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4:57:09

장제스-다나카 회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장제스의 일본행3.2. 장제스-다나카 회담3.3. 장제스의 귀국
4. 결과5. 참고문헌
5.1. 저서5.2. 논문
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1927년 중국국민당 장제스 일본 제국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도쿄에서 만나 회담한 일을 말한다. 장제스의 1927년 일본 외유 중에 일어난 일로, 장제스는 소련 대신에 일본이 국민정부를 도와 국민혁명을 성공시키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다나카는 장제스를 극진히 대우하면서도 그의 지원요청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2. 배경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1인자가 된 장제스는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 직예군벌 우페이푸 쑨촨팡을 격파하고 우한, 난창, 난징, 상하이 등 주요 도시들을 잇달아 점령하여 1927년 봄에는 호북, 호남, 강서, 복건, 절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했다.

하지만 장제스와 대립하는 중국공산당 왕징웨이를 옹립하려는 국민당 좌파들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각종 정치적 공세를 펼쳤고 1927년 1월 우한 국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장제스는 차차 권력이 축소되어 1927년 4월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되고 1집단군 사령관으로 강등당해 상하이를 떠나라는 위협까지 받았다. 난징사건, 조계지 무력 회수 등을 보고 공산당이 국민당과 열강의 전쟁을 유도하여 국민당을 내부에서 적화시키려고 한다고 간주한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들은 더 이상 국공합작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숙청에 들어갔다. 이어 4.15 광저우 쿠데타가 일어나 광동이 장제스에게 호응했으며 4월 18일 장제스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남방에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두 국민정부는 일단 북벌을 지속하기로 결정하고 산동, 하남에 이르렀으나 북방에서 북양군벌들이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쭤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반격에 나서고 심각한 경제위기와 마일사변을 비롯한 내분에 시달리던 우한 국민정부의 탕성즈가 세력확대를 위해 도장을 선언하면서 장제스는 궁지에 몰렸다. 우한 국민정부가 국공결렬로 공산당과 결별하고 장제스 하야를 통합의 조건으로 요구하자 리쭝런, 바이충시를 비롯한 광서파들이 우한과의 화해를 위해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고 종용하자 장제스는 1927년 8월 13일 하야하여 공식적으로 야인이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중국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며 간접적으로 국민당 우파를 지원하던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와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을 비롯한 온건내각이 퇴진하고 적극적이고 강경한 팽창정책을 추진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한 상태였다.

3. 전개

3.1. 장제스의 일본행

장제스 하야 이후 불과 한달이 지난 9월 즈음에 장제스의 정적인 왕징웨이도 서산회의파 등의 맹렬한 비난을 받고 사퇴했고 장제스 복귀를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많았으나 장제스는 복직을 시기상조라 여겨 복귀 대신에 후한민, 허잉친, 우징헝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때 장제스는 "향후 최소 5년의 시간을 갖고 정치와 경제학 공부에만 전념하겠노라"고 말했다. 원래 여행 목표는 세계일주였으나[1] 급박한 정세 때문에 이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스러웠다. 9월 22일 시커우를 떠나 상하이로 향한 장제스는 9월 28일 상하이 호를 타고 9월 29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장제스는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일본이 발전하는 속도는 놀랍다. 일본은 또한 교육과 사회질서도 한단계 향상시켰다. 일본에 오기 전에, 물질적인 발전은 반드시 정신적인 타락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일본이 여전히 전속력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27년 10월 4일, 장제스의 일기
일본의 건설은 두 배의 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언제쯤에야 우리나라가 똑같은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1927년 10월 21일, 장제스의 일기

일본에 도착한 장제스는 상당히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가 공직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고위 공직자를 위한 의전을 받았다. 장제스는 과거 자신이 복무했던 13사단의 사단장 나가오카 가이시 장군을 만나 그에게 존경을 표시했고 나가오카는 장제스를 크게 환영했다. 10월 3일 고베에 도착해서는 고베의 화교들이 장제스에게 연설을 요청하였고 장제스는 크게 감명받았다.
중국인이건 아니건, 늙었건 젊었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모두 나를 너무도 존중해 준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1927년 10월 3일, 장제스의 일기

