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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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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UN 사무총장
우 탄트
U Thant
ဦး သန့်
파일:brian_urquhart_1.png
<colbgcolor=#4b92db> 출생 1909년 1월 22일
인도 제국 판타나우
(現 미얀마 연방 공화국 판타나우)
사망 1974년 11월 25일 (향년 65세)
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인도 제국 (1909~1937)

[[버마국|]][[틀:국기|]][[틀:국기|]] (1942~1945)
파일:영국령 버마 기.svg 영국령 버마 (1937~1948)

[[버마 연방|]][[틀:국기|]][[틀:국기|]] (1948~1962)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62~1974)
학력 랑군 대학교 (졸업)
종교 불교
배우자 다우 티엔틴(1934~1974)
임기 1961년 11월 30일 ~ 1971년 12월 31일
서명
파일:U_Thant_Signature.svg

1. 개요2. 상세3. UN 사무총장까지의 삶
3.1. 유년 시절3.2. UN 사무총장이 되기까지3.3. 제3대 UN 사무총장으로
3.3.1. 사무총장이 되기 직전의 상황3.3.2. 첫 번째 임기 (1961 ~ 1966)3.3.3. 두 번째 임기 (1966 ~ 1971)
4. 은퇴 이후
4.1. 은퇴를 선언하다4.2. 사망 및 이후
5. 평가6. 관련 문서7. 참고 문헌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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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의 외교관으로,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약 10년 동안 제 3대 UN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 상세

최초의 아시아-태평양 그룹의 사무총장으로, 최초의 아시아 출신 사무총장이라는 것에 의미가 깊다. 앞의 선대 사무총장들보다 5년 정도 더 사무총장 자리를 지켰다. 한편 그는 선대 총장이 사고로 죽은 특수한 상황 덕에 현재까지도 최장기 UN 사무총장으로 남아있다.[1] 또한 역대 UN 사무총장 중에서 처음으로 3선 제의를 받았던 인물이다.[2] 하지만 이를 고사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탄트는 1909년 1월 22일 미얀마 남서 해안지방인 판타나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립고등학교와 랭곤대학교[3]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28년부터 1947년까지 저널리스트와 교사로 생활하였다. 1947년에는 미얀마의 신문사장, 이듬해 방송국장이 되었다. 1948년 전후로 미얀마의 당시 정치 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런 미얀마의 긴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탄트는 미얀마의 첫 번째 수상이자 그의 절친힌 친구였던 우 누(U Nu)의 도움으로 험난한 환경을 해쳐나갈 수 있었다. 탄트는 1957년 유엔 주재 미얀마 대사와 알제리 문제에 관한 아시아 그룹 상임 위원회 위원장, 콩고 위원회 위원, 유엔 자본 개발 기금 설립 위원 등을 지냈다.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탄트가 상당히 차분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1961년 그의 전임자였던 다그 함마르셸드 1961년 콩고 내전을 조정하기 위해 콩고로 가던 중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4] 때문에 그는 UN에서 사무총장직 제안을 받고 제 3대 UN 사무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의 첫 임기엔, 1961년 10월 소련 미국 쿠바를 놓고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냉전이 심화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존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을 쿠바 밖으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제 정세가 상당히 긴박했다.[5] 그는 이런 긴박한 정세 속에서 미국 소련사이의 대치가 더 큰 재앙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던 존 케네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와의 여러 차례 중재를 거쳐 평화 협상을 이끌어 냈다. 그 결과 소련 미국간에 쿠바 미사일 위기 소련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정리됐다.[6] 1961년 12월 다그 함마르셸드가 다 완수하지 못했던 콩고 내전 종식시키기 위해 작전명 그랜드슬램(Grandslam)을 지시하면서 분쟁을 매듭지었다.

