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익황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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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효명세자빈
왕세자빈 조씨 | 王世子嬪 趙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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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익종의 왕비
신정왕후 | 神貞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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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문조의 황후
신정익황후 | 神貞翼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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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 철종조 왕대비
효유왕대비 | 孝裕王大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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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 고종조 대왕대비
효유대왕대비 | 孝裕大王大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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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추정 초상화[1] | |||
출생 |
1809년
1월 9일 ( 음력 1808년 12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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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 남부 두모방 두모포계 쌍호정 사저 (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독서당로40길 25 일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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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0년
5월 23일(
음력
4월 17일) (향년 8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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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
경복궁 흥복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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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수릉(綏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819년 11월 16일 ~ 1834년 12월 7일 | |||
조선 왕대비 | |||
1834년 12월 7일 ~ 1857년 9월 15일 | |||
조선 대왕대비 | |||
1857년 9월 15일 ~ 1890년 5월 23일 | |||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 |||
1864년 1월 4일 ~ 1866년 3월 17일 (고종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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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풍양 조씨 | |
부모 |
부친 풍은부원군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1776 ~ 1846) 모친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德安府夫人 恩津 宋氏, 1776 ~ 1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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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2남 4녀 중 장녀 | ||
배우자 | 문조 익황제 | ||
자녀 | 슬하 1남 (+양자 1남) | ||
전호 | 효모전(孝慕殿) | ||
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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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호 | 경훈철범(景勳哲範) | ||
시호 |
조선: 신정왕후(神貞王后) 대한제국: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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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추존 왕 문조(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자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大王大妃).[3]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이며, 순조와 순원왕후의 며느리이다. 조선 말 '다섯 전하' 중에 가장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며,[4] 조선의 최장수(81세 4개월 11일) 왕비이며, 최장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한국 근·현대사에서 흔히 말하는 "조 대비"가 이 사람이다. 대비로서의 공식 명칭은 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지만, 후대에는 '조 대비'가 통칭으로 굳어졌다.[5] 세도정치 시기,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6]
2. 생애
2.1. 왕세자빈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7]의 장녀로 태어나서 1819년(순조 19년) 10월 11일에 왕세자빈이 되었다.[8]숭정전에서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행하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빈의 책빈례(冊嬪禮)를 행하였다.
교명문(敎命文)[9]에 이르기를,
" 임금은 말한다. 정체(正體)를 계승하여 대본(大本)으로 삼았으니 나라에서 세자보다 높은 경우가 없고,
세자를 짝지을 적엔 반드시 나라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기다리니 예(禮)는 육빙(六聘, 육례를 갖춘 빙례)보다 도타운 것이 없다.
하늘이 지은 배필이요, 땅의 도리는 끝맺음이 있다. 생각건대, 세자의 현명함은 온 백성의 소망이 매여 있다.
나이를 따져 차례로 삼는 것을 배워 삼가례(三加禮)를 다하니 만방의 정숙(貞淑)으로 밝게 들리고, 세자를 가군(家君)으로 하여
그 법을 살피니 좋은 배필로 1백 채의 수레로 맞이함이 마땅하다. 곤위(坤位)로서의 상(象)이 없었으면, 어찌 세자의 짝이 되겠는가?
아! 조씨(趙氏)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요, 해맑은 좋은 자질이다. 길한 경사와 상선(祥善)이 선대에 쌓여 그 몸에 모였으며,
정정(貞靜)과 화유(和柔)는 천성으로 타고나서 얼굴에 드러났다. 얌전하고 아름다움을 점쳐 협화(協和)하였으니,
경사(卿士)들에게 상의하여 어김이 없었노라. 백복(百福)의 근원을 열었고, 이성(二姓)이 화호(和好)를 돈독히 하였다.
(중략)
여염 백성들의 은미함을 살펴서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더구나 종묘의 신령을 이음에 감히 공승(共承)을 소홀히 하겠는가?
아! 남편에 대한 공경은 효경(孝敬)에 근본하여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과 복록을 얻어 창성하기에 한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상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빈의 책빈례(冊嬪禮)를 행하였다.
