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5:58

미즈키 시게루/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미즈키 시게루
1. 성장기
1.1. 집안 배경1.2. 성장기1.3. 중·고등학교 시절
2. 전쟁에 휘말리다
2.1. 입대와 참전2.2. 왼팔 절단과 그로 인해 바뀐 삶
3. 작가 데뷔, 그리고 가난
3.1. 결혼과 가정
4. 인기 작가가 되다5. 슬럼프의 극복, 말년6. 사망

1. 성장기

1.1. 집안 배경

미즈키 시게루의 가문인 무라(武良) 가문은 전국시대부터 계속된 호족 출신 가문이다. 증조부인 소헤이는 회선 도매상을 경영하고, 현지의 명사로 마을 의원을 지내는 등 한때는 큰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실업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아버지 료이치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난봉꾼이었고, 가족이 귀향한 것도 아버지가 취미로 속속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큰고모부는 요나고에서 처음으로 도쿄대학을 나온 수재지만 빵집 주인이 됐다. 친척 중에는 미즈키 못지않은 괴짜들이 많았다. 도쿄대 졸업 빵집 큰숙부 외에 영어책만 읽고 평생 백수였던 사람, 사족[1]임을 핑계로 일하지 않고 예술에 빠져 산 사람 등도 있었다. 왕숙부인 스미타 료조는 화가 수업을 위해서 프랑스 파리에 유학, 거기서 30세의 젊은 나이에 객사했지만, 그의 기일과 미즈키의 생일이 같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즈키를 료조의 환생으로 믿어 소년 시절의 미즈키에게 료조가 가지고 다녔던 그림 세트를 사준 에피소드가 있다.

아버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대식가였고 위장병이 생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아들에게도 유전된 것으로 보인다.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다. 재학 중에는 가부키나 연극 구경을 열심히 했고, 마을에 돌아와서도 방탕한 생활을 해 아버지한테 두드려 맞았다고. 직장에 나가서도 땡땡이 치고 영화를 보던 것이 발각되어 잘리고, 할아버지로부터 큰 돈을 받고 시작한 농기구 수입 사업도 허무하게 실패했다고 한다. 사카이쵸에 돌아와, 이번에는 은행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밤에는 근처의 연극 극장을 빌려 영화를 상영해, 은행원이 본업인지 영화관이 본업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직장을 포기 할정도로 놀기를 좋아했던 인물이다. 영어를 굉장히 잘해서 미호 항공대에서 주둔군의 통역도 했다. 친척이 오사카에서 경영하던 신문사에 다니고 있을 때 임신한 어머니[2]는 이 무렵 아버지를 만나러 사카이미나토에서 오사카시로 도착해 미즈키 시게루를 1922년 3월 8일 낳았다. 일단 공동 경영인과 함께 농기구 수입판매 회사를 부흥시키기 위해 아버진 먼저 가족들을 돗토리현으로 이사시켰으나, 얼마 후 큰 사업 실패를 당해 돗토리 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돗토리 출신으로 더 알려져있다.

그의 고향인 자연이 뛰어난 사카이미나토시는 어린 미즈키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으로, 바다나 산, 동물이나 벌레와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신선했다고 한다.

1.2. 성장기

파일:400px-Shigeru_Mizuki_at_age_3.jpg
1925년의 미즈키 시게루(3세)
굉장히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인물로, 어릴 적부터 특이한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고향의 자연을 사랑하여 그림 그리기에 힘썼으며, 비교적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철저히 열중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부모가 발달장애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는데, 3살이 될 때까지 말을 못했고, 4살 때 처음으로 뱉은 말이 "고양이 똥". 자다가 오줌을 싼 후 고양이한테 누명을 뒤집어 씌울려고 한 말이었다. 5살 때는 '죽음'에 흥미를 가져 3살된 남동생을 바다에 밀어넣으려다 메리 벨을 능가할 뻔했다[3] 주위 사람들이 발견하여 말렸고, 부모님에게 실컷 꾸중을 듣고, 친척 큰숙모한테 액땜으로 뜸을 맞기도 했다. 초등학생 1학년 때부터 남의 장례식에 찾아 다니기를 좋아했고, 평생의 취미의 하나가 묘지 산책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유는, 내 말대로 살고 나밖에 몰랐기 때문이다(웃음). 그것은 지금도 같고, 남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 미즈키 씨는(※ 미즈키 씨는 자신을 이렇게 부른다), 베비(※ 미즈키 말로 아이를 가리킴) 때부터 마음대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었다. 근처에 사는, 저승이나 요괴의 이야기꾼과 같은 존재의, 통칭 "농농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자연속에서 놀거나. 느긋한 성격으로 걱정하신 부모님은 보통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늦췄을 정도였다. 난 3형제고 형은 우등생이었어.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형은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간다. 나는 그걸 다 먹어치우고 가기 때문에 항상 2교시부터 등교. 학교에 늦게 가서 선생님에게 불려 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남들과 달라도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질렀다거나 큰일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길을 간다는 느낌이었다. #
골목대장 일로 바빴기 때문에 공부는 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기묘한 애교도 곁들여 선생님은 저건 특별하다고 이상한 존경까지 받게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 #
파일:Mizuki_Shigeru_the_Little_Scrapper.png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자신의 어린 시절
성격은 타고난 마이페이스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싸움질이나 이웃 아이들과 유치한 싸움에 참여하는 등 '게잡이'를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이페이스로 공부도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는 1년 늦게 입학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땐 늦잠을 자고 천천히 일어나 아침밥 다 먹고 2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 등교하는 일이 잦았다. 공부도 못해서 산수 시험에는 빵점을 잘 받았다고 한다. 다른 애들에 비해 체격이 우람했기 때문에 골목대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1살 차이나는 동급생들과 만나 덩치 좋은 시게루는 골목대장 격이 됐지만, 튼튼한 체격이라도 느긋한 성격이어서 아이들을 솔선수범해 따르게 하는 리더가 아니었다. 이 무렵, 자신의 이름 '시게루'를 발음하지 못하고 '게게게루'라고 발음해 '게게게'라고 별명하게 된다. 이것이 나중의 '게게게'의 유래다.

잠드는 게 너무 좋아 초등학교 1교시 산수 수업이 시작될 시간까지 깨어나지도 않았고 식욕도 좋아 아침 식사도 꼭 챙겨 먹고, 터벅터벅 느긋하게 걸어간 지각 상습범이었다. 덕분에 수학 성적은 낙제 직전이었고 게다가 수업 시간에는 뜬금없이 방귀를 뀌는 등 반교사와 동급생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받는 열등생이기도 했다. 이런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부모형제, 친척, 학교 관계자들이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잘 듣지 않아 고집불통이라고 불렸다. 당시 미즈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상당해 이 열의가 심상치 않았고, 설령 붐이 지나가려고 관심을 가진 취미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즐기는 등 그런 의미에서 끈기는 강했다. 자전 만화에서는 자주 도공 체육을 제외하고 열등생이었던 일을 말하고 있지만, 형제 3명의 좌담회에서 남동생 유키오의 발언에 의하면, 확실히 이과계열의 과목은 괴멸적이었지만, 문과계는 말하는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파일:Mizuki_Shigeru_and_NonNonBa.png
농농할멈
어린 시절 미즈키는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는 '농농할멈'[4]이라는 할머니가 요괴 이야기를 자주 들려줘서 요괴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친정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쇼후쿠지에 자주 데려갔다. 본당에 지옥극락도가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지금도 걸려 있다고 한다. 지옥의 모습과 극락 풍경을 유형적으로 그린 작은 연작 다섯 장이다. 미즈키는 "지금 봐도 꽤 괜찮은데, 어린 마음에는 대단한 박력으로 다가와서, 꿈에 가위눌릴 정도였다. 빈둥빈둥 저 어눌한 설명을 들으면서 조심조심 살펴본 이 종교화는 베이비였던 나에게 저승의 존재와 영혼의 실재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도깨비나 요괴, 지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농농할멈"과의 만남은 미즈키가 후에 요괴를 소재로 한 만화가가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 할머니와의 경험은 후에 <농농할멈과 나>라는 에세이와 장편 만화로 출판했다. 미즈키의 할머니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지만 농농할멈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말년에 식모나 가정교사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여성이었다. 농농할멈은 미즈키에게 하나의 현상이었다. 그림 형제의 도로테아 비에만처럼, 농농할멈은 잊혀진 민속과 전설적인 이야기의 살아있는 보고였다. 미즈키는 농농할멈에게 둘러싸고 있는 마법의 세계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질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숲속을 거닐거나 해변에서 의식을 치르거나 농농할멈과 미즈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을 암송하는 오래된 집들의 벽을 바라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 자그마한 할머니가 내 생애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즈키 시게루, 농농할멈에 대해 #
농농할멈은 미즈키의 인생의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후 미즈키가 요괴 만화가와 요괴 연구가가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녀가 말하는 요괴 등의 이야기에 미즈키가 강한 영향을 받아 훗날 미즈키 만화의 원점이 됐다. 농농할멈은 미즈키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33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미즈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미즈키의 고향에 있는 기념관에는 농농할멈 동상이 있다. #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질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던 미즈키는, 13살 때에 도공 교사의 추천으로 개인전을 연 적도 있을 정도의 뛰어난 어린 화가였다. 학교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미술 실력은 대단해서 초등학교 교감의 권유로 그가 그린 그림이 공민관에서 전시회를 연 적도 있었고 톳토리에 천재소년이 나타났다고 마이니치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이 당시 미즈키는 무량무철(武良無鐵)이라는 아호를 칭한 적이 있다. 그는 아직 예술가로 미숙한 사람이었는데,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때 미즈키가 그린 그림들은 다 소실되어 없지만, 그의 테크닉은 경이롭다고 전해졌다. 미즈키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술적 영향에 대해 묻자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것은 자랑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미즈키는 단지 솔직했을 뿐이다. 학내 미술대회에서도 금상을 여러 번이나 수상했다. 이미 그림의 재능을 점차 쌓아가고 있었지만, 다른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미즈키는 초등학교 졸업 후, 친척의 연줄로 오사카에 가서 일하게 된다.

