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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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3대 국왕 Authari | 아우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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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아우타리 |
라틴어 | Authari | |
생몰 년도 | 미상 ~ 590년 9월 5일 | |
재위 기간 | 584년 ~ 590년 9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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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3대 국왕.2. 행적
랑고바르드 왕국 2대 국왕 클레프와 마사네의 아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2명의 누이가 있었다. 574년 부모가 부하 또는 노예에게 살해된 뒤, 공작들이 왕을 세우지 않기로 결의하면서 왕위를 잇지 못하고 10년간 은거했다. 그러다가 575년 프랑크 왕 군트람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트렌트를 공략하고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프랑크족과 동맹을 맺는 등 외세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공작들은 584년 아우타리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그는 라틴 선주민과 랑고바르드족의 통합을 꾀했다. 서로마 제국 황제들이 줄곧 써 왔던 '플라비우스'라는 칭호를 채용해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개인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칼케돈파와 가급적 잘 지내고자 노력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성인들의 유물을 교황 펠라지오 2세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칼케돈파를 신봉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랑고바르드족의 의식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칼케돈파에 온정적인 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그는 로마(즉 카톨릭) 의식에 따른 세례를 금지하는 정책을 반포해야 했다.
한편,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체 영지의 1/3을 랑고바르드 귀족이 점유하고 나머지 2/3은 로마인이 소유하는 정책을 반포했다. 1:2라서 혜자(?)로워 보이지만 이것은 총량이고, 인구수는 1:2보다도 차이가 훨씬 많이 났을 것이기 때문에 인구수 대비로 따지면 말이 달라진다.(...) 이와 함께 라틴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랑고바르드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 제도가 반포되면서 라틴계 지주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공고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금도 동로마의 세금보다는 가벼웠다는 것이었다. Schwerpunkt라는 역사 유튜브의 Byzantine Italy: an introduction 영상에서의 20~25분경 즈음 내용에 의하면, 동로마령 이탈리아의 주민들이 동로마의 과중한 세금을 피해서 세금이 가벼운[1] 랑고바르드령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신설한 라벤나 총독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트렌트를 탈환한 뒤 에윈을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다. 585년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하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589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는 프랑크 왕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고, 킬데베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계 소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이후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킬데베르 2세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철수했던 것과 파병 요청에 불응했던 것 모두에는 전염병뿐만 아니라 랑고바르드를 멸망시키기보다는 완충국으로 유지시켜 동로마와 국경을 직접 맞닿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순망치한의 성격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기로 마음먹은 아우타리는 589년 5월 15일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하고 테오도리다의 남자 형제인 군도랄드를 아스트리 공작으로 선임했다. 또한 테오도리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트렌트 공작 에윈과 결혼했다. 이때 아우타리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안술루스가 결혼 축하 행사 중에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아우타리는 590년 9월 5일 파비아에서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귀족들은 논의 끝에 토리노 공작 아길루프를 새 왕으로 세웠고, 결혼 1년 만에 미망인이 된 테오도린다 왕비는 아길루프와 재혼했다.
[1]
동로마의 행정체계의 수준이 높았던 만큼, 그 행정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도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