교명문(敎命文)[9]에 이르기를,
" 임금은 말한다. 정체(正體)를 계승하여 대본(大本)으로 삼았으니 나라에서 세자보다 높은 경우가 없고,
세자를 짝지을 적엔 반드시 나라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기다리니 예(禮)는 육빙(六聘, 육례를 갖춘 빙례)보다 도타운 것이 없다.
하늘이 지은 배필이요, 땅의 도리는 끝맺음이 있다. 생각건대, 세자의 현명함은 온 백성의 소망이 매여 있다.
나이를 따져 차례로 삼는 것을 배워 삼가례(三加禮)를 다하니 만방의 정숙(貞淑)으로 밝게 들리고, 세자를 가군(家君)으로 하여
그 법을 살피니 좋은 배필로 1백 채의 수레로 맞이함이 마땅하다. 곤위(坤位)로서의 상(象)이 없었으면, 어찌 세자의 짝이 되겠는가?
아! 조씨(趙氏)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요, 해맑은 좋은 자질이다. 길한 경사와 상선(祥善)이 선대에 쌓여 그 몸에 모였으며,
정정(貞靜)과 화유(和柔)는 천성으로 타고나서 얼굴에 드러났다. 얌전하고 아름다움을 점쳐 협화(協和)하였으니,
경사(卿士)들에게 상의하여 어김이 없었노라. 백복(百福)의 근원을 열었고, 이성(二姓)이 화호(和好)를 돈독히 하였다.
(중략)
여염 백성들의 은미함을 살펴서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더구나 종묘의 신령을 이음에 감히 공승(共承)을 소홀히 하겠는가?
아! 남편에 대한 공경은 효경(孝敬)에 근본하여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과 복록을 얻어 창성하기에 한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상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순조의 유일한 손자인 원손( 헌종)을 낳았다.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다 대신들이 하례 하다
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 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臣)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 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
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 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臣)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 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
하지만 1830년(순조 30년)에 남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22살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같은해 9월, 아들 헌종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시아버지 순조도 승하함에 따라, 고작 8세 밖에 안 된 어린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다.
2.2. 왕대비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중전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숭함에 따라 어머니인 그녀도 왕비를 거치지 않고 왕세자빈에서 바로 왕대비가 되었다. 1836년(헌종 2년),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다
대왕 대비전에 문인(文仁)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전에 효유(孝裕)의 존호를 올렸는데, 존숭(尊崇)하는 것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0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대왕 대비전에 문인(文仁)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전에 효유(孝裕)의 존호를 올렸는데, 존숭(尊崇)하는 것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0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문인명경대왕대비)만큼은 아니지만, 대비이자 왕의 생모로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겼기에, 그녀의 친정 가문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만큼은 아니지만 세도정치 기간 동안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헌종 시기, 결국 시모의 친정인 안동 김씨와 자신의 친정인 풍양 조씨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행되었다. 어떤 면에선 소혜왕후( 인수대비)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적대하거나 압도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안동 김씨의 천하가 된 철종 연간에도 헌종이 총애한 조병헌을 제외한 풍양 조씨들이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해코지 당한 적이 없으며, 안동 김씨가 사실상 만든 《 헌종실록》이나 《 철종실록》에도 조인영, 조만영 등 풍양 조씨 유력 인물들이 우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가문이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었다.[10] 한편 1847년(헌종 13년), 40세를 맞이하여 창덕궁 인정전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이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그러다가 1849년(헌종 15년)에 헌종이 후사없이 갑작스럽게 이른 나이에 승하하면서 정조계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캐던 강화도령 철종, 즉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전계군의 서자(3남) 이원범을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 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군하고 왕위에 옹립하였다. 헌종 승하시 영조의 후손은 전계군 이광의 아들인 철종밖에 남지 않았다.[11]
2.3. 대왕대비
1857년(철종 8년)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12]이 된다.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에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가 차기 국왕을 선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이때 옥새를 확보한 안동 김씨[13]에 맞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교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다만 그녀가 지명한 차기 국왕이 하필이면 흥선군의 차남 명복인 걸 보면 정황상 흥선군과 그녀 사이에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비밀 커넥션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록에는 이들의 커넥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야사도 그렇고 몇몇 정황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흥선군은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면서 결국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을 익종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군하여 즉위시켰다.대왕대비가 국상 중에 정사를 대리할 사람을 정하였고 철종의 뒤를 흥선군의 두 번째 아들로 정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중희당(重熙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신하와 백성들이 복이 없어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했으니 애통하고 원통하여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죽지 못해 사는 이 몸이 차마 망극하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나니 그저 원통한 생각뿐이다.