1.3. 중·고등학교 시절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fbc26381.jpg
14살 때 그린 그림
당시의 지방의 남성은 고등소학교(현재의 중학교에 해당)를 졸업해 가업을 잇거나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이지만, 미즈키는 위와 같이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며, 시게루의 부친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큰고모부는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고학력자가 많았다. 면학에 열심이었던 시게루도 아버지와 같이 학력이 높은 구제중학교(현재의 중고일관교)를 지망하지만, 당연히 합격할 만한 성적은 아니어서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시험인 고등소학교에 진학한 시게루는, 그림 콩쿨에서 몇번이나 입상하는 등 그림 재능을 발휘한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어머니는 그를 매우 걱정스러워했지만 반대로 자신은 도시로 나간다는 기대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에 왔을땐 도시의 광경과 밤거리의 불빛에 감격해 마치 축제(마츠리)같단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 석판 인쇄사의 하청 판화사에 근무했었지만 일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2개월만에 해고당했다. 이후 2번째로 근무한 회사에서도 해고당해 친척집으로 갔다가 황달에 걸려 고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보고 노동이 아들한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림 공부를 가르치기로 다짐했고, 성격상 시험이나 입학할 때 자격이 없는 미술학교를 골라 오사카에 있던 한 미술학교로 들어가 입학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구조상 개인 학원이었으며 수업 방식도 실전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도안 강습회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실망하고 인근의 숲이나 산에서 시간을 때우며 얼마 다니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오사카에서 미즈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혹한 날들이었다. 인쇄회사에 더부살이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실패뿐으로 해고를 선고받는 등 주위로부터 문제아 골칫거리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마이페이스라 본인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윽고 미즈키는 부모님으로부터 소개받은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수업 내용에 만족할 수 없어서, 그 곳을 나와 굳이 독학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다.
학교의 모자에는 '미'라는 미술학교나 다름 없는 휘장 기소가 붙어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가짜 학생과 같은 떳떳하지 못한 기분을 들게 할 정도로 한가한 학교였다.
나는 더욱 더 「 자습」에 열중했다.
도서실에 가서 인체해부학 책의 그림을 베껴(이것은 정확한 인체데생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를 오가는 길에는 이곳저곳을 스케치하는 맹공부했다.
그림책도 점점 신물이 나 안데르센이나 그림 동화를 그림 이야기로 만들어 보려고 며칠이고 방에 틀어박혔다. #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b3131eca.jpg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262529aa.jpg
10대 후반 시절에는 그림책 창작에 몰두했다. 당시 미즈키는 도쿄미술대학(현재의 도쿄예술대학)에 진학해 화가가 될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과 체육 이외의 성적은 여전히 안 좋은 상태로 졸업 후 친척의 소개로 오사카 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그러나 너무 마이 페이스를 지닌 성격인 바람에 어느 직장도 오래 가지 못하고, 이직을 반복하게 된다. 고등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수험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미즈키는 일종의 꿈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유화 세트와 미술 잡지로 어린 화가를 즐겁게 하는 것을 기뻐하는 별난 영화 및 연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양친은 미즈키가 결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부모님을 설득해 야간중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꿈을 실현하고자 나섰을 때에는 일본에는 전쟁 그림자가 닥쳐온다.

2. 전쟁에 휘말리다

군인 시절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군인 시절을 토대로 만든 드라마 "키타로가 본 옥쇄 ~미즈키 시게루의 전쟁~"[5]

2.1. 입대와 참전

파일:1280px-Shigeru_Mizuki_at_age_18.jpg
1940년의 미즈키 시게루(18세)
1940년엔 일본 광업학교 채굴과에 응시해 합격한 바 있으나, 성적이 부진하고 결석이 많아 6개월 만에 퇴학당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아들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그 다음은 그림 공부를 하면서 구제중학교 시험을 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당시 시게루는 한 신사에서 오토시를 목격했다. 장래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림을 그리면서 독서와 보물총가극에 열중하는 생활을 보내는데[6] 부모와 의논한 끝에 당시 일본대학 부속의 구제 오사카야간중학교 진학을 권유받아 입학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낮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들르는 일이 많았으며, 1941년 이윽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징병신체검사를 받은 끝에 보충역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소집 대상 범위가 넓어지면서 입영 가능성이 높아지자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철학 도서나 불교 서적 및 성경 등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일종의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듯 하다. 2015년 6월 그가 죽기 몇 달 전, 미즈키의 딸들은 그가 젊은 시절 그의 임박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간직했던 일기장을 재발견했다. 1942년 10월 6일, 20세의 미즈키는 이렇게 썼다.
매일 50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 예술은 어느 정도인가? 종교는 어떤 점인가? 우리는 심지어 이런 것들을 고려할 수조차 없다. 화가나 철학자가 되거나 문학 학자가 되려면 노동자들만 있으면 된다. 지금은 묘지의 흙빛으로 칠해진 시대다. 사람들이 땅속 덩어리인 매몰된 인류의 시대. 나는 가끔 이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 더 나쁜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졌다. 남아있는 것은 폭력, 정치적 권위, 그것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내 유일한 안도는 음악과 그림에 빠져드는 것이다. 전쟁을 생각하면 얼굴이 창백해지지만, 그게 내가 이기는 방법이야. #.[7]
신병 훈련소로 보내지기 전에, 미즈키는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괴테의 철학 작품들에 자신을 쏟아 붓고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불교 기독교 같은 철학 미술, 종교를 통해 도덕을 배운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도록 나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그 철학은 너무 광범위하다. #
얼마 안 돼 1943년 소집 영장이 전송되어, 고향인 돗토리현에 위치한 보병 제40연대로 입영하였다.

군대에서도 마이페이스는 여전하고 고참병의 눈에 띄어 매일 괴롭힘을 당했다. 원래 그의 보직은 나팔수였으나, 나팔 실력이 제대로 늘지도 않아서 쓸모가 없다고 간주되어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부지 내를 달리게 하는 벌만 받는 나날을 보낸다. 마침내 견딜 수 없게 된 시게루는 스스로 보직 전환을 본인이 신고한다고 하는 당시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인사계의 조장(=상사)은 전대미문의 일병졸로부터의 신고에 놀라, 달래줄 생각으로 "저기, 참아 줘"라고, 군인으로서 상당히 상냥하게 타이르지만, 체벌의 나날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린 병사[8] 미즈키 시게루는 3번이나 신고를 반복하는 행위에 이르렀다. 3번째 신청에서 그와 면담한 조장이 " 남쪽이 좋은가, 북쪽이 좋은가?"라고 물어서 막연히 추운 지역을 싫어했고, 최대한 고향에서 가까운 국내의 규슈 같은 남부 연대에 배속될 생각으로 남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푸아뉴기니령의 라바울 전선 배치였고, 이미 남방전선의 참상은 본토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였기에 라바울 행을 통보받았을때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 무척 창백해진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배속되기 전까지 잠시 휴가를 받아 본가에 들렀는데, 가족들과도 기가 막혀서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정도라고. 당시 군대의 실정에 어두운 시게루 였지만, 남방에서의 격전과 전사자의 많음은 알고 있었으므로, 눈 앞이 캄캄해졌다.[9]
파일:Mura_Family.jpg
입대 후 부모님과 찍은 사진(왼쪽)
이후 그는 보병 제229연대로 배치되어 러일전쟁에 사용되었던 낡은 순양함인 시나노마루를 타고 라바울(뉴 브리튼 섬) 전선으로 도착했다. 승선 당시는 만지면 선체 연의 철판이 떨어져 내릴 정도로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어, 미즈키를 포함한 병사의 사이에서는 "떠 있는 것이 이상하다"라고 야유받았지만, 어찌됐든 가라앉는 일 없이 무사히 전쟁을 견뎠다. 이미 제해권이 장악된 상태라 어뢰를 정신없이 피하며 겨우 상륙하였다. 어찌나 혼란스러웠는지 그가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이 "여기가 어디죠?"였다고. 그리고 바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보병 제229연대는 라바울 전선 일본군의 마지막 증원부대로, 이후의 증원 시도는 수송선이 격침되며 모두 실패한다. 당시에 참전했던 전쟁 경험은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군대에서 상관에게 뺨을 많이 맞아선지 '싸대기의 왕'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ed195353.jpg
자유분방한 시게루에 규율이 철저한 군대생활은 맞지 않았다. 걸핏하면 상관에게 얻어맞는 나날이 계속되며 이때의 강렬한 경험이 훗날 미즈키 작품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자전적 만화에서도 그려진다. 당시 일본군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구타가 일상다반사였다. 여기에 관해선 일본군/문제점 참고. 파병지인 파푸아뉴기니에서도 불운과 괴롭힘의 연속이었고, 식량은 늘 부족했고 괴롭힘을 당한 시게루는 굶주림과 체벌의 고통도 남달랐다.
한 번은 망을 보고 있을 때 적이 뒤에서 쳐들어와 부대가 전멸한 적이 있어요. 나 혼자만 살아남았죠. 밤사이에 적들은 우리를 포위하고서 내가 사람들을 깨우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근데 저는 앵무새가 재밌어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었어요. 앵무새는 계속 보고 있어도 재밌잖아요. 그러는 사이 해가 떠서 기다리다 지친 적들이 달려들었죠. #
뉴브리튼섬 라바울에서는 분대장인 상관의 노여움을 사 대열에서 밀려나 꼴찌 불침번을 받았으나 분대가 적의 급습을 받아 전원 전사하는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전투가 벌어질 때 이 전투는 무조건 진다는 촉이 왔고 전쟁을 하다가 죽는 것은 개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는 기총소사와 원주민 게릴라를 피해 단검과 훈도시 차림으로 정글을 헤매다 며칠 뒤 자신의 부대로 복귀한다. 동료들은 그를 반겨주었지만 상관한테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데 대해 심한 질책을 들었다. '왜 죽지 않고 도망쳤을까.', ' 패잔병 주제'라고. 나중엔 다음엔 꼭 죽으라는 말까지 들으며 절망적인 심경으로 내몰렸다. 미즈키는 이때 '이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라바울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용감히 싸우다 죽는 사람도 많았지만 상관의 무모한 명령과 죽음이 미화되어 '비겁함', '수치함', '체면' 등의 말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후부터 점차 허무주의적 사고에 빠지기 시작했다.