탄트는 첫 번째 임기를 마침과 동시에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그가 두 번째 임기를 지내는 동안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는데, 탄트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7] 하지만 상임이사국으로 있었던 초강대국 미국주도의 냉전 대리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막거나 중재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임기 말기엔 강대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과 아시아 UN가입에 대한 문제를 다수 처리하였다. 탄트는 세 번째 임기를 거부하고 1971년 UN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은퇴한다

은퇴 후, 그는 뉴욕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폐암으로 1974년 향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활약했던 미얀마의 외교관 우탄트는 현재까지도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우탄트의 국민적 존경심은 그의 고향인 판타나우를 그의 이름을 딴 "판타나우 탄트"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정도로 깊다.

사실 우탄트의 본명은 "탄트(Thant)"이다. 탄트 앞에 붙은 "우(U)"는 영어로 "미스터(Mr.)"정도로 해석된다. 이것이 앞에 붙어 "우탄트"로 이름이 굳어진 것이다.[8]

3. UN 사무총장까지의 삶

3.1. 유년 시절

파일:50390525.jpg
우탄트의 랭곤대학교 교육 이수 자격증 수료 당시의 모습

탄트는 판타나우 지방의 한 부농 집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탄트의 아버지는 캘커타에서 교육을 받고, 여러 학술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또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영어를 쓸 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유복한 집안과 유능한 아버지 밑에서 탄트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탄트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국과 영국 서적을 모아 놓는 개인 도서관을 열었는데, 거기서 탄트는 남다른 독서 습관을 기르게 된다. 후에 그는 열렬한 독서충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의 친구들이 탄트를 보고 "철학자"라고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다.

그의 나이 11세, 1920년 영국의 새로운 대학 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9] 이 시기에 탄트는 기자를 꿈꾸기 시작하였고, 미얀마 소년 스카우트 협회[10]에 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면서 가족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다. 이 시기 즈음에 탄트는 판타나우의 지방 국립고등학교(National High School)[11]에 입학한다. 그의 기자라는 꿈을 펼치기도 잠시, 탄트의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4남매는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엔 랭곤 대학교의 4년 학위를 이수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대신 그는 1926년부터 2년간 랭곤대학교에서 교육 이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으로 대학 교육을 대신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2년 동안 대학에 있을 당시, 탄트는 가족의 장남으로서 힘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가족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 시기에 탄트는 후에 미얀마의 초대 총리 누(Nu)와 함께 인연을 맺고 랭곤대학교에서 역사학을 함께 공부한다. 탄트와 누(Nu)가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는데, 누(Nu)가 탄트의 먼 친척으로부터 탄트를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듣게 되면서, 누(Nu)가 탄트에게 각별한 신경쓰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랭곤에서 누(Nu)말고도 다른 동반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동반자의 이름은 퍼니벨(J.S Furnivall)[12]이었다.

퍼니벨(J.S Furnivall)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랭곤대학교에서 4년제 학위를 받고, 그 후에 공무원이 되면 좋지않겠느냐고 권유를 했지만 탄트는 이를 거절한다. 탄트는 2년제 교육 이수 자격증을 수료하고, 판타나우로 돌아와 1928년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다. 한편 탄트는 공무원을 권유했던 퍼니벨(J.S Furnivall)과 함께 정기적으로 기사를 쓰고, 번역 활동도 같이 하였다. 1931년 탄트는 전국 교사임용시험에서 수석을 하고, 25세엔 학교 교장이 된다. 탄트는 교직에 있으면서도 계속 기사를 썼고, 집필 활동도 계속 이어 나갔다. 그의 글의 주제는 대부분이 당시 식민지 상태의 미얀마의 긴박한 정치적 환경에 관련된 것이다.

