 사산하며 산후 후유증으로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를로스 2세는 무수한 장애와 질병을 안고도 그의 모든 적/서출 형제자매들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근친혼의 결정체로 태어난 만큼, 그는 평생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불임까지 겪는데, 사후 부검 결과, 심장은 후추 알갱이 크기였고 내장 전체는 부패로 인해 악취가 대단히 심했으며 신장에는 큰 담석 3개, 결정적으로 고환은 검게 변색된 채 단단한 1개가 잠복으로 남아 있었다.

2.3. 스페인의 쇠퇴

국왕의 상태가 무척 나빴음에도 국정 운영이 가능했던 건 모후 마리아나[18]가 섭정으로서 10년간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의 이복형이자 펠리페 4세의 사생아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19]는 이걸 아니꼽게 봤다.[20] 결국 돈 후안은 군대와 귀족들의 도움으로 마리아나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21]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서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부탁했고, 통치는 본인이 했다.[22] 그러나 섭정이 된 지 3년 만인 1679년에 후안이 사망하자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만 19세가 되는 해인 1680년에 종교재판이 열렸는데 이때 카를로스 2세는 교회가 종교재판을 하는 것을 묵인하여 120명이 체포되고 그중 21명이 화형당한 것을 사실상 모른체 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라는 게 세간의 상상과 달리 종교 재판소 설립 초기와 종교 개혁 초기 시절에나 열정적으로 활동했지, 그 시대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체포나 탄압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관이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당시 교회의 관할이었던 결혼 문제, 즉 상속과 이혼소송을 전담하는 기관이라 평소에는 '아 그런 기관도 있었지' 하는 식으로 스페인 사회의 일상에서나 정계에서나 그리 설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방관 아래 교회 권력자들의 내분이 결국 종교 재판소의 대대적인 동원을 야기하여 스캔들이 된 것이다. 이후에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카를로스 2세가 종교재판소의 말에 혹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도록 방조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당시의 섭정 및 관료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도 통치를 아예 못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는지 섭정 모후가 물러난 후 카를로스 2세는 드디어 친정을 시작하였다. 사실 카를로스 2세 이전의 스페인 국왕들은 정사를 직접 보지 않고 총신들에게 나라를 맡겼지만, 이 체제는 행정 체제의 심각한 부패를 야기했다. 이를 혁파하기 위해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위 관료들과 각 지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 당시 스페인의 경제는 이전 정부들의 실정과 전쟁, 기근 탓에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설령 능력이 좋은 국왕이 정사를 돌보아도 스페인은 나라 형편이 나아지기는 힘들었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왕 카를로스 본인의 건강이 나쁘고 통치 능력이 따라주지 못해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결국 스페인의 무능은 전 유럽에 알려졌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또한 카를로스 1세가 구축한 이탈리아 반도의 점령지는 이 시기까지도 유효했으나 카를로스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23] 결과적으로 국력 탈진 때문에 수세에 몰려가던 스페인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 쇠퇴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21세기의 역사가들은 그에게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이 루이 14세의 프랑스 권력에 대항하여 제국을 온전하게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치세의 역사상 가장 큰 디플레이션 중 하나인 왕국의 구매력 증가, 공공 금고의 회복, 기아의 종식과 평화를 달성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역사학자 루이스 리보트(Luis Ribot)는 그를 "악마에 홀리지도 않았고 퇴폐적이지도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 또한 '합스부르크의 근친상간이 낳은 괴물이자 백치'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와서 과장된 측면이 크며, 정작 카를로스 2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은 그를 그 정도로 저평가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카를로스 2세
(Carlos II)
<colbgcolor=#fff3e4,#331c00> 펠리페 4세
(Felipe IV)
<colbgcolor=#ffffe4,#323300> 펠리페 3세
(Felipe III)
펠리페 2세
(Felipe II)
오스트리아의 안나[24]
(Anna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A]
(Margarete of Austria)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26]
(Karl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27]
(Maria Anna of Bavaria)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Maria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28]
(Maria Anna of Bavaria)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Maria Ana of Spain)
펠리페 3세
(Felipe III)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A]
(Margarete of Austria)

3.2. 결혼과 후계

3.2.1. 첫 번째 부인 마리 루이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C3%ADa_Luisa_de_Orleans,_reina_de_Espa%C3%B1a.jpg
<colbgcolor=#c70243><colcolor=#fff>왕비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

