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04:21:58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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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문·학술 기구
예조 계제사
(기능 일부)
집현전 홍문관 홍문관
우문전 예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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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수정전.
이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

1. 개요2. 역사3. 성과4. 집현전의 관직5. 대중매체에서6. 유사기구
6.1. 한국
6.1.1. 국립6.1.2. 사립
6.2. 외국
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집현전( 殿)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다.[2]

'Jade Hall'이라고 영역(英譯)한 사례를 종종 접할 수 있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 집현전이 재개편된 홍문관의 별칭이 옥당(玉堂)이었기 때문. 'Jade Hall'은 '옥당'을 직역한 표현이다. 참조 링크.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Hall of Worthies라고 돼있다.

2. 역사

중국에서는 전한, 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현종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를 두어 경적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사에서 집현전(集賢殿)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 인종 14) 고려에서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술 기관들의 명칭은 이름뿐으로, 재상들이 겸해야 했던 대학사(大學士)를 가리키는 말로만 사용되었고, 실제 학술 기능은 한림원이 담당하였다.

1356년( 공민왕 5) 고려 공민왕이 문종 관제를 회복하면서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했지만 역시 내용이 없는 것은 같았다. 조선에서는 1399년( 정종 1)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여,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420년( 세종 2) 확대 및 개편되어,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훈민정음(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거든 것이고 세종의 주도하에 문종과 다른 왕족들이 주로 참여한 것이 정설이다.[3] 아니라면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되어도 겸직인 윗 관직들을 제외한 최상위 보스인 부제학 최만리가 몰랐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세종대왕이 저질러 놓으면 집현전 학자들이 뒷수습하는 모양새.

집현전에 소속된 인물들의 이름을 보자면, 정인지, 정창손,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최항, 양성지, 서거정, 노사신… 당대의 천재들은 다 모였다. 그야말로 드림팀.

1456년(세조 1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을 비롯한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음력 6월 6일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시키면서, 집현전에 소장한 책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때와 달리 집현전의 실적은 저조했는데 심지어 소속된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1460년(세조 5년) 음력 5월 22일에는 이조에서 사관 선임 규정을 강화하고, 경연, 집현전, 보문각 등은 직함이 비고 직임이 없으니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이로써 집현전은 완전히 폐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종이 친정을 행한 이후인 성종 9년(1478년) 음력 3월 19일 집현전에 의거해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이후 연산군 때에는 흥청[4], 곧 기생의 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3. 성과

조선 세조에 의해 폐지당하기 전까지 집현전은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16명, 2등이 6명, 3등이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과거에서 5등 안에 합격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의 최고인재들이 모여있는 기관이었다. 때문에 조선의 집현전은 15세기 학술 연구의 큰 축이 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이 되는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며 여러 서적들을 참조, 당시의 현실에 맞는 사례들을 수집하고 정리
  •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 전개
  •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 수행.
  •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등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가 대표적. 그외에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도 편찬했다. 때문에 장기간 수행하는 과제가 부여되고 완수하는 양상이 많았으며 이에 일부에선 집현전을 조선의 학술/연구기관으로 꼽는다. 오늘날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집현전과 같은 기관의 필요성은 이후 몇몇 뛰어난 임금들에게 인식되어 집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성종대의 홍문관이나 정조대의 규장각이 탄생하게 된다.

4. 집현전의 관직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정1품 영전사 2명 겸직
종1품
정2품 대제학 2명 겸직
종2품 제학 2명 겸직
정3품 부제학(당상관) 1명
종3품 직제학 1명
정4품 직전 1명
종4품 응교 1명
정5품 교리 1명 부검토를 겸임
종5품 부교리 1명 부검토를 겸임
정6품 수찬 1명 부검토를 겸임
종6품 부수찬 1명 부검토를 겸임
정7품 박사 1명
종7품
정8품 저작 1명
종8품
정9품 정자 1명
종9품

5. 대중매체에서

  • 문명 5
    한국의 문명 특성으로 나오는데, 모든 전문가와 위인 시설이 매 턴 과학력 2를 추가로 제공하며 수도에서 과학과 관련된 건물을 지을 때마다 과학력을 얻는 것. 이 덕분에 연구가 미칠듯이 빨라서, 남들이 석궁 쏠 때 혼자서 총 쏘고 다닐 수 있다. 이 밖에 플레이어에게 선전포고를 할 때 세종의 대사[5]에도 나오는데, 학문 연구 및 자문 기관이라 조언이나 자문 정도는 몰라도 선전포고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의회같은 성격으로 해석한 듯.
  • Europa Universalis III
    한국의 Decision에 나온다. 능력치는 존재 가치가 없는 수준. 문화력을 0.01씩 증가시켜주는 정책인데, 사용할 때 드는 50두캇이 3.142배는 더 아깝다. 왜냐하면 문화력이 정말로 남아돌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토가 작고 기술개발속도는 거북이라서 행정관이 나올 때마다 0.05문화력으로 갈아넣는데, 대체 0.01이 무슨 소용일까? 심지어 사용하는데 3행정관까지 소모되며, 영구적이지도 않다. 이쯤되면 에딧에 손이 가기 시작한다.
  • Europa Universalis IV
    전작처럼 50두캇을 지불하나 효과는 매년 위신 +0.5에 게임종료까지 적용되게 바뀌었다.

6. 유사기구

6.1. 한국

6.1.1. 국립

6.1.2. 사립

6.2. 외국

7. 같이보기

  • 정종: 집현전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 세종: 큰아버지 정종이 설치한 집현전의 기능을 확대했다.
  • 최만리: 세종조때 부제학으로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였다.
  • 훈민정음
  • 세조: 세종대왕의 아들. 큰할아버지 정종이 설치하고 부왕 세종이 자리잡게 만든 집현전을 폐지했다.

[1] 북궐도형을 보면 이 건물 앞에 궐내각사가 쫙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한국개발연구원(KDI)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KDI에서도 스스로 집현전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 다만, 당연히 KDI가 집현전의 역사를 승계할 수는 없다. [3] 다만 중국의 음운학자인 황찬을 요동의 귀양지까지 만나고 온 신숙주 같은 경우도 있다. [4]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5] '네놈의 성가신 행패를 집현전은 더는 용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