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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우루과이| 1930 우루과이 |
[[이탈리아 왕국| 1934 이탈리아 |
[[프랑스 제3공화국| 1938 프랑스 |
[[브라질 제4공화국| 1950 브라질 |
[[스위스| 1954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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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
[[스웨덴| 1958 스웨덴 |
[[칠레| 1962 칠레 |
[[잉글랜드| 1966 잉글랜드 |
[[멕시코| 1970 멕시코 |
[[서독| 1974 서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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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스페인| 1982 스페인 |
[[멕시코| 1986 멕시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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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994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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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프랑스| 1998 프랑스 |
[[독일| 2006 독일 |
[[브라질| 2014 브라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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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러시아| 2018 러시아 |
[[카타르| 2022 카타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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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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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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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대회 이전 | 지역 예선 · 참가팀 정보 | |||||||||||
조별 리그 | 1조 | 2조 | 3조 | 4조 | |||||||||
토너먼트 | 8강 | 준결승 | 결승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 ||
Fussball-Weltmeisterschaft 1954 Schweiz Championnat du Monde de Football 1954 Campionato mondiale di calcio 1954 Campiunadis mundials da ballape 1954 1954 FIFA World Cup Switzerland™ |
||
대회 기간 | 1954년 6월 16일 ~ 1954년 7월 4일 | |
개최국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
|
공인구 |
스위스 월드 챔피언 (Swiss World Champion) |
|
본선 진출팀 | 16개팀 | |
대회 결과 | ||
우승 |
서독 (첫 번째 우승) |
|
준우승 | 헝가리 | |
3위 | 오스트리아 | |
4위 | 우루과이 | |
수상 | ||
득점왕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
|
이전·이후 대회 | ||
1950년 브라질 |
1954년 스위스 |
1958년 스웨덴 |
[clearfix]
1. 개요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5번째 FIFA 월드컵.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16년 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2. 개최지 선정
개최지 결정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1950년 대회의 브라질 개최와 동시에 이뤄졌다. FIFA가 밝힌 스위스 개최의 공식적인 이유는 FIFA의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를 FIFA의 본부( 제네바)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유럽 대륙 대부분이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 국가 중에 그나마 대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는 나라가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이다. 이 여파는 다음 대회까지 이어져서, 이 다음 대회 역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 외에는 유럽에서 유치 희망국이 나오지 않았다.3. 지역예선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지역예선 문서 참고하십시오.지역예선에선 이런 일들이 있었다.
- 이 대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출전금지가 해제되었다. 다만 서독만 이 대회에 출전해 지역 예선을 뚫고 우승까지 거뒀고 동독은 1953년 동독 봉기로 인해 예선조차 출전 못했다. 일본은 예선에는 출전했으나 대한민국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 자르 보호령이 유일하게 예선에 참가한 월드컵 대회이다. 자르 보호령은 예선을 뚫지 못했고 1957년에 서독에 편입되었다.
- 시드 배정국을 보면 다소 의외의 국가가 있는데 바로 튀르키예이다. 튀르키예는 당시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하는 국가였고 지역예선까지 모두 합쳐봐도 1950년 월드컵에 출전했다가 국외정세로 인해 기권한 것이 전부였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원래 FIFA는 지역예선이 끝나기도 전에 시드를 배정해 줄 8개국을 미리 선정해 놨었고 이 8개국중 7개국은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스페인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지역예선에서 스페인을 동전 던지기 끝에 떨어뜨리고 올라온 팀이 튀르키예였고 FIFA는 스페인에게 줬던 시드를 튀르키예에게 다시 주는 것으로 대충 해결을 봤다.
