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31 20:15:22

국민당의 2차 동정

第二次東征
Second Eastern Expedition
파일:2차동정.jpg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로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천중밍의 반격3.2. 혜주 공략3.3. 당호 전투와 동정의 종료3.4. 국민당의 남정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clearfix]

1. 개요

국민당의 2차 동정·남정의 전개 과정[1]

1925년 10월~11월에 걸쳐 일어난[2]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광동군벌( 월계군벌) 천중밍 사이의 전쟁. 이 전쟁으로 천중밍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광동은 국민정부에게 복속되었다.

2. 배경

국민당의 1차 동정으로 국민당은 천중밍을 격퇴하고 광동 동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천중밍 토벌에서 태업만을 일삼았던 양시민, 유진환 부대는 천중밍, 탕지야오와 내통하며 군비만을 요구할 뿐이었고 광동성 성장 관서, 재정부 등을 장악하여 중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후한민은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여 이들에게 중앙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지만 이들이 도리어 반란을 일으키자 동강에 있는 장제스, 쉬충즈 부대를 소환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1925년 7월 1일 마침내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국민당 산하의 병력은 국민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당군으로 구성된 제1군 사령관은 장제스, 호남군으로 구성된 제2군 사령관은 탄옌카이, 운남군으로 구성된 제3군 사령관은 주페이더, 광동군으로 구성된 제4군 사령관은 리지선, 광동군으로 구성된 제5군 사령관이 리푸린이었다. 그런데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 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당하면서 국민당은 혼란에 휩싸였다.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 사건을 우파 후이성 등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후이성의 사촌형이자 외교부장 후한민을 소련으로 강제 외유를 보냈으며 군정부장 겸 월군 사령관 쉬충즈도 천중밍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숙청하여 상하이로 보냈다. 장제스는 쉬충즈 숙청에서 광저우 위수사령관으로 활약하여 쉬충즈의 군세를 흡수하였고 휘하의 병력이 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청년부장 겸 중산대학 총장 쩌우루, 린썬 등이 국민혁명 전파를 구실로 추방되면서 국공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천중밍은 하이난섬과 광동 남부를 장악한 군벌 등본은과 결탁하고 베이징의 돤치루이 임시 집정 정부으로부터 30만원의 군비와 두척의 군함을 받아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홍콩의 영국 식민정부도 천중밍에게 300만 발의 탄약과 군자금을 제공하며 천중밍을 원조했다.

3. 전개

3.1. 천중밍의 반격

양시민, 유진환의 반란 때문에 동정군이 대부분 철수하고 이어 8월 20일에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등에 휘말려 국민정부가 혼란에 휩싸이는 것을 본 천중밍은 광저우 공격을 준비하고 9월 11일, 홍조린과 임호로 하여금 병력을 삼로를 나누어 동강을 치게 했다. 국민혁명군 일부 부대가 매현과 조주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반란군의 병력이 3만에 달해 금방 압도당하여 퇴각했고 반란군은 광저우 동쪽 150킬로미터 지점의 평산에 이르렀다. 보령, 혜래, 게양, 조양 등 4개 현이 함락되었고 동강의 상당수 지역이 다시 천중밍의 손에 들어왔다. 9월 16일, 천중밍은 유지육을 총지휘관에, 이역표를 전적지휘관에, 사문병, 왕정화, 임렬을 각각 좌중우로 지휘관으로 삼고 광저우 동남부의 등본은에게 남쪽에서 협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농민부 비서 펑파이 등은 강경하게 2차 동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2차 동정을 실시하기로 결정, 9월 28일 장제스를 동정총지휘관에, 왕징웨이를 당대표에, 저우언라이를 총정치부 주임에 임명하고 소련고문 로가챠프를 군사고문으로 삼았다. 그리고 허잉친을 1종대 지휘관으로 삼아 중로군 1만명을 거느리게 했고 리지선을 2종대장으로 삼아 우로군 1만 2천명을 거느리게 했으며 청첸을 3종대장으로 삼아 좌로군 6천명을 지휘하게 했다. 10월 1일 동정군 총사령부는 동정개시 명령을 내려 10월 6일 각로의 종대가 전선으로 떠났다.

3.2. 혜주 공략

파일:혜주점령.jpg
혜주성 공략

장제스는 1군과 3군을 중심으로 3종대를 편성하고 허잉친, 리지선, 청첸을 각각 1종대장[3], 2종대장, 3종대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1군 2사단 당대표에는 저우언라이가 임명되었다. 장제스는 1차 동정에서 바실리 블류헤르[4] 사용했던 우회 전술을 버리고 혜주로의 정면 돌파 전술을 채택했다. 혜주는 남북서는 강으로, 동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로 2천년 동안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요충지였는데 양곤여가 이끄는 3천명의 병력이 수비하고 있었다.