첫번째 아내는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장녀인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 1662년~ 1689년)였다. 마리 루이즈 역시 부모가 사촌지간인[30] 근친혼 태생이었으며 카를로스 2세와는 펠리페 3세를 기준으로 5촌이자 6촌이었다.[31] 마리 루이즈는 원래 친사촌 그랑 도팽 루이와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루이 14세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32]

둘의 사이는 처음에는 좋지 못했다. 외모도 흉한데다 성불구자인[33] 왕을 남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마리 루이즈는 자기 운명을 비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비록 모자라긴 했어도 헌신적이고 자상한 남편이었고, 마리 루이즈를 위해 심부름을 자처하거나 프랑스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등 마리 루이즈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마리 루이즈도 카를로스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마리 루이즈는 낯선 스페인 궁정에서 적국의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굉장히 박한 대접을 받고 있었고, 후계자를 생산하라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그녀에게 친절한 사람은 모자란 남편 한 사람뿐이었으니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1689년에 마리 루이즈가 식중독 혹은 맹장염으로 추정되는 병으로[34] 급사하자 카를로스 2세는 무척 슬퍼하였다.

3.2.2.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혼자가 된 카를로스 2세는 다시 여러 공주들과 혼담이 오갔고, 최종적으로 2명의 공주들이 카를로스의 신붓감 후보에 오르게 된다. 한 명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의 딸이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였다. 다른 한 명은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인 마리아 안나였다. 이 때 카를로스는 두 공주의 초상화를 받게 되었는데, 초상화를 본 카를로스는 "메디치 가 공주는 굉장히 아름답고, 팔츠 공주는 평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마리 루이즈의 초상화를 보고 "이 공주가 가장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며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정치적 상황들로 인해 카를로스는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게 되었다.[35]
파일:Maria Anna von Pfalz-Neuburg.jpg
<colbgcolor=#c70243><colcolor=#fff>왕비 팔츠노이부르크 마리아 안나

두 번째 부인은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인 마리아 안나( 1667년~ 1740년)였다.[36][37] 카를로스 2세의 외증조할머니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 마리아 안나의 친할머니 바이에른의 막달레네는 자매지간이었기에 카를로스 2세와는 7촌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나중에나마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주고 남편으로서 존중했던 마리 루이즈와는 달리, 마리아 안나는 인성이 아주 개판이어서 남편을 장애인이라고 대놓고 깔봤다. 때문에 카를로스 2세는 그야말로 무능한 남편이 권력을 등에 업은 아내에게 당할 수 있는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일례로 마리아 안나가 스페인에 있는 각종 비싼 그림들을 훔쳐서 몽땅 친정에 보내버린 적이 있었는데 카를로스 2세가 이에 대해 추궁하자 되려 화를 내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또한 자신이 가진 보석이 전 부인인 마리 루이즈보다 적다는 이유로 그를 들들 볶은 적도 있었다. 이 보석 문제는 프랑스인들조차 보다못해서 펠리페 5세에게 압박을 가해 마리아 안나를 성에 유폐시켰다. 이후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잉글랜드- 네덜란드 블레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바르셀로나를 점령하여 근거지를 확보한 덕에 풀려날 뻔했다. 하지만 요제프 1세가 후사없이 죽고 뒤를 이어 카를 6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고, 펠리페 5세가 정식으로 스페인의 국왕으로 승인받자 아예 프랑스로 쫓겨났다. 그리고 죽기 1년 전인 1739년에야 74세의 늙은 나이로 간신히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아 안나는 성추문도 굉장히 많았는데, 어떤 백작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가 생 제르맹 백작이라는 설도 있다.

1690년대 말에 이르러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신하들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38] 카를로스 2세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여 후계자 지명을 최종 결정한다. 그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친척 중에서 유력한 후계자가 둘 있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이다. 루이 14세의 어머니 안 도트리슈는 카를로스의 첫째 고모이고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 마리아 아나는 둘째 고모로 루이와 레오폴트 모두 카를로스 2세의 고종사촌이었고, 또한 두사람 모두 카를로스의 누나들( 마리아 테레사 & 루이 14세, 마르가리타 테레사 & 레오폴트 1세)과 결혼했기 때문에 매형이기도 했다.