4.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총 6개의 도시와 구장에서 열렸다.- 베른 - 슈타디온 방크도르프[1] (Stadion Wankdorf) (64,600명) - 결승전 개최
- 제네바 - 스타드 드 샤르밀 (Stade de Charmilles) (35,997명) - 개막전 개최
- 바젤 - 장크트 야코프 슈타디온[2] (St. Jakob Stadion) (54,800명)
- 로잔 - 스타드 올림피크 드 라 퐁테즈 (Stade Olympique de la Pontaise) (50,300명)
- 루가노 - 스타디오 디 코르나레도 (Stadio di Cornaredo) (35,800명)
- 취리히 -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Hardturm Stadion) (34,800명)
5. 본선 진출팀[16개팀]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참가팀 정보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회 진행
제2차 세계 대전 복구 문제와 각종 사정[4]으로 본선에 진출해놓고도 기권한 팀이 3개국이나 되었던 지난 1950년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기권팀이 없어서 진정한 의미로 16개국이 본선 진출한 조별 리그 체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월드컵 대회 진행의 기본적인 틀인 조별 리그+토너먼트의 1930년 월드컵 방식을 오랜만에 도입한 월드컵이었고 1970년 월드컵까지 이 방식을 사용했었다.[5]6.1. 조별 리그[16강]
이 대회는 각조당 시드 배정국 2개국이 있어서 시드 배정국은 시드 미배정국들과, 시드 미배정국은 시드 배정국들과 시합을 하는 방식으로 모든 팀이 2경기씩 치렀다. 이 대회에는 조별 리그부터 연장전이 있어서 정규 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연장전을 치렀고 연장전에서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무승부로 기록되었다. 골득실은 따지지 않았고 만약 승점이 같은 팀이 나오면 플레이오프를 치러 승리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이 방식은 이 대회에서만 사용되었다.조별리그 결과 | ||||
순위 | 1조 | 2조 | 3조 | 4조 |
1위 | 브라질 | 헝가리 | 우루과이 | 잉글랜드 |
2위 | 유고슬라비아 | 서독 | 오스트리아 | 스위스 |
3위 | 프랑스 | 튀르키예 | 체코슬로바키아 | 이탈리아 |
4위 | 멕시코 | 대한민국 | 스코틀랜드 | 벨기에 |
6.2. 결선 토너먼트
이 대회에서 토너먼트 상대는 조별 리그 성적이 아닌 추첨으로 정해졌는데 얄궂게도 1위팀과 2위팀이 만난 대진은 대회 내내 하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1위팀들이 2위팀들에 비해 더 불리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서독의 우승으로 끝났다.결선 토너먼트 결과 | |||||
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A |
8강 1경기 우루과이 4:2 잉글랜드 |
E |
4강 1경기 헝가리 4:2 우루과이 |
G |
결승 헝가리 2:3 서독 |
B |
8강 2경기 오스트리아 7:5 스위스 |
||||
- | |||||
C |
8강 3경기 브라질 2:4 헝가리 |
F |
4강 2경기 서독 6:1 오스트리아 |
||
D |
8강 4경기 유고슬라비아 0:2 서독 |
H |
3위 결정전 우루과이 1:3 오스트리아 |
6.3. 우승
|
1954 FIFA 월드컵 우승 |
서독 |
첫 번째 우승 ★ |
7. 최종 순위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서독 |
5 | 4 | 0 | 1 | 18 | 12 | +6 | 8 | 우승 | |
[[틀:깃발| 헝가리 | ]][[틀:깃발| ]][[헝가리 인민공화국| ]]5 | 4 | 0 | 1 | 27 | 10 | +17 | 8 | 준우승 |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오스트리아 |
5 | 4 | 0 | 1 | 17 | 12 | +5 | 8 | 3위 | |
4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우루과이 |
5 | 3 | 0 | 2 | 16 | 9 | +7 | 6 | 4위 |
5 | [[틀:깃발| 브라질 | ]][[틀:깃발| ]][[브라질 제4공화국| ]]3 | 1 | 1 | 1 | 8 | 5 | +3 | 3 | 8강 |
6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잉글랜드 |
3 | 1 | 1 | 1 | 8 | 8 | 0 | 3 | |
7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유고슬라비아 |
3 | 1 | 1 | 1 | 2 | 3 | -1 | 3 | |
8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스위스 |
3 | 1 | 0 | 2 | 7 | 10 | -3 | 2 | |