2.2. 왼팔 절단과 그로 인해 바뀐 삶

그러다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된 와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왼팔을 잃는다.[10]
바로 근처에 위생병이 있어서 달려가 지혈해 주었다. 그래도 피는 양동이 2통이나 나온 것 같았다. 하기야, 실제로 그렇게 나왔으면 진작에 죽었겠지만, 인상에선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심했다. 어쨌든 위생병의 민첩한 판단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은 틀림없다. #
마취제도 없이 왼팔 절단 수술을 하며 다시금 생사의 고비를 넘긴다. 수술에 임해서는, 시반이 생길 정도의 왼팔 부상의 격통과 말라리아의 고열에 의한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미즈키는 마취도 이용되지 않는 절단되는 아픔을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빈사 상태였고, 뿌연 의식 속에서 피가 양동이에 가득 고였다는 것만 기억했다고 한다. 워낙 심한 상태여서 주위에서 죽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단정해서 미즈키를 묻을 구덩이까지 파 놓았지만[11] 시게루는 타고난 왕성한 식욕을 발휘해 목숨을 건졌고 거꾸로 생명력의 비정상적인 강함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어느 날, 잘린 팔에서 '갓난아기'의 냄새가 나면서, 생명의 힘을 느끼고, 무언가가 내면에서부터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마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매일 이 갓난아기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하늘의 향기였다고. 그리고 신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다. 왼손이 없어진 뒤로는 어느 정도 규율도 느슨해졌다.

라바울의 일본 야전병원에 있는 동안, 그는 톨레의 한 여성과 친해지며 그에게 땅, 집, 시민권을 제공한 원주민 톨라이 부족[12]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원주민 톨라이족과는 당초 말이 거의 통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웃음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톨라이족 사람들은 전쟁에 휘말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열에 시달리는 시게루에 과일을 전달하는 등 지극한 보살핌을 베풀었다.
저는 순박하고 온후한 원주민들과 묘하게 알고 지냈어요. 혼자만 어슬렁 어슬렁 마을을 찾아다니고, 배급 담배와 과일 등을 교환하기도 하지요.

마을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미즈키의 모습을 염려해 부대에 온 원주민이, 말라리아의 재발로 약해져 움직일 수 없는 미즈키에게 병문안의 과일을 계속 전한 적도 있었다. 미즈키는 이들과 "밭도, 집도, 아내도 주고 돌볼 테니 현지 제대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우정을 맺었다. 시게루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지에서부터 몇권의 괴테 관계의 철학책을 전쟁터에서도 갖고 있었다. 한편 톨라이족 가정에는 선교사들이 나눠준 성경이 있었고 로마자로 적혀 있어 미즈키도 읽을 수 있었다.

이 성경 내용을 통해 시게루는 서투른 말이지만 톨라이족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이 계기가 되면서 시게루는 이들에게서 사도 파울로스로 불리게 됐다. 이 교류는 시게루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 받은 마음도 치유해 갔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정령과 친숙한 톨라이족과 어려서부터 자연을 사랑하고, 요괴와 친숙한 시게루는 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특히 당시 소년이었던 토페드로는 생애 최대 친구 중 한 명이 되었고, 훗날 그가 추장이 된 이후에도 우정은 계속 이어졌다. 라바울은 토페드로 사후 화산 대폭발로 한때 괴멸적인 피해를 보았으며 주민들은 호주 등 다른 땅으로 이주했으나 유족과 미즈키 프로덕션의 교류는 지금까지도 끊이질 않고 있다고 한다. 상관 중에 톨라이족과 교류하는 미즈키를 못마땅해 함정에 빠뜨리려 한 사람이 있었다. 미즈키가 톨라이족으로부터 식량을 얻어 살찌운 것을 눈여겨보고 사령관 순례 때 사령관의 눈에 띌 만한 곳에 일부러 세웠지만 사령관은 원주민으로부터 식량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호오, 그런 거냐'며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령관이 바로 인망으로 이름 높은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이었다. 이마무라 장군은 미즈키에게도 말을 걸어 이야기했고, 미즈키는 후년에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뜻함을 느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톨라이족 사람들과는 점점 가까워져 이제는 친구를 넘어 동포 같은 존재로 승격되고 있었다. 내 몸속에 눌러앉아 있는 한가롭고 느긋한 나의 리듬과 그들의 리듬이 어우러져 파장이 척척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합이 맞았다. #
파일:mizukishigeru13.jpg
톨라이족과의 만남을 그린 만화
1945년 8월 25일 포츠담 선언에 대한 훈시를 부대장에게 전달받았다. 처음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동료들처럼 '전쟁에 이긴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을 깨닫고 병영은 허탈해하고 절망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였다.[13] 그뒤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송환 순서를 기다릴 동안 시게루는 이미 뉴기니 땅과 톨라이족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톨라이족 측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추장격 중 한 사람인 이카리안이라는 할머니에게서 집과 아내를 주고 밭을 돌봐줄 테니 남으라는 말까지 들었고, 시게루도 진지하게 영주를 생각했다고 한다.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 다리외'를 닮은 톨라이족의 여성 에푸페를 짝사랑하고 있었고(하지만 에푸페는 당시 이미 남편이 있었다.) 생활도 마음에 들었으며 일본에 들어가면 패잔병이라고 무슨 소리를 들을지 두려워 돌아가기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의관으로부터 "붕대를 감고 있는 왼팔의 절단면에 뼈가 나와 있기 때문에, 재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선고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한다. 톨라이족에게는 7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미즈키 시게루는 이듬해 3월 미귀환병 수송 임무를 맡고 있던 구축함 유키카제에 승선해 가나가와현의 우라가항에 입항하여 다시 일본 땅을 밟았다.

미즈키의 전쟁 경험의 결과는 평화주의와 호의의 동시적 감각이었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요괴 캐릭터는 전쟁이 아닌 평화의 시기에만 볼 수 있으며, 이 초자연적인 생물들을 특정한 민족이나 국적이 아닌 인간성의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미즈키는 솔직한 공포와 인간성으로 가득 찬 남태평양 전선 일선에서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썼다. 대표적으로 ' 전원 옥쇄하라!'와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가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아이스너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걸작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평생 톨라이족과 계속 교류를 나눴다. 그런데 2000년대에 하필 서뉴기니 갈등으로 치안이 안 좋을 때 방문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뉴기니에 가는 것은 자제했다. 그래도 지원과 연락은 계속 했다고 한다.

3. 작가 데뷔, 그리고 가난

죽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게다가 미즈키 상은 계급이 제일 밑이라서 퍽퍽 얻어맞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는 가난했지만 죽음의 공포는 없어요. #
화가가 되는 꿈이 있었는데 그때 돈으로 1천만엔은 줘야 한다고 했다. 유화로는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것에 가까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부모는 왼팔을 잃은 시게루의 몸을 걱정했지만 정작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 특히 오른팔이 무사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반면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것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귀향 후엔 병원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뒤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현재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몇 년 만에 중퇴했다. 미즈키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일부 정규 미술 수업을 들었지만, 프레드 쇼트가 드림랜드 재팬에서 지적하듯이, "정식 미술 훈련이 좋은 만화에 필요한 독창성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는 그 경험으로 망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후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일본에서 부상병인 미즈키가 안정된 생활을 보내는 것은 아직 쉽지 않았다.

그 후도 팔 재수술을 마친 뒤에는 생활을 위해 상이군인 모금 활동부터 생선 장사까지 뭐든 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자전거 택시업도 하며 먹고 살기 위해서 직업을 전전하는 가운데, 생업을 위해 동생과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잘되지 않았으며 이때 사업차 들린 고베시에서 한 허름한 건물을 집주인한테 싼 값으로 구입해 '미즈키 장(미즈키 길이라는 주소에 있어서)'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방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수입은 적었고 부업을 찾기 시작한다. 그때 그림연극 작가의 제자라는 청년[14] 이 건물로 입주한 것을 계기로, 접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그림 연극을 그리기로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입주자는 괴짜들뿐이고, 시게루는 집세의 회수와 아파트의 유지보수에 휘둘리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종이연극 작가의 제자를 자처하는 청년이 점자가 되면서 종이연극 업계에 인연이 생겼다. 미즈키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스토리 구성에 서툴러서 당시에 고전했다.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그림 연극에서는, 보여지는 장면은 물론, 다음 번에의 기대를 갖게 한 채로 끝내는 스토리 전개를 하는 것이 필수다. 잘나가는 작품을 목표로 하기 어려웠던 SF에까지 손을 뻗어도 팔릴 기미는 전혀 없었다. 우연히 작품이 팔렸다고 해도, 대출원이 야반도주해,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 일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은 언제나 곤궁했다. 그래도 일사불란하게 그림연극을 써 내려간 미즈키에게는 조금씩 그림연극이 만들기의 노하우가 쌓이기 시작했다. 미즈키는 여기서 '살아 남은 이상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된 시게루는, 자신 있던 그림을 그리는 일로서 한신 극화사에 소속해, 종이 연극 작가의 길에 들어설 것을 결의한다. 이 한신극화사의 사장, 스즈키 카츠마루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타입으로, 시게루도 아파트명으로부터 '미즈키 씨'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필명을 '미즈키 시게루'라고 했다. 그러나 종이연극 작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즈키는 미즈키 장을 팔아 치우고 잘 안 된 대가 노릇에서 손을 뗀다.
파일:external/www.ienohikari.net/index_img02.jpg
그림연극( 카미시바이(紙芝居 종이연극))이란 1930년대와 전쟁이 끝난 1946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흥했던 손님을 끌기위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당시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아이들을 행상인들이 불러모아 그림을 보여주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대신 과자나 물엿사탕 등을 파는 게 장사 방식이었다. 만화가 시라토 산페이, 코지마 고세키( 아들을 동반한 검객)가 이 그림연극의 그림을 그린 경력이 있다.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황금박쥐는 인기있던 그림연극의 레파토리였다. 이 당시 미즈키가 그린 그림 연극은 미즈키 프로덕션에 있는 몇 개의 실패 원고를 제외하면 지금에는 소재지가 불명해 생전 미즈키 본인도 계속 찾으려고 했었다. 오사카부립 중앙 도서관의 국제 아동 문학관에는, 미즈키가 오오타 산로쿠 명의로 착색을 담당했다고 여겨지는 '네코샤'라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미즈키 장에는 미즈키를 의지해 온 동생, 그리고 관리를 돕기 위해 불러들인 형수와 그 딸이 동거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다가 미즈키가 새로 산 작은 외딴집으로 고스란히 이사했다. 1953년에는 스가모 감옥에서 풀려난 형도 몸을 의탁하게 되어 이듬해 29년 7월에는 형수가 미즈키의 조카가 되는 아이를 출산, 가족 6명의 대세대가 된다.

