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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 11대 국왕 Grimoald | 그리말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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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그리말트 |
라틴어 | Grimoald | |
생몰 년도 | 미상 ~ 671년 | |
재위 기간 | 662년 ~ 6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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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벤토 공국 5대 공작, 랑고바르드 왕국 11대 국왕.2. 행적
프리울리 공작 지술프 2세와 바이에른 남부, 오스트리아, 쥐트티롤 일대를 지배하던 바이우바리족의 공작 가리발트 1세의 딸 로밀다의 아들이다. 형제로 카코(Caco), 타소네(Tasone), 라도알트가 있었고, 누이로 아파, 가이아 등 4명이 있었다. 초대 국왕 알보인의 종고손이다.610년 아바르족이 쳐들어와 지술프 2세의 군대를 궤멸시킨 뒤 프리울리 공국의 수도를 포위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로밀다는 아바르 족장이 젊고 사내다운 기상을 풍기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나와 결혼해준다면 도시와 주민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 족장은 이를 받아들였고, 로밀다가 은밀히 성문을 열자 즉시 군대를 투입해 도시를 장악했다. 로밀다는 소원대로 아바르 족장과 결혼해 하룻밤을 보냈지만, 다음날 족장이 "너에게 적합한 남편들이다"라고 말하며 12명의 망나니에게 보내 갖은 고문과 강간을 당하게 한 뒤 꼬챙이에 찔러 죽게 했다고 한다.
이후 프리울리의 랑고바르드인들을 모조리 끌고 판노니아로 귀환한 아바르족은 포로로 잡은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기로 했다. 이때 라도알트, 카코, 타소네, 그리말트 4형제는 탈출하기로 결의했다. 형제 중 한 명이 그리말트는 어려서 말을 탈 수 없으니 아바르족에게 능욕당하기보다는 지금 죽는 편이 낫다며 죽이려 하자, 그리말트는 스스로 말에 올라 타 능숙하게 이동함으로써 자신 역시 말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네 형제는 곧 간수를 죽이고 프리울리로 피신했고, 카코의 타소네가 프리울리 공동 공작을 맡았다. 이후 슬라브족으로부터 많은 영토를 빼앗고 영지를 잘 이끌던 두 사람은 625년 아버지 지술프 2세처럼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자 했는데, 마침 동로마 귀족 그리고리오스가 "턱수염을 깎는 의례와 함께 타소네를 양자로 삼고 싶다"고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그리고리오스가 있는 오데르소로 향했다. 그러나 두 형제가 오데르소에 도착하자마자, 그리고리오스는 성문을 닫고 병사들을 투입해 그들을 죽이게 했다. 형제는 끝까지 항전했으나 끝내 피살되었고, 그리고리오스는 타소네의 목을 벤 뒤 수염을 깎았다.
카코와 타소네가 피살된 뒤, 지술프 2세의 형제인 그라술프 2세가 프리울리의 새 공작에 취임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라도알트와 그리말트는 자신들이 공작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삼촌이 가로챘다며 불만을 품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베네벤토 공작 아레치스 1세는 두 사람을 후대했고, 나중에는 양자로 삼았다. 아레치스 1세에게는 친자식이자 공작 후계자인 아이울프 1세가 있었지만, 파비아에 인질로 보내지던 중 라벤나에 들러서 술을 진창 마셨다가 정신 이상이 생겼다. 아레치스 1세는 641년 죽기 직전에 라도알트와 그리말트에게 아이울프의 섭정을 맡겼다.
642년, 슬라브인들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시폰토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했다. 아이울프는 두 섭정이 마침 자리를 비웠을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입자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말이 적진 주변에 슬라브인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구덩이에 갇힌 채 살해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라도알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슬라브족을 공격해 섬멸한 뒤 로타리 왕으로부터 베네벤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647년 라도알트가 사망한 뒤, 그리말트가 베네벤토 공작이 되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가르가노 산에 있는 몬테 산탄젤로 성역을 약탈하려 한 '그리스인'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러던 662년, 형제 페르타리트와 한창 내전을 벌이던 고데페르트가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비아로 진군했다. 고데페르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페르타리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대다수 공작들은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아스티와 토리노에서는 그에 대항하여 봉기하기로 마음먹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는 두 도시의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한편, 페르타리트를 보호해주고 있던 아바르족에게 당장 자신에게 넘기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바르족이 이탈리아로 돌려보내려 하자, 페르타리트는 프랑크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663년, 그리말트는 아스티로 침입한 프랑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페르타리트를 프랑크 왕국에서 끌어내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663년,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 전역을 재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해 로무알트 1세를 격파하고 베네벤토를 포위했다. 그는 즉시 아들을 구하고자 출격했고, 콘스탄스 2세는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 승리는 여전히 위태로웠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들 로무알트는 나중에 반격에 나서 오트란토를 제외한 풀리아 전역을 탈환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군에서 이탈한 불가리아 분견대를 고용해 세피노, 보이아노, 이세르니아 등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이탈리아 중남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여기에 카푸아 백작을 맡던 사위 트라스몬드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승진시켰고, 로타리의 칙령에 새로운 법률을 추가했으며, 파비아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종교 활동에서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안정적인 통치를 선보이던 그는 671년 사망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활을 쏴서 비둘기를 맞히려 했다가 팔의 정맥이 끊어졌고, 의사들이 이를 봉합하려 했다가 합병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의사들이 상처를 봉합할 때 독에 적신 거즈를 발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불확실하다. 사후 아들 가리발트가 즉위했지만 3개월만에 축출당하고 지난날 그에게 쫓겨났던 페르타리트가 재집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