9 |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터키 |
2 | 1 | 0 | 1 | 8 | 4 | +4 | 2 | 조별리그 |
10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
2 | 1 | 0 | 1 | 5 | 3 | +2 | 2 | |
11 | 프랑스 | 2 | 1 | 0 | 1 | 3 | 3 | 0 | 1 | |
12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벨기에 |
2 | 0 | 1 | 1 | 5 | 8 | -3 | 1 | |
13 | [[틀:깃발| 멕시코 | ]][[틀:깃발| ]][[멕시코| ]]2 | 0 | 0 | 2 | 2 | 8 | -6 | 0 | |
14 |
[[체코| ]][[틀:국기| ]][[틀:국기| ]] 체코슬로바키아 |
2 | 0 | 0 | 2 | 0 | 7 | -7 | 0 | |
15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스코틀랜드 |
2 | 0 | 0 | 2 | 0 | 8 | -8 | 0 | |
16 | [[틀:깃발| 대한민국 | ]][[틀:깃발| ]][[대한민국 제1공화국| ]]2 | 0 | 0 | 2 | 0 | 16 | -16 | 0 |
8. 수상
9. 기록실
- 최초 득점 - 밀로스 밀루티노비치( 유고슬라비아), vs 프랑스(6월 16일, 16강 조별 리그), 전반 15분
- 퇴장 - 니우통 산투스, 움베르투(이상 브라질), 보지크 요제프 ( 헝가리)
- 최초 페널티 킥 - 레몽 코파(프랑스), vs 멕시코(6월 19일, 16강 조별 리그), 후반 43분
- 최초 멀티골 - 핑가(브라질), vs 멕시코(6월 16일, 16강 조별 리그), 전반 34분, 전반 43분
- 해트 트릭
- 코치시 샨도르(헝가리), vs 대한민국(6월 17일, 16강 조별 리그)
- 카를로스 보르헤스( 우루과이), vs 스코틀랜드(6월 19일, 16강 조별 리그)
- 에리히 프롭스트( 오스트리아), vs 체코슬로바키아(6월 19일, 16강 조별 리그)
- 코치시 샨도르(헝가리), vs 서독(6월 20일, 16강 조별 리그)[7]
- 부르한 사르군( 튀르키예), vs 대한민국(6월 20일, 16강 조별 리그)
- 막스 모를로크(서독), vs 튀르키예(6월 23일, 8강 진출팀 결정 플레이오프)
- 테오도르 바그너(오스트리아), vs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제프 휘기(스위스), vs 오스트리아 (6월 26일, 8강전)
- 최다 득점 경기 - 오스트리아 7 vs 5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최다 득점차 경기 -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 (6월 17일, 16강 조별 리그)
- 최초 역전승 - 서독 4 vs 1 튀르키예(6월 17일, 16강 조별 리그)
- 자책골
- 지미 디킨슨( 잉글랜드), vs 벨기에(6월 17일, 16강 조별 리그)
- 라울 카르데나스(멕시코), vs 프랑스(6월 19일, 16강 조별 리그)
- 이반 호르바트(유고슬라비아), vs 서독(6월 27일, 8강전)
- 루이스 크루즈(우루과이), vs 오스트리아(7월 3일, 3위 결정전)
- 무득점팀 -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대한민국
- 최고령 선수 - 스탠리 매튜스(잉글랜드), 39세
- 최연소 선수 - 코슈쿤 타슈(튀르키예), 19세
- 득점왕 - 코치시 샨도르(헝가리), 11골
10. 뒷이야기
-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진 FIFA 월드컵 대회다. 다만 당시에는 인공위성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라서 영화 필름같은 기록 매체에 녹화한 후 각 방송국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위성 생중계는 1966년 대회부터 진행되었다.
-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역대 최다 경기당 득점 기록이 나온 대회로 기록되었다. FIFA 월드컵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로 점수만 보면 야구라고 해도 믿겠다 할 정도인 경기들도 꽤 있었다.
- 헝가리 9 : 0 대한민국 (9골)
- 튀르키예 7 : 0 대한민국 (7골)
- 헝가리 8 : 3 서독 (11골)
- 서독 7 : 2 튀르키예 (9골)
- 우루과이 7 : 0 스코틀랜드 (7골)
- 잉글랜드 4 : 4 벨기에 (8골)
- 오스트리아 7 : 5 스위스 (12골)
- 서독 6 : 1 오스트리아 (7골)
- 스위스는 이 대회에서 무려 10실점을 헌납하면서 개최국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60년 간 이어져 오다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서 개최국 브라질이 독일에게 1:7로 참패하는 등 한 대회에서 14실점을 허용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 진출한 모든 16개팀들이 최소 1패 이상을 기록했다.