다만 카를 대공이 부계쪽으로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피를 이어받은 것에 반해 필리프의 할머니이자 루이 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는 펠레페 4세의 장녀이자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나여서, 혈연 관계로 보았을 때 조부모 모두에게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앙주 공작 필리프가 더 유력한 후계자였다. 또한 루이 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 펠리페 4세의 장녀)와 모후인 안 도트리슈( 펠리페 3세의 장녀)는 둘 다 레오폴트 1세의 모후 마리아 아나(펠리페 3세의 차녀)와 아내 마르가리타 테레사(펠리페 4세의 차녀)보다 언니라서, 혈통이나 서열로 보면 스페인의 계승자로 차남을 내세우는 레오폴트 1세보다 자신의 손자들을 내세우는 루이 14세의 주장이 더 우위에 있었다.

본래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건 외조카인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39]였으나, 마리아 안토니아가 산후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이후에는 그녀의 갓 태어난 아들인 바이에른의 호세 페르난도(요제프 페르디난트)[40]가 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이쪽도 그만 8세에 천연두에 걸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으며 이렇게 되자 후보군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 그리고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 세 명으로 압축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정나미가 떨어진 카스티야 귀족들이 스페인의 해외 영토를 지킬 수 있는 나라는 9년 전쟁에서 전 유럽의 다굴을 견뎌낼 정도로 끄떡없는 체급을 증명했고 해군도 어느 정도 갖춘 프랑스밖에 없다고 카를로스를 설득하였고, 카를로스 본인 역시 어떤 가문이 왕이 되냐보다는 어떤 왕이 스페인의 영토를 보존할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스페인의 발목만 붙잡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버리고 프랑스를 스페인의 새로운 우군으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카를로스는 왕비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41] 1700년 10월 2일 앙주 공작 필리프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으며 그가 사양할 경우 앙주 공작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 베리 공작 샤를이 사양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과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42]가 차례로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에 서명하였다. 이는 그가 실질적으로 내린 거의 유일한 결정 중 하나였고, 한 달 후 카를로스 2세는 세상을 떠났다.

유언을 전달받은 루이 14세는 이 유언을 수락할지 말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것을 곧이곧대로 수락하면 100% 전쟁 확정이었고 9년 전쟁으로 경제가 초토화되다시피 한 프랑스 입장에서 또다른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는 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의 항상 아버지의 결정을 군말없이 따르던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가 이 안건만큼은 자신의 아들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루이 14세가 아들의 주장을 못 이기고 카를로스의 유언을 수락하였다. 이에 따라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였고[43] 바로 스페인 왕관을 물려받았으나 이에 오스트리아가 반발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된다.