3.2. UN 사무총장이 되기까지

파일:U_Nu_with_U_Thant.jpg
젊은 시절 우 누(U Nu)와 우탄트

교직 생활을 이어가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일본군 1942년에 침입하여 미얀마를 점령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은 탄트를 미얀마에 일본 교육을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 투입했지만 별다른 협력을 보이지 않자 다시 판타나우로 돌려 보내게 된다. 일본군은 탄트에게 판타나우에 일본어 과목을 비롯한 일본에 협력적인 교육과정 개발에 착수하라고 명령했지만, 탄트는 이를 거부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미얀마 영국령 식민지로 다시 귀속된다. 후에 1948년 미얀마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한다. 누(Nu)는 미얀마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게 되고, 누(Nu)는 오랜 세월 동안 협력 관계로 지내왔던 탄트에게 방송부문 장관직에 앉힌다. 하지만 독립 직후 혼란스러운 정치적 환경때문에 누(Nu)의 신정권은 순조롭게 나라를 꾸리고, 이끌어가지도 전에 소수민족들의 반란[13]에 의해 상당히 무거운 정치적 짐을 지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949년 탄트는 정보부 비서관으로 임명된다.[14] 그리고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수상의 비서를 지냈다. 수상의 비서를 지내는 동안 수상의 정책에 대하여 자문 일도 하였다.[15]

그는 미얀마 관료 생활 이후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국제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1955년 반둥회의[16]를 성사시키는 데 한 역할을 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그는 미얀마 유엔 대표부 대표 였고 알제리 독립에 관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 탄트는 사무총장이 되기 전까지 콩고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3.3. 제3대 UN 사무총장으로

3.3.1. 사무총장이 되기 직전의 상황


총회에서 사무총장직 수락 연설을 하는 우 탄트

1961년 9월 2대 사무총장이던 다그 함마르셸드 콩고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콩고로 가던 중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이에 당황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즉시 새로운 사무총장 후보 물색에 나섰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지만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미국 소련이 제시한 후보 몇명을 놓고 최종 합의에 이르기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61년 11월 30일, 결국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 168호에 의해 탄트가 사무총장직을 수행해 줄 것을 권고 받았다. 처음에는 전임 총장의 잔여 임기를 채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17], 결국엔 완전히 새로운 5년 임기로 탄트가 3대 UN 사무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3.3.2. 첫 번째 임기 (1961 ~ 1966)

파일:u-thant-640x360.jpg
첫번째 임기 당시의 우 탄트

우탄트가 임기를 시작할 당시엔 국제 정세가 상당히 긴박했다. 왜냐하면 당시 세계는 쿠바를 놓고 대치하는 미국 소련이 핵전쟁에 근접한 교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8]. 이 상황 속에서 1962년 10월 22일 미국 백악관 펜타곤에서 쿠바 상공을 촬영한 정찰 사진을 공개하였다. 그리고 나서 존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로 향하는 소련 선박들로부터 모든 공격적인 무기들을 제거하기 위해 해군의 "검역"을 명령했다. 한편, 소련 선박들은 검역 구역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탄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재와 협상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탄트는 미국에게 소련의 미사일 철거에 앞서 사전에 긴장 행위를 부추기는 침략적 행위를 일단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존 F. 케네디가 이 제안을 고려할 것을 시사했다. 이에 흐루쇼프가 환영하면서 협상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런 협상의 기초를 토대로 유엔의 중재하에 미국 소련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존 케네디 미 대통령이 탄트의 제안에 응하면서 흐루쇼프 소련 핵전력이 쿠바내에서 계속 증강되는 것을 일단 멈추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소련 쿠바 미사일 기지 상황을 감시하기 위한 미국 정찰기 쿠바에서 격추되면서 다시 대치국면으로 바뀌어 버렸다. 당시 존 케네디 대통령은 펜타곤과 합창의장으로부터 쿠바 미군을 투입할 것을 강하게 촉구 받았지만, 쿠바 공습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존 F. 케네디도 세계대전에 준하는 교전을 원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존 케네디는 우탄트가 이 상황의 중재를 맡아줄 것을 강하게 희망했다. 오히려 미국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받아 놓고도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한 것.[19] 아마 소련과 면대면으로 협상하기가 많이 힘든 것으로 판단하여 유엔의 중재가 전보다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협상은 다시 재개되었다. 미국 소련에게 모스크바를 사정권으로 두는 핵탄두를 해체하고[20], 쿠바를 침략하지 않는 것을 소련에게 제안한다. 추가로 소련이 격추했던 미국 정찰기의 기체 반환에 대해서도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탄트의 중재 아래서, 미국은 소련의 최대 위협인 터키에 설치된 핵탄두를 해체하기로 한다. 소련은 이를 대가로 쿠바에서 철수하고, 격추한 정찰기의 기체를 반환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따라서 두 양 강대국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우탄트는 콩고 내전에서도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내전을 종식시켰다. 심지어 그는 내전 종식을 위해 무력을 쓰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탄트가 콩고 내전을 직접적으로 해결하기 전에 반군이 계속 유엔 평화유지군이 움직이는 곳마다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평화유지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우탄트는 콩고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작전명 그랜드 슬렘(GrandSlam)"을 발동하면서 콩고 정부군의 반군 진압을 촉진 시켜주었다. 결국 반군은 진압되었고 탄트는 콩고 내전을 효과적으로 종식 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첫 번째 임기는 끝이 났다.