- 브라질은 8강전에서 헝가리에 2:4로 패배했다.
- 유고슬라비아는 8강전에서 서독에 0:2로 패배했다.
- 프랑스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유고슬라비아에 0:1로 패배했다.
- 멕시코는 16강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 0:5로 참패를 당하고 프랑스에 2:3으로 패배했다.
- 헝가리는 결승전에서 서독에 2:3으로 패배했다.
- 서독은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3:8로 패배했다.[9]
- 튀르키예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서독에 1:4로 패배하였으며, 8강 진출을 가리기 위해 서독과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서독에 2:7로 또 패배했다.
- 대한민국은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튀르키예에 0:7로 대패를 당했다.
- 우루과이는 준결승에서 헝가리에 2:4로 패배했다.
-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서독에 1:6으로 패배했다.
- 체코슬로바키아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에 0:2로 패배하고 오스트리아에 0:5로 참패를 당했다.
- 스코틀랜드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오스트리아에 0:1로 패배하고 우루과이에 0:7로 대패를 당했다.
- 잉글랜드는 8강전에서 우루과이에 2:4로 패배했다.
- 스위스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에 0:2로 패배하고 8강전에서 오스트리아에게 5:7로 패배했다.
- 이탈리아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스위스에 1:2로 패배하였으며, 8강 진출을 가리기 위해 스위스와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스위스에 1:4로 또 패배했다.
- 벨기에는 16강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에 1:4로 패배했다.
-
이때 대회 포스터 중에 태극기가 완전히 가려진 것도 있다. 당시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초라했다는 것을 잘 느끼게 해 준다.[10] - 이 대회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아 대륙 역사상 두 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회이자, 아시아의 주권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기념비적인 대회였다.[11][12][13] 대한민국은 지역예선에서 일본을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했지만 다시 월드컵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32년이 걸렸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86년 월드컵에서의 본선 진출을 시작으로 월드컵 본선에 꾸준히 개근하고 있다.
- 한편 일본은 대한민국에게 이 진출권을 빼앗기고 44년 후인 1998년에서야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4년뒤 홈[14]과 2022년 대회에서[15] 최초 조 1위를 달성했다. 양쪽 조 1위를 달성한 국가는 일본이 최초이다.[16]
- 우승 시상식 때 아직까지도 전쟁후유증이 남아있던 서독 국민들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당시에 금지된 독일국가 1절을 불렀다고도 한다.
- 이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 중 2024년 현재 생존이 확인된 선수는 8명[17]으로, 튀르키예 선수 슈크뤼 에르소이(1934년생, [age(1934-01-14)]세), 메흐메트 딘체르(1933년생, [age(1933-02-20)]세), 우루과이 선수 호세 산타마리아(1929년생, [age(1929-07-31)]세), 로베르토 레오파르디(1933년생, [age(1933-07-19)]세), 라파엘 소우토(1930년생, [age(1930-10-24)]세), 오마르 멘데스(1934년생, [age(1934-08-07)]세), 이탈리아 선수 지노 피바텔리(1933년생, [age(1933-03-27)]세)이다.
특히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한민국을 9:0으로 이긴 것을 포함해 5경기에서 27골로 경기당 5.4골을 기록하는 경이로운 공격력을 과시했다.[8]
10.1. 고난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도전
대한민국은 지역예선에서 라이벌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18]에 진출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차전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무려 9골을 내주며 0:9로 참패하고 만다. 하지만, 경기의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알아보면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로 경기를 끝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우선 이 당시 헝가리는 지금의 그저 그런 유럽 중위권 수준이 아닌, 매직 마자르란 별명으로 불린 명실상부한 축구 최강팀이었다. 당대 최고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필두로 산도르 코츠시스, 히데그쿠티 난도르, 졸탄 치보르, 요세프 보직 등의 선수들이 포진되어 축구 역사에서 손꼽을 만한 강호였다. 헝가리는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대회 직전 평가전에서 7:1로 격파했고[19], 에이스 페렌츠 푸스카스가 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8강전에서는 차기 대회(1958년) 우승국 브라질을, 4강전에서는 전 대회(1950년) 우승국 우루과이를 상대로 각각 4득점씩을 퍼부으며 결승까지 올랐다.