[1] 마드리드 왕궁의 전신. [2]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레오폴트 1세의 첫번째 황후이기도 하다 [3] 이 외 이복 형제들이 더 있다. [4] 영어로는 'the Bewitched'로 번역된다. witch(마법)에 홀렸다는 뜻인데 좋은 뜻으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악마에 홀린', '귀신 들린', '마가 낀'과 같은 부정적인 뜻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선조 후아나 1세도 비슷한 별명(일명 '미친 후아나')으로 불렸다. 두 사람의 생일도 똑같다. [5] 1627~1644. 펠리페 4세와 그의 첫번째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소생. 즉, 루이 14세와 겹사촌이다.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친여동생인 마리아 테레사는 이복동생인 카를로스 2세보다 22살이나 많다. 오히려 마리아 테레사의 아들 그랑 도팽 루이가 외삼촌인 카를로스와 동갑이다. [6]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자가 Habsburg가 아닌 Hapsburg로 되어 있다. [7]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인명이 영어식으로 번역된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영어식으로 찰스 2세(Charles II), 펠리페 2세는 필립 2세(Philip II)라 적는 식. 동명이인의 구분을 위해 재위한 국가의 국명을 붙여 구분한다. [8]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시절부터 근친혼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카스티야와 아라곤 모두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잘 보면 3촌 결혼, 즉 오빠가 여동생의 딸 또는 남동생이 누나의 딸과 결혼한 경우가 많이 보인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속한 가문이 다르기에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도덕적, 종교적 기준으로도 숙질간 결혼은 명명백백히 근친혼으로 간주되었지만, 혈연이 없는 가문과 결혼하기 어려운 스페인 왕실 특유의 문제점 때문에 저런 결혼을 거듭했다. (지독한 근친혼은 합스부르크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며, 후대에 나타난 부르봉 왕가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안는다) [9] 19세기 20세기에도 6~8촌의 근친혼은 많이 일어났다. 당장 前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그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따지면 둘 다 4대손으로서 8촌이 되고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따지면 여왕은 4대손, 부군은 3대손이라 7촌이 된다. [10] 다만, 이 카를로스 2세조차도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에서 가장 근교계수가 높은 인물은 아니다. 압스부르고의 혈통을 물려받은 인물 중 최고의 근친계수(0.3)를 기록한 인물은 카를로스 2세의 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해서 낳은 딸인 오스트리아 대공비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근교계수만 따지면 친남매(0.25)도 아니고 부모자식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산욕열로 요절하긴 했어도, 장애가 있다는 기록은 없으며 교양있고 지적인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1] 보통 사람이나 캥거루 등 직립보행을 하는 동물들은 몸무게에서 다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그래야 하중을 버티기 때문이다. [12] 다만 성장하면서 합스부르크 특유의 주걱턱 외모가 나타났다. [13] 사진이 없는 시대에 왕족의 초상화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구다. 유화가 빨리 그려지는 그림도 아니고, 제작 비용도 상당한 편이며, 어린 공주가 꽉 죄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오래 부동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일의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걸 따져보면 결국 왕실이 초상화 작업을 지시했고 적극 지원했을 거란 의미가 된다.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도 이 공주를 그리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여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을 시작으로 펠리페 4세의 장례 상복 차림인 열 네살의 모습까지 계속해서 화려한 초상화들을 그렸다. [14] 그리고 카를로스 2세는 누나에 비해 초상화가 거의 없으며 전해지는 작품도 성인 이후, 매우 어두운 배경에 비교적 흐릿하게 표현된 그림뿐이다. 일단 장애 때문에 외모가 보기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은 둘째치고, 얼굴만 봐도 건강에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빤히 다 보이기 때문에 왕권의 안정을 위해 가급적 특징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2세는 어릴 때부터 각종 병을 앓을 때마다 온갖 기도와 미신적 행사의 대상이 되었고, 악마를 쫒는 부적을 달고 다니거나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밖에 나가거나 사람 만나는 것을 삼가고 어두운 방에만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15] 합스부르크 왕실 출신들에게서 난 적자들은 당대 농민의 아이들보다도 유아 사망률4배나 높았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3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오래 살았던 딸 마리아 안토니아도 23세에 요절했다. [16] 총 7번 임신하였다. [17] 임신 4개월 째에 사산하였다. [18] 부계로만 따지자면 카를로스에게 마리아나는 고종사촌 누나였다. [19]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와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보통 미들네임인 호세까지 같이 표기한다. 영미권에선 John of Austria the Younger로 표기하여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보다 후세의 인물임을 강조한다. [20] 당시 돈 후안과 마리아나는 서로 싫어하여 관계가 굉장히 안 좋았다. 심지어는 돈 후안이 이복동생 카를로스 2세의 추천으로 국왕 자문이 되었을 때 마리아나가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 취소시킬 정도였다. [21] 이는 마리아나가 섭정이었으나 총신인 발렌수엘라를 재상에 임명하여 정치를 맡겼는데 재상이 된 발렌수엘라가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발렌수엘라는 일부러 궁전에 파티를 자주 열어 대비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렸고, 정부위원회의 위원 2명을 파면하고, 나중에는 아예 정부위원회를 해산시켜 버릴 정도로 권력을 남용했다.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돈 후안을 지지했다. 