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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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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 1월 15일 태종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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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이직7 조경 조박8
조온 한규 홍서
1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2 1404년 태종의 왕자들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섬기려 한 혐의로 제명
3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4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5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6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7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8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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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평도공(平度公)
박은
朴訔
출생 1370년( 공민왕 19)
사망 1422년 6월 7일[1] (향년 51 ~ 52세)
(음력 세종 4년 5월 9일)
봉호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시호 평도(平度)
본관 반남 박씨
앙지(仰止)
부모 부친 - 박상충
모친 - 한산 이씨 이곡(李穀, 1298 ~ 1351)의 딸[2]
부인 주언방(周彦邦)의 딸
자녀 장남 - 박규(朴葵)
차남 - 박강(朴薑)
3남 - 박훤(朴萱)
장녀 - 윤구(尹救)의 처
차녀 - 김윤(金潤)의 처
3녀 - 이중(李重)의 처
4녀 - 함종 어씨 어효첨(魚孝瞻, 1405 ~ 1475)의 처

1. 개요2. 생애
2.1. 조선 개국 초반2.2. 이방원과 가깝게 지내다2.3. 심온을 몰락시키다2.4. 아샤에서의 모습
3. 후손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여말선초 관료, 조선 정승으로 부친은 고려 말의 문신 박상충이고, 외삼촌이 목은 이색이다.

2. 생애

2.1. 조선 개국 초반

음서로 관직길에 올랐다가 138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391년 개성부 소윤이 된다. 하지만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에 오르기는 했으나 주로 지방관을 전전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외삼촌이 되는 이색이 정도전 일파에 의해 내쫓겨지고 외사촌들은 죽기까지 한 상황에다 아버지인 박상충이 죽은 지도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던지라[3] 중앙 관직에 오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의 배경을 본다면 오히려 조선 개국에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잔존파와 더 가까웠을 확률이 높다.

다만 졸기 등 실록에 기록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본인의 대쪽 같은 성품 탓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 6년에 그와 안 좋은 사이였던 유양이라는 이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었고, 당시 집정이었던 이가 그를 사헌시사로 임명하여 처벌을 하게끔 만들었는데, 오히려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주장하여 유양이 벌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집정[4]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지춘주사로 좌천되기도 했고, 태종 때에는 박은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명나라에서 황엄이란 환관이 사신으로 왔는데, 그의 횡포에 시키는 대로 따랐던 다른 지방관들과는 달리 오로지 박은만이 규정에 맞게 대접하여 황엄이 이런 그에게 노하면서도 태종에게 그의 충신은 박은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든지, 대사헌이 되었을 당시에는 당시 좌정승이었던 하륜이 잘못한 바가 있으면 지적하였고, 그의 말을 하륜이 듣지 않으면 서명하지 않았다는 등의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였다.

2.2. 이방원과 가깝게 지내다

어쨌든 그런 주변 상황 때문이었는지 이방원 측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5], 1398년에 이방원이 무인정사를 일으켰을 당시 상술한 대로 지춘주사로 있었다가 상경하여 무인정사에 참가한 공으로 이방원에 의해 도성에 남아 사헌중승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6] 중앙 관직에도 오르기 시작했고, 2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을 도와서 그가 태종으로 즉위했을 때 좌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육조의 판서직을 두루 거치는 등 중앙의 중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여, 결국 1416년 우의정에 올랐고, 뒤이어 좌의정에 임명된다.

2.3. 심온을 몰락시키다

그런데 좌의정 시절 때 태종의 외척 숙청 계획에 가담해 세종의 처가인 심온 가문을 몰락하는데 한몫을 하였고, 심온이 절대 반남 박씨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일화가 야사인 연려실기술이나 기재잡기 등에 남았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전제군주정인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만백성의 어버이인 국왕을 탓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심온의 죽음에 대해서 태종에게 책임을 지우기보다는 박은을 원망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합당했다.

이후 박은은 세종 때에도 좌의정 자리를 유지하지만, 태종이 죽기 하루 전에 죽게 된다.