반면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에 조인한 지 겨우 1년이 채 안 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도 급급한 상황이라 스포츠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도 없었고, 되려 일본과의 최종예선에서는 원래 대한민국에서 한 경기, 일본에서 한 경기씩 치르게 되어 있는 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는 바람에 홈 경기마저 치르지 못하게 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버리기도 했다.[20] 이러한 악재를 극복하고 기어이 일본을 꺾고서 본선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21] 사실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몽니를 부리자, 당시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며 "만약 우리가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각서까지 쓸 정도로 강하게 어필해 어찌어찌 어웨이 경기라도 치를 수 있었던 점이 크긴 했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세 닳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 중 한 명이 "당신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조롱이나 다름 없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나라라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을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받아넘겼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의 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일본 도쿄-태국 방콕-인도 콜카타-파키스탄 카라치-이탈리아 로마-스위스 취리히로 이어지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방불케 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22][23] 그나마도 1진만 먼저 출발했고 2진은 좌석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일정을 미루고 좌석을 양보한 덕에 2진도 뒤늦게 에어 프랑스 항공편으로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다른 팀들이 전부 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을 하는 동안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10시간 전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쉽게 찾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경기 하루 전날까지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컨디션 관리는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거의 유니폼만 갈아입는 수준으로 결전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세계 최강 헝가리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전반 초반 20여 분까지는 헝가리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으며, 결정적 득점 찬스까지 맞았을 정도로 헝가리를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초반에 다소 고전한 헝가리 선수들 사이에서 잠시 분란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헝가리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점차 체력의 한계로 경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골문을 두들겼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는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선방해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 선수들이 어찌나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는지, 홍덕영 골키퍼는 훗날 "슈팅 수를 30개 이후로는 아예 세 보지도 못했고[24], 특히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골포스트에 맞으면 위잉 소리가 날 정도였으며,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25] 게다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밖으로 차낸 경우 다시 가져올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던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맹활약에 감명받은 관중들 중 일부는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사인 요청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시 해외 언론은 경기 전만 해도 헝가리의 20:0 대승 또는 그 이상을 예상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 영상만 봐도 외국 기자들이 경기 도중 대놓고 드러누워 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고.'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되려 이들은 경기 종료 후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26][27]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당시 한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 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거나 완전히 탈진해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당시 승장이었던 셰베시 구스타브 당시 헝가리 대표팀 감독 또한 "한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헝가리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하러 왔던 전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 출전한 들러리로 평가받던 초반의 시선을 떨쳐내고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위대한 불굴의 팀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유럽 방송국의 해설자들 또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이들에게 응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의 숙소에 찾아와 점퍼, 청바지, 소시지, 통조림, 현금, 손목시계 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과 음식을 산더미로 쌓아놓고 돌아갔다.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들이 거둔 성적과 상관없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한 난민 올림픽 선수단,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그리고 실제로 우승하게 되는)이자 랭킹 라운드 1위였던 세계 최강자 김우진을 상대로 고군분투한 이스라엘 마다예[28]에게 전세계가 표한 것과 같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분위기도 가라앉은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대한민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29] 이후 2차전 튀르키예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마저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튀르키예전을 끝으로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친 대한민국 선수단은 귀국하는 과정에서도 해프닝을 겪었는데, 바로 월드컵 경기 수익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튀르키예와의 경기가 끝난 뒤 대한민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온 과정도 매우 험난했고 여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귀국이라도 서두르고자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30] 한국 선수들도 이왕 스위스까지 온 김에 좀 더 머무르며 결승전은 꼭 보고 가고싶었으나 거기서 며칠 먹고 잘 돈조차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31]은 조 추첨 결과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며 간곡하게 호소했고 선수들 역시 이러한 호소에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는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고, 대진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스위스에 너무 늦게 도착해 경기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끝내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악전고투를 겪은 대한민국이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가자 유럽 강호들에게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이런 수준 낮은 국가들이 월드컵에 나와 대회의 격을 떨어뜨려서야 되겠느냐?'라는 비판 의견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월드컵의 창시자인 쥘 리메 FIFA 회장은 '월드컵은 강자만의 대회가 아니다. 대한민국 같은 약체라도 그 대륙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만큼, 나올 값어치는 있다. 또한 지금은 대한민국이 무너졌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라며 대한민국을 옹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훗날 아시아의 월드컵 도전사와 아프리카의 월드컵 도전사를 보면 쥘 리메의 말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2022년 1월 13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등장했는데, 방송에서는 홍덕영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며, 홍덕영이 1996년 대한민국의 월드컵 유치를 위해 스위스에 머물던 중 푸스카스를 보고 월드컵 준비 과정을 회상하는 부분부터 소개되었다. 당시 선수들이 모두 고인이라[32] 직접적인 인터뷰를 하는 대신 과거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으며 당시 출전 선수인 홍덕영의 아들 홍기빈[33]과 한창화의 아들 한정수[34]의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10.1.1. 유효 슈팅이 100개 이상?