장제스는 고베의 아리마 온천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에서 요양 중이던 쑹메이링의 어머니 예계진(니구이전)을 만나 쑹메이링과의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 그간 예계진은 장제스가 기독교도가 아니며 이미 아내가 있다는 이유로 쑹메이링과 그가 결혼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해왔으나 장제스는 이제부터 성경 공부를 할 것이며 이미 전처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며 예계진을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 국민들을 상대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나쁜 감정을 제거하고 실질적인 공존과 공영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2. 장제스-다나카 회담

11월 5일에는 도쿄 아오야마의 다나카 기이치의 사저에 방문하여 장제스-다나카 회동이 있었다. 사실 다나카 기이치는 난징 정부를 반공 정부로 고평가하면서 적어도 관내에서는 난징 정부가 중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상해관을 기점으로 만주는 장쭤린이, 관내는 장제스가 지배하면서 양측이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다나카는 장제스를 정중하게 대우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을 제대로 된 주권국으로 대우하지는 않고 있었다. 오후 한시 반에 다나카를 만난 장제스는 두 시간 동안 장췬을 통역으로 삼아 다나카와 대화했다. 다나카의 통역은 육군 소장 사토 야시노스케였다. 장제스와 다나카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장제스: 중일 양국 관계의 장래는 동아의 앞날에 화복을 결정하는 것이다.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나카: 먼저 각하의 포부부터 들려주기 바란다.
장제스: 나의 생각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중일은 성의를 가지고 합작하고, 진정한 평화를 기반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공존공영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은 부패한 군벌을 상대로 하지 말고, 자유, 평등을 추구하는 국민당을 상대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에서 일본의 노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애국적인 친구를 택해야 하며,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중일은 참된 제휴와 합작을 할 수 있다. 둘째, 중국의 국민혁명군은 금후 반드시 북벌을 계속하여 혁명, 통일의 사명을 완성시키겠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간섭하지 말고 조력할 것을 희망하고 싶다. 셋째, 일본의 대중국 정책은 무력을 포기하고 경제를 제휴의 대본으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번에 귀국을 방문한 것은 중일 양국의 정책에 관해서 각하와 의견을 교환하고, 얼마 간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이다. 각하의 의견을 명확하게 교시해주기 바란다.
다나카: 각하는 북벌의 목표를 남경에 두고, 장강 이남의 통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하지 않고 통일을 서둘려고 하는가?
장제스: 중국혁명이 목표로 하는 바는 전국의 통일에 있다. 태평천국과 같은 실패를 또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다. 북벌은 되도록 빨리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되며, 만일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면 동아는 안정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본디부터 중국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복도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기록이 두 가지로 갈리고 있다. 장개석비록을 비롯하여 중화민국 측 기록에서는 다나카가 장제스가 중국의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 측 통역관인 사토 소장의 기록에 따르면, 다나카가 중국이 분열되어 통일이 어려우니 장강 이남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장제스는 이에 동감하지만 북벌을 서두르지 않으면 남방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측 기록에는 장제스는 다나카에게 중국에서 반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일본이 장쭤린을 지원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양자가 모두 반공의 필요성에 동감했다고 나온다. 어쨌거나 장제스는 일본에 과거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당을 도와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 요구가 국민들에게 매국으로 불릴 것을 알고 있다고까지 강하게 나왔으나 다나카는 2시간 동안 끝내 확실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 결국 회담은 구체적인 합의 없이 끝났고 이에 실망한 장제스는 1927년 11월 5일 장문의 일기를 통해 실망을 표현했다.
오늘의 다나카의 회담결과를 종합해보면, 그에게는 조금도 성의가 없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중일간에는 거의 합작 가능성은 있을 수 없고, 동시에 일본은 우리의 혁명 성공을 용납하지 않으며, 앞으로 반드시 우리 혁명군의 북벌행동을 방해하고, 중국의 통일을 저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 명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일본은 북양군벌을 상대로 하고 있지만 만청시대, 청일전쟁 이래 계속해서 일본과의 교섭을 맡고 있는 자는 모두 부패하고 이기적인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을 경멸케 하고, 이 축적이 한층 더 이 경향을 조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이번 방문도 결과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나카는 옛날의 군벌 관료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나를 접했다. 일관해서 나를 적당히 다루고, 구슬리려 할 뿐, 성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중국침략이라고 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책을 전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정책의 개략을 살짝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전혀 헛일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내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제스는 자신이 잃은 것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장제스와 다나카의 회담 내용이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장제스의 정적들은 장제스와 다나카가 어떠한 합의를 했는지 매우 불안하게 여겼다. 실제로 리쭝런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장제스가 다나카와 비밀협약을 맺어 다나카는 장제스에게 4천만 엔을 지원하고 장제스는 일본의 중국에서의 특수 권익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장제스는 훗날 협약문건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고 일본이 협약문건을 전달하자 공작원을 보내 문건을 훔쳐으며 일본의 만주사변도 일본이 장제스가 약속을 깬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레이 황 교수는 리쭝런의 이야기를 장제스의 개인 여행에 대해 장제스의 정적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겼는지에 대한 증거로 분석한다.