동정군은 혜주 공격을 위해 부대를 공성군과 예비로 나누었는데 1종대 병력의 대부분이 공성군이 되었다. 장제스는 1종대 1사단, 2사단 4단, 3사단 등의 정예부대를 혜주 공략에 투입했고 1종대 잔여부대와 2,3종대는 예비로 삼아 박라, 담수 일대에 배치하여 적의 증원과 협공을 저지하게 했다. 총지휘부가 북문에 설치되고 2사단 4단이 배치되었다. 10월 13일 오전 9시 30분에 혜주성 공략이 시작되었다. 혜주성은 성벽의 높이가 12~14미터, 두께가 8~10미터였으며 철조망, 못이 박힌 널판, 말을 막기 위해 가시철망으로 뒤덮은 목판, 4,5미터 높이의 전기철사 담장 등으로 탄탄한 방어를 갖춘 상태였다. 저우언라이는 정치선전대를 조직하고 <전시정치선전대강>을 작성하여 강연, 전단 배포, 표어 부착 등으로 민중과 군인들을 고무시켰다. 야전포격대가 10시에 포격을 시작해 성문, 성루, 성내 적 사령부, 포병진지, 기관총진지, 무선방송실을 포격했고 비행기들이 포탄과 선전문을 투하했다.

국민혁명군의 포격에 북문의 성벽이 무너져내렸고 1종대 보병이 북문을 돌파하여 북문교를 건너 성 안에 진입했지만 양곤여 부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종대는 5차례에 걸쳐 맹렬히 돌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낼 뿐 진전이 없었다. 오후 4시에 병사들이 사다리를 대고 성벽 위로 올라갔지만 실패했고 보병 4단 단장 유요신이 직접 사다리를 가지고 성벽을 넘으려다 전사했다. 4단의 사상자가 50%를 넘자 보병 7,8단과 보충단이 투입되었으나 적들이 화염병과 불붙은 장작까지 던지며 격렬히 저항하자 모두 격퇴되었다.

10월 14일 오전, 북문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4단이 선봉을 자처하여 <공선선봉부대>를 조직하여 앞장섰고[5] 2시에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4단과 8단이 북문을 쳤고 7단과 보충단이 서문을 쳤다. 야포와 산포 포격은 모두 북문에 집중되었다. 병사들은 짚을 쌓아 불을 질러 전기선을 태워버렸고 육탄전으로 철조망과 철판을 돌파하였다. 양여곤 부대는 성루 뒤에 배치한 기관총으로 맹렬히 저항했는데 산포대가 북문 가까이에 배치되어 성루를 날려버리는데 성공했다. 기관총 기지가 궤멸당하자 4단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를 올라 수류탄을 던졌다. 이로써 오후 3시에 이르러 북문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2차 동정에도 동행한 알렉산드르 체르파노프는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수류탄이 성가퀴 위에서 폭발했고, 소총과 기관총 소리도 들려왔다. 적을 말끔히 쓸어버린 승리의 희열에 취해 국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양곤여는 끝까지 사령부에서 저항했으나 대세가 기울어지자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부상당한 몸으로 도주했다. 10월 14일 저녁에 동정군은 4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혜주성을 완전히 점령했고 장제스는 광저우 당중앙과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에게 승전보를 보냈다. 이때 장제스의 조카인 장샤오셴이 군공을 세워 중대장으로 승진했다.

3.3. 당호 전투와 동정의 종료

파일:2차동정원정로.jpg
동정군의 원정로

3일간 휴식을 취한 동정군은 10월 16일 조매에 대한 공격을 결정, 10월 17일 동진을 재개했다. 1종대는 우로를 맡아 해풍을 점령, 26일에 하파에 이르렀고 2종대는 중로를 맡아 자금으로 진출했다. 3종대는 좌로를 맡아 하원에서 출발, 동강을 거쳐 오화로 진격했다. 국민혁명군에 호응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도 벌어졌다. 동정군이 해풍과 육풍에 이르렀을 때 <동정참전보고>에 따르면, 농민들이 몰려와 술과 고기를 가져와 자발적으로 병사들을 환영했고 밥과 국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당시 군대에는 새로운 기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장병 간, 군민 간 사이가 거의 단결되어 있었고 용왕매진하는 혁명적 정신이 충만하여 있었다. 당시 군대에는 당대표와 정치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제도는 중국 역사상 없었던 거이며 이런 제도에 의해 군대의 면모가 새로워졌다."고 평가했다.

