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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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4대 국왕 Agilulf | 아길루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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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아길루프 |
라틴어 | Agilulf | |
생몰 년도 | 미상 ~ 616년 4월 | |
재위 기간 | 590년 ~ 616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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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4대 국왕.2. 행적
튀링겐족 출신으로, 531년 프랑크 왕국이 튀링겐 왕국을 정복했을 때 랑고바르드족에 망명한 튀링겐 인들의 지도자였다. 아우타리 왕의 누이와 결혼한 뒤 토리노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590년 9월 5일 아우타리 왕이 역병에 걸려 사망한 후, 공작들은 아우타리와의 결혼 1년만에 미망인이 된 테오도린다 왕비에게 차기 왕을 선택할 권한을 주었다. 이때 아길루프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대는 제 입에 키스할 권리가 있는데 어째서 손에 키스하십니까?"
그 후 아길루프는 테오도린다의 지명을 받아 왕이 되었고, 591년 5월 밀라노에 모인 군중 앞에서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당시 테오도린다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며 강대한 영향력을 주변 지역에 행사한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이었고, 아길루프는 그녀에게 왕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에 향후 통치에서 그녀의 의사를 가급적 존중했다.그래서 당대 역사가들은 아길루프와 테오도린다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다고 기술했다.
일부 공작들은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진영에 합세했다. 이에 아길루프는 무력으로 그들을 복종시키기로 했다. 베르가모와 가둘루프가 이끄는 반란이 특히 거셌지만, 594년 아길루프에게 패배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공작들을 복속시킨 뒤, 그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프랑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는 동시에 판노니아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북방과 동방 전선을 안정시켰다. 그 후 남방의 라벤나 총독부와 로마 시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군은 나폴리를 포위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로마누스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다가 596년 로마누스가 사망한 뒤 새 라벤나 총독으로 부임한 칼리니쿠스는 전임 총독과는 달리 교황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601년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휴전 협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칼리니쿠스는 601~602년에 파르마를 공략하고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에 분노한 아길루프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북부의 일부 공작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한 뒤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파도바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했으며, 뒤이어 에스테, 아바노, 몬첼리체를 공략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는 칼라니쿠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과거 라벤나 총독을 역임했던 스마라그두스를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시켰다. 스마라그두스는 칼리니쿠스가 주도하던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고, 아길루프가 포로로 잡힌 딸과 사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아길루프는 603년 크레모나를 포위하였고 605년 8월 21일 크레모나를 함락한 뒤 철저하게 파괴했다. 뒤이어 9월 1일 마토바를 점령했으며, 불투르나 요새를 포위하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고, 여세를 몰아 브레셀로를 공략했다. 결국 스마라그두스는 아길루프에게 사죄하고 605년 4월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와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그는 아들 아달랄트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며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제작된 왕관이 현재에도 전해지는데, 거기에는 'Gratia Dei rex totius Italiae(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는 자신이 온 이탈리아의 통치자이자 랑고바르드족과 라틴인의 군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었으며, 신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한다는 왕권신수설이 가미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통치 말년에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족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여 평화를 이어갔고, 랑고바르드인과 라틴인의 통합 정책을 이어갔다. 611년 프리울리 공작 기술프 2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의 사주를 받은 아바르족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616년 4월 25년간의 통치 끝에 밀라노에서 사망했고, 아들 아달랄트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