그렇게 어떤 그림연극 회사의 전속 작가가 되기는 했지만 무명 신인 작가이자 실적이 별로 없어서 돈은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러던 참에 텔레비전의 출현으로 그림 연극의 인기는 급락한다. 이 무렵 미즈키는 서부극물등을 그리고 있었지만, 종이 연극 업계가 쇠퇴하기 시작해 현장 매상은 둔화되고 있었다. 거기서 인기를 노릴 수 있는 소재로 해서 괴기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이야기가 되어, 스즈키로부터 권유받은 것이 이토 마사미의 '하치바기타로'였다. 곧바로 이토의 승낙을 얻은 미즈키는 제목을 묘지의 키타로로 바꾸고 4편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제작한다. 당초의 키타로는 캐릭터 디자인 등이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인기가 없었다. 이것이 변하는 계기가 미즈키의 어린 조카였다. 아기의 천진난만한 행동이나, 얼굴에 머리카락이 뻗치는 듯한 귀여움, 재미를 깨달은 미즈키는, 그것을 키타로의 움직임이나 디자인에 도입한다. 이렇게 해서 키타로는 조금씩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존재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당시 유행하고 있던 가라테 영화로부터 액션의 요소를 도입하여 인기를 얻어 갔다. 이것이 미즈키와 나중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수호신이 되는 키타로와의 만남이었다.
파일:20210211_195142.jpg
대본 시대의 미즈키 시게루의 명함.
미즈키가 도쿄에 나와서 처음으로 살았던 곳이 카메이도, 그 후 신주쿠역 근처에 살았다. 바로 그 무렵의 것이다
당시 "이대로 필사적으로 계속 그리고 있다 해도, 그림 연극에 미래는 없다"라고 생각한 미즈키는 그림 연극을 단념하고 만화가를 목표로 한다. 도쿄에서는 종이연극 대신 대본 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즈키는 종이연극의 대가에서 종종 일거리를 받던 가타코지의 지원을 받아 대본 만화가로 전업하기 위해 상경해, 활동 거점을 도쿄로 옮긴다. 가타의 소개로 같은 전업 만화가인 센다쓰 아이야마 모와 면회한 미즈키는 그로부터 일터로 우사기 책방을 소개받는다. 이렇게 붓에서 펜으로 바꾸었지만 토게쓰 책방의 원고료는 형편없었고, 먹고 사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궁상을 모면하기 위해 전당포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대본 만화업계에서는 당초 약속을 어기고 원고료를 대폭 깎거나 때로는 완성한 원고를 가져가도 그런 걸 부탁한 적이 없다며 버림받는 폭거가 예사였고, 형용 대신 말 그대로 만화와 심중에 몰리는 만화가도 생겨났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 현재의 필명인 '미즈키 시게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53년, 마침내 '미즈키장'을 팔아 빚을 갚고 효고현 니시노미야시로 이사하였다. 그 뒤로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면서 노하우를 다졌고, 당시 그림연극이 텔레비전과 대본소 만화에 밀려 쇠퇴하면서 35살 때 대본소 만화가로 전향해 1958년 '로켓맨'을 출판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한다.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51x6HMEah9L._SX355_BO1,204,203,200_.jpg
파일:external/zerogahou.cocolog-nifty.com/roketman.jpg
로켓맨 표지와 내용, 보다시피 캐릭터는 슈퍼맨 표절. 그림체는 땡땡의 모험의 영향도 보인다. 그 외 다른 표절 의혹도 있다. ##
대본 만화의 세계에는 아사와 성공의 둘 중 하나였어요. 성공이라는 건 잡지 만화로 옮겨가서 살아남는 거예요. 대본 만화는 원고료가 적어서 어쩔 수 없어요.

좀 팔리기 시작하면 값을 올려주겠지만 편집자는 어떻게 (만화가에게 지불할) 돈을 깎을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형편없는 만화 그리기는 평생 가난해요.역시 돈이 없으면 굶어 죽어요. #
대본소 만화가 활동 초기엔 원고료로 한 권당 2만 5천에서 3만엔을 출판사로부터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 공무원 초임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한 달에 단행본 1권을 그리기는 벅찬 일이었고, 당시 영세했던 대본소 만화 출판사는 경영악화로 도산해 원고료 떼 먹고 야반도주 도망치는 일도 흔했으며 열심히 그려도 작품이 잘 팔릴만한 내용이 아니면 출판을 해주지 않기도 해서 미즈키 시게루는 항상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만어둡고 음울한 작풍이 꺼려져 출판사 측에서 원고료를 싸게 해달라고 하거나 작자명을 무단으로 변경했다는 사실을 출판 후에 알리기까지 했다.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전기물(전쟁기록물)을 시리즈로 출판했는데, 일본군측이 승승장구 이길 때까지는 잘 팔렸다가, 갈 수록 미군에게 지기 시작한 상황을 그린 작품들은, 독자들이 싫어해서 출판을 중지당한 적도 있었다. 자신있어 하는 괴기물을 그리는 것을 희망했다고 해도, 사전 평판이 나빠서 출판을 하지 못하고, 바보 취급까지 당한다. 월세 체납이 지속되고 전당포에서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먹고 사는 빠듯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열흘쯤 지나서 아케보노 출판에 돈을 받으러 갔다.내 역작이 책이 되어 있다. 손에 쥐면 무취만취의 작품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일이에요"
미즈키 시게루라면 전혀 팔리지 않아. 미안하지만 이름을 바꿨어. #
1959년 봄, 니시노미야에 남아 있던 형이 새롭게 도쿄에서 일자리를 찾았다고 연락해 왔다. 이에 미즈키는 집을 팔고 그 돈으로 조후에서 고옥을 찾아 구입했다. 다시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우사기쇼보에서는 전기물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었지만, 1960년, 미즈키는 사장과 교섭해, 괴기 단편집 요기전을 집필. 이 요기전의 두 번째 이야기 유령 가족을 만화판 묘지 키타로 시리즈로 시작되는데,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괴기성 높은 내용은 일부 광팬을 얻었으나 판매량이 늘지 않아 2간을 냈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미즈키의 작품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전기물의 리얼함, 괴기물로 보여주는 독자적인 세계관이 마니아적인 독자에게는 인기였지만 일반 독자들의 넓은 지지를 얻기는 어려웠다. 끝내 팔릴 가망이 없다는 평이 퍼져, 모든 출판사로부터 쫓겨나고 만다. 이 무렵의 미즈키 시게루는 생활고를 겪으면서 세상에 대한 울분이 쌓이고 이것이 작풍으로 나타나 어둠이 짙어지면서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다름아닌 열성 팬으로부터의 "굉장히 재미있었으니까, 어떻게든 계속 해 줘"라고 재개를 바라는 편지가 온 것을 계기로, 키타로의 단행본이 출판되기 시작한다.
"요기전에 실려 있던 키타로는 굉장히 재미있으니까, 어떻게든 계속을 내 줘"라는 내용이다. 이 편지 덕분에 무덤의 키타로의 뒤를 이어 받게 됐다. 그 편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키타로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
이 응원 편지가 차례차례로 토즈키 쇼보에 도착한 것으로, 간신히 키타로 시리즈는 부활하며 다시 그리라는게 결정한다. 이것이 호평을 얻으면서 미즈키의 인지도는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고, 토게쓰 책방의 매상에도 공헌했다. 열성적인 팬으로부터의 편지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키타로가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본 업계 자체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도 있어, 토게쓰 책방의 지불은 더욱 안좋아진다. 이윽고 미지불된 원고료는 쌓여 20만엔(지금의 260만엔에 상당)에 달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불합리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만 그래도 아사는 두렵다며 가난의 괴로움, 삶의 고통을 실감하던 시절이었다. 이즈음 일본의 대본소 만화 산업은 몰락해 가는 시기로, 그의 대본소 만화는 판매량이 떨어졌고, 어느 날 세무서 직원이 집을 찾아와 "이렇게 소득이 없을 리가 없다"며 의심하자 그는 전당표 뭉치[15]로 내보이면서 "우리들 생활을 너희가 알 턱이 있냐"며 화를 내며 쫓아내기도 했다. 이듬해 딸이 태어나면서 생활고로 만화가를 그만둘 생각까지 한다.

그의 초기 대본 만화 작품은 조잡하고, 미즈키의 놀라운 재능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만화 예술을 터득하면서 모방에서 혁신으로 전환했다. 1960년 키타로사미의 Mbirth로부터 허가를 받은 후, 미즈키는 하카바 키타로를 인류와 요괴를 혼합한 세계로 재상상하였다. 미즈키는 키타로라는 메인 주인공에게 그의 눈알 아버지 메다마 오야지와 탐욕스러운 반동 인물 오토코 네즈미를 포함한 독창적인 캐릭터리티를 주었다. 미즈키가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오토코 네즈미에게 "키타로는 사실 좀 멍청하다. 그는 마치 슈퍼맨과 같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보상이나 행복의 희망 없이 무작위로 낯선 사람에게 준다. 그건 지루해. 오토코 네즈미를 거기에 넣어서 일을 좀 망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즈키는 초기 단계부터 이야기에 몰두했다. #