2.4. 아샤에서의 모습

대중들에게는 태종의 외척 숙청에 적극 가담하고 한술 더떠서 소헌왕후 폐위까지 주청한 전적 때문에 아첨꾼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이는 세종의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국왕을 비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인 세종의 입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음은 분명하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세종은 박은의 명예를 추탈하는 등의 처벌을 일절 내리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실록 속 사례나 전해져 오는 야사에 따르면 박은은 대쪽 같고 겸소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소헌왕후의 가문과는 다르게 원경왕후의 친정 가문과는 꽤나 친분이 돈독했던 사이이었고, 이 때문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 숙청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언들에게 탄핵을 당했을 정도. 그리고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선배 하륜과는 달리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전해져오는 야사에 따르면 우의정으로 임명되고나서도 낙산 밑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심지어 밥도 비교적 거친 조밥을 먹고 살았다가 미행을 나왔다가 박은의 집에 들린 태종 이방원이 이를 보고 의아하게 여겼을 정도였다고. 이 야사의 경우 박은의 본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반남록에 실린 야사라 다소 집안 인물을 의도적으로 미화하고 띄우는 성향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실록에서도 박은이 치부와 뇌물로 물의를 일으켰단 기록은 전무하다.

3. 후손

조선 ~ 근대 대다수 반남 박씨 역사인물의 조상이다. 차남 박강의 증손, 즉 조은 박은의 현손인 인종 인성왕후와 삼남 박훤의 아들인 박숭질[7]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장남인 박규 쪽인데, 구체적으로는 박규의 현손인 5대손 야천 박소에서 갈라진다.

박소의 장남 박응천의 후손이 소론의 박세당(박은 기준 9대손)과 그 아들 박태보(10대손) 부자[8],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14대손), 구한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박정양(17대손)이고, 박소의 차남 박응순의 딸이 선조 의인왕후(7대손)이며, 박소의 4남 박응복의 후손이 소론의 박세채(9대손), 부마 박필성(11대손)ㆍ박명원(13대손), 연암 박지원(13대손)과 그 손자 박규수(15대손), 부마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이후 친일이 된 박영효(18대손), 구한말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오적 경술국적) 박제순(16대손)과 그 손자인 독립운동가 박승유(18대손) 등이다.

4. 대중매체

4.1. 용의 눈물

임병기가 연기했다. 태종이 처음 조회를 보는 날부터 시작해 꾸준히 등장하며 다양한 직책과 책임을 맡다 좌의정까지 오른다. 옥사 이전까지는 그와 제법 친한 사이로 묘사되며[9] 태종이 민무회와 민무휼을 숙청할 때는 사위 민무휼을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어했던 우의정 이직을 겁박하다시피하며 말도 못하게 하는 대사헌 유정현에게 "너무 심하다"며 한 마디 할 정도로 외척 숙청에 온건한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심온의 숙청 때에는 영의정인 유정현과 함께 심온을 국문하는데 심온이 유정현은 그럴 줄 알았지만 박은에게는 그야말로 배신감을 느낀다고 비난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10]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태종에게 국문을 중단하자고 제안하여 가납되기도 하며 중병에 걸렸을 때 세종과 소헌왕후가 어의를 보내자 감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1]

4.2. 대왕 세종

박영지가 연기했다. 일명 '국왕의 칼' 내지는 '칼잡이'로 불리며 온건파 축에 속했던 용의 눈물과는 달리 태종이 벌이는 온갖 숙청과 정치 공작을 최전선에서 직접 집행하는 역할로 나왔다.