지금 나라의 형세의 안위가 시각을 다투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을 청해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큰 계책을 의논하여 정하려는 것이다."
(중략)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기로 작정하였다."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2번째기사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중희당(重熙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신하와 백성들이 복이 없어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했으니 애통하고 원통하여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죽지 못해 사는 이 몸이 차마 망극하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나니 그저 원통한 생각뿐이다.
지금 나라의 형세의 안위가 시각을 다투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을 청해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큰 계책을 의논하여 정하려는 것이다."
(중략)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기로 작정하였다."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2번째기사
고종이 당시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대왕대비이자 고종의 법적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군이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신정왕후는 중앙과 지방에 다음과 같이 유시하여 방계 혈통인 고종의 정통성을 천명하였다.
대왕대비가 정통을 이은 것에 대한 교서를 내리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정조 · 순조 · 익종 · 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 철종)에 이르고 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익종은 황고(皇考)라 칭하고 헌종은 황형(皇兄)이라 칭하며,
대행 대왕은 황숙고(皇叔考), 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30일 (임인) 6번째기사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정조 · 순조 · 익종 · 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 철종)에 이르고 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익종은 황고(皇考)라 칭하고 헌종은 황형(皇兄)이라 칭하며,
대행 대왕은 황숙고(皇叔考), 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30일 (임인) 6번째기사
이후 3년이 지나 고종이 15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는 말도 있는데,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가 흥선군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명목상으로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흥선군의 막후(섭정) 정치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그만두다
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대왕대비의 하교
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體貌, 체면)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주상은 힘쓸 것이다.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하였다.
-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2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대왕대비의 하교
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體貌, 체면)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주상은 힘쓸 것이다.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하였다.
-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2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다만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고 여전히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와 의논하여 새 개혁 정책을 짜면 고종의 입을 빌리거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는 형식으로 여전히 조정의 권력의 한 축이었고, 어찌보면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로 해석할 수도 있다[14]. 그러나 자신의 친정에게 주려는 특혜에 반대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신정왕후가 자신 친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조건적으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고,[15] 왕실의 법도를 보면 왕실의 최고 어른인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대원군이 왕의 생부란 이유로 며느리를 멋대로 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16] 왕의 결혼은 대비를 포함한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기 때문. 만약 진짜로 대원군이 신정왕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인 명성황후 민씨를 밀었다면 오히려 이게 기존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아무래도 야사인 듯.
최익현의 세 차례 탄핵 상소로 인한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아버지이자 시아버지를 내쳤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대원군이 아닌 신정왕후의 아들 및 며느리라는 걸 궁궐 대, 내외에 보여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 갑신정변이 터졌을 때는 궁녀들에게 업혀다니면서 여기저기로 피해다니기도 했다.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나이인 81세를 일기로 1890년(고종 27년)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였다.
대왕대비전께서 승하하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승하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5번째기사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승하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5번째기사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다
전교하기를,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망극한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
하고, 이어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6번째기사
전교하기를,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흥복전(興福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망극한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
하고, 이어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6번째기사
생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1890년(고종 27년)까지 살았기 때문에 개화( 강화도 조약)가 진행되는 것도 지켜보았던 인물. 연도만 보면 잘 감이 안올 수 있는데, 제중원(1885년), 이화학당 설립(1886년), 영어 등 서양 외국어 교육 실시(육영공원 설입,1886년), 경복궁에 전기가 들어올 때도(1887년) 생존해 있었다. 그래서 신정왕후의 3년상을 전화기를 써서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장 그의 장례식 리허설에는 지구 반대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온 블라디미르 폰 키텔의 사절단도 참관했다.
혜경궁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 사람도 오래 산 만큼 많은 아픔을 겪었다. 남편 효명세자와 아들 헌종이 모두 20대 초반에 요절했던 만큼 외로움과 한이 컸을 것이다.