3.1. 결혼과 가정

미즈키는 다른 것을 시도했다. 1961년 그는 또 다른 카미시바이의 등장인물 캇파의 산페이를 부활시켜 수영을 돕는 강력한 방귀 능력을 가진 캇파를 만들었다. 1962년 그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던위치 호러(The Dunwich Horror as Shoots as the Deep of the Earth)를 각색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파일:external/castnet.nctu.edu.tw/20121028113857.jpg
1962년, 39세의 나이까지 구질구질하게 만화가 생활을 하던 미즈키를 보다 못한 부모님의 강한 권유로 이이즈카 누노에(飯塚布枝)[16]와 맞선을 치러 같은 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하는데 5일이 걸린 스피드 결혼이었고, 신혼여행을 할 여유도 없이 도쿄로 돌아왔다. 현대 기준으로는 서구적인 외모에 모델 체형의 미녀였지만 자신은 동양적인 얼굴이 둥글고 작고 귀여운 여성을 좋아했는데 아내는 키가 크고 얼굴도 길어 사진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얼굴에 대해 항공모함 같았다고 하기도 했다. 위쪽은 결혼식을 올리며 아내와 찍은 사진. 미즈키가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부인이 어릴 적 별명이 '키다리'였을 정도로 키가 170이 넘게 크다. 하지만 초라한 만화가에 팔도 하나 없는 자신과 결혼할 여자는 없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반면 다른 인터뷰에서는 미즈키가 누노에를 본 감상은 '얼굴이 긴 여자이지만, 아버지는 더 얼굴이 길고, 그것과 비교하면 둥글게 보여서 귀엽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주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이즈카 누노에는 가난한 삶을 살았고 집안 장사일을 도우며 형제 뒷바라지만 했고 키가 크다고 남자가 다 도망가서 29세까지 남자와 인연이 없었고 결혼 적령기를 놓쳐 사람을 고를 형편이 안 되었다고 한다. 중매는 이모가 주선했다. 만화가로 먹고 살만하고 자택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혼하고 도쿄에 왔는데 다 허물어가는 집이었고 살림살이도 없어서 그 가난뱅이 생활에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이즈카 가도 가난했는데 미즈키가 누노에의 돈을 까먹는 상태가 오래 갔다고 한다. 아내는 신혼 벽두부터 남편 미즈키의 만화 원고를 도와야 했지만 미즈키의 근면함에 존경심을 갖게 되어 언젠가 반드시 인정받아 성공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또한 남편과 반대로 누노에는 미즈키의 외모는 마음에 들었다고도 했다. 아내는 후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다룬 수필집 ' 게게게의 여보'를 썼고, 영화와 NHK 연속 TV 소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특히 드라마는 대히트를 했고 명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결혼 당초 미즈키 시게루는 여러 걱정이 있었지만 아내는 요리를 매우 잘했고 자신이 별볼일이 없는 남자인데도 잘 챙기고 지원해줘서 감사했으며 결혼을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돈이 없으면 싸지만 맛있는 식재료를 구해와서 어떻게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내가 시커먼 바나나를 사왔을 때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상한 걸 사왔구나 했는데 노란 바나나보다 맛있었다고 한다.[17] 작은 방에서 둘이 시커먼 바나나를 까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호러물 같아서 늘 웃음이 터진다고 하며 자신의 자전 만화에 이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롤 캐비지와 만두를 잘 했으며 만두에 넣을 고기를 못 사면 빵가루에 계란을 섞어서 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라 누노에는 훗날 요리책 '게게게의 식탁'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난에 빠져 있던 토게쓰 책방은 끝내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게 되었고, 화가 치민 미즈키는 마침내 토게쓰와 단절한다. 미즈키는 이때를 회상하며 ' 국교단절'이라는 표현을 썼다. 단절 이후에는, 이전부터 미즈키와 알던 사이였고,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있던 나가이 카츠이치의 산요사에서 키타로 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싸더라도 제대로 원고료를 지불해 주는 산요사로 무대를 옮김으로써, 간신히 제대로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아직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지만, 키타로 야화의 간행도 순조롭게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한숨 돌린 것도 잠시, 나가이가 병으로 쓰러져 산요사가 사라지고, 의지할 데를 잃은 미즈키는 가난의 구렁텅이로 내몰린다. 이 때의 소동 속에서, 벌써 납품이 끝난 상태로 키타로 야화의 5간째가 될 것 같았던 '거북이의 권'의 원고가 분실되어 환상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1962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장녀 나오코가 탄생하며 아버지가 되는 기쁨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경제 상태는 한층 더 악화되어 간다. 대본 출판사의 줄도산으로 약속어음이 줄줄이 부도나면서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복덕방 변호사에게 집의 퇴거를 요구받게 됐다. 끝내는 대장성의 잘못된 조사로 미즈키가 소유한 땅의 절반은 나랏것이라고 매일같이 몰아세웠고, 온후한 미즈키도 분노가 폭발해 집에 몰려든 관리에게, 쌓인 질표를 들이밀고 "네놈들이 우리의 생활을 알겠는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일해도 보상받지 못하는 인간사회의 불합리함에 분노한 미즈키는 악마 같은 두뇌를 가진 천재아가 악마를 사역해 교활한 인간을 처단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일어서는 만화 '악마군'을 구상한다. 히가시코샤의 사쿠라이 쇼이치(미즈키 작품의 '안경 뻐드렁니'의 모델)가 미즈키 팬이었기 때문에 채용되어 출판까지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마술 요소를 담은 그 내용은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에게는 난해한 부분이 많고 아나키한 스토리도 곁들여 매출이 늘지 않아 총 5권으로 예정됐던 것을 3권으로 중단해야 했다. 이 작품은 말년의 잡지 리메이크로 재평가를 얻게 된다.
파일:9784063754964_w.jpg
악마군
냉혹한 대장성은 미즈키를 더욱 몰아세운 결과, 땅의 반을 가져간다. 장부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뒤에도 사과는 없었고, 미즈키는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고통받는 나날이 이어졌고, 마침내 삶도 내몰렸다. 미즈키는 몸과 마음이 모두 아슬아슬한 상태에 빠졌고, 마침내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드물지만 어떻게든 구원을 받아 아사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도 비슷한 희망에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4. 인기 작가가 되다

파일:ent15113012510008-p9.jpg
40세 무렵의 미즈키 시게루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을 해메며 방황하는 듯한 절망감에 시달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1964년, 미즈키의 눈앞에 한 줄기 빛이 비친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직전인 그 해에 미즈키는 아는 편집자로부터 잡지 " 가로"에 집필을 제안받는다. 한 때의 산요사의 사장, 나가이 카츠이치가 병으로부터 복귀해 신회사 세이린도를 시작하여 신잡지 월간 만화 가로의 발행을 결정한 것이다. 나가이로부터 다시 '키타로'의 정기 집필을 의뢰받은 것으로 안정된 수입을 얻고, 뜻하지 않게 빈곤의 최악의 상황인 ' 아사'만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겨우겨우 하루하루 세 끼만 먹을 수 있게 된 정도여서 극빈생활은 여전했고 전당포 출입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 뜻밖의 잡지 데뷔가 미즈키에게 큰 기회를 안겨준다. 당대 만화팬들에게 인기 잡지 중 하나이기도 했던 가로는 일세를 풍미했던 시라토 산페이 닌자 만화 ' 카무이전'과 미즈키의 '키타로 야화' 두 편이 간판 작품이 있었다. '가로'는 그때까지 '아이가 읽는 것'이라 불리던 만화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꾼 혁신적인 만화 잡지였다. 무명에 가까웠던 평판을 받은 키타로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되며 인기를 얻는다. 키타로 시리즈의 프롤로그가 된 '유령 일가'. 밑 그림의 두 명이 키타로의 부모다. 당시엔 단편이였기에 공식 설정이 아니었으나 게게게의 키타로 시리즈가 크게 성공하게 되자 공식 설정이 되었다. 게게게의 키타로는 일본에서 요괴 만화라는 장르를 확립시킨 걸작이자 그의 대표작이 된다.
파일:external/blog-imgs-29.fc2.com/PICT0064.jpg
이윽고 키타로는 가로 매거진에서도 톱 클래스의 인기작이 되어 갔다. 이 무렵 시게루는 주간 소년 선데이의 연재 요청을 받는다. 요괴만화로 '가로'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미즈키는 이듬해 메이저 잡지인 '소년 매거진'으로부터 집필 의뢰를 받는다. 1966년 당시 주간 소년 매거진은 '에이트맨'[18]의 쿠와타 지로가 총도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연재 중단했고, 스포츠 만화 해리스의 선풍의 치바 테츠야가 신혼여행을 가 버려 장기 휴재했으며, W3사건에 말려들며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 때문에 쇼가쿠칸 간행의 라이벌잡지인 주간 소년 선데이에 판매부수 20만부 차이가 생겨 편집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편집부는 이 역경을 벗어날 수 있도록, 타지에 없는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를 찾고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편집장이 된 우치다 쇼의 눈에 띈 것이, 대본 시대에 미즈키 시게루의 '키타로'였다. 이 강렬한 개성을 보여 월간 가로에 간판으로 실적을 늘리고 있던 미즈키 시게루였다. '키타로'는 출판계에도 팬을 가져, 작품으로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파일:25%_てれびくん388-89.png
테레비군
그 무렵 소년 매거진 편집자가 찾아와 외계물을 그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외계어 같은 건 잘 못한다. 대본만화 동아리 중 잡지에서 주문이 온 것은 좋지만 서툰 분야인데도 도맡아 나중에 고생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대본 만화로 되돌리려 해도 되돌리지 못하고, 서투른 분야는 맞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예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얘기는 거절했다. #
미즈키는 인기 잡지로부터의 의뢰에 기뻐하지만, 소년 잡지로의 이전은 지금까지의 작풍이나 그림을 크게 바꾸는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우주물( SF)'이라고 하는 본인에게 약한 테마를 집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한 결과, 미즈키는 의뢰를 거절한다."왜 거절해 버렸나"라고 후회지만, 반년 후에 "테마는 맡깁니다"라고 재차 의뢰를 받아 괴기물을 그릴 찬스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미즈키는 이 때 의뢰를 받은 작품이 바로 '테레비군'이다. 1965년 별간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한 '테레비군'은 제4회 코단샤 만화상 아동 부문을 수상하면서부터 45세로 인기 만화가의 자리에 앉게되었다. 테레비군의 대략적인 내용은 TV에 손을 뻗쳐 TV에 광고된 모든 놀라운 것들을 꺼내어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마법의 힘을 가진 아이의 환상에 관한 스토리다. 여전히 가난하기는 했지만 식탁에 진수성찬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이제야 생겼다.