다만 여기서 헝가리의 유효 슈팅이 100여개에 달했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있다.54년 월드컵 헝가리전에 대한 자세한 경기 기록이나 영상은 남아있지 않으나, 유효 슈팅이 100개가 되려면 축구의 경기 시간인 전후반 90분 전체를 인플레이로 간주하더라도 유효 슈팅이 평균 54초당 1개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와야 한다.최근 연구로 밝혀진 축구 인플레이 시간은 평균 60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각종 세트피스 상황을 제외하면 평균 시간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두 자리 수 유효슈팅이 있었다면 골키퍼가 실점을 했건 선방을 했건 킥오프나 골킥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인플레이 시간은 평균적인 축구 경기보다 극단적으로 짧아지게 된다.
또한 현대 축구에서는 기대 득점의 수학적 계산이 가능한 상태다. 상세한 내용은 선수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통상 100개의 유효슈팅의 기대 득점 값은 30골 남짓으로 계산된다. 2022시즌 K리그 선방지수 1위 김동헌의 선방지수가 7.35, 즉, 기대 실점보다 7.35골 더 막았기 때문에[35], 당시 골키퍼인 홍덕영이 레프 야신 이상의 경이적인 체력과 선방 능력을 가졌다고 가정하여 선방지수 값을 두 배로 잡더라도 10골에서 15골 남짓의 실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일단 90분이라는 시간 내에 100개 이상의 유효 슈팅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설령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골키퍼가 두 자리 수 실점을 안 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 현실성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실제 사례를 꺼내자면,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경기가 149:0인데, 이는 선수들이 쉬지 않고 자책골을 만들어서 세운 기록이다. 즉, 선수들이 경쟁조차 안 하는 상태에서 자책골까지 퍼부을 정도로 작정해야 100개 이상의 유효 슛이 나올 수 있다.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경기들로 비교하자면, 1948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 0:12 패배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전 0:5 패배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인 스웨덴전에서의 전체 슈팅 수는 48개에 불과했으며, 유효 슈팅 수로 본다면 그 이하로 판단해야 한다. 네덜란드전에서도 한국이 맞이한 전체 슈팅 수는 27개, 그 중 유효 슈팅 수는 17개에 불과했다.[36]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SBS의 유튜브 스포츠 채널인 스포츠머그가 영상에 고스란히 보도한 적까지 있다.