2.4. 사후
시호는 신정(神貞)이며 백성들이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원대한 계책을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 한다. 능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경내에 남편 문조와 합장릉의 형식으로 함께 합장되어 있는 수릉(綏陵)이다.3. 가계
3.1. 친가( 풍양 조씨)
- 고조부 : 조상경(趙尙絅)
- 고조모 : 증 정경부인 이씨(贈 貞敬夫人 李氏)
3.2. 외가( 은진 송씨)
3.3. 시가( 전주 이씨)
3.3.1. 배우자 / 자녀
- 남편 : ( 추존)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4. 기타
- 특이한 기록을 여럿 갖고 있는데, 그녀의 정식 시호는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익황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翼皇后)로서 총 61자이며 세계 왕비들을 통틀어 가장 시호가 긴 왕비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시호가 가장 긴 사람은 남편인 문조. 또한 정식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 역대 왕후 중 가장 장수한 왕후[22]로, 조선의 대비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대비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수렴청정을 한 대비들 중 유일하게 정식 왕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실로 격동의 조선 후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정말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만했던 인물.
- 남편인 효명세자와는 은연 중에 연결되는데 신정왕후의 증조부가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엄이다. 조엄의 부인 즉 신정왕후의 증조모가 정경부인 풍산 홍씨이며 홍봉한· 홍인한의 여동생이다. 홍봉한의 딸이 다름아닌 혜경궁 홍씨이므로 신정왕후는 조엄(풍산 홍씨)의 증손녀, 남편인 효명세자는 홍봉한의 외현손자이므로 촌수로 따지면 외7촌이다. 그러므로 남편 효명세자와는 홍현보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9촌 관계이다.
- 남편 효명세자와 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을 당시에 제작된 《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프랑스로 무단 반출되었다. 일각에서는 병인양요로 인해 책봉 죽책이 전소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었으나 이후 15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2018년 공개되었다.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을 국외 소재 문화재재단에서 라이엇 게임즈의 기부금으로 구입하여 국내로 반환되어, 영구히 되돌아 왔다고 한다. #
- 1847년(헌종 13년) 1월 1일, 신정왕후가 40세가 된 해를 맞이하여 창덕궁 인정전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은 어머니 신정왕후에게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또한 신정왕후의 사순을 기념하여 헌종은 공인 3000석과 시민의 한 달 동안의 요역등을 특별히 탕감해 주었다. 신정왕후의 40세를 축하하는 진하연을 그린 《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은 보물 제7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살아온 시기를 보면 사진이 충분히 남아있을 법한데 사진들이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아마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으로 국내나 해외 등으로 반출되거나 행방불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5. 대중매체에서
남편과 아들은 사극 출연이 전혀 없다가 남편은 드라마 《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남주인공[23], 아들은 영화 《 흥부》와 영화 《 명당》에 간신히 첫 출연한데 비해 본인은 구한말 배경의 사극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덕분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조선 시대 인물임에도 인지도는 남편과 아들을 압도한다.- 작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한다.
- 1965년 개봉한 영화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전옥이 연기했다.
- 1968년 개봉한 영화 《 대원군》에서는 배우 송미남이 연기했다.
6. 참고 문서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경복궁
- 경복궁 흥복전
- 고종
- 고종실록
- 김조순
- 김좌근
- 동구릉
- 명성황후
- 병인양요
- 서얼금고법
- 세도정치
- 수렴청정
- 순원왕후
- 순조
- 순조실록
- 승정원일기
- 외규장각
- 익평군
- 임오군란
-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 조만영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조엄
- 조인영
- 창덕궁
- 창덕궁 인정전
- 창덕궁 희정당
- 철인왕후
- 철종
- 철종실록
- 헌종
- 헌종실록
- 효명세자
-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 흥선대원군
[1]
추정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참조
[2]
#
[3]
대비인
철인왕후가
1878년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1890년에 사망한 뒤에도
효정왕후 홍씨는 대왕대비로 승봉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남았으며 대한제국 이후에도 태황태후가 아닌 태후가 되었다.