이 성공에 의해, 같은 해에 같은 잡지인 주간 소년 매거진 8월 1일호에 '무덤의 키타로'와 '손'이 게재된다. 키타로는 당초 다크하고 그로테스크한 작풍이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고, 중지의 갈림길에 서 버렸다. 이 사태에 편집장으로 미즈키를 매거진에 끌어들인 책임자이자 키타로의 가능성을 믿었던 우치다는 그를 위해 미디어 믹스 기획을 꾸린다. 하지만 그동안 없던 요괴라는 마이너한 소재와 기괴한 주제, 그리고 무덤이라는 부정적인 제목에 방송국 관계자들이 머뭇거려 스폰서 찾기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런데도 최종적인 아슬아슬한 단계에서, 대본시대의 키타로를 아는 열광적인 팬들로부터의 높은 평가와 지속되는 지지로 연재 진행이 결정한다. 여기서 또 미즈키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대본 시대에 불우했던 '악마군'의 리메이크 작품이었다. 원래 미즈키 작품의 팬이었던 당시의 토에이 프로듀서가 주목해 실사 드라마로 방영이 결정되었다. 감독은 타구치 카츠히코. 원작의 연재와 거의 동시 진행된 미디어 믹스 작품으로서 1966년 10월부터 전26회의 계약으로 스타트했다. 미즈키도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미즈키의 작품을 좋아한 스태프들의 열정에도 힘입어 실사판 악마군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인기를 끈다.
국민 애니메이션이 된 게게게의 키타로.
이 무렵 킹레코드와의 제휴기획으로 "만화작자가 직접 작품의 테마송을 작사"를 판매한 "소년매거진 만화대행진"이 발매되었다. 이 음반에 미즈키가 발표한 것이 '게, 게, 게, 게, 게, 의, 게'로 시작되는 주제가였다. 당시는 연재중의 작품명에 따라, 타이틀은 '묘지의 키타로'. 유쾌하고 친숙한 이 타이틀은, 곧바로 아이들에게 받아 들여졌다. 또 자유분방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요괴의 생활을 그린 음악 가사는 공부와 일에 쫓기는 나날을 보내는, 학생과 직장인 등 청년, 성인층에도 호평을 받았다. 코단샤 편집부는, 지금까지의 실적과 실사판 "악마군"의 성공을 원안으로, 매거진의 주력 작품이 된 키타로의 미디어 믹스 기획을, 재차 강하게 추진한다. 그리고 마침내 1968년, "묘지"를 "게게게"라고 제목을 바꾸며 TV 애니메이션화가 결정된다. 1968년 1월 3일부터 방영 개시된 ' 게게게의 키타로'는 전국의 어린이들을 빠져들게 하여 속편도 만들어지는 대히트 작품이 되었다.

게게게의 키타로는 쇼와 시대 요괴 붐을 일으키며 사회현상급 대박을 터뜨렸다. 이 만화는 오늘날까지도 애니메이션화 되고 있으며 일본의 국민 애니메이션이자 일본 대표 요괴만화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미즈키 시게루는 평생을 요괴 연구, 창작에 힘썼다.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며 현대의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요괴 이미지는, 미즈키의 작품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미즈키는 요괴 연구가로서 대중 속에서 잃어버린 많은 요괴를 구했다라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미즈키를 요괴 문화의 계승자, 선도자라고 평가한다.[19]

미즈키는 마흔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일본의 잘나가는 만화가가 된다. 미즈키는 일약 스타덤에 뛰어올랐고, 가족들은 마을에서도 소문난 부자가 되었다. 수입면에서도 매일 사치가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의 전형적인 만화가다. 그 인기상은, 당시의 연재 11편, 텔레비전이나 이벤트 출연의 의뢰도 잇따르고 있던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겠다. 요괴나 귀신 관련 행사가 많이 열리는 여름에는 특히 바빠서 10년 동안 아이를 해수욕장에 데리고 다니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바쁘게 일하며 잠도 자지 못하며 일했다고 한다. 이 무렵 미즈키는 아사직전의 극빈생활을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일을 거절할 수 없어 과도한 집필 의뢰를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그 결과 가족과의 접촉도 소홀히 되고 마침내 과로로 쓰러지고 만다. 일주일가량 거동을 하지 않고 쉬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을 그만둘 수도 없어 다시 바쁜 나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간에 한큐 그룹의 유원지, 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로부터 '키타로'를 기용해 주었으면 한다는 전화 의뢰가 있어, 승낙해 코베에 가서, 한큐 그룹 계열의 호텔에서 중역에 종사하고 있던 전우들과 뜻밖의 재회를 하기도 한다. 이후, 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20]에서는 여름방학 기획으로서 "키타로의 유령의 집"이 1993년까지 무려 23년의 장기에 걸쳐 개최되게 된다.

1966년 많아진 작화 작업[21]을 분담할 겸, 업무 처리를 위해 미즈키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케가미 료이치, 츠게 요시하루, 스즈키 오지(鈴木翁二) 등이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기도 했다.[22] 미즈키의 차녀 에츠코는 아버지인 시게루를 닮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요괴나 악마에도 어릴 적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가지로 말이 맞는 에츠코를 시게루도 손놓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에 에츠코는 타케라가에 머물러, 미즈키 프로에 입사한다. 아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작업에 걸쳐서 지지하는, 그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장녀 나오코는 미즈키 프로덕션에 사장이기도 했다.

이때, 어시스턴트를 고용하면서 점묘법을 사용한 치밀하고 한 편의 그림 회화같은 정교한 배경 그림과 선화로 그린 심플한 만화체의 인물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미즈키 시게루의 독특한 그림체가 완성된다. 외국의 만화 평론가들도 이런 거는 처음 본다고 놀라는 대목이다.
파일:external/img-cdn.jg.jugem.jp/20151201_932135.jpg
파일:external/img-cdn.jg.jugem.jp/20151201_932136.jpg
예를 들면, 이런 그림들. BS 망가 야화에서 분석하기를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 연출로, 만일 캐릭터도 배경 그림과 같은 스타일로 그려버리면, 그 배경에 뭍혀버리면서 혼돈이 일어난다고. 그림으로써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화가로써의 미즈키와, 캐릭터로 스토리를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꾼으로써의 미즈키가 절충해서 만들어낸 스타일이다. 이것은 한 때 어시스트를 한 츠게 요시하루한테도 영향을 끼친다. 참고로 저 두 그림 속에 나온 캐릭터는 각각 일본 요괴이자 게게게의 키타로 시리즈에서 주조연으로 꾸준히 출연한 스나카케바바 잇탄모멘이다.

이 무렵, 우연히도 미즈키는 라바울에 있을 무렵의 친했던 중사와 재회하고, 둘이서 전쟁터를 여행하게 된다. 25년 만인 1973년 미즈키는 원주민 트라이족들과의 약속을 지켜 다시 라바울 땅을 찾았다. 전우들의 묘표를 세우고 현지인들과 재회했다. 당시 인기 만화가로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스케줄을 해내고 있던 미즈키는, 느긋하게 사는 원주민의 모습을 보고, 옛 미즈키의 페이스를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과감히 일을 줄였다. 그러다 일에 쫓기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쫓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있던 트라이족의 마을을 방문해 잊고 있던 "아등바등 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의 중요함"을 생각해 내며 귀국 후 마감에 쫓기는 생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며 스스로 일을 줄이게 된다. # 현지에서 트라이족과 약 25년 만에 만났지만 지난번 만났던 할머니 이카리안은 안타깝게도 타계로 인해 상봉이 무산된 채 현지에 있던 그녀의 묘소를 찾아가 명복을 빌었다. 이카리안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미즈키의 '7년 후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믿었고, 미즈키는 그녀의 무덤 앞에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고 한다. 또한 이후 미즈키는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도로 이름을 지었고, 오늘날에는 라바울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섬이 있으며, 거리에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Mizukijuki Shigeru Road)가 있다.
파일:Shigeru-Mizuki-Tolai-Mizuki-Productions.jpg
1973년 25년만에 트라이족과 재회한 미즈키 시게루
미즈키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트라이족 땅을 찾아 교류를 더욱 돈독히 해나간다. 또한 이 시기에 이 당시 당대의 인기 만화가 중 한 명이 되어 다양한 만화를 그리며 다양한 시도를 한다. 다쓰미 요시히로를 비롯한 작가들은 매체의 경계를 밀어붙였고, 이로 인해 데즈카 오사무나 미즈키 같은 주류 작가들이 더 도전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문이 열렸다. 1971년, 미즈키는 극화 히틀러라고 불리는 히틀러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한다. 그 후 1973년 걸작 전쟁 만화 ' 전원 옥쇄하라!'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일본보다 서양권에서 높게 평가받았으며 권위있는 상인 아이스너상, 앙굴렘 국제만화제를 모두 석권한다. 1975년 '내 딸들을 위한 이야기: 아버지의 전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전시 경험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5. 슬럼프의 극복, 말년

잠시 인기가 사그라들은 1980년대 초기엔, 아내가 부업이라도 해야하냐고 물어볼 정도로 재정 상태가 악화된 적도 있다. 이 당시 미즈키는 "요괴따위는 없다"며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과 창작의욕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둘째 딸이 수학여행에서 요괴[23]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85년부터는 민속학 재평가의 흐름과 게게게의 키타로 2기 재방송이 반복되는 가운데 인지도가 대폭 상승하며 요괴가 다시 사회 현상을 이룬다. 1985년, 이 붐에 따라 애니메이션 키타로가 13년만에 부활, 게게게의 키타로 3기가 최고 시청률 29.6%를 기록하는 대히트작이 되어, 캐릭터 상품도 큰 호평을 받는다. 미즈키의 경제 상태는 다시 좋아지게 되었고, 요괴의 실재에 대해서는 아직 약간의 망설임 속에서도 만화가로서의 자신감을 되찾으면서 정신 상태도 안정되었다. 훗날, 그의 제자 오다이가, 대본시대부터 잡지 연재, 애니메이션화와 뜻밖의 호기가 찾아왔을 때의 일을 되돌아 봐달라고 질문하는데 미즈키는 "궁지에 빠지면, 언제나 나타나 구해 주는 것이 키타로였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후 자신이 그렸던 만화들의 영상화와 재방송이 거듭되면서 다시 인기가 쌓여 일본에서 세대를 거듭한 국민 만화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게게게의 키타로 3기가 종료하며 이듬해, 시대는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바뀐다.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미즈키는 격동의 쇼와와 자신의 경력을 그린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를 써내려가며 제13회 코단샤 만화상을 수상한다. 1991년에는 여태까지의 업적을 인정받아 자수포장을 수상. 다시 요괴 연구가로서도 활동을 재시작하며, 1992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첫 컬러판 '요괴 화담'이 출판된다. 또 이 무렵부터, 친구이자 제자인 교고쿠 나츠히코와 아라마타 히로시 등과 함께 전 세계 요괴, 전설 장소를 방문해, 현지의 요괴, 괴담의 수집에 힘썼다. 이후에도 요괴 연구를 계속하며 주간 소년 선데이 연재의 "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에서 요괴화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주간 소년 매거진' 증간의 '일본 요괴 대전'을 거쳐, '미즈키 시게루 요괴 화집'을 간행. 이후에도 '요괴도감'의 종류를 다수 집필하고 있다. 미즈키는 요괴를 소재로 함에 있어서 옛 문헌이나 그림 두루마리 등에서 많은 전승과 요괴화를 수집해 간다. 2007년 8월에 요괴 연구가 유모토 고이치가 보유한 에도 시대 에마키에 그려진 "네모난 개와 같은 요괴"가 미국 브리검 영 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과 부합되어 "누리카베" 그림으로 판명된 것처럼 최근 연구에서 미즈키 창작 이전의 그림이 발견된 예도 있다.
파일:7e6c6d7caed1aa4027748f5605578203.jpg
평생 요괴 연구에 매진했던 미즈키 시게루
요괴 연구를 재시작하며 만든 책이 바로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사전"과 "미즈키 시게루의 세계요괴사전" 등을 발표하며 요괴 연구를 계속 해나갔다. 이 사전에는 대한민국의 요괴들도 수록되어 있다. 1992년에는 '컬러판 요괴화담'을 이와나미 신서에서 간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부터는 1600점 이상의 요괴화를 수록한 '요귀화'시리즈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즈키 주위에 요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1995년에 세계요괴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이 된다. 아라마타 히로시, 교고쿠 나츠히코, 타다 카츠미, 사노 시로[24], 미와 아키히로, 요로 타케시 등 당대의 요괴 덕후들이 회원이 되어, '세계 요괴 회의'를 개최하기도 한다. 1997년부터는, 세계 요괴 협회 공인의 카도카와 서점이 발행한 요괴 매거진 '괴'[25]를 간행하며 요괴 연구를 대폭 늘려간다. 미즈키도 이 잡지의 만화를 집필하고 있다. 이러한 요괴 덕후들을 이끌고 전세계 요괴를 찾으러 세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논픽션 라이터 오이즈미 사네나리와 아프리카 말리 공화국의 도곤족, 말레이시아의 꿈을 자유롭게 꿀 수 있는 세노이족,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보리지니, 멕시코의 인디오들의 마을, 미국의 원주민·호피족의 마을 등, 세계의 여기저기에 '모험 여행'이라고 칭한 장소, 유적지를 다니며, 각지의 영적인 오컬트, 요괴 문화를 접하기도 한다.[26] 오이즈미 지쓰나리 미즈키의 대모험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정글에서 현지인들에게 일본 요괴 대전을 보여줬더니 이건 알고 있다, 이것도 알고 있다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그 결과로 미즈키는 세계의 요괴는 1000가지로 집약된다. "전세계 모든 지역의 요괴는 대부분 공통점이 있다"라고 말하며 '요괴 천체설'을 주창하게 된다.

