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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4년 7월 11일 |
경기도
경성부
다옥정 18번지[1] (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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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5년 4월 11일 (향년 80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5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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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시인, 군인. 前 국립극장장을 역임했다.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24년 7월 11일 경기도 경성부 다옥정 18번지(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서 태어났다.보성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항일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9월에는 경기도경찰부에 다시 체포되어 일본군 학병 입대를 강요받았고, 결국 1944년 1월 일본제국 육군에 입대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해 5월 그는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남부에서 12명의 동지를 이끌고 탈영해 당시 호남성 형산현(衡山縣)[2]에 있던 국민혁명군 중앙군 유격사령부에 편입되었고, 액외(額外:정원 외) 중령 계급을 부여받아 특수공작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5년 2월에는 그의 초모공작에 따라 황의선(黃義善)· 강재식(姜在植)· 김광수(金光洙) 등 학병들을 탈출하도록 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도록 돕기도 했다. 그해 8월 한국광복군 사령부에 합류하기 위해 중경(重慶)으로 가던 도중 8.15 광복을 맞았고, 국민혁명군 제73군 193사단장 소중광(蕭重光, 1908 ~ 1984)[3] 소장을 만나 일본 군대의 무장해제 준비에 통역관으로 참여하다가 1946년 4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관동군 제82사단 통역관으로 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만나 함께 귀국했다고 한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의 후신인 고려대학교에 복학해 1949년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6년부터 시인인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4]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졸업 후 육군 장교로 임관, 1953년 육군신문[5] 편집국장, 1955년 정훈국 보도과장을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 국방연구원 2기로 입교하였고, 1년 후 정훈국 보도과장에 복직하였다. 1960년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 보도과장에 임명되었고, 5.16 군사정변 후 공보국장에 승진하였다. 그해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를 수행했으며, 1962년 국립극장 극장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공보부 조사국장, 문화선전국장, 서울국제방송국장을 역임하고 1968년 다시 국립극장장에 취임하였다. 1969년 문화공보부 예술국장을 끝으로 공직을 퇴임했으며, 1970년 학병 탈출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라디오 연속극 '분노의 계절'이 DBS에 방영되었다. 1971년 한국영화진흥조합 상임이사에 취임하였고, 동년 대종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1973년 5.16 민족상 사무총장,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사무총장 겸 이사, 1980년 독립유공자협회 상임이사를 지냈다.
1992년에는 제4대 성남문화원 원장에 취임해 제1회 성남사랑 글짓기 대회를 최초로 개최하고 삼일절노래를 작곡한 작곡가 박태현(朴泰鉉)과 ' 나! 성남의 살리라' 노래를 작사해 발표했다. 그리고 1993년 8월 2일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는 둔촌 이집 묘역을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시키는 데에[6] 공헌했다.
그 밖에도 향토문화연구소 설치 청원서를 제출해 지역사 발굴의 연구소를 준비하고, 성남시민모임 준비위원장·고문 등 성남시 지역의 원로로서 1997년 8월 성남시와 분당신도시 주민들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성남-분당 '화합의 종' 설치 계획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또 2001년 4월에는 중원구 성남동 모란민속5일장 상인회가 주도해온 백범 김구 선생의 중국 피난처 '영안정' 복원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2년 4월에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병량 새천년민주당 성남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기도 했으나, 김병량의 낙선으로 빛이 바랬다.
이후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10번지 주공아파트[7]에 거주하다가, 2005년 4월 11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그의 유해는 2005년 4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이용상은 시인이자 작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시집 '아름다운 생명',[8] '내가 만든 사막' 등을 집필하였고, 1970년 라디오 드라마 '분노의 계절'[9]을 발표하였다. 1993년에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문단 이야기를 모은 '용금옥 시대[10]를 발표하였다.
3. 여담
-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지만이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6.25 전쟁 당시
제9보병사단 정훈부장 복무 당시 참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과 친분을 쌓았고, 술친구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11] 이용상에 따르면 9사단에 부임 후, 첫 참모회의에서 사단장과 말다툼을 벌였는데[12] 참모장이던 박정희가 자신을 불러 위로를 하던게 첫 만남이었다.[13]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장군과 이용상 공보국장. 좌측은 심흥선 장군, 가운데 이용상, 우측이 박정희 장군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술친구이면서 주량은 박 전 대통령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5.16 군사정변 후 기자회견 당시[14] 기자들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량을 묻자 박 의장은 "이용상 동지에게 물어보라."고 답했다 한다. 첨언한 바로는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데(길가에 있는 술집을 다 들르느라) 일주일 걸린다고 한다. 실제로 9사단 정훈부장 복무 당시 서울 출장을 갔다가 종로에서 동대문에 있는 술집들을 일주일 내내 들렀다고 전해진다.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 방미 수행 당시 비행기 안에서 샴페인 40병을 마시고 술값을 내려고 했으나 기장이 술값 대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한다.