3.3.3. 두 번째 임기 (1966 ~ 1971)

파일:U-Thant_2.jpg
1968년 당시 우 탄트의 모습

탄트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 결의에 따라 1961년 12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그의 임기는 그가 은퇴할 시점인 1971년 12월 31일까지 지속되었다. 장장 10년이란 세월을 사무총장 자리에 있던 것. 임기 중 그는 새로운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과 아시아 국가들의 유엔 가입을 관리 감독하였다. 그는 또한 유엔개발계획, 유엔교육위원회, 유엔 무역개발회의, 유엔 환경계획등의 여러 유엔 산하 기구들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산하기구들은 유엔의 역할이 더 다양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으로 작용하였다. 그외에도 제3차 중동전쟁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21],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22], 대만의 유엔 축출 및 중화인민공화국 유엔 가입 등 굵직한 사건들이 그가 사무총장직에 임기 중에 일어났다.

제3차 중동전쟁 발발 직전, 이집트 수에즈 위기당시, 이스라엘에게 패한 것에 복수를 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23]후에 그렇게 이스라엘 이집트 사이에선 자연스럽게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졌고, 결국 1967년 5월 16일 이집트군 가자 지구 근방의 이스라엘 방어선을 공격하기에 이른다.[24] 이에 이집트 대표부는 유엔에게 두나라의 휴전선 사이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긴급군(UNEF)[25]을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26] 전쟁 위기 상황에 닥치자 탄트는 전쟁을 막고자, 이스라엘 이집트 사이의 완충을 위해 이집트에 있던 유엔긴급군(UNEF)을 이스라엘 국경지대에 다시 재배치 하려 했으나, 이스라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27] 다른 방도가 없자 결국 탄트는 이집트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1967년 5월 19일 유엔긴급군(UNEF)의 철수를 명령하게 된다. 이러한 유엔의 부재 속에서, 두 국가의 군사적 대치는 계속 심화되었고 거의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예방전쟁차원에서 선제 공격을 감행면서 3차 중동전쟁은 결국 개전되었다.[28] 사무총장으로서 세계평화를 위해 중동 전쟁을 조정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었다.

중동 전쟁 이후, 1967년 11월 키프로스 위기가 닥쳤다. 그리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고, 인근 그리스계 국가인 키프로스와의 관계도 덩달아 긴장 국면에 들어섰다. 종종 이 긴장 국면 속에서 그리스 군사정권의 압력에 의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두 국가간의 대립을 봉합하고자 탄트는 협상단을 꾸렸고 1968년 협상을 시작하였다. 키프로스에 대한 협상은 중간에 차질을 빚으면서 중단되었지만, 그가 퇴임한 후 1972년에 다시 재개되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65년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을 공개 비난하였다. 임기말 탄트는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준비하였지만 미국의 방해로 무산되고 만다. 이렇게 탄트는 1971년 12월 31일 임기를 모두 마치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탄트는 폐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4. 은퇴 이후

4.1. 은퇴를 선언하다

안전보장이사회가 탄트에게 3선 임기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그는 3선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은퇴를 하기로 한다. 탄트의 임기 만료 직전, 안전보장이사회는 그의 후임자를 찾기 위해 후보자 물색에 나섰다. 후임자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총회에서는 몇 명을 두고 교착 상태에 빠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후임자로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을 내정하였다. 사무총장직 인수인계에 관련한 작업은 탄트의 임기 10일전까지 이루어졌다.