그리고, 버블 경제 붕괴 이후의 어지러운 세태를 바라보는 가운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요괴와 정령은 있다"라고 하는 확신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제자 중 한 명인 교고쿠 나츠히코가 추리 소설가로서 충격의 데뷔를 한다. 디자이너이기도 한 교고쿠는, 어릴 적부터 미즈키를 따랐던 미즈키 팬이었다. 때마침의 불경기로 일이 없었던 시기에, 교고쿠는 미즈키 공인의 지원 단체인 '관동 미즈키회'에 입회. 그 활동에서 뜻하지 않게 미즈키와 알게 된다. 한편, 미즈키는 교고쿠의 편집능력과 요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작가로서의 역량에 관심을 두어 어시스턴트가 되지 않겠느냐고 권하지만, 이 때 이미 교고쿠는 소설가로 각광받으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27]

이렇게 요괴 만화의 기수가 된 미즈키 시게루지만, 자전격 만화를 주제로 한 만화도 크게 호평받는다. 어린 시절 미즈키 시게루의 소년시절과 농농할멈의 추억을 담은 만화 '농농할멈과 나'는 2007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제에서 일본인 최초가 되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1996년에는, 게게게의 키타로 4기가 방영된다. 거품경제 이후의 불황은 사람들의 시점을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주제로 나왔다. 그러한 세태를 배경으로, 4기 키타로는 원점회귀를 테마로 해, 최신의 애니메이션 기술로 1~2기의 작풍을 헤이세이 시대에 부활시킨다고 하는 컨셉으로 호평을 얻었다. 미즈키는 이 해, 세계 요괴 회의를 정기 개최하고, 게다가 1997년부터는 카도카와 서점에서 발행한 요괴 매거진 '괴'를 발행, 만화 '신비가 열전'을 연재하며, 독자의 요괴 목격담에 일러스트를 첨부해 답하는 등의 활동을 개시한다.
파일:미즈키 시게루.jpg
파일:001_size9.webp
말년의 미즈키 시게루
4기 키타로는 1998년에 종영되었으나 화업 50주년을 기념하여 각 출판사에서 복각된 요괴화집과 전쟁에서 자신의 실체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전기들도 각 방면에 충격을 주었다. 이 무렵에는 미즈키 시게루와 그가 창조해낸 키타로와 요괴들의 존재는 이미 일본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대는 21세기 들어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작품의 복각과 요괴 피규어 판매, 키타로 작품의 플레이스테이션 2 기종으로 게임 게게게의 키타로 이문요괴기담 제작 등이 진행되어 미즈키의 활약도 계속되었다.

2007년에는 키타로의 첫 실사 영화가 개봉되어 대호평과 흥행도 성공해서 두 작품이 만들어진다. 또 게게게의 키타로 5기의 애니메이션화도 만들어져, 과거 시리즈와 같이 히트한다. 2008년에는 최고 훈장 중 하나인 욱일소수장을 수훈한다. 이 해는 애니메이션 게게게의 키타로 40주년으로, 그것을 기념해 게게게 이전의 대본시대 원작 묘지의 키타로도 심야에서 애니메이션화된다. 완전히 테이스트가 다른 애니메이션이 동시기에 같은 시리즈에 애니가 방송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묘지의 키타로는 심야임에도 시청률도 잘나오고 DVD도 잘팔렸다. 그러나 2008년말, 리먼 사태의 발단으로 미국의 경제 불황이 일본에도 영향을 끼치며 방영 중이던 게게게의 키타로 5기도 영향을 받아 시청률적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의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그래서 완결이 나지 못한 유일한 키타로 애니메이션이다. 이 무렵 키타로 자체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전개를 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아사도라 '게게게의 여보'가 실사 드라마화되어 크게 히트하는 등 미즈키 시게루는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지명도는 더욱 높아졌다. 미즈키는 이 해 일본 문화공로자로 선정이라는 명예를 받지만 고령으로 인한 불안도 있고 사랑하는 "키타로"가 재개되지 않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해 작품의 장래를 염려했었다. 그러나 그의 우려를 씻고 그가 사망하고 3년 뒤인 2018년에 발표된 게게게의 키타로 6기가 작품성을 인정받고 시청률도 히트하게 되며 게게게의 키타로라는 브랜드의 꾸준함을 보여주게 된다.[28]

나이가 든 후에는 방송 인터뷰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재미난 말솜씨와 독특한 인생관이 시청자들의 호감을 얻어, 만화가로써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자서전적 드라마가 만들어져 방송되기도 했다. 미즈키 시게루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돈에 관한 언급이다. 작가는 세인의 이목을 신경 써서 수입의 증감을 공공연히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미즈키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거침없이, 고령이 되어도 정기적으로 키타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기뻐하는 발언을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말년의 무덤 키타로에 있어서의 인터뷰에서의 발언은 유명하다. 키타로에 대해 코멘트를 해달라고 의뢰를 받았는데 미즈키는 제일 기쁘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를 '미즈키 상을 몇 년이 지나도 (키타로는) 돈 벌게 해 준다'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본래 이러한 발언은 반감을 사기 쉽지만, 미즈키의 경우는 가난한 생활의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팬으로부터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미즈키의 애교로서 잘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도 체력 유지를 위한 운동도 많이 했고 가족도 팬도 당연히 100살을 넘어 장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2013년 자신의 첫 전집 인 '미즈키 시게루 만화 대전집'이 코단샤에서 발행된다. 같은 해에는 자신의 근황을 담은 만화 '나의 일상'의 잡지 연재를 "빅 코믹" 잡지에서 시작한다. 91세의 나이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는 이례적인 기록이자 대단한 기록이다. 나의 일상은 미즈키의 삶을 되돌아보는 에세이 만화로, 2015년 5월 연재 종료를 맞이할 때까지, 평온한 일상에서, 전쟁 체험, 가난한 생활, 대본과 그림 연극까지, 과거 에세이 등으로 이야기된 에피소드를 모두 그렸다. 전 34화로 그의 유작이다.

2014년 말에 심근경색이 발병하여 약 2개월 입원한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외출은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지만, 요괴를 비롯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기력은 시들해지지 않았다. 변함없이 식욕도 왕성하고, 회복을 향해서 요양을 계속했다.

6. 사망

파일:ent1601310019-p3.jpg
신화 속의 괴물들을 인간화하고 인간적인 면을 해부하는 재능을 가진 영향력 있고 널리 인기 있는 일본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가 월요일 이곳에서 사망했다. (중략) 그러나 미즈키씨는 또한 그래픽 형태로 심각한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이 중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겪은 자신의 참혹한 전투 경험과 아돌프 히틀러의 급부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삶은 영화와 호평을 받은 자전적 작품들의 주제였다. 일본만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가득 찬 나라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이나 독특한 특징에서 미즈키씨와 견줄 만한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 그는 아마 아톰의 창시자이자 아마 일본에서 가장 찬사를 받은 애니메이션 제작자인 데즈카 오사무와 함께 나란히 한다.
뉴욕 타임스 #
2015년 11월 11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수술을 받고 입원치료를 받던 도중 건강이 급속히 약화되어 2015년 11월 30일 새벽,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영면하였다. 향년 93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간병한 가족의 말로는, 평온한 잠자리에 드는 듯한 최후였다고 한다. 하룻밤이 지난 12월 1일에는 미즈키 시게루의 자택이 있는 도쿄도 쵸후시에 많은 팬이 방문하여, 키타로 동상에 꽃다발을 올리기도 했으며 미즈키의 출신지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의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 앞에서도 이날 주민들이 꽃을 바쳤다.