3.3. 장제스의 귀국

이외에도 일본 정재계 여러 인사들과 두루 회동한 장제스는 다나카와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일본 여행을 중단했다. 이는 중국의 급변하는 정세를 의식한 것으로 탕성즈 토벌의 시작, 중전회 소집 논란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중국에서 장제스 복귀 요구가 더욱 높아진 것이었다. 난징 측에서는 허잉친, 리쭝런, 바이충시 등이 장제스에게 탕성즈 토벌과 북벌 지휘를 맡아줄 것을 전보로 요청하면서 장제스 귀국을 촉구했고 원로들도 계속 귀국을 종용했다. 11월 6일에는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는 대회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이에 고무된 장제스는 5년으로 계획한 세계일주+공부 계획을 한달 반 만에 끝내고 11월 7일 밤 8시, 자동차로 요코하마로 떠나 도카이도 야간열차를 타고 11월 8일 도야마 미쓰루 등의 환송을 받으며 고베를 출항, 11월 10일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12월 1일 쑹메이링과 결혼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명문가 중 하나를 인척관계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4. 결과

강력한 반장군벌인 탕성즈가 토벌되고 왕징웨이가 복직을 위해 장제스와 연대, 장왕합작을 결정하였으며 장제스 하야를 종용하던 광서파가 입장을 선회하여 장제스 복귀를 지지하면서 장제스의 복직을 막을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서산회의파만이 장제스의 복귀를 저지하려고 광서파와 연대를 시도했으나 서산회의파에게서 얻을 것이라고는 명망밖에 없다는 점에서 광서파는 반장파에 가담하길 거절했다.

결국 1928년 난징 국민정부가 재출범, 장제스는 정식으로 공직에 복직하여 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8년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제남 사건을 일으켜 끝끝내 국민정부와 충돌하고 장제스와 적대하게 된다.

한편 서산회의파는 근성넘치게도 1929년 편견회의를 시작으로 반장군벌들을 선동하여 이들로 하여금 반장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5. 참고문헌

5.1. 저서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중국 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장제스와 국민당엘리티스트, 정두음, 도서출판선인.

5.2. 논문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國民革命時期의 蔣介石과 汪精衛, 김영신, 동양사학연구 112권, 동양사학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湖南 軍閥政權의 再編 : 北伐時期(1926-27) 唐生智 政權의 정치적 성격, 김세호, 동양사학연구 86권 86호, 동양사학회.
  • 湖南軍閥政權의 崩壞와 變貌 : 唐生智의 執權過程(1923-1926)을 중심으로, 김세호, 중국근현대사연구 3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국공합작기 왕정위(汪精衛)의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혁명



[1] 일본에서 정치, 사회학, 독일에서 철학, 군사학, 프랑스에서 정치, 사회학, 영국에서 정치, 경제, 해군, 미국에서 철학, 경제, 이탈리아에서 정치, 사회학, 터키에서 혁명사를 배울 계획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