- 1950년대·1960년대 문단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 '용금옥 시대'를 집필하고, 국립극장장, 서울국제방송국 국장을 역임하는 등 문단과 연이 많이 닿았다. 1961년 수주 변영로가 별세하자 그는 상복 입기를 청해 수주의 부인이 상복을 장만해줬으나 수주의 친형인 변영태 전 국무총리의 반대로 입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수주 선생의 중절모, 넥타이, 머그 술잔 등 유품 3점을 소장하게 되었는데 머그 술잔은 명동에서 '은성'이란 대폿집을 운영하던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에게서 얻었다고 한다.[15]
-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 여사와 혼담이 오갔다고 한다. 이해경 여사의 생모인 김금덕 여사의 주선으로 만났으나 이해경 여사가 결혼에 회의적이었고, 이용상 또한 해방 직후 형과 형수가 결혼 두 달 만에 연달아 자살하는 사건으로 인해 방황하던 시기라 결혼을 하지 못했다 한다. 부부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평생 친분을 유지하였다 하며, 생전 '40여 년 전 99% 나와 결혼할 뻔 했다.'고 언급했다 한다.
- 해방 후 작은형 내외가 결혼 두 달 만에 연달아 자살한 사건이 발생해 이 충격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주변에서 보다 못해 군에 입대시켰는데 12.12 쿠데타 주역인 유학성과 함께 육군정훈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육군 정훈장교 및 공보장교로 1955년까지 복무하였다.
- 해방 직후 일본군 무장해제 당시 일본어 통역을 맡으며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를 만났다 한다. 1991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회고록 <나의 친구 김영주>를 연재하면서 그와의 일화를 남겼으며, 함께 귀국한 후 한 방을 썼고 김영주가 월북하기 직전까지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 뒤 대한민국 제3공화국 때와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김영주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만남을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한다. 당시 박정희가 비서를 통해 함구령을 내렸으나 추후 이용상을 보내 북한 당국을 놀라게 만들고자 했으며 방북 특사였던 장기영에게 평양 방문 전에 이용상을 만날 것을 권하고, 이용상은 장기영을 만나 김영주에게 저하는 안부를 부탁했다.
4.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 정운헌 칼럼,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 오마이뉴스. 2005년 4월 14일 자.
- 시인, 독립유공자 이용상
[1]
당시 다옥정 18번지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10번지와 33번지에 각각 편입되어 있다.
[2]
현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헝양시 헝산현(衡山縣).
[3]
호는 조량(調亮).
호남성 무강주(武岡州) 동구(洞口) 파도촌(破刀村)[17] 출신이다.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제6기), 육군대학(제15기)를 졸업하고 육군대학 교관을 역임했다. 1942년
국민혁명군 제73군 193사단 부사단장에 취임했고, 1944년 4월 예중회전(豫中會戰)에 참전했다. 참전 후 제73군 193사단장에 승진했고,
소장에 올랐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 1947년 2월 23일 라이우전투에서 패배해
중국 인민해방군의 포로가 되었고, 1950년에서야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전향해 인민해방군 남경군사학원 교원을 지냈다.
[4]
호(號)인 공초가 담배 꽁초에서 왔다고 전해질 정도로 흡연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일설에 따르면 공초의 유래가 담배 꽁초가 아닌
골초라고 한다. 실제 사진을 검색해보면 담배를 손에 쥔 사진이 대부분이다.
[5]
국방일보의 전신
[6]
이후 2008년 5월 26일
경기도기념물 제219호로 승격되었다.
[7]
2017년 철거 후
재건축되어 현재 이 자리에는
산성역 포레스티아가 들어서 있다.
[8]
출간에
박정희가 도움을 주었다.
[9]
1978년 동명의 소설로 발매되었다.
[10]
용금옥은 지금도 종로구, 중구에 있는 추어탕집이다. 본래 중구 다동에 있었으나, 종로구 통인동에 분점을 냈다고 한다.
[11]
9사단 복무 당시 박정희,
김재춘등과 어울려 개울에서 잡은 게를 안주삼아 국산 위스키나 정종, 심지어 의무실의
에탄올에 물을 섞어 마셨다고 한다.
[12]
아마
최석 사단장으로 추측된다.
[13]
이 무렵 창설된지 얼마 안되었던 9사단은 사단장이 반년동안 6번이나 바뀔 정도라 박정희가 사실상 사단장 역할을 하며 참모들로부터의 신망도 두터웠다.
#
[14]
이용상이 기자들을 끌고 장충동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무턱대고 찾아가 이뤄진 기자회견인데 박정희는 맨발로 기자들과 회견할 정도로 격의없는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15]
당시 은성은
명동백작에도 소개될 만큼 5,60년대 유명한 대폿집이자 문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수주 변영로도 그 곳에 전용 술잔을 갖고 있을 만큼 단골이었으며, 최불암 역시 수주 변영로와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16]
당시 문공부 공보국장으로 있다가 국제방송국장이 되었는데 이사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직급이 내려간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