그가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땐 자신 혼자서 일종의 위기감, 예컨대 속으로 "내가 이렇게 일을 안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사무총장으로서 세계평화를 책임져야 하는데 이 현안이 내 손을 떠나도 되는가.."같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탄트가 은퇴할 때, 뉴욕 타임즈에선 "우탄트의 해방"이라는 제목으로 , "그가 사무총장직을 은퇴하더라도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조언은 언제나 필요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기고했다. 그가 은퇴하고 나서는 뉴욕에서 여생을 보냈다. 뉴욕에선 사무총장 시절 자신이 추진해왔던 일들에 관련된 것을 연구하면서 보냈다.

4.2. 사망 및 이후

파일:U-Thant-Mausoleum.jpg
미얀마에 안장된 우 탄트의 묘

1974년 11월 25일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뉴욕 본부에서 고국인 미얀마로 이송되었다. 그 무렵 미얀마 네 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당시 미얀마의 군사정부의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미얀마 경제는 침체에 빠져있었고, 군사독재로 배출구가 막혀있었는데 이 때문에 우 탄트와 군사정권이 자연스레 비교되었기 때문에 군사정부의 국민적 지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얀마 독립 직후 세워졌던 초기 민주정부의 수상 '우 누(U Nu)'와 절친한 사이였다는 사실도 군사정부를 위협하는 하나의 여론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군사정부는 미얀마내에서 탄트의 공식적인 장례식이나 행사 없이 조용히 묻을 것을 명령했고, 그에 대한 미얀마내에서의 어떠한 명예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우탄트(U Thant)'이후로 두 번째 아시아 출신인, 대한민국 반기문이 제8대 UN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29]

5. 평가

탄트는 지난 사무총직에 있는 10년 동안 상임이사국 초강대국을 향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소신있게 행동했던 인재였다. 첫 임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탄트는 유엔 강대국들 사이에 껴있는 허수아비가 아닌, 세계 평화를 관리하고 중재하는 독립적 기구였음을 보여주었다. 극심한 두 강대국의 대립 속에서 탄트는 유엔의 역할과 존재감을 톡톡히 보여주며 쿠바 미사일 위기를 잘 넘겼다. 또한 콩고 내전에서도 탄트는 즉각적인 무력 투입으로 전쟁이 장기화 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유엔의 힘을 보여주었다. 특히 1965년 베트남 전쟁 당시, 탄트는 초강대국 미국에게 대의적으로 옳지 않은 부분을 가감없이 비난했다. 이에 초강대국 미국에 맞선 강한 지도자라는 긍정적인 평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그가 재선임되던 1966년 유엔 가입국 만장일치 동의와 강대국의 찬사 속에서 그의 직책 수행의 유능함이 재확인 됐다.

6. 관련 문서

7. 참고 문헌

이 문서는 영어 위키백과를 기초로 하고 있다.