[4]
대왕대비 익종비(효명세자빈) 신정왕후 - 왕대비 헌종비
효정왕후 - 대비 철종비
철인왕후-
고종 - 중전 고종비
명성황후 순.
[5]
'조 대비'라 불린 다른 인물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선
장렬왕후보다 신정왕후가 조 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6]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들여온
조엄이 그녀의 증조부다. 또한 증조모인 홍씨부인은 홍현보의 딸이자
홍봉한,
홍인한의 여동생으로
혜경궁 홍씨의
고모이기도 하다. 부계로는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송준길의 7대손이다.
[7]
송준길의 6대손이다.
송준길의 외손녀가 그 유명한
인현왕후며, 증손녀사위 김제겸의 후손들이 그 유명한
순원왕후,
효현왕후,
철인왕후다.
[8]
이때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무단 반출되었다.
[9]
왕비(王妃)·빈(嬪) 또는 세자(世子)를 책봉할 때 훈유(訓諭)하는 글. 즉
세자빈을 책봉할 때
순조의 하교를 말함.
[10]
단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가문에서
왕위 관련, 혹은
중전의 자리를 누구의 가문에서 낼 것인가, 또는 주요 관직에 누구 가문 쪽 사람을 많이 앉힐까에 정치적으로 경쟁, 견제하는 스타일이지, 사극 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자기 가문을 앉히기 위해 상대 가문을 죽이거나 유배보내는' 그런 행위는 각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또 보이지 않는다.
[11]
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 16권, 헌종 15년(
1849년,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 (임신) 14번째 기사에 따르면,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철종의 이복형
영평군과
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이 있긴 했는데 어차피 이 둘도 처지는
철종하고 똑같았던지라 별 의미가 없었다.
[12]
철종이
순조의
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철종의 아내인
철인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랫동서가 되고
헌종의 아내인
효정왕후에겐 숙모가 된다.
[13]
옥새와 내탕고의 열쇠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보관하는데
철인왕후의 친정이
안동 김씨였다. 혹은
대원군의 충고대로
철종이 죽자마자 신정왕후가
안동 김씨들이
옥새를 찾으려 들기 전 미리
옥새를 찾아 보관해 두었다는 말이 있다.
[14]
개혁 파트너 설은
박시백 역시 주장하였지만,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주도적 위치에서는 완전히 빠진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15]
바로 얼마전까지
안동 김씨의
전
횡이 있었는데 눈치 없이 나섰다가는 괜히 미운털 박힐 수 있다.
흥선군과 손잡고
고종을 옹립할 정도인 그녀가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리 없다.
[16]
법적으로는
흥선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종은 익종(=
효명세자)의 아들이므로 법적으로는 신정왕후가 어머니로 더 가까웠다.
[17]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를 보급한 인물이다.
[18]
정경부인 홍씨가 바로
혜경궁 홍씨의 조부인 홍현보의 딸이자
홍봉한·
홍인한의 여동생이므로
혜경궁 홍씨한테는
고모가 된다. 그래서 신정왕후에게 있어서
혜경궁 홍씨는 시가 항렬을 따지면 시증조모할머니와 증손자며느리 관계이지만, 친가로 따지면 7촌 당고모-조카 사이가 되는 것이다.
[19]
남동생 조병기는 작은아버지
조인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20]
송준길의 직계 6대손이다.
[21]
혈연상 시조모는
수빈 박씨가 맞으나 법적인 시조모는
효의선황후가 맞다.
[22]
2번째가
정순왕후인데 아시다시피 이 인물은
왕비로 지낸 시간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승하당시는
왕비도 아니었다.
[23]
실제
역사와 달리 조 대비와 혼인을 하지 않는다.
[24]
나머지 두 세력은 각각 며느리인
중전과
대원군.
[25]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풍양 조씨인 조면호의 여식을
중전으로 택하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이를 가로막았다고 하는데 조면호는
임천 조씨로 핏줄만 따지면 신정왕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26]
신정왕후가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내쫓아버렸다.
[27]
원세개가 신정왕후의 면전에서 "노마님께서 망령이 드셨다.
고종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강제로
퇴위시켜버리겠다."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28]
본명은 조선주로
2020년에 조연희로 활동명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