또한 이 소문은 정작 골키퍼인 홍덕영에 의해서 사실상 부정되고 있다. 일단 홍덕영 본인조차 헝가리전의 슈팅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본인도 30개까지는 셌지만 포기했다고. 다만 당시 한국팀이 초반 10분을 선방하여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고[37], 홍덕영 본인도 막다가 지쳐서 막은 공을 그냥 관중석에 던지는 고의적인 경기 지연을 했기 때문에 유효슈팅이 나올 수 있는 시간이 위에서 계산한 것보다 더 적게 나왔을 것이다. 또 비슷한 사례로 홍덕영 옹은 1948 런던 올림픽 8강 스웨덴전의 전체 슈팅 수는 정확하게 회고하였는데, 48개에 12실점이다. 이마저도 잘했다고 평가되었으니, 최악의 컨디션에서 9실점한 헝가리전의 슈팅 수도 그 수치를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 소문은 54년 월드컵 국가대표 중 골키퍼 홍덕영이 2002년 월드컵을 즈음하여 매스컴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그 투혼을 선전한다는 명목 하에 과장 또는 날조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골키퍼의 투혼을 찬양하기 위한 이 과장이 역으로 당시 필드 플레이어들에게는 심각한 모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실 이 과장이 하루이틀 된 일은 아닌게, 당시에도 이미 푸스카스의 공을 막던 골키퍼가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였다 혹은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이 얘기 역시 홍덕영 본인이 그 얘기는 와전되었다며 부정하였다. 그저 손이 얼얼했을 뿐이었고, 골대에 맞은 푸스카스의 슈팅이 딩-하고 한참을 울렸다고 회고한 정도였다. 본인의 갈비뼈가 울린게 아니라 골대가 울린 것이다. #
[1]
현재는
슈타디온 방크도르프(2005~)가 위치해 있으며 스타드 드 스위스라고도 불렸다. 동명의 경기장이지만 소유자가 다르다.
[2]
현재는
장크트 야코프 파르크가 위치해 있다.
[16개팀]
[4]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2위로 밀렸다고 참가를 거부해버렸다.
[5]
그 후
1974년 월드컵과
1978년 월드컵은 본선 16강 조별 리그에서 상위 2팀을 추려 8강도 조별 리그로 진행한 다음 8강 각조 1위는 결승, 각조 2위는 3,4위전을 치르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뒤이은
1982년 월드컵에서는 24개국 본선 24강 조별 리그 다음 12강까지 조별 리그로 진행한 다음 4강 토너먼트로 진행했다. 각 대회마다 이렇게 대회 시스템이 바뀌었다가
1986년 월드컵부터 현재의 조별 리그+토너먼트 체제로 회귀했다.
[16강]
[7]
해트 트릭을 넘어 4골을 기록했고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2경기 연속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8]
헝가리의 이 승리 기록은 이후 1974년 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자이르를 상대로 거둔 9:0 승리, 1982년 대회에서 헝가리가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0:1로 승리한 경기들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점수 차 승리 기록이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을 9:0으로 이긴 헝가리는 20:0으로 이길 거라 예상했는데 고작 9골 밖에 못 넣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9]
결승전에서 3:2로 승리하며 16강 조별리그에서의 패배를 복수했다.
[10]
자세히 보면 본의아니게(?) 피해를 입은 멕시코도 국장이 가려져서 이탈리아가 되어 버렸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는 그 지역 깃발이 아닌 연합왕국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이 2번씩 나왔다.
[11]
독립을 한 '주권국가'로 한정짓지 않을 경우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국가다.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1938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는데
지역예선에서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기권하자 무혈입성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헝가리에 0:6으로 대패하고 바로 탈락했다.
[12]
1950년 월드컵 당시
인도가 본선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 기록을 가져갈 수 있었다.
1950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 참가했던 다른 팀들이 모두 기권하면서 인도가 본선에 갔고, 조 추첨까지 이뤄져서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와 함께 3조에 편성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2년 후의 올림픽을 준비하겠다고 갑자기 기권했고, 피파는 인도에게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 출전 자격을 박탈하는 징계를 내렸다.
[13]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국가는
1966년 월드컵의
북한이다. 당시 북한은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는데 이 기록은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위를 달성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국가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었다. 현재까지도 원정 월드컵에서 8강(8위)에 올라가 본 아시아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
[14]
대한민국은 D조, 일본은 H조에서 1위로 16강에 올라갔다.
[15]
1966년 북한이 조별리그에서 아시아최초의 8강으로 올라갔지만 조1위가 아니었으며 16강도 없었다. 원정으론 일본의 조1위가 최초로 볼 수도 있다.
[16]
아시아의 원정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건 1966년 이탈리아를 무너뜨려 8강에 진출한 북한이고 홈은 당연히 북한과 같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잡아낸 4강의 대한민국이었다.
[17]
생사불명 제외.