8. 외부 링크


[1] 이는 갑자기 추락사고로 죽은 선대 총장의 잔여 임기까지 채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따라서 그의 실제 재임기간은 다른 사무총장보다 10년하고도 몇 달 더 많다. 즉 최장기 집권 사무총장이란 타이틀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 [2] UN 헌장에 보면 사무총장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3선 제의를 받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3] 미얀마 양곤에 위치한 종합대학으로 미얀마의 명문대학교이다. [4] 하지만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실상 콩고 우탕가의 권력자였던 촘베의 지시로 격추되어 사망했다고 보는것이 일반적이다. 2013년의 민간 조사 위원회의 발표를 시작으로, UN에선 재조사를 지시했고, 이후 수잔 윌리엄스의 관련 저서 등 여러 정황이 밝혀졌다. 영국 가디언지의 2014년도 기사에 따르면 얀 판 리세험(Jan van Risseghem)이라는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전직 영국군 조종사이자 당시 촘베 정권의 유명한 파일럿이었던 이 사람이 바로 다그 함마르셸드의 DC-6항공기를 추락케 한 원인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전직 미 해군 조종사이자 NSA의 무전 청취요원이었던 찰스 사우스홀(Charles Southall)과 여러 동료 요원들이 1961년 사고 당일 키프로스의 청취소에서 청취 임무중 3,000마일 거리의 은돌라에서 들리는 비행기의 무전을 들었던 내용을 그 증거로 내세웠다. 그 내용은 두 항공기 조종사의 무전이었는데, 각각 ' 수송기가 낮게 비행 중인 것이 보인다. 모든 등이 켜져있다. 하강하여 격추하도록 하겠다. 그렇다. 트랜스에어 DC-6 항공기다 ' 라는 말의 정체 불명의 항공기 조종사의 무전을 시작으로, 직후 들려온 다른 무선에선 또 다른 조종사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 맞았다! 화염이 보인다! 추락한다! ' 라는 말을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을 들린 조종사의 목소리는 매우 침착하고 프로페셔널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첫 번째로 들린 목소리의 파일럿이 당시 함마르셸드가 타고있던 DC-6항공기를 격추하는 임무를 맡았던 비행기의 조종사가 말했던 무전이라고 말하였다. 추가로 DC-6 항공기를 공격한 기종도 확인되었는데, 당시 카탕가 공군으로 복무중이던 얀 판 리세험이 조종하고 또한 기관포 두정을 장착하는 개조를 거친 CM-170 미스테르 훈련기로 확인되었다. 얀 판 리세험은 이후 벨기에로 건너가 벨기에 공군에서 복무한다. [5] 2차 대전 종전이후, 양대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 소련은 각자 영향력을 넓히는 것에 주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충돌을 수반하면서 냉전이 심화되었다. 그런 미국 소련의 대치상황 속에서 우탄트는 임기를 시작한 것. 탄트가 겪은 쿠바 미사일 위기또한 앞서 설명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 강대국이 대치하다가 일어난 사건. [6] 미국과의 세계대전을 감수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흐루쇼프는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때문에 흐루쇼프는 당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사회주의 진영의 신흥 맹주였던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금이 갔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강한 한 수가 소련을 물러나게 했다고 볼 수도 있음. [7] 당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했던 베트남을 단지 "공산화 국가의 탄생을 막겠다"라는 미국의 단순 이념적 욕심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비난이 거셌다. 정당한 명분도 부족했고, 꼭 필요한 전쟁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냉전 상황 속에 있었던 미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던 전쟁으로 기억됨. 하지만 강대국으로 구성된 상임이사국의 승낙을 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개적 비난을 한 것은 이례적이고 손에 꼽을 만한 일. [8] 보통 미얀마 유명인사들의 원래 이름에 "우(U)"가 붙어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이 일반적이다. 예컨테 그의 절친한 정치적 동반자 였던 누(Nu)도 앞에 "우(U)"가 붙으면서 기존의 이름인 누(Nu)보단 "우 누(U Nu)"로 잘 알려진 것이 대표적 사례다. [9] 당시 미얀마는 영국령 식민지였는데, 영국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교육을 집중시키는 새로운 대학법을 발표했다. 이는 영국의 식민정책에 잘 협조하는 친영파를 키우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미얀마의 기존 소수 엘리트들에게만 교육을 집중시킴으로써 똑똑한 엘리트들이 영국에 자연스럽게 협조하게 되는 그런 효과를 기대한 것. 비슷한 예로 일본이 조선인에게 일정 부분 교육을 제한시키고,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엘리트들만 교육을 제공해줬던 정책과 흡사함. [10] 미얀마 소년 스카우트 협회는 1910년에 설립된 소년 단체이다. 상당히 역사가 깊은 단체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2016년 기준 2만 5천 명 정도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11] 영국 식민지 교육은 현재와 비슷한 보통교육을 채택하였는데, 각 지방마다 영국이 설립한 "국립고등학교"라는 것이 존재하였고, 이 시기의 식민지 치하에 있던 미얀마 학생들은 11세에서 12세에 고등교육을 받고, 14에서 15세 정도에 대학교육과정을 밟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영문위키의 맥락상 우탄트가 "14세에 랭곤대학교의 학위수여를 받지 못할까봐 고민하고있다"라는 문장이 있기 때문. 