천중밍은 병력을 퇴각시켜 당호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1종대 3사단장 허잉친은 당호에서 천중밍 병력 5천명과 조우하였고 적의 숫자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양호각으로 퇴각했다. 천중밍은 하파 탈환을 위해 돌격해왔으나 1사단이 천중밍 부대를 격퇴했다. 이어 자금의 2종대가 적시에 달려와 매림에서 천중밍의 병력을 모두 포위섬멸했다. 정거장에서 장제스를 노린 저격이 있었으나 장제스에게 맞지는 않았다. 당호 전투에서 주력을 잃은 천중밍 부대는 무기력하게 궤멸당했고 각 종대는 복건의 성경까지 순조롭게 전진했다. 원정을 시작한지 근 한달 만인 11월 초, 장제스가 산터우를 다시 점령하면서 2차 동정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11월 말에 이르러 광동과 복건 성경에서 천중밍의 잔존 부대까지 완전히 섬멸되었다. 장제스는 공식보고에서 6,000명의 포로와 비슷한 숫자의 소총을 노획했다고 보고했다. 최경식 교수의 <국공비사>에 따르면 섬멸된 천중밍군은 12,000명, 노획된 각종 무기는 8,000여점이라고 한다.

3.4. 국민당의 남정

한편 천중밍과 결탁하여 광동정부의 남방을 위협하던 등본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정부는 10월 초, 4군 10사단에게 남로 경계를 담당하도록 하고 천밍수를 전적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0월 16일, 10사단이 강문에 배치되었고 10월 25일 개평 단수구를 공격하려는 등본은의 부하 소정의 부대를 격퇴했다. 동정이 완료된 이후, 국민정부는 2군 일부와 3군 전부를 남하시켜 천밍수에게 지휘를 맡겨 남로연군 총지휘부를 조직하여 3군 군장 주페이더를 총지휘관에, 주극정을 정치부 주임에 임명하였고 휘하의 병력을 총 4로군으로 구성하게 하였다. 1로군 사령관은 4군 10사단 지휘관 천밍수가 맡았고 2로군 사령관은 3군 소속 왕균임이, 3로군 사령관은 2군 소속 대악이, 신편 2사단장 진장보가 우측 지대를 맡았다.

1924년 11월 초 , 국민정부는 광서에서 부상한 신 계계군벌 리쭝런을 광서전성수정독판 겸 광서육군 제1군장으로 임명하고 리쭝런과 합작 중인 황소횡을 광서육군 제2군장으로 임명하여 광서와 연계하는 한편, 남정의 실시를 결정했다. 공산당은 황학증을 서기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선명(張善銘), 주극정(朱克靖), 료건오(蓼乾五)를 파견하여 선전과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12월 말까지 남정군은 등본은 부대를 궤멸하여 고주(高州), 뇌주(雷州), 흠주(欽州), 염주(廉州) 등을 잇달아 함락시켰다. 등본은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하이난 섬으로 달아났으나 국민혁명군은 1926년 1월 남중국해를 도하하여 2월에 하이난 섬까지 장악하면서 등본은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도주했고 패잔병들은 국민정부에 항복하여 국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로써 광동 내부의 군벌들을 대부분 정리했고 광동은 완전히 국민정부의 수중에 들어와 국민정부의 세입을 크게 증가시켜주었고 북벌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파일:2차동정승리.jpg
2차 동정 승리를 기념하여 중산공원에 모인 국민혁명군

국민정부와 합작한 리쭝런, 바이충시 등 신계계군벌은 광동을 노리던 탕지야오를 격퇴시키고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에 심홍영, 루룽팅 등 광서의 경쟁군벌들을 모두 청산하여 1925년 광서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광서 지방의 개혁과 경제건설에 착수하였고 성정부 조직법이 제정되자 광서성 정부를 조직,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국민정부는 양광지역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4. 결과

기반을 완전히 상실한 천중밍은 또 다시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고 그 이후 다시는 국민정부에 적대하지 못했다.

저우언라이는 광동 동강 각속 행정위원에 임명되어 혜주, 조주, 매현, 해륙풍 산하 25개 현의 행정사업을 지도할 것을 지시받았고 장제스는 두 차례의 동정, 전계군과 계계군 토벌, 월군 흡수를 성공시키면서 국민정부의 최고 군사실력자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급속한 성장에 주페이더, 탄옌카이, 리지선 등 다른 군사실력자들의 알력이 심해졌으며 북벌을 주장하는 장제스와 북벌이 시기상조라 반대한 공산당 사이에서도 마찰이 일어났다. 여기에 친위 군사력을 육성하려는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불화를 빚으면서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영상 앞에는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등이 나온다. [2] 국민당의 남정을 포함한다면 1926년 2월까지. [3] 병력은 2만명, 정치위원 160명. [4] 이때 바실리 블류헤르는 펑위샹과 회담하기 위해 광저우를 떠난 상태였다. [5] 중국 공산당은 이들이 공산당원과 공청당원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