[18]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시기였는데, FIFA는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타 대륙에 비해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튀르키예에 0:7로 참패하고 탈락하자 FIFA가 아시아들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들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19]
이 패배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골 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20]
결국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예선을 치르지 못하게 되자 일단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날씨 문제를 이유로 3월에 일본에서 두 경기 모두 치르는 것처럼 처리했다. 그런데 도쿄 경기장 역시 연일 비와 눈이 섞여 내려 진흙탕같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
[21]
다행히 대한민국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서 돌아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열렬한 환영 행사를 치러 주었다.
[22]
노선이 저렇게 복잡한 이유는 간단하다. 1950년대에는 기술 부족으로 민항기들의 항속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의 영공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럽을 가려면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크게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카라치의
진나 국제공항은 당시 아시아-유럽 항로의 거점으로 각광받았으나,
냉전이 종료되어 구공산권의 영공이 활짝 열리고
파키스탄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23]
비슷한 고생담이
1948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에게도 있다. 다만 이때는 여러 종목의 선수진이 함께 출발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 출발한 편이었다.
[24]
이 증언이 와전되어 헝가리전 유효 슈팅 100개설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경기에서 100개의 슈팅이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어림잡아 30개 이상에서 40개 이하나 중간 정도로 보인다.
[25]
홍덕영은 이러한 맹활약과 축구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 이후 한일 월드컵 유치위원단으로 활동하던 도중 40여년 만에 푸스카스와 재회하기도 했다.
[26]
1998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했을 당시 대한민국 골키퍼였던
김병지만은 외신의 찬사를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 경기 역시 김병지의 선방이 없었다면 5골보다 더 큰 점수차가 나올 여지가 충분했던 경기였던 까닭이다. 하물며 이때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상황이 199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27]
심지어 이 당시는 발전되지 않은 축구 전술의 특성상, 미드필더와 수비수에 비해 공격수가 상당히 많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금보다 다득점이 굉장히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월드컵 초창기의 기록을 보면 골이 많이 터진 경기가 많았으며 친선 A매치 기록을 보면 수준 차이가 나는 경기에서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골이 많이 나왔다.
[28]
특히 그로부터 정확히 70년 전 스위스에서 마다예와 유사한 일을 겪었던
한국인들의 응원이 많아 마다예도 한국에 감사를 표했을 정도. 마침 그가 상대한 김우진이 당시의 헝가리 축구 대표팀처럼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물론 차이점은 김우진은 실제로 우승했지만 헝가리는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것이다.
[29]
헝가리전에서 뛰었던 1진 선수들이 체력 고갈로 기진맥진한 탓도 있지만, "우리가 이런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해 볼 기회가 더는 없을 테니 차라리 대표팀 전원에게 한 번쯤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가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2진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다시금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는 장장 32년이 걸렸다.
[30]
이 배당금은 결국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후 바로 다음 월드컵에서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월드컵 예선 참가 신청서를 분실해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 예선에도 못 나가게 되어 FIFA에 납부해야 했던 벌금을 바로 이 스위스에 남아 있던 배당금으로 갈음해서 충당했다. 지금이야 모든 행정이 전산화되어 있고 이중 삼중으로 백업과 보안을 해놓으니 신청서를 분실할 일이 없지만 그때는 모든 행정 서류가 지류와 수기로만 작성되던 시기였으니 원본을 분실하면 그냥 끝인 시절이었다.
[31]
김용식 또한 당시 선수로 활약한 골키퍼
홍덕영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
[32]
마지막 생존자였던 박재승(1923~2015)도 92세 생일을 한 달 정도 앞두고
2015년 3월 12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사망했다.
[33]
정치경제학자이며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34]
우리가 아는 그 배우 맞다.
[35]
실제 김동헌의 선방률은 유효슈팅 107회에 22실점이기 때문에 가정하는 상황과 얼추 비슷하다.
[36]
참고로 네덜란드전도 상대 유효 슈팅 수를 과장한
날조가 마찬가지로 돌고 있다. 또한 조별리그 3경기 동안 허용한 56개의 전체 슈팅이
유효 슈팅으로 와전되어 보도된 적도 있다.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가져야 할 언론들까지도 기록 부풀리기를 하고 있으니 웃어 넘길 상황이 아니다.
[37]
당시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경기 시작 10분 내에 무조건 득점을 하는 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걸 막은 것만으로도 선방했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