따라서 당시 식민지 교육과 우리가 기존 알고 있는 교육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니, 착오 없기를 바람. [12] 퍼니펠(J.S Furnivall J.S)는 영국 출신의 식민지 공무원으로, 현지에서는 작가로도 활동했다. 우탄트는 퍼니벨을 만난 후에 그에게 집필 및 기고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3] 미얀마의 독립 직후 버마 민주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는데, 나라의 정치 이념을 놓고 분열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은 계속 지속되었고, 결국엔 이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4] 정부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정부 기능이 상당히 손상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정부 내에 인사 작업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문서를 이해하는 데 착오가 없기를 바람. [15]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참여정부 시절)의 사이가 이것과 많이 흡사하다 [16] 정식 명칭은 "아시아-아프리카회의"로, 보통 "반둥회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냉전시기에 심화되는 긴박한 국제정세를 탈피하고자 평화를 위해 제3세계 중심으로 만들어진 회의이다. [17] 군소국가 대표와 비동맹 운동가들의 제안이었다. 이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국제정세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18] 당시 소련 근방의 서유럽 진영 땅에는 미국 핵탄두 소련을 향해 상당수가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소련을 향해 을 발사해 초토화 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련의 정치권 내에서도 위기감이 안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핵전력으로 비교를 해봐도 미국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이에 대응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고, 핵탄투를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의도였다. 이에 미국은 당연히 반발..을 안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 문제를 두고 격렬히 대치하고 있었던 것. [19]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제스처라는 거지, 반발 성명이라든지 무력시위라든지 전쟁이 아닌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발의 목소리를 내긴 냈다. 고로 할 건 다했고, 그래도 상태 유지는 원하지 않았기에 협상의 문을 열어 놓은 것 [20] 터키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사정권에 두는 핵탄두를 설치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선 최대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소련 워싱턴을 사정권으로 두는 미사일을 설치하려고 했다. 그것은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 형태로 나타났고 이를 두고 격렬히 대치했던 것. 특히 이 터키의 미사일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음. [21]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시위를 막기위해 소련군이 개입한 사건이다 [22]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영국으로 부터 독립 직후, 영토 문제를 놓고 3차례 걸쳐 전쟁을 사건이다. 3번의 전쟁 중 하나가 1971년 전쟁인 것. [23] 수에즈 위기에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는 등,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외적으론 연합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동맹; 사실상 영국 프랑스는 무력을 쓰는 것은 몇 안 되고, 실질적으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함)에겐 패배하였기 때문에 전쟁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24] 이때 소련 이집트에게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방어선을 침범하고 있다는 거짓 전보에 속아 이스라엘 국경 방어선을 공격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요인으로 꼽힘 [25] '유엔긴급군(UNEF)'는 중동내에 군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유엔으로부터 파견된 임시군이다. [26] 수에즈 위기 1957년 정전 협정으로 유엔긴급군(UNEF)을 이집트 국경내에 배치했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을 치를 작정인 이집트입장에선 이 유엔긴급군(UNEF)은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 그리고 유엔군을 배치하는 결정권은 해당 나라에 있음. [27] 이스라엘 이집트를 향한 선제 공격을 염두에 두고, 맞대응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치를 거부하였다. [28]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난다. [29] 반기문 사무총장이 우탄트의 묘에 방문하여 경의를 표한 적이 있다. 두 명의 아시아 출신 사무총장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