그래서 돈 후안이 군대를 이끌고 마드리드로 입성하여 발렌수엘라를 체포하고, 마리아나를 톨레도로 추방했다. [22] 이때 섭정이 된 후안은 사치를 금지하고 생필품 공급을 정상화시키며 상공위원회를 창설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23] 위트레흐트 조약 때문인데 이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해 다시 수복했다. [24]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이다. [A]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다. [26]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다. [27]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다. [28]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와 결혼한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는 다른 사람이며, 그 마리아 안나의 조카이다. [A] [30]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어머니 잉글랜드의 헨리에타가 내외종간이었다. [31]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 펠리페 4세와 마리 루이즈의 친할머니 안 도트리슈는 남매지간이었고, 카를로스 2세의 외할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와 마리 루이즈의 친할머니 안 도트리슈 역시 자매지간이었다. [32] 이는 마리 루이즈가 사실 루이 14세의 조카가 아닌 친딸이라서 그렇다는 말이 있다. 난봉꾼이었던 루이 14세는 동생의 아내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헨리에타 앤과도 염문이 있었는데, 이때의 불륜으로 인해 헨리에타가 루이 14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를 낳았다는 루머가 있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도 동성애적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의혹이 더 확산되었다. 마리 루이즈의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치켜올라간 눈썹 등이 루이 14세를 더 닮긴 했다. 카를로스 2세가 무능력자에 장애인이라고 해도 엄연히 스페인의 국왕이었으므로, 프랑스 왕가에서 공주를 카를로스에게 시집보내려 한 것은 정치적으로 당연한 선택이었다. [33] 고환이 하나밖에 없었고, 조루 발기부전을 앓았다. [34] 당시 마리 루이즈는 후계자를 얻지 못한 스트레스와 궁전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폭식을 자주 하였다. 특히 하루에 32파운드(약 14.5kg)의 설탕이 들어가는 레몬 요리와 계피 음료수를 즐겨먹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죽기 전에는 과체중과 비만 상태였다. 시어머니의 손에 독살당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근거는 부족하다. 21세기 현재 성인 기준 1일 설탕 섭취 권장량은 25g에서 50g 사이니 마리 루이즈는 하다못해 지금 기준으로도 설탕을 과다 섭취하다 못해 퍼먹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35] 팔츠 선제후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와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레오폴트 1세도 마리아 안나의 언니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마리아 안나의 오빠이자 카를로스의 처남이었던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 결혼했다. 요한 빌헬름이 아내를 내버려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남편의 성병이 옮아 불임이 되는 등, 매우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36] 펠리페 5세의 계비 이사벨 파르네시오의 이모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이사벨 파르네시오도 국민들에게 평가가 영 좋지 못했다. 실제로 둘 다 권력욕이 굉장히 심한데다, 아무리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지만 장애인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했다. 마리아 안나는 자기 조카인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주라고 남편을 압박했고, 파르네시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 되게 했다. [37] 아버지 필리프 빌헬름은 원래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먼 방계였으나 당시 선제후 가문이었던 지메른계가 끊기면서 선제후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루이 14세는 자신의 제수인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와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9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를 느낀 필리프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장녀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는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시집보내고, 차녀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에게 시집보내면서 오스트리아계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시에 사돈을 맺는 쾌거를 이뤘다. 여담이지만 마리아 안나의 언니인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는 동생과 정반대로 굉장히 신앙심이 깊고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한 훌륭한 황후였다. 1710년 즈음엔 마리아 안나의 오빠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도 바이에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친프랑스파가 되고,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조차 자기 동생인 마리아 안나의 행각에 경악해서 스페인에서 쫓겨난 그녀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38]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15권인 에스파냐편에서 신하들이 빵이 되든 수프가 되든 빨리 결정하시라며 재촉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39] 친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했다. 참고로 카를 대공의 이복누나다. [40]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한 카를 알브레히트의 이복형으로 일찍 요절했기에 카를 알브레히트가 바이에른 선제후가 되었다. 요절한 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살아남은 하나뿐인 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다. 여담이지만 펠리페 5세 프티 도팽 루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막시밀리안과 오누이니 서로 사촌이다. [41] 마리아 안나가 반발한 이유는 카를로스가 후계에서 제쳐놓으려는 카를 대공이 그녀의 조카(언니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차남)였기 때문이다. [42]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차녀 안 마리 도를레앙의 장남이다. 16세에 요절하여 동생이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로 즉위했다. [43] 이에 대해서는 턱이 대가 끊어지자 코를 수입해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걱턱으로 유명했다면 부르봉 가문은 큰 코로 유명했기 때문인데, 사실 코 이야기는 부르봉 이전인 발루아 왕조 때부터 나온 것이다. 부르봉 왕조는 사실상 발루아로부터 사촌 관계로 분가한 매우 가까운 가문이었으므로, 발루아의 큰 코가 부르봉까지도 이어져 온 것. 백문이 불여일견, 발루아 왕조의 대표적인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