드라마에서 민씨 형제나 심온을 비롯해 누군가를 고문하는 장면엔 반드시 박은이 있다.(...) 이조판서로 등장하고 작중 내내 영의정 하륜과 대립하며 하륜을 비롯한 이숙번, 김한로 등 공신과 세자파들을 견제하려 하지만, 자신보다 정치 원로 격인 하륜에게 번번이 밀린다. 이후 심온을 끌어들여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해 하륜을 도모하려 했고, 심온의 사위인 충녕대군을 움직여 세자를 견제하려 했지만, '정쟁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륜을 쳐내려는 태종의 발탁을 받아 그의 부패를 밝혀내 탄핵시키는데 성공하고, 이후 '6조 직계제'가 실시되면서 조정의 실세로 자리잡을 기대에 부풀지만, 지신사 조말생으로부터 태종이 그를 좌의정으로 승차시키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에게 뒤통수를 친 조말생과 태종에게 역정을 내는 것이 백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개가 떨어져도 새는 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좀 쉬다가 돌아오라는 조말생[12]의 권고를 거절하고, 명예직일뿐인 좌의정으로 조정에 남는다. 이후 태종이 경녕군 건으로 불거진 폐비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민무휼과 민무회를 숙청하는 작업을 아니나다를까 역시 박은에게 맡겼고,[13] 박은은 이숙번을 반협박해 형제의 비리를 밝히고 사사에 이르게 만든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을 때는 '세자사',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집현전 영전사'가 되어 세종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측근 포지션을 잡는다. 이때 심온의 숙청도 맡게 되는데, 박은 본인도 처음에는 강상인과 엮어서 심온을 보내버리려는 상왕전의 의중에 이게 맞냐는 식으로 반문했으나 태종이 "그럼 너부터 죽여주리?"라고 하자 깨갱하고, 유정현과 함께 강상인과 심온을 모두 숙청한다. 이후 집현전에서 계속 일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계속 달리하는 태종과 세종 사이에 끼어 마음 고생도 했으나[14] 점차 세종에게 감회되어 정치적 후원자가 된다. 이 때문에 집현전 위주로 국정이 돌아가는 데에 반발한 대신들이 집현전 폐쇄 여론을 밀어붙였을 때, 집현전을 살리는 대신 자신이 표적이 되어 파직을 당하는 쪽으로 희생한다. 세종에게 앞으로 평생 자신이 쳐낸 무고한 자들에게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며 성군이 되어달라 당부하고는 집현전 학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궁을 떠났는데, 문제는 박은이 떠난 이후 황희가 복직하기 전까지 세종은 조정을 컨트롤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4.3.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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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균[15] 박은을 연기한다. 태종 재위 시절부터 등장하던 타 드라마와는 달리 젊은 시절부터 등장하여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동참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민씨를 통해 이방원의 측근으로 포섭된 뒤, 지춘주사로서 지방군을 끌고 와 방원의 거사에 일조한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후 하륜, 이숙번, 조영무 등이 최측근으로 자리한 것과 달리 그들보다 낮은 품계를 전전했는데, 박포와 달리 불만 없이 묵묵히 일을 하다, 태종 집권 후반부에 이르면 하륜과 조영무는 사직, 이숙번은 숙청당하지만 박은은 병판, 이후 좌의정까지 오르며 황희, 유정현과 함께 태종의 수족으로 자리 잡고 세종 즉위 후 심온의 숙청에 앞장 선다.
[1] 율리우스력 5월 29일 [2] 이색의 누이. [3] 묘비에 따르면 박상충 사후 얼마 안있다가 모친도 잃어서 고작 나이가 5살 때 이미 고아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외삼촌이었던 목은 이색이 데려가서 키워준 걸로 추정된다. [4] 사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이 당시 집정이라 하면 이 사람밖에 없다. 애초에 둘은 고려시대때부터 정치적으로 정적이었던데다가 성향도 상극이었던만큼 굳이 이런 사건이 없었더라도 박은 본인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많기도 했다. 게다가 원래 척을 졌던 사이었던만큼 이 집정은 박은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좌천시키려 했을 확률이 높다. [5] 박은의 후손이자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박찬수의 저서 <평도공 박은 연구(2019)>에 따르면 박은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이방원과 가까워졌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박은 본인은 목은 이색을 외삼촌으로 두고 있는 온건파 사대부들과 가까운 집안 배경을 가졌고 여흥 민씨 또한 권문세가 출신 가문이었던만큼 둘 다 '고려잔존파'라는 교집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개국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원의 주요 지지세력은 본래 조선 개국에 비교적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온건파 사대부들이었다. [6] 다만 공이 비교적 미약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1차 왕자의 난때는 공신으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래도 사헌중승으로 임명한 걸 보면 이방원이 박은의 공을 어느정도 치하는 한 듯. [7] 연산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모두 역임한 문신이다. [8] 부자가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9] 심온와 박은 두 사람만 따로 묶인 적은 없으나 하륜으로부터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들에 포함되기도 했으며 황희 역시 이 둘과 다른 몇몇을 태종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영의정에 임명된 심온은 사석에서 "자신보다 박은이 이 자리에 더 적합하지 않은가" 하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좌의정인 그에게 "조정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허나 세자가 명나라 공주와 혼인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언쟁을 하기도 했다. [10] 당시 심온은 유정현에게는 "호놈"을 하며 반말을 썼지만 박은에게는 "좌상 대감"이라고 관직을 부르며 하오체를 썼다. [11] 사극에서 주로 간신이나 악역 권신 역할을 맡았던 배우 임병기가 맡았던 역할 중에서는 그나마 온건한 역할이기도 하다. 말년의 행보만 보면 다소 악역스러운 면모가 있긴 해도... [12] 먼 훗날 조말생 자신이 비리로 파직되었을 때 저 명언을 그대로 가져다 써 먹는다. [13] 이때는 태종도 "매번 험한 일만 시키고 정작 제대로 보상은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14] 오죽하면 세종에게 "내 장인처럼 너도 부왕 칼맛 좀 보라는거냐?"는 식으로 항변하며 못 해먹겠다고 사직을 청했을 정도, [15] 나의 나라에서 이방간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