장례식, 장의·고별식은 가까운 친척들만 참석했다. 사망 후 다음 해인 2016년 1월 31일 도쿄에서 미즈키 시게루를 추도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 도쿄·아오야마 장의소에서 '작별의 모임'이 열려 친교가 있던 저명인이나 일반 조문자 등 약 7,800명이 참석했다. 이날 작별 모임은 '작별의 모임'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제자들인 작가 아라마타 히로시[29]가 발기인 대표를 맡았고 교고쿠 나츠히코는 사회를 담당했다. 미즈키 시게루의 영정과 키타로와 악마군 등의 캐릭터의 패널이 흰 꽃의 고리로 둘러싸인 제단은 교고쿠가 미즈키 의 단편 만화 '둥근 고리의 세계'를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교고쿠는 "미즈키 선생님은 지금 키타로와 악마군, 갓파이와 사랑해야 할 캐릭터와 함께 고리의 저편에 계십니다. 하지만 고리는 열려 있습니다. 이 고리 너머로, 우리의 마음이 전해지길."이라고 설명했다. 영정 아래에는 미즈키의 고향에서 보이는 산과 바다, 좌우에는 태평양 전쟁 때 출정한 라바울을 표현한 꽃이 배치되었다. 회장에는 게게게의 키타로의 테마곡과 아사도라 '게게게의 여보(ゲゲゲの女房)'의 주제가였던 이키모노가카리의 「고마워요(ありがとう)」 등의 노래가 흘렀다.

영정 앞에는 아키히토 천황의 제사료[30]가 장식되었다. 계명은 '다이만인 석도무(大滿院釋圖茂)'. 조사는 노자와 마사코[31], 사이토 타카오[32], 마츠다 테츠오[33] 등이 낭독했다. 작별 회에는 드라마 게게게의 여보에서 미즈키 부부를 연기 마츠시타 나오, 무카이 오사무, 실사 영화판 '게게게의 키타로' 출연한 웬츠 에이지, 아사노 타다노부, 카가와 테루유키, 나카가와 쇼코, 사카나군 등 다수의 유명 인사들이 발길을 옮겼다. 오후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일반 팬들을 위한 헌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사장 앞에 줄 지어 있었다. 배우자 무라 누노에는 기자들의 취재에 영정은 평상복 차림이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오늘 큰 제단을 보고 옷을 잘 입은 사진도 있었는데 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미즈키씨의 아내로서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 어떠셨나요」라고 기자가 질문. 그녀는「즐거웠어요. 몹시 가난하고 뭐고 좋은 추억. 굶어죽을 일은 없었으니까요. 곧 저도 따라갈 테니 저승에서도 손을 잡고 잘 부탁합니다. 기대할게요. 지금은 꿈에서도 만날 수 없네요」라고 답변했다. # 그의 딸들은 "우리 아버지에게 그의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도 그는 우리를 계속 감시하고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고향에 있는 그를 환영해 온 옛 전우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뉴욕 타임스 #, BBC #, 더 뉴요커 #, NPR #, 월스트리트 저널 #, 르몽드, 연합뉴스, 명보, 싱타오일보 #,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 등에서도 그의 사망 뉴스를 보도했다.
파일:20210109_202306.jpg
도쿄도 쵸후시 훈증사에 있는 미즈키 시게루의 묘지

[1] 구무사 계급 [2] 화를 잘내는 성격이라 별명이 이카루(イカル)였다. 미즈키 시게루가 붙인 별명. 아들이 가난한 직업인 만화가를 택하자 굉장히 걱정했다. 미즈키가 도쿄에서 대본만화가로 있을 때는 매우 걱정하여 '만화가 안 되면 등대지기라도 해'라고 권했다. 또 종종 걱정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답장이 오지 않으면 더욱 걱정해 장문의 편지가 오기 때문에 미즈키는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오면 곧바로 건강하다는 답장을 썼다. 또 가난하다는 것이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군인 은급을 친정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 미즈키가 만화가로 성공해 부모님을 불러 모은 뒤로는 만화 스토리에 자주 참견해 오니타로에 시서가 등장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 덕분이라고 한다. [3] 우스겟 소리가 아니라 메리 플로라 벨은 10세에 2건의 살인에 성공했다. 만일 정말로 남동생을 바다에 밀어 죽이는데 성공했다면 최연소 살인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을 것이다. [4] 본명 카케야마 후사(景山ふさ). 사카이미나토시에서는 신불을 섬기는 사람을 "농농상"이라고 부르는 풍조가 있어, 일찌기 "배례자"라고 불리는 기도사의 아내였던 그녀는 주위로부터 "농농할멈(농농바)"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5] 주연: 카가와 테루유키 [6] 독서는 주로 종교나 철학책을 봤으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7] 일본어 원문 : 将来は語れない時代だ。毎日五萬も十萬も戦死する時代だ。芸術が何んだ哲学が何んだ。今は考へる事すらゆるされない時代だ。画家だらうと哲学者だらうと文学者だらうと労働者だらうと、土色一色にぬられて死場へ送られる時代だ。人を一塊の土くれにする時代だ。こんな所で自己にとどまるのは死よりつらい。だから、一切を捨てて時代になつてしまふ事だ。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힘든 시대다. 매일 5만에서 10만명이 전사하는 시대다. 예술이니 철학이니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생각하는 것조차 용서받지 못하는 시대다. 화가건 철학자건 문학자건 노동자건, 흙색으로 칠해져(=구 일본군 군복이 입혀져) 사지(死地)로 보내지는 시대다. 인간을 흙 한 덩이로 취급하는 시대다. 이런 데서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것은 죽음보다 괴롭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시대에 동화되어버리는 것이다. [8] 후년의 회고에서는「그만둘걸」이라고 말했다. [9] 덧붙여서 말년의 시게루는, '극한의 북대륙에 보내졌더라면 추위에 약한 자신은 동사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남쪽이라고 대답한 것이 나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실제로도 북쪽이라 대답했으면 관동군으로 보내질 확률이 높았을 것이며, 그랬다면 전쟁을 겪는 것은 덜했을 것이고 일본군의 포로 생환률도 상당히 높았던지라 어떻게든 일본에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대신 1950년대까지 시베리아에서 꼼짝없이 잡혀있어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냥 40연대에 남았었다면 모 아니면 도였는데, 원하는 대로 규슈쪽으로 가서 본토결전 준비만 하다 패전을 맞은 부대가 있었는가 하면 사이판까지 가서 전멸당한 예하대대도 있었기 때문이다. [10] 이때 만약 오른팔을 잃었다면 평생 동안 그림을 못 그리고 살았을 것이다. [11]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열이 40도 넘게 올랐고, 피골이 상접하게 마르는 것도 모자라 모발까지 거의 다 빠졌으며, 절단한 팔 부위는 머리만큼 부어오른 데다가 구더기마저 들끓었다고 한다. 잘 때에는 구더기가 콧구멍 속으로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집도했던 군의는 돌팔이였던 데다가 절단 시에 사용한 도구도 맥가이버 나이프 수준이었지만, 의사 자체는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모양. [12]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토인으로 부른다. [13] 하지만 미즈키 시게루 자신은 '전장에서 살았다'는 생각에 무척 기뻐했었다고 한다. [14] 이 청년이 14살 때 그림연극 업계에 들어와, 후에 황금박쥐의 창시자 스즈키 이치로의 대본을 바탕으로 1950년에 '황금박쥐 수수께끼편'의 그림을 그린 카타 코우지.
파일:external/stat.ameba.jp/t02200136_0329020313045138623.jpg
[15] 전당포에 물건을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렸을 때 받는 증명서로, 이것이 많을 때는 쌓여서 3센치가 넘었다고 한다. [16] 일본은 부부동성제이기 때문에 결혼 후 미즈키의 본성을 따라 무라 누노에가 되었다. 후에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도 남편의 필명과 상관 없이 본명인 무라 누노에로 활동했다. [17] 까만 바나나는 상품성이 없어서 싸게 팔지만 사실 잘 익은 거라 먹어도 문제는 없다. [18] 훗날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 버전은 장삐쭈가 더빙해서 봉팔맨으로 알려지게 된다(...). [19] 그는 민속 화가가 그린 고전 그림을 참고하여 그렸다. 글자나 전설의 기록만으로 고전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가 처음 그려 대중화시키도 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요괴는 미즈키가 창조한 형태다. 한편, 출처 미상이기 때문에 창작 가능성을 지적받고 있는 요괴도 몇 개 그렸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20] 2003년 폐쇄됐다. [21] 절정기에는 한 달에 11개 잡지에 연재했다고 일본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다. [22] 츠게 요시하루는 대본소 만화가 시절부터 미즈키와는 만화가들의 모임에서 몇 번 마주 친 인연이 있었고, 가로의 편집부에서 미즈키 선생이 어시스턴트를 구한다는 소개를 받아 그를 찾아갔다. 이 당시 츠게는 이미 프로로 활동하는 만화가여서 일반적인 어시스턴트라기보다는 바쁠 때만 일주일에 2,3일 도와주고 일당을 받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가로에 발표한 작가주의 단편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자, 만화가 생활은 때려치고 다른 일을 하던가, 미즈키 선생의 어시스턴트로 계속 일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어시스턴트 생활은 1년 반 정도 했다. 나중에, 자신이 받는 일당이 미즈키 선생한테는 꽤나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시스턴트를 고용하면 매월 인건비가 장난이 아니게 지출된다. 더구나, 츠게 요시하루는 이미 프로로 만화가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일당은 두둑히 챙겼다. 덕분에 츠게는 생활고 걱정은 덜었다.) 미즈키 시게루가 자서전과 인터뷰에 밝힌 바에 의하면 이케가미 료이치는 어시스턴트 시절 엄청 성실하고 부지런했고, 츠게 요시하루는 과작이면서도 같은 만화를 여러번 재출판하여 인세를 받는 것을 비꼬며 '일을 안하려하는 게으름뱅이'라고 평했다. 좋은 의미로 분발하라는 속뜻이었다. [23] 모쿠모쿠렌(目目連). [24] 배우다. [25] 2018년 폐간됐다. [26] 당시 축제 등이 있으면 비디오 촬영이나 녹음을 해, 자택에서 몇 번이나 감상한다. 여행지에서 구입한 가면, 인형, 책 등도 수집해 집 등에 전시하고 있다. [27] 현재는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 중 한명이기도 하다. [28] 6개 작품이 연속으로 모두 호평을 받고 흥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롱런을 하고 있는 이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29] 일본의 인기 SF 작가 [30] 천황이 장례에 하사하는 금원으로 일반 부의금(鄕典)에 해당한다. [31] 애니메이션 게게게의 키타로 1, 2기에 키타로 담당 성우였다. [32] 대본 시절부터 만화가 동료로서 절차탁마해 온 친구다. [33] 